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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5/10)

Chapter 4 

아델은 침대에 누웠다. 킹사이즈 침대는 합숙훈련을 하던 기숙사보다 비좁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온갖 중압감이 자신을 누른 듯 경기 한 시간 전의 패닉 상태와 같았다. 아델은 몸을 뒤척거렸다. 카일의 차가 오지 않는 것을 보니 리와 하룻밤을 보낼 것이었다. 

그때 바보처럼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 끔찍하게 회상되었다. 여느 아이들처럼 그들의 농담에 웃고 공감하며 자리를 맞춰야 하는 것이 무난한 흐름이었다. 왜 대책 없이 리의 집을 나왔는지 스스로가 본능에 충실한 인간임을 깨닫고 말았다. 아델과 카일의 밤을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리는 것도. 

참 고독한 그리움이었다. 무릇 그리움들은 혼자만의 몫이었지만 유난히 리는 아델을 외롭게 만들었다. 18년을 떨어져 있었고 그의 숨결을 느낀 지는 두 달도 되지 않았지만 외로웠다. 그를 볼 수 없어서 마음이 쓰라렸다. 기분 나쁜 슬픔이었다.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외사랑은 범죄 같았다. 

아델은 카일을 떠올렸다. 단호하지만 너그러운 남자. 도전적이지만 신중한 남자. 모험을 즐기지만 익숙함을 원하는 남자. 온통 모순 덩어리였다. 카일을 떠올리고 그를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턱 막혀왔다. 하얀 손을 들어 달빛에 비춰보았다. 이 혈관 속에 카일이 흐른다. 제 몸은 전부 카일이 만든 것이다. 리를 사랑하는 지독한 유전자마저 비켜갈 수 없었다. 등을 세워 달빛에 비추면 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구겨진 심장 속에서 웃고 있는 리가 번져갈 것 같았다. 달빛보다 빛나고 그림자보다 어두운 남자가 방 안에서 외로이 죽어가고 있었다.

* * *

이상한 일이었다. 무척 이상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찝찝한 아침이었다. 여느 날처럼 카일과 몸을 섞었고 그는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아델은 슬픈 표정으로 제 앞에 서있었다.

여전히 검은색 코트에 흰 셔츠 그리고 쓸쓸한 향기였다. 카일과 닮은 점이라면 그의 향기였다. 카일이 떠난 후 태워버린 핫케이크를 처리할 궁리를 하고 있던 찰나 쓸쓸한 표정의 아델을 마주해야 했다. 

문을 열고 들어올 과격함도 없는 남자였다. 성당의 낡은 석고상 앞에서 하염없이 서있었다. 리는 조각상 아래에서 공기를 바라보는 아델에게 다가갔다. 하늘도 땅도 조각상도 아닌 공기에 눈을 기댄 채. 

“아델.”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다소 간지럽게 느껴졌다. 마치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무엇이라도 고백할 것 같은 모양새였다. 서로가 서로를 예측할 수 없어 조심스러웠다.

“리.” 

아델의 목소리는 젖어있었다. 어제오늘 이곳의 태풍은 전부 아델에게 갇힌 듯 축축하기만 했다. 

“일단 들어와요.” 

리는 그를 이끌었다. 아델은 얇은 티 한 장을 걸치고 있는 리를 감싸 안았다. 

“신경이 쓰여요. 이런 것까지. 난.” 

아델의 뜨거운 손길에 리는 어깨를 떨었다. 자신의 머리 위에서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소년에게. 감히 못할 짓이라도 한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을 위해 무엇이라도 걸 것 같은 그런 헌신이 두려웠다. 도망치고 싶어졌다. 

“리가 추울 것 같아서. 이 날씨에도 그럴 것 같아서. 바보 같네요.” 

아델이 리의 손목을 쥐었다. 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열여덟이어서가 아니라. 카일의 아들이어서가 아닌,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면 온 행동을 멈추고 그의 입술을 바라볼 뿐이었다.

“모른 척해도 좋아요. 도망쳐도 좋아요. 리가 편하다면. 그걸 원한다면. 전부 괜찮아요. 알고 있잖아요, 난.” 

아델은 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아니… 나는…….”

“좋아해요. 좋아하고 있었어요. 첫날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함부로 하던 사내들과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어깨를 다독거리며 허리를 감싸 안았다. 포근하게 심장 쪽으로 자신을 이끌었다. 

리의 사고는 정지했다. 반듯하게 생긴 소년이, 심장을 할퀼만한 애절한 고백을 뱉고 있음에도 리의 입이 떨어질 줄 몰랐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그 누구도 제게 마음을 표현해 준 적이 없었다. 절로 아연해졌다. 고백을 받게 된다면, 별이 떨어지고 무지개가 솟아오르고 꽃이 휘날린다는 연극 속 대사들은 전부 거짓이었다. 

커다랗고 뾰족한 별이 심장에 박혀 톱니바퀴처럼 굴러가고 있었다. 뜨겁고 따갑고 숨이 가빴다. 아델은, 순수한 아델은. 자신에게 닿으면 안 되었다. 우리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리는 아델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커다란 아델은 주인을 잃은 강아지처럼 애절하게 안겨왔다. 리는 눈물을 흘리며 아델을 끌어안았다. 

주차하는 카일의 소리를 망각할 만큼. 리는 아델을 연민하고 있었다. 그 둘을 바라보는 절망의 기운이 드리웠다. 카일은 허망한 눈빛으로 리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잃은 군인처럼. 카일의 영혼은 텅 빈 것처럼 쓸쓸해 보였다. 

카일의 시선은 리의 얼굴에 닿았다. 새하얀 얼굴이 홍조빛을 띠고 있었다. 어젯밤 제가 빨아 놓은 자국을 달고 아델에게 안겨 있었다. 

‘어… 아델…….’ 

작은 입술로 아델을 달래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몸을 섞던 어젯밤처럼. 가녀린 팔목으로 아델을 품고 있었다.

날카로운 리의 몸짓이 처연하게 반전되는 순간이었다. 마치 솜털처럼. 솜사탕을 입안 가득 넣은 듯 하염없이 달콤했다. 리의 달달함에 카일은 머리가 아파질 정도였다. 아델을 보는 눈빛이 다정해서 죽을 것 같았다. 다정함으로 자신을 죽이던 그날처럼 리는 상냥하게 아델의 목숨을 끊어놓고 있었다.  

그런 손이 아델을 쓰다듬었다. 십 년 전, 그리고 십 년 후에도 자신과 몸을 섞어야 할 리가. 

정신을 교류하고 정신없이 서로를 탐닉하던 세월이 잊혀 갔다. 카일은 비틀거리며 성당을 빠져나갔다. 차 속에 기절할 듯 몸을 던지고 떨리는 손끝으로 담배를 찾았다. 라이터를 켜는 손이 엇나가 손톱이 찢겼다. 겨우 담배를 물 수 있었다. 떨리던 심장은 진부한 영화를 보듯 고요해졌다. 

카일은 차에 올라탔다. 심호흡을 했다.

[아델이 위험하다. 자신이 위험하다. 리는 위험하다.] 

쾌락에 몸부림치던 작은 천사처럼. 단 한 번도 독극물에 길들여져 본적 없는 악마처럼 헤매고 있었다. 처음 맞본 낯선 감정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것은 질투, 아들에 대한 두려움, 리에 대한 사랑. 모든 것이 맞춰지며 숨고 싶을 만큼 무너졌다. 자신을 창조하고 감정을 잉태시키던 거룩한 리는 한순간에 자신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예고도 없이. 아델의 눈에 담긴 리가, 십 년을 품어왔던 리가 두려워졌다. 

카일은 심장을 부여잡고 핸들 위로 쓰러졌다. 꽤나 도덕적인 마음이었다. 그를 해치고 가두고 강압적인 성관계를 불사해도 전부 사랑이었다. 그렇게 포장하던 세월이 있었다. 리가 두렵다. 모든 것을 쥐고 있는 그가 끔찍할 만큼 거부감이 들었다. 

당장 한 줌도 되지 않는 리의 품에 안겨 울고 싶을 만큼 간절해졌다. 도대체 어디까지 리가 자신을 망칠 것인지. 이젠 여유롭게 기대를 품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리는 타락하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었고 자신은 그런 리에게 복종했다. 

그런 리가, 자신의 가엾은 목숨을 쥐고 있는 리가 일탈을 했다. 카일은 담배를 물었다. 텁텁한 맛에 그대로 던져버렸다. 뒷좌석에 박혀 있는 코카인을 찾았다. 움직임이 둔한 탓에 허벅지 위로 하얀 가루가 흩뿌려졌다.  

카일은 코카인을 들이마셨다. 

‘사랑하지 않아. 그럴 리가 없잖아.’ 

쓰리게 웃었다. 리를 버릴 방법을, 자신을 살릴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멍청한 스무 살처럼 그의 얇은 허리선을 보며 몽정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 * *

아델이 돌아가고 리는 카일의 시계를 정리했다. 잠깐 외출한 건지, 그대로였지만 주인은 야속하리 만큼 돌아오지 않았다. 카일을 기다리던 리는 깜빡 잠이 들었다. 카일의 시계를 소중히 쥔 채로. 

십년 전 오늘 같은 날이었다. 

[이름은?]

[리 와일러입니다.]

[우린 상담가예요. 안심하세요.]

[경찰 같아요. 냄새가 경찰 같아요. 걸음걸이가 경찰 같아요.]

[아니에요. 리가 오해한 겁니다. 우린 상담사에요. 이 주일 전 리의 친구 두 명이 사망했죠. 한 명은 총상 다른 한 명은 익사. 어떤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어요? 리와 같은 기숙사인 걸로 알고 있어요. ‘카시아’의 배역을 맡았잖아요. 리와 함께.]

[무슨 일인지 몰라요. 저도 오늘 알았어요. 정말 몰라요.]

의심 가득한 얼굴로 상담사가 일어섰다. 리는 정신없이 카일에게 달려가 안겼다. 

[무슨 말 했는지 안 물어봐요?]

두 명의 상담사는 카일을 향해 경멸 섞인 눈빛을 지으며 물러갔다. 그리고 숨 막히는 인터뷰는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리가 훗날 알게 된 사실은 살해당한 두 명을 쫓던 상담사는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후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살인은 상담사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한 달에 평균적으로 세 명이 죽었다. 과로사, 영양실조 그리고 질투와 시기로 살인을 택하기도 했다. 

[글쎄. 리는 무슨 말을 했지?]

카일은 목발을 짚고 있는 리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목발이 계단 밑으로 떨어졌고 창문에 아슬하게 걸쳐진 팔목이 얼얼했다. 리는 카일이 목발이라도 되는 듯 온 힘을 다해 기대왔다. 카일은 리의 입술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분명 제 친구 두 명이 살해당했고, 둘의 공통점은 리와 역할을 공유한다는 사실이었다. 열정 없는 주인공 리는 며칠 전 난간에서 떨어졌지만 친구 둘은 죽어버렸다. 카일은 의욕과 야망을 높이 샀지만 리는 ‘카일의 사랑’만이 필요했다. 리는 이곳에서 최약체였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어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리는 카일을 향해 웃었다. 카일은 리의 허리를 잡아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앞으로 그렇게 하는 거야. 친구들이 죽어도 괜한 추측은 삼가는 게 좋을 거야. 그렇다면 열정 없는 너를 품어줄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지.]

리는 카일의 품에서 한참을 기대었다. 그의 부하들처럼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음모를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리는 결백했다. 그들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카일을 향해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구애를 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친구들이 왜 죽어나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셀리언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아서 자살을 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리는 훗날 멍청한 자신을 탓해야 했다. 그들이 죽어가던 그곳에서 카일과 몸을 섞고 신음을 흘렸다.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묻힌 곳에서 야릇한 신음을 흘리며 죽음을 묵살했다. 

“아아… 아… 몰라요… 정말 몰라요…….” 

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건조한 입술 위로 핏방울이 맺혔다. 눈물자국으로 뻑뻑한 눈을 뜨면 10년 전 총을 든 상담사의 입꼬리가 생각났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대답을 재촉하던 하이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리는 창문 사이로 보이던 카일의 미소가 생각났다. 카일은 상담사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허공에 손을 뻗어 불안하게 휘적거렸다. 새벽에 카일이 돌아갔고 몇 시간 전 아델이 돌아갔으며 점심이 되어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카일이 옆에 누워 있어도 카일의 꿈을 꿨다. 죽어버린 어린아이 두 명. 그리고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자신. 그것은 전부 카일이 만들어낸 연출이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허무한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까. 저 혼자 스무 살이 되어버렸다. 친구들은 영원히 지하에 갇혀 백골이 되어 썩어갈 텐데. 리는 침대에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잔인한 개자식 네가 우리를 죽인 거야!’ 눈부시게 흰 뼛가루들이 자신을 덮칠 것 같았다. 코와 입을 막고 온몸을 결박시키며 용암처럼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 죄책감에 갇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갈 것이었다. 

그렇게 씁쓸하고도 찬란한 노후를 생각할 즈음에 종소리가 울렸다. 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맑은 울림소리에도 놀라 머리가 멍멍해졌다. 납치를 당한지는 이틀이 지나지 않았으니 이 구역 마피아들이 이렇게까지 멍청할 리가 없었다. 아델일까?

카일일까. 그는 비밀번호를 알았으니 굳이 다정하게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을 것이다. 리의 심장이 부드러운 속도로 잦아들었다. 리는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일층으로 내려갔다.

“리 와일러 씨. 되십니까?” 

경찰은 신분증을 활짝 벌렸다. 그의 두꺼운 손가락 안에서 작은 신분증이 너덜거렸다. 상담사. 경찰. 상담사. 경찰. 리는 다시 떨려오는 발작 증세를 잠재워야 했다. 이곳엔 카일이 아니면 전부 불청객일 뿐이었다.

“네.” 

리는 떨리는 어깨를 감추기 위해 카디건을 끌어올렸다.

“제인 모이건의 모발에서 와일러 씨의 정액이 검출되었습니다. 23일 날 무엇을 하셨죠?” 

“제인 모이건 씨요?” 

리는 헛웃음이 나왔다. 여자의 모발에서 자신의 정액이라니. 카일이 아니라면 타인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게 갇혀 있는 신세인데 정액이라니. 

“이 여자 말입니다.” 

경찰은 두툼한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금발의 성숙한 외모. 그것은 카일의 난교장에서 몸을 섞던 여자였다. 한마디로 아델의 연극 속 주인공이 되어야 할 인물이었다.

“23일 벽난로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망 추정 시간은 17시 24분이고 와일러 씨를 만나기 전 타인의 출입 흔적은 없었습니다.” 

이쯤 되면 죄를 인정해. 라고 말하듯 경찰은 따분한 목소리로 인상을 찡그렸다. 당장 리를 걷어 차 수갑을 채울 것 같은 모양새였다. 

리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여자와 섹스를 한건 사실이지만 벽난로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물며 살인이라니. 저는 그럴 포부도 없을뿐더러 살인은 질색이었다. 카일의 부하들을 조지는 것이 아니면 연약한 여자를 구태여 해할 이유도 없었다. 여자와는 몸을 섞었고 그녀를 주인공으로 발탁한 것이 깔끔한 로비였는데 왜 일이 이렇게 됐는지 의문이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리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뱉었다. 멍해진 기분이었다. 살인사건의 용의자 그것도 심증과 물증이 완벽한 용의자라니. 이미 법정에 서서 판사봉으로 머리를 연달아 맞은 듯 교도소 생활이 눈에 훤했다. 

리의 몸이 떨려왔다. 국적도 이곳에서의 신분도 불확실한 자신이 용의자가 되는 건 수상한 일이 아니었다. 경찰들이 자신을 먼저 찾아온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미망인, 난민, 남창.

알리바이도 없이 버벅대는 리를 보며 경찰들은 하품을 시작했다. 경찰은 주황 옷에 어울리게 염색이나 하라며 리를 향해 이죽거렸다. 다분히 사무적이었던 초반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경찰 또한 이렇게 수월한 살인사건은 간만이었다. 한 달도 아닌 이 주일 만에 범인을 찾게 되다니. 관할구역이 조금이라도 멀어졌으면 아쉬울 법한 사건이었다. 사건을 의뢰한 것도 익명의 신고자였지만. 그것이 찜찜했지만 차후에 범인이 밝혀지지 않으면 플랜 비로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넙죽 범인이 자백을 하듯 멍청한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그들이 돌아가고 리는 짐을 싸고 택시를 잡았다. 카일의 B구역으로 내려 익숙한 분수대에서 숨을 골랐다. 당장 이런 일이 일어나자 고민 없이 찾을 상대가 카일이었다. 십년 전처럼 무슨 일이 생기면 카일을 찾게 되었다. 어미와 산 지는 17년, 카일을 만난 지는 10년이었으니 그리운 건 카일이 우선이었다. 카일이 전부 해결해 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처음 겪는 이 불안감을 카일은 잠재워 줄 거라 생각했다. 

카일은 회의 중이었다. 한 손으로 회의를 중단시키고 리를 향해 걸어왔다. 리는 그의 품에 덥석 안겼다. 예쁜 눈망울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복도였지만 한창 회의 중에 그의 개 같은 부하들이 힐끔거릴 테지만 심장을 가두기엔 카일의 품이 제격이었다.

“리, 무슨 일이야.” 

카일은 그의 땀에 붙은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 여자가… 죽었대! 내가 용의자래! 여자 머리에서 내 정액이 검출되었고… 마지막에 만난 사람이 나래. 카일… 나 어떡해야 해?” 

카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카일은 감겨오는 손을 거칠게 떼어 내었다. 리는 불안한 눈빛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지금 카일이 저에게 싸늘해진 것은 자신이 ‘살인자’였기 때문일까? 카일은 일주일에 두 명은 정기적으로 죽였었다. 마치 호랑이처럼 그에게 죽은 조직만 해도 브루클린의 깡통보다 많을 것이다. 

리는 멀어지는 카일의 손을 잡았다. 카일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생기를 잃어갔다. 

“음… 그래서?” 

카일은 마치 리를 잡상인 취급하듯 거리를 두었다. 카일의 태도는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카일에게 살인에 대한 충고를 얻는 일은 처음이었지만, 그는 싸늘할 만큼 자신을 배척하고 있었다. 마치, 죽은 여자처럼. 

인품 좋은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거절당할 때보다 비참했다. 카일은 놀랍도록 매정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내가 죽인 게 아니잖아! 카일은 알고 있잖아!”

리는 카일의 멱살을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의 남색의 타이가 미세하게 구겨졌다. 카일은 리를 보며 조소했다. 거짓 누명을 쓰고 하루 내리 굶은 것이 분명했다. 손아귀엔 그 어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리는 부패된 시체 같았다. 

“내가 뭘 알고 있는데?” 

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용의자 선고를 받고 가슴을 졸였을 때보다 더욱 아득해졌다. 

눈앞의 카일이 흐릿했다. 당장 발작 증세가 일어날 것 같아 발가락에 힘을 주어야 했지만 그럴수록 몸이 너덜거렸다.

“탈옥 방법이라도 알려줘?” 

카일은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즈려 밟았다. 용의자임을 암시할 만큼 중압감 있던 모든 증거들이 카일에 의해 훼손되었다. 마치 저것이 없어도 리는 범인이라는 듯 한점의 의심도 없이 웃고 있었다.

“미안. 괜한 말을 했어. 돌아갈게.” 

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종이를 주웠다. 카일의 커다란 발자국이 찍혀 있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날 힘이 없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 카일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미치도록 간절했다. 

카일은 쭈그려 앉아있는 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십 년 전처럼 한 손에 앙증맞게 잡히는 크기가 귀여웠다. 

아델과의 사이좋은 부자 사이를 위협한 형벌은 아니었다. 다만 아델이 나타나고 리가 부쩍 일반인의 삶을 탐한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을 뿐이다. 

단지 리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벌인 일이었다. 자신을 찾아와 보호막을 원하는 모습, 아이 같은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장난은 환상적이었다. 

여자는 자살이었다. 리와 연관될 리가 없었다. 리는 오븐 속 거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해 차라리 갖다 버리는 쪽을 선택하는 남자였다. 그런 유약한 리가 사람을 벽난로에 집어넣는 괴상한 일을 벌일 리가 없었다. 

카일은 도망치는 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회의 내용이 전부 증발할 정도로 유익한 만남이었다. 오늘 밤 리의 집으로 가서 그를 달래 주고 경찰에 친히 안부 전화까지 걸어줄 생각이었다. 리의 패닉이 그리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리는 택시를 잡았다. 카일의 부하가 그에게 달려 나와 손짓을 함에도 불구하고 멀리멀리 도망쳤다. 카일은 경찰과 다름없었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욱 격렬하게 용의자임을 떠밀었다. 리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서류를 정리하고 눈을 감았다. 눈을 뜨게 된다면 비참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기사의 핸들을 꺾을 것 같았다. 

징역은 몇 년쯤일까. 재판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전에 자살을 할 생각이었다. 여자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자살했다고 하면 카일이 이해해줄까? 

죽이지도 않은 여자의 억울함을 뒤집어쓰고 교도소에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죽지 못하도록 설계해 놓은 교도소에서 자신이 견딜 수가 있을까. 어쩌면 성당 속은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새장일지도 모른다. 낯선 사람과, 살인자라는 낙인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카일이 가둬놓은 성당은 교도소가 아니었다. 안락한 보금자리였다. 리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택시에서 쏟아질 듯 내려와 성당으로 달려갔다. 곧장 침대 옆 서랍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카일의 부하가 꽁꽁 싸매놓은 서랍장을 해머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대여섯 번 만에 서랍장이 열렸고 리는 휘청거렸다. 오아시스라도 만난 것처럼 게걸스럽게 핥아먹기 시작했다. 화병의 물로 목을 축이고 동그란 알약을 삼켜내었다. 리의 납작한 배가 볼록해질 만큼 차올랐다. 토기가 치밀었다. 먹은 것도 없어 나올 것은 위액뿐이었다. 리는 곧장 욕실로 들어가 구역질을 했다. 약물로 죽는 건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욕조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자살기도 12분 전. 수없이 많이 저질렀던 자살시도 중 이번은 의미 있고 생존적인 자살이었다. 우스운 역설. 살기 위해 죽는다. 리는 볼에 빵빵한 바람이 찰 만큼 자신을 비웃었다. 

“개자식. 진작에 죽었어야지.”

카일의 부하들이 했던 목소리를 따라 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악령 같았다. 그리고 어느새 리는 제법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었다. 자신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리는 욕조에 몸을 맡기고 물결을 만지작거렸다. 욕조 밖에 닿는 목뼈가 끊어질 듯 저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리는 다리를 활짝 벌리고 오른쪽 허벅지를 내리쳤다. 흰 살결이 붉은 자국을 띠었을 때 두 손으로 칼을 쥐고 내려찍기 시작했다. 손목은 새끼손가락이 끊어질 만한 세기여야 가능했고 허벅지 안쪽은 질긴 짐승의 근육을 끊는 것과 맞먹는 악력이 필요했다.  

리는 천천히 허벅지를 물살에 담갔다. 아득히도 졸음이 밀려오고 뜨끈한 욕조 물이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카일과의 첫 경험처럼. 기술 없는 행위는 늘 피를 수반하는 법이었다. 

벌어진 허벅지의 앙상한 뼈를 감싸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한 손에 와인 잔을 들고 고개를 숙였다. 허벅지가 너덜거려도 손목이 너덜거려도 구체적인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프다’

그저 아프다로 정의될 고통이었다. 카일이 저를 보는 눈빛과 비교하자면 담백한 슬픔이었다. 심장이 찢어지고 피가 말라가고 눈물이 마를 것 같은 고통과는 달랐다.  

심장이 찢어졌다. 

“카일… 나의 카일…….”

리는 입술 속으로 카일을 품었다. 카일의 싸늘한 눈빛과 의미 없는 눈동자, 자신을 해치던 공기가 다시 살갗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리는 눈을 감았다. 잘린 허벅지에 피가 쏠렸다. 하체가 단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욕조는 검붉은 피로 흥건히 차오르고 있었다. 자살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리는 완전히 눈을 감고 싶었다. 

향긋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카일이 주던 고통과는 색다른 가슴의 떨림. 심장의 표면을 살살 갉아먹는 듯 아주 얕은 울림이었다. 간질거리는 바람 같았다. 청아한 여우비 같았다. 슬며시 젖어들게 하는 봄 햇살 같았다. 그 순간 아델이 웃었다. 카일과 닮은 얼굴로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파란빛에 가까운 보라색이에요.]

아델은 파란빛의 붉은 꽃다발을 건네었다. 긴 시간 품에 안고 왔던 건지 다발 부분이 뜨거웠다. 그리고 아델의 눈빛은 타들어갈 듯 뜨거웠다. 

[너무 아름다워요. 나는 내 눈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쉽네요.]

리는 꽃다발에 얼굴을 묻었다. 깊은 향이 새어 나왔다. 독하게 코를 마비시킬 만큼 강력한 향기였다.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는 순수한 아델과 달리 몹시 유혹적인 향이었다. 

[남자한테 꽃은 처음 받아봐요.]

리는 수줍은 듯 꽃다발 속으로 숨어들었다. 흰 얼굴 위로 핑크빛이 스쳤다. 

[저도 남자한테는 처음이에요.]

아델은 아름답게 웃었다. 꽃이 흩어지고 아델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평화로웠다. 하늘 위로 꽃잎이 휘날리고 흰나비가 선율 속으로 흩어졌다. 이 세상이 아델의 미소로 향긋해졌다.

리는 꽃다발에 얼굴을 묻고 강력한 숨을 품었다. 하. 절로 콧소리가 나왔다. 아델은 리에게 다가가 목을 감싸 안았다. 눈을 맞추고 슬픈 눈빛으로 대답했다.

[꽃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요. 계속 안아주세요.]

[이랬을 겁니다.]

아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절절한 고백에 리는 얼굴을 떨구었다.

“리.”

선율도 나비도 꽃잎도 사라진 현실이었다. 커다란 천장에 쓰디쓴 약 냄새가 풍겨왔다. 손목을 미세하게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수갑이 채워져 있진 않았다. 다행인 걸까. 지옥이 아니라서 썩 불행했지만 감옥이 아닌 것에 안심해야 했다. 

리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거렸다. 엉덩이뼈에 닿는 물살이 사라진 이후였다. 피비린내도 젖은 머리도 말라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 죽어가는 자신을 옮긴 것이었다. 

리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을 골랐다.

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델을 바라보았다. 이건 꿈일까. 캐주얼한 차림. 카일의 명령에 반하듯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마치 잠옷을 입고 뛰쳐나온 듯 허술해 보였다. 조금은 안심되는 옷차림이었다. 의사의 가운도 경찰의 제복도 아닌 아델이라 다행이었다. 

“내 면회 와줄래요…?” 

리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경쾌하지 못한 쇳소리처럼 아델의 속을 긁기 시작했다. 듣기 싫은 소음이었다. 리의 슬픈 목소리는.

아델은 리를 진정시켜야 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교도소와 벽난로, 간간이 들리는 <백조> 속 주인공의 이름까지. 전부를 추측하면 살인에 대한 자수였다.

“무슨 소립니까.” 

아델은 리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침대에 눕혔다. 이로써 리가 깬 것은 다섯 번째 새벽이었다. 아델이 리를 찾아온 건 멋없는 고백을 재구성하기 위함이었다. 

다짜고짜 찾아와 ‘좋아해요.’를 연발하는 남자는 제아무리 상냥한 리라도 불쾌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고작 새벽에 들이닥치는 일이었지만, 욕조에서 리를 건져냈을 때 자신의 무모한 외사랑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일단 새벽이 끝나면 이야기합시다. 리는 지금 피곤해 보이니까요.”

리는 아델의 말에 몽롱한 두 눈을 감았다. 약기운이 몰려왔고 아델의 향기가 안정을 찾아준 이유였다. 리는 새벽 내내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혼자 잠드는 것이 익숙한 사람처럼 아델의 손길을 거부했다. 

아델은 처음 리의 침실에 몸을 기대었다. 리의 상큼한 향수 냄새와 묵직한 바디 워시 냄새가 섞인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었다. 커다란 침대는 마치 카일의 사이즈를 겨냥한 듯 주인이 명백해 보였다. 리는 한쪽으로 치우쳐 몸을 말고 있었다. 카일이 없는 밤 외로움을 달래는 리만의 방식이었다. 

아델이 잠깐 눈을 붙인 사이 리가 사라졌다. 아델은 제 위에 곱게 덮여 있는 이불을 박차고 욕실로 달려갔다.

“일어났어요?” 

욕조 문 앞에 리가 와인 잔을 들고 있었다. 아델은 실소를 터뜨렸다. 리의 죽음을 목격한 건 두 번째였다. 아델은 초연한 척하고 싶었다. 리의 죽음에 대해. 리에게 생명을 운운하며 진부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깨진 와인 잔으로 손목을 파고 있는 리에게. 역겨운 광경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유난을 떨고 싶지도 않았다. 자살은 선택이었다. 적어도 아델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너무 무심하고도 염세적인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 리를 보니 자살은 결코 선택이 아니었다. 강요였다. 스스로에게 혹은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피난처였다. 

아델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리가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다. 동정심이 들었던 한 남자를 사랑까지 해버려서 그 연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아델은 리의 앞에서 줄곧 태연한 척했지만 불시에 리가 마음을 흔들 때면 미치광이가 되어버렸다. 

“아델…….”

리는 아델에게 다가와 등을 쓸어주었다. 아델은 과호흡 증상이 일어났다. 자신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기흉이 아니었으니 리가 만들어낸 허상에 가까울 것이다. 리가 너무도 가여워서, 그를 너무도 사랑해서 아파진 것이었다. 

“숨이 안 쉬어지면 이렇게 해봐요.” 

리는 잔을 내려놓고 숨 쉬는 방법이나 알려주고 있었다. 죽고 싶은 리는 아델을 필사적으로 살리려 했다. 

기껏 리의 흔적이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온 집안을 뒤지는 자신에게 리는 너무도 경계심이 없었다. 마치 미안하지도, 그럴 필요성도 못 느낀다는 듯이. 마치 아델이 리의 죽음에 단 1퍼센트도 영향력이 없는 사람처럼 대하곤 했다. 죽음을 들킨 순간조차 리는 너무도 무결했다. 

‘어떻게 그렇게 대담할 수가 있어요.’

아델은 슬픈 눈으로 리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는데 어떻게 내게 한마디도 해주지 않을 수가 있어요.’

아델이 눈물을 흘렸다. 자신에 대한 비참함과 리의 마음 언저리에도 닿을 수 없다는 패배감이 초라했다. 

몹시 처량하게 느껴져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사랑을 거절당한 기분은 생각보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리라면, 다정한 리라면 조금은 친절하게 멀어질 줄 알았지만 사랑 앞에 친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거절이었다. 

심장은 유리조각으로 변해 온몸에 박혀왔다. 정말. 진짜 딱 죽을 것 같다. 아델은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로 제게 다가오는 리를 바라보았다. 

사랑해도, 사랑한다고 고해도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리는 리만의 세상이 존재했고 아델의 세상은 이미 리로 채워져 있었다. 두 세계의 교접점은 리의 죽음 혹은 아델의 단념이었다. 허무했다. 리를 사랑하는 이 연정만 없앨 수 있으면 좋겠다. 아델은 쓴맛을 삼켰다.

“왜 울어요… 울지 마요…….” 

리는 당황했다. 제 눈앞에서 아이처럼 울고 있는 아델을 어찌할 줄 몰라 바라보기만 했다. 욕조에서 이끌어낸 아델은 꾸벅꾸벅 졸며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이미 씻긴 몸을 정성스럽게 닦아가며 체온을 조절해 주고 상처까지 예쁘게 봉합해 주었다. 

아마 주치의가 다녀간 모양이었지만 아델은 리에게 커다란 옷을 입혀 상처와 마주하지 않게 해주었다. 어른스럽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요란한 자살쇼에 대해 묵묵히 치료만 해주었으니까. 그랬던 아델은 잠시 사라진 순간에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주저앉았다. 

리는 아델을 보니 심장이 아파졌다. 마치 카일을 걱정하던 자신 같아서. 카일을 쫓고 매일 밤 상처를 찾아다니며 간호했던 나날들이. 그의 일상에 자신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무기력함에 휩싸였던 순간들이. 리는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아델을, 순수한 아델을 망쳐놓고 있었다. 천박하고 경박스러운 자신이 아름다운 아델을 더럽히고 있었다. 눈송이 같던 소년이 제 앞에서 울고 있었다. 겨우 자신이 죽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수하겠습니다.” 

아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리는 주저앉았다.

“무슨 소리예요?”

“제가 자수할게요. 그 여자 내가 죽였다고 할 겁니다. 리는 감옥에 갈 필요 없어요. 난 23일 날 그 여자와 캐스팅 문제로 다투었고 홧김에 죽인 겁니다. 리는….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리는 입을 틀어막았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허벅지에 쌓이는 것처럼 설움이 복받쳤다. 아델이 입을 연 그 순간부터 감정을 절제할 수 없었다. 아델은 리가 죽였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더더욱 알리바이를 맞춰야 했다. 리는 그것조차 거룩해서 가슴이 무너질 것 같았다. 사람을 죽인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는 아델이 가여웠다. 이유도 묻지 않고 누명을 쓰려는 아델이. 아델은 덤덤한 눈빛으로 리의 손을 잡았다. 

“감옥은 내가 갑니다.” 

아델의 눈빛에서 리는 말을 잃었다. 이미 아델은 구체적인 계획까지 설정한 상태였다. 리는 이를 떨었다. 어깨가 흔들리는 반동에 아델은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걱정 말아요. 전부 내가 할 거니까.” 

리는 눈물을 흘렸다.

* * *

리는 내일 아침 자수를 할 생각이었다. 재빠르지 않으면 한결같이 바보 같은 아델이 먼저 선수를 칠 것 같았으니. 

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렸을 뿐이다. 자수를 하겠다는 아델은 교도소에 대한 걱정도 없는지 의자에 앉아 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리는 아델의 휴대폰을 찾아 수족관에 담가 두었다. 아델은 리에게 온갖 정신이 쏠려 팔을 베어 가도 모를 정도로 심취해 있었다. 리는 아델을 침대로 데려갔다. 자신을 사랑하는 아델을 하룻밤 섹스토이로 사용할 만큼 악질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지쳐있었고 마음을 뉠만한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아델은 달아오른 얼굴로 옷을 벗었다. 리는 침대 맡에 앉아 아델을 바라보았다. 그때처럼 여전히 초콜릿같이 탄탄한 몸이었다. 햇빛에 제대로 그을려 건강해 보였다. 운동을 했던 시절이 인생이 반이었다고 한다. 제니의 뱃속에서도 골프를 쳤다는 우스갯소리를 할만큼.

아델과 함께 있으면 최악의 시련이 닥쳐와도 나름의 행복을 찾곤 했다. 시간에 갇혀 눈물을 퍼내는 일은 아델에게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시시콜콜한 농담을 하며 서로를 알아가며 아델은 소년처럼 웃기도 하고 남자처럼 리드하기도 했다.

카일의 아들이라는 틀에 어리게 느껴졌지만 아델 자체로 보면 성숙한 편이었다. 아델이 매력적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10대들이 환장할 만큼 섹시하기도 했다.

“매일 발자국을 셌어요. 우린 벌써 이만큼이나 가까워졌네요.” 

아델은 리를 바라보며 커다란 손으로 한 뼘을 만들었다. 아델의 한 뼘보단 못 미치는 거리였기에 리는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아델은 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잡아 품에 넣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리와 침대에서 같은 숨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온갖 쾌락을 쏟아 부운 행위 같았다. 리는 너무도 거칠게 뛰어오는 아델의 심장에 얼굴을 댔다. 마치 죽기 직전의 사슴처럼 맹수에게 쫓기는 듯한 급박함이 느껴졌다. 

“어릴 때 나는 제프리랑 결혼할 줄 알았어요.” 

리는 아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눈빛으로 눈물 어린 위로를 하고 있었다. 아델은 눈썹을 움직였다. 리의 고요와 애틋한 눈빛이 슬퍼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두 번째 고백 이후 결심한 듯 입을 뗀 리에게서 좋은 소식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제프리는 <쿠키 공장>의 주인집 강아지였다. 한때 인기가 많았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었다. 리는 카일이 나타나기 전 제프리와 결혼을 꿈꿔왔다. 

매일 밤 주인 몰래 초코칩을 박아 넣는 영특한 강아지. 제프리를 끌어안으면 고소한 버터 냄새가 온몸을 휘감을 것 같았다.

“멍멍! 그 제프리요?”

리트리버와의 결혼이라니. 아델은 어린 시절 리가 떠올랐다. 자신이 모르던 리의 시절이 질투가 났다. 어릴 적 리는 얼마나 귀여울까.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어렸으니까. 오래 보거나, 호기심이 생기면 사랑으로 오해할 수도 있어요. 내가 강아지와 결혼을 결심한 것처럼요.” 

아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치 자신의 고백을 철없는 장난으로 여기는 듯한 말을 한 리는 이물질이라도 세척한 듯 시원해 보였다.  

리는 제프리였고 아델은 어린 시절 감정에 미숙해 혼동해버린 어린이였다. 아델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어리지 않아요.”

“나보단 어려요.” 

리는 싱긋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며 아델은 숨을 내쉬었다. 

“잠버릇이 고약해요. 아델을 발로 찰지도… 모르겠네요.”

“리한테 밀릴 리가 없을 텐데요.”

아델은 제법 자연스럽게 장난도 쳤다.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울어버린다면 정말 아이가 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제 상황을 부정하기 위한 발악인 것 같았다. 

리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입을 틀어막았다. 덤덤한 아델을 보자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절대로, 아델 앞에서는 울 수 없었다. 상대에게 눈물을 보이게 된다면 영원히 같이 울어줘야 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었다. 

더러운 제 인생에 아델의 발목을 잡아 둘 수 없었다. 기껏 천한 자신에게 빠져 아델마저 인생을 버리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빈민가의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넘어서는 안 되는 룰이 있었다. 그리고 리는 죽을 때까지 아델만은 온전하게 보호하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아델은 행복한 꿈을 꾸었다. 제프리가 되어 리의 품에 안겨 있었다. 리는 제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리의 피부결은 하얗고 부드러웠다. 혀로 살살 음미하고 싶을 만큼 청량했다. 아델은 행복한 환상에 잠을 설치고 말았다. 

리의 말마따나 그의 잠버릇은 고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여운 편에 가까웠다. 리가 완전히 잠이 들기 전까지 아델은 잠에 들 수 없었다. 리의 세 번째 자살을 기어코 막아보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리는 새벽 세시가 되어서야 겨우 일정한 숨을 내쉬며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리는 고롱고롱 잠꼬대를 하며 아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작은 입술로 중얼거렸다. 

“추워… 추워…….”

아델의 심장이 꿀렁거렸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참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뛰어왔다. 아델은 조심스럽게 리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리는 아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언제 왔어요?”

리는 아델의 목선에 입을 맞췄다. 잠에 취한 상태였고 리의 행동은 이성을 거치지 못한 본능이었다.

“카일, 보고 싶었어.”

흐릿한 목소리로 부정확한 발음으로 속살거렸다. 리는 아델의 몸을 찾아 손을 휘청거렸고 겨우 가슴팍에 몸을 붙여오자 숨소리를 새근새근 내기 시작했다. 

“졸려… 졸려.”

새벽에 방문한 카일을 놓칠 수 없다는 듯, 수면상태인 시간도 아깝다는 듯 말을 붙여오기 시작했다. 

“피곤했어요?”

아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자신을 카일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아델은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리를 밀어냈다. 붕대가 잔뜩 감긴 리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리는 외면하는 손길이 아쉬운 듯 아델의 가슴팍을 끌어안았다. 

“전 카일이 아니에요.”

카일의 이름에 리는 눈을 번쩍 떴다. 아델은 처참한 얼굴로 리를 바라보았다. 멋쩍은 듯 슬픈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 미안해요.”

리는 새하얀 얼굴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버벅거렸다. 아델은 이 순간에도 아름다운 리의 얼굴을 망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리는 스탠드를 켜고 아델을 바라보았다. 아델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잠시 헷갈려서… 카일이 아니면 누구랑도 같이 자본 적이 없어서.”

리는 아델의 뺨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아델은 숨쉬기조차 힘겨운 듯 끊어질 듯한 숨결을 내뱉고 있었다. 리는 걱정스럽다는 듯 아델을 살폈다. 아델은 그런 리의 모습이 더욱 괴로울 뿐이었다. 

리는 끔찍할 만큼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친절함이 독이 된다는 사실을. 아델은 쓰리게 깨달았다. 상대를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상처 낼 사람이라는 것을.

“절 아버지라고 생각하세요. 아무 소리도 안 낼게요. 리의 생각을 방해하는 어떤 짓도 안 할게요.”

아델은 가운을 벗었다. 그리고 그 얼굴엔 촉촉이 눈물이 젖어있었다. 아델의 맨몸이 드러났고 달빛 아래서 윤기나게 번쩍거렸다. 창문 틈으로 살갗을 파고드는 바람이 불어왔다. 아델의 검정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리는 아델의 가슴팍을 끌어안았다. 역시나 따뜻한 거절이었다. 대단히도 세련된 어른의 자태였다. 

“어떻게 소리를 안 내요.”

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제니가 아델에게 해준 것처럼 리는 따뜻하고 포근하게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리 와 봐요.”

리는 아델의 머리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다. 커다란 밴드가 감겨있는 허벅지 위에서 소독약 냄새가 흘러나왔다. 리의 본연의 냄새를 침해하는 향이었다. 아델은 허벅지에 누워 묵묵히 눈을 감았다. 리는 말씨부터 목소리 행동까지 너무도 다정한 사람이었다. 리는 아델의 귓바퀴부터 목뒤까지 차례대로 쓰다듬었다. 

아델의 심장이 울컥했다. 카일을 원하는 리에게 제 몸이라도 바치고 싶었다. 리의 외로움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 하룻밤 상대가 되어도 황홀할 것 같았다. 리가 원한다면 카일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도, 제 얼굴을 가릴 수도 있었다. 그 정도 다짐쯤은 가슴 아픈 쪽에도 끼지 못했다. 그랬던 다짐이 부끄럽게도 리는 너무도 어른이었다.  

“그냥 자요.”

리는 아델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허벅지가 따가울 만도 할 텐데 리는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아델의 머리를 쓸어 넘기기 시작했다. 투박하고도 고운 손이었다. 리는 그 자체로 아델에게 자장이었다. 

[코… 이제 잘 시간이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어린 시절. 일곱 살도 되지 않을 무렵 제니는 아델을 낯선 곳으로 보냈었다. 꼴도 보기 싫다며 죽어버리라는 폭언과 함께 유기했었다. 그때 아델은 작은 공룡을 들고 미로 같은 정원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 나타난 낯선 남자. 어린 아델은 남자의 허벅지에 누워 어리광을 부렸었다.

[나는 버려진 거예요?]

[코 자고 일어나면 집일 거야.]

남자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차갑고 흰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제니에게 유기되고 온갖 새까만 정장의 사내들 속에서 홀로 빛나던 존재. 공기의 흐름마저 바꿔놓을 아름다운 존재였다. 

잠이 솔솔 올 무렵 새까만 방에 새까만 정장을 입고 나타난 남자. 

어린 날이었기에 기억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악마 혹은 아버지였다. 카일이었구나. 그리고 그 남자는 아마, 리였겠구나. 

리는 식은땀을 흘리는 아델의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애무랄 것도 없이 다분히 성적인 의도가 결여된 손길이었다. 아델의 뺨에 리의 뾰족한 무릎이 느껴졌다. 어느 곳으로 머리를 대어도 딱딱한 뼈 자국이 진로를 방해했다. 

“동정 아니에요.”

아델은 눈을 감았다. 리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웃었다.

“경험은 많아요.”

아델은 다소 억울하다는 듯 힘주어 발음했다. 리가 선뜻 제 몸을 유린하지 않는 이유가 ‘동정’을 배려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낮은 목소리로 자학에 가까운 해명을 해오고 있었다.

“정말 잘 할 수 있어요.”

“나중에 어른이 되면… 후회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카일과의 섹스를 후회하세요?”

아델은 리의 심장을 무참히 밟았다. 아직 정돈되지 않은 심장이 너덜거리는 기분이었다. 아델의 머리에서 손가락이 멈추었다. 아델은 허공을 바라보았다. 리의 앞에서 결코 꺼내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꺼내버렸다. 언젠가는 쑤셔질 상처였다고 생각해야 했다. 그렇다면 제 정당한 짝사랑에 위로가 될 것 같았다. 

리의 편견처럼 아델은 순수하지 않았다. 한때 둘이서 하는 섹스에 진부함을 느꼈던 적이 있고, 꽉 막힌 집안 침대가 지겨웠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리를 만나고 나선 그런 진부한 것들이 전부 부끄럽게 느껴졌다. 손이 스친 것만으로도 설렜던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리의 말처럼 깨끗하고 순수하고 소박한 것들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리의 모든 움직임에 온 힘을 다해 집중하고 있었다. 우울한 사랑이었다. 깨끗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아… 별로요. 나는 아델 씨가 올바른 어른으로 자랐으면 해요. 나처럼 살지 말았으면 해요.”

리의 목소리가 보잘것없이 떨려왔다. 아델은 몸을 일으켜 리를 끌어안았다. 이번에도 섹슈얼한 느낌이 아니었다. 그날 밤 아델은 리를 위로했다. 리는 아델을 위로했다. 서로 애절한 사랑을 하면서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못하는 불쌍한 두 영혼을 치료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뭔데요?”

리는 대답 없이 아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아델을 카일로 착각할 리가 없었다. 아델이 카일과 같을 리가 없었다. 아델의 염려처럼 아델을 카일로 착각할 리가 없었다. 잠에 취해 몸이 기억하는 행동이었을 뿐. 아델은 카일과 달랐다. 제 품에 감겨오는 뼈대도, 힘겹게 허리를 껴안아야 하는 골격도. 피부결도, 체향도 전부 카일과 달랐다. 리는 아델을 더욱 꼬옥 안아주었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 포옹이었다. 그가 멋있는, 아니 자신 같지 않은 어른으로 자라길 바랐다. 그는 올바르고 선량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에게 물들지 않길 간곡하게 빌어야 했다. 

“사랑에 목숨 걸고 기다리고.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그래서 리는 후회하고 있습니까?”

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델은 리와 같은 어른이 될 것 같았다. 처절하게 느껴졌다. 평생 리를 사랑하고 목숨 걸고 기다림에 시간을 거는 일. 그것이 자신의 운명 같았다. 리와 같은 짓을 하게 될 것 같았다. 이건 필연 같았다.

‘사랑’을, 리가 몸소 보여준 그 미련함이 고스란히 제 몫이 될 것 같았다. 

* * *

아델이 눈을 떴을 때는 리가 사라진 이후였다. 침대 옆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만이 온전할 뿐이었다. 아델은 눈을 비볐다. 벽장의 뻐꾸기시계를 확인했다. 아홉시에서 열시, 열한시에서 열두시. 꼬박 12시간을 잠들어 버렸다. 오랜만의 단잠이었다.

아델은 칼칼한 목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아델은 쓰디쓴 입맛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제 입가에 말라있는 하얀 약 가루를 발견하고 좌절했다. 새벽에 리가 묻혀 놓은 수면제. 아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안았다. 

리의 가녀린 손가락에 취해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면 머저리일까. 얇은 손가락으로 제 입가를 만졌을 때. 환상적이었다고 하면 죄가 될까. 아델은 관자놀이를 만지작거렸다. 이미 떠나버린 리를 붙잡을 방도가 없었다. 

아델은 슬리퍼를 신고 거실로 나섰다. 그때 익숙한 커피향이 흘러나왔다. 묵직한 오렌지향이 나는 시큼한 커피. 제 아버지의 모닝커피 취향이었다. 카일의 아침이 시작되는 신호 같은 것이었다. 아델은 카일의 그림자에 주춤거렸다. 리의 소파에서 카일은 몸을 기댄 채로 아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신문을 펼치고 커피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커피 잔은 넘칠 만큼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동안 카일은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아델은 두려워졌다. 

아델은 껄끄럽던 목구멍을 가다듬었다. 차분하게 리의 행방을 쫓았다. 카일의 무릎, 카일의 발치, 카일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 어느 곳에도 리가 없었다. 리의 공기, 그만의 특유의 과일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묵직한 향수냄새가 성당을 채워갈 뿐이었다.

“리는 살인이 아니어도 갇힐 운명이야.”

카일은 마음을 굳혔다. 병든 개처럼 제 그림자를 쫓는 아델을 향한 따끔한 경고였다. 그리고 짝사랑을 접을 최후의 통첩이었다. 

오늘 아침, 리는 자수했다. 자신의 장난이 이틀로 끝나지 않을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인정해야 했다. 이것은 ‘사랑’이었다. 리를 사랑했다. 사랑이 아니라면 어떠한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델마저 그렇게 둘 수 없었다. 사람을 죽여도 마음에 그 무엇도 남지 않았었다. 그럴만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면 편해졌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만큼 여운이 남는 죽음이 있었던가? 그러나 리는 여운 속에 머무르게 했다. 

파릇파릇하고 청량하고 청아한 리. 리는 모든 자연을 짓누를 만큼 깨끗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 누구라도 그에게 홀려 인생을 바칠만한 무기가 온몸에 녹아 있었다. 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리가 제 아들의 정신마저 빼앗았을 때 카일은 크나큰 위기감을 느껴야 했다. 

고독한 고뇌 속으로 끝없이 빨려 들게 만들었다. 리 덕분에 20대를 버리고 30대를 버리고 40대를 고뇌로 차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천국 속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리. 이곳까지 생각이 미치자 카일은 끔찍한 망상에 시달려야 했다.  

아델의 눈을 바라봤을 때. 리를 어디에 숨겼는지 당장 제 아비를 찌를 것 같은 눈빛을 보았을 때. 카일은 확신했다. 

‘아델이 위험하다.’

아델은 하나뿐인 자신의 아들이었다. 검은 독사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도록 교육할 가치가 있는 아이였다. 잘만 키운다면 사랑 같은 감정에 기력을 소비하지 않게 잡아 둔다면 그는 훌륭한 마피아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델이 리에게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 깊은 사랑이 되기 전에, 자신처럼 일생을 바쳐 연정을 품기 전에 끊어내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도리였다. 2대에 걸쳐 부자가 리에게 미치게 둘 순 없었다. 리는 위험했다. 해저든 가문을 망칠 것이었다. 표독스럽고 우아하게 해저든의 심장을 파먹고 처참하게 버려둘 것이었다. 그런 사태가 오기 전에 미국의 대지가 피로 젖기 전에 그만두어야 했다. 

“리는… 어디 있습니까?”

카일은 무신경하게 티브이를 틀었다. 벽에 걸린 거대한 스크린에서 리의 머그샷이 띄워졌다. 현행범, 자수, 외국인의 충격적인 살인. 카일은 억센 억양의 앵커의 목소리가 피로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델에게 받아들일 시간을 주었다. 47초. 이성이 깔끔하게 돌아올 시간을 마련해 주고 있었다. 아버지의 도리였으니까. 마지막 리의 가는 길 즘은 배려해줄 수 있을 테니까.

“불법 총기 소유, 마약, 마약 유통, 살인, 방화. 더 필요한가?”

“카일이… 도울 수 있는 거잖아요. 당신은 할 수 있잖아요!”

아델은 분에 못 이긴다는 듯, 이 현실이 끔찍하다는 듯 무릎을 꿇었다. 따가운 나무 바닥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아델의 손등 위로 뼈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피 냄새를 맡으며 카일은 한적한 티타임을 즐겼다. 아델의 몸이 부르르 떨려오기 시작했다. 바닥이 피로 적셔졌다. 

‘이걸 우려했지.’

대지가 피에 젖을 차례였으니까. 리는 파멸적이었다. 리는 색정적이고 매혹적이었다. 리가 홀리지 못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카일은 감히 자부할 수 있었다. 리는 순진한 눈초리로 사람을 홀리고 파멸로 이끄는 남자였다. 아델의 손등 위로 튀어나온 뼈를 바라보았다. 그 정도의 화를 당한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었다. 자신은 리에게 목숨을 걸었으니까.

“내가 왜 리를 도와야 하지? 건방진 얼간이 십 년 키워줬으면 됐어. 아들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카일은 신문을 시원하게 접었다. 여전히 아델은 넋이 나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일은 분에 못 이겨 남색의 가운을 찢을 듯이 우악스럽게 쥐었다. 아델의 목덜미를 쥐고 입속에 총을 구겨 넣기 시작했다. 아델은 울음을 터뜨리지도 않고 창백한 얼굴로 기도를 할 뿐이었다.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총구 사이로 나오는 아델의 간절한 고백. 카일은 총을 내려놓고 아델을 바라보았다. 아델의 처절한 고백에 카일이 휘청거렸다.

나무 바닥에 총알이 경쾌한 소리로 낙하했다. 카일의 심장, 아델의 심장, 리의 심장이 차례대로 조준당하고 있었다.

“감옥을 무슨 캠프쯤으로 생각하나 본데… 아델. 무모한 짓은 삼가는 게 좋을 거야.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말아야지?”

카일은 평정심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아델을 거칠게 일으켜 소파에 던졌다. 그리고 식은땀으로 젖어버린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허튼수작, 불결한 사랑, 거친 섹스, 황홀한 첫사랑. 제 아비가 죽이라 지시했던 모든 것들이 떠올랐다. 아름답고 서정적이어서 역겨웠던 감정이었다. 세상의 낭만과 로맨틱은 전부 침식시켜야 했다. 

심장이 허튼수작을 부리기 전에 소각해야 했다. 아델의 할아버지가 될 사람이 살아있지 않아서 유감이었다. 카일은 제 손으로 아비를 죽인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나의 아들은, 왜 이렇게 나약한 것일까. 

일곱 살이 되던 해 옆집 아이를 쏘고, 15살 때 멧돼지의 뇌를 꺼내고, 스무 살이 되던 해 아무렇지 않게 살생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흔 살이 된 지금. 살생을 즐기기까지 했건만. 아델은 처연한 얼굴로 청승을 떨어대고 있었다.

“리를 왜 보내려고 하시는 겁니까? 왜! 리가 감옥에 갇혀 죽어가길 원하세요?! 리가 눈앞에 있는 걸 왜 두려워하시죠?”

아델은 분에 못 이겨 소리쳤다. 제 키와 얼추 비슷한 청년이 사랑에 허덕이고 있었다. 가여운 소년. 카일은 조소했다. 

아델은 스스로의 강점을 버리려 하고 있었다. 아델이 자신과 닮은 점은 통찰력, 냉정함 그리고 간파 능력이었다. 그런 아델은 너무도 사적으로 굴고 있었다. 카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예술적 감각이 떨어진다고 누가 그래.’

아델은 처음부터 예술에 몸을 담가야 할 건방진 철학자였다.

“두려워?”

카일은 한 글자 한 글자 끊어 말하기 시작했다. 아델을 비웃는 낮은 음색이었다. 가죽 장갑을 끼고 아델의 작은 머리통을 쥐었다. 제게 고개를 숙이도록 힘주어 흔들었다. 더 이상 아둔한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카일의 손아귀 안에서도 아델은 머리에 힘을 꿋꿋이 주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독한 자식.’

너무나도 닮은 두 사람. 두 사람의 눈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처럼 허망할 뿐이었다. 아델은 알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너무도 경박해서 스스로가 천박해지는 그런 웃음을. 

“아, 이제 알겠습니다. 리를 사랑하시는군요. 그 눈동자가 생각나서 컨트롤이 안 되실 겁니다. 아버지는 리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없었고 그래서 리를 보내신 거 아닙니까? 당신이 위험해질 것을 직감한 거죠. 아주 오래전부터.”

아델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몹시 섬뜩해 카일의 가죽 장갑 사이로 땀방울이 흘렀다. 과연 제 아들다웠다. 그래서 그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카일은 아델의 뺨이 돌아가게 내려쳤다. 핏물을 잔뜩 머금은 가죽 장갑이 아델의 뺨에 감겨왔다. 아델은 감히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였고 자신은 아들이었다.

“건방지군. 그 자세로 연극에 임해봐. 걸작이 탄생할 것 같으니.”

카일은 장갑을 벗어 벽난로에 던져두었다. 그리고 각진 아델의 턱 선을 만족스럽게 쓸어보았다. 

“마이 썬… 넌 총명하고 상냥하지. 아버지를 실망시켜선 안 돼.”

카일은 바닥에 떨어진 총구를 닦기 시작했다. 반질반질해진 총구로 아델의 이마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아델의 창백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카일은 질척한 눈으로 아델을 감시했다. 

넓은 어깨 두툼한 손가락 그리고 허벅지 장대한 허우대까지. 완벽했다. 후계자 양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아델을 후계자로 키운다면, 이젠 적임자를 찾기 위해 시간을 소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델은 그야말로 제 몸에서 나온 최고의 정자였다.

아델의 얼굴이 새빨갛게 올라왔다. 하지만 몸에 상처가 잘 드는 건 자신을 닮은 것 같지 않았다. 손목만 쥐어도 나약하게 상처가 올라오는 사람. 카일은 리를 떠올렸다. 리와 아델을 낳은 것도 아닌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카일은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던 커피 잔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카일은 정원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아델은 소파에 쓰러져 쓰린 숨을 쉬었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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