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4/10)

Chapter 3 

카일과는 오랜만의 식사였다. 아델은 텅 빈 식탁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된 음식을 플레이팅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아들의 도리는 아니었다. 

핫케이크 두 접시와 과일, 그리고 담배를 올려두었다. 단장을 마친 카일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 아델은 식탁에 앉아 카일을 기다렸다. 

카일은 여느 부모처럼 아델에게 핫케이크를 잘라주는 애정은 생략했다. 그러나 아델은 이따금씩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게 실감이 날 때가 있었다. 물론 자신은 젖먹이 아들이 아니었고 카일 또한 지긋한 중년이 아니었다. 

카일은 어려 보였다. 그것은 경박스러운 형용일지 모르겠으나 그는 매우 매력적인 남자였다. 다부진 몸에 훤칠한 키. 깊은 눈매와 웃는 모양까지 가끔 그의 세련된 모습에 반할 때마다 아델은 자신을 향한 찬양 같아 부끄러웠다. 카일과 아델은 너무도 닮아있었다. 마치 거울을 보며 식사하는 것처럼. 다만 카일의 머리는 한 올도 빠짐없이 정돈되어 있다는 점에서 노련함의 차이가 있었다. 카일은 좀 더 깊은 느낌이었고 아델은 나이에 맞게 청량했다.

둘의 회색의 눈동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탐색했다. 아주 샅샅이.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피붙이들의 싸움은 한쪽의 피가 마르지 않고는 종결될 수 없었다. 진한 피의 농도만큼이나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킴이 필요 없다는 의미인가?” 

카일은 칼을 쥐었다. 부드러운 핫케이크를 조각내는 용도임에도 아델은 뾰족한 그것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델은 킴에게 지극히 사적인 요구를 했다. 뉘앙스는 명령이었지만 아델은 꽤나 정중했다고 자부했다. 

[리는 앞으로 내가 맡을 겁니다.]

카일은 전부 알고 있었다. 수요일에 한가하게 포커를 치고 있는 킴을 발견한 날이었다. 우아하고 고상하게 해결해야 했지만 찰나의 정신이 혼미했다. 카일은 곧 실성할 것 같았다. 카일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재킷을 벗었다. 시계를 풀어 두고 킴의 포커를 내던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킴에게 총을 겨누었을 때 비로소 싸늘한 이성이 돌아왔다. 리는 미친 남자였다. 자신을 미치게 했고 짐승으로 만들었다. 발정하게 했고 교양을 잃게 했다. 그럼에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카일에게 리는 금기 같은 것이었다. 반드시 깨지고야 말 것임을 알면서도 생떼처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리와 자신 사이에 그 누구도 끼지 않길 소망했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장담했다. 가장 신성한 곳에 그를 묶어 두고 자살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전부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델은 포크를 내려놓고 카일을 마주 보았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예를 갖추는 아이였다. 카일은 리와는 별개로 아델이 기특할 때가 종종 있었다. 아들이 아닌 부하였어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리를 공유하게 된다면 망설임 없이 아델을 죽일 것이다. 

“리를 함부로 대하니까요.” 

아델은 귀 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아버지에게 좋아하는 아이에 대한 푸념을 하듯. 간지러운 연애상담 같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쓰던 존댓말조차 망각하고 칭얼거리는 것 같았다. 카일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아델의 음색이 떨려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저 아델의 눈빛을 읽으며 농도를 파악할 뿐이었다. 

나의 리가, 사랑스러운 리가 어느 정도로 널 미치게 하고 있는지. 

카일의 의문은 그것뿐이었다. 파악해야 할 것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면 부성애로 치장한 보스가 되어 달래줄 것이었다.

“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이상하군.” 

카일은 무심하게 턱을 쓸었다. 아델은 카일의 네 번째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아델의 심장이 지끈거렸다. 카일의 회색의 눈빛과 강렬한 손의 조화가 마치 의도했다는 듯 아델에게 적중했다.

‘아버지의 남자.’

“리는…….”

“착하고, 상냥하고 여리지.” 

아델은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애썼다. 카일이 바라보는 리와 자신이 바라보는 리. 그것은 차이가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카일의 입에서 나온 ‘나약하다’라는 감상은 몹시 의외였다. 아델은 표정을 굳히고 끄덕거렸다. 카일의 식사가 끝이 났다.

* * *

카일의 발치에 담배꽁초가 쌓여갔다. 카일은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며 리를 떠올렸다. 이젠 자신을 바라보아도 리가 떠올랐고 리를 바라보아도 자신이 떠올랐다. 사실 리는 제 눈 속에 사는 것은 아닐까. 이 세상은 전부 리가 창조한 것은 아닌가. 카일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리의 보라색 눈동자 속 홍채를 뽑아 버린다면 달라질까. 애초에 리가 죽는다고 이 사랑이 끝이 날까. 카일의 머릿속은 온통 난잡스러운 질문들로 가득 찼다. 리에 대한 생각을 마치고 나면 작고 고요한 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의 음성은 숨소리 한 번만으로도 사정에 도달할 수 있는 위험한 악기였다. 

[마피아가 왜 이렇게 패션에 집착해?]

리는 카일의 옷장에 빽빽하게 박혀있는 넥타이를 보며 과장스럽게 입을 벌렸다. 그리곤 장난스럽게 웃으며 흩트리기 시작했다. 카일은 남색의 넥타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마피아는 어떻게 다녀야 하지?]

카일도 지지 않았다. 리는 채도별로 분리되어 있는 슈트를 만지작거렸다. 얇은 손가락으로 도미노를 하듯. 리의 입매가 신중해졌다. 

[검은색보다 남색이 더 잘 어울리는 거 알죠?]

양말까지 정리한 후 리는 뿌듯한 얼굴로 카일에게 손짓을 했다. 마치 자신이 코디한 대로 입으라는 듯. 기대하는 눈빛이 투명하게 느껴졌다. 

[머리에 칼이라도 꽂고 다녀야 하나?]

[아니. 멋있다는 말이었어요.]

“젠장….”

카일은 거울 속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몽글하게 올라온 거품을 쓸었다. 자동 면도기가 좋았지만 리가 해주는 엉성한 면도는 중독성이 있었다. 그래서 몇 년째 고수해온 수고스러움이었다. 리가 없어도 있어도 벼락 맞을 습관은 고쳐지질 않았다. 

리를 무릎에 앉히고 받았던 면도는 혼자 있을 때도 무릎이 뻐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생생했다. 

[열여섯 살이 되어도 수염이 안 나더라고. 난 전생에 개구리였을 거야.]

리가 웃었다. 카일은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카일은 가장 어두운색으로 골라 입었다. 리와 옷장이 분리된 이후 생긴 습관적인 행위였다. 오늘은 지겹게도 느린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카일은 부하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역시나였다. 오늘의 불행은 아들놈의 사고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차질이 생겼다. 신입의 서툰 일처리로 생긴 사고였다. 

피해와 보상은 동등한 레벨일 때 가능한 것일 텐데. 상대 조직의 응석이 도를 지나쳤다. 보내오는 첩자까지 전부 허술했다. 신생조직이라더니 연극은커녕 구걸조차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런 일에 카일이 직접 나설 정도로 중대한 사건도 아니었다. 그러나 카일은 굳이 나서고 싶었다. 오늘은 누구라도 죽여야 할 것 같았다. 시원하게 머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뻐근함을 덜고 싶었다. 

사랑이 아닌 살생으로 마음을 채우고 싶었다. 그리고 리를 찾아가 안을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리를 적시며 환희를 만끽할 것이다. 

그렇게 새벽을 지샌다면 마음속에 남아있는 찌꺼기들이 더 이상 눌어붙지 않을 것이다.

카일은 지체 없이 약속 장소로 향했다. K와 M을 데려오는 것은 인력 낭비였다. 눈앞에 남자는 셋. 오른팔 없이도 처리할 수 있었다. 복도에 대기하고 있었지만 유능한 부하들까지 더러운 장난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은 솔직한 심정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카일은 보스로 보이는 남자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남자들은 표정을 숨기는 데는 능숙해 보이지 않았다. 어린 애송이 둘에 이빨 빠진 늙은이 하나. 남자의 손이 꿈틀거렸다. 카일은 남자들의 바지춤을 살폈다. 

남자의 손이 부들거렸다. 이곳에서 나를. 감히. 카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남자는 단숨에 영업적인 미소를 흘리며 협상을 이어갔다. 그때 늙은이가 조심성 없이 총알을 만지작거렸다. 애송이의 표정이 굳어갔다. 카일에게 들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카일은 공기의 흐름을 읽었다. 

카일은 탁자를 엎고 늙은이를 쓰러뜨렸다. 함께 쓰러진 두 명의 남자들은 서둘러 총을 쥐었다. 카일은 늙은이의 배를 차고 머리를 날렸다. 남자들이 총을 꺼내는 시간까지 카일은 느긋했다. 총알을 장전하고 허둥지둥할 때까지 이미 늙은이의 숨통은 끊어져 있었다. 순식간에 죽어버린 보스를 바라보며 추모할 작정인 듯했다. 카일은 총을 꺼내들었다.

“고민할 시간을 줄여.” 

남자는 총을 맞은 오른쪽 다리를 붙들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얼굴에 화병이 꽂힌 다른 남자는 이마 아래로 흐르는 뜨끈한 피에 덩달아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카일은 권태로운 표정으로 한쪽 귀를 막았다. 늙은이의 머리통을 날리고, 남자 둘을 쏘아도 뻐근함이 풀리지 않는 것은 좋지 않은 신호였다. 이젠 제압이 아닌 화풀이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카일은 왼쪽 가슴에서 총 한 자루를 더 꺼내었다. 무기는 넉넉했고 시간은 흘러넘치게 많았다. 그러나 손끝에 놓치듯이 흘러내리는 그것들을 잡을 수 없어 분노가 치밀었다.

‘리.’

울컥. 카일은 심장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몸으로 배워. 잊어버리지 않을 테니.” 

화병을 맞은 남자의 심장 속에 총알 일곱 개가 박혔다. 울퉁불퉁 지저분하게 심장이 튀어 올랐다. 여전히 카일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칼을 꺼내 눈마저 도려내었다. 

[사랑해요. 카일.]

카일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구둣발로 남자의 눈알을 짓밟으며 축축한 액체가 튀어나올 때까지 걷어차기 시작했다.

[보고 싶어요. 카일.]

칼로 배를 찔러대기 시작했다. 인간도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흉부부터 배꼽 위까지 정교하게 갈라내기 시작했다. 총알이 박혀 돼지 시체처럼 터져있는 심장을 들어 올렸다. 

[카일… 카일…….]

여전히 죽지 않은 심장이 퍼덕거렸다. 카일의 창백한 얼굴에 죽은 피가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카일은 얼굴에 뒤덮인 피로 세수를 시작했다. 

리를 떠올리는 모든 감각을 지워내고 싶었다. 남은 남자는 애처롭게 심장을 쥐어뜯고 쓰러졌다. 늙은이의 전화가 울렸고 카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선명히 뜬 메시지에 ‘보랏빛 인질 요망’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것도 암호라고 우쭐대는 건가. 늙은이는 노망이 나진 않은 모양이다. 미리 죽을 것을 예감했는지 카일이 총을 들기 전 20분 전에 전송된 메시지였다. 눈치가 좋아. 아니면 공기의 흐름이라도 읽으신 건가. 카일은 노인의 팔을 잘라내어 생선 위에 던졌다. 일식당은 언제나 핏덩이와 어울렸다. 할복. 자결보단 살인이 환상적이었다.  

* * *

아델은 이른 아침 리에게 메일을 보냈다. 아델은 늘 9시 15분, 10시 15분에 맞춰 예약 메일을 보내곤 했다. 빽빽한 열 줄의 메일은 밤늦게 머리를 쥐어뜯은 아델의 수고였다. 메일 속엔 아델의 사랑, 그리움,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결국 ‘리가 보고 싶어요. 내일 성당에 갈 거예요’가 핵심인 말이었지만. 아델은 늘 날씨 이야기, 기분 이야기 혹은 제 친구의 실패한 짝사랑 이야기를 늘여놓곤 했다. 

[아몬드를 사러 갈 시간을 드리는 겁니다.]

리는 피식 웃음이 걸렸다. 오늘은 아몬드 쿠키가 좋을 것 같았다. 비가 온다고 했으니 축축한 브라우니보단 건조한 쿠키에 차 한 잔이 어울렸다. 

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앞치마를 매었다. 그때 수상한 그림자가 리를 덮쳐왔고 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분명 아델에겐 트라우마를 고백했으니 그가 나타날 리는 없었다. 리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안심하세요. 다신 이런 일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라고 했던 아델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리는 쓰디쓴 헝겊 속에서 숨을 잃어갔다. 오늘로 아홉 번째 인질극이었다. 

리는 눈을 떴다. 오늘의 장소는 배인 듯했다. 그것도 아니면 바닷속의 드럼통 정도. 물이 차는 소리와 흔들거리는 몸. 그리고 뱃고동 소리와 멀미까지. 인질 베테랑의 완벽한 추측이었다. 항구까지 멀진 않은 것 같았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귀로 추측하는 일은 성당에 갇히고 터득한 요령이었다. 

리는 서서히 눈을 떴다. 힘겹게 눈을 들어 올리면 커다란 손바닥이 뺨으로 날아들었다. 철썩. 찰진 소리와 함께 다시 눈이 감겼다. 항구와 멀어지고 배가 정박했다. 단단히 갇혀 아무런 파도 내음도 느껴지질 않았다. 황망한 바다 위에 떠있는 기분이었다. 도시에서 멀어진 것이 분명했다. 돌아가려면 반나절 정도. 

‘귀찮은 일이 생겼어.’

리는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엔 어둠이 길었다. 눈을 비비고 싶었지만 찢겨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자살시도를 하고 눈을 떴을 때처럼 불쾌감이 들었다. 옷이 벗겨져있고 두 손이 결박되어 있었다. 

‘플레이가 아니구나.’

이 상황에서도 우습게 카일과의 놀이가 떠올랐다. 거친 표면의 밧줄이 손목을 감아왔다. 봉합되지 않은 상처에 두꺼운 밧줄이 짓이겨져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윽…….” 

리는 고통을 삼켰다. 가슴과 손목, 무릎과 발목 전부 칭칭 감겨져 있었다. 이 노끈을 쓰는 조직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카일이 저를 앉히고 알려주었던 표식과 비슷했다. 

[등신 같은 새끼들이지. 대놓고 광고하는 꼴이라니.] 

카일이 비웃었던 그 조직이었다. 빨간 나비와 수상한 라틴어까지. 리는 석유 냄새에 눈을 번쩍 떴다. 그제서야 담배를 물고 있던 남자들이 하나둘씩 리에게 다가왔다. 벗겨놓을 생각까진 없었는데 카일을 자극하기 위해선 이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들은 전부 사내를 벗기는 데는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리의 얼굴을 확인하곤 서로의 달아오른 눈빛을 읽었다. 

건드려보고 싶었다. 카일의 인질을 찾는 데는 큰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보랏빛 남자. 카일이 끼고 산다는 남창은 리 하나뿐이었다. 그들 사이에선 남창으로 일컬어지지만 카일은 놀랍게도 성당에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지쳐갈 때쯤 그곳을 방문했고 그 흔한 사진을 찍을 틈 조차 주지 않았다. 반신반의했다. 아주 오래전의 데이터였고 십 년 동안 카일이 한 남자를 품을 줄 몰랐으니까. 무작정 리를 잡아들이기로 했다. 카일의 아들까지 연쇄적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다. 리는 다른 인질을 위해 첫 번째 먹잇감이 되어야 했다. 

리는 사진보다 환상적이었다. 요물이라는 소문과는 달리 단정한 인상에 가까웠다. 미국을 손에 쥔 마피아가 환장할 정도면. 아랫도리가 쓸만하거나 혹은 눈빛만으로 사람을 홀리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의 인상은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앙탈이라곤 평생 부려본 적 없는 사람처럼 고상하기만 했다. 생각보다 리는 정숙했고 성숙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색기보단 청초함에 가까웠다. 투명한 피부에 슬퍼 보이는 눈빛까지. 괴담들은 전부 사실과 달랐다. 그러나 눈만 마주쳐도 싸버린다는 말이 영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었다. 베일이 감춰져 더욱 자극적이었다. 옷을 전부 벗기고 밧줄로 묶을 때 남자들은 딱딱해진 아랫배를 애써 감춰야 했다. 뒷구멍에 환장하는 호모가 되긴 싫었던 것이다. 

그때 리는 마른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곤 허탈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 속 미묘한 비웃음에 남자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카일은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아요.” 

리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남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풀어주세요 시키는 건 전부 다할게요.’라고 할 줄 알았다. 여느 납치극처럼 수월할 줄 알았다.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리는 납치극을 비웃었다. 아주 자조적인 얼굴로 찡그리기까지 했다. 리를 청초하다 여겼던 남자들은 후회해야 했다. 리는 목숨을 구걸하지도, 카일을 울부짖지도 않고 얌전히 죽어가고 있었다. 눈빛에 담긴 모든 것들이 귀찮음 그 자체였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당장 내장을 쑤시고 상어 밥이 되어도 영광이라는 듯 히죽거렸다.

“개자식이. 카일은 널 구하러 올 거야. 이번 협상 건도 진행될 거고. 괜히 머리 굴리지 마.” 

남자는 불안한 듯 거친 욕설과 함께 리의 머리채를 잡았다. 리는 여전히 무시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남자들은 포악함을 숨기지 않았다. 눈앞의 리가 겁을 먹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리는 남자들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리의 옷을 벗기고 결박할 때까지 줄곧 욕정이 차올랐던 상태였다. 리는 남자들의 뒤틀린 욕망에 불을 붙였다. 남자는 리의 머리채를 쥐고 허리를 거칠게 잡아 올렸다. 남자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리를 겁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욕정을 채울 행위라는 것을. 

리를 납치하고 결박할 때부터 남자들의 손길엔 욕망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리를 강제로 취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는 듯이. 누가 먼저 자존심을 버리고 달려들 것인가가 문제였다. 리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는 발정난 개처럼 달려들어 리의 골반을 고정했다. 

“겨우? 너희들 열 명이 달려들어도 카일은 눈 하나 깜짝 안 해.” 

리는 헐떡거리면서도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남자들은 하나둘씩 리에게 다가갔다. 오히려 그의 앙칼진 목소리가 흥분을 촉진시켰다. 한 남자는 결국 카메라를 켰다. 리는 입과 구멍으로 남자들을 받아내야 했다.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묵묵히 그들을 노려보았다. 점점 남자들은 리가 두려워졌다. 카일이 십 년을 끼고 살던 남창의, 그 천박한 남창의 허튼수작에 놀아나고 있었다. 

남자는 우악스럽게 손모가지에 힘을 주었다. 울퉁불퉁 험상궂게 튀어나온 근육을 과시하듯 리의 머리통을 잡아 발로 짓이겼다. 삼각대에서 카메라를 뽑아 리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흔들거리는 허리와 울렁거리는 배안. 삼각대는 조류에 의해 기울어진 지 오래였고 리는 끊어질 듯한 신음을 참으며 피를 토했다. 관음 하던 세 명의 남자들은 리에게 달려들어 손을 뭉갰고 서로의 손인지 발인지도 모르는 채 그를 탐했다.

“그냥 죽여줘.” 

리의 끊어질 듯한 목소리와 함께 남자의 머리가 날아갔다. 정박한 선박에 불이 붙었고 배의 머리통부터 희뿌연 연기가 아득했다. 리는 천천히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허리부터 허벅지 하물며 발목까지 뼈가 뒤틀려 움직일 수 없었다. 목과 골반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꺾여있어 올바른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리는 화마 속에서 마른기침을 뱉었다. 머리를 잃은 남자들의 뜨끈뜨끈한 피가 손에 감겨왔으며 남자의 성기가 머리맡에서 덜렁거렸다. 상하체가 분리된 것이 분명했다.

킴은 정신을 잃은 리에게 술을 쏟았다. 정신이 번쩍 들 만한 도수라고 생각했지만 리의 정신은 더욱 혼미해졌다. 구멍에 술이 스며들었고 리는 울컥 정액을 토해냈다. 

“카일…….”

리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 *

[단 한 잔도 못 마셔?]

카일은 성인이 된 열여덟 리에게 술 한 잔을 건넸다. 다소 강압적인 카일의 요구에 리는 조심스럽게 고개만 끄덕거렸다. 

[희한하군. 거짓말이 아닐 테지만 캐묻고 싶어져.]

카일의 장난스러운 웃음에 리는 도수만큼 얼굴이 달아올랐다. 한 방울도 섭취하지 않은 리의 얼굴은 이미 만취한 사람처럼 붉게 타올랐다. 카일의 목덜미에서 나던 은은한 향기에 눈을 감으면 심장부터 타들어갈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핥아봐. 네 생각과 다를 수 있으니.]

카일은 포도주를 제 성기에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리는 무릎을 꿇고 기어와 카일의 성기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뜨거운 귀두의 촉감에 입술이 데일 것 같았다. 귓속에 불씨가 흘러넘치는 듯 감각이 녹아 신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생각보다… 맛있어요…….]

리는 천진하게 웃었다. 카일은 리의 부드러운 머릿결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헤집기 시작했다. 

리는 행복한 악몽을 꾸었다. 눈물을 닦고 일어나면 카일이 없겠지만. 꿈속에서 다정한 카일을 봐서 행복했다. 그리고 악몽을 귀접이라 덮어씌울 만큼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사랑하는 카일이 나와서 행복해. 열여덟 살 때처럼 십 년이 흐르고도 뻔뻔하게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킴은 쓰러진 리를 병든 참치처럼 끌어올렸다. 술을 잔뜩 먹은 리는 한참을 골골거렸다. 온몸에 오한이 드는지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흘러나왔다. 킴은 무전기를 넣었다. 리의 죽다 살아난 표류기를 생생히 보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체 같은 리를 발로 건드려 보았다. 이내 무전기의 버튼이 꺼지기를 기다렸다. 바다에 던질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킴은 리의 머리채를 잡아 항구로 끌고 갔다. ‘제길, 러시아까지 올 줄이야.’라며 농담을 맞받아쳐줄 동료가 없는 게 아쉬웠다. 마피아의 영역 다툼치곤 고결한 편이었다. 중간에 ‘망할 리’가 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보낸 비디오는 가뜩이나 예민한 카일의 신경을 자극했다. 중간에 리가 껴 진흙탕이 되었다. 그들이 보낸 비디오는 카일의 신경을 자극하기엔 효과적이었다. 카일은 킴을 불러 세웠다. 분수대 앞에서 음악을 듣던 킴에게 가볍게 손짓을 했다. 그것은 마치 ‘몇 시?’, ‘담배 좀 주겠어?’ 정도의 가벼운 부름이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킴의 표정관리에 힘을 부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리를 찾아와.]

카일의 입매는 평소와 같이 부드럽게 꺾였고 배경의 선율도 아름다웠지만 킴이 받은 명령은 그렇지 못했다. 마치 아름다운 숲속에서 칼이 찔린 듯한 부위만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카일의 영역에선 더욱 확실해졌다.

카일은 킴을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 누구도 카일을 보필할 이유가 없었다. 리의 일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들의 밤일이 아니고서야 낮에 카일이 리를 보살피는 일은 드물었다. 리는 그저 산책 시간을 기다리는 귀족 견에 불과했으니 카일이 그 이상의 관심을 쏟는 일은 없었다. 

킴은 리에게 다시 한 번 술을 들이부어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서서히 눈을 뜬 보랏빛 눈동자엔 아쉬움이 한가득 차올랐다. 

‘살려줘도 엿 같은 반응.’ 

킴은 리를 매몰차게 노려보았다. 당장 남자들이 손댄 곳을 마구 들쑤시며 제 것도 뿌리고 싶어졌다. 한 줌도 되지 않는 리가 세상 독기는 전부 품고 악을 쓸 때면 리를 제압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저뿐만이 아니었다. 카일의 부하라면 전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카일은?” 

리는 언제나 그렇게 물어왔다. 카일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단 한 번도 카일은 리를 구하러 온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리는 매번 신선한 눈빛으로 묻곤 했다. 

“왔겠어요? 리,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킴의 맹렬한 비난에 리는 고개를 떨궜다. 죽지 못한 허탈감과 카일이 눈앞에 보이지 않았을 때의 그 허망함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킴 나름의 예를 갖췄지만 리의 얼굴은 단숨에 일그러졌다. 킴은 리를 차에 쑤셔 넣었다. 리에게 담요를 둘러주고 공주님처럼 안아주는 건 오히려 리를 비참하게 만들 것 같았다. 

리는 안전벨트도 하지 못하고 몸을 떨구었다. 

“카일은 이 시간에 바빠?”

“보스는 늘 바쁘죠.”

킴은 휴대폰을 열어 모바일 게임을 시작했다.

“그렇구나…….”

리는 기사의 거친 운전 솜씨에 맥을 못 추고 흔들거렸다. 리의 옆자리에 앉은 초면의 남자는 리를 힐끔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바지도 없이 얇은 셔츠로 낑낑거리며 몸을 가리고 있는 리를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 음욕 가득한 남자는 점차 리와의 간격을 좁혀가고 있었다. 

킴은 신입의 패기에 호기로운 웃음을 지으며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물에 흠뻑 젖은 리는 오들오들 떨며 창문 가까이 붙어 가녀린 숨을 내뱉고 있었다. 

“입어요.”

킴은 제 재킷을 벗어 리에게 던져주었다. 리는 떨리는 손으로 재킷을 받아들고 필사적으로 제 몸을 가리기 시작했다. 킴은 발정 난 눈빛으로 리를 쫓는 신입에게 찡긋거렸다. 

‘먹어서 뭐해. 더러운 남창 같은 자식을.’ 

신입은 단번에 킴의 속내를 읽고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하니 건드려도 죄책감이 덜할 것 같았다. 오히려 그냥 이 남자를 내버려 둔다면 이 차에 탈 때마다 아쉬움에 몸이 뒤틀릴 것 같았다. 

신입은 리에게 성큼 다가와 허리를 끌어당겼다. 리는 양옆으로 입술이 터져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면 침이 새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와중에 체면을 차리고 있는 자신이 신기했다. 입을 앙 다물고 남자를 밀어내면 킴은 재밌다는 듯 게임 볼륨을 키웠다. 

기사는 거칠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신입이 리에게 다가갈 때면 리 쪽으로 핸들을 틀어 겹쳐지게 만들었다. 반동 덕분에 리를 무릎에 앉힌 신입은 거칠게 리의 몸을 만지작거렸다. 

‘십 년 만에 사형수가 나오려나.’ 

킴은 하룻강아지 같은 멍청한 신입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감히 카일의 전용을 건드리다니. 그의 선임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죽으라고 교육한 것이 틀림없었다. 신입을 아니꼽게 본 선임의 복수일 것이다. 

리는 신입에게 유린당한 몸을 질질 끌고 도망쳤다. 절뚝거리며 분수대로 기어가 앉았다. 그 속에 몸을 풍덩 빠뜨렸다. 남자의 흔적들과 핏방울 그리고 이 순간에도 카일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지워내고 싶었다. 머리부터 천천히 빠뜨렸다. 미지근한 물살이 뇌의 주름으로 파고들었다. 음악에 맞춰 터져 나오는 물살이 장엄하게 느껴졌다.

카일은 분수대에 몸을 빠뜨리는 리를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은 3층의 서재였고, 리의 몸뚱어리가 물 위로 떠다니고 있었다. 

카일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분수대 쪽으로 걸어오는 신입을 주시했다. 수상한 그의 행동을 빠르게 스캔했다. 리와의 정사가 꽤 즐거웠는지 신입의 앞섶은 팽팽하게 솟아있었다. 

신입은 허리춤을 들썩거렸다. 마지막을 내버려 두고 핸들을 꺾어버린 기사 때문에 절정에 달하지 못한 아쉬움이었다. 신입은 이죽거리며 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신입의 머리가 터졌고 카일의 오른쪽 어깨에는 기다란 총이 얹혀 있었다. 

‘나이스 카일.’ 

킴은 총을 내려놓고 담배를 물고 있는 카일을 향해 엄지를 치켜 올렸다. 

‘정말 존경할 수밖에 없어.’ 

킴은 슬쩍 종아리를 털고 신입의 뇌수를 닦아 내었다. 분수대와 네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신입의 육신이 흩어졌고 리는 정신을 잃은 채 깊이 가라앉았다.

* * *

너무 늦었네. 그렇지? 당신은 매일 늦으니까. 이젠 익숙해. 이렇게 말하기를 원하는 거지? 내가 아무런 기대 없이 당신을 포기하길 원하는 거잖아. 맞아? 카일. 대답해.

나의 꿈속은 역시나 기대 이하였다. 멋없게 카일만 기다리는 무의식이 정신을 지배했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 괜한 기대였다. ‘카일을 사랑한다.’ 이것만 없으면 나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죽음에 대해 성급하지 않았을 테니까. 카일은 나를 죽였고 나를 살렸다. 그를 떠올릴 때면 숨을 옥죄여 오듯 회색빛의 과거가 떠올랐고 그 끔찍한 기억은 잔인할 만큼 강력한 향수를 품고 있었다. 만약 카일의 곁이 아니라면 나는 장물아비 혹은 장물아비에게 팔려갈 물건이 되어 있었겠지. 카일이 내게 알려준 첫 번째 세상이었다. ‘넌 내가 아니었으면.’ 알겠어요. 그만 말해도 돼요. 충분히 감사하게 생각해요. 

카일은 어린 나를 잡고 머리카락을 헤집고 뇌의 주름을 헤집으며 수많은 상처들을 주입시켰다.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로 나를 현혹시켰다. 

열여덟에는 서른 살인 그가 막연히 어른으로 보였다. 응석을 부리고 마음껏 사랑을 갈취했다. 마치 그가 원래부터 쥐고 있었던 것 마냥. 허술한 도둑처럼 사랑을 캐물었고 기어코 받아내고 싶었다. 한 방울이라도. 그 한 방울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카일이 아니면 전부가 소용없던 시절이. 카일을 책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카일은 나를 유혹하지도 나를 신속한 자살에 이르게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가 한 것은 오로지 ‘다정한 방치’였다. 

꿈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현실과 죽음의 경계선이 꿈이라는 망상은 어릴 적부터 해오곤 했다. 그런 카일은 꿈에서조차 날 안아주지 않았다. 세밀하고 촘촘하게 카일의 숨을 끊어놓을 만한 질문을 하고 싶었다. 

신입은 누구야? 신입이 날 강간한 걸 알아? 신입은 당신이 뽑았어? 그리고 자질구레한 것들.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잖아.

다시 꿈의 경계가 흐려졌다.

“일어나. 눈을 뜬 것 같으니.” 

손 가죽에 커다란 바늘이 박혀 있었다. 장기가 빠지는 기분이 아니라면 코카인은 아닐 것이다. 포도당 아니면 비타민. 그것도 아니면 나를 잠재울 만한 수면제일 것이다.

카일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의 웃음이 경박스럽지 않다는 건 실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단 한순간이라도 그가 일그러진다면 나의 상상보다 멋없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를 포기했을 것이다. 아직도. 여전히. 첫사랑에 목을 매는 소년인 척하는 늙은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 상대는 미치도록 눈이 부셔서 여전히 날 소년으로 만들었다. 깜빡 나이를 잊게 했다. 

나는 카일의 셔츠 깃을 바라보았다. 그와 십 년을 붙어먹으면서 생긴 취미였다. 깃이 꺾여 나풀거린다면 다른 여자를 안고 온 날이었다. 

[얼굴을 핥는 여자는 없어?]

정갈한 머리 스타일은 잠자리를 끝낸 후에도 여전했고 셔츠와 소매만 풀려있었다.  

나는 카일의 턱을 핥고 귀와 코까지 전부 깨물곤 했다. 그가 미울 때는 이를 갈며 포악한 짐승이 되곤 했으니까. 카일은 나의 말에 ‘집에 있는 고양이와는 달라서.’라고 대답했다. 앙칼진 고양이가 있어.

나는 그날 벽난로 아래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카일의 눈동자 안에 담긴 나를 정돈했다. 털이 타들어갈 정도로 불구덩이에 붙어있는 고약한 짐승에게 창문을 열어 주었다. 

* * *

“뭐 하다 왔어?” 

리는 손에 꽂혀있는 링거를 잡아 뜯었다. 눈꼬리에 얹어진 피딱지 덕분에 카일을 노려볼 순 없었지만 그의 떨리는 어깨만 보아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음이 느껴졌다. 

카일은 팔짱을 끼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벽에 몸을 기대었다. 리는 침대 위로 들어오려는 카일의 어깨를 밀쳤다. 

주삿바늘이 찔린 부분이 쓰라려 카일을 밀어내지 못했다. 곧 죽어도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이렇게 카일의 냄새를 맡으며 안정을 찾고 안겨버리는 건 스톡홀름 증후군보다 위험했다. 

카일은 리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보랏빛 눈동자를 보길 원하는 듯 리의 눈꺼풀을 두들겼다. 카일은 리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촉촉한 점막에 그의 입술이 닿을까, 리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방금 전까지 다른 여자를 안고 왔던 그에게, 강간범을 부하로 둔 그에게, 납치당한 자신에게 일언반구도 없는 그에게. 할 수 있는 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얼굴을 묻는 일이었다.

“신입은 내 소속이 아니었어. 제 아비를 대신한 스페어였지. 어차피 죽을 자식이었으니 신경 쓰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리는 고개를 들어 커튼을 젖혔다. 분수대에 빨간 시신이 떠올랐다. 머리가 잘려 신입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범했던 손가락은 확실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박힌 의문의 문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벌써 다른 트라우마가 적립되었고 앞으로 손가락을 볼 때마다 정신이 흐려질 것이었다. 닳고 닳은 세포기관과 몹쓸 기억력은 환상의 커플이었다.

“여자랑 헷갈렸나 봐. 병신 같은 자식. 카일은 그런 건 안 알려주나 봐?” 

리는 이불을 걷고 허벅지를 벌렸다. 새하얀 허벅지 사이에 번져있는 멍, 그리고 구멍을 타고 흐르는 진득한 피를 보여주었다. 

“앞에다가 쑤신 거 보여?”

리는 일부러 자극적인 말을 골라했다. 

“박을 곳이 있을 리가 없잖아.”

카일은 앙상한 리의 허벅지를 바라보았다. 생살에 찔러 넣은 탓에 리의 허벅지는 손자국으로 가득했다. 

“제대로 알려줘야겠군. 남자는 이곳으로 박는 거라고.”

카일은 성큼 다가왔다. 그리곤 오므려진 리의 허벅지를 벌렸다. 피가 흥건한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리의 신음이 터질 때까지 기다렸다. 카일의 매정한 말에 리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카일은 지분거리던 손가락을 빼내었다. 기다란 중지 손가락에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카일은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핥았다.

“그만해.”

카일은 더욱 집요하게 손가락을 핥아내기 시작했다. 야살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는 수치심에 고개를 푹 숙였다.

“제발… 그만해요!”

이런 것을 바라던 건 아니었다. 지친 몸을 카일이 안아주길 바랐던 거지. 제 몸을 다시 한 번 헤집기를 원하던 건 아니었다. 

리는 카일과 눈을 맞췄다. 리가 당장 죽어버릴 것 같은 얼굴을 지을 때면 카일의 심장이 시큰거렸다. 

건조하고 잡히는 것 없이 한적한 그런 곳을 선호했지만 리의 모든 것은 물기를 담고 있어 손에 잡히지 않았었다. 

카일은 리의 허리선에 손을 올렸다. 이십 분 전 그를 씻긴 비서는 알았을 테지만. 리의 몸에 정액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카일은 찰나의 풀린 눈빛으로 리의 옷을 젖혔다. 배꼽에 얼굴을 묻고 적당한 곳을 찾았다. 리의 몸은 건조하기만 했다. 카일의 심장이 비상식적으로 뛰어왔다.

“간지러워. 그만 나와.” 

리는 불룩해진 배 위로 카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커다란 공을 넣고 다닌 어린 시절처럼. 카일의 유치한 장난에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카일은 리의 가슴에 포개졌다. 카일과 20cm 이상 차이 나는 리는 카일의 몸집이 버거웠다. 카일과 몸을 섞을 때면 카일은 필사적으로 스스로의 몸을 제어했으니 리가 힘들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카일이 온 힘을 빼고 올라 타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여운 폐가 짓눌려 찌그러질 것 같았다.

“무거워도 참아봐. 내 마음이니까.” 

카일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리는 눈물이 흘렀다. 눈동자가 송곳에 찔린 듯 천장을 바라보아도 눈물이 참아지질 않았다. 카일의 머리칼이 오르락내리락 정신없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리는 울어버린 자신이 부끄러워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열여덟 살 같군.’ 

카일은 리의 손을 쥐고 입맛을 다셨다. 십 년 전 그날 같았다. 리를 처음 안던 날. 그날도 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가냘픈 신음을 뱉었다. 

그 소리에 귓바퀴가 요동쳤고 이명이 온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쾌락이 극에 달하면 가혹하게 괴로워진다는 것을 그날 깨달았다. 카일은 신경질적으로 귀를 감싸 안으며 리를 뒤집었다. 가죽만 남은 리의 몸을 보자 심장이 완화되었다. 무사히 진정되었고 찢어진 고막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베개 속에 묻힌 여린 신음에 마음이 놓였다. 만약 리와 눈을 마주치게 된다면 두 귀에서 피가 흘러나와 침대 위에 쏟아질 것 같았다. 

리는 5.8피트조차 되지 않는 키에 가죽만 남은 몸. 마치 구걸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궁핍한 모양새였지만 그 속에 감춰진 것은 탐이 날 만큼 카일을 탐욕스럽게 만들었다. 목소리와 몸짓 그리고 보랏빛 눈동자까지 전부를 소유하고 싶었다. 응석을 부리던 리는 가끔 어른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카일을 달래곤 했다. 

리는 생활 소음조차 달콤했고 주정을 부리고 싶을 만큼 취기가 돌았다. 하품을 하며 빵을 뒤집는 모습과 당근을 씻으며 한입 베어 무는 모습이 황홀했다. 외설적인 음악이 깔릴 필요도 인조적으로 색감을 자극할 필요도 없이 환상적인 배우 같았다. 리는 소름 끼치게 외설적이다. 순수하다. 그리고 카일은 리를…….

“이런 농담하면 좋아?” 

리는 뻐근한 허리를 일으켰다. 끊어질 듯한 골반과 멍이 든 허벅지를 보며 비위 좋게 붙어있는 카일이 이상했다. ‘그는 마피아니 상처와 흉터쯤에는 감흥이 없겠지. 이 정도의 부상으로 어리광을 부리는 내 자신이 이해가 안 될 법도 해.’ 늘 이렇게 리는 카일보다 더 카일을 이해하며 살아왔다. 이것이 리의 생존 방법이었다. 그리고 오랜 짝사랑의 비결이었다.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래? 카일… 같이 저녁 먹자. 내가 요리해줄게.” 

마치 이 장난은 여기서 끝이라는 듯 카일은 장갑을 끼우고 있었다. 성치 않은 몸을 가진 저와 별개로 늘 튼튼한 몸이었으니 병자 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카일은 거울을 보며 헝클어진 머리와 넥타이를 정리했다. 리는 카일의 등에 대고 애처롭게 소리쳤다.

“며칠 전에 배운 요리가 있는데. 카일이 좋아할 거야.” 

손목이 잘릴 만큼 결박당한 남자가 무슨 요리를 하겠다는 건지. 카일은 리를 냉철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리는 그 눈빛을 읽었고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분명 카일은 저를 조롱하고 있었다. 단 오 분 만에. 그에게 안겨 한 말이라곤 저급한 농담뿐이었는데 그 순간을 사랑했고 이렇게 시시한 방법으로 잡고 있으니 그가 코웃음을 칠만했다. 카일은 ‘최근 배운 요리’에 대해 속닥거리고 있는 리를 바라보았다. 

“아니. 약속이 있어서. 아쉬워서 어떡하지?” 

늘 그러하듯 카일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활짝 웃었다. 전혀 아쉬움 없는 얼굴로 차갑게 조소하고 있었다. 리는 심장이 묵직해졌다. 너무 무거워서 몸이 휘청거렸다. 당장 침대에 얼굴을 묻고 허리를 굽혀야 나을 통증이었다. 이렇게 일 분만. 아니 이 분만 견디면 카일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갉아먹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 * *

리의 요리는 별 볼일 없었다. 아주 싱겁거나 아주 간이 세거나. 약쟁이의 미각은 노숙자들도 뱉을 만큼 형편없었다. 요리도, 운전도, 그렇다고 잠자리도. 리는 모든 스킬에 미숙했고 본능에 의지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카일은 리를 버릴 수 없었다. 할 줄 아는 것은 짖는 것뿐인 리가 바깥세상에 버려진다면 이보다 더 고약한 취급을 받을 것이다.

카일은 B급 누아르보다 유치한 리의 납치 영상을 시청했다. 처음부터 예상했지만 그들이 리를 훔쳐 간 것은 높이 쳐줄만한 일이었다. 아델이 아닌 리를 훔쳐 간 것은 혈육보단 욕정이 우선인 자신을 잘 간파한 것이니까.

카일은 영상을 곱씹었다. 남자에게 머리채가 잡혀 허리를 떨고 있는 리를 보며 심장이 차갑게 굳어갔다. 리는 작은 입술로 ‘카일은 오지 않아. 괜한 짓 하지 마.’라며 독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덤비고 있었다. 

다섯이었나. 여섯이었나. 제 몫을 채우지 못하는 대가리가 많아 나열하기 애를 먹었지만 그들에게 유린당한 리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카일이 데리러 오지 않는다는 것을. 카일은 리와의 관계성이 짐작할 수도 없이 더러워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럼에도 정정하지 않은 것은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조금은 비겁한 마음으로. 그것이 아니면 자신이 마음을 기울일 곳이 없었다. 리를 찾아가 숨 냄새를 맡으며 잠을 청하고 계란껍질이 씹히는 오믈렛을 먹으며 일상을 나누는 일은 값어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집착적으로 일상 속에 끼워 넣어야 할 습관이었다. 

카일은 변화에 민감했고 예민했다. 사랑은 신경을 갉아먹을 정도로 치가 떨리는 감정싸움이었다. 리는 여전히 리로. 카일은 여전히 카일로 그렇게 온전했으면 했다. 리를 건든 남자들에게 당연스럽게 죽음을 선사했지만 이유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남창을 건드려서? 계약과 달라서? 단순히 그들이 건방져서? 

리의 허리를 우악스럽게 잡던 남자의 눈알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릴 적 바이올린 선생과 닮았다는 이유로 묻어두기로 했다. 그 이상을 생각하면 무너질 것 같았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첫눈에 반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리를 마주해야 할 것 같았다. 그만. 그만. 그만. 그렇게 신입의 얼굴을 날렸고 리가 분수대에서 떠올랐다.

리는 아름다웠다. 분수대에 떠오른 순간에도, 주삿바늘을 꼽고 앓고 있던 순간도. 투명한 얼굴에 땀방울이 한 방울 떨어지면 그것마저 싱그러워 보일 정도였다. 리는 장물아비의 몸종일 때부터 청량했다. 천막 안에서 태어난 출신치고 기품이 있었다. 타고난 우아함은 헝겊으로도 감출 수 없었다. 작품을 수집하고 예술에 몸을 담고 있던 카일조차 리를 보며 숭고함을 느꼈다. 

사랑이라면 평생 리에게 기울어져 있을 것이다. 리는 두 눈을 가득 차게 했고 향기로 매혹시켰고 목소리로 비로소 정신을 흐려지게 만들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거룩한 표현으로 다할 수 없어서 외면했다. 그를 무대에 세우지 않고 성당에 가두고 강간을 당하게 내버려 둔 것도 전부 ‘사랑’이 아닌 근거를 만들기 위한 발악이었다. 

초조함. 조마조마함. 조급함. 전부 나약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조롱하고 싶었다. 무차별적으로 폭언을 내뱉고 싶었다. 한 남자에게 10년의 연정을 바친 자신을 인정할 수 없어 부리는 패악이었다. 

* * *

리는 성당으로 돌아와 분주하게 요리를 시작했다. 손톱을 제외하곤 전부 찢어져 힘이 없었지만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리는 오븐 앞으로 걸어갔다. 

파스타 면이 오븐 아래에 꽉꽉 채워져 있었다. 1,000명이 맛보고도 남을 만큼. 

만약, 장물아비의 밑에 있었더라면 이마저도 훔쳤겠지만. 하루에 30인분이 넘는 요리를 하며 버리는 사치도 화분에 밑거름이 되는 쿠키들도 카일의 재력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녁 약속을 무참히 거절한 카일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합리화를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그에게 실망하지 않을만한 것들을 찾아다녔다.

‘카일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카일을 떠올리다 결국 태워버렸다. 연기가 폴폴 나는 파스타를 본 리는 화들짝 놀라 접시를 떨구었다. 불과 여섯 시간 전 항구에서 있던 일이 회상되었다. 퀴퀴한 드럼통 냄새, 사내들의 진한 땀 냄새 그리고 카일에 대한 고인 집착의 냄새.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왔는데 많이 놀랐습니까?” 

아델은 커다란 주방 장갑을 들고 주저앉아있는 리를 바라보았다. 리는 언제나 제 손보다 배로 큰 초록색 장갑을 끼고 멍하니 서있었다. 권투 선수 같은 장갑 사이로 가는 손목이 드러났다. 오븐은커녕 접시를 드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아... 아델… 반가워요. 오랜만이네요.” 

아델은 허겁지겁 접시를 주우려 하는 리를 저지시켰다. 아델은 재킷을 벗고 셔츠를 걷어 올렸다. 이곳에서의 모든 사고는 킴이 처리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 킴은 잘렸다. 정확히는 머리가. 연민이 느껴지지도, 죽은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델은 그저 카일의 눈빛으로 모든 것을 예측해야 했다. 오늘 카일은 아델을 향해 은근한 미소를 띠었다. 킴 대신 직책을 부여받아 영광을 누리라는 것인지 아니면 리의 독점을 누리라는 것인지. 

카일의 미소는 언제나 복합적이었다. 아델은 피로해 보이는 리를 앉혀야 했다. 

엎어진 파스타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리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오븐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찢긴 눈썹과 터진 입술, 그리고 얇은 반팔 티 사이로 울긋불긋한 상처들까지. 

특히 리가 걸을 때 아장아장 걷는 모습은 더 이상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당장 그의 다리를 벌려서 흉터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면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분명한 선이 존재함을 알면서도 위험한 생각을 단념할 수 없었다. 걱정이다. 이건 걱정이었다. 불우한 리가 몸을 간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동정이다.

“남은 파이가 있어요. 아델이 괜찮다면 같이 먹어줄래요?” 

리는 아프게 웃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는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힘겨워 보였다. 리는 붉은 소스가 튀어 있는 아델의 셔츠를 미안한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아델은 슬쩍 셔츠를 바라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의자에 앉았다. 옆에 있는 앞치마로 자국을 가리며 리를 안심시켰다. 리는 아프지 않게 웃었다.

“왜 그런지 물어보지 않아서 고마워요.” 

리는 작은 파이를 여덟 번 쪼개어 먹었다. 먹는 방법이라도 잊어버린 것처럼. 벽난로 옆 말라가는 선인장처럼 꾸벅꾸벅 시들어갔다.

아델은 리의 얼굴을 살폈다. 리와 눈이 마주쳤을 때 얼굴을 잡고 캐묻고 싶었다. 당장 리를 짓누른 사람들을 찾아 대가리에 총을 박고 싶었다. 그런 폭력성과 마주했을 때 아델은 카일의 아들임을 실감했다. 풋볼이 아니라면 이 정도의 승부욕은 생기지 않았다. 정정당당한 룰을 기반으로 한 열정과 달랐다. 이것은 한 사람을 위해 비정상적인 분노가 표출된 명백한 패역이었다. 

“브라우니가 말썽을 부렸나 봐요.” 

요리 수습을 하지 못했던 리를 떠올렸다. 며칠 치아바타에 도전하는가 싶더니 가장 안전한 브라우니에 몰두했다. 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터진 입술을 가리기 위해 상대를 배려하는 행동이었다.

아델은 리와 눈을 맞췄다. 리에게 흐르는 공기는 느릴 것 같았다. 리는 향기를 품어내는 기묘한 능력이 있었다. 아델은 리와 눈이 마주치면 목덜미가 서늘했고 코끝이 간질거렸다. 눈을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브라우니 기대할게요.” 

아델은 시선을 거두었다. 만약 오래도록 리를 바라본다면 같잖은 위로라도 해버릴 것 같았다. 선을 넘어 아이처럼 모든 사건을 파헤치고 싶을 것 같았다. 

리는 작은 인기척에 벌떡 일어났다. 식탁에 쥔 손이 얼얼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아델은 심장을 고르기도 전에 카일의 묵직한 향기에 뒤를 돌아야 했다. 아침처럼 코트 차림에 머리를 쓸어 넘긴 카일이 이곳으로 들어왔다. 마치 저녁식사에 늦은 아버지처럼 느긋한 얼굴로 찬바람과 함께 식탁에 합류했다. 

“역시 미안한 일이었어.” 

카일은 입꼬리를 깊게 파며 짙은 눈빛으로 웃었다. 리는 심장이 욱신거렸다. 몇 시간 전 매몰차게 버리고 돌아선 카일이 버젓이 식탁에 앉아있었다. 아델은 카일과 리를 바라보았다. 둘은 닮은 얼굴로 아델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카일은 친히 포크를 아델 앞에 놓아주며 자상한 아버지처럼 굴고 있었다. 마치 음식을 준비하는 새엄마를 도와주듯 다정한 손놀림이었다. 아델은 묵묵히 포크를 받아들고 요리하는 리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앞치마를 묶어 맨 리는 분주하게 치킨을 조각냈다. 카일은 아델에게 손짓하며 음식을 먹을 것을 권유했다. 

샐러드와 파이뿐인 식탁이었지만 갑자기 휑하게 느껴지는 것은 오지 않은 고기 때문일 것이다. 아델은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아델과 리. 따뜻함이 가득했던 공기에 카일의 찬바람이 들어와 온몸이 찢길 듯 쓰라렸다. 

리는 카일을 향해 수줍게 웃었다. 카일은 리의 허리를 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리는 아델의 눈치를 보며 카일의 어깨를 밀었지만 행동과 달리 리의 눈빛은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마치 아델이 없었더라면 당장 안길 것처럼 카일이 간절해 보였다. 

열흘 만에 만난 주인이라도 쫓아가듯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리의 하얀 얼굴은 어느새 노을빛에 물든 듯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델은 카일과 맞닿아 변한 리의 온도 변화에 씁쓸함을 느꼈다. 심장이 조금 저릿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리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하얀 목에 선명한 흉터 자국들이 신경 쓰였다. 그가 카일을 보며 미소 지을 때보다.

오믈렛이 타고 있었다. 천장으로 희뿌연 연기가 차오르고 리는 얇은 기침을 터뜨렸다. 카일은 신문을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갔다. 리의 요리시간에 카일이 신문을 보는 것은 꽤 익숙한 행위 같았다. 빵을 들고 식사를 기다리는 아델과 요리하는 리. 그리고 신문을 보는 카일까지. 마치 고전적 가정상을 재현하듯 카일은 열정적이었다. 

“오늘도 계란껍질 넣어줄 거야?” 

카일은 리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뒤통수와 함께 가라앉는 리의 어깨가 유난히 작아보였다.

“왜? 넣어줘? 그런 식성인 줄 몰랐는데.” 

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정말 기쁠 땐 어떻게 웃어요?]

리의 쓰디쓴 미소를 보며 아델이 한때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 아델은 멈춰야 함을 알면서도 그를 파헤치고 싶었다. 

[몰라요. 요즘 기쁠 일이 없어서 그런가…]

리의 대답과 달리 지금 아주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진실로 기쁜 상태. 아델은 고개를 숙이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카일은 작은 쇳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아델과 눈을 맞췄다. 포크의 마찰음이 찰나의 총알 소리로 둔갑했다. 

“멋진 식사시간이야 아델. 그렇지?” 

정학을 당한 사춘기 소년을 회유하는 듯. 그렇다면 리는. 나를 설레게 하는 리는 무엇이지? 활짝 웃고 있는 시원한 입매와 달리 단호한 그의 눈빛을 보며 아델은 시큰함을 느꼈다. 

이제 와서 어머니라도 구해주려는 건지. 카일의 비정상적인 소꿉놀이에 불쾌함이 들었다.

‘게이 부부의 편견 가득한 식사시간 같네요.’ 

아델은 숨통이 조여 오는 듯한 텁텁함을 느꼈다. 카일이 아무리 제 아비라 한들 그는 결코 혈육 같지 않았다. 카일의 몸에, 자신의 몸에 같은 피가 흐른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불편한 상사, 아주 멋진 옆집 남자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았다. 갑자기 다가온 카일의 가계도는 외면한 세월만큼 이질적이었다. 

“네. 빵이 맛있네요.” 

아델은 건조한 목소리로 빵을 눌렀다. 카일은 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러고 있으면 요리 못해. 굶어 죽고 싶어?” 

날카로운 리의 목소리와 달리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아델은 쓸쓸했다. 쓰디쓴 감정이 한순간에 몰려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리는 무척이나 살고 싶어 보였다. 소꿉놀이를 하는 카일에게 흠뻑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아델은 희끄무레한 자신의 눈동자와 닮아있는 카일과 눈을 맞췄다. 이제 더 이상 그가 마피아로서의 두려움은 없었다. 제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제니는 내가 널 보러 오길 원했지. 죽기 직전까지. 미안하지만 난 네가 궁금하지 않았어.]

카일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연을 끊어버리는 상황을 회상했다. 늦은 시간에 리를 찾아와 다정한 연기를 펼치는 건 리의 소유권 주장이었다. 

리의 간지러운 웃음소리가 아델의 귓바퀴에 돌았다. 솜털들이 쭈뼛 서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리는 뜨겁고 차갑고 감당할 수 없었다. 제자리에 서있는 리에게 온갖 정서를 부여하며 독백하는 꼴이 무척이나 우스웠다. 아델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 허망한 웃음과 함께 리의 요리가 완성되었다. 루꼴라를 아무렇게나 찢어 넣은 오믈렛과 어울리지 않는 블루베리까지 그는 요리에 재능이 없었다.

카일은 가장 못생긴 부분을 잘라 접시로 가져갔다. 아델에겐 예쁘게 잘려진 부분을 덜어 주었다. 리는 카일의 접시에 포크를 대고 깔짝거렸다. 서로의 접시가 공유되는 순간이었다. 아델의 마음은 아득히 멀어졌다.

“나는 아델이 시인이 되길 원해. 그것도 아니면 약에 절은 고독한 철학자도 나쁘지 않지.” 

카일은 리를 바라보았다. 오늘 식탁의 주제는 ‘아델의 진로’였다. 카일은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리를 바라보았다. 

‘작정했군. 리는 나의 엄마가 아니야.’ 

아델은 주머니 속 총구를 쓰다듬었다. 언젠가는 이 총이 주인을 찾아갈 날이 오길 소망했다.

‘쟨 당신을 닮아 마피아나 하겠지.’ 

리는 카일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대상이 아델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카일이 씨를 뿌린 세포들이 아델 하나겠냐마는, 어쨌건 리에게 아델은 특별했다. 

여느 카일의 자식들처럼 비아냥대며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카일에게 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자신을 찾아온 모양인데 한참이나 틀려먹었다. 차라리 킴을 협박하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카일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안다면 집을 부수는 도전 따위는 삼갈 테니까. 

리는 아델에게 만큼은 폭언을 내던지고 싶지 않았다. 카일의 아들 중 -밝혀진 자녀들 중엔- 가장 진솔한 편이었다. 아델은 함부로 타인의 눈을 읽으며 캐묻는 버릇이 없었다. 그럴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가 적어도 카일보단 따뜻한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을 향한 무한한 친절, 그리고 그 속에 느껴지는 숱한 욕망들.  

리는 아직까지 사람을 대하는 일에 서툴렀다. 상대하는 일엔 폭언과 응석, 그리고 주먹이 먼저 나가곤 했으니까. 십 년 내리 이 성당에 갇혀 떠돌이의 고해성사나 구경하는 처지에 사회성이 길러질 리가 없었다. 그런 리는 아델에게 브라우니에 초코칩을 배로 박아준다거나 건포도가 싫다면 모카빵을 전부 버릴 정도로 위해주고 싶었다. 아델은 친절했고 순수했고 카일과 자신과 달랐으니까. 그렇게 리는 아델이 카일과 닮지 않길 바랐다. 소름 끼칠 정도로 외형이 닮은 두 사람이 속마저 겹쳐지지 않길 바랐다.

“기대에 부흥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아델은 고개를 숙이고 일어섰다. 리는 적당한 칭찬 거리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그리고 아델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리는 우물쭈물 거리며 아델을 바라보았다. 아델이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포크를 내려놓았을 때 공기가 얼어붙었다. 

‘아델은 친절해. 상냥해. 계속 보고 싶어.’

계산 없는 칭찬을 던졌어야 옳았는데. 시간은 야속했고 리의 후회는 막심했다. 아델은 카일에게 고개를 숙이고 성당을 나섰다. 리는 쓸쓸한 아델의 자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은 그런 리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관찰했다.

“아델은 할 짓이 없나보군.”

리는 과격한 그의 표현에 인상을 찌푸렸다.

“할 짓이라뇨. 내가 오라고 했어요. 같이 저녁 먹고 싶어서.”

거짓말을 내뱉었다. 

“카일이 안 먹어주니까.”

리는 냉기가 흐르는 카일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콧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카일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이 선명하게 굳어 있었다. 

카일은 밤이 다 되어가는 늦은 저녁, 리를 향한 아델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다. 퇴근 후 아델의 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델의 창엔 어둠만이 깔려 있었다. 투명한 커튼 사이로 리를 소중히 껴안고 있는 망상이 들었을 때 리의 집으로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해야 할 일이 투성이었다. 근 일주일 동안 아무것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감정을 써 내려가는 일도 인간관계와 비슷했다. 노력한다고, 시간이 많이 주어진다고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과의 합의를 보던 중이었다. 머리가 맑아지고 어깨에 힘이 풀릴 때까지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마침내 어둠만이 자욱한 밤. 그럴듯한 영감이 떠올랐지만 아델 방의 꺼진 전등을 보는 순간 전부가 소진되었다. 

아델이 그곳에서 리를 끌어안는 상상을 했다. 아델은 저의 아들답지 않게 우직한 면이 있었다. 고전을 쫓으며 클래식에 뽕이 맞아있는 아이도 아니었고 방안 한가득 노래를 틀어놓고 분위기를 잡을 성격도 아니었다. 젊었을 때의 자신과 너무도 달랐다. 제니에게 들은 사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델은 유년기부터 최근까지 운동선수였다. 카일은 스쳐 지나친 상대방의 신상을 되도록이면 무의식 속에 저장해 두는 편이었다. 아델은 성실한 땀으로 이루어진 쿼터백이었고. 아버지의 철학에 못 이겨 예술의 길로 틀은 불운의 선수였다. 아델의 꿈을 거세했다. 카일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열정과 성실, 정의로운 제 아들의 미래를 거세한 것이라고. 아델이 제게 온 이상 더 이상 자랄 수 없었다. 꿈을 좇을 수도 이대로 포기할 수도. 살생이 두려워 떨고 있을 자격조차 박탈당한 것이 아델에게 놓인 현실이었다. 

말수가 적었고 진중한 편이었다. 깊은 고뇌에 젖을 때가 많았지만 그중에 일부는 ‘리’에 대한 걱정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보니 일부가 아닌 전부 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 혈액 속에 리가 돌듯이. 아델의 세포는 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리를 떠올리며 자위를 하고 잠자리에서 뒤척였을 것이다. 리를 쫓는 아델의 눈빛이 아파서 죽을 것처럼 처연하게 느껴졌으니. 넘어진 아이처럼 리의 손길만을 기다리며 밤을 지새울 것이다. 자신과 리의 섹스를 저주하며 울분을 토할 것이다. 아델은 그렇게 하염없이 죽어갈 것이다. 그런 아델은 밤에 리를 찾아갔을 테고….

이런 생각들로 카일은 두 어깨가 뭉친 듯한 뻐근함을 느꼈다. 리에게 안마라도 부탁해볼 생각이었다. 이렇게까지 아델을 골려줄 의도는 없었지만. 아델의 몽정을 방해하고 싶은 느낌이었다. 이미 아델은 저의 머리를 몇 번이나 쏘고 싶었을 테니. 

“아델이 여길 왜 찾아온 거지?” 

“몰라. 당신은 이해 못 해.” 

리는 포크를 내려놓고 카일의 두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 눈빛이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필요할 때만 오는 당신이랑은 달라. 아델은 달라요.” 

리는 카일의 볼에 입을 맞췄다. 달콤한 파이 향이 느껴졌다. 카일은 리의 아랫입술을 집어삼켰다.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의 입술이 터져 비릿한 맛이 흘러나왔고 카일은 당장 리를 눕히고 싶었다. 아델이 이 장면을 지켜보길 원했다. 아버지의 남자를 건드리지 마. 아버지의 남자에 발정하지 마. 

“카일은 무정하니까.”

기다란 타액이 늘어졌다. 살벌한 말과는 달리 리의 손길과 눈빛엔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아델의 엔진 소리가 들리고 카일은 입을 맞췄다. 나무를 박는 소리, 핸들을 꺾는 소리, 아델의 분노 섞인 심장소리까지. 전부가 짜릿했다. 

“어디서 그런 아들을 낳았어? 당신이 키우지 않아서 정상적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사실 내 아들이 아니라면 어때.” 

리는 서랍을 뒤적거렸다. 

“음… 이 아이는 어떻게 자랐길래 이렇게 착하지? 라고 생각하겠죠?”

묵묵히 볼펜 뚜껑을 찾았다. 

파란 볼펜을 열고 카일의 손바닥에 낙서를 시작했다. 카일은 간지러운 듯 리의 손목을 부드럽게 당겼다. 주욱. 카일의 손바닥 위 하트가 찌그러졌다. 겨우 이런 것에도 서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리는 뾰로통한 입술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똑같이 생겼어. 당신도 느껴? 아델을 볼 때마다 못된 카일이 떠올라.”

“나에게서 아델이 떠오르지는 않고?”

“응. 대부분은.”

“다행이군.” 

카일은 다시 알 수 없는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두 부자는 혼자만의 생각을 던져놓고 의문을 품게 하는 몹쓸 버릇까지 닮아 있었다. 아마 데칼코마니로 찍어본다면 짙은 블루가 번질 것이다. 

카일은 샤워를 마치고 리에게 다가왔다. 리는 밀린 집안일을 시작했다. 킴이 죽었으니 하찮은 심부름은 전부 자신의 몫이었다. 

리는 책상에 있는 아델의 서류들을 정리했다. 노트북이 있었지만 아델에겐 왠지 연필부터 쥐여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종이와 펜 그리고 생각을 써 내려가는 것이 모두 생소해 보이는 남자였다.

리는 카일이 시선을 둔 종이를 구겼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왠지 카일이 전부를 뒤질 것 같아서.

To. 리.


당신의 이름을 써 내려갈 때면 신선한 기분을 느껴져요. 설렌다. 신선하다.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왠지 에일리언, 뱀파이어 이런 것들을 떠올릴까 봐 겁나네요.


메일도 종이도 한결같이 나를 긴장되게 만들어요. 


연필의 소리와 빳빳한 재질이 어색할 뿐이에요. 당신 집 종이들은 물기가 말라 울퉁불퉁하거든요. 물론 종이의 재질을 따지려던 것은 아닙니다.


리의 이름은…… 아름다워요. 그뿐입니다.


ps. 언제 찾아갈지 모르는 아델.

리는 자신이 한심했다. 겨우 카일의 질투 따위를 바라고 있었다. 아델은 건재하고 건강한 정신을 가진 소년이었고 자신은 약쟁이었을 뿐인데. 카일과의 관계의 진전을 위해 쓸데없는 상상을 한 자신이 우스웠다. 

‘그럴 리가 없지.’ 

리는 카일의 옷을 정리했다. 오늘따라 그가 뭉그적거리는 모양새가 설레면서 불안했다. 저녁을 먹고 미련 없이 일어서는 뒷모습과 벽난로의 불을 피워주는 친절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카일이 침실까지 들어오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델도 들어왔나?” 

카일은 뻣뻣한 이불을 만졌다. 아델이 물기 먹은 종이라고 한 것은 은유적인 긴장의 표현이 아니었다. 이곳은 해가 잘 들지 않았고 습기가 가득 차 꿉꿉한 냄새가 났다. 리는 매일 창문을 열고 햇볕에 방을 태워야 했다. 그래서 리의 이불에선 햇살 냄새가 났다.

“아델이 여길 왜 들어와?” 

카일은 예리한 눈초리로 리를 대면했다. 리는 평소처럼 결백한 얼굴이었다. 들켰다는 불안함도 카일이 눈치챌까 조급해 하는 엉망인 표정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아델이 왜 들어오냐는 궁금한 얼굴이었다. 

굳은 얼굴 근육으로써 결백을 표현하고 있었다. 카일은 다시 한 번 심장이 경직되는 기분이 들었다. 리의 긴장이 풀어질수록 카일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카일은 리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리곤 리의 베개를 멀리 던져버렸다. 리는 카일이 새벽에 떠남을 알면서도 그의 베개를 준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신 팔 베고 자라고? 이상한 영화 봤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는 카일의 품을 파고들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베개를 줍기엔 팔이 저렸고 다시 불을 켜기엔 수고스러웠다.

“어떤 영화에 이런 로맨틱이 나오지?”

리는 그의 허리를 쓸었다. 이상하리만큼 성당에 있으면 숭고해지는 기분이었다. 카일의 분수대와 서재. 그리고 온갖 난교가 난무한 더러운 그곳과는 달랐다. 리의 온전한 공간에 있을 때 카일은 신성했다. 

“이런 거 원하던 거 아니었어? 의외군.” 

카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 리는, 

“좋아, 좋아요.” 

라며 십 년 전의 미숙한 소년처럼 안겨왔다. 

카일에겐 영원히 리가 미숙한 소년으로 느껴질 것이다. 성숙해지지 않는 리는 비극이자 포르노였다. 카일은 영원히 자신보다 어린 연인을 두고 있었다. 스물여덟 어엿한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아이 같았다. 첫눈에 들어왔던 그 순간처럼. 

“의외 아니야. 이런 거라면 전부 원해. 카일이 날 사랑하지 않아서 헷갈리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이 해주는 건 전부 좋아.” 

리는 담담한 고백을 던졌다. 카일은 리를 등지고 웃음을 지었다. 

“아델을 보니까 알겠더라고. 아델은 친절하고 상냥해. 선인장한테도 잘해줄 것 같은 남자야. 그리고 난 당신이 왜 날 원하지 않는지 깨달았지.”

“고민의 답은?”

“내가 당신한테 해줄 수 없는 게 뭘까. 답은 간단했어. 아들이 갖고 싶던 거지?”

다른 사람이 아닌 다른 여자였다. 카일은 여자를 원했고 정확히는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생명의 잉태란 신성했고 잔인했다. 남자인 자신이 해줄 수 없는 것이었고 카일은 그렇기에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 아델을 향한 섬세한 행동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과 닮은 아들을 낳고 싶었는지 쓰린 짐작을 해야 했다.

역시 카일에게 자신은 성별부터 거부당했던 것이 분명했다. 카일은 쓸쓸한 웃음을 짓는 리를 바라보았다. 

“아델을 갖고 싶던 거지.”

리의 심장에 손을 올렸다. 여전히 그날처럼 뛰고 있었다. 카일은 안심했다. 리의 두서없는 고백에도 마음이 아득해졌다. 오늘 하루를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아델이 생각나지 않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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