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3/10)

Chapter 2 

“좋은 임무를 줄게.” 

카일의 입매에 곡선이 그려졌다. 짙은 고동색 커튼과 색색의 조명들. 빼곡한 의자와 윤기가 나는 테이블이 조명에 반사되었다. 곡선을 그리는 무대 디자인 아래엔 사치스러운 금색의 조형물들이 한껏 빛을 냈다. 지하엔 갈비뼈를 드러낸 소년들이 다리를 찢고 있을 터였다.

“네.” 

아델은 그와의 호칭을 고민했다. 해저든 씨. 미스터 해저든. 카일, 대표님. 전부 ‘아버지’보다 흉측하게 느껴졌다. 

카일은 종이 뭉치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빼곡한 계단 위로 펼쳐진 레드 카펫 위로 가슴을 가린 무용수들이 저마다 포즈를 취하며 워킹을 시작했다. 머리 위론 거대한 장맛비를 홀딱 맞은 듯 위태로워 보였으며 갈비뼈가 무사했던 그들의 발목은 벽돌로 빻은 듯 휘청거렸다. 

펑펑 불꽃의 효과음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났다. 카일의 얼굴에 붉은빛이 반사되었다. 코끝을 타고 흘러내린 조명이 번쩍거렸다. 금색의 커튼 아래로 하나둘씩 쓰러진 남자들은 카일의 손짓에 맞춰 몸을 일으켰다.

“내 감각은 진부해. 이젠.” 

카일은 초콜릿색 소파에 기대앉아 불을 붙였다. 아델은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자리 잡힌 검은 줄을 바라보았다. 반지의 자국. 그것은 리의 손가락에 남아있던 자국과 흡사했다. 아니, 정확히 같은 디자인이었다. 

[타투에요.]

리는 약지 손가락의 검은 줄에 눈을 떼지 못하는 아델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카일이 총을 잡을 때 반지가 신경 쓰이더라고요. 그래서 타투를 하자고 했어요, 내가. 지금은 번져서 엉망이지만.]

[하지만 내가 총을 잡아보니까 변명이었더라고….]

아델은 그때 아이처럼 울고 싶었다. 아델은 재빨리 잔을 들어 슬픈 입매를 감추었었다. 하마터면 리에게 놀라움과 서운함. 그리고 알 수 없는 패배감이 분명한 얼굴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창피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카일의 손가락에서 아델의 눈물처럼 빛이 났다. 아델은 다시 잔을 들어 표정을 숨겨야 했다. 반항도 의기소침한 태도도 아니었다. 아델은 자신이 살아온 분야와 동떨어진 카일의 부탁이 불가능하다 여겼다. 

아델은 축구 주장이었으며 문학 시간에는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창문을 바라보며 교사의 목소리에 맞춰 공을 쥐는 상상을 했다. 튕기고 던지고 공격하고 수비하고 그렇게 교사의 높낮이에 맞춰 두들기다 보면 어느새 종이 울렸다.

“단순한 글이 아니야. 난 너의 감정을 알고 싶을 뿐이야.” 

“한 달 뒤에. 정확히 오늘 이 무대에서 쓰일 대본을 만들어 보도록 해. 주제는 없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전부 너에게 달렸지.”

아델은 카일이 나갈 때까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카일의 구두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생각에 잠겼다.

오늘 킴은 출장이었다. 예측하기론 판권에 대한 문제였을 것이다. 킴은 매니저이자 변호사였다. 아델은 그제서야 깐족거리는 킴을 카일이 살려두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입을 잘 털거나, 아래를 잘 털거나. 둘 중 하나라도 날 만족시킨다면 목숨줄은 보장할게.]

카일은 늘 신입이 들어오면 같은 말을 반복하곤 했다. 킴은 입을 잘 털었고, 자신은 아들이었고. 그렇다면 리는? 

아델은 쓴웃음을 지었다. 입안 가득 사탕을 물고 있었지만 어쩐지 텁텁한 맛을 감출 수 없었다. 카일은 아델에게 차 한 대를 주었다. 매일 밤 디브이디를 보며 친구와 허풍을 떨었던 그 차종이었다. 미국엔 10대가 전부라더니. 그 중 한 대가 카일에게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승차감은 끝내주게 좋았고 차 위의 작은 자수까지 완벽했다. 

리의 얇고 작은 손가락으로 한 땀 한 땀 만들었을 프랑스 자수였다. 아델은 조심스럽게 자수를 쥐었다. 그리고 제 심장으로 가져가 한껏 품어보았다. 이렇게라도 리와 닿을 수만 있다면. 

아델은 10분 만에 저택에 도착했다. 어찌 운전을 해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오로지 리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달려왔다. 

리는 오늘도 얼굴에 밀가루를 묻히고 열중이었다. 앞치마가 매일 바뀌는 것으로 보아 그의 하루 일과는 앞치마 세탁인 듯 보였다. 오늘은 어제보단 건강한 얼굴이었다. 아마 카일이 다녀간 이후겠지. 리의 표정이 밝아질 때면 카일의 귀가가 늦어지는 날이었다. 더욱이 어제는 카일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리의 기가 채워지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아델은 킴의 할 일을 대신했다. 술병을 치우고 약을 한곳에 모아두고 이름을 적어놓았다. 리의 웃는 얼굴은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상큼하게 느껴졌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 투정 섞인 목소리가 나오곤 했다. 

“좋은 일 있나 봐요?”  

굵고 낮은 아델의 목소리에 약간의 신경질이 묻어나는 것은 리의 착각이 아니었다.

“그런 건 없어요. 브라우니가 쉬웠을 뿐이고 오늘의 초콜릿 칩은 완벽하게 달콤할 뿐이죠.” 

리는 활짝 웃었다. 리는 감추는 데는 재능이 없는 편이었지만 약점을 숨기는 것엔 습관이 돼버린 것 같았다.

첫날 킴과의 다툼 이후 리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를테면 카일의 행방을 묻는다거나, 카일의 스케줄, 카일과 관계된 일에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것은 순전히 오래된 킴과의 관계에서 오는 분노였으니 굳이 아델에게까지 히스테릭을 부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전부 드시는 건가요?”

아델은 하얀 반팔 사이로 튀어나온 앙상한 리의 팔목을 바라보았다. 리는 식욕도 식탐도 없어보였다. 

“그냥 버려요. 요리를 하는 행위를 즐기는 거지 먹는 것에 흥미가 있진 않아서요.” 

“그럼 절 주세요. 배가 좀 고프던 참이거든요.”

아델은 커다란 접시에 담긴 브라우니를 집어 들었다. 리의 얼굴이 아름답게 펴지면서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카일의 부하들은 요리를 하는 리를 보며 미친 남자 취급을 했다. 이젠 하다 하다 주방에 눌어붙어 사는 것이냐며 오븐에 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동양식 가치관에 익숙한 남자들이었으니 무지함은 당연했을 것이다. 

리는 카일의 부하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여기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천박하고 교양 없고 심지어 미쳐버리기까지 한 호모였다. 

‘사모님’, ‘전용창부’라고 폄하하는 것도 전부 알고 있었다. 카일은 작가였고, 예술가였고, 그들의 우상이었다.

그러나 아델은 달랐다. 오로지 아델과 있을 때 리는 제가 인간임을 실감했다. 

“맛있어요?” 

전부 버린다는 리의 단호한 말과 달리 장갑 안의 손은 평가를 바라듯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아델은 망설임 없이 끄덕거렸다. 혹시 리가 보지 못할까 아주 강하게 미소를 지었다. 리의 얼굴에 환한 빛이 돌았다. 

“카일은 좋아하지 않아요. 캐러멜도 초코도, 크림도 전부 지방 덩어리라고 멀리하죠. 카일과 둘이 있으면 먹을 음식이 없어요. 그는 튀긴 것도 단것도 전부 먹지 않으니까요.” 

아델은 오늘 리의 버릇 하나를 발견했다. 모든 문맥에 카일을 엮는다는 점이었다. ‘카일은’,  ‘카일이’, ‘그는’. 이제는 카일의 이름을 부르지 않더라도 모두 그와 연관되어 있음을 아델은 눈치챌 수 있었다. 리가 아는 사람은 카일과 킴, 그리고 자신이 전부일 테니까. 그중에서 리의 인생에 끼워 넣고 싶은 사람은 카일이 유일해 보였다. 아델은 리의 입에서 카일이 나오지 않길 기다렸다. 리와의 대화가 지루할 땐 언제나 ‘카일’이 중심이 되곤 했다. 

“글을 써야 해요. 대본을 만들어야 하죠.” 

아델은 주제를 바꿨다. 

아델은 킴에게 리에 대한 몇 가지 힌트를 얻었다. 리는 무용단에 들어온 지 3개월을 넘기기도 전 무용수 자격을 박탈당했다.

오른쪽 다리를 부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리는 카일의 옆에 붙어 대본만을 집필했으며 카일과의 호흡이 좋아 인기가 상당했었다. 대중성보다는 특유의 분위기 설정이 여운을 남게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델은 리의 도움을 받아볼 생각이었다. 아델은 리의 앞에 노트북을 내려놓고 브라우니 하나를 들었다. 리에게선 여전히 달콤한 냄새가 흘렀다.

“음…. 카일의 뮤즈가 된 건가요?” 

리는 아델을 향해 착잡한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뮤즈’라는 단어를 뱉은 리는 서러움에 몸부림쳤다. 아델은 창백해진 리를 바라보며 서둘러 손을 저었다. 

‘사모님’이기 전에 리는 카일의 뮤즈였다. 그의 부하들은 늘, 

[이 캐릭터 리 아니야? 보랏빛 구름, 보랏빛 바다, 보랏빛 노을, 관마저 전부 보라색이잖아.]

라고 리를 놀리곤 했다. 

[리! 네 이름 보라색으로 바꿀 생각 없어? 그럼 우리 인생이 좀 더 재밌어질 것 같은데 말이야.]

부하들은 카일의 감시가 뜸한 틈을 타 조롱을 시작했다. 유일하게 카일의 신임을 얻은 리를 시기하는 것이었지만 수치스러움에 이를 갈고 덤비는 리의 모습 또한 중독성 있었다. 

[소년, 청년, 중년, 노인의 사랑 전부 리로 묘사되고 있어. 리를 죽일 생각이었는데 그를 죽이면 카일도 절필이겠군.]

부하는 쓰디쓴 한숨을 내쉬었다.

리는 옛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욱신거렸다. 아델은 떨리는 리의 손을 부드럽게 쥐고 눈을 맞추기 시작했다. 다른 이야기로 넘겨야 리의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왜… 저한테 배우려고 하시는 거죠?”

“운동을 했어요. 어머니는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땀 흘리는 모습이라고 하셨죠. 경기장 밖에서 보아도 실루엣만으로 마음이 가야 된다고 하셨어요. 등과 목선은 어깨의 넓이가 결정한다고 하셨죠. 그래서 글과 친하지 않아요. 너무 변명처럼 들리나요?” 

전부 사실이었다. 아델의 어머니는 아델이 7살이 되던 해 1미터 밖에서 봐도, 정확히는 농구 관객석에서 봐도 환심을 사야 한다고 강조했다. 카일에게 반한 그녀는 중년이 될 때까지 그를 잊지 못했고 그 집착은 고스란히 아델에게 향했다. 

카일처럼, 아버지처럼. 제니는 아델에게서 카일을 쫓았다. 아델은 그래서인지 얼굴도 모르는 카일이 궁금했다. 아버지이기 전에 같은 남자로서. 

“손 모양을 보니 알겠어요.” 

리는 글과 친하지 않은, 친해질 수 없이 바빴던 아델의 몸을 이해한다는 듯 끄덕거렸다. 

“공을 잡은 사람의 손이에요.”

리는 하얗지만 굳은살이 박인 아델의 손을 바라보았다. 카일과 같았다. 

카일과 많이 닮은 남자. 아델은 손마저도 카일의 그림자 같았다. 이 부분이 거칠었고, 이 부분은 깨끗했지. 리는 아델의 손을 보며 사색에 잠겼다.

“리가 도와주었으면 해요.” 

리는 흠칫 놀라 아델에게서 멀어졌다. 

“다신 글을 쓰지 않을 거예요.” 

2년 전 리는 절필했다. 취미로 쓰던 행위조차 멈추었다. 성당에 갇혀 일상마저 제한받은 이후로 끊어진 경력이었다. 이곳에 갇힌 후 연필과 키보드는 전부 창고에 박아놓았다. 그에 흥미 없는 베이킹에 취미를 붙이려고 무던히 노력하던 참이었다.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어요. 아마 못할 거예요. 제가 아닌 다른…….” 

아델이 리에게 다가섰다. 눈빛이 호소력 있게 느껴졌다. 이마저도 문장을 풀어쓰는 뇌를 보며 리는 절망했다. 카일이 알려준 수업 방식이었다. 상대를 바라보며 글로 풀어 생각하는 학습. 

‘아델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약해졌다. 그럼에도 난 그를 거절할 힘을 찾지 못했다.’ 

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카일이 제게 남긴 모든 것은 좌절로 다가왔다. 

[네가 말한 직업병이 이거야? 정신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흔든 머리가 비로소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연필을 쥐는 것조차 멋있지 않을 거예요. 전부 리가 알려줘요.” 

“키보드가 있잖아요.” 

리는 아델을 보고 웃었다. ‘햇살’, ‘소생’, ‘봄’, ‘아침’. 아델에게 스쳐가는 단어를 손으로 휘감았다.

아델은 리의 방안으로 들어섰다. 성당은 넓고 고요하고 차가웠다. 적막은 고독했다. 신성한 곳에 종교적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허울 좋은 감옥에 불과했다. 

“슬리퍼를 신는 게 좋을 거예요. 남들은 결벽증이라고 하지만, 핏물로 뒤덮인 신발을 보고 싶지 않다면 유념하는 게 좋을걸요?”

리는 바닥에 묻은 굳어버린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피를 묻히고 다니는 카일 덕분에 이곳은 늘 전쟁터였다. 

리는 아델의 값비싸 보이는 신발을 보며 파란 슬리퍼를 건넸다. 카일이 언제 불시에 이곳을 전쟁터로 만들지 모르는 일이었다. 피가 잔뜩 묻은 옷으로 하얀 침대에 누워 트랙 1번을 틀을 것이다. 그러면 리는 그의 신발을 벗기고 옷을 벗겨 세탁기에 넣고 화가 난 듯 걸어갈 것이었다. 아델은 16초 간격으로 다른 생각에 잠기는 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사색에 잠길 때면 눈동자에 힘이 풀리고 보랏빛이 짙은 파란색을 띠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멀미 날 것 같아.’ 

아델은 미숙한 킴의 운전 솜씨를 떠올렸다. 리와 함께 있으면 늘 뱃속이 울렁거렸다. 

“일단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수 있어요. 미리 말했지만 정석적인 수업을 원한다면 다른 선생을 알아봐 줄게요.” 

리의 걱정스러운 충고에도 아델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리의 방을 살펴보았다. 알 수 없는 인테리어와 다채로운 색감이 얽혀 있었다. 

리는 종이 한 장을 소리 나게 찢었다. 흰 종이는 비뚤비뚤하게 찢겼다. 그 모습에 아델은 그도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동질감이 들었다. 차가운 리는 언제나 밀가루를 바르고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하얀 종이와 하얀 밀가루. 그리고 리의 창백한 얼굴. 

리가 사용하는 단어는 빈민가 그 자체였지만, 억양과 제스처는 그렇지 않았다. 여유롭다 못해 고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리의 분위기와 어울려 거북하지 않았다. 아마 카일에게 배운 습관이겠지만. 가증스럽지 않았다. 

“시즌이 봄인가요?” 

타깃을 설정하고 마케팅 포인트를 잡아야 했다. 카일은 예술가이기 전에 사업가였으므로 떠오르는 영감을 닥치는 대로 집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소비자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였다. 카일은 유능한 사업가였다. 카일의 주문대로 ‘겨울’에 맞게 캐스팅을 해야 했지만 아델은 리와 닮은 여름을 고집하고 싶었다. 

“겨울이요.” 

카일의 두꺼워진 코트 자락만큼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었다. 리의 보라색 눈동자와 여름 냄새. 그에게서 어떤 연유로 여름이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피아들의 총 부림 잔치에 광대를 세우는 일일뿐인데 아델은 사뭇 진지해졌다. 카일에게 첫 명령을 받던 날보다 더욱 완벽한 작품을 탄생시키고 싶다는 의욕이 샘솟았다. 

리는 아델의 옆에 다가와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리는 쉽사리 중심을 잡지 못했다. 마치 자갈밭에 세워 둔 의자처럼 삐걱거렸고 중력을 잃은 듯 붕 뜬 것 같았다. 아델은 그의 의자 위에 커다란 손바닥을 올려 중심을 맞춰주었다. 리의 허벅지에 스친 손이 달아올랐다. 

리의 살림살이는 대부분 미적인 요소가 강했다. 불편하게 고개를 숙여야 할 만큼 실용성이 뛰어나지 않은 낡은 협탁이 많았다. 추운 나라는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므로 인테리어가 발전했듯이 성당에 갇힌 리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아델은 고개를 숙이고 리의 옆선을 바라보았다. 리는 입술을 앙 다물고 연필을 쥐고 있었다. 커다란 종이 위에 작은 글씨로 ‘아델’이라고 적었다. 리의 앞섶이 기울어질 때 아델은 고개를 돌렸다. 코에 빨간 기운이 몰려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아무렇게나 엉켜있는 장작더미를 보며 얼굴을 식혔다. 

“키보드는 익숙하지 않아서요.” 

리는 어깨를 들어 올렸다. 아델과 달리 평온한 얼굴이었다.

“전 연필도 익숙하지 않아요.” 

아델이 미소 지었다. 카일의 입매와 닮아있었다. 리는 장작에 시선을 두었다. 슬픔이 가라앉길 바랐다. 

아델은 밤새 생각해 본 스토리와 주인공을 털어놓았다. 그는 귀를 붉히며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뱉어내야 했다. 아델의 엉성한 스토리에도 리는 진지한 기색으로 임했다.

“메인으로 누굴 세워야 할까요?” 

아델은 이른 아침 명단을 둘러보았다. 킴이 준 포트폴리오를 보며 연습실까지 방문했지만 쉽사리 와닿는 주인공은 없었다. 재구성이 빠를 것 같았다. 황무지 같은 벌판에 아이디어를 던지기란 쉽지 않았다. 캐스팅부터 대본 연출까지 전부를 소화하기엔 아델은 흥미도, 무엇보다 잘 해낼 열정도 없었다. 카일의 후계자 테스트라는 사명 하에 받아들인 일이었다. 그러나 아델은 리를 만나고 그의 연필 소리와 밀가루 반죽 그리고 여름 같은 뜨거움에 모든 것이 의미 있어졌다. 

“당신이 골라주었으면 해요.” 

아델은 리에게 속삭였다. 리의 연필 끝이 멈춰 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아델과 눈을 맞추었다. 카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 * *

리는 아델이 떠나고 텅 빈 공간을 둘러보았다. 카일의 공백에 익숙할 대로 무뎌진 고통이었지만 아델은 달랐다. 킴도, 그동안의 사내들과도 다른 방문이었다. 그의 멀어짐은 마음을 뻐근하게 했다.

[난 아직 건재해. 그러니까 천덕꾸러기 취급하지 말았으면 해.]

카일을 향해 소리쳤던 용감했던 자신은 어느새 벽지에 흡수되어 버릴 것 같았다. 아주 천천히. 이 공간 안에서 심장이 뛰는 생명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리는 심장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뛰는 소리를 들었다. 일정한 속도를 찾아가는 가슴을 두들기며 주방으로 향했다. 

‘브라우니’. 아델의 발음을 떠올렸다. 묵직한 혀와 입천장을 훑는 듯한 뱉어냄이 이색적이었다. 캐스팅 디렉터보단 배우에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달걀을 풀어 설탕과 섞었다. 

“조금 더 많이 할까.” 

리는 중얼거렸다. 어깨에 설탕 차를 얹고 모조리 쏟고 싶은 심정이었다. 취미가 의무감이 되어버린 것은 전부 카일의 탓이었다. 

[하루 종일 뭐 했어?]

[손톱 뜯었어.]

[그런 거 말고.]

[그럼 내가 뭘 했겠어! 손톱 뜯고 화분 죽였어. 됐어?]

[바빴겠네.]

[엿 먹어. 카일.]

카일을 향해 하루를 보고할 때 적어도 손톱 뜯는 행위와는 질적 수준이 달랐으니까.

리는 아델이 제게 요구한 그것이 퍽 다행이었다. 아델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되길 소망했다. 

초콜릿을 녹이고 버터와 섞었다. 팔 근육이 잔뜩 긴장되었다. 이젠 고독한 취미를 끝내고 나면 ‘할 일’이 생겼다. 아델의 일을 도와주는 것. 리는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포트폴리오를 넘기기 시작했다. 

주방에 엉망으로 흩뿌려진 밀가루는 두 시간이 지나면 킴이 치워줄 것이었다. 킴도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심심하지 않게 취미를 만들어 주었으니까. 

“차 한 대만 보내주세요.” 

리는 카일의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카일의 부하는 아무런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럴 때면 혹시 카일이 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조금은 설레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할 설렘을 안고 찬 공기를 섞어야 했다. 카일은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 * *

뺨에 닿는 바람이 차가웠다. 겨울은 겨울이었다. 코트를 여미고 허리춤에 손가락을 끼웠다. 방안에 남은 장갑은 카일의 피 묻은 장갑이 마지막이었다. 그 장갑마저 그리워지는 추위였다.

부하는 말이 없었고 리는 더더욱 조용했다. 손에 쥔 브라우니가 허벅지 위에 무게감 있게 실렸다.

리는 거대한 빌딩으로 들어섰다. 카일 조직의 건물은 증권사 아니면 잡지사 같아 보였다. 리의 성당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중심가였다. 택시의 주황빛에 눈이 아팠고 매연의 퀴퀴한 냄새와 어두운 하늘, 그리고 정신없는 구두 소리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이 속에 무대와 무용수들 그리고 사교회장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리는 카일의 사무실을 두들겼다. 둔탁한 노크 소리와 함께 카일이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열자 여자의 웃음소리와 인공적인 단내가 풍겨왔다. 리의 손에 들린 브라우니와 비슷한 냄새였다. 여자의 눈은 넥타이로 감겨져 있었다. 카일의 이니셜이 박힌 타이였다. 카일의 책상에는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와 전라의 남녀들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흡사 핼러윈의 난교 파티 같았다. 카일은 머리를 단정히 넘기고 소파에 기대앉았다. 눈이 결박당하지 않은 다른 여자는 카일의 옷을 벗겼고 남자는 카일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세 명이 매달려 카일의 욕구를 채워주고 있었다. 카일은 조소와 함께 케이크를 엎었다.  

정사각형의 체리가 가득 박힌 케이크는 남자의 몸을 타고 흘렀다. ‘카일’의 남자는 실실 웃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여자의 눈에서 넥타이가 흘러내렸고 마침내 리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당황한 얼굴로 가슴을 가렸다. 리는 카일에게 다가갔다.

“당신 생일이 오늘인 줄 몰랐어.” 

카일은 남자의 어깨에 담뱃불을 지졌다. 실실거리던 남자는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았다. 리는 커다란 검은색 가죽 소파를 둘러보았다. 생크림과 정사의 흔적이 묻지 않은 곳을 찾아야 했다. 

“더러워.” 

리는 욕설을 뱉으며 바닥에 털썩 앉았다. 도저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릎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일은 금발의 여자에게 구두 짓을 했다. 카펫을 두어 번 두드리며.

넥타이가 완전히 흘러내린 여자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네가 접대해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니야.” 

카일은 리를 향해 턱짓했다. 눈이 풀린 여자는 가슴팍을 가리지 않고 리에게 기어갔다. 남자는 불안한 듯 이를 깨물었다. 카일은 그의 어깨에 짓이긴 담배를 털었다. 리는 카일과 눈을 맞췄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카일은 은밀한 정사를 방해한 리가 원망스럽지 않았다. 이 파티의 주인공은 리였으니까. 

몇 시간 전 부하는 카일에게 리의 행보를 전달했다. 

금발머리의 여자, 벽안의 남자. 백조 속 주인공을 탐내는 인간들의 야망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카일은 리가 오기 전 모든 파티를 주도했고 리의 걸음 소리와 함께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리는 오늘 캐스팅을 하러 이곳에 방문할 것이고 손안에 달콤한 무언가를 들고 들어올 것이었다. 

먹었어도 안 먹었다고 해야 된다며 리는 예쁘게 웃으며 소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곤 소꿉장난처럼 생크림 케이크를 떠먹으며 기대올 것이었다. 그러나,

리의 표정이 볼만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카일은 처참히 뭉그러진 리를 보며 웃었다. 

<겨울-여름>. 아델이 연출한 계절의 방향성에 대해 찝찝했던 기분이 비로소 씻겨 나갔다. 왜 아델이 계절을 바꾸기를 고집했는지. 모든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아델은 리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카일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제 아들의 불장난을 가만히 볼 수 없었다. 그 분노는 고스란히 리에게 향했다. 제 혼탁해진 기분을 풀어야 할 상대는 리뿐이었다. 

자갈 같은 걸림돌이 내려가는 기분은 시원했고 따가웠다. 

리는 다가오는 여자를 무릎 위로 올렸다. 평소처럼 ‘난 당신의 난잡한 놀이에 끼지 않을 거예요.’라며 문을 박차고 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카일의 입꼬리와 경직된 눈빛이 리의 마음을 벅차게 했다. 딱딱한 돌덩이가 앉은 것 같았다. 

리는 손에 쥔 브라우니를 내려놓고 코트를 깔았다. 여자를 위로 올리고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카일을 마주 봤다. ‘못할 것 같아?’ 리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카일이 웃었다. 자조적인 웃음에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벽안의 남자는 카일의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며 열정적으로 비위를 맞췄다. 무엇이 웃긴지. 리가 옴으로써 더욱 흥분한 건지 이 미친 상황들 속 사람들은 전부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자를 품에 안고 애무하는 리를 보자 카일의 중심이 딱딱해졌다. 벽안의 남자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카일은 우악스럽게 남자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남자의 입을 포악스럽게 벌리고 제 성기를 처넣었다. 남자의 교성은 점점 비명으로 변했다. 

카일과 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리의 애처로운 눈빛에 카일의 입꼬리가 흔들거렸다. 카일은 나른해진 얼굴로 생크림을 손가락에 묻혔다. 붉은 혀로 크림을 빨았다. 그 모습을 본 리가 사정했다.

“주인공은 당신이에요. 그만.” 

리는 허벅지 사이로 파고드는 여자의 얼굴을 들었다. 여자는 눈이 풀려 그대로 소파에 털썩 쓰러졌다. 카일은 타이까지 말끔히 차려입은 상태로 사무실을 나섰다. 벽안의 남자의 주먹이 흔들거렸다.

분수대에 꽁초가 떠올랐다. 여섯 개. 카일은 재가 떨어진 탁한 웅덩이를 바라보았다. 리가 다가왔다. 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코트도 두고 나온 리는 하얀 셔츠 한 장에 의지하고 있었다. 카일은 코트를 벗어 리의 어깨에 걸쳤다. 리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집착하는 거 싫다고 했으니까 참은 거야. 전부 뒤엎고 싶었어. 당신이 그러고 있는 거 볼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어버리고 싶어. 끝까지 참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더 초라해.”

오랜만에 겪는 일이었다. 카일의 성교는. 성당이 아닌 그의 사무실에서 겪는 초라함은 몇 배는 더 충격적이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이어서 더욱 치가 떨렸다. 카일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리의 심장을 할퀴었다. 그럼에도 카일은 흘러내리는 코트를 여미어 주었다. 그의 이런 배려가 리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집착하지 마.]

[구속하지 마.]

[지치게 하지 마. 그렇지 않아도 넌 충분히 질리고 있으니까.]

카일의 날선 경고를 받아들여야 했지만 마음의 소리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리조차 마음을 어쩌질 못했다. 카일의 코트 속은 생크림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저와 카일이 합쳐질 수 없는 걸림돌처럼. 

“죽어버릴 거야?” 

카일은 눈물로 범벅이 된 리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리는 시선을 피했다. 

“당신이 죽기 전까진 기대 말아요.” 

리가 돌아섰다. 코트가 떨어졌고 리는 묵묵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분수대에 아슬하게 걸쳐진 코트가 물을 먹고 추욱 쳐졌다. 거대한 검은색 옷감이 깊이깊이 가라앉았다.

* * *

아델의 메일이었다. 

To. 리


아델입니다. 리의 조언을 생각해 봤어요. 여름으로 하고 싶다는 것도 눈동자에 집착하는 것도 전부 버릴 수가 없어요. 


첫눈에 반하는 건 개연성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작가의 역량이 부족했다며 비아냥거렸던 지난날을 사죄해요. 그런데요… 이젠 이해할 것도 같아요. 첫눈에 반했어요. 에드워드는 처음부터 루이를 사랑했을 것.. 같은데요.


PS. 성당 속의 아몬드는 무사한가요?

리는 노트북을 열었다. 성당 속의 아몬드. 서랍장을 뒤져서 아몬드 한 봉지를 꺼내었다. 두 손에 올려두고 오드득 소리가 나게 씹었다. 아델에게 주었던 아몬드 쿠키가 생각났다. 귀여운 아델. 호두보다 아몬드가 좋다고 말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답장할 여력이 없었다. 리는 지쳐있었다. 카일의 부재와 생크림. 초면인 여자와의 정사. 전부 복잡하고 난잡한 기억이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난교 파티에서 합의 없이 인권을 유린당한 탓일까. 아직까지도 수치심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카일은 리의 영혼을 강간했다. 리의 연정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카일이 벽안의 남자를 쓰다듬고 목에 이를 박아 넣는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다리를 벌리고 왼쪽 다리를 핥던 카일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비로소 심장이 요동쳤다. 이렇게 카일에게 집중하다 보면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가고 발작 증세가 일어났다. 그리고 카일을 사랑한 걸 미치도록 후회하곤 했다. 카일이 생각났다. ‘나의 연인, 나의 첫사랑, 나의 살인자.’ 손에 쥔 아몬드가 흩어졌다.  

그 순간 <첫눈에 반했어요.> 주어 없는 의문의 문장이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아델의 목소리가 그려졌다. 몽롱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감긴 눈 속 어두운 복도 속 한줄기의 빛이 내리쬐는 것 같았다. 멍멍했던 정신이 서서히 풀리고 소음이 방안을 한가득 메웠다. 볼륨이 찢어질 듯 클래식을 틀어 놓은 탓이었다. 

리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오븐을 껐다. 다시 죽음을 경험한 순간이었다. 좀비처럼 방안을 긁어 대고 나면 온몸엔 멍 자국이 가득했다. 깜깜한 뇌 속 세계와는 이미 친숙해졌다. 익숙한 작은 집이었다. 텅 빈 복도를 끝도 없이 걷다 보면 카일도 자신도 사랑하는 미련도 전부 사라진 무 상태가 되곤 했다. 

욕심도 집착도 그에 대한 지저분한 사랑도. 무중력의 상태에선 심장도 뛰질 않았다. 그때 리의 귓가엔 <첫눈에 반했어요.> 아델의 싱그럽고 나약한 빛줄기가 비쳤다. 리는 눈을 비벼야 했다. 

“작은 집이 사라질 것 같아.” 

리는 중얼거렸다.

* * *

그날 밤 카일은 핏물에 절여진 옷을 입고 리의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코트와 베스트, 넥타이핀까지 전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사교회장에서 총싸움이라도 하고 온 거야? 왜 이렇게 애처럼 구는 거예요?”

그날 밤 리는 ‘총잡이들. 마피아들. 사회악들. 쓰레기들. 한심해.’라며 카일을 나무랐다. 

“그냥 죽어. 얼굴 보기 싫어.”

리는 카일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리가 예쁜 얼굴로 미운 말을 내던질 때 카일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반전은 인간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법이었다. 그런 점에서 리는 매혹적이기까지 했다. 

카일은 리의 이런 점이 좋았다. 열두 살이나 어린 애인은 가끔 엄마 같았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력한 남자임에도. 

설거지도 세탁도 전부 익숙지 않은 리는 낮은 목소리로 근엄하게 혼을 내곤 했다. 카일은 처음부터 눈치를 보지 않는 리가 편했다. 마피아였던 부친과 어머니. 자신의 몸속엔 살인을 하지 않곤 배기지 못할 피가 흐른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아버지에게 창고 속으로 이끌려가 죽여야 했던 수많은 남자들과 돼지들. 그리고 소동물들까지. 숲속에 걸어 놓은 작은 다람쥐의 내장을 터뜨려야 했을 때 무늬 사이로 스며들던 피를 외면하고 아버지의 평가를 기다릴 때 카일은 전부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심장과 뇌. 둘 중 무엇이 죽어야 인간은 목숨을 잃은 거지?]

아버지는 커다란 손으로 제 턱을 감싸 쥐었다. 

[생각 잘해야 할 거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카일은 벌떡 일어나 총을 쥐었다. 작은 인기척에도 벌떡 일어나 총을 겨누어야 했다. 바람일 때도 아버지일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차가운 눈빛으로 머리맡에 서있었다. 

[무엇에도 취해선 안 돼. 널 홀리는 것들은 전부 널 죽게 할 테니까.]

총구를 감싸 안으며 방을 나섰다. 카일은 심장을 달래며 뇌에 총을 겨누었다. 심장에 총을 겨누고 뇌를 감싸 안았다. 아무래도 심장이 죽어야 목숨이 끝이 난 것 같았다. 

무서운 사람, 두려운 사람, 인간 같지 않은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조부모님 같은. 짐승이면서 인간의 탈을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카일은 스스로가 짐승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리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것을 공개하는 주제에 그에 대한 마음은 숨기고 싶었다. 간지러운 마음이 창피했다. 그뿐이었다. 

[아저씨 사람 막 죽이고 다녀요?]

그랬던 소년은, 

[아무리 내가 나이를 먹어도 당신은 어른일 테니까.]

라며 허락 없이 존댓말을 거두었다. 카일의 죄책감은 가벼워졌고 둘 사이는 더욱 무거워졌다.

카일은 천천히 눈을 떴다. 리의 달큼한 향수 냄새가 제 코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대답해, 카일.” 

리는 외출금지라도 시킬 작정인 듯했다. 카일은 앙칼진 리를 바라볼 때면 웃음이 걸렸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볼 때마다 죽어버린 인간들이 생각났다. 정확히는 자신이 죽여버린이지만. 어쨌건 카일은 무탈하게 보라색 세상에서 살고 싶었다. 

리가 자신의 정의를 내려주길 바랐다. 방향을 틀어주길 바랐고 어디든 데려가길 원했다. 

“네가 여자랑 그 짓을 할 줄은 몰랐어.” 

카일은 낯선 목소리로 리를 자극했다. 리는 온기 없이 뱉는 카일의 말이 익숙해졌다. 그리고 창피했다. 예전에는 몹시 수치스러웠고 지금은 견딜 만하게 부끄러운 정도였다. 

“날 싫어하는 당신을 잡을 순 없잖아. 난 이렇게 당신이 오기만 기다려야 하니까.”

“내가 널 싫어한다고 생각해?” 

카일은 리를 일으켰다. 빗물에 젖은 개새끼를 일으키는 것처럼. 세차게 목덜미를 잡았다. 리는 어둠 속에서 기댈 곳을 찾았다. 그대로 카일의 허벅지에 미끄러져 숨을 몰아쉬었다.

“그건 당신이 더 잘 알겠지.” 

차마 자신의 입으로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용기가 없었다.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은 소멸한 지 오래였지만 기대마저 부서뜨린다면 살아갈 힘이 없었다. 

“나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건방을 떠는 남자도.” 

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자주 찾아와 줄래요? 이렇게 한 달에 한 번. 아침과 함께 사라지는 저주를 받은 사람처럼 떠나지 말고. 매일 난 슬픈 밤이야. 카일이 없어도 있어도 난 외로우니까. 남들처럼 아침엔 날씨를 묻고 당신에게 우산을 챙겨주고… 당신은 집에 있는 나를 걱정하는 거야. 우린 환상적인 저녁식사를 하고 모닥불 앞에서 잠이 드는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카일은 리의 멱살을 놓았다. 

“비 맞는 게 악취미라서. 피가 씻겨 내려가는 거 시원하잖아.” 

카일은 다시 잔인하게 리의 가슴을 찢어내었다. 

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다시 숨이 불규칙적으로 쉬어질 것 같았다. 서둘러 카일에게 입을 맞췄다. 그의 앞에서 발작을 하게 된다면 끔찍한 표정을 하고 달아날 것 같았다. 그리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카일은 부드럽게 리를 감싸 안았다. 

“오늘 밤은, 오늘 밤만은……. 내일 비가 올 거예요. 내가 우산을 챙겨줄 거예요.” 

리는 카일의 품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제발 가지 마…….”

카일은 비가 위로 솟구치고 스펠링이 거꾸로 얽혀있는 질서 없는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리가 여자와 뒤엉켜 흥분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카일은 조급하고 아찔했다. 그건 인정해야 했다. 변함없는 리가 엇나갈 때 카일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리는 여전했다. 

“사랑해.”

카일은 커다란 손으로 리의 눈가를 감싸 안았다. 

“많이 좋아해. 알지?”

카일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카일은 눈물로 흠뻑 젖은 리의 뺨을 감싸 안았다. 턱 선부터 눈꺼풀까지 모조리 핥아내었다. 짜디짠 눈물 맛이 느껴졌다. 

“옷 벗어.”

카일의 말에 리는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카일은 그마저도 답답한지 리의 잠옷을 찢겨내었다. 바닥에 동그란 단추가 낙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일은 리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걸리적거리는 시트를 던져두고 오로지 리의 몸에 집중했다. 리의 다리를 쓸어보았다. 체모 하나 없이 매끈한 다리였다. 시체마냥 새하얗게 뜬 것도 매력적이었다. 무르팍에 초록빛의 멍울이 져 있음에도 색정적이었다. 카일은 리의 무릎을 굽히고 연신 입을 맞춰대었다. 리는 간지러운지 어깨를 잘게 떨었다. 그럼에도 카일이 제 몸을 원한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하고 싶어.”

무릎에 입을 맞추던 카일은 리를 눕히고 허벅지 사이로 얼굴을 파묻기 시작했다. 사타구니에 느껴지는 카일의 머리칼에 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간지러워…”

리는 사랑스럽게 웃었다. 카일은 리의 입꼬리에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리가 옷을 벗고 있을 때, 서로의 몸을 겹칠 때만큼은 카일은 솔직했다. 제 마음을 필사적으로 숨기는 것은 섹스를 할 때는 해당되지 않았다. 리의 흐느끼는 신음, 굽어지는 등줄기, 민감한 젖꼭지. 빨아 당기면 자국이 남는 여린 살결까지. 눈물을 흘리며 신음을 참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어느 하나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발목을 깨물면 파르르 떠는 얼굴까지 카일을 발정하게 만들었다. 카일은 리의 가슴팍에 얼굴을 대고 심장소리를 들어보았다.

“카일은 안 벗을 거야?”

전라의 상태가 된 리는 시계조차 풀지 않은 카일을 바라보았다. 부끄러운 듯 하반신을 가리며 카일을 밀어내었다. 

“가까이 닿고 싶어. 카일도 벗어줘.”

리는 카일의 시계를 풀었다. 그가 지퍼만 내린 채로 하는 의무적인 삽입은 원하지 않았다. 그저 체온을 나누고 싶을 뿐이었다. 카일의 따뜻한 몸에 제 찬 몸을 섞으며 적당한 온도를 찾고 싶었다. 새벽이 끝나도록 카일의 품안에서 흐느끼고 싶었다. 카일은 시계와 셔츠 그리고 바지까지 전부 벗었다. 탄탄한 근육질의 몸이 드러났고 카일의 깊은 체향까지 느껴졌다. 묵직하게 가라앉는 향수 냄새. 그 어떤 마약보다 황홀했다. 리는 카일의 어깨를 쓸어보았다. 그을린 피부에 지방 하나 없이 탄탄한 몸이었다. 리는 카일의 어깨를 물어보았다. 제 이를 박아 넣고 각인하고 싶었다. 

“화풀이 하는 거야?”

카일은 리에게 물린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리는 카일의 볼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아니, 내 거라고 자랑하고 싶어.”

카일은 진지한 리의 대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로 오물거리는 리의 입술을 삼켜내었다. 아래는 분주하게 리의 하반신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꿈틀대는 구멍에 성기를 끼울 듯 말 듯 애를 태웠다. 카일은 제 성기를 쥐고 리의 입구를 두들겼다. 움찔거리는 구멍이 보기 좋게 벌어졌다. 이미 내벽은 카일을 원하는 듯 입구부터 작게 진동하고 있었다. 축축한 액을 잔뜩 뿜어낼 것처럼. 카일은 그 구멍을 젖게 만들고 싶었다. 

카일은 리의 구멍에 손가락을 꽂아 넣었다. 주름진 표면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졌다. 구멍 속 까지 들쑤시려는 듯 집착스럽게 긁어내었다. 카일의 손가락 뼈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리는 작게 허리를 돌렸다. 

“너무… 오랜만에 해서… 잘 안 들어갈지도”

건조한 내벽이 따끔거렸다. 그럼에도 낯설지 않은 공포, 지속되었으면 하는 위험한 쾌락이 리를 덮쳐왔다. 카일은 리의 골반을 쥐고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었다. 리가 환장하는 부분, 깊은 안쪽에 자리 잡아 카일만이 아는 그 부분을 건드렸다.

“아읏!”

리는 카일의 손가락에 데인 것처럼 높은 신음을 터뜨렸다. 몸이 흐물거리며 녹진하게 힘이 빠졌다. 내벽 안쪽은 손길 한 번에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고 카일의 손가락이 아닌 성기가 가득 채워지길 고대했다. 카일은 손가락을 꺾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어루만졌다.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흣아......안...돼!”

리는 얇은 신음을 터뜨렸다. 카일은 침대 옆 화병에 손을 뻗었다. 투명한 화병 속 보라색 장미를 손바닥 안에 으깨기 시작했다. 카일의 손 안에 보라색 꽃잎들이 으스러졌다. 어느새 끈끈해진 꽃물이 흘러나왔다. 카일은 흥건하게 젖은 꽃잎들로 리의 구멍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카일의 손가락이 아닌 축축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리의 붉은 구멍 위로 보라색 꽃물이 들여지고 있었다.

“해보고 싶던 건데.”

카일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푹 젖은 꽃잎을 밀어 넣었음에도 뻑뻑함은 여전했다. 카일은 배려 없이 리를 눕혔다. 따가운 시트가 몸에 닿았을 때 리는 전신을 잘게 떨었다. 리는 카일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가슴팍을 간지럽히는 카일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카일은 리의 입속에 손가락을 넣었다. 혓바닥부터 천장 그리고 목구멍 안까지 진득하게 침을 묻혔다. 

“흣….” 

카일은 흐느끼는 리를 바라보며 아래를 푸는 것에 집중했다. 리가 글썽일수록 수축된 구멍이 뻐끔거리며 적나라하게 내벽을 드러냈다. 카일은 그곳에 입을 맞췄다. 카일의 입술이 뜨거운 구멍에 맞춰졌다. 카일의 성기도 그리고 입술도. 뜨거운 혓바닥도 전부 제 몸과 소름끼치게 맞아 떨어졌다. 마치 카일을 받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리는 황홀했다. 

“매번 첫 경험 같아서 어떡해?”

카일은 제 성기로 리의 입술을 두들겼다. 느긋하게 웃으며 리를 희롱했다. 

“응? 리 몇 살이야?”

카일의 냉기 가득한 말에 리는 사색이 되었다. 

“아...아니… 그래도 잘 할 수 있어. 오랜만에 해서… 그래서 그런 건데.”

리는 카일이 다른 여자에게 갈까 봐 덜컥 겁을 먹었다. 

카일은 여전히 벌어지지 않는 구멍을 보며 흐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따분한 듯한 기색으로 콘돔을 뜯었다. 능숙하지 않아 제게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는 의미로 전해졌다. 리는 카일과의 섹스가 중단될까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말과 달리 친절히 구멍을 쑤셔대는 카일의 손을 간절히 잡았다. 그리고 제 손가락도 함께 넣어 폭력적으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카일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리의 손을 내려 두었다. 

“코...콘돔 없이 해도 돼요…!”

리는 카일이 떠날까 애처롭게 소리쳤다.

“원한다면.”

카일은 싱긋 웃으며 바닥에 콘돔을 쏟아 부었다. 

카일은 리의 구멍을 삼킬 듯이 다가왔다. 꽃잎과 섞인 카일의 혀가 무자비하게 구멍을 유린하고 있었다. 꽃잎으로 물든 내벽에 카일의 혀가 침범했다. 내벽을 샅샅이 핥는 듯 카일은 더욱 더 깊숙이 혀를 넣으며 느끼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리는 카일의 어깨를 밀쳐내었다. 그럴수록 카일은 리의 허벅지를 뜯을 듯 쥘 뿐이었다. 구멍 속에서 느껴지는 얕은 쾌감. 오랜만에 느껴보는 천박한 떨림이었다. 

“으...으응……!”

리의 고개가 곡선을 그리며 꺾여갔다. 새하얀 목덜미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가느다란 목 사이로 봉긋하게 튀어나온 목젖. 카일은 리의 목젖을 깨물었다. 

“귀여워.”

카일이 리의 둔부를 가르고 회음부부터 핥아내었다. 리는 천장을 향해 송곳 같은 교성을 터뜨렸다.

물기 가득한 신음에 카일의 눈빛이 몸보다 빨리 반응했다. 

카일은 리의 성기에 얼굴을 푸욱 묻었다. 메이플 시럽 같았다. 귀두 끝이 탐스럽게 반질거렸고 리의 입술만큼이나 붉은 농도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리는 카일의 얼굴을 끌어 당겨 입을 맞췄다. 카일의 높은 콧대 그리고 단정한 입술까지 빨아내었다. 리의 체액이 마구잡이로 섞였다. 카일은 다시 리의 아래로 내려갔다. 축축해진 입술로 성기를 물었다. 흡 하는 소리와 함께 빨아 당겨졌다. 카일은 볼이 움푹 파이도록 리의 성기를 먹어치웠다. 아이스크림을 탐하는 어린 아이처럼. 

왠지 달큰한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리의 성기가 카일의 목구멍 속으로 삼켜졌다. 카일의 주름진 목구멍이 느껴졌다. 카일의 입속은 뜨거웠다. 카일의 목울대가 점차 부피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리는 카일의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제 성기가 이곳에 있다니. 이젠 통각 같은 쾌감에 질식할 것 같았다. 창피하게도 이른 사정감이 몰려왔다. 

“으읏……!”

리는 발등으로 카일을 밀어냈다. 카일은 정액이라도 삼킬 작정인지 더욱 깊이 얼굴을 묻고 있었다.

주름진 목구멍 속으로 제 정액이 흩뿌려지는 착각이 들었다. 리는 카일의 등을 할퀴기 시작했다. 카일은 빠른 속도로 기둥을 핥아내기 시작했다. 삼켜지는 민망한 소리가 리의 귀에 생생했다. 몰려오는 사정감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듯했다. 하복부가 터질 것만 같았다. 리는 공포심에 카일을 밀쳐내었다. 

“하읏…! 카일 제발…. 저리가…!”

리의 비명에도 카일은 더욱 바싹 허리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카일의 얼굴 위로 뽀얀 정액이 뿌려졌다. 새하얀 액체가 카일의 단정한 눈썹으로 흘러내렸다. 리는 제 손등으로 정액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카일은 입가에 흘러내리는 정액이 아쉬운 듯 할짝거렸다. 

“내 몸 안에 네 정액이 흘렀으면 좋겠어. 피 대신.”

리의 손을 끌어당겼다. 격정적으로 정액을 빨아먹기 시작했다. 손가락 틈 사이에 흐르는 정액조차 아깝다는 듯 혀를 날름거렸다. 리는 카일의 얼굴을 끌어 당겼다.

“키스 한 번만 해줘.”

매춘처럼 보이지 않게. 사랑하는 것처럼 연기해줘. 

리는 애절한 얼굴로 카일의 입술을 빨아 당겼다. 혀를 넣을 자신은 없는 듯 아랫입술을 할짝거리며 카일의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리의 속눈썹이 파리하게 흔들거렸다. 리는 눈을 감고 카일의 목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카일은 리의 얼굴을 삼킬 것처럼 혀를 눌러 넣기 시작했다. 카일의 높은 콧대가 리의 숨을 위협했고 입술 속으로는 말캉한 혀가 자리 잡아 가슴이 가파르게 뛰어왔다. 카일은 리의 가슴팍을 지그시 눌렀다. 리의 허리가 튀어 올랐다. 카일은 리의 등뼈를 감싸고 성기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으읏…! 카일…! 흐응……!”

카일이 마찰시킨 살덩이 위로 붉은 자국이 선연했다. 카일은 제 성기를 쥐고 구멍 윗부분을 두들겼다. 그럴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쩐 일인지 오늘따라 카일은 짓궂었다. 삽입을 더디게 하고 있었다. 리는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간신히 뜨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은 여전히 거대한 성기로 회음부 부근을 찔러댈 뿐이었다. 마찰된 살갗이 처참히 쓸리고 있었다. 이미 흉흉해진 카일의 성기로 찌른 탓에 여린 살이 쓸려 따끔거렸다. 다만 카일이 성기를 꽂아 아랫배를 꽉 채워준다면 나아질 통증 같았다. 그 통증은 어리광을 수반하는 복잡한 고통이었다. 

“제발 넣어줘…! 제발….”

이미 부끄러움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리는 엉엉 울며 카일을 끌어안았다. 

“가득 차게 넣어줘?”

카일은 여유롭게 미소를 걸고 물었다. 리는 무척이나 간절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찰시킨 엉덩이 골에 멍울이 생겼다. 그럼에도 아프지 않았다.  

리는 싱긋 웃었다. 눈물방울을 매달고 카일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카일의 성기가 무섭도록 팽팽해졌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성기는 불구덩이가 된 듯 참을 수 없이 달궈졌다. 카일은 귀두부터 거대한 그것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흐…으응…! 카일 천천히…!”

“계산할 정신없어.”

카일은 잘게 이를 씹어대며 허리를 털었다. 귀두부터 엉망으로 들어온 탓에 구멍 안이 전부 망가질 것 같았다. 리는 카일의 머리채를 잡고 높은 신음을 질러대었다. 

“으읏……!!”

계산할 정신이 없다던 카일에게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

낮은 울림에 리의 아랫배가 경련하듯 움찔거렸다. 카일은 고환이 뭉개질 때까지 뿌리 깊이 밀어 넣기 시작했다. 엉덩이 골 사이로 카일의 고환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여기 카일이…. 있어…”

리는 소중히 제 아랫배를 동그랗게 쓸어보았다. 그리고는 쾌락에 절여진 얼굴로 카일의 머리를 쥐었다.

얕은 삽입질이 아닌 탓에 순식간에 성기는 리의 아랫배에 가득 채워졌다. 장기가 뒤틀릴 만큼 카일의 성기가 무질서하게 침범하기 시작했다. 파정할 것 같았다. 하복부가 질서 없이 엉키기 시작했다. 장기들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듯 구역질이 났다. 카일은 리가 그럴수록 짐승 같은 신음을 흘리며 더욱 깊숙한 곳을 찔러왔다.

“아, 흣…! 으응……!”

“똑바로 봐. 내가 누군지.”

송골송골한 땀방울이 내려왔다. 눈가가 따가웠다. 카일은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정액을 싸질렀다. 리는 자신의 배 위에 흩뿌려진 액체를 만져보았다. 카일의 몸처럼 뜨거웠다. 

“안에… 해도 돼.”

리는 필사적으로 이를 깨물었다. 제 신음이 듣기 좋지 않다고 여긴 결론이었다. 역겨운 교성에 카일이 떠날까 두려웠다. 카일은 리의 입을 우악스럽게 벌렸다. 숨소리 하나까지 놓치기 싫은 것처럼 리의 입술에 귀를 파묻었다. 리는 카일의 귓바퀴를 할짝거렸다. 

“여기도… 내 거야.”

리는 카일의 귓속에 혀를 넣었다. 카일은 선연한 웃음을 흘렸다. 아래에 진득하게 머문 카일의 성기가 빠져나왔다.

“하…”

카일은 다시 신음했다. 

“사랑해요.”

* * *

리는 손을 뻗었다. 카일의 코트, 정리해둔 구두, 카일의 시계. 전부 사라진 이후였다. 

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노트북을 열었다. 아델에게 늦은 답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침대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몽땅 쏟아내었다. 속았다. 이번에도 카일에게 버림을 받았다. 방치됐다. 커튼으로 비가 들이쳤다. 리는 문을 활짝 열고 내리치는 비를 맞았다. 

“죽어버릴까.” 

허공에 물음을 던졌다. 침대의 끝자락이 비에 젖어 축축해졌다. 커다란 창에 바람이 들이쳤고 화병이 떨어졌다. 

‘아직 내 뱃속에 꽃잎이 잠들어 있는데.’

리는 천천히 욕조로 걸어갔다. 리는 더 이상의 감정을 소진하고 싶지 않았다. 욕조 물을 받는 데는 한참이었다. 아까운 시간 동안 상념에 젖어 보기로 했다. ‘카일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가 아니라면 어떤 생각이라도 상관없었다. 

아델의 캐스팅은 차후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다음 생으로. 리는 천천히 욕조 속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차가운 물이 귀까지 들어가 차오를 때면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금붕어가 되는 것 같았다. 리는 욕조 위로 약을 털어 넣기 시작했다. 욕조에 얼굴을 묻고 한가득 물을 들이마셨다. 뻣뻣한 뱃가죽 위로 불룩하게 물이 차올랐다. 

‘차갑고, 고요하고 시원하다. 그리고 곧 죽을 것 같다.’ 

돌고래가 빛났다. 리의 오른손엔 투명하게 빛이 나는 칼 한 자루가 있었다. 카일이 일본에서 사온 과도였다. 

[과즙이 맺힌다고 하더군.]

아쉽게도 과육이 아닌 죽어가는 자신의 핏덩이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리는 더욱 깊이 찔렀다. 눈을 감고 목숨의 원천을 찾아 더듬거렸다. 손목 위로 기포 방울이 올라왔다. 점차 거세지며 기름처럼 물 위로 떠올랐다. 

‘봄’, ‘바다’, ‘숲’. 아름다운 것들이 떠올랐다. 이젠 환상으로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아델’.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은색 매화가 박힌 칼이 욕조 아래로 떨어졌다. 손목을 짓이기는 통증에 리가 서서히 눈을 떴다. 이렇게 깨어날 때면 세상에서 가장 불쾌한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카일이 욕조에서 건져 올린 칼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는 리의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성당에서 불순한 짓을 하고 싶어?”

카일은 한때 목숨을 흥정하는 리를 비웃었다. 그땐 과도가 아닌 총알이었다. 리는 제 허벅다리에 한 발을 쏘고 절벽으로 떨어졌다. 카일을 향해 퍼포먼스를 하듯 우스꽝스러운 부상이었다. 단 한 번도 ‘자살’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부상’으로 끝이 난 질긴 목숨 때문이었다.

“당신이 나한테 하는 짓은 순수해?”

리는 카일을 비웃었다. 하지만, 이럴수록 카일의 입매가 진해졌다. 카일은 이날 이후로 성당에 발길을 끊었다. 

* * *

아델은 두 사람을 통해 예측해야 했다. 마치 사랑의 전선인 듯 전쟁의 불씨인 듯 헷갈려야 했다. 카일의 귀가가 늦어지는 일, 코트에 리의 냄새가 배어나는 일, 카일의 등 뒤 손톱자국이 선명한 일. 그러나 오늘 카일의 몸은 말끔했다. 리를 만나지 않았다. 외박을 하지 않은 카일은 다분히 신경질적이었다. 부하를 괴롭히거나 아델을 향해 폭언을 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같은 음악을 질릴 때까지 틀어놓곤 했다. 듣는 사람마저 몸서리칠 정도로 끔찍한 고문이었다. 모닥불에 보드카를 수시로 던지며 한 겨울에 더위를 일으키기도 했다. 

아델은 그에게 각진 얼음이 가득한 물을 건네었다. 그의 목구멍이 활활 타오를 것 같은 염려 때문이었다.

“마침 필요했는데 잘 됐군.” 

카일은 아델과 눈을 맞췄다. 저와 지독히도 닮은 카일은 특히 무표정한 얼굴일 때 더욱 소름 끼쳤다. 아델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부하들은 전부 자세를 낮추었기 때문이다. 등에 닿는 벽난로의 열기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켈리는 새벽마다 린넨을 훔쳐보다 눈이 멀었어. 앞을 볼 수 없는 화가라니. 우습지 않아?” 

켈리는 카일이 사랑해 마지않는 화가였고 린넨은 켈리의 형수였다. 진한 치정극 혹은 실명의 로맨스에 힘을 더해 줄 루머일 뿐이었다. 

“넌 그래서 무엇을 잃을 거지?” 

카일은 아델의 턱을 들었다. 엄지와 검지로 그의 턱을 부술 듯이 쥐었다. 아델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무엇을 원하고 소유하고 싶은 거야?”

카일이 힘을 더해갈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바로 이거야. 아델. 네가 원했던 거잖아. 아델의 머릿속에선 세포들이 얽혀 혼미해졌다. 

“눈을 잃을 준비가 됐어?” 

카일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고 그의 왼손엔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손에 쥔 은잔이 번쩍 빛이 났다. 

아델은 가슴이 벅차올라 터질 것 같은 흥분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이 주일 만에 보는 리는 지쳐 보였다. 

[당분간은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가지 않아도 돼요.]

킴의 경고가 지나고 2주 만이었다. 아델은 리를 그리워했다. 2주 전 리는 직접 카일의 사무실에 찾아왔고 아델은 분수대에서 둘을 보았다. 카일의 눈빛이 매섭게 빛이 났고 리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행복해했다. 

그 이후로 리를 볼 수 없었다. 킴의 지시도, 카일의 명령도 없었으니 아델이 홀로 리를 찾아갈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리는 힘겹게 문을 열고 아델을 바라보았다. 아델은 고개를 숙이고 리의 방으로 들어섰다. 

“카일과 같이 산다고 들었어요.” 

인사를 하기 전 카일을 찾는 리의 목소리에 아델은 표정을 굳혔다. 

[그래, 넌 무엇을 잃을 준비가 됐지?]

전날 밤 모닥불에 타버린 카일의 저주가 떠올랐다. 그리고 저주 속 리의 그리움이 닿아 혼미해졌다. 

“최근에.” 

아델은 말을 줄였다. 카일에 대해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것을 의미했다. 서류를 꺼내고 연필을 쥐었다. 보란 듯이 리를 보고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리는 평소보다 멍한 얼굴이었다. 입술은 까슬했고 핏물이 맺혀 있었다. 피부결과 머리, 전부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몸보다 커다란 니트를 걸치고 불편하게 앉아있었다. 

‘답답하군.’

아델은 니트 사이에 아슬하게 보이는 리의 손목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리는 아델의 시선을 느끼고 오른손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른손잡이가 아닌 거 알고 있어요. 왜 소매를 걷지 않는 겁니까?” 

아델은 삐뚤삐뚤한 문장의 스펠링을 손으로 훑었다. 리는 차분히 한숨을 쉬었다. 가끔 아델이 자신의 영역 안으로 침범하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아델과의 선은 작가와 보조 정도일 텐데 아델은 자신의 사생활에 지나친 흥미를 보였다. 리는 할 말이 없었다. 그를 다른 부하들에게 대하듯 신경질적으로 발길질을 하거나 총을 머리에 올리면 입을 닥칠 것이었지만. 선을 넘은 것은 자신이 먼저였다. 

아델에게 카일의 안부를 물은 것.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울타리가 부서졌다. 

아델의 불분명한 경계선에 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리는 어리숙했다. 부하들은 영특하고 노련한 남자라고 입 모아 이야기했지만 리는 무엇을 팔 요량이 못 되었다. 

사회생활이라곤 해본 적이 없었다. 십 대의 끝자락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성당에 갇혀 살았으니 그 흔한 쇼핑 한 번도 제 손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 운전은 더더욱. 그래서 카일의 부하가 없으면 다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리가 기사를 죽이지 않는 이유 또한 그러했다.

“궁금해요? 내가 지금 소매를 걷으면 당신은 역겨운 동정을 해야 될 거예요. 걱정 받고 싶은 것도 아니고 위로받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에요.”

“상관없어요.”

아델은 굳건하게 리를 바라보았다. 아델의 회색의 눈동자가 흔적도 없이 녹을 것 같았다. 전부 가라앉아 눈송이로 변해버릴 것 같았다. 그것을 슬픈 눈이라고 생각해 버린다면 리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 표정 없이 넘긴다고 약속해요.”

“약속해요.” 

아델은 리의 왼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리는 흠칫 놀라 어깨를 비틀었지만 이미 잡혀버린 악력에 손쓸 수 없었다. 아델은 서서히 리의 니트를 올렸다. 팔꿈치 안쪽까지 난도질 되어있는 살가죽을 바라보았다. 

봉합한 흔적이 선명했고 가장 최근의 자해로 보이는 곳엔 피와 근육이 적나라하게 파여 있었다. 아델은 약속대로 아무 표정 없이 옷을 다시 내렸다.

“앞으로 이러고 싶으면 내 몸을 긋도록 해요. 당신 가죽들이 안타까우니까.” 

아델은 애써 슬픔을 삼키고 웃었다.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아슬하게 리에게 비쳤다. 아델은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그의 단단한 몸이 여실히 드러났다. 리는 고개를 젖히고 스트립쇼를 보듯 감상했다.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할지 예상했으므로. 이건 섹슈얼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천진한 아델의 위로였다. 

“그을 곳을 생각해 놔요. 언제든지 찔릴 준비가 되어 있으니.” 

리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단추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델이 코트를 입을 때까지 리는 아델의 전라를 회상했다.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한 근육질. 카일의 몸과는 달랐다. 총알 자국과 칼자국, 문신으로 가득 채워진 카일의 몸과는 달리 깨끗한 초콜릿 같았다. 어깨부터 치골까지 전부 매끄럽게 느껴졌다. 손을 올리고 그곳을 쓸어보고 싶었다. 찌를 곳을 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리의 손목이 움찔거렸다.

“주인공은 이 여자가 맡을 거예요.” 

카일의 사무실에서 리와 몸을 섞었던 여자였다. 리는 고민 없이 이 여자를 앉혀야 했다. 비록 배역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제가 생각했던 거랑 다르네요.” 

아델은 의아했다. 원작 속 주인공은 아시아인이었다. 정확히 갈색의 눈동자에 아담한 체구였지만 리가 가리킨 여자는 금발에 성숙미가 넘치는 여자였다. 

태닝한 피부에 초록색 눈동자까지. 사소한 색은 넘어갈 수 있어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위화감이 상당했다. 인종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델은 고개를 흔들었고 리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이 여자랑 잤어요.” 

아델은 연필을 내려놓았다. 리는 조금 일그러지는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무를 수가 없어요.” 

아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턱을 어루만지며 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리는 카일과 같은 자세에다가 불쾌한 눈빛마저 닮아있는 그가 두려웠다. 니트 속에서 땀방울이 흐르는 것 같았다. 오들오들 한기가 들고 목구멍이 칼칼해졌다.

“그럴 사람 아닌 거 알아요.” 

“그런 사람 맞아요. 왜 확신하세요?” 

리는 아델의 맹목적인 믿음이 불편했다. 연민인 듯, 질투인 듯 아델은 배신감 서린 눈동자로 리를 바라보았다. 리는 안주했다. 아델을 바라볼 때면 이 성당에 어울리는 피사체를 보는 듯 순수했고 깨끗했다. 그래서 더 타락시키고 싶었다. 아델은 자주 따스한 얼굴로 리의 온몸을 어루만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사로운 손끝으로 핥아냈다. 순수하고 고독한 소년이 동정심 어린 눈빛을 지을 때마다 리는 처량했다. 자신과 카일은 언제나 닮아 있었다고 자부했다. 가장 밑바닥부터 그림자조차 꽁꽁 숨기려 노력하는 족속. 카일은 부정했고 리는 긍정했다. 

[더러운 사람들이잖아. 당신이랑 나. 그래서 우린 어울려.]

리는 아델은 저와 다르다고 확신했다. 아델만은 다르다고. 카일과 다르고 저와 다르다. 깨끗하다. 청아하다. 청량하다. 그는 성당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녹아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믿게 해줄래요? 바보처럼 들릴 거 알아요. 하지만 계산할 정신이 없었으니까.” 

아델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붉은 입술이 불안으로 물들었다.

“위험한 말이에요.” 

리는 아델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리의 손끝이 떨려왔다. 아델은 그만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멈추지 않으면.

“각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이 여자로 해요.” 

아델은 고개를 돌렸다. 허공 속에 떠 있는 리의 손이 주춤거렸다.

기본적인 것은 전부 완성되었다. 주인공과 배경 삽입곡까지 얼추 틀이 잡혔다. 만약 리가 아니었다면 진즉 후계자 자리를 박차고 나올 만큼 성가신 일이었다. 

아델은 역량에 맞지 않는 일은 가끔 ‘지루하다’라고 자위했다. 이것도 전부. 리의 소매 끝을 보는 일도 전부 지루했다.

리는 긴장감이 넘치는 분위기를 견딜 수 없는 듯 자리를 떴다. 차와 쿠키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아델에게서 멀리 달아났다. 

아델은 코트 속의 티켓을 만지작거렸다. B구역의 공연이 아닌 아델의 고향에서의 공연이었다. 작은 펍이었는데 60년대 밴드를 재구성한 리메이크 공연이었다. 

팀원들은 전부 아델의 친구들이었고 그들은 꽤 괴짜였다. 아마 리가 좋아할 것 같았다. 새벽 그리고 아침잠이 들 때까지 카일의 방안에선 음악이 끊기는 일이 없었다. 그건 리도 마찬가지였다. 성당 밖부터 심지어는 화장실까지 각기 다른 선율이 흘러나왔다.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슬퍼져요.]

[고독이 무서워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리가 음악을 듣는 이유였다.

아델은 리와 밖에서 만나고 싶었다. 성당이 아닌 말굽소리가 자작한 곳이라도. 인형처럼 이곳에서 고요의 폭력에 시달려야 하는 리가 아닌 스물여덟의 리가 궁금했다. 지루했지만 그럼에도 도전해볼 만한 일이었다.  

아델은 쿠키와 차를 준비하는 리에게 다가섰다. 그의 뒤에 바짝 붙었다. 리의 머리카락의 윤기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섰다. 이곳은 언제나 음악이 가득했기에 아델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리의 어깨는 각이 져있었다. 오른쪽 근육이 눈에 띄게 발달한 카일과는 다른 아담함이었다. 카일은 총을 쥐는 사람이었고 때로는 칼을 휘두르기도 하는 남자였다. 그럼에도 굳은살과 칼자국을 빼면 고운 손이었지만 집안에서 음악만을 듣는 리는 병든 물고기 같았다.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금붕어. 어항에 부딪히면 해초로 숨어버리는 금붕어.

아델은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리의 반응이 이상했다. 어깨부터 덜덜 떨리는 것이 둔한 움직임이었다. 앙상하게 떨리는 두 다리와 식탁을 쥔 두 손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경련했다. 

아델은 이상함을 느꼈다. 리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숨을 참았다. 이내 가슴을 부여잡고 그대로 식탁 밑으로 미끄러졌다. 아델은 초점 없이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그를 진정시켰다.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눈을 맞췄다.

“리, 아델입니다. 정신이 들어요? 어디 아픈 겁니까?”  

리의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리는 얼굴을 굳히고 앞치마를 거칠게 쥐었다. 창피하다는 얼굴이었다. 방금 전까지 죽어가듯 떨고 있던 리는 본래의 차가운 얼굴을 유지했다. 이 상황을 설명해 보라는 듯한 아델의 눈빛은 더욱 걱정스럽게 변해갔다. 리는 더 이상 그의 정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납치를 많이 당해서. 트라우마 같은 게 있어요. 카일이 야쿠자와 거래할 때였죠. 걔넨 손버릇이 안 좋았어요.” 

아델의 눈빛이 흔들렸다. 생선회 칼로 뼈와 살을 분리하는 잔혹한 상상을 한 것 같았다. 아델은 리를 놀라게 한 오른손을 그대로 자르고 싶었다. 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오히려 그를 안심시켰다. 카일의 이야기를 한 후 급격히 낯빛이 어두워졌지만 서로 모른 척하고 싶었다.

“이상한 일이죠. 난 카일에게 아무것도 아닌데 날 인질로 삼는다는 게. 사실 마피아들은 멍청할지도 몰라요.”

리는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아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건 카일과 피가 연결되어 있기에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카일은 아델의 어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디서 만났는지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아델은 알지 못했다. 카일이 씨를 뿌리고 무참히 버린 것은 문학에 조예가 없는 아델조차 손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눈빛과 공기, 손에 닿지 않는 무언가가 흘렀다. 리는 카일을 미치도록 사랑했고 카일은 그보다 더 리를 사랑할지도 모른다. 만약 아델은 그들이 서로를 사랑해 마지않는 격정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면 무너져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이 쓸쓸한 감정은 자신의 어미가 불쌍해서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아델은 리가 초면이 아니었다. 방금 전 깨달은 사실이었다. 리의 목덜미에 새겨진 문신은 ‘마피아의 여자’의 표식이었다. 물론 그것이 남자일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여인이었다. 

리의 하얗고 가는 목에 어울리지 않는 문신은 카일의 바코드 같은 것이었다. 

십 년 전 아델은 리우와 차이나타운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리우는 중국계 미국인이었고 망상에 찌든 마니아였다. 리우는 제 아비가 아편을 한 트럭 갖고 있다고 허풍을 떨곤 했다. 

그곳은 세상의 멋진 차들을 전시해 놓은 천국 같았다. 드림카, 슈퍼카. 성공의 징표. 감동도 잠시, 아델은 슈퍼카보다 더 환상적인 피조물을 발견했다. 일본산 외제차 속 뒤엉켜 있는 사내들을 보았을 때. 아델은 그날 평생 ‘남자’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절망했다. 

나직한 신음을 내뱉던 남자는 허리를 비틀었다. 그의 전라의 몸이 드러났다. 그리고 피조차 마르지 않은 타투 자국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새빨간 목에 맺혀 있는 핏방울들. 배를 곯은 사슴처럼 피골이 상접한 등뼈에는 파란 멍이 박혀있었다. 

슈퍼카 안에서의 정사가 이루어졌다. 아델은 리우와 함께 남자 둘을 구경했다. 아편은 잊은 지 오래였다. 아편보다 코카인보다 더욱 자극적인 마약 같았다. 아델은 조금 더 씁쓸해졌다. 그 표식은. 붉었던 문신은 어느새 번져있었다. 그 세월 동안 자신은 무엇을 놓치고 살았을까.

“사랑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알죠?” 

아델은 리를 따라 털썩 주저앉았다. 그에게 아픈 질문임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가 멍청한 얼굴로 ‘나도 카일을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한다면 이 엿 같은 기분이 나아질지도 모른다. 

“자꾸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밤이 되면 떠날 것 같은 불안감 말이에요. 그러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돼요.” 

리는 쓰게 웃었다. 웃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마치 십 년 전 차이나 타운에서처럼. 리가 진정 행복해서 웃어준다면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 것 같았다. 아델은 자신이 사춘기라고 생각했다. 만약 ‘사랑’이라고 인정해 버린다면 ‘리’가 불행해질 것 같았다. 아델은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입술에 댔다. 리의 식기에는 새것의 냄새가 진득했다.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듯. 아델은 리의 입술인 것처럼 오래도록 잔을 내려놓지 못했다. 

“아델이 자주 왔으면 해요. 커피 잔을 전부 쓰고 싶거든요.” 

리가 오른쪽 어깨에 볼을 비비적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리가 이렇게 웃어줄 때면 아델의 심장이 뻐근해졌다.  

리는 평생이 울적했고 매일이 좌절이었다. 혈액 속에 우울 세포가 잠식해 있는 것처럼. 

아델은 리의 환각제 같은 것이었다. 흥분과 망각. 둘 사이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리를 지배했다. 달콤한 억압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느껴본 적 없는 위험한 친절을 베풀었다. 

아델과 함께 있을 때 리는 무한히 방심하곤 했다. 

“새겨듣지 않아도 돼요…. 아델이 너무 편해져서… 나도 모르게…….”

리는 멋쩍은 듯 달아오른 두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 안았다. 아델은 리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아마 리는 본래 순수하고 천진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리의 눈꼬리가 접혀진 채 웃을 때 아델은 행복한 그를 떠올렸다. 언젠가는. 반드시 행복했을 리를 상상했다. 

카일의 위에서 헐떡거리던 남자가, 온몸이 멍투성이인 남자가, 햇살에 파묻혀 웃을 때면 그와 같은 나이가 되어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소년이었던 아델이. 놓쳐버린 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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