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백민후야. 네가 좋다고 했던 게 바로 나라고. 정후 저게.”
“민후 너, 약속했던 거완 틀려!”
“약속? 개 소리 하지 마. 너 한테 사랑한다 소리 했다는 말 듣고 골로 가고 싶었는데 약속? 개나주라 그래.”
“알았어! 그만! 그만해!”
다시 또 싸우려고 하는 둘에게 소리치고 나는 일부러 화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하나만 묻자. 나랑 처음 잔 사람이 누구야?”
내 질문에 둘의 안색이 동시에 굳었다. 머리가 짧은 민후, 아니 정말 민후인 민후가 인상을 찌푸리고 침대위에 앉아있던
“나야. 정후.”
“하지만, 넌 민후라고.”
“네가 민후라고 기억하고 있으니까. 난 몸이 안 좋아서 고등학교를 제대로 못 다녔어. 학교가 끝나면 민후가 학교 얘기를
들려주었었는데……네 얘기가 있었어. 민후한테 늘 사진기를 들이댄다고. 궁금해서 민후에게 네 사진을 부탁했어. 나는
널.”
“그래서 내가 네 사진을 정후한테 줬어. 정후가 그 동안 너 몰래 네 뒤를 쫓아다녔지. 그렇게 대학에 들어가고 작년에
대학하키에서 우승하면서 광고를 찍게 됐는데 정후가 광고사진 담당 밑에 네가 있다는 걸 알고는 그날만 서로의 자리를
바꿔치기 하기로 한 거야.”
“왜 민후라고 한 거야. 왜.”
“넌 나는 모르니까. 민후라고 기억하고 있을 뿐이니까. 내가 민후한테 부탁했어. 이런 일이 있으니까 도와달라고. 사실을
말하게 될 때까지, 나랑 바꿔치기 하자고.”
“그런데 넌 나를 찍고 싶어 했어. 링크에서의 모습도. 하지만 정후가 그것까지 흉내 낼 순 없으니까 부득이하게 그럴 때만
내가 정후를 대신해서 널 만난 거야.”
“정후를 대신해서 나랑 자면서?”
“…….”
“섹스도 대신해준 거라고?”
“대신하지 않았어. 하고 싶어서 했어.”
나는 두 녀석을 노려보았다. 쌍둥이 일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 수많았던 기시감들. 일기예보를 늘 봐왔으면서
태풍이 나를 덮치는 건 모르고 있었다. 나는 시트자락을 꽉 말아 쥐고 물었다.
“그럼 정후 넌 내가 민후랑 자는 거 알고 있었어?”
“민후니까 상관없었어. 우리는 원래부터 한 몸이고, 한 핏줄이니까.”
“난 반은 호기심이었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으니까.”
“어제는 민후가 오고 오늘은 정후가 오고 그 다음날은 민후가 오고 정후가 오고. 너희 둘……날 공유한 거야?”
“…….”
“…….”
머리를 짧게 자른 민후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정후는 그저 난감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제는 나랑 무슨 말을 했고 무슨 짓을 했는지 민후가 정후한테 다 말하고 정후는 민후한테 다 말하고……. 술을 많이
마셔서 기억이 안난다고? 머리가 나빠서 기억이 안나?”
“확실히, 그랬어. 난 정후가 하도 널 좋아해서 도와주고 싶었어. 너하고 있었던 일을 정후에게 상세하게 알려줬고 정후
역시 너하고 있었던 일을 나에게 상세하게 알려줘야만 했어. 그래야 공백의 틈이 생기지 않으니까.”
“미안해. 하지만 나도 오늘은 말하려고 했어.”
“내가 몰랐으면 평생 속였겠네?”
내 말에 둘의 표정은 더욱 굳었다.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비는 여전히 세차기 떨어지고 있었다. 창문가에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귀를 적시고 있었다. 나는 웅크린 채 고개를 숙였다. 양 민후들이, 아니 정후와 민후가 다가와 내
어깨를 쓸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말하려고 했어. 미안해. 미안해.”
“너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거 아니었냐? 왜 이렇게 놀라는 척이야?”
“미안해. 용서해줘. 백민후 너도 사과해.”
“아, 그래그래. 미안하다. 좇나게 미안하네.”
“화났어? 이해해줘.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 난 민후가 널 좋아하게 되리라곤 생각 못했어.”
“씨발. 콧구멍 쑤시는 것도 예뻐 보이는데 어떻게 안 좋아하냐? 백정후 너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네 놈이 용기 없으니까
날 끌어들여서 너 대신 고백시키려고 한 거잖아!”
“아니야! 난 민후 너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정말 시끄러운 쌍둥이들이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만! 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똑같은 얼굴을 번갈아가며
쏘아보았다. 난 정말 너무 놀라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거나,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란이었다. 나는 민후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민후가 두 개로 분리되며 서로 자기가 내가 사랑하는
민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분명 둘의 다른 성격을 다 좋아하고 있었다. 다정하고 신사적인 정후, 욕 잘하고 싸가지
없는 민후. 나는 다시 무릎에 고개를 묻어버렸다. 무의식중에 누가 더 섹스를 잘했는지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이 정말
치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정후도, 그리고 민후도 나에게 분명 만족을 주었다. 둘 다 테크닉이 기가 막힐 정도로 좋아서
내 뇌가 분해가 될 정도로 좋았기 때문에 누굴 골라야 하는지, 그 선택에 기로에 저절로 들어서며 섹스로 우선순위를
매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나는 다시 번쩍 고개를 들고 둘을 바라보고 물었다.
“백민후, 너 정말 날 좋아해? 백정후, 너 정말 날 좋아해?”
“쪽팔리게 똑같은 소리 두 번 하게 하지 마. 코딱지 파는 것도 귀엽다고 했잖아.”
“응. 좋아해. 그때부터, 민후가 네 사진을 줬을 때부터.”
“백민후, 백정후. 나랑 섹스 하던 거 서로 얘기했지. 내가 어떻다는 거 서로 다 얘기했지. 나, 도마 위에 올려놓고
너희둘이 시시덕거렸지.”
말 많은 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인 모양이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살면서 이랬던 적이 별로 없었다.)
울먹울먹 말했다.
“정후 너, 나 좋아한다면서. 민후 너, 나 좋아한다면서. 아무리 너희가 쌍둥이지만 내가 다른 남자랑 잤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았어? 정말 날 좋아하는 거야?”
“보통의 인간하고 비교하면 안 되지. 난 정후가 너랑 다시 잔다고 해도 상관없어. 정후니까. 하지만 누굴 사랑하는 지는
확실하게 해 두고 싶어.”
“나도 그래. 민후라면 상관없어. 하지만 누굴 사랑하는 지는 확실하게 알고 싶어. 난지, 아니면 민후인지.”
둘은 어서 골라달라는 얼굴로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갑자기 번개를 맞아 둘로 쪼개진
것처럼 골라달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고른단 말인가. 다시 번개가 쳐서 이 둘을 붙여놓던지 날려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란스러워하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민후가 말했다.
“넌 고를 수 있어. 저 뒤에 사진을 봐. 나하고 정후. 네가 완벽하게 따로 분리시켜 놨다고.”
흥분된 어조로 이번엔 정후가 말했다.
“그래. 한두개 틀리긴 했지만. 정말 깜짝 놀랐어. 부모님도 나하고 민후를 구분하지 못하는데. 넌 사진으로 우리 둘을
구분시켜 놨잖아.”
“그때부터야. 네가 우리 둘 중에 누굴 더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졌어.”
그건 알고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이 바보 쌍둥이야. 갑자기 눈물이 솟구쳤다.
“이 멍청이들아. 누굴 좋아했다면 그 사람 사진만 붙였을 거야. 다 마음에 드는 사진만 붙인 거란 말이야.”
울먹거리며 말하자 민후가 짧아진 제 머리를 긁적인다.
“그렇다면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군. 그만 좀 질질 짜고.”
“왜 울어. 잘못은 우리가 했는걸. 울지 마.”
다독이는 손길이 두 명이라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눈물을 그치고 둘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둘은 외모만 빼면 성격도 좋아하는 것도 판이하게 달라. 겉모습만 보지 말고, 누가 더 좋은지 느낌은 말할 수
있을 거 아니야.”
“난 둘 다 좋았어. 다정했던 정후도 좋았고, 만날 화만 내는 민후도 좋았고.”
“이거 답답하네. 대충 까놔봐.”
“대충 어떻게 까네! 둘 다 좋단 말이야! 난 몰라, 이 나쁜 놈들아. 미리 말해줬어야지. 난 이제부터 사랑하기로
결심했는데……. 둘로 쪼개져 버리면 어떡해.”
“쪼개져 있긴 원래부터 쪼개져 있었어.”
나는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안겨야 할지 난감했다. 이 가슴에? 저 가슴에? 창문을 깨고 밖으로
추락해버리고 싶었다. 나는 그러다 내가 세상의 모든 문화와 도덕으로부터 일체의 면제를 받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둘의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말했다.
“난…… 너희 둘 다 좋아. 둘 다, 사랑해. 그럼 안돼?”
민후와 정후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둘 다 똑같이 생겨서 쳐다보면 거울을 보는 기분일 것 같았다. 머리가 짧은
민후가 고개를 끄덕했다.
“정 순위를 못 정하겠다면 상관없어. 일단 나는. 정후 넌?”
“나도 민후라면 상관없어. 우리는 뭐, 한 사람이라고 해도 되니까.”
“정말 괜찮아? 나중에 화내지 않을 거지?”
“우리가 왜 화를 내. 잘못은 우리가 했는걸.”
둘이 동시에 날 살포시 안아주었다. 어느 쪽으로 몸을 기울어야 할지 난감해서 그저 가만히 있었다. 민후가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동시에 정후가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누구에게 입을 맞춰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민후의 손이
시트 자락을 여미고 있는 내 가슴으로 쓱 들어왔다. 정후의 손이 내 가랑이 사이로 쓱 들어왔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서 그저 가만히 있었다. 비바람은 더욱 더 그악스러워지고 있었다. 오늘 밤, 대지가 물에 잠겨 태풍에 빨려들어 갈
것만 같다. 나는 누구에게도 입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내 하체와 상체를 공유하고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내
편견과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나는 그날 밤 이들을 사랑해서 다행이라고 안심하는 배덕자인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모든 축제, 모든 승리, 모든 드라마. 아마 랭보도 이처럼 극적인 경험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평소처럼 소리를 마구
질러댔다. 민후가 내 입을 틀어막고 정후가 막지 못하게 했다. 시끄럽단 말이야. 분위기 다 깨. 놔 둬. 귀엽잖아. 꼭
저러면 장난치는 것 같다고. 아니야. 좋아서 그러는 거야. 솔직하잖아. 솔직한 것도 정도가 지나친 거 아니야? 왜, 난
귀여워서 좋더라. 말 많은 쌍둥이들의 대화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왔다. 완벽하게 체면과 이성을 벗어버린 나의
육체. 그리고 나의 정신. 백민후, 백정후. 쌍둥이가 내 의식을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당긴다. 새로운 꽃, 새로운 별,
새로운 육체. 새로운 언어. 기존의 것을 파괴하길 원하는 나의 기갈에 쌍둥이가 마른 식도를 적셔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나는 옆으로 누워서 자는 것이 어릴 때부터의 버릇이었다. 하지만 몸을 아무 곳으로도 돌릴 수가 없었다. 사나운
짐승들처럼 음험하게 침대 위를 날뛰었던 우리 셋은 지쳐서 반쯤은 골아 떨어져 있었다. 미농지 같은 나의 얇은 잠 속으로
현실, 혹은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말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정말 말이 많은 쌍둥이들이었다.
“씨발, 그 얘긴 왜 안했어?”
“말 한 줄 알았지. 그래서 아이스크림이 주식이라는 거야. 밥은 안 먹고. 지난번에 케이크 잘못 말해줘서 엉뚱한 거
사왔잖아.”
“케이크가 다 똑같지. 다른 건 또 뭐냐.”
“치즈케이크가 먹고 싶었대. 그러는 넌 왜 입으로 해줬다는 말은 안했어?”
“부끄럽잖아. 새꺄.”
“하여튼 그런 말을 했어야지.”
“장난 아니게 귀여웠지. 얼굴 새빨개져서는.”
“나도 보고 싶다.”
“야 은근슬쩍 그 쪽으로 돌리지 마.”
“아니 팔이 불편해 보여서. 돌리려고 한 건 아니고.”
내 몸은 그들이 끌어당기는 대로 왼쪽으로 눕혀졌다, 오른쪽으로 눕혀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삼겹살 먹기 싫다는데 억지로 데려갔다면서.”
“나는 삼겹살이 먹고 싶었어.”
“민후 넌 배려가 없어.”
“지랄하네. 뭐냐 그게. 먹는 거냐?”
“얼굴 찡그린다. 시끄러운 가봐.”
“얜 암만해서 잘 안 깨. 요거 봐라. 코 찡그리네.”
“귀여워. 민후 너도 귀엽다고 생각했으면서 아닌 척 한 거지?”
“아 그래그래 귀엽다. 귀여워.”
“진작 이럴 걸.”
“그러게. 진작 이럴 걸. 괜히 사서 고생했잖아.”
그들은 나에게 백치의 끔찍한 웃음을 안겨주었다. 내 얼굴을 쓰다듬고 내 몸을 쓰다듬는 그들의 손과 입술은 하나가
아니었다. 나는 꿈속에서 늑골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나를 봤다. 뼈마디가 불거진 나의 얼굴은 피폐해져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이십년쯤을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
“여기, 여권. 학교엔 잘 신청했어?”
“네.”
“나도 너 데리고 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따라 나설 줄은 몰랐어. 무슨 일 있어?”
“집에 이상한 생물들이 살아요.”
“이상한 생물?”
“무지하게 시끄럽고 말이 많아요. 도망가는 게 상책이거든요.”
조영인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피식 웃으며 딴소리를 한다.
“이번에 가서 잘 봐. 배울 게 많으니까.”
“저기, 선생님. 아프리카에 가면 찍을 게 많나요?”
“세상 어느 곳이든 찍을 거리는 많아. 보지 못할 뿐이지. 보는 눈을 가져야 해. 알겠냐?”
“치잇.”
나는 똑같이 닮은 이상한 생물들에게서 도망친다. 아프리카로. 아프리카로 간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만 피해야 한다.
랭보처럼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그 사랑에 동참할 수 없다. 나의 예술성은 보존되어져야만 한다.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은
나의 의무인 것이다. 나와 조영인 그리고 스태프들은 지금 아프리카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타려고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
가서 정신을 녹슬지 않게 하는 것들을 볼 것이다. 백민후와 백정후는 내게 태풍이었다. 태풍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인간은
죽는다. 그 누구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랭보도 그리고 나 역시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태풍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나는 물론 태풍을 사랑한다. 그것을 찍고 싶고 명멸하는 찰나를 간직하고 싶다. 하지만 태풍과 사랑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아마 나는 랭보처럼 지쳐버려 절필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랭보에게 신선한 수액을 공급받아 순간
미쳐버린 베를린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태풍을 사랑한 것은 분명 멋진 일이다. 동시에 아름답고 고귀한 체험이다.
하지만 언젠가 이렇게 읊조리게 될 것이다. ‘예전에,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온갖
술이 흐르는 축제였다.’한 때 사랑이라는 것과 시의 열정으로 진실 된 언어를 구사하고자 지옥에 온 몸을 바쳤던 랭보.
그것이 지나버린 축제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허망했을까. 민후와 정후의 얼굴이 떠올랐다. 둘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고 쪼개져 버린 하나였다. 그 둘은 처음부터 하나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하나라고 굳게 믿었다. 쪼개질 수 없는
하나라고. 내 카메라에 담았던 그들은 착란증세의 증거일 뿐인 것이다. 나는 진실을 알지도 못한 채 나의 상상력에 근거해
피조물을 탄생시켰다.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 같은 태풍 앞에 미천한 존재인 나를 발견한 것처럼 진실을 마주한 나는,
나의 빈약하고 빈곤한 상상력과 감수성이 그 둘이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는 것보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이십년을
한꺼번에 늙어버린 듯한. 피폐함. ‘나는 더 이상 말할 줄을 모른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두려운
일이다. 모래 위에 쌓여진 진실. 그리고 언어. 휘몰아치는 삶 속에 정체성 부재로 고민하였던 랭보처럼 나를 지옥에
휩쓸리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랭보, 랭보. 우리는 이제 동지가 아니오.
이제 나를 배반자라고 칭해주오.
나는 그들을 버리고 떠납니다.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내 영혼이 고갈될까 무서워요.
나를 비겁자라고 말해도 좋아요.
하지만, 당신처럼 당신을 한때는 불태웠던 예술을 잊혀진 축제라고 부르진 않을 거예요.
그래서 나의 비겁함은 때로 정당할 겁니다.
“가자.”
조영인이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으쌰 일어섰다.
태풍을 미친 듯이 찍어댔던 그날, 내 카메라엔 필름이 없었다.
랭보화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