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패 같아. 잘 어울려.”
“이제 헷갈리지 마라.”
“뭘?”
내 의문이 천연덕스럽다는 듯 녀석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저 그런 녀석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녀석이 또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미용실 앞에서 헤어졌다. 엉덩이가 아파 닌자를 타기가 거북해 녀석에게 열쇠를 주고 대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샀다. 여름이라 밥보다 지금은 아이스크림이 내 주식이었다. 콘 종류, 컵 종류,
막대 종류. 이것저것을 잔뜩 사들고 계산대 위에 좌르르 쏟아 놓았다. 편의점 알바생이 내 얼굴을 힐긋 보더니 하나씩
집어 들고 바코드를 찍어댄다. 가끔 저 단순노동이 재미있어 보일 때가 있어 내가 해보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
라왔으나 참았다.
“손님 태풍이 또 올라오고 있다는 거 아십니까?”
그는 바코드를 찍어대는 숫자가 많아 지루했는지 나에게 말을 건넨다. 내가 자주 왔던 탓에 우리는 이미 안면이 익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정말이요?”
“네. 무시무시한 속도로 북상하고 있습니다. 괌의 북서쪽에서 발생한 중형급 폭풍이었죠. 처음 발생했을 때는 중심기압이
996헥토파스칼이고 중심 최대 풍속이 18m의 열대성 폭풍에 지나지 않았는데 점차 북상하면서 태풍으로 발달해 중심 기압이
낮아지면서 더욱 강해졌죠. 중심기압이 낮을수록 태풍이 힘이 강해진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한반도의 역대 태풍 중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합니다. 최저기압이 920헥토파스칼이니 최대 순간 풍속이 초속 60m정도 되지요. 아마 엄청난 재산
피해와 인명 피해를 낼 것 같습니다. 설마 이번에도 일본까지 가기도 전에 죽지는 않겠지요. 팔천이백원입니다. 봉투
필요하시죠? 봉투 값 이십 원 추가해 팔천이백이십 원입니다. 요샌 봉투 값 안 받으면 법에 걸려요. 이십 원 있으세요?”
“태풍의 이름이 뭔가요?”
나는 돈을 건네면서 말했다. 만원 받았습니다. 대꾸하곤 남자가 말을 이었다.
“태풍의 이름은 우리나라가 제출한 ‘나리’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외국에선 쌍태풍이라고 해서 제메나이라고도 한답니다.”
“제메나이? (Gemini)”
“쌍둥이자리라는 뜻이죠. 또 잘난 척하고 오지랖 넓은 양키들이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요. 한국에서 예쁜 이름 지어 놓은
것이 샘난 모양입니다. 지난번에 북한에서 지은 매미, 사실 이건 좀 깼죠. 제메나이. 어쩐지 입에 착 안 감기네요. 자,
받으세요.”
쌍둥이자리 태풍이라. 나는 봉투를 받아들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을 열자마자 에어컨을 틀고 아이스크림을 작은 냉장고에 쑤셔 넣었다. 지금 보니 소형 냉장고는 이 아이스크림을 다 넣어 둘 만큼 넓지 않았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얼음을 빼내고 안을 싹 비운 후에 아이스크림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날씨가 꾸물꾸물해지고 있었다. 설렘과 두근거림이 한량없이 밀려왔다. 어쩐지 하늘은 섬뜩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달려드는 모기를 쫓아내며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관찰했다. 먹구름이 잔뜩 모여들고 있었다. 공포스럽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한 장면이었다. 누군가 새카만 먹구름을 잔뜩 끌고 와서 넉넉하게 하늘을 덮고 있던 하얀 뭉게구름과 함께 휘젓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느님이 천지창조를 할 때 하늘이 이랬을까.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눅진눅진하고 뜨거운 여름 공기를 순식간에 잠재우는 빗줄기였다. 서늘한 기운이 피어오르듯이 퍼지고 있었다. 나는 구석 벽에 대책 없이 쌓아둔 상자를 뒤져 우비를 찾아냈다. 내 카메라는 방수하우징이 장착되어 있었다. 녀석은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비를 입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지 옥상 출입구 앞에 무언가가 잔뜩 먼지 낀 채 쌓여 있었다. 그것들을 한 곳에 세워두고 옥상으로 나갔다. 휘몰아치고 있는 구름의 모양이 선뜻하게 다가왔다. 그 광경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삼각대를 세우고 카메라를 설치했다. 바람이 불어와 우비가 벗겨질 듯 펄럭거렸다. 기관총이 난사되는 것 같은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세상은 블루블랙의 그레이톤으로 변하고 있었다. 영화 속 인 것만 같은 기묘한 기분에 잠기며 카메라를 조절했다. 셔터스피드를 1/250초 이하로 조정했다. 조리개의 수치를 적게 해 구경을 넓히고 렌즈의 감도를 측정해보곤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하는 소리가 내 심장을 두들겨 깨우는 것만 같았다.
내 몸의 무게로는 지탱할 수 없을 만큼의 강한 바람이 불어와 허리를 잔뜩 숙였다. 우비는 차라리 벗는 게 나을 정도로
걸리적거리며 제 역할을 다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비는 수직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위
에서 몰아치고 있었다. 어느새 비에 흠뻑 젖었는지 신발까지 질척거리고 있었다. 그때 번쩍 하고 번개가 쳤다. 얼마 뒤
쿠르릉 하면서 천둥이 울렸다. 마치 하느님이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번개가 번쩍! 할 때마다 세상은 낮보다 환해졌
으나 그것은 너무 순식간의 찰나라 도무지 카메라에 어떻게 담아야 할지 난감했다. 번개에 맞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린 나는 셔터 누르기에만 온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바람 때문에 덜컹덜컹 거리던 허술한 입간판이 급기야 한쪽이
떨어지며 기우뚱했다. 그 모습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다시 번개가 쳤다. 번쩍- 망막에 하얀 잔영을 남기고 동시에
도시 전체의 불이 꺼져버렸다.
“…….”
암흑, 암흑이었다. 쿠르릉 천둥이 울리며 지축을 뒤흔들었다. 플래시를 터트리며 위치를 가늠하려고 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카메라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젠장, 갓뎀, 퍽! 쉣!"
배터리 교체한 지가 꽤나 지나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 있었다. 암흑 속에서 비바람이 몰아쳤다. 번개가 번쩍 할 때 세상은 비대한 골격을 하얗게 드러냈고 동시에 사라졌다. 바람에 몸이 밀려 엉금엉금 기어서 옥상 출입구를 찾아다녔다. 번개가 번쩍 할 때마다 잘못된 진로를 수정해 가까스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난간을 부여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 오피스텔 입구에 도착해서 다시 소리를 질렀다. 열쇠를 안 가지고 나온 것이다. 컴컴한 와중에 다른 집도 혼란스러운지 웅성웅성 대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누가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빗방울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관리실로 내려가 열쇠를 찾아오면 좋겠는데 엘리베이터까지 멈춰버려 이 어둠을 뚫고 비상구를 해쳐나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조금씩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태풍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 앞에 자신이란 존재는 얼마나 미약한 것인지. 한줌도 되지 않는 내 존재를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어쩌면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은 착각이 아니라 착란인 것인지도 모른다. 랭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결국 자연 앞에 한없이 작은 존재일 수밖에 없는 내가 모든 문화와 도덕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그 모든 것들로부터 예술성을 빌미삼은 면죄부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랭보의 고백대로, ‘허위를 먹고 살아온 나’의 존재가 절절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과 자연 앞에 예술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내가 창조해낸 모든 시적인 피조물들은 하찮은 착란증세의 증거일 뿐인 것이다. 나는 랭보가 왜 절필하였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의 가소로운 예술성이 이 세상을 뛰어넘는 거라고 믿어왔다. 나의 상상력은 실상을 무시한 허구의 산물일 뿐이다. 태풍은 저토록 거대하게 꿈틀거리는데. 타협할 수 없고 겸손해질 수 없는 랭보는 그리하여 예술을 떠나버렸다.
“뭐해?”
고개를 들어 검은 인영에 시선을 주었다. 민후의 목소리였다. 내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울 때 나는 그의 품에 풀썩 안겨버렸다. 민후도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와 그악스럽게 그의 옆구리에 팔을 둘렀다.
“열쇠 안 가지고 나왔구나. 왜 이렇게 젖었어? 무서워?”
“응. 젖었고 무서워.”
그러나 독재자 랭보보다 나의 예술은 겸허했다. 나는 랭보처럼 극단적으로 내 예술성이 허위라고 판단될지라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랭보가 절필한 이유는 허위의 예술을 깨닫기도 했지만 이미 심신이 많이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냉소적이며 비장한 마지막 작품 작별에서 랭보는 시적 표현을 유물론적으로 그의 삶에 실행하고자 하였다.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그는 ‘농부’로 돌아갔다. 그토록 애써 피하던 자신의 원래 존재로. 초라한 일상생활의 범속함 속에 돌아가
자신의 허위를 속죄하려고 했다. 랭보는 지독하리만치 소모적인 짧은 생애를 예술이랍시고 실행해서 자신을 망가뜨렸다.
신에게 대항하였던 극과 극의 예술성. 귀가 얇은 나는 민후를 사랑하는 일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민후와의 사랑이
소모전이라 내 영혼이 모두 고갈되어 버리면, 나는 무엇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걸까. 나의 첫 번째 판단대로 모든 감정에
빠져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조심스럽게 그런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춥다. 들어가자.”
“민후야.”
“왜.”
컴컴한 어둠 속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에게 체온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처사인가. 대답 없는 내 말을 기다리지 않고 민후가 문을 열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눅눅한 공기로 실내가 잠겨 있었다. 민후와 나는 어둠 속에서 옷을 벗었다. 더듬더듬 욕실로 옷을 가지고 가 서로 양 끝을 쥐고 돌려 물기를 짰다.
“왜 이렇게 풀썩 젖었어?”
“옥상에서 사진 찍었어.”
“그러다가 번개 맞으면 어쩌려고.”
물기를 꼭 짠 옷을 방바닥에 대충 널었다. 우리는 알몸으로 침대 속에 기어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한 여름의 갑작스런 태풍으로 온도가 무섭게 하강하고 있었다. 체온으로 체온을 비볐다. 37.2C가 되기 위해. 그러나 나는 가능하면 민후와 접촉하지 않으려고 했다. 사랑으로 인해 나의 감수성이 마모될까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민후가 차가워진 내 팔을 제 손으로 문질러댔다. 다시 번개가 번쩍 일었다. 방안의 풍경이 일순 섬광 속에 하얗게 드러났다 사라졌다. 찰나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내 앞의 남자와 방안의 잔영이 망막에 남아 아른거렸다. 망막의 잔영을 더듬다 소리를 지르며 민후에게서 떨어졌다.
“으아악!”
결국 쿵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괜찮아? 하고 반사적으로 민후가 나에게 다가왔고 다시 번개가 쳤다. 번쩍! 하얗게 모든
것이 드러났다. 나는 민후의 얼굴을 보고 다시 기겁을 하고 있었다.
“너, 너, 너 머리가, 머리가.”
“머리라니?”
너,너,너,너! 손가락을 가리키며 허둥지둥 버벅거리다가 침을 삼키고 소리쳤다.
“너 분명히 낮에 머리를 밀어버렸잖아. 근데 어떻게 머리가 밀기 전이랑 똑같은 거냐고! 귀신이냐? 너 닌자 타고
돌아다니다가 죽어버린 거지!”
“……내가 머리를 잘랐다고?”
“땜통까지 생겼단 말이야! 너 닌자타고 사고 난 거야? 귀신이 된 거야?”
“죽긴 누가 죽어!”
내 앞의 민후가 외친 것이 아니라 현관 쪽에서 목소리가 터졌다. 정전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 계속 되고 있었다.
민후가 민후의 목소리로 민후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 밀었냐?”
“그래.”
“왜 밀었어?”
“저 새끼가 누굴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서.”
“쟨 아무것도 모르잖아.”
“아니, 알고 있어. 알면서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거야.”
“몰라. 아무것도.”
민후가 저 혼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알아, 아니 몰라. 안다고, 몰라. 알고 있어. 모른다니까. 혼란스러운 중에 다시
번개가 쳤다.
“으아아악!”
나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민후가 둘이었다. 하나는 침대 위에 하나는 침대 앞에. 하나는 머리가 길고 하나는 머리가 짧은
민둥산이었다. 나는 서랍을 뒤져 더듬더듬 플래시를 찾았다. 만년필 겸용 손전등을 찾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잡상인에게
샀던 그 물건이 퍼뜩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손에 플래시가 잡히자 팍하고 불을 밝혔다. 그리고 침대위의 얼굴과 침대
앞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확인했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표정, 똑같은 목소리의 민후가 두 명이었다. 내게서 조명을 받을
때마다 그들의 얼굴이 실팍하게 찡그려지고 있었다.
“……백,백민후. 귀,귀신이면 당장 피하는 게 좋을 거다. 나, 나는 우선 기독교 신자라서 너, 너희들이 나한테 해코지도
못할 것이고, 더, 더불어서 나는 불교 신자이기도 해서 너희들이 나, 나한테 귀신 짓 하려고하면, 나는 독경을 외울 거고,
또, 그리고, 또, 백, 백민후, 민후야. 이러지 마.”
내 손에 들린 손전등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우며 한마디 했다.
“지랄 쌈 싸먹고 있네.”
손이 내 몸에 닿자마자 히익, 하고 질겁했다. 놀라는 내 손을 콱 잡아채고 녀석이 제 머리를 만지게 했다. 분명 낮에
미용실에서 자르고 난 후의 짧은 머리칼이었다.
“백정후, 사실대로 말하자.”
“약속이 틀려.”
“나도 좋아하게 된 걸 어쩌란 말이야!”
“약속이 틀려. 백민후.”
낡은 발전기가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발동이 되는지 불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주변이 밝아지자 나를 붙잡고 서 있는
민후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민후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표정, 똑같은 몸뚱이. 내가 무언가를
깨닫기도 전에 침대위에 앉아 있던 민후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맞아. 우린 쌍둥이야.”
“귀신같은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내 옆에 서 있던 민후가 그렇게 말하곤 시트를 끌어다 내 어깨에서부터 덮어 가슴에서 여며준다. 나는 그들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이 귀신 놈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아까 번개를 맞았던가. 번개가 칠 때 뭔가 몸이 뜨끔한
것 같더니, 번개를 맞은 건가.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놔두고 민후는 민후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백민후 약속이 틀리잖아. 이렇게 갑자기.”
“너도 나 인척 하기 지쳤고 나도 너 인척 하기 지쳤어.”
“지치다니, 내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 그리고 너.”
“그래, 나도 쟤 좋아. 너만큼, 아니 너보다 더.”
“나쁜 새끼. 내가 먼저 좋아했어. 내가 먼저!”
“씨발, 좋아하게 된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민후는 민후와 싸우기 시작했다. 니가 잘했네, 못했네. 내가 먼저니 제가 먼저니. 한번 죽어 볼래, 죽어보자. 입 닥쳐,
못 닥쳐. 꺼져버려, 못 꺼져.
“그만!”
으르렁거리며 싸우려고 하는 둘 사이에 끼어들어 뜯어 말리며 외쳤다. 씩씩거리는 민후와 민후를 떼어놓고 가장 혼란스러운
사람은 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나는 일단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민후가 때로 다르게 보였고 어제 그 민후가
오늘의 그 민후가 아닌 것 같다는 기시감을 늘 느껴왔다. 그래, 쌍둥이. 모르고 있었을 뿐, 유추하면 충분히 추론해 낼
수 있는 정답이다. 데자부, 미묘한 기분. 그 일기예보를 보고 잘 판단했어야 했다. 그것이 태풍인지 아닌지를 말이다.
나를 두고 싸우려고 하는 녀석들을 멀찌감치 떨어트려 놓고 바닥에 풀썩 앉았다. 한 명의 민후는 침대 위에, 한 명의
민후는 책상 의자에. 나는 그들을 수십 번씩 번갈아가며 바라보았지만 역시, 너무나 똑같아서 머리 모양이 아니면 구분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만 싸우고 우선 구분을 해보자. 한 명이 백민후면 다른 한 명은 뭐야.”
“정후. 내가 정후야.”
침대위에 앉아 있던 민후가 자신을 정후라고 소개했다. 나에게 늘 친절했고 하염없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던 것이 정후.
그럼 성질 잘 부리고 신경질 적이었던 것이 백민후겠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