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4)

나는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 한 갑을 샀다. 우리 오피스텔 건물 편의점은 늘 한산한 편이었다. 나는 계산을 하며 알바생에게 물었다. 혹시, 일기예보 보셨어요? 나와 동갑이거나 아니면 한살 많거나 적을 것 같은 남자가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곧 덧붙였다. 이천육백원입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오천 원짜리를 꺼내 내밀고 물었다. 태풍은 온대요, 안 온대요? 남자가 바코드를 띡, 찍고는 담배를 내밀고 말했다. 빠져나갔어요. 오천 원 받았습니다. 거스름돈 이천사백 원 받으세요. 나는 잔돈과 담배를 받아 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다. 거짓말. 남자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어제 이틀 동안 중심기압이 800헥토파스칼로 강해지면서 제주도에 진입했죠. 루나는 제주도 서귀포 지점에서 방향을 갑자기 북쪽으로 바꾸어 같은 날 12시경 전라남도 남쪽 해안에 상륙했어요. 그 뒤, 전북 남원, 무주, 충북 지방 영동, 충중, 보은, 강원도 평창, 인제, 강릉, 속초를 지나 바로 어제 속초 북동쪽 지점으로 빠져나갔죠. 불행하게도 열대성저기압으로 힘이 약해져 일본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어요. 불행하게도 말이에요. 일본에는 진입하지도 못했죠. 우리나라만 된통 당했다는 겁니다. 그래도 다들 당하면서도 일본으로 어서 꺼지라고 빌었습니다만. 뉴스를 전혀 안 보시나 봐요? 손님, 이쪽으로 주세요. 육천이백오십 원입니다. 봉투 필요하세요?”

나는 내 뒤의 남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편의점을 나왔다. 태풍이 벌써 빠져나가다니, 나도 모르게 자기들 멋대로 태풍이 지나가버렸다. 퀭한 쓰라림 같은 것이 가슴을 훑고 있었다. 나는 결코 태풍을 이런 식으로 보낼 생각이 아니었다. 닌자를 타고 태풍의 중심으로 가서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 우리나라엔 수십 개의 태풍이 밀려왔다. 어떤 태풍은 서태평양에서, 어떤 태풍은 남태평양에서, 북태평양고기압의 기압골을 따라 편서풍을 타고 우리나라로 이동해 왔다. 그러나 나는 단 한번도 그 태풍을 맞아본 적이 없었고 기다린 적도 없었다.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태풍을 기다리고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풍은 나를 피해가 버렸다. 내가 명멸하는 저의 찰나를 찍어버려 내 사진 속에 갇힐 까봐 나를 피해간 것이다. 아니면 내가 어리석어서 그냥 보내버린 걸까. 나는 다짐하고 다짐했다. 다음에 태풍을 만나면 절대로 어리석게 그냥 보내지는 않을 거라고, 태풍의 안으로 랭보처럼 뛰어들 거라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야!”

내 손은 담배각의 비닐을 뜯고 있었다. 고개를 돌렸다. 성이 제대로 난 얼굴로 백민후가 서 있었다. 다중인격자 납시오. 어제는 온화 컨셉, 오늘은 짜증 컨셉. 나와의 거리를 단 몇 걸음으로 후다닥 줄인 녀석이 바짝 다가와 으르렁거렸다. 왜? 하고 물으니 다짜고짜 아까 그 새끼 누구야! 하고 소리를 지른다. 나의 눈엔 그저 그것이 백민후의 월권이거나 권력남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말하면 네가 아냐? 그렇게 쌜쭉했더니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구석진 벽에 기대섰다. 손안에서 뜯어낸 비닐 껍데기가 요란스럽게 구겨지고 있었다. 녀석이 엘리베이터에 따라 올라타며 닫힘 버튼을 마구 눌러댔다. 협소한 공간에 둘만 있게 되자 백민후는 아예 고삐를 풀어버리고 화를 낸다.

“아까 그 새끼 뭐야.”

“그 새끼라니.”

“널 태워다 준 그 새끼가 누구냐고!”

“조영인.”

“누가 그 새끼 이름 궁금하대!”

나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 아, 시끄러워. 떠벌떠벌 떠들어대는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그 새끼랑 너랑 무슨 사이냐고!”

“공적인 사이.”

“…….”

순식간에 입을 다무는 민후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내가 벽에 붙여 놓은 사진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버버 거리기까지 했다. 어제 봐 놓고선. 오버하기는. 녀석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일그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똑같은 얼굴의 똑같은 사람. 이상한 기시감이 또 나를 덮쳐온다. 어쩌면 이 기시감은 

일기예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기시감을 잘 더듬으면 태풍이 어디쯤 와 있는지 알 수 있을까. 파고다공원의 할머니는 

무릎이 결리는 것으로 태풍을 감지하고 까치가 집을 높게 지으면 태풍이 올 것인지 아닌지를 미리 예측할 수 있다.

 하등동물인 해파리는 초음파를 감지해서 태풍이 밀려오는 것을 몇 시간 전에 알 수 있다. 나도 이 이상한 기시감을 더듬어 태풍이 어디쯤 와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잘 생각하면, 그러니까 잘 생각을 해봐야 한다.

“어제도 봤으면서, 너 되게 오버한다.”

“…….”

나한테 마구 쏟아내던 그 화를 다 잊어버린 듯 녀석은 말이 없었다. 하긴 내가 봐도 편집증환자의 솜씨 같다. 자기 얼굴 수백 개가 남의 집 벽에 도배되어져 있다는 것은 봐도, 봐도 충격적인 모습이겠지. 나는 갑자기 의식이 구정물처럼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걸 네가 나눠 붙인 거야?”

“어제부터, 나누긴 뭘 나눠. 그냥 다 넌데.”

“…….”

나에게 다가와 녀석은 내 팔목을 확 휘어잡고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중심축을 잃은 나는 휘청하며 그에게 풀썩 안겼다. 

“너 다 알고 있는 거지?”

“응. 이해해. 인간은 누구나 다 정신병을 앓고 있으니까.”

“너 정말 이상한 놈이야.”

“네 정신병은 재미있어. 덜 심심해.”

“…….”

“그나저나 팬티 말이야.”

“팬티?”

“네 팬티, 너 팬티 안 잃어버렸어?”

“내가 그딴 걸 왜 잃어버려.”

“…….”

그럼 내가 어제 샴푸로 비벼 빤 그 팬티는 누구 것이란 말인가. 비록 바람에 날아갔지만. 나는 그의 가슴에 안겨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내 아름다운 피사체. 팬티를 벗고 다니는 노팬티의 피사체. 팬티를 잃어버렸는지 입고 있는지 벗고

 있는지도 모르는 불쌍한 다중인격의 피사체. 단기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피사체. 나는 갑자기 걱정스러워서 그의 바지

 지퍼를 끌어내렸다. 뭐하냐! 버럭 소리를 지르는 녀석의 지퍼 속으로 손을 쑤욱 집어넣었다. 다행히 팬티를 입고 있다. 

“야! 넌 도대체가. 진짜 미친놈 아니야? 하여튼 넌 다 잡은 분위기 망쳐놓는데 뭐 있어!”

“저기, 나 정말 걱정이 되서.”

“그 새끼 지렛대랑 내 지렛대랑 비교하는 거냐? 어?”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녀석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내 지렛대가 더 크네 튼튼하네, 나보다 건실한 놈은 본적이 없다느니. 그런 말을 떠들고 있는 녀석을 뒤로하고 우선 씻었다. 조영인이 잘 먹여준 덕에 성마르게 배가 고프거나 하진 않았다. 씻고 나와 아직도 구시렁거리는 녀석을 지나쳐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나는 곁에 누군가가 없으면 잠을 깊게 하지 못한다. 자유롭길 원하면서 애욕에 빠져 섹스를 갈구하는 나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외로움을 잘 타는 성미인 것이다. 내 잠은 얇은 막 같아서 현실과 의식의 단절 사이에 끼인 투명한 잠자리 날갯죽지 같았다. 반은 자고, 반은 깨어 있는, 내 잠은 무척이나 얇으나 길기는 엄청 길다. 깊게 못자는 만큼 얇게 오래자려고 발버둥쳐대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침대에 누워 까딱까딱 손가락으로 녀석을 불렀다. 나를 노려보던 백민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가와 옆에 눕는다. 나는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리며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포기한 듯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일렁거린다. 물기어린 유리컵의 어룽거리는 구름무늬처럼. 그의 셔츠를 활짝 벌리고 나는 고개를 드밀었다. 단단한 허리를 끌어안고 나는 녀석의 목에 목젖에 입을 맞추었다. 쪽, 쪽, 쪽, 츕, 츕, 츕. 혀를 움직이고 이를 세워 유두를 핥고 깨물고 빨았다. 거칠어지는 녀석의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열심히 혀를 놀렸다. 내 아름다운 피사체를 흥분 시키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고개를 움직여 옆구리를 혀로 간질였다.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 골반에 입술을 비비며 녀석의 바지를 풀어 끌어내렸다. 죽겠다며 앓는 소리로 끙끙거리는 녀석이 내 머리칼 속에 손을 집어넣는다. 근육이 배긴 것처럼 단단한 엉덩이를 양 손으로 꽉 쥐고 주물럭거렸다. 바지를 무릎까지 밀어 내리고 나는 녀석의 사타구니에 고개를 처박았다. 나 역시 묘한 흥분과 격정을 느끼고 있었다. 자극, 나는 지금 백민후를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녀석의 물건을 손에 말아 쥐었다. 둥근 부분의 끝부터 혀로 할짝거렸다. 내 따듯하고 말랑거리는 혀는 즐거운 노동에 입각해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녀석은 악질적인 병을 앓는 것처럼 신음했다. 뜨끈한 살덩어리를 양손에 넣고 비볐다. 좋아? 하고 물었다. 으응. 대답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되돌아온다. 목이 타고 몸이 뜨거워지고 발진이 일어나듯 붉어진다. 나는 본격적으로 녀석의 살덩어리를 씹으며 입안에 넣었다. 녀석은 정신이 함몰되는 사람처럼 내 머리칼을 꽉 부여잡았다. 잡지 않으면 어딘가로 튕겨 나갈 사람처럼 그악스럽게. 머리가죽이 아프게 당겨와 나는 가끔 입을 떼고 아파, 하고 말했다. 혼곤하게 넋이 빠지고 있는 녀석은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하얀 액이 비질비질 새어나왔다. 나는 입으로 열심히 움직이다가 왠지 모를 치욕을 느끼고 얼굴을 뗐다. 대신 손으로 열심히 문질렀다. 꼭 원시인이 부싯돌에 나무 작대기를 꽂아 넣고 비비고 돌리면서 불을 피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녀석의 몸에 불을 피우기 위해 헥헥거리면서 열심히 움직였다. 얼마 뒤 뜨거운 액이 솟구쳤다. 액에 젖은 기둥을 점액질로 비벼대니 매끄러운 느낌이었다. 미끌미끌 거리는 것이 내 손에도 잔뜩 묻고 말았다. 나는 수건으로 손과 녀석의 사타구니를 깨끗하게 닦아주고 그의 몸 위로 기어 올라가 풀썩 누웠다. 붉어진 얼굴로 숨을 고르는 녀석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내 허리와 머리를 쓰다듬으며  녀석은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이 모습을 찍어두고 싶지만 사진에 갇히기엔 너무도 아까운 광경이었다. 아까워서 찍고 싶지만 또 찍어서 그 가치를 훼손하고 싶지 않은 이율배반적인 기분에 잠기며 지쳐버린 녀석의 이마를 손으로 쓸었다. 땀에 젖어 축축했다. 한참동안 숨을 고른 녀석이 말한다. 

“다음부턴 절대 하지 마.”

“왜, 별로였어?”

“그래, 별로니까 다시는 하지 마.”

“치이.”

녀석이 몸을 모로 누워 날 바라보고 귓가에 속삭였다. 해줄까? 나는 모올? 하고 되물었다. 이거. 하고 백민후가 쑥스러운지

 내 가랑이 사이에 손을 대면서 내 어깨에 고개를 묻어버린다. 나는 다시 모올? 하고 물었다. 죽을래? 백민후의 뺨이 달

구어진 쇠처럼 뜨거웠다. 나는 갑자기 백민후의 육체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신 목을 끌어안았다. 내 

사타구니에 뜨겁고 축축한 손을 넣어 녀석이 움직일 때 끊어지는 듯한 숨을 계속 귀에 불어넣어주었다. 내 이름을 부르며

 신음하며 녀석과 나는 혼돈 그 자체로 얽히고 있었다. 나에게 자유를 주는 녀석의 육체. 나는 녀석과 결합하며 체면과 이성과 관습을 날려버린다. 녀석은 나와 결합하며 무엇을 날려버릴까, 아니 날려버리는 대신 채워지는 걸까.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고 모르면서도 알고 싶지 않다.

얇은 내 잠 속으로 현실인지 현실이 아닌지 알 수 없는 소곤소곤 거리는 말소리가 새어 들어온다. 

알고 있어, 모르고 있어. 알고 있다니까. 아니야. 모르고 있어.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아니야. 모르고 있는 거야. 

데자부는 때로 기분 나쁘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구정물처럼 흐리게 느껴지면 괴롭더라도 명확하고 적나라하게 그것을 까발리고 싶어지는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하니까. 그 소곤소곤 거리는 소리는 멀어졌다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반복했다. 알고 있어, 모르고 있어. 알고 있다니까, 아니야, 모르고 있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눈을 뜨고 싶었으나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꺼풀에 묵직한 추가 달린 것 같기도 했고 아침이 밝아오기 전엔 이 요원한 느낌이 걷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를 덮어오는 따듯한 살내음이 사위에서 느껴졌다. 내 입술을 더듬는 손도, 그리고 또 다른 입술도, 또 다른 입술도. 공중으로 부양하고 있는 것처럼 넋이 가볍게 떠올라 춤을 추었다. 뼈들은 몸살 기운이 있는 것처럼 혼곤하게 젖어 있었다. 멀리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더불어 백민후의 냄새도 코로 스며들었다. 그 냄새가 따듯해 백민후가 마치 내 얼굴 바로 앞에서 숨을 불어 넣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가물가물한 넋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나 감기였지.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머리가 지끈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혼몽인 것 같은 말소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차가운 것이 얼굴에 닿았다. 눈을 뜨니 흐릿한 시야로 누군가 앉아 있다. 세찬 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주변은 약간 어둑어둑했다. 눈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물방울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건물의 입간판을 덜컹거리게 하고 있었다. 낡은 오피스텔은 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늑골 앓는 소리로 떨고 있었다. 욱신거리는 머리를 돌려 내 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뿌연 눈을 몇 번 깜박거리니 수건을 비틀어 짜고 있는 인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민후였다.

“괜찮아?”

“……몇 시야? 며칠이고, 무슨 요일이야? 밤이야, 낮이야”

“두시, 11일 이고 토요일, 낮이야.”

“민후는 어디 갔어?”

나는 그런 말을 하며 민후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정신이 몽롱한 상태여서 내가 무슨 말을 내뱉은 건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민후는 나를 쳐다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내 이마에 손바닥을 대었다. 너, 아직 열 많다. 나는 다시 

물었다.

“민후 어디 갔어?”

“…….”

묘한 탄식조의 한숨을 흘리며 민후가 일어섰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돌아왔을

 땐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자, 죽 먹자. 엄마 같은 다정한 말투로 그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 뜨거운 죽을 호호 불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나는 입을 아 벌리고 그가 떠먹여주는 죽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리고 약까지 먹고 다시 드러누웠다.

“더워도 에어컨 가급적이면 틀지 마.”

비는 아직도 세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태풍도 다 지나간 이 마당에 비가 다 무슨 소용인가. 한발 늦어 기차가 떠나버린 

허망함처럼, 내게 비는 그렇게 느껴졌다. 또한 무언가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아파서 그런 건지 비참하고도 처참했다. 문득 눈시울이 젖어와 베개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랭보도 

외로움에 약했을까. 내 어깨를 가만히 쥐는 민후의 손을 잡았다. 우린 애인사이인 걸까, 단순한 섹스 파트너인 걸까, 이 

문제는 내게 꽤나 심각했다. 지란지교가 아닌 오입지교. 바로 그 차이였기 때문이다. 예술가로써 중간 입지에 서 있으려고 

하는 나의 노력은 참으로 가상했다. 랭보의 애인 베를린의 시처럼 속삭이는 비 소리는 대지와, 지붕, 나의 협소한 오피스

텔의 작은 공간에 떨어지며 울적한 이 내 가슴을 대신해서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베를린의 말처럼 가장 괴로운 아픔이었

다. 사랑도, 미움도, 아무것도 없는데 이 마음은 왜 이렇게 아픈 걸까. 이유도 모르는 채 말이다. 나는 랭보에게 묻고 

싶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 감정도 결국 관습이고 세습이고 고정관념인 것이냐고. 사랑의 감정에 구속이 되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그것은 너무도 참담한 이분법이었다. 랭보처럼 이 불같은 사랑에 뛰어 들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랭보는

왜 베를린을 떠났을까, 어떤 허망함을 느낀 걸까, 어떤 비참함을 느낀 걸까. 그것을 깨닫게 될까 두려워졌다. 랭보처럼 

너무 지쳐버려서 그 예술성과 감수성이 마모되어 버릴까봐 무서웠다. 민후가 떠는 내 몸 위로 자신의 몸을 기울여 

안아준다. 나는 민후와의 섹스가 미치도록 좋아서 그것의 노예가 될까 두려운 것이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감정이 단순한

 육체의 섬광으로 인해 퇴색되어 버릴까봐. 나의 모든 고민, 고통, 절망, 번민, 고뇌, 자유를 갈망하는 내 영혼은 뒷전이 

되어버리고 오로지 살덩어리만으로 부질없이 녀석을 사랑하게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나의 고정관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후는 그저 추워? 추워? 물을 뿐이다. 나는 그때마다 비 맞은 새처럼 고개를 끄덕, 끄덕할 수밖에 없었

다.

다시 잠이 들었다가 얇은 잠을 깨고 말았다. 밤중에 깨는 것은 곤욕에 가까운 재난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한번 걷혀진 

잠은 쉽게 오지 않는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네 마리. 양이 천오백구십이 마리가 되어도 잠은 

돌아오지 않는다. 한번 간 잠은 이미 내 잠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의 잠이 되어버린 것이다. 잠은 내게서 아늑함을

 느끼지 못해 떠나버렸다. 나는 가슴부터 시린 사람인가보다. 몸이 아파서 그런지 나는 더운 시린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시리다는 느낌이 절절절 느껴지고 있었다. 발가락의 끝에서부터 차가운 얼음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동상에 걸

려버릴 것만 같다. 나는 나의 시림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랭보의 시구가 떠올랐다. ‘오, 행복이여, 오 이성이여, 나는 하늘로부터 거무스름한 푸른빛을 떼어놓았다. 그리고 나는 

자연의 빛 그 황금 불티가 되어 살았다.’ 거무스름한 푸른빛은 랭보의 광기일 것이다. 자연의 빛 그 황금 불티는 광기를 

극복한 랭보일까, 광기에 굴복해버린 랭보일까. 만약 극복이거나 굴복이더라도 살아있는 랭보는 황금 불티인 것이다. 극복,

 굴복. 나는 이것들이 같은 선에 놓을 수 있는 단어인지 생각해보았다. 모양새가 비슷해서 인지 같은 선에 놓일 수 있는 

단어들 같아 보였다. 극복이나 굴복. 랭보는 극복함과 동시에 굴복한 것인가. 극복과 굴복은 나를 희롱하고 있었다. 그

 단어는 정상에서 만나는 현기증 같았다. 극복, 굴복. 

“아.”

나는 깨닫고야 말았다. 그것은 명멸하는 찰나인 것이다. 극복과 굴복. 극복은 동시에 굴복이기도 했다. 거무스름한 

푸른빛을 떼어놓고 자연의 빛 황금 불티가 되어 살아났다. 극복하고 동시에 굴복하여 살아난 명멸하는 찰나. 

나는 랭보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랭보는 그것을 언어로 표현했고 나는 극복과 굴복을 사진으로 찍어 놓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또 의문점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예술가로써 모든 감정의 중심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민후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고, 경멸하지 않기 위해서 조영인의 예술을 돕고 있다. 모든 것을 조절해서 그 감정의 중간에 서 있지 않으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예술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랭보는 합리적이고 또 객관적인 동시에 독창적인 예술을 창조해냈다. 랭보는 모든 감정의 가시밭길을 뒹굴었다. 마약, 섹스, 무기밀매, 동성애. 랭보는 제멋대로 삐져나가는 인생을 살았다. 그는 훗날 그것을 지옥에서 보낸 한철 이라고 설명했다. 지옥에서 한철을 보내기에 랭보는 너무 어리지 않은가. 

랭보는 스무 살에 절필했다. 나는 스물한 살이다. 스물한 살인 내가 스무 살인 랭보보다 비겁하다니. 하지만 나는 랭보처럼 절필, 그 예술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없다.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지옥에서 한철을 보냈던 랭보. 

나는 모든 명멸하는 찰나를 표현하기 위해 기꺼이 지옥에서 한철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추측어린 감수성에 의지해 여태껏 나의 예술성을 이어왔다. 랭보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하지만 나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것을 랭보를 만나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랭보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예술 속에서 절대적이고 개인적인 독재자였다. 훗날 그 사실에 문학, 세상 그 자체에 흥미를 잃고 절필하긴 했지만. 

랭보는 다정한 시인이 결단코 아니었다. 그의 예술은 뾰족하고 날카로운 창끝처럼 사람들의 관념을 푹푹 쑤셔댔다. 

모든 상징은 사실을 이념화해야 하고 이 이념은 형상으로 변화하게 된다. 나는 늘 예술성과 상업성은 공존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상업성이 없는 예술은 죽은 예술이다.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징과 그것의 형상화는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 행위일 뿐이다. 

보통의 시인들은 숭고한 고통이라는 관념을 말하기 위해 십자가라는 어휘를 쓰는데 랭보는 전혀 생뚱맞은 상징을 갖다 붙이는 것이다. 아마 랭보는 숭고한 고통이라는 관념을 말하기 위해 빗자루, 거미줄, 스시 따위의 단어를 사용할지도 모른다. 

대중이 알지 못하는 상징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랭보의 모음들처럼 철저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예술인 것이다.

 조영인이 나로 인해 자신의 예술성을 되찾고 있는 것이 나에겐 기쁜 일이듯이 나의 예술성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 예술 하는 나의 최대의 고민임과 동시에 소망인 것이다. 

나는 얼마나 다정한 예술가인가! 그러나 랭보는 위대한 예술가다! 

랭보는 모음들이라는 단어를 나열해 시를 만들었다. 랭보는 모든 감각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자 했다. 지옥에서 보냈던 한 철은 아마 그의 이런 의지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랭보는 그렇게 모든 감각을 이해할 수 있는 자신만의 언어를 썼다. 나와 그 누군가들이 전혀 짐작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은 지독한 이기주의적 관념은 그런 나에게 조소를 날리고 있는 것이다. 모음들에서 우리는 어떠한 논리적, 인과적 연관관계를 찾을 수 없고 변형되거나 상징적인 이념도 찾을 수 없다.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결합하여 시를 만들어낸 랭보는 그것을 이질적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나와 그들의 고정관념과 보편적 관념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랭보는 또한 다정하지만은 않지만 위대한 시인이다. 

유추할 수 없는 랭보의 시는 우리가 얼마나 상상력이 빈곤하고 이성을 뛰어넘지 못하느냐고 다그치고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뛰어넘으라고,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세습되어지고 있는 세뇌를 뛰어넘어 언어를 받아들이라고. 그리고 나를 향해 

지옥에서 한철을 보내자고 꼬드기고 있다. 아, 친절한 랭보씨. 나는 그의 손을 잡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잠이 든 민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루 종일 떼 많은 나를 간호하다가 지쳐버린 민후는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어리석

은 사람은 아니었다. 시로 만났다곤 하지만 동성애로 점철되어 베를린의 시들어버린 육체를 경멸하게 된 랭보. 문학, 시

, 예술, 어휘, 단어, 사랑. 둘은 그런 것에 대해 논의하고 살덩이만으로 엉켰던 것이다. 랭보는 아마 그래서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랭보는 아마 그래서 베를린과 그런 관계가 된 것을 후회했을 것이다. 그렇게 위대해 보이던 사랑도 사람도 욕망 

앞에선 헌신짝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엄청난 딜레마에 빠지고 있었다. 굵고 긴 예술을 할 것인가. 한 순간 명멸하는 찰나의 예술을 할 것인가. 랭보는 

후자였다. 그리고 랭보는 나에게 자꾸 후자를 선택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풍성하게 빛나는 명멸하는 찰나. 나는 진정으로 예술 하는 자가 되기 위해 민후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잠이 든 민후의 등에 얼굴을 묻으며 끌어안았다. 잠결에 민후가 자신의 가슴에 감겨드는 내 손을 잡는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민후를 좋아했다. 아름다운 피사체임과 동시에 나의 애욕.

“백민후.”

“……으응.”

“사랑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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