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4)

그의 팔이 헐겁게 풀리자마자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어섰다. 조영인은 아주 짧은 시간동안 정말 깊게 잠들어있던 

건지 기지개를 키며 기합을 넣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고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가만히 서 있자, 빨리 안 나가냐? 

소리를 지른다.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다시 암실에 들어가 뒤져보았지만 내 사진은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그 

주인인 나에게조차 사진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했으니 사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조영인의 손에 들려 있을 내 모

습의 존재를 떠올리면 도무지 그 부재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조영인의 사무실 문을 발로 뻥 차고 스튜디오를 

나와 버렸다. 

“변태새끼.”

조영인이 제 사무실 창문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닌자 위에 올라탄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높게 치켜들고 그 밑을 

지나갔다. 닌자를 타고 바다까지 달려가려고 싶은 갈증을 느꼈으나 엔꼬등이 간당간당하고 있었다. 젠장. 하는 수 없이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생활비 좀 보내달라고 떼를 쓰다가 창문 앞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담황색 

액체와 파도의 포말 같은 거품을 후룩후룩 마셨다. 뜨거운 해에 반대편 건물의 반사광이 눈을 찌르고 있었다. 저무는 것에 

대해 분명한 반항의 몸짓을 해대는 태양을 바라보다 문득 든 생각에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침대 밑에 박스로 쌓아둔 내 

사진들을 꺼냈다. 민후의 사진을 모아 둔 박스를 찾아 열어보았다. 족히 수백 장은 될 것 같았다. 바닥에 앉아 사진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고등학교 때 찍은 사진보다 요새 들어 찍은 사진이 더 많았다. 사진을 보고 있는데 취해서 그런지 

주책없게도 울음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변하지 않을 사진의 위력 앞에 민후는 터무니없이 부패하고 있었다. 사진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바닥에 내려놓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모르게 사진을 두 가지로 분류해놓고 있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기분에 따라 행동이나 말투가 달라지는 민후의 모습을 떠올려서 그런 걸까. 두 가지로 나눈 사진을 따로 

모아 툭툭 높이와 넓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벽을 쳐다보았다. 꾸미거나 장식할 줄 모르는 내 성정에 맞게 오피스텔의 벽엔

 곰팡이가 슬어 구석 벽이 푸르스름하게 변해가고 있을 뿐 액자는커녕 시계조차 걸려있지 않았다. 나는 그 을씨년스럽고

 휑한 벽을 멍하게 쳐다보다 양면테이프를 찾아와 민후의 사진 뒤에 붙였다. 그리고 벽 앞의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사진들을 붙이기 시작했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음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사진을 붙여나갔다. 웃는

 민후, 웃지 않는 민후, 찡그린 민후, 화내는 민후, 다정한 민후, 열 받은 민후, 기뻐하는 민후, 우는 민후 수많은 민후의 

얼굴은 하나씩 붙이고 나니 편집증 환자 같은 느낌이었다. 분류해 놓은 사진 중 한 묶음을 다 붙이자 손닿지 않는 위쪽을 

제외하곤 빼곡하게 녀석의 얼굴이 바람결을 따라 흐르듯 붙어버렸다. 사진은 분명하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분류해놓은 남은 사진 묶음을 들고 이번에는 오른쪽 가장 귀퉁이부터 왼쪽으로 붙여나갔다. 분류해놓은 두 명의 민후가 

벽의 양 끝 가에 하나씩 붙어가며 만나고 있었다. 사진을 다 붙였을 때 바닥엔 양면테이프의 껍질이 굵은 국수자락처럼

 널려 있었다. 

“푸하.”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수백의 민후를 바라보았다. 양 끝에서 붙여나간 민후는 달려 나가며 중간에서 격돌하고 있었다. 

같은 민후가 분류된 민후로 구분되어 강력한 솟구침으로 그 분노가 발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싸울 것처럼 사진은 

부딪히고 있었다. 그 이상하고도 적나라한 분류를 나는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을 혼자만 알고 있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수백의 민후의 흐름 속에 내 웃음은 속절없이 번지고 있었다. 아, 웃다보니 배

가 고프기 시작했다. 냉장고엔 쌀 대신 잔뜩 구입한 맥주가 빼곡하게 들어 있을 뿐이었다. 가끔 오피스텔에 오는 어머니가 

나의 무계획성과 철없음을 냉장고를 열어보는 것으로 판단하곤 했다. 나는 싱크대를 뒤져 컵라면 하나를 찾아냈다. 

미지근한 물을 부어놓고 민후의 앞에서 후룩후룩 면발을 빨아먹었다. 민후 녀석이 이걸 보면 기겁을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사진을 하나하나씩 바라보며 대화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야, 하면 왜. 하고

 이쪽의 민후가 대꾸하고. 야, 하면 응? 하고 저쪽의 민후가 대꾸하고. 일기예보 봤어? 하면 그딴 걸 뭐하러 봐. 하고 

이쪽의 민후가 대꾸하고. 일기예보 봤어? 하면 아니, 알아봐줄까? 하고 저쪽의 민후가 대꾸한다. 어느새 민후는 인격이

 분리되듯 둘로 나눠지고 있었다. 이쪽의 민후와 저쪽의 민후. 내 감이거나 혹은 무의식이 나눠 놓은 민후는 보면 볼수록

 나 자신을 납득시키고 있었다. 저 둘은 다른 존재라고. 이것이 나의 예술성일까. 깨끗하게 비운 컵라면 용기에 국수자락 

같은 양면테이프의 잔해를 꼭꼭 뭉쳐 담았다. 그렇게 청소를 하다 나는 민후의 캘빈클라인 팬티를 발견했다. 캘빈클라인을

 좋아하는 민후는 속옷도, 겉옷도 거의가 이 메이커였다. 이 녀석, 팬티를 못 찾아서 그럼 노팬티로 나갔단 말인가. 나는 

욕실에 쭈그리고 앉아 민후의 삼각팬티를 빨았다. 빨래비누가 없어 샴푸로 팬티를 문지르고 비볐다. 거품에서 라벤더의

상큼한 냄새가 훅 올라왔다.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팬티를 헹구고 꼭 비틀어 물기를 짰다. 탈탈 털어 창문가에 

널어놓았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도시의 바람이 불어 왔다. 바람에서 꽃향기가 났다.

주머니의 이만 원과 낮에 조영인이 심부름 값으로 준 오천육백 원이 내 전 재산이었다. (사실은 거스름돈을 돌려주지 않았

지롱)

나는 그 돈으로 닌자에게 밥을 주고 하상 고수부지에서 신나게 달렸다. 밥을 먹은 닌자는 바람처럼 달렸다. 두두두두두두. 

총 대신 입으로 총을 쏴댔다. 랭보가 담금질되어 부수고자 했던 세상에 나는 입으로 총을 쏴 부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랭보는 시를 쓰기 위해 지옥에서 한철을 소비했다. 

‘나는 그리 크다고는 할 수 없는 이 세상 전부를 답파하고자 합니다.’

랭보의 시구가 내 귀를 적신다. 랭보는 자신을 파괴하며 세상을 답파해 나갔다. 시를 쓰기 위해서. 오로지 진실 된 언어를 

선택하고자 했던 것이다. 거짓으로 꾸며댄 단어가 아닌, 진실을 담고 있는, 진실 그 자체의 단어를. 그러나 랭보는 너무 

어렸다. 

너무 어려서 어리석었던 것이다. 랭보는 자신을 파괴시키는 길을 걸음으로써 모든 감정에 담금질되기를 희망했다. 세상을

 답파해 진실 된 언어를 쓰고자 한 그 갸륵한 마음이 결국 인간이기에 초심을 훼손시키고 소모시켰던 것이다. 랭보의 절대

적인 예술성. 그러나 내 예술성은 비겁하게도 상대적이다. 나는 감정의 중간에 서서 그 모든 감정을 맛만 보고 있는 것이다.

 수박 겉핥기의 예술을 하며 나의 예술성을 보호하는 것이다. 랭보가 진실 된 예술을 하기 위해 자신을 파괴시킴으로써 그

 예술까지 파괴시켜버렸던 것처럼, 랭보를 답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가련한 랭보는 

예술의 치기를 깨닫고 절필하였던 것이다. 절필! 랭보는 지나치게 급진적이었고 동시에 지나치게 절대적인 인간이었다. 

나는 랭보를 대신해 열심히 총알을 발사했다. 두두두두두두두. 랭보는 모든 신화적 개념들을 맹종하기를 거부했다. 

거부하는 것이 그의 삶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 나는 이 사회의 교과서적인 개념들을 거부한다. 이성, 체면, 돈, 명예,

 글, 인습. 학문과 항문이 구분되지 않는 굴레적인 세습을 나는 닮지 않을 것이다.

닌자를 실컷 달리고 다시 오피스텔로 돌아왔을 때 내 목은 지독하게 쉬어 있었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올라갔다. 민후가 

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불행하게도 나도 랭보처럼 지쳐가고 있었다. 민후에게 길들여지고 민후가 사온다고 

약속한 치즈케이크의 간교한 맛에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랭보, 나를 배신자라 칭해다오. 그러나 적당히 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랭보를 통해 배웠다. 나는 절대,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별 수 없이 랭보를 배신하고 

비겁해지는 수밖에는 도무지 구명 길이 보이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민후가 룸 가운데 서 있었다. 민후는 자신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벽에 붙여진 수만 가지의 제 얼굴을. 각이 많은 다이아가 빛에 반사되는 듯한 다채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내 퍼포먼스에 민후는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넋이 나가 사진을 보고 있었다. 나는 문 앞에서 

민후를 불렀다.

“백민후!”

고개를 돌리는 민후에게 달려가 펄쩍 뛰어올라 안겼다. 목을 꽉 끌어안고 뺨에 귀에 마구 입을 맞추었다. 나를 굴복시키고

 나를 길들이고 나를 비겁하게 만드는 나쁜 자야! 내 가슴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의 허리를 다리로 꽉 감고

 키스를 퍼부었다. 민후는 주춤주춤 물러서면서도 내 엉덩이를 받쳐 안고 있었다.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어대다 문득 얼

굴을 떼고 물었다. 

“케이크 사왔어?”

“…….”

“케이크 사왔냐고!”

“으, 으응.”

내려달라고 그의 어깨를 팡팡 쳤다. 민후가 나를 내려놓자마자 나는 책상위에 올려져 있는 케이크 상자를 까보았다. 민후는

 다시 멍하게 자신의 사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야! 무스케이크잖아.”

“뭐?”

“치즈케이크! 무스케이크 말고!”

“치즈케이크였어?”

“에이씨.”

나는 눈앞에 원형을 그리고 있는 녹차무스케이크를 내려다보고 인상을 썼다. 단기기억상실증이거나 머리가 나쁜 게 틀림없어

. 민후가 다가와 정말 미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잘못 들었나봐. 무스케이크 말하는 줄 알았어.”

“됐어. 넌 내 말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아.”

“다시 사올게.”

정말 미안해하며 당장이라도 다시 사오려고 하는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그냥 먹을래.”

“다음엔 꼭 치즈케이크 사올게.”

나는 눈만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에 분명 처먹고 싶으면 네가 사먹으라고 말한 그 입술이 맞는 걸까. 

민후의 인격은 하루를 주기로 달라진다. 불쌍한 다중인격자의 비애. 나는 녀석을 다독여 안아주었다. 그래, 나는 그것마저 

이해할 수 있으니까. 민후는 다정한 목소리로 치즈케이크를 다시 한번 다짐하고는 물었다.

“저 사진들, 네가 나눈 거야?”

나는 그 말에 흠칫 떨었다. 새삼스럽게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해리성정체장애. 침을 삼키고 사진을 붙여놓은 벽을 

쳐다보았다. 정신병자가 해놓은 것처럼 다시 보니 오싹하고 기괴했다. 그러나 티내지 않고 물었다.

“나누다니?”

“나눈 게 아니란 말이지?”

“다 너잖어. 나누긴 뭘 나눴다고 그래. 다 너 붙여놓은 건데.”

“너 정말…….”

민후는 나를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탐색의 눈빛이었다. 나는 녀석의 해리성정체장애를 내가 눈치 

챘다는 것을 알아챌까봐 급하게 말을 돌렸다. 

“사진 다 잘 나왔지?”

“응. 그러네.”

아이, 그럼 나는 케이크나 먹어야겠다. 민후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박스 안에 들어 있던 케이크용 칼로 무스케이크를

 잘라 먹었다. 민후는 다시 벽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해, 대단해.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 아이, 쑥스럽게.

 뭐가 대단해. 치즈케이크의 간교한 맛을 바라고 있던 나는 녹차무스케이크의 너무도 솔직한 맛에 인상을 쓰고 말았다. 

차라리 컵라면 한 박스를 사달라고 할걸. 침대 위에 앉아 케이크를 먹고 있는 내게 민후가 다가왔다. 그리고 옆에 앉아 

나를 정말 정성스럽게 끌어안았다. 기특하고 소중한 물건 다루듯이. 왜 그러냐고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내 이마에 제 

이마를 기대며 녀석은 흐릿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만족스런 웃음이었다. 

“네 머리를 열어보고 싶다.”

“그럼 죽어.”

“농담이야.”

이마에 쪽, 입을 맞추는 민후의 얼굴을 달음박질 친 사람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라기보다 흥분이었다. 

흥분한 입술로 민후는 다시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녹차 무스 케이크가 잔뜩 들어차 뭉개져 있는 입 속으로 민후의 

혀가 들어왔다. 이렇게 단 키스는 생전 처음이었다. 입술을 떼고 녀석은 혀로 입가에 묻은 케이크의 잔여물을 핥고 

말했다.

“나 갈게. 급한 일이 있어.”

“벌써?”

“급해, 급한 일이야.”

잔뜩 흥분한 민후가 일어서며 내 머리를 다시 한번 쓸어 넘겼다.

“내일 링크에 가도 돼? 연습이잖어.”

“그래, 좋을 대로 해.”

그럼 간다. 녀석은 집에 가스렌지라도 켜놓고 나온 건지 황급히 돌아갔다. 쩝쩝 입을 다시며 사진을 붙여놓은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민후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가 사진을 나눠놓은 것을 알아차린 걸까. 해리성정체장애. 그건 무의식으로

 나눠지는 인격이라고 들었는데. 녀석은 두 인격의 의식이 동시에 깨어있단 말인가. 지킬박사와 하이드도 아니고. 

“앗, 팬티!”

창문으로 뛰어갔다. 불행히도 팬티는 이미 바람에 날아가고 난 후였다. 컴컴해진 창문 밖은 가로등 밑 불빛에 모여든 수

백 마리의 하루살이 떼들이 뭉쳐서 부유하고 있었다. 그 산란한 모습 어디에도 팬티는 보이지 않았다. 여름밤, 도시의 

소음이 내 얼굴로 치달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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