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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빨리 일어나, 잠꾸러기야.’ 그 아득하게 들려오는 빨리 일어나, 잠꾸러기야가 열 번 쯤
반복될 때였다. 연속적으로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빨랑 안 일어나, 이 새끼야.’ 라는 욕으로 변질되어 들릴 때까지
나는 베개를 머리에 뒤집어쓰며 그 알람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나 발로 내리친 것 같다. 벌떡
일어났을 때 시간은 여덟시 삼십분이었다. 헉, 변태새끼 조영인이 날 가만히 놔두지 않을 텐데. 나는 어제 내가 지껄였던
말을 떠올리며 소스라치게 놀라 침대에서 튀어 올랐다. 그래도 할 것은 해야지 싶어 샤워까지 마치고 집을 나섰다. 닌자를
타고 다닌 이후로 이런 과속은 해본 적이 없었다. 닌자가 워낙 비싸서, 메고 있는 카메라가 워낙 비싸서, 몸뚱이가 고장
나면 큰일 나니까,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늘 저속을 고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눈썹이 휘날리도록 바이
크를 몰아 젖혔다. 맞바람에 몸이 붕붕 뜨고 바이크에서 솟구쳐 오를 것만 같았다. 스튜디오에 도착해 허둥지둥 뛰어 올라
갔을 때 시간은 이미 아홉시 이십분이었다. 쿵덕거리는 가슴을 꾹 누르며 쭈그려 앉아 오리걸음으로 스튜디오 문을 열었다.
다행히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조용했다. 낑낑거리며 오리걸음으로 기어 데스크를 지나칠 때였다.
“야 임마.”
허억. 포복자세로 고개를 들었다. 팔짱을 낀 조영인이 까마득한 높은 곳에서 날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쭈그리고 있던 자세를 피며 비척거리고 일어서자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곳곳에서 고개를 쭉 빼고 날 쳐다보고 있다. 아마 조영인이 나를 감시하기 위해 여덟시 삼십분부터 이 앞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뻔하다, 뻔해. 초조하게 일분, 일초를 헤아려가면서. 이놈의 자식, 늦게만 와봐라. 음산하게 중얼중얼 구시렁대면서 말이다.
“정확히 이십이 분 칠초. 너 나 따라와.”
저벅저벅 제 사무실로 걸어가는 조영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들 시선을 피하며 자진하라는 듯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날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영은누나도 보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느릿느릿 조영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조영인은 의자에 앉아 책상 위의 재떨이를 쓰레기통에 비우고 있었다. 저걸 나한테 집어 던지려고 하는 건가. 설마. 그런 표정으로 문을 반쯤 열고 머뭇머뭇 대고 있자 조영인 변태 대마왕이 인상을 확 찡그린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의 사무실로 한걸음 더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저절로 닫혔다. 예술 하는 내가 이 별것 아닌 지각 때문에 삭신이 쪼그라들어야 한다니.
“또 지각했네?”
“죄송해요. 일찍 일어나려고 했는데 몸이 안 좋아서.”
콜록, 콜록. 가볍게 쥔 주먹을 입에 대고 콜록거려보았다. 조영인은 거만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콜록콜록, 기침기침, 쿨럭쿨럭. 몇 번인가 그 모양새를 바꿔가며 최대한 초췌한 몰골을 하며 콜록거렸지만 조영인은 그 거만하고 오만한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어째서 잘난 놈들은 표정이 다 저모양일까.
“어제 뭐라고 했었지?”
“콜록 콜록, 뭘요?”
“또 지각하면 어떻게 하겠다고 했었냐고.”
“글쎄요. 머리가 나빠서.”
머리를 긁적이며 조영인을 바라보았다. 조영인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문간에 서 있는 내게 급격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보통 이런 경우에 정말 더러워서 그만두고 말지, 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지만 조영인은 꽤나 유명한 사진작가라서 나는 그에게 아직 배울 것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장대로 무급 봉사를 해주겠다는 어시들이 대한민국에 널리고 깔린 것이다. 한번 떨궈지면 다시 붙기가 힘들었다. 단물 다 빠진 껌처럼 말이다.
“그땐 옷을 홀랑 벗기던지 살가죽을 홀랑 벗기던지 알아서 구워먹으세요.”
“…….”
“그렇게 말했었지. 여기서, 이 자리에서 말이야.”
조영인의 화법이 노골적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기억력마저도 노골적이었다. 그랬었나, 그런 표정을 지으며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옷을 홀랑 벗겨줄까, 아님 살가죽을 홀랑 벗겨줄까. 응?”
“그냥, 한번만 봐주세요.”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영인의 얼굴은 새삼스러운 호기심과 흥분으로 뒤섞여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박거리는 느린
시간이 흐르고 내 말에 반응 없던 조영인이 손을 올려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너 거울보고 연습 하냐?”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하면서도 뒤통수를 쓰다듬는 조영인의 손이 신경 쓰여 눈은 자꾸 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표정 거울보고 연습하느냐고.”
“무슨 표정이요.”
“불쌍한 표정.”
그럴 리가. 그렇게 눈을 뜨자 조영인이 내 뺨을 툭 건드린다.
“나랑 사귀자.”
“네에?”
“아님 옷 홀랑 벗겨서 나한테 사진 찍히던가. 둘 중에 하나야. 나랑 사귀던지 나한테 찍히던지.”
조영인은 내가 사진 찍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전에 그가 나를 찍어보고 싶다고 했을 때 내 표정이 아연해지던 것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매우 난감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그가 말을 덧붙인다.
“네 취향 다 알고 있어. 내뺄 생각 하지 말고.”
“저기…….”
“잔머리 굴리지 말고 빨리 선택해. 옷 홀딱 벗고 사진 찍을래, 아님 나랑 사귈래.”
“그건 너무.”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르는 거야. 이미 네 입으로 말했어. 알아서 구워먹으라고. 아니야? 선택권을 주는데도 마다하는 거
면 내가 선택해주지.”
“잠깐만요.”
급하게 무언가를 쏟아내려는 조영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그러니까 어서 말하란 말이야. 조영인의 표정이 조악스럽게 구겨졌다. 변태, 변태 조영인. 나는 매우 정중히 또 곤란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 조영인 선생님. 저 사귀는 사람 있어요.”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 아니에요.”
“이름이 뭔데.”
“비밀인데요.”
죽을래? 조영인이 무섭게 인상을 찡그렸을 때 나는 팍 쪼그라들었다. 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고 눈깔을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사귀는 사람이라 봐야, 없지만은 꼭 어느 얼굴 하나가 떠오른다. 거짓말 하지 말라는 조영인의 눈이 광희난무를 부리고 있다. 곤란, 난감, 곤혹, 곤욕, 재난, 고통, 고민. 아아, 랭보가 시를 쓸 때 알맞은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느꼈던 고통을 나 역시 절감하고 있다. 랭보는 아마 무지하게 답답했을 것이다. 정말 이 답답한 심경을 글로써 표현하고 싶은데 하지 못해서 신경질이 있는 대로 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경질을 내는 대신 거짓말을 하기로 한다.
“정말이에요.”
내 말에 눈을 여우처럼 가늘게 뜨고선 조영인은 이를 가는 것처럼 턱을 씨근덕거렸다. 잔뜩 쫄아있는 내게 점점 고개를 숙였다. 으아아. 무릎을 굽히며 몸을 숙이자 어느새 그의 팔 안에 옴짝달싹 못하게 갇혀버렸다. 변태 대마왕 조영인이 꼭 무슨 일을 칠 것처럼 내 얼굴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럼, 벗어.”
“싫어요.”
“그럼, 그만둬.”
“싫어요.”
“너하고 길게 얘기하는 나만 바보지.”
“다음부턴 절대 안 늦을게요.”
“그건 안돼.”
조영인의 손이 허리를 감싸왔다. 뜨거운 것에 화상을 입듯 몸을 빼고 비틀어대자 변태 대마왕의 양 손이 내 허리와 등을
강하게 옥죄기 시작한다. 나는 그의 품에 완전하게 갇혀 그 어깨너머 창밖을 바라보았다. 태풍은 도대체 어디쯤 온 것일까.
그러다 조영인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신문에 눈이 간다. 일기예보가 나와 있을 텐데.
“저기요, 선생님.”
“…….”
대답 없는 조영인의 품에서 꼼지락거렸다. 조종식이 나를 더욱 끌어안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한다. 나랑 자자. 조영인의
노골적인 언변과 그런 어휘를 저항감 없이 구사하는 것이 나에게는 치욕이다. 나는 완강하게 조영인의 가슴을 밀어버렸다.
변태 대마왕은 갑자기 태도를 부드럽게 바꾸고 말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거, 죄악이야.”
씨이. 미간을 찡그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조영인은 다시 손가락 두개를 앞세우고는 내 눈앞에 들이댔다. 그리고 첫째, 둘째 하면서 검지와 중지를 말에 맞추어 까딱까딱 흔든다.
“좋아, 조건을 바꿔서 첫째, 나랑 잔다. 둘째, 내 사진의 모델이 된다. 골라, 못 고르겠으면 그만둬.”
“고용자를 협박하고 있는 건가요? 노동청에 신고할 거예요.”
“잔소리 말고, 골라.”
“…….”
나는 사진 찍히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내 앨범의 사진이라고는 사진이 뭔지도 모르고 찍었던 영유아기 시절의
것이 태반이고, 중, 고등학교 시절엔 졸업앨범에 실린 반명함 크기의 사진과 단체사진이 고작이라 그거다. 그것도 먹구름이
잔뜩 낀 것처럼 불만스럽게 찌푸린 얼굴이란 말이다. 생과 사가 공존하는 사진 속의 나는 지층 속에 단단하게 굳어진 화석
처럼 고착되어 있다. 그것이 몸서리쳐지게 싫다. 나는 섹스와 사진을 저울에 하나씩 올려놓고 무게를 달아보았다. 어느
쪽이 기울어지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면 되잖아요.”
“뭘.”
“……그거.”
“그게 뭔데.”
“그거.”
“그거가 뭐냐고!”
조급증 때문에 버럭 소리를 지르는 조영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조영인이 내 손가락을 보더니 변태 대마왕처럼
웃는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려 내 귓가에 속삭였다. 도망가면 죽어.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