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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민후를 찍은 사진을 변태 대마왕 조영인이 없을 때 암실에 들어가 인화했다. 비싼 렌즈 값을 제대로 한다. 사진은
내가 원하는 찰나를 제대로 집어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내 실력이 고새 좋아진 것은 아닐까. 사진은 내 방랑벽의
증거다. 나는 약간의 방랑벽을 가지고 있다. 한 곳에 오래 있지 못하고 이곳저곳 쏘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한 곳에 있지
못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 안주하지 못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내가 한 사람을 오래 만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 내 방랑벽 탓이다. 그래서 인지 내가 찍은 사진들은 확고하다. 내가 내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자면, 내 사진은 흐릿하지 않다. 모두 찰나를 확고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 순간이 살아있고 동시에 죽어있는 생과 소멸이 한 곳에 존재하는 단호한 사진들이다.
나는 나의 사진에서 실체를 소유하길 원하는 자의 부랑감을 읽는다. 방랑벽과 부랑자의 삶. 나는 로드무비를 좋아하니, 내 삶은 지나칠 정도로 희극적이다.
적당히 때 묻고 적당히 닳아 적당히 희석되느니 차라리 부랑하는 희극의 삶이 더 아름다운 것 같다. 예술 하는 자의 희망사항이긴 하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 몇 가지를 추려 파일에 넣었다. 나는 민후의 사진을 백장도 넘게 가지고 있다. 민후 뿐만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피사체의 사진은 봉투에 빼곡하게 들어차 박스로 쌓여져 있다. 그것은 해소하지 못한 피곤이나 스트레스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축적되고 있다. 언젠가 한방에 날려버려야지. 암실에서 나와 예쁜 영은누나와 수다를 떨었다. 이 포토에이전시의 실질적인 사장은 영은누나다. 밉보여서 좋을 것이 없다.
“누나, 나 포트폴리오 만들 건데 인물 사진이 나아요, 아니면 풍경이 나은 것 같아요?”
“넌 인물 잘 찍더라. 인물로 해.”
“나 졸업하면 여기 제대로 취직시켜 줄 거예요? 그런 거 아니면 당장 그만둘래요.”
“시켜줄 테니까 조영인 어시나 열심히 해.”
“저기 누나, 나 조선생님 말고.”
“나 말고 누구.”
나는 영은누나에게 바짝 내밀었던 상체를 거둬들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변태 대마왕 조영인이 더운지 셔츠를 풀어헤친 채
고개를 삐딱하게 세우고는 날 쳐다본다. 나는 모르는 척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너 내가 아홉시까지 나오라고 했어, 안했어.”
“했는데요.”
“했는데요? 그래서 너 아홉시까지 나왔냐?”
“아니요.”
“너 여기가 무슨 애들 장난하는 덴 줄 아냐? 내 말이 그렇게 우스워? 지각도 한 두 번이지. 한국 말 못 알아 듣냐?”
“죄송해요. 늦게 일어났어요.”
“너 나 따라 들어와.”
변태새끼 조영인이 잔뜩 골에 열을 올리고는 제 사무실로 걸어 들어간다. 어서 들어가 봐라. 잘못 했다고 싹싹 빌어.
영은누나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조영인을 따라 들어갔다. 조영인은 장식장에 놓인 렌즈, 어제 내가 가지고 나갔다가
오늘 몰래 갖다 놓은 그 렌즈를 들고 무언가를 확인하다 내가 들어가자 인상을 쓰며 내려놓았다. 다행히 눈치는 못 챈 것
같다. 휴우.
“야, 너 그만둬라.”
짜증나는 말투로 짜증나는 말을 하는 조영인을 쳐다보았다. 조영인은 책상위에 걸터앉아 더운지 파일로 부채질을 하기 시
작했다. 머리카락과 옷이 텀이 짧은 바람에 퍼덕거린다. 그는 그것으로도 속의 불을 끄지 못하는지 담배를 빼물었다.
뻑뻑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노려보는 통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연기는 미인한테만 온다더니, 담배연기는 내가 미인인
줄 아는가 보다. 아니면 나는 정말 미인인 건가?
“너 그만 두라고 임마.”
“지각 좀 했다고, 치.”
“니가 좀 했어? 방학 하고 내내 늦게 나왔잖아!”
“대신 지각비 냈잖아요.”
“아침 아홉시까지 나오라고 했더니 오후 세 시, 네 시에 나오면서 그게 지각이냐? 결근이지.”
“원래 예술가는 규율을 따르지 않는 법이예요. 법도 지키고 규칙 따르면 좋은 사진 나와요? 틀에 박힌 것밖에 안나온다고
요.”
“하.”
내 말에 조영인은 기가 막힌다는 듯 더욱 담배를 빨아댔다. 어느새 장초가 확 쪼그라들어 있었다. 식은 커피가 조금 남아
있는 종이컵에 꽁초를 집어넣고 그는 본격적으로 갈구겠다는 듯 셔츠 단추를 하나 더, 그리고 소매 단추를 풀어 팔을 걷
어붙였다.
“너 어디 가서 예술이니, 사진이니 이 따위 소리 하지 마. 세상에서 제일 추잡한 놈들이 프로근성 없는 것들이야. 뭐?
규율, 규칙? 임마 그건 기본이야. 기본이라고. 기본도 못 지키는 놈이 예술 핑계대면서 자기 합리화만 시키지. 그런
의타심은 추잡하다 못해 구역질나. 너 그런 구역질나는 인간이 되고 싶냐?”
“아니요.”
조영인은 노골적인 언변을 가지고 있다. 그의 화법은 때로 잔혹해서 꼭 누군가의 눈물을 뽑게 했다. 때로 조영인은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특히 같은 말을 반복해야만 할 때 서류를 집어던지는 잔인한 놈이었다.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지면 우리는 잔뜩 오그라들어 그의 눈치를 슬슬 살피곤 했다. 내가 보기에 그의 태도는 예술을 하는 게 아니라 예술과 싸움을 벌이는 것 같다.
“추잡한 놈이 되기 싫으면 기본을 지키란 말이야. 알겠냐?”
“치, 일찍 나오면 뭘 해. 사진도 못 찍게 하면서.”
“임마. 누가 어시한테 카메라를 빌려주냐. 렌즈 몰래 빼가는 나쁜 놈들이 간혹 있는 것 같은데, 그 새끼 내 손에 잡히기만
해봐.”
“잡히면요?”
내 물음에 조영인은 인상을 살짝 구겼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가슴이 뜨끔거리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암시를 주듯 새침하게 뜨고 있었다.
“내 손에 잡히기만 하면, 홀딱 벗겨서…….”
“홀딱 벗겨서요?”
“홀딱 벗긴 다음에 음, 이런 저런 삐리리한 아주 저질의 나쁜 짓을 해줄 테니까.”
“삐리리한 짓이요?”
“야, 너 이리 와봐.”
조영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조영인의 가랑이 사이였다. 나는 홀딱 벗겨 무슨 봉변이라도 당할까봐 재빠르게 그가
손가락을 가리키는 곳에 섰다. 조영인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한다. 사나운 들개가 내 얼굴에 제 얼굴을 들이대고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지각 할 거야, 안 할 거야.”
“안 할게요.”
“또 지각하면 어떡할래. 그만 둘래?”
“싫어요.”
“그럼 어쩔래. 홀딱 벗겨서 이런 저런 저질의 삐리리한 나쁜 짓을 해줄까?”
“싫어요.”
“그것도 싫고 이것도 싫으면 어떻게 해줄까. 지각 안한다는 네 말을 어떻게 믿느냐 말이야.”
“다음에 또 지각하면, 지각하면.”
“지각하면.”
조영인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내 시선은 조영인의 삐뚤어진 미간을 향하고 있었다. 지각하면, 어쩌지. 나는 마땅한
절충안을 내놓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조영인이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을 때도 나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지각하면
어쩔까. 지각하면 밥을 살까, 지각하면 청소를 할까. 밥 사기 싫고 청소도 하기 싫으면 뭘 해야 하지.
“넌 맹한 척 하면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놔.”
“네?”
“모르는 척 하지 마.”
내 허리를 바짝 끌어당겨 조영인의 얼굴과 내 얼굴이 지나칠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었다. 입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비틀었다. 내 손은 나비처럼 살포시 조영인의 사타구니에 내려앉고 있었다. 손아래 느껴지는 살덩어리가 불끈불끈 심장처럼
뛰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빼며 조영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이제부터 진짜 지각 안할게요. 제가 또 지각하면, 그땐 옷을 홀랑 벗기던지 살가죽을 홀랑 벗기던지 알아서 구워먹으세요.
”
움찔 굳어 있던 조영인이 바람 빠지는 소리도 웃었다.
“맹랑한 녀석.”
내 코를 쥐고 흔들며 조영인이 말했다. 나는 손을 떼고 그의 가슴을 밀쳤다. 뭔가 아쉬운 듯 황망해 보이는 얼굴을 뒤로
하고 조영인의 사무실을 나와 버렸다. 조영인의 예술은 이래서 예술이 아닌 것 같다. 예술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의 중심축에
서 있어야 했다. 그래야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기본을 지키라면서 조영인은 나에겐 관대하다.
예술과는 늘 싸우는 그가 나와는 타협하려고 한다. 그런고로 감정에 타협하지 않는 나는 비록 지각쟁이지만 진정한
예술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