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화
by leefail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녀석을 흠모해왔다. 동경, 이상, 연민, 애정, 애욕, 욕망.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흠모라는
포괄적 개념으로 적용 할 수 있는 수많은 단어 중에 내가 녀석에게 가장 절박하게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바로 애욕이다.
나는 녀석의 육체에 사로잡혀 있다. 녀석의 육체가 내게 주는 향연에 사로잡혀 있다. 그 따사롭고 먹먹한 느낌은 어머니의
자궁 속인 것 같은 안락함이 있다.
물의 입자보다 더욱 질기고 밀도가 높은 액체 속에 발가락부터 머리의 끝까지 푸욱 담가져 부유하는 기분. 때로 녀석의
섹스는 그런 느낌이다. 이 적나라한 광란이 아슴아슴하게 멀어진다.
나는 지금 좋아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다. 녀석의 어깨를 깨물기도 하고 그의 목을 있는 힘껏 끌어안기도 한다. 처음엔
옆구리를 간질이는 입술과 혀에 허리를 비틀며 깔깔깔 웃어젖히기도 했다. 어젯밤엔 무얼 했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것은
체면을 벗어 내리는 자의 민망함 때문에 괜스레 나오는 말이었다. 어젯밤 녀석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선 일말의 궁금증
도 없었다. 그 말은 홀딱 벗고 마주하고 있는 자의 면괴함일 뿐이었다. 그 면구함을 벗어던지고 이젠 웃는 것도 말하는
것도 숨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 채 녀석의 허리가 강하게 안쪽으로 밀어붙일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다
잊었다. 본능으로 얽히고 있는 것이다. 녀석의 기이한 재주가 발동된다. 녀석은 가끔 나를 야생의 짐승으로 만들어 버린다.
모든 번뇌와 상심, 아니면 반대되는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을 이 순간만큼은 전부 잊게 해주는 것이다. 그 환각 같은
자유에 휩싸일 때마다 나는 짐승들이 부럽다. 본능만으로 사는 짐승들에 비하면 사람이란 얼마나 답답할 정도로 어리석은가
. 대체로 그 모든 것은 태곳적부터 누가 만들었을지 모르는 이성에 근간하고 있다. 사실 나는 그것을 이성이라 읽고 체면
이라고 해석한다. 체면의 문화. 그 답답한 체면의 문화를 녀석은 벗게 해준다. 그것이 녀석과의 섹스에서 오는 오르가즘
이다. 형용할 수 없는 자유로움. 내 가랑이 사이로 들어와 있는 녀석의 살덩어리가 더 이상의 발기가 유지되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섹스를 즐긴다. 그리고 풀이 죽는 그것을 끼워 넣은 채로 녀석이 풀썩 내 가슴으로 엎어졌다. 끄응하며
숨을 내뱉는 녀석의 번들거리는 등허리를 손으로 끌어안았다. 무엇에 밀리는지 내 속에 들어와 있는 살덩어리가 소름
끼치는 느낌으로 꾸물텅거리며 빠져나갔다. 나는 그제야 숨을 탁 터트렸다. 하아, 하아, 하아. 땀에 젖은 육신이 마주
비벼지며 질척거린다.
계절은 여름, 시간은 새벽이다.
“…….”
어제 뉴스에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더니. 창밖의 플라타너스가 유난히 요란을 떨어대며 허리를 굽이친다. 가지에 달려 있
는 손바닥모양 큰 잎들이 파락거리고 있다. 나는 창밖의 그 광경을 바라보며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조금씩 체면을 차리고
있는 것이다. 내 가슴에 비비적거리고 있는 녀석의 이마가 뜨끈하다. 조금 더운 느낌에 에어컨을 작동시켰다. 나른한
손길로 리모컨을 들어 버튼을 누르자 벽걸이형 에어컨의 날개가 소리를 내며 열린다. 장마 때문인지 우리가 흘려댄 땀
때문인지 시트가 눅눅하다.
“비켜 봐.”
다시 얽혀드는 녀석을 밀어내고 일어섰다. 등짝에 땀이 고여 있었는지 일어서자 서늘한 인공 바람에 소름이 인다. 음료수
만이 꽉꽉 들어 차 있는 소형 냉장고를 열고 하이네켄 두 개를 꺼냈다. 침대에 아직도 고꾸라져 있는 녀석의 옆으로 캔
하나를 던졌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를 들고 태풍의 기미로 소란스러운 창가로 걸어갔다.
캔버스 80호 사이즈 정도의 창밖은 새벽녘의 어두움에 잠겨 있다. 건너편 오피스텔의 분양안내 현수막이 어둠 속에서
처녀귀신의 치맛자락처럼 푸들푸들 떨고 있다. 차가운 맥주를 들이켜고 바람의 세기와 강도를 예상해보았다. 태풍은 매우
가까운 곳에 와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냄새나는 주차장이 싫어 오피스텔 입구에 그냥 세워둔 내 바이크, 닌자가
걱정스럽다. 이 정도 바람에 쓰러지진 않겠지만. 점검하듯 어둠 속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비척거리며 일어난 녀석이 침대헤드에 등을 기댄 채 맥주를 마시고 있다. 희끄무레한 어둠으로 표정이 잘 보이지가 않는다.
나를 쳐다보는 듯도, 아닌 것도 같다. 괜스레 긴장이 되어 등을 꼿꼿이 했다. 확신할 수 없으면서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자 몸은 또 체면을 차리는 것이다. 그제야 내 알몸이 녀석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염려스럽다. 나는 내 성기를 내려다보다
모자를 그 위에 씌우고 돌아섰다. 푸웃- 하고 맥주를 뿜으며 녀석이 웃었다.
“L is for the way you look at me, O is for the only one I see, V is very, very extraordinary, E is even more
than anyone that you adore can.”
흐릿한 비음을 섞어 나탈리 콜의 love를 부르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마치 스트립쇼를 하는 것처럼 모자로 사타구니를
가리고 한바퀴 빙그르르 돌자 다시 큭큭거리며 웃는다. 단순한 멜로디를 반복하며 녀석의 옆에 풀썩 몸을 뉘였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속삭이는 것처럼 불러본다.
“Love is all that I can give to you. Love is more than just a game for two. Two in love can make it. Take my heart and please don't break it. Love was made for me and you--”
내 마음을 가져가, 하지만 내 마음을 깨지는 말아줘. 사랑은 당신과 나 둘로 만들어 졌거든. 낯간지러운 가사를 읊조리는
내 입술을 녀석이 손가락을 내려 누른다. 입술을 배회하는 손가락을 핥아 올렸다.
“귀여운 척은.”
그런 말을 내뱉는 녀석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이와 이 사이에 갇혀 있는 길쭉한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찌릿 하는 아픔을
느끼게끔 힘을 콱 주었다가 놓아주었다. 옆으로 돌아누우며 녀석의 허벅다리 안쪽을 기댈 자리를 고르는 것처럼 문지르며
툭툭 치곤 머리를 고였다. 내 얼굴을 쓸어내리는 녀석의 손이 부드럽다. 어느 날은 사포처럼 거칠고 어느 날은 물고기
비늘처럼 부드럽다. 같은 손인데 어째서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이상하게 생각하며 나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 L은 네가
날 바라보는 법이야, O는 내가 바라보는 한사람, V는 아주 아주 특별한, E는 네가 흠모하는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LOVE 라는 말을 하며 한번도 언급해 본적 없는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애욕과 사랑은 분명히 다르다. 나는 녀석에게 애욕의 감정을 품고 있다. 녀석은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까. 맥주를 마셔 축축해진 입술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내 입술을 덮는다. 아직 우리는 애욕에 물들어 있을 뿐, 사랑은 하고 있지 않다. 사랑은 몹시도 소모적인 감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