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외전
그 일이 있던 이후로 며칠이 지났는지 제대로 세지 못했다. 오랫동안 창문 전체를 가리고
있던 암막 커튼 덕분에 밝은 햇빛을 구경해본 것도 까마득한 일이 되어버렸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할 정도로 적적한 방 안. 그렇다고 룸메이트가 있던 것도 아니었으면서 묘하게
낯선 공기였다. 나는 괜히 입을 벌려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쓸데없고 영양가 없는
말들인 걸 알면서도 이 적적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핸드폰 진동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나는 작게 욕을 내뱉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예상했던 대로 핸드폰 화면엔 ‘사장님’이라고 적혀있었다. 부재중 통화 9건과 메시지
10개가 쌓여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마치 지금 확인한 척 천연덕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야!!! 장현우!!!
너 왜 전화 안 받아!!!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쩌렁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내 미간은 저절로 찌푸려졌다.
나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기력한 말투로 대답했다.
“…지금 받았잖아요.”
― 너 오늘도 안 나올 거야? 너 때문에 지금 밑에 애들만 고생하고 있잖아. 주말 다 빼먹고
뭐하자는 건데?!
“…오늘부터 나갈게요.”
마지못한 내 대답에 사장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통화가 끊기기 직전까지 제발
나오라는 말을 수도 없이 되뇌었고, 나는 무성의한 대답으로 그를 안심시켰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렇게 한참 동안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잔뜩 뻗친 머리카락을 손으로 꾹 눌렀다. 겨우 침대를 벗어나 옷장을
뒤적이던 중, 현관문 옆면에 위치한 전신 거울이 눈에 띄었다. 항상 깔끔히 정리되어있던
방 안엔 며칠 전 입었던 검은색 정장이 헝클어져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고, 그 날 마셨던
각양각색의 빈 술병들이 식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지. 실연이 뭐 대수라고 성인답지못하게 알바는 잠수타버리고,
학교도 계속 빼먹고….
유치하다는 걸 잘 알지만, 이렇게 실연당한 티를 팍팍 내면 그 애가 다시 연락해주지
않을까, 나한테 달려와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아무도 몰라준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철없어 보일 뿐인데도 헛된 희망을 걸어본 셈이었다.
나는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꽤 오랜 시간 쳐져 있던 커튼을 확 걷어버렸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뱀파이어 마냥 환하게 비추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렸고, 가까스로 창문을 여는
것까지 성공했다. 쌀쌀한 바람이 쾌쾌했던 공기마저 정화시켜 주는 기분이었다. 나는
바닥에 띄엄띄엄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과 쓰레기들을 하나씩 집으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허리를 숙일 때마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한숨 소리가 애처롭게까지
느껴졌다. 잊으려고는 하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게 힘든 일을 겪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사람이 측은해지려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그 후로 한 번도 켜지 않았던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한순간에 밝아진 방 안이 낯설기만 했다. 나는 꽉 찬 쓰레기봉투를 현관 앞에 내놓았고,
쌓인 설거지와 빨랫거리를 마저 정리하기 시작했다.
평소 즐겨듣던 음악을 스피커로 켜고, 옷장에 걸어뒀던 하얀색 셔츠와 짙은 회색의 정장
바지를 꺼냈다. 아까 그 쾌쾌하고 음침한 방 안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예전처럼
깔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미지 좀 바꿔볼까 싶어 가만히 있는 머리카락을
넘겼다 내렸다 계속 반복했다. 거울 앞에서 보낸 시간이 꽤 지났던 건지, 두 번째 재촉
전화가 울려댔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며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형, 가고 있어요.”
신발장 위에 얹어져 있던 지갑을 들고 현관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안 나온 지 며칠 안
지났을 뿐인데, 밤공기가 비교적 따뜻해진 것 같았다. 나는 내 할 말만 해버린 채 실수인
척 통화를 끊어버렸다. 길게 늘어서 있는 자취방 건물들과 편의점을 지나고 익숙한
카페와 식당들이 즐비한 대학로 쪽으로 들어서자, 달갑지 않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나는
수많은 기억을 모른 체하듯, 길가에 세워져 있던 택시에 탔다.
***
주말 전 금요일 밤, 가게 안은 한창 바쁠 시간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누군가의
주먹으로 어깨를 세게 맞았다. 이 정도면 오랜만의 신고식치고 약한 편이지….
나는 아픈 척 표정을 찌푸리며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형, 손님들 다 보는데 때리는 건 좀…”
“아는 새끼가 지금 오냐? 빨리 갈아입고 나와.”
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얼굴 정면으로 검은색 앞치마를 던졌다. 요란한 조명과
어수선한 술집 분위기를 뚫고 지나가 구석에 위치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능숙하게 앞치마와 와인색 넥타이를 매고 반신 거울 앞에 섰다. 시간이 촉박한 탓에
왁스도 제대로 못 바르고 나와 머리는 축 처져있는 상태였다. 나는 손끝으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거울 앞을 떠나지 않았다. 묵직한 창고 철문을 뚫고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가게 안을 쩌렁쩌렁 울리고 나서야, 나는 넥타이를 느슨히 당기며 밖으로
향했다.
“현우, 너가 저쪽 테이블 주문 좀 받아.”
“네네….”
그동안 날짜를 유심히 안 봐서 몰랐는데, 아까 보니 집 안에서만 11일을 지냈다. 그렇게
등에 가시가 돋을 정도로 누워 지낸 후에야 차라리 일에 치여 사는 편이 그 애를 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조금이나마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다행이지, 만약
실연당하자마자 가게에 나왔으면 잔뜩 구겨진 얼굴로 사장님한테 불려갈 게 뻔했다.
접시도 서너 개쯤 깼겠지.
나는 매고 있던 앞치마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3번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얼마 만에
웃어보는 거더라…. 앞에 앉아있는 손님들은 내 사정을 알 리 없겠지만, 기계적인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받았다.
“살라메 하나랑 빌라 엠 로쏘 한 병 맞으시죠?”
“네. 맞아요.”
잊자고 마음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들고 있던 수첩에 메뉴 이름을 적고 고개를 들자, 앞에 앉아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날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오른쪽 팔로 턱을 괴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연한 갈색 머리카락과 긴 속눈썹, 색소를 탄 듯 연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돌리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와인부터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가게 안을 울리는 노랫소리만큼이나 심장이 크게 뛰는 것 같았다. 분명 유하진과
닮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인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를 뻔했다. 나는
카운터 쪽에 진열되어있던 와인잔 두 개를 꺼내 들고, 적당한 온도로 유지된 레드와인 한
병을 가볍게 들었다. 그 남자가 있는 테이블로 향하기 전,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장현우. 안 어울리게 이런 걸로 떨지 말자.
평소대로 테이블 위에 와인병을 올려놓고 오프너로 능숙하게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다만, 와인병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는 점이 평소와 달랐다. 나는 빈 와인잔에 붉은색
와인을 채우며 마치 훔쳐보듯 ‘그 남자’를 흘끗 쳐다봤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손님은 그
남자까지 두 명. 둘은 평범한 친구, 애인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깍듯이 존댓말을 하며
딱히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며 이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의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 보였다.
여덟 살? 아니, 열두 살 정도?
딱 봐도 원나잇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내가 왜 남의 인간관계에 집착하고 있나 싶었지만, 계속 시선이 가고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죄송합니다.”
와인이 잔을 넘쳐 흐르고 있었다. 진한 붉은색 액체가 잔을 타고 흘러 새하얀 테이블
시트를 적셨다. 평소 이런 실수에도 당황하지 않고 잘 마무리했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버벅거리기 일쑤였다.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둔 마른 수건으로 테이블을 정리하고, 물든
테이블 시트를 걷어버렸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옷에 흘린 거 안 보여?”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귓바퀴에 달린 볼륨을 음 소거한 것 마냥,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걸러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기계처럼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고, 손님들과 점원들의 시선이 점점
이쪽으로 쏠리는 것 같았다.
“이 정도 갖고 뭘 그래요? 그냥 나가요. 어차피 여기 온 것도 형식적인 거였잖아요.”
옆에 서 있던, 갈색 머리의 남자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일행을 말렸다. 그리고는 흘끗
내 쪽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말고 실실 웃었다. 딱히 기분 나쁘게 비웃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어떤 의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갈색 머리의 그 남자는
일행에게 뭔가 소곤거렸고, 불같은 성격으로 버럭 화내던 남자는 레드와인으로 살짝 물든
정장 바지를 만지작거리며 뒤를 돌아 가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재수도 없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질러진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무릎까지 꿇어 테이블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흐르고 있는 술을 마른 수건으로 닦았다.
“저기요.”
나는 고개를 들어 다가온 남자를 빤히 올려봤다. 정말 아무리 봐도 유하진과 똑 닮은
남자였다. 다른 점을 굳이 찾자면 유하진과 달리 눈웃음이 자연스럽다는 것과, 쌍꺼풀이
좀 더 짙다는 것.
사실 가게 손님을 짝사랑 상대와 겹쳐 본다는 거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얼굴에 계속해서 시선이 머물렀다. 말없이 빤히 쳐다보고 있던 내 모습에 그도
적잖게 당황한 건지, 멀뚱히 눈만 깜빡이며 나를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 눈싸움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와인으로 젖은 수건을 바닥에 놓고 몸을 일으켰다. 이름도 모르는,
하진이를 닮은 그 남자는 내 어깨를 살짝 넘는 정도의 키였다. 키는 하진이랑 비슷하거나
좀 더 큰 느낌. 어깨나 골격 자체도 생각보다 좀 더 단단해 보였다. 아무 말 없던 내가
답답했는지, 그 남자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지갑에서 뭔가를 꺼내 다짜고짜 손에
쥐여줬다.
“세탁비는 받아내야죠. 나중에 연락 줘요.”
그렇게 멋대로 내 손에 자기 명함을 쥐여주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 잘난 세탁비를
받을 거였으면 처음부터 계좌를 불러주던가, 현금으로 달라 하면 될 것을. 게다가 와인을
흘린 건 그 나이 많은 남자의 옷이었는데? 뭔가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이름은 이도윤.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평범한 회사원.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에
다소 놀라웠지만, 그보다도 일하는 내내 퇴근하는 동안에도 이도윤이라는 남자와 옆에
있던 나이 많은 남자의 사이가 계속 머릿속을 떠돌았다. 추측해봤자 그저 원나잇, 아니면
돈이 얽혀있는 관계? 더 나아가서는 거래처 사람? 별 시답지도 않은 생각들이 종일 날
괴롭혔다.
***
이도윤….
12시간 내내 어제의 일을 되짚고 생각하느라 밤을 새워버렸다. 퀭해진 눈가를 손으로
비비며 침대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나는 하품을 늘어져라 하며 탁자 밑에 떨어져
있는 담뱃갑을 손에 쥐었다. 담뱃갑의 가벼운 무게만으로도 안이 텅 비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며칠 동안 건물 주인 아저씨 몰래 집 안에서 담배를 피웠었는데, 하필이면 오늘
새벽에 걸려 잔소리를 호되게 들었다. 마침 담배도 떨어졌겠다 편의점에 갈 준비를 했다.
왔다 갔다 하는데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 설마 아는 사람을 만나겠냐는 생각에 뻗친
머리를 검은색 모자로 가렸고, 후줄근한 회색 후드티와 추리닝 바지 차림으로 카드랑
핸드폰만 챙겨 들었다.
생각보다 더워진 날씨에 꽤 두꺼운 후드티 소매를 걷어 올렸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고민 없이 항상 먹던 도시락과 음료수 두 개를 집어 담배와 함께 계산했다.
“어서오세요.”
“어떤 커피 우유? 샌드위치는 전에 먹던 거 맞지?”
경쾌한 방울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절대 마주치기도, 아는 척하기도 싫은
사람. 그는 핸드폰을 귓가에 댄 채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통화 상대는… 그의
웃음소리와 말투를 봤을 때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느긋하게 계산하고 있는 점원을
은근히 재촉하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점원은 계산이 끝나고도 물건들을 봉지에
담아 주려는 듯 카운터 밑을 뒤적였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 모양으로
‘괜찮아요.’라 했고, 얼른 카드를 받아 들어 부랴부랴 물건들을 손에 들었다.
“…오랜만이네요. 형.”
씨발… 왜 아는 척이야.
이건 당연히 마음속에만 담아둔 말. 아마 소주 3병쯤 마셨으면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을
수도 있는 말이었다. 맨정신으로 말하기엔 찌질하고 구차해 보인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나는 가까스로 말을 아끼며 여유로운 척 웃음 지었다.
“뭐야…. 왜 친한 척이냐?”
“맥주라도 한잔 하자고요.”
강이태는 품에 들고 있던 캔맥주 두 캔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뭐 승자의 여유… 그딴 거냐?
속으로 이런저런 욕설과 말들이 떠올랐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편의점 밖으로 나가
파라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던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던 담배를 꺼냈다. 그냥 이 상황이 막연하게 화나는 건지, 구겨진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이태는 편의점 밖으로 나왔고, 그는 들고 있던 캔맥주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나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보란 듯 캔맥주를 따 벌컥벌컥
들이켰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어색할 줄이야.
나는 일부러 소리를 내 기침을 하며 쓰고 있던 모자를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강이태도 내
눈치를 보고 있던 건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처음엔 형이랑 이렇게 엮일 줄 몰랐어요.”
“…난 뭐 알았겠어? 그때 우리 학교로 편입했다는 놈이 하진이가 말한 첫사랑일 줄은….”
나는 마음속 깊이 참고 있던 한숨을 내뱉으며 내려놨던 캔맥주를 다시 한번 크게
들이켰다. 어쩌면 그 날, 강이태와 유하진, 내가 한 자리에 있던 그 술자리에서부터 모든
게 이미 정해져 있던 거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허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백이나 제대로 하고 차일 걸 그랬나.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분명 똑같은 길을 밟을 게 뻔한 일이었다. 막상 바로 옆에 있는
하진이를 보고 있으면 똑같은 욕심이 생겼겠지.
“…집에서 하진이가 기다리는 거 아니야?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냐?”
“10분 정도는 괜찮아요.”
“…걔가 답답한 구석이 있어도 너가 참고 기다려줘. 너도 알잖아? 걔 표현 서툰 거.”
“잘 알죠. 우리 둘 다 하진이 때문에 고생 꽤나 했잖아요.”
강이태는 어느새 캔을 비워 편의점 옆에 놓인 쓰레기통으로 골인시켰다. 가벼운 캔이
둔탁한 플라스틱 쓰레기통에 부딪히는 소리가 다소 경쾌하게 귓가에 울렸다. 괜스레
먹먹해지는 마음에 나는 주머니 깊숙이 넣어뒀던 담배를 꺼냈다. 체감상 10분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저 멀리서 익숙한 누군가가 다가왔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예상은 했지만….
하진이는 멀리서 날 발견하고는 마치 각목 인형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3초간 그대로 멈춰
섰다. 오랜만에 보는 그 어리바리한 모습이 꽤 그리웠던 것 같았다. 나는 터져 나오려던
웃음을 삼키며 남아있던 맥주를 마저 비웠고, 자리에서 일어나 강이태에게 말했다.
“너 한눈팔거나 저번처럼 쟤 울리면 그땐 내가 채갈 거니까 알아서 해.”
“…걱정 마세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강이태를 뒤로하고, 나는 뻣뻣하게 경직되어있는 하진이 쪽으로
다가갔다. 호랑이 앞에 놓인 토끼마냥 잔뜩 주눅 든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그를
놀려주고 싶었다. 바로 앞에 멈춰 서자, 그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우 형, 오랜만이에요.”
“나한테 뭐 죄지었어?”
나는 차분히 빗질된 그의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었다. 남들이 보기엔 혼자 심술부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처럼 대해줘야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봐줄
것만 같았다. 하진이는 투덜대며 하늘로 솟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건지, 그는 시선을 마주한 채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살짝 몸을
숙여 그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강이태가 널 어지간히 좋아하긴 하나보더라.”
“…….”
하진이는 잔뜩 멍해진 표정으로 파라솔 밑에 앉아있는 강이태를 바라봤고, 나는 하진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덧붙였다.
“뭐해? 가봐.”
그 후 하진이가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나는 내 할 말만 하기 바빴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먹먹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마음 같아선 억지로라도 그를 붙잡고, 어떻게 해서든 내 옆에 두고 싶었다. 이
속마음은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하진이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 멍청한
유하진은 혼자 끙끙거리며 밤새 고민할 테니까.
나는 어젯밤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명함을 꺼내 유심히 살폈다. 꽤 오랜 시간 집 앞을
서성거리며 망설이던 끝에 핸드폰을 꺼냈고, 명함에 적힌 번호를 눌렀다. 점점 길어지는
통화연결음에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가빠지는 숨을 골랐다.
― 여보세요?
이런 식으로 처음 보는 사람을 아는 사람과 겹쳐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하면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 시간 괜찮아요?”
나는 마음속으로 ‘유하진’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부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