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동물원의 제이슨
지각한 타격이 크긴 컸는지 오기영의 무리 외에는 전혀 손님이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가게가 휴업인 것 같다는 말이 퍼진 듯했다. 자업자득이라 할 말도 없다. 두드리고 있어봤자 마음만 답답해지는 계산기를 과감히 내려놓고 후카를 입에 물었다.
뻐끔, 축축한 허공에 대고 동그란 연기를 뱉어 놓았다. 이람호는 오늘도 없는 일까지 만들어서 하시는 중이다. 오기영과 그의 친구들은 이람호가 대걸레나 먼지떨이를 가지고 곁을 지나갈 때마다 뭐라도 말을 붙여보려 수작이었으나 그는 참으로 산뜻하고 침착하게 그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어디서 쿨내 안 나요? 혼자 킁킁대고 있으려니 눈앞으로 잘 빨아놓은 걸레가 툭 떨어졌다.
“…뭔데.”
“할 일 없으면 카운터라도 닦으라고.”
뭐라 말하려다 팔꿈치 아래가 끈끈한 걸 자각하고 조용히 걸레를 집어 들었다. 파이프를 마저 빨아들이고 내려놓자 이람호가 의아한 듯 묻는다.
“그거 맛있어?”
“피워볼래?”
“아니.”
이람호가 이곳에 드나들기 시작한 지도 어느새 몇 달 되어가지만, 후카에 대해 묻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이전에 슬쩍 본 바로 이람호의 담배 취향은 심플했었다. 이런 들척지근한 향을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의외였다.
“내가 피워보고 싶은 건 아니고, 하도 맛있게 피우길래 궁금해서.”
놈이 그새를 참지 못 하고 내 손에서 걸레를 빼갔다. 장부와 계산기와 모니터를 하나씩 들어 올리며 카운터를 깨끗하게 닦아내는 움직임이 능숙했다.
“난 좋아하지만 니 취향은 아닐 것 같은데. 어차피 향으로 피우는 거라.”
“오늘 건 뭔데?”
“사과향.”
맡아봐, 하며 파이프를 내밀었다. 그러나 이람호는 그 손을 지나쳐 상체를 쑥 내밀더니 내 목덜미로 덥석 코를 박았다.
“…….”
미친, 깨무는 줄 알았네. 너무 놀란 나머지 딱딱하게 굳어버린 내게서 마음껏 숨을 들이켠 이람호가 한참 뒤에야 떨어져 나갔다.
“그러네.”
“…….”
“사과향이네.”
멀리서 오기영의 무리가 휘파람을 불었다.
끝을 모르는 적자행진이어도 장부는 써야 한다. 매출과 손익을 꼼꼼히 기록하고 카운터에 엎어졌다. 손님들이 떠나고 적적해진 가게 안, 어딘가에서 이람호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날이 어슴푸레 밝아올 시간이다. 그래봤자 창 하나 없는 지하에서 식별할 방법은 없었다. 아, 그래. 가게를 옮기고 싶은 데는 그 이유도 있었다. 하루가 지나가는 과정을 눈으로 보고 싶다는 것.
아침이 밝아오는 모양을 보면 이람호가 떠오른다.
열아홉 살의 풍경이다. 이른 새벽, 나는 쓰레기를 내놓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슬리퍼를 끌고 터벅터벅 걸어가던 시야에 푸른 피쉬가 일렁였다. 돌아보니 골목 끄트머리에 이람호가 보였다. 메마른 등에 검은 트레이닝복만 봐도 이람호였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고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서 있었다. 피쉬가 낮게 유영하며 그 쓸쓸한 등 주변을 맴돌았다.
이람호가 국가대표 선발전에 탈락한 다음 날이었다.
- 인터넷에서는 다 이람호가 이긴 거라고 하던데. 완전 편파판정이었다고.
김세나가 소시지를 까먹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 편파판정? 왜?
- 이람호 상대가 A대생이었거든. 그쪽 학교 연줄이 선발전이고 심판이고 다 꽉 잡고 있대. 이람호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KO 나온 게 아닌 이상 소용없었을 거라던데. 아니, KO가 나와봤자 반칙패당했겠지.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스포츠에서 그런 건 없는 줄만 알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동이 틀 무렵 바깥공기를 마시고 있을 때면 이람호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어째서 그 시간에 그런 외로운 모습으로 서 있었을까. 그것도 우리 동네에서.
혹시 나를 찾아왔었나.
“태경아.”
주방에서 나타난 이람호가 톡톡, 카운터 위를 두드렸다.
“끝났어. 가자.”
“…어.”
가게 안은 어느새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오픈 준비도 따로 필요하지 않을 정도다. 적자행진인 와중에도 이람호에게 나갈 아르바이트비는 전혀 아깝지 않은 이유였다. 이람호가 없으면 이렇게 몸 편하게 가게를 운영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아참.”
막 밖으로 나서던 이람호가 멈춰 섰다.
“열쇠 어쩌지?”
“어?”
“잠그고 갈 수가 없잖아.”
아차. 나도 덩달아 멈춰 섰다. 들어올 땐 어떻게든 들어왔지만 나갈 땐 가게를 잠그고 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열쇠는 모조리 이람호의 도장에 있다.
“맞다, 아…. 까맣게 잊고 있었네.”
“잠깐 있을래? 가지고 올게. 침낭 안에 떨어뜨린 것 같다고?”
“…….”
이람호는 어제 낮부터 일했고, 지금 이 시간까지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매일 끝날 때마다 나를 데려다주고 가는 것도 미안한데 이런 똥개훈련까지 시키게 되다니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안 잠그고 가도 되지 않을까…? 하루쯤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니면 너 퇴근해. 나 오늘 그냥 가게에서 자면 되니까. 니가 이따 열쇠 가지고 오면 그때 다시….”
“뭐하러 그래? 지금 가서 찾아오면 되는데.”
“글쎄 좀…….”
“안에서 잠그고 잠깐만 기다려. 이 시간엔 차도 없어서 얼마 안 걸려.”
잠그고 기다릴 것까지야. 어차피 이람호가 없던 때에는 혼자 다 알아서 하던 일이다.
“아까 일 별로 없을 때 다녀올 걸, 나도 깜빡하고 있었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너무 빨리 이람호에게 안주해버린 것은 아닐까.
“…이람호.”
이제 와서 이람호 없이 살 수 있을까.
“가지 말라니까.”
당장이라도 박차고 나갈 듯 급해 보이는 팔을 붙들었다. 멈춰 선 그가 의아하게 돌아본다. 얼굴에 쓰여 있었다. 이게 갑자기 왜 이러지.
“가지 말라고.”
“…….”
“좀.”
나는 증거가 필요하다.
피쉬는 나를 떠났다. 가끔 한 번씩 잔해를 보여주지만 그 역시 오래 가지는 못 하리라는 것을 안다. 나는 피쉬를 잊을 준비를 해야 한다. 피쉬 없이도 외롭지 않게 살아가기 위해서.
그러자면 이람호를 연습해야 한다. 푸른 피쉬를 보여주지 않는 이람호가 그 외의 어떤 신호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사소한 표정, 말투, 목소리, 손짓에 대해서 낱낱이 기록하고 싶다. 평온해지기 위해서. 내가 뱉은 말과 들을 말을 일일이 되짚으며 불안한 밤을 보내지 않기 위해서.
“문만 잠가.”
이람호는 그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몸의 감각 앞에서 비유는 어차피 부질없는 것이다. 높아진 체온을 점막으로 받아들이고 평소와 다른 목소리를 귓전에서 듣는 경험은 그래서 더욱 소중해진다. 땀에 젖은 이람호의 목덜미를 힘껏 끌어안으며 나는, 몸을 관통하는 뻐근한 통증을 뱃속에 새겨 넣으려 애썼다. 이람호는 시작부터 끝까지 내게 묻기만 했다. 괜찮아? 아프지 않아? 그러면 나는 대답했다. 아파, 그런데 괜찮아.
찌르르, 1층 벨이 울리는 소리에 선잠에서 깼다. 조간신문이 꽂힌 모양이었다. 뻐근한 등을 쭉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에서 뭔가 달그락거리는 기척이 들려왔다.
“람호야.”
모포를 둘둘 만 채 주방으로 향했다. 이람호는 프라이팬에 달걀을 두르다 말고 돌아보았다.
“일어났어?”
평온하고 상쾌한 목소리였다. 안도감이 든다. 슬금슬금 걸어 등 뒤로 다가갔다.
“뭐해.”
“너 아침 먹어야지.”
“흠….”
잠이 덜 깨서 눈앞이 가물가물하다. 이람호의 어깨에 턱을 얹어놓고 눈을 감았다. 그는 한 손을 뒤로 둘러 내 등을 토닥이고는 물었다.
“컨디션은 괜찮아?”
“응. 그냥 졸려.”
“간단하게 먹고 더 자. 나는 열쇠 가지러 다녀올 테니까.”
넓적한 접시 두 개에 계란프라이와 베이컨이 차례로 담겼다. 리큐르를 다루는 건 어설퍼도 요리는 꽤 하는 것 같다. 이참에 이람호를 아예 캐스팅해서 어디 대학가에 브런치 가게라도 내보는 건 어떨까…. 또 다시 망상에 빠져 있는데 그가 접시 하나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앉아서 먹어.”
“네, 사범님.”
이람호가 픽 웃었다. 나는 그가 웃을 때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를 너무나 좋아한다. 슬쩍 일그러지는 눈썹 위의 흉터도.
“열쇠 침낭 안에 있는 건 확실해?”
베이컨을 돌돌 말아 입에 넣으며 이람호가 물었다. 나는 한 번 더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거기 외에는 떨어뜨릴 만한 곳이 없는데.”
“흠.”
“아, 근데 너 어제 정말 뭘 어떻게 한 거야? 순간이동이라도 했어?”
그게 이제야 생각이 난다. 포크를 들이밀며 따지듯 묻자 이람호는 또 능청만 부렸다.
“보안문제는 노코멘트라니까.”
“아니, 진지하게 말야. 열쇠 없이도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뭔지는 내가 좀 알고 있어야 하잖아. 누가 또 너처럼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너 없을 때 내가 얼마나 불안하겠어.”
그 말에는 이람호도 설득당한 모양이었다. 흠, 하며 헛기침을 한 이람호가 접시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따라와봐.”
그가 향한 곳은 주방 뒷문이었다. 새벽에 나갈 쓰레기를 모아놓은 좁은 복도를 지나면 창고라 하기도 방이라 하기도 애매한 공간이 나온다. 사람 두 명이 간신히 나란히 설 너비에 5미터 높이의 천장, 이람호가 가리킨 것은 그 천장 옆에 매달린 환기용 창이었다.
“…….”
밖에서 보면 저 창이 1층 높이에 나 있긴 하지만, 그래서 설마 지금 저기로 들어왔다는 건가. 이람호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창은 아무리 봐도 성인 남자가 출입하기엔 지나치게 작았을 뿐더러 무엇보다 바닥까지 다이렉트로 뚫려 있었다. 아무리 이람호라 해도 5미터 높이를 맨몸으로 뛰어내렸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야, 뻥치지 말고…. 설마 아까 저기로 들어왔다는 건 아니지?”
“나가긴 힘들어도 들어오는 거야 쉽지. 보여줘?”
이람호가 덤덤히 묻더니 돌아서 나가버렸다. 나는 멍하니 선 채 이람호가 어딘가에서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허세가 너무 심하지. 아무리 이람호여도….
그때 창 너머로 그림자가 나타났다. 설마,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올려다보았다. 이람호는 창을 안쪽으로 열더니 다리부터 쑥 내밀었다. 어찌나 거침없이 침입했는지 저대로 떨어지는 게 아닐까 가슴이 다 철렁했다.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는데 창틀을 양 손으로 쥔 채 몸을 끝까지 밀어 넣는다. 그는 이제 5미터 높이 창에 두 팔로만 매달린 모양이 되었다.
“괘, 괜찮아?”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는 내게 이람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응.
“아니, 거기서 어떻게 내려올 건데? 그냥 뛴다고는 하지 마, 나 그런 거 보면 심장 터질….”
“뒤로 좀 물러나 있어, 위험하니까.”
간단하게 경고한 이람호가 두 발을 벽에 대더니 손을 놓고 훌쩍 뛰었다. 악! 나도 모르게 비명부터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반대쪽 벽을 한 번, 또 반대쪽 벽을 한 번 발로 밀어 차듯이 짚고는 너무나 쉽고 가볍게 바닥으로 착지했다.
“…….”
이람호가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나는 후르륵 주저앉았다.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축지법인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는데 어느새 내 앞에 다가온 이람호가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놀랐어?”
“…놀라지, 그럼….”
“이거 파쿠르라고 하는 거야. 위험한 거 아냐.”
그가 내민 손을 붙들고 일어나면서도 얼떨떨했다. 파쿠…, 뭐? 중얼거리듯 묻자 이람호가 내 등을 털어주었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거나 점프하거나…. 그러면서 노는 운동인데, 예전에 아는 형이 무슨 영상물 촬영한다고 해서 잠깐 배웠었어.”
“…….”
“출연료를 많이 줬거든.”
이람호가 씩 웃었다. 그래도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아무리 출연료…, 아르바이트…, 아무튼, 그런다고 뭐 이런 짓을 해. 가게야 하루 안 열면 그만인데 어제 그럼 너 여기 불도 안 켜진 상태로 이 짓을….”
“깜깜해도 안이 어떤 상태인지는 다 알잖아. 내가 다 정리해놨는데.”
“…아무튼 두 번 다시 하지 마, 아, 나 진짜 깜짝 놀랐네. 애 떨어지는 줄 알았네….”
그러자 이람호가 푸하, 웃었다. 화사하게 휘어진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린다. 좋냐? 좋아? 나도 모르게 그의 뺨을 꼬집어 죽 늘렸다.
“아야, 아파.”
“넌 도대체가 뭐 얼마나 밀도 있는 인생을 산 거야? 안 해본 일이 뭐야? 이거 뭐라고? 파, 파쿠…?”
“파쿠르. 나중에 유튜브 검색해봐. 나는 정말 초보적인 것만 할 줄 아는 거고 멋진 영상 많아.”
이람호는 내가 놀라 자빠진 것이 어지간히 재밌는 모양이었다. 소년처럼 웃는 얼굴에 싱그러움마저 깃들어 있다.
“…저 창도 막아버려. 정말, 내가 왜 열쇠를 흘려서…. 저런 데로 출입할 궁리를 하는 건 이 세상에 너뿐일 거야.”
“위험한 거 아니라니까.”
“암튼 걱정할 게 없다는 건 내가 알겠네. 어떤 미친놈이 5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리면서까지 이런 구질구질한 가게를 털러 오겠어? 확인시켜줘서 고맙다, 그래.”
“그래도 잠가놓긴 해야겠어. 내가 들락거리는 거 누가 봤을지도 모르니까.”
“…….”
“이따 밖에서 자물쇠 걸어놓을게.”
그럼 됐지? 이람호가 내 이마를 쓸어 넘기며 어르듯이 말했다. 그 사이 뒷목이며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끈적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놈의 팔을 탁 쳐내고 혼자 돌아섰다.
“되긴 뭐가 돼? 여차할 땐 니가 그냥 열쇠 따고 또 똑같은 짓할 수 있는 거잖아.”
“열쇠는 니가 갖고 있으면….”
“열쇠 소리 그만해, 열쇠 이제 지겨워. 가지러 가지도 마. 열쇠공 부를 거야. 어제도 그냥 이랬으면 되는 걸 괜히….”
“태경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지 않자 어깨를 쥐어온다. 쑥 가까워진 얼굴이 여전히 장난기로 반짝였다. 휘어진 눈동자 가득 들어찬 애정이 어지럽다. 그래서 나는 이제 와 후회하는 것이다. 열아홉의 그 새벽, 부당함에 저항할 힘이 없어 무력하게 가라앉아 있던 너의 뒷모습에 어째서 말을 걸어보지 못 했던가, 하고.
“화내지 마.”
“…….”
“응?”
어쩌면 나를 찾아 거기까지 왔을 너에게 그럴싸한 위로는 못 하더라도, 네가 어떤 사람이건 내 마음은 변치 않는다는 한 점의 확신이라도 주었더라면.
“응?”
그랬더라면 네가 그토록 거칠고 황폐한 기억으로만 살아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알았다고.”
이제 와 후회하고, 그리하여 다시 한 번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은.
“화 안 내니까 그만해.”
이제라도 돌이킬 기회를 받아서일까.
“진짜?”
그런 걸까, 람호야.
* * *
“뭐 보는 거야?”
핸드폰에 한참 집중해서 코를 박고 있는데 김세나가 뒤에서 얼굴을 쑥 내밀었다. 평소와 다르게 달달한 향기가 풍겼다. 언제나 차분하고 세련된 향을 추구하던 김세나로서는 별스러운 향수였다.
“그냥 좀…. 향수 바꿨어?”
“알아주는 거 정말 우리 자기밖에 없다.”
김세나가 내 목을 끌어안더니 흐흐, 웃었다.
“이거 뭔데? 야마카신가?”
“아니, 파쿠르.”
“파쿠르가 야마카시 아냐?”
“…그래? 잘 몰라서.”
영상 속 남자는 고층건물을 자유자재로 뛰어넘으며 온갖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아찔해지는 광경이었다. 뭐하러 목숨 걸고 이런 짓을 하지. 안전장치 하나 없이 맨몸으로 온갖 기예를 부리는 남자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즐거워 보였다.
“이거 갑자기 왜?”
“이람호가 이걸 하더라고.”
“뭐?”
황당하게 되물은 김세나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에 황당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이람호가? 이런 걸?
“니가 직접 봤어야 해. 5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리는데 난 무슨 무협영화인 줄 알았다. 벽을 막 타더라니까.”
“진짜로? 야, 영상을 찍어 놨어야지.”
“그런 걸 뭐하러 찍어. 눈으로 본 것만으로 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떠올리니 또 다시 섬뜩해졌다. 발만 까딱 잘못 디뎠다가는 크게 다칠 텐데, 운동한다는 놈이 왜 그렇게 겁도 없이 몸을 굴리는지 알 수가 없다.
“와, 너무 의외다. 이미지랑 심하게 다르….”
뭐라 덧붙이려던 김세나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왜, 뭐. 돌아보자 그녀의 시선이 내 뒷목 쪽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
아파, 그만 좀 해, 목덜미에 이를 박고 잘근대던 이람호가 떠오르고 나도 모르게 얼른 손으로 목을 감쌌다. 김세나의 눈이 점차 가늘어졌다. 분위기 개판되겠군. 마른침을 삼키고 눈치를 보는데 그녀가 곧 씨익 웃었다.
“잤냐?”
“…….”
“어휴, 빠른 거 봐. 아주 속전속결이네.”
김세나가 낄낄대고 웃더니 슬그머니 내 어깨를 놓았다. 뭐라 할 말이 없어 머쓱하게 셔츠 칼라를 잡아당겼다. 거울 봐서는 안 보이는 부분이라 미처 몰랐다. 김세나도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뭐라도 다른 화제가 없는지 찾는데 종이 딸랑, 울리고 이람호가 들어섰다.
하여간 타이밍…. 막막하게 바라보며 애매하게 웃었다. 이람호는 여느 때와 같았다. 분위기가 개판이든 아니든 가벼운 인사부터 건넨다.
“안녕.”
“…어.”
그대로 마가 끼었다. 먼저 침묵에 굴복한 것은 김세나였다.
“아…, 아. 태경아. 어, 저기, 너. 그러니까, 이거 가질래?”
그녀가 바쁘게 클러치를 뒤져 작은 봉투 한 장을 꺼냈다. 겉면에는 요란뻑적지근한 글씨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공포의 한계에 도전한다! 귀요미들의 낙원 물범랜드가 좀비의 습격을 받은 사연! 최고의 스릴 쇼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이게 뭔 기역부터 히읗까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날뛰는 소리냐며 타박부터 주었겠지만 김세나가 그랬듯이 나 역시 절실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해줄 무언가가.
“어, 재, 재밌겠네. 우와, 물범이 막 좀비가 되는 거야?”
“…그, 그렇겠지? 어, 그래. 이람호랑 둘이 가면 되겠네. 응, 그거 두 장이야….”
“물범이 뭐가 어쨌다고?”
분위기야 이렇거나 저렇거나 언제나처럼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할 준비로 분주하던 이람호가 불쑥 물었다. 김세나는 그조차도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게, 내가 좀 아는 관장님 조카가 물범랜드 이벤트 담당자인데 이번에 좀 야심만만하게 준비한 거라고…. 재밌다면서 주더라고. 평이 좋아서 요즘 손님도 많대.”
“…이게? 물범이 좀비가 되는 호러 쇼가?”
“아, 아냐. 물범이 좀비가 되는 게 아니고…. 물범 사육사가 좀비래.”
“…….”
“아참, 이거 반전인데…. 스포했네, 미안.”
희미하게 웃은 김세나가 빠르게 뒷걸음질쳤다. 나는 이람호와 눈을 한 번 마주치고, 봉투를 열어 티켓을 꺼냈다. 귀여운 물범 마스코트가 전기톱을 들고 있는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다.
“뭔데? 동물원이야?”
이람호가 대걸레로 바닥을 밀며 물었다. 내 눈에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데 매일매일 참 열심히도 닦는다 싶다.
“어, 응. 동물원인데…. 뭐 좀비가 나오는 이벤트 같은 걸 하나봐.”
“흐음.”
“…갈래? 너만 괜찮으면 가도 되는데….”
당연히 관심 없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러면 이 떡밥은 여기서 식고 김세나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람호는 대걸레 자루 끝에 턱을 얹고는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고민을 왜 해, 설마 가고 싶은 거냐? 물범 좀비 쇼에?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데 입을 연 이람호가 대단히 의외의 말을 뱉어 놓았다.
“나 동물원 가본 적이 없어.”
“…엉?”
“언제 갈 수 있는 건데?”
나도 모르게 김세나를 돌아보았다. 김세나도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한참 서로를 마주본 채 말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런 지옥도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여러분! 선생님 보이죠? 여러부운?”
그렇다, 봄소풍철이다.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어린 인간들이 동물원 입구부터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아이들 수십 명을 혼자 체크하느라 이미 진이 빠져버린 교사들과 교사의 통제가 그저 답답해 어쩔 줄을 모르고 제 몸을 흔들어대는 아이들과 유모차를 바리바리 끌고 들어온 가족 방문객들로 이루어진 인산인해를 멀리서 목도한 것만으로 나는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버리고 말았다. 죽는다. 저 안으로 들어갔다간 십 초 만에 피가 빨려서 죽고 말 거야. 가게를 또 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일찍부터 나오느라 잠도 세 시간밖에 못 잔 터였다.
“…저기, 람호야….”
“와, 사람 진짜 많네. 이런 데는 다 그래?”
슬쩍 올려다본 이람호의 얼굴은 너무나 태연했다. 아이들의 행렬을 보고도 겁먹은 기색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잊고 있었다. 이 녀석은 태권도 사범이었지. 인생에서 가장 힘이 넘치고 가장 인내심 없는 시기의 어린애들을 호령 한 마디로 찍소리 못 하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이지….
“여긴 나도 처음 와보는 거라 잘 모르겠지만…. 소풍철이라 이런 것 같은데.”
“소풍…, 아, 그러네. 요즘 소풍 많이들 가지.”
“…….”
“입장권은? 저게 입장권 구매줄이야?”
태연함을 넘어 어째 들뜬 것 같다. 그 모양을 빤히 보다 고개를 돌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나이를 먹도록 동물원 한 번 가본 적 없이 일만 했다는 불쌍한 영혼에게, 나는 어린애들한테 치이면 죽는 병이 있으니 도로 집에 가자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 우리는 초대권 있으니까 바로 들어가면 돼….”
“그래?”
그러나 생각할수록 웃긴 것도 사실이었다. 곧 삼십줄인 남자 둘이서 물범랜드가 웬말이냐. 그것도 물범이 좀비인 줄 알았는데 사육사가 좀비였던 호러 이벤트를 보러 왔다는 게 말이 되냐고. 아청이 들으면 배를 잡고 뒤집어져서 웃을 일이다. 진이 쭉 빠져 바닥만 보는데 이람호가 내 어깨를 슬쩍 쥐었다.
“태경아.”
“어?”
“피곤해? 그냥 집에 갈까?”
“…….”
“잠도 얼마 못 잤지?”
옆머리를 쓰다듬는 손끝이 따뜻하다. 들여다보는 눈동자에는 애정이 가득 차 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부드러운 스킨십에 나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와, 섹스 한 번 했다고 이럴 수가 있나. 이렇게 하루아침에 다정한 남자친구가 되다니.
“…아, 아냐. 괜찮아. 그냥 사람이 하도 많으니까 기가 빨려서….”
“너 피곤하면 무리할 거 없어. 오늘만 날도 아니고.”
미치겠다. 이람호는 나를 다루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아니, 아니지. 내가 이람호에게 너무 쉬운 것이다. 살펴주는 손길, 마음을 담은 눈빛 하나에 전생의 원수라 한들 용서할 마음이 들어버린다. 유구한 세월 동안 품어온 첫사랑이 나를 바보로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아냐, 가자. 이거 이벤트 이번 주까진데 오늘 안 가면 어차피 못 볼 것 같아.”
“그래?”
이런 감각은 오랜만이다. 내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 말을 아끼는 상대의 속을 읽으려 애쓸 때의 간질간질함. 흠, 헛기침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온 거, 괜히 이람호가 내 눈치나 보고 있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즐겁게 하자, 즐겁게. 힘껏 미소를 띠고 그를 마주보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 할 것도 없다. 데이트 아닌가. 학생 때는 꿈도 못 꿔봤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꿈꿀 생각조차 없었던 동물원 데이트.
막상 입장해보니 각오했던 것만큼 혼잡하지는 않았다. 동물원 자체의 규모가 워낙 넓다보니 그런 듯했다.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좀비 이벤트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볼수록 심란해진다. 물범이 좀비인 줄 알았는데 사육사가 좀비였던 이벤트라니 대체 무슨 내용인가….
“저게 그렇게 보고 싶어?”
이람호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하고 되물었다.
“으응? 뭐?”
“저런 거 좋아해? 어제부터 되게 가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
“…….”
도대체 어떤 사고회로를 거쳤길래 저런 결론이 난 걸까. 곰곰이 되짚어보니 걸리는 게 없진 않았다. 막 출근한 이람호에게 티켓을 보여주며 같이 가자 들이대고, 사람이 우글거려 싫다면서도 굳이 들어오고, 가는 내내 플래카드에서 눈을 떼지 못 하고…. 그러자 또 간지러워졌다. 그런 내 모습이나 행동을 유심히 보고 있었을 이람호가.
“아니, 뭐…. 도대체 뭔 내용인지 감도 안 잡히니까 궁금하잖아. 너는 안 그래?”
“난 잘 모르겠어. 귀신이나 좀비나 그런 거 뭐가 무섭다는 건지.”
그래보이긴 한다.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장화홍련의 귀신이 나타나도 니네는 뭔데 내 방에 있느냐며 잘 타일러 내보냈을 인간이다. 이런 건 아무래도 김세나랑 봐야 재밌다. 귀신 그깟 게 뭐가 무서워? 나는 하나도 안 무섭단다, 하며 허세를 부리다가도 음산한 음악만 좀 깔렸다 하면 사자후부터 내지르는 게 아주 귀엽고 볼만한데.
“무서울 것 같아서 궁금하다는 건 아닌데…. 나도 이런 거 별 반응 없이 봐.”
“그래? 그건 아쉽네.”
“…뭐가.”
“벌벌 떨면 귀여울 것 같았는데.”
마음속으로 빌었다. 제발 무서워라, 벌벌 떨게. 내 인생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체험을 오늘 하게 해다오. 전기톱 든 물범을 빤히 바라보며 자가최면도 잊지 않았다. 나는 물범이 무섭다, 좀비가 무섭다….
“어, 기린이다.”
버스에서 내린 이람호가 낮은 탄성을 질렀다. 높은 울타리 너머로 커다란 기린이 나무를 뜯어먹고 있었다. 곁에는 어른 기린의 반만 한 아기 기린도 보였다. 울타리 안내판에는 아기 기린이 두 달 전 탄생했으며 이름은 호랑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기린 이름이 왜 호랑이야?”
“그러게….”
“되게 가까이서 볼 수 있네. 신기하다. 이거 뚫고 나오지는 않나?”
이람호가 울타리를 툭툭 두드렸다. 말을 듣고 보니 나도 갑자기 걱정스러워졌다. 그러게, 저렇게 큰 동물을 이렇게 허술하게 둬도 되나. 아는 게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일단 나는 이람호와 다르게 동물원 유경험자였으므로 뭐라도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뭐…, 충분히 안전하다고 판단했으니까 이 정도로 해둔 거 아닐까? 맹수들은 전기 흐르는 철창에다 가둬두잖아.”
“이거 기린이 그냥 뒷발로 한 번 툭 차면 부서질 것 같은데 그냥 저 안에서 산다고? 왜?”
“…어…, 글…, 쎄. 사육사가 먹여주고 재워주니까?”
후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그러게 사람은 주제넘게 나서는 게 아니다. 허허실실 웃는 나를 보며 이람호가 흐음,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하긴 나도 굳이 탈출하진 않을 거야.”
“응?”
“울타리 잠가놓은 게 너라면.”
시공간이 분리되는 게 이런 느낌인가. 뱉어놓은 이람호는 너무나 평온하게 기린을 감상 중인데 내 정신만 위아래로 요동친다. 왜 이래. 나한테 대체 왜 이러냐고. 이쯤 되니 졸졸 따라붙을 때마다 차갑게 노려보던 십대의 이람호가 그리워질 지경이다.
“거…, 참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말이네….”
“그냥 그렇다는 거야. 뭐 좀 마시자.”
혼자 상상해본다. 돈이 엄청 많아서 이람호를 울타리에 가둬두고 키우는 나. 아침저녁으로 이람호의 잠자리를 살펴주고 때에 맞춰 맛 좋은 먹이를 준비해주고 건강을 관리해주는 나. 이람호는 그런 나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어서 울타리가 열려 있어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
큰일났다, 좋고 난리냐. 음료수 차로 향하는 이람호의 뒷모습을 보면서 망상을 끊으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나에게만은 온순한 맹수라니 말만 들어도 사랑스럽다. 다음에 한 번 작은 울타리를 사다가 이람호를 넣어보고 싶다. 내가 허락할 때까지는 나오지 마, 내가 꺼내주고 싶을 때 꺼내줄 거야, 나 외의 사람에게선 아무 것도 받아먹지 마….
“태경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카드지갑을 손에 쥔 이람호가 메뉴판을 턱짓하며 물었다.
“뭐 마실래?”
“어…, 어, 난 커피. 아이스로.”
“아이스 커피 하나, 생수 하나요.”
하지만 또 모르지. 이람호는 맹수가 아니니까. 언제고 뒷발이 아닌 손으로 울타리를 분리하고 떠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이토록 거리낌 없이 나만은 특별하고 나에게만은 다를 거라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끓어오르고 또 얼마나 빠르게 식어가는 것인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오랜 세월 내 친구였던 피쉬가 가르쳐준 것들.
마음이 간사하다. 웃는 얼굴 한 번 보고 싶었던 소원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열망이 되고, 십 년을 품었던 사랑이 이루어지자 증거로서 욕망을 원한다. 꾸밈없는 말에서 거짓을 찾고, 사랑을 속삭이는 눈에서 변심의 씨앗을 찾는다. 오지도 않은 미래의 가장 나쁜 경우를 생각하고 자꾸만 대비하려 한다. 이람호가 다정할수록 나는 불안해진다.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기를 바라면서도 그 바람을 믿고 싶지 않은 내가 뱃속을 쥐고 흔든다.
“여기.”
이람호가 받아온 커피를 내밀었다. 홀더에 티슈까지 감싸놓은 컵을 받아들면서 그의 얼굴을 살폈다. 평온하고 무던한 표정. 태풍이 불어도 속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을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오랜 세월 마모되어 둥그렇게 빚어진 나의 첫사랑.
사실 나는 알고 있다. 이람호의 어떤 말이든 절대 쉽게 나오는 건 아니라는 것을.
“세나가 너랑 잤느냐고 하더라.”
커피 한 모금을 쭉 빨고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었다. 생수 뚜껑을 따던 이람호가 멈칫했다. 오늘 처음으로 보여준 동요였다.
“어떻게 알고?”
“이거.”
파스를 붙여놓은 뒷목을 가리켰다. 반창고는 너무 뻔하고, 그렇다고 전시하고 다니기엔 눈으로 확인한 자국이 예상보다 훨씬 선명했다.
“아.”
간단히 대답한 이람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구나.
“그래서?”
“뭘 그래서야. 뻔히 보이는데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내 말은, 김세나 씨의 태도가 이제 좀 정리가 됐냐고.”
“…어?”
“그동안은 나나 김세나 씨나 비슷한 입장이었지. 그런데 이제는 아니니까, 김세나 씨 쪽에서도 이제까지와는 좀 달라질 필요가 있지 않아?”
“…….”
“네 생각은 달라?”
가히 기습이라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내가 눈을 크게 뜨고 굳어버린 사이 이람호는 생수 한 병을 반 이상 비워버렸다. 어,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더듬더듬 할 말을 찾는데 문득 머릿속을 때리는 가설이 있었다.
“…너 이거 일부러 그랬어?”
파스 위를 짚으며 물었다. 이람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병 뚜껑을 꼼꼼히 닫아 가방에 넣었을 뿐이다.
“가자.”
“아니, 잠깐…. 잠깐만.”
돌아서는 팔을 붙들었다. 금방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니까, 이람호가, 김세나를 견제하겠다고 지금 이런….
“야, 걔는 내 친구야. 십 년을….”
“십 년 동안 널 좋아한 사람이지. 네가 나한테 그런 것처럼.”
“…….”
“너한테 김세나 씨가 어떤 존재이고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아. 그냥 네가 한 번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마주치는 눈동자가 한없이 무겁고 진지했다. 이람호가 이렇게 갑자기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던 부분이다. 아니, 아니지. 일부러 외면하고 있던 부분이라고 말해야 맞지. 만약 이람호에게 그를 십 년 간 좋아하며 곁을 지킨 친구가 있고, 나와 이렇게 된 후에도 그 친구와의 관계에 변화가 없다면 나 역시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더러 김세나를 뭐 어쩌란 말인가. 순간 막막해진다. 이람호와 계속 사귀기 위해 김세나와 절교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 절로 걸음이 멎는다. 눈만 끔벅이고 서 있으려니 앞서가던 이람호가 슬그머니 멈춰 섰다.
“…….”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머리만 벅벅 긁었다. 조용히 한숨을 내쉰 이람호가 설렁설렁 다가왔다.
“미안.”
다음 순간 떨어진 것은 놀랍게도 사과의 말이었다. 이어 뻗어오는 손을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이람호는 순하고 걱정스러운 눈빛을 띠고 있었다.
“몰아붙일 생각은 아니었어.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야.”
“…….”
“겁먹지 마. 네가 싫다는 거 강요 안 해.”
이람호의 손이 계속 허공에 떠 있다. 늦기 전에 맞잡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심스레 그의 손끝을 지나쳐 팔을 쥐고 걸음을 옮겼다.
“내가 널 무섭게 해?”
멀리 곰 우리가 보였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간다. 비명에 가까운 웃음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남아도는 힘을 주체하지 못 해 힘껏 뛰는 남자아이들과 하나같이 입술을 빨갛게 칠한 여자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물결처럼 곁을 스쳐간다. 덕분에 나는 이람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딴청 피울 말을 찾을 수 있었다.
“애들 입술이 다 똑같은 색이네. 저 나이 땐 저 색깔만 예뻐 보이나?”
다행히 이람호는 어떤 고집도 부리지 않고 내 장단을 맞춰 주었다.
“입술 색이 어떤데?”
“전부 빨간색이잖아. 핑크나 오렌지는 한 명도 없어.”
“뭐가 다른데?”
“…응?”
“응?”
뭐가 다른가 하면…. 사람마다 얼굴색이 다르고 그래서 어울리는 색깔도 다르고 그래서 여러 가지 컬러의 화장품이 있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하마터면 김세나 이야기를 꺼낼 뻔했다. 김세나는 매일 입술 색이 다르잖아. 어쩔 땐 핑크색이고 어쩔 땐 벽돌색이고 또….
“입술은 원래 다 빨갛게 칠하고 다니는 거 아니었어?”
장단 맞춰주는 사이 궁금해졌는지 이람호가 지나가는 여자애들을 곰곰이 살피기 시작했다. 야, 야, 보지 마. 얼른 등을 때려 시선을 돌리게 했다.
“모르겠으면 됐어.”
“넌 어떻게 아는 건데?”
“…나는 원래 좀 색깔에 민감해.”
“흐음.”
더 이상 이어갈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평소에도 이람호와 대화할 때 수없이 김세나를 입에 올렸던 것 같다. 혹시 이람호는 그때마다 언짢았던 걸까. 그런데 차마 말을 못 하다가 이제야 한 마디 던져본 거고, 나는 거기다 대고 정색해버린 거면….
“어.”
낮게 내뱉은 이람호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의아하게 바라보니 노란 모자를 쓴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홀로 동동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등에는 큼지막한 이름표도 붙여 놓았다. 햇빛유치원 신서은.
이람호는 참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아이에게 다가가더니 무릎을 굽혀 앉았다. 아이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서은아, 선생님은 어디 계셔?”
그가 아이의 눈높이를 맞추고 부드럽게 묻는다. 아이는 여전히 눈만 끔뻑이고 있을 뿐이었다. 불안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를 아예 모르는 기색이었다.
“친구들 어디 갔어?”
“…….”
“아저씨가 잠깐 그 목걸이 좀 봐도 돼?”
자기 자신을 너무나 쉽게 아저씨라 칭하는 이람호를 보니 존경심이 들었다. 이 자식, 어른이구만. 조심스레 다가가 같이 쪼그려 앉았다. 아이는 손가락을 입에 넣은 채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동그란 팬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건 채였다. 아마 보호자의 연락처가 쓰여 있을 것 같았다.
“목걸이 좀 볼게. 괜찮지?”
이람호가 재차 물어도 반응이 없다. 아무래도 의사소통이 원활할 것 같지 않았다. 고민하다 아이에게 손을 뻗는 그를 제지했다.
“내가 볼게.”
“응?”
“아니다, 저기…. 저기요.”
지나가던 여고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둥근 단발머리에 새빨간 입술을 한 여자아이가 의아한 얼굴로 멈춰 섰다.
“좀 도와줄래요? 이 애가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네? 네.”
“목걸이에 보호자 연락처가 있을 것 같은데 봐주세요.”
뭐야? 뭔데? 여고생의 친구들도 함께 몰려들었다. 아이는 갑자기 제 앞을 빼곡히 채운 어른들을 보고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아, 여기 있어요. 엄마 전화번호요.”
“불러주세요.”
여고생이 불러주는 번호를 핸드폰에 찍고 이람호에게 내밀었다. 전화해봐. 이람호는 영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네, 물범랜드 안인데 아이가 혼자 있어서…. 네, 곰 우리 앞입니다. …무슨 곰이냐고요? 어, 그러니까….”
“반달곰, 반달곰.”
“네, 반달곰 우리 앞이네요.”
“근데 얘 누구예요?”
아이가 사라질까봐 살피면서 이람호의 통화를 거드는데 여고생의 질문세례까지 들어오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이에게 손을 흔들고 말을 붙이던 여고생들은 아이가 영 반응을 보이지 않자 금방 흥미를 잃어버리고 일어섰다.
“저희 이제 가도 돼요?”
“아, 네, 도와줘서 고마워요.”
“야야, 물범 쇼 한대. 보러 가자.”
맞춘 듯이 빨간 입술을 한 여고생들이 맑은 소리로 웃으며 사라지고 또 다시 이람호와 나만 남았다. 그제야 그가 내게 물었다.
“방금 왜 그랬어?”
“왜긴, 아무리 도와주려는 거여도 너 같은 덩치가 애한테 함부로 손댔다가 잘못하면 큰일 나. 넌 평소에 애들 많이 접하니까 거리낌이 없는 거겠지만 밖에서까지 그러지는 마.”
이것도 아청 때문에 갖게 된 경각심이다. 작년 가을이었나, 길을 가던 중 길에 엎어져 우는 여자애를 보고 집까지 데려다줬다고 했다. 아이가 중간에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안아준 게 화근이었다. 아이를 찾아 헤매던 아이 엄마는 웬 남자가 딸을 안아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며 경찰을 불렀다.
아이가 또박또박 아청이 도와준 사실을 말한 덕에 무탈하게 넘어갔지만 아청은 한동안 그 일을 떠올리면 분통이 터져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애를 도와주려 한 게 잘못이에요? 정말 뭐 그런 여자가 다 있어? 그의 불운을 진심으로 동정했기에 누구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그야 놀라지, 웬 노란머리 양아치가 내 딸을 안고 있으면.
어차피 남의 뱃속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상대가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의도로 하는 일인지 평범한 인간에게는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렇듯이.
“서은아!”
멀리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솔교사인 듯했다.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온 그녀는 한참이나 숨을 고르고 나서야 아이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감사합니다, 애가 약간 자폐증상이 있어서요.”
다급히 전하는 인사에 당혹감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교사는 아이의 손을 잡아당기다 아이가 도통 움직이려 하지 않자 결국 높이 안아들었다.
“저러면 힘들 텐데.”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교사를 보며 이람호가 중얼거렸다.
“애들은 한 번 안아주면 계속 안아달라고 하거든.”
“뭐 어쩌겠어. 걸을 생각을 안 하는데.”
“그래서 아버지가 초등부 애들 하원시키다 디스크가 왔어. 어찌나 업어달라 안아달라 성화인지.”
그건 의외다. 안아달라 업어달라 한다고 들어줄 양반 같지 않았는데. 단단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던 얼굴을 떠올리고 갸웃했다.
하긴, 이람호도 의외로 무른 구석이 있지. 어린애들 한정인 것 같긴 하지만.
“…….”
슬쩍 장난기가 올랐다. 이람호를 향해 두 손을 뻗고 고개를 까딱였다. 그가 의아한 눈으로 그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건 무슨 액션이야?”
“업어달라고.”
“그래.”
당연히 질색하거나 웃거나 뒷걸음질을 칠 줄 알았건만, 이람호는 너무나 태연하게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덕분에 식겁한 쪽은 나였다. 얼른 손사래를 치고 그의 어깨를 철썩 때렸다.
“아, 장난이야. 진짜 무서워서 농담도 못 하겠네.”
“장난? 왜?”
“…왜는 또 왜야, 장난 좀 칠 수도 있지.”
“괜찮아, 업혀. 다리 아픈 거 아냐?”
“아니라고, 일어나. 됐어.”
행여나 계속 앉아 있을까봐 얼른 팔을 붙들고 끌어당겼다. 순순히 일어서던 이람호의 눈에도 순간 장난기가 돌았다. 그걸 눈치 챘을 때 도망가야 했다. 설마, 하며 굳어 있는 사이 재빨리 팔을 뻗은 이람호가 내 허리를 감아 훌쩍 들어올렸다.
“악! 으악!”
시야가 뒤집히고 발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람호의 어깨에 얹힌 꼴이 된 채로 팔다리를 버둥거리고 있자니 놈이 읏샤, 하며 내 몸을 한 번 추어올린다. 머리로 피가 몰리고 얼굴이 불타오른다. 미친놈아! 등을 퍽퍽 때렸지만 소용없었다.
“야, 내려놔!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왜? 장난인데.”
“아오, 쫌, 아씨, 쪽팔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이 지나치게 잘 보이고 들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람호는 너무나 가뿐하고 신나는 걸음으로 나를 운반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아이가 풍선을 묶어놓은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저 아저씨는 왜 저러구 있어? 묻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가 다 잘못했어, 나 좀 내려놔. 응? 람호님, 제발요.”
“뭘 잘못했는데?”
“아무튼 잘못했어. 아, 피 쏠려. 아, 나 머리 터질 거 같아. 내 머리 펑 터진다. 터진다고.”
허리를 팡팡 때리며 우는 소리를 하자 이람호가 경쾌하게 웃었다. 몸을 낮춰 나를 내려놓고는 엉망이 된 머리를 쓸어 넘겨준다. 식은땀이 다 흘렀다. 얼굴이 불타는 것 같다. 뺨을 감싸는 손을 팩 뿌리치고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야, 어디 가?”
“집에 갈 거야! 쪽팔려서 여기 못 있겠어.”
물론 입구 방향으로 달린 것은 아니다. 곰 우리와 사자 우리를 지나쳐 아기동물들의 축사 앞에 도착해서야 모아뒀던 숨이 바닥났다. 무릎을 짚고 헉헉대고 있으려니 호흡을 다 고르기도 전에 따라붙은 이람호가 너무나 평온하게 물었다.
“다 뛰었어?”
“…헉, 너 이씨, 이 체력돼지가.”
“체력돼지는 뭐야, 대체.”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미소 짓는 얼굴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더 따져봐야 내 손해일 게 뻔해서 입을 다물었다. 아기동물 케이지 안에서는 갓 태어난 사자와 호랑이가 서로에게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벌게진 얼굴로 있는 대로 숨을 내쉬며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게 다 뭐하는 짓인가 싶어졌다.
“이놈의 동물원은 이름이 물범랜드면서 물범은 어딨는 거야? 왜 가도가도 육지 포유류밖에 안 나와? 장난해?”
“물범은 동물원 꼭대기에 있대. 한참 더 가야 돼.”
“그럼 셔틀버스를 꼭대기까지 운행하든가! 짜증나죽겠네 증말!”
이람호는 아예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내가 이성을 잃고 날뛰는 꼴이 재밌어 죽겠다는 기색이었다. 낯설다, 이런 면이 있었나. 십 년의 세월을 넘어 찾아낸 소년의 모습이 나를 여러 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아, 심태경.”
다가온 손이 뺨을 살짝 쥐었다 놓는다.
“귀엽다, 진짜.”
웃는 얼굴에 햇빛의 잔해가 매달린다. 눈이 부셨다.
망설이거나 투덜거렸던 일이 무색하게도 동물원은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이람호와 나는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각종 맹수나 희귀한 동물들에 하나하나 감탄하고 즐거워하며 어느새 동물원 꼭대기까지 다다랐다. 그곳에 있는 것은 물범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공연장이었다. 줄줄이 늘어선 입장줄도 보였다. 삼십 분 뒤부터 물범 쇼를 한다고 했다.
“어떻게 할래? 저것도 볼래?”
묻자 이람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뭔데?”
“물범들 데려다 놓고 묘기 같은 거 보여주는 거 아닐까.”
“묘기? 물범이?”
진심으로 의아한 듯 묻는 말에 나까지 순간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게, 물범이 묘기를 부리고 쇼를 한다고? 무슨 수로?
“사실 별생각 없이 온 거긴 한데 이런 거 동물 학대에 안 걸리나?”
이람호의 의문은 민감하고 새삼스러운 부분까지 이어졌다. 그러게. 안 걸리나. 솔직히 별로 궁금하지 않았기에 성의 없이 되받았다.
“뭐…, 관련된 법이 다 있지 않을까? 그거 통과했으니까 하는 걸 테고.”
“물범 좀비는 그럼 뭐야? 그것도 물범 쇼야?”
“…글쎄, 나도 잘 모른다니까.”
흘긋 시선을 돌려보니 공연장 앞에도 좀비 이벤트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아무래도 같은 장소에서 하는 모양이었다.
“희한하네, 정말.”
“니 머릿속이 더 희한하다. 오늘따라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아?”
“처음이니까 그렇지. 이런 거 전부.”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이라 더 난처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우선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래서, 어쩔 거야? 저거 볼 거야?”
“아니. 관두고 어디 가서 좀 쉬자.”
“…어? 정말로?”
“너 얼굴빛이 말이 아니야.”
이람호의 손이 내 뺨을 약하게 꼬집고 떨어져 나갔다. 얼굴빛? 내 얼굴빛이 어떤데? 의문은 카페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풀렸다. 거울에 비친 것은 눈밑이 검게 죽고 입술이 가칠하게 일어난 내 모습이었다.
“…….”
딱 하루 잠 좀 못 잤다고 곧장 이 꼴이 될 수가 있는 거냐. 곧 서른이라고 이러기냐. 아니, 아니지. 동갑인 이람호는 멀쩡하잖아. 씁쓸한 심정으로 돌아오니 이람호는 골똘히 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해?”
미리 시켜놓은 커피와 샌드위치를 뒤적대며 물었다. 그는 아, 하더니 느릿하게 대답했다.
“물범 좀비 사파리가 그래서 뭔가 싶어서.”
“검색해본 거야?”
“어, 근데…. 뭔가…. 희한하네.”
“제목부터 희한하잖아.”
“너 이거 정말 볼 거야?”
이람호가 은근히 물었다. 이건 또 의외의 반응이었다. 나는 커피 컵에 있던 얼음 하나를 와작 씹으며 그의 핸드폰 화면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뭐길래 그래.
[진심 개무서움 내 인생에 이런 공포가 없었음]
아마 이벤트 후기 페이지인 듯했다. 심드렁하게 스크롤을 내렸다. 그야 이런 데는 다 알바를 쓰니까 이런 평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지.
[이런 걸 왜 봄 시즌에 하는 겁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 데리고 갔다가 아이가 일주일째 밤마다 오줌을 지리고 트라우마를 겪고 있어요. 합당한 보상을 요청합니다]
[→ 뻔히 15세 이상 관람가라고 돼 있는데 부득불 애 데리고 들어간 아주머니도 참ㅋㅋ]
[→ 제 아이는 고2고 저는 애 아빠입니다]
…또 쭉쭉 내렸다. 점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째 재밌고 무서웠다보다는 아무리 호러 기획이라지만 동물원 이벤트가 이렇게까지 무서워도 되는 거냐는 평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평…, 좋다더니…. 이런 쪽으로 좋은 거였나.”
“어떻게 할래?”
“…뭘?”
“볼 거냐고. 안 무섭겠어?”
이람호가 마치 저와는 한 톨도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듯 말했다. 잔뜩 겁먹은 척 수작 부려보겠다던 마음까지 밀어내고 괜한 오기가 피어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나 이런 거 안 무서워한다니까. 괜찮아.”
“정말?”
“왜, 너는 무서워?”
눈을 가늘게 뜬 채 물었다. 이람호는 잠시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무섭다고? 뭐가?
“니가 무서우니까 괜히 내 핑계 대는 거 아냐? 안 보고 싶어서.”
느릿하게 두 눈을 끔뻑인 이람호가 이내 픽 웃었다. 당연하지만 내가 원했던 반응은 아니다.
“알았어, 그만 물어볼게. 보러 가면 되잖아.”
“…….”
“먹어. 세 시에 시작이래. 먹고 좀 쉬다가 가면 딱 맞겠네.”
그가 태평하게 권한 샌드위치는 밍밍하고 차가웠다. 이딴 걸 칠천 원이나 주고 먹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화가 난 것은 맹세컨대 겁먹어서가 아니었다. 절대로.
커피와 샌드위치를 꾸역꾸역 밀어 넣고 앉은 채 잠시 졸았다. 꿈속에서 나는 한참을 좀비가 된 물범에게 쫓겨 다녔다. 아니, 글쎄 왜 하필이면 물범이냐고…. 출구 없는 어둠 속을 헤매며 이람호를 찾았지만 허사였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이람호는 이미 좀비가 되어 있었다.
- 태경아.
뻗어오는 손은 군데군데 실로 기워진 채였다. 그 모습이 끔찍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그저 아프겠다, 안타까웠을 뿐.
“태경아, 일어나.”
눈을 번쩍 떴을 때, 어깨를 흔드는 손은 다행히도 말끔했다.
“입장 줄 서기 시작한 것 같은데.”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창밖으로 늘어서는 행렬이 보였다. 좀비 분장을 한 직원들이 줄 정리를 돕고 있었다.
“더 자게 두고 싶은데 이 이상 줄 길어지면 한참 기다릴 것 같아서.”
“어어, 그러네. 가자.”
비몽사몽간에 일어나는데 침이 주륵 흘렀다. 얼른 닦아내고 이람호의 눈치를 살폈다. 보지 못한 건지 모르는 척해주는 건지 이람호는 말없이 제 짐을 챙기고 있었다.
“인간들 참 할 짓도 없다. 이런 이상한 쇼 보자고 대낮부터 동물원에 다 오고.”
“그거 우리 얘기 아냐?”
민망함을 감추려 한 말에 이람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맞아, 우리 얘기야. 짧게 답하고 날름 줄을 섰다. 시간마다 입장 인원이 정해져 있는지 우리가 자리를 잡자마자 좀비 쇼 팻말을 든 직원이 마감을 알렸다.
“3시 입장 마감되었습니다! 이 다음에 오신 손님들은 3시 30분 타임부터 입장 가능하십니다….”
정말 인기가 좋긴 좋은 모양이었다. 바쁘게 달려온 사람들이 아쉬운 한숨을 토해내고 직원에 안내에 따라 옆줄로 옮겼다. 어쩌다보니 이람호와 내가 3시 쇼의 마지막 입장객이 된 셈이었다.
“…….”
롤러코스터를 타든 귀신의 집을 가든 피해야 할 자리는 딱 두 개다. 맨 앞자리와 맨 뒷자리. 중간에 대충 묻어가면 공포든 쪽팔림이든 어떤 식으로건 수습할 수 있지만 맨 앞과 맨 뒤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슬슬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손전등 나눠드리겠습니다. 두 분이신가요?”
가까이 다가온 직원이 물었다. 얼굴이 온통 물어뜯기고 뼈가 튀어 나온 분장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리얼하고 섬뜩했다. 엉겁결에 손전등을 받아들자마자 마른침이 꿀떡 넘어갔다.
“주의사항 꼭 확인하시고요, 나눠 받으신 책자는 입장 전에 바구니에 반납 부탁드립니다.”
“…저기.”
“네?”
“손전등을 왜 주시는 거예요? 이거 그냥 앉아서 감상하는 게 아니에요?”
“공연장 지하로 내려가셔서 정해진 길을 따라 쭉 이동하시면 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책자에 적혀 있어요.”
간단히 설명한 직원이 손전등이 든 바구니를 들고 앞줄로 옮겨갔다. 아무래도 바쁜 모양이었다. 큰일이다. 떨리기 시작했다. 긴장한 마음을 이람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두 손에 한껏 힘을 준 채로 책자를 넘겼다.
<귀여운 물범들이 화려한 공연을 펼치고 있는 물범 랜드 공연장의 지하 깊숙한 곳….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물범 ‘제이슨’의 원한이 깨어난다!>
…시작부터 여러 가지 의미로 불길했다. 이람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게 틀림없었다. 우리는 잠시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고 동시에 책자로 눈을 돌렸다.
<고향 오호츠크해를 떠나 한국의 동물원에 갇히게 된 물범 ‘제이슨’, 그는 사육사의 정성 어린 보살핌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향수를 이기지 못해 병을 얻는다. 한편, 천연기념물인 물범 제이슨이 동물원에서 죽을 경우 동물보호단체의 추궁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한 물범 랜드는 제이슨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거짓 서류를 꾸미고 그를 공연장 지하 수조에 가둬버린다.
누구도 찾지 않는 새카만 지하, 홀로 더러운 수조에 갇힌 채 죽을 때를 기다리던 제이슨의 눈앞에 나타난 검은 그림자. 과연 그 정체는…?>
“…….”
대체 이게 뭔데…. 동물원에서 이런 내용으로 호러 이벤트해도 괜찮은 거야? 정말이야? 이람호가 품었던 의문이 오버랩되며 나는 그만 황망해졌다. 힐끗 이람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좀비가 왜 나온다는 건데?”
흉터가 있는 쪽 눈썹을 찌푸리며 물음표를 여러 개 붙여 중얼거린다.
“그…, 그러게.”
답할 말이라곤 그뿐이었다. 곧 입장이 시작되고 앞사람들이 하나둘 안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까 봤던 공연장 줄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지하로 이어진다는 게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책자 반납해주세요. 절대로 뛰지 마시고 침착하게 이동해주세요. 연기자를 때리지 말아주세요.”
좀비 분장을 한 직원이 주의사항을 고래고래 외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연기자라니, 역시 좀비 분장을 한 아르바이트생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서 놀래주는 귀신의 집인가보군.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안내 책자의 얼토당토않은 설정도 한몫했다. 무슨 놈의 기획인지 모르겠지만 이벤트 페이지 댓글이야 어차피 반 이 상은 알바일 테고 이런 포맷으로 무섭게 만든다고 해봤자 뻔하지 싶었다.
“전등 내가 들까?”
입구에 다다라 이람호가 물었다. 고민하다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너 재밌으라고 주는 거야. 내가 양보해주는 거라고.”
“알아, 알아.”
입구부터 굴처럼 새카맸다. 계단이 어찌나 좁은지 일렬로 서서 내려가야만 했다. 당연히 전등을 든 이람호가 앞장섰다. 나는 한 손으로는 이람호의 셔츠 끝을, 한 손으로는 난간을 붙들었다. 어째 점점 속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응?”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컴컴한 계단을 잘만 내려가던 이람호가 걸음을 멈췄다. 스피커에서는 끝없이 음산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비린내가 났다. 나는 최대한 빨리 이 미션을 클리어하고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왜? 왜 그래?”
“저기 누가 있는데.”
이람호가 손을 들어 전등으로 비춘 방향을 가리켰다. 등으로 찬 기운이 지나고 신 침이 돌았다. 내가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이람호가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농담.”
“…….”
나도 모르게 이람호의 등짝을 힘껏 내리쳤다. 철썩, 경쾌한 소리가 났다. 아야야,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놈이 실실 웃었다.
“무서우면 무섭다고 해. 버티지 말고.”
“아니거든, 이딴 게 뭐가 무서워. 유치해 죽겠구만.”
이상하다, 분명 들어오기 전에는 없는 겁도 만들어서 이람호에게 들러붙을 생각이었는데, 막상 조금 겁먹고 보니 절대로 티내기가 싫어지는 것이다. 꾸며낼 틈도 없이 한심한 모습을 보이게 될까 겁이 나서.
[집으로 돌려보내줘……]
“악!”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노파 같기도 한 음성이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주저앉아 버렸다. 이람호가 얼른 나를 살피려 돌아섰다.
“괜찮아?”
방금 그거 뭐지? 제이슨 목소리랍시고 트는 건가? 이쯤 되니 불쾌하게까지 느껴졌다. 이벤트 후기에 줄줄이 달려 있던 항의글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기분 안 좋아? 나갈까?”
이람호가 물었다. 내가 큰 소리를 지른 탓에 놀랐는지 장난기가 걷힌 얼굴에 걱정만이 그득했다. 그 얼굴을 빤히 보다 소리를 낮춰 물었다.
“…방금 못 들었어?”
“들었어. 어린애 목소리 같은 거?”
“어….”
[집에 가고 싶어……]
두 번째는 좀 더 분명하게 들렸다. 하마터면 욕부터 내뱉을 뻔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멋대로 움직이려는 혀를 이성으로 꾹꾹 잡아채 잇새로 눌러놓고 심호흡을 했다. 후우, 하아아. 이람호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런 나를 살피고 있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
안 그래도 좁은 통로에 이상한 목소리가 쾅쾅 울리고 비린내가 코를 찌르니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이람호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안 되겠다, 나가자.”
“…아, 아니야.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너 지금….”
“괜찮다니까. 너 때문에 놀란 거야, 너 때문에.”
괜히 이람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 니가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놀란 거라구. 눈을 흘기며 따지듯 쏘아붙이자 미심쩍은 듯 흐음, 한다.
“그럼 빨리 나가자. 스토리 보지 말고.”
“…스토리?”
“안내책자에 있던데. 여기 코너마다 스토리 감상구간이 있대.”
이람호의 팔을 붙들고 몸을 일으켰다. 슬금슬금 나아가며 손전등이 비추는 곳을 살폈다.
“저기…, 나 말이야.”
“응.”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거거든. 원래 이런 거에 겁먹고 그러지 않는데….”
“그래, 알아. 다 알아.”
이람호가 관용 넘치는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꿀밤 한 대 먹여주면 여한이 없겠다. 물론 그 이전에 나 자신을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내가 대체 왜 이러지, 이딴 유치한 게 뭐라고. 그러나 아무리 스스로 타이르고 마음을 고쳐 먹어봐도 한 번 놀란 신경은 좀처럼 진정할 줄을 몰랐다. 맥박이 팔딱팔딱 뛰고 침을 삼킬 때마다 위가 뒤집어졌다.
“아무래도 냄새 때문인 것 같은데….”
“냄새?”
“어, 이거, 이상한 비린내 나는 거.”
“무슨 냄새? 나는 모르겠는데.”
“…….”
돌아본 이람호는, 도저히 연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의문을 가득 담은 얼굴이었다. 물론 손전등 하나가 광원의 전부였으므로 표정을 낱낱이 볼 수는 없다. 그래도 내 공포심을 한계까지 자극하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장난치지 말고….”
“아니, 정말로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나는 그만 아연해졌다. 냄새가 안 난다고? 이 속 뒤집어지는 비린내가? 한 손으로 코와 입을 막은 채 주위를 곁눈질했다. 여전히 시커멓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일단 가자.”
“괜찮겠어?”
“아, 그냥 빨리 보고 빨리 나가자고.”
중도 포기만은 안 된다. 심지어 들어오자마자 퇴장이라니, 그런 기록을 세워놓고 김세나 얼굴을 어떻게 보란 말인가. 설령 이 길의 끝에 있는 것이 분장한 직원이 아닌 진짜 좀비라 해도 나는 그 좀비가 내 신경줄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음을 이 한 몸 바쳐 증명하고 돌아가야 했다. 물론 지금까지의 추태를 이람호가 빠짐없이 보긴 했으나 이 정도는 모르는 척해줄 것이다. 이람호니까.
계단을 다 내려오자 그나마 발밑이 밝아졌다. 붉은 등이 벽 아래쪽을 따라 희미한 빛을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꼭 정육점에 걸린 돼지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너…, 여, 여기 길은 알아?”
이람호의 셔츠를 뜯어낼 기세로 붙들고 물었다. 놈은 참으로 태평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길 알고 있을 필요 없어. 외길이니까 쭉 따라가면 된대.”
“아니, 아니 그런데…. 이게 중간에 뭐가 튀어나와서 니가, 나 말고 니가 엄청 놀란다고 쳐봐. 니가 방향감각을 좀 잃어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 앞뒤가 헷갈리면 뒤로 가고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미안한데 통 뭔 소린지 못 알아듣겠다. 그냥 나가는 게 낫겠는데.”
“아니! 아니라니까! 나는 이걸 클리어해야 한다고!”
이람호가 어깨가 가라앉도록 큰 한숨을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 중요한 것은 이 미칠 듯한 불안감을 개미 더듬이만큼이라도 해소하는 일뿐이었다.
“너 그럼 뭐가 튀어나와도, 아무리 놀라도 가던 길 똑바로 갈 수 있어? 방향 안 헷갈리고 안 헤맬 자신 있어?”
“그래,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똑바로만 갈게. 걱정하지 마.”
“갑자기 물범이 나타나서 니 발목을 물어도으아악!”
복도 아래쪽에서 사람 손이 쑥 튀어나온 것은 그때였다. 놀라 자빠질 뻔한 내 팔을 붙들어 세워놓은 이람호가 전등을 비춰보더니 픽 웃었다.
“모형이야, 봐봐.”
“…….”
“아무리 동물원 이벤트라지만 좀 너무하네. 허접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래, 허접한 거 보고 기함해서 미안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과연 놀란 가슴이 무색할 만큼 엉성한 모양이긴 했다. 어두운 곳에서 전등 빛으로 봤는데도 마네킹 손에 얼기설기 피칠갑이나 해놓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다 이런 식인가본데….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그래?”
마네킹 손을 툭 걷어찬 이람호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혹시나 저 손이 다시 살아나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버리지 못한 채 재빠르게 이람호의 뒤꽁무니로 따라붙었다.
“아, 여기 있다.”
안쪽으로 꺾이는 지점에 다다르자 이람호가 걸음을 멈췄다. 전등으로 비춘 자리에는 머리 위에 공을 얹고 묘기를 부리는 물범 사진이 있었다. 설명도 첨부되어 있었다. 제이슨 3세.
<향수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도 사육사 앞에서는 활짝 웃어 보이던 제이슨. 이때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했다. 사육사의 지극한 사랑이 곧 비극의 씨앗이 되리라는 것을…>
“…야, 진짜 뒷얘기 안 궁금하다.”
진심이었지만 어쩐지 센 척하느라 내뱉은 말 같아 스스로 창피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람호는 사진 곳곳을 전등으로 비추며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뭐 봐?”
“아니, 사진에 뭐 힌트가 있는 게 아닐까 해서. 이거 마지막에 퀴즈가 나온대.”
“…너는 그 짧은 시간에 참 이것저것 열심히도 봤네. 퀴즈는 또 뭐야….”
전등이 사진 구석구석을 비추었지만 별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이람호가 곧 돌아서고, 다소 제정신을 찾은 나는 이제라도 깎여나간 자존심을 회복해보고자 그의 옷깃을 놓았다.
[집에 보내줘어어!]
제이슨의 사진이 있던 자리가 시커멓게 바뀌더니 눈알이 까맣게 비어버린 좀비가 튀어 나온 것도 그때였다.
“……!”
너무 놀라면 비명도 안 나온다는 말을 이만큼 실감한 순간이 없었다. 입을 벌린 채 뒷걸음질을 치자마자 벽을 짚었다. 짚은 자리가 물컹했다. 설마, 하며 내려다보니 역시나 눈구멍 자리가 비어 있는 물범 모형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라, 람….”
목구멍이 파들파들 떨린다. 무릎이 얼어붙은 듯했다.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린 나를 본 이람호가 어이구야, 하며 내 손을 물범 모형에서 떼어놓았다.
“아, 이거 매직미러네.”
그리고는 제이슨의 사진이 있던 자리, 지금은 웬 좀비가 달라붙어 발광을 하고 있는 액자 안쪽을 톡톡 두드려보는 것이었다.
“와, 잘 만들었네. 점점 분장이 리얼해지는데.”
“…람호 님.”
“응?”
“저 손 좀 잡게 해주세요…. 기절할 것 같아요.”
애원하는 소리에 이람호가 낮게 웃었다. 내미는 손은 단단하고 따뜻했다.
“너 손가락 장난 아니게 차가운데, 정말 괜찮아?”
“괜찮아, 나는 이제 강해졌어. 그래, 그래서 제이슨이랑 사육사랑 뭐 어떻게 됐는데…. 사육사가 제이슨한테 저주받아서 좀비가 됐냐?”
“여기 있다, 두 번째.”
희끄무레한 전등이 비춘 자리에 사육사와 제이슨이 함께 찍은 사진이 보였다. 다만 사육사는 얼굴 부분이 칼로 난자당한 듯 시뻘겋게 긁혀 있었다. 제이슨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양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제이슨의 표정도 귀여웠다.
“근데 얘는 실존인물…, 아니…. 실존물범인가….”
“그렇지 않을까? 홍보성으로 기획한 이벤트일 테니까.”
그 말을 들으니 더욱 마음이 복잡해진다. 제이슨 4세.
<사육사가 바란 것은 제이슨의 향수병이 낫는 것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보살핌은 사육사에 대한 제이슨의 의존성을 증폭시키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제이슨은 사육사가 주는 먹이만 먹고, 사육사가 곁에 있어야만 잠을 잤으며, 이에 사육사는 개인 일상을 포기하면서까지 제이슨에게만 매달려 있어야 했는데…>
“어, 잠깐만. 이거 스토리 위험하지 않냐? 어디까지 가는 거야.”
얼른 손을 내저으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잣말을 했다. 이람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위험해? 뭐가?”
“…아니, 딱 패턴이 이거 금단의 사랑….”
“…?”
“으응, 그래, 나만 쓰레기야? 응, 모르겠으면 됐어….”
이번에도 사진 자체에는 별다른 트릭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패턴을 파악했다. 이람호가 전등을 거두는 순간 뒤에서 좀비가 튀어나오겠지. 걸려들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아예 그의 팔짱을 끼고 달라붙었다.
“와, 심태경.”
이람호가 낮은 탄성을 질렀다.
“너 심장 엄청 빨리 뛰어. 내 팔에 안마기 댄 줄 알았다.”
“…시끄러.”
“이런 거 자주 와야겠네. 재밌네.”
너나 재밌지, 너나. 내가 판 무덤인 걸 알면서도 김세나가 원망스러웠다. 이 자식, 이렇게까지 본격적인 호러체험인 걸 알았으면 미리 말이라도…, 해줄 수가 없었겠지. 김세나도 몰랐겠지.
사람이란 적응의 동물. 비슷한 패턴을 몇 번 겪고 나니 그래도 점차 익숙해졌다. 어차피 튀어나오는 시점이야 뻔하고, 분장 수준도 뻔하고, 아무리 비주얼 쇼크적인 연기자가 나온다 해도 어차피 나를 못 건드린다는 확신이 서니 마음도 점점 차분해졌다.
<사육사와 제이슨이 특별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벼락같은 불행이 그들을 덮친다. 바로 수조 청소를 하던 사육사가 발이 미끄러져 익사하면서…>
“예? 뭐요?”
새로 나온 사진에는 제이슨 혼자 찍혀 있었다. 어딘지 풀이 죽고 우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배경도 침침하고 어둡다. 나는 눈을 비비고 설명을 마저 읽었다.
<…사육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제이슨은 결국 먹이 급여를 거부하며 허약해져가고, 제이슨이 동물원 안에서 폐사할 경우 동물보호단체의 추궁을 받게 될 일을 두려워한 동물원 측은 제이슨을 공연장 지하 수조에 홀로 가둬놓는다. 춥고 어두운 수조에서 홀로 죽어가던 제이슨 앞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는데…>
이람호와 나는 어떤 말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니 이거…, 스토리가 해도해도 너무 암울하지 않나? 이런 게 정말 꿈과 희망의 물범 랜드에서 나와도 되는 이벤트란 말인가….
어찌저찌 끝이 보이고 있었다. 코너를 네 번 돌았고 지도상 중앙까지는 이제 한 번의 스토리가 남았다. 이람호와 나는 대충 훑어보고 빨리 나가자는 소기의 목적을 까맣게 잊은 채 어느새 제이슨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서 좀비는 왜 나오는 거지?”
이람호가 제게 들이대는 좀비의 얼굴에 꼼꼼히 전등을 비추며 중얼거렸다.
“여태까지 스토리를 보면 제이슨을 아껴주던 사육사가 사고로 죽었고, 그것 때문에 제이슨도 시름시름 죽어가니까 동물원이 그 사실을 은폐하려고 제이슨을 여기다가 가뒀다는 거 아냐. 그거랑 좀비 창궐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좀비 분장을 한 연기자는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는 이람호를 피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벽 아래로 사라져갔다. 으어어어, 끄어어어.
“이 다음에 나오지 않으려나? 제이슨 앞에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사육사의 좀비인 거지.”
“사육사가 왜 갑자기 좀비가 됐는데?”
“글쎄…. 좀비가 유행이니까?”
“…으응?”
“이런 데서 뭐 그렇게까지 앞뒤 들어맞는 스토리 기대하지 마. 애초에 물범 가지고 만들 이벤트도 아니구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 대체 뭔지 정체나 좀 보자. 오기로 도착한 중앙 홀에 마침내 원통형의 거대한 수조가 나타났다.
“…….”
싯푸른 조명이 비추는 수조 안은 어둡고 더러웠다. 또 어디선가 역한 비린내가 났다. 코를 틀어쥔 채 이람호에게 착 달라붙었다.
[집에 돌려보내줘……]
잔뜩 쉬고 깨랑깨랑한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왜, 뭐, 이제 그래서 뭘 보여줄 건데. 긴장한 채 수조를 주시하는데 이람호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근데, 태경아.”
“왜.”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갔지?”
“…뭐?”
신경질적으로 묻자 천천히 나를 돌아본다.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이람호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떠올라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들어간 사람들 말이야, 꽤 많았잖아.”
“…….”
“우리가 좀 늑장부렸다고는 해도 중간부터는 시간 끌지 않고 곧장 왔는데,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한 명도 안 남아있다는 게 좀 이상하지 않아?”
“…야…, 하지 마.”
“내 생각인데 이거 혹시….”
“하지 말라니까.”
“퀴즈를 못 풀면 못 빠져나가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있냐, 이런 이벤트에서 그럴 리가 있느냐고. 비웃어줘야 한다는 것을 이성으로는 알고 있었으나 그보다 공포심이 큰 탓에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모…, 못 나간다고?”
“어쩌면 답이 틀린 순간에 좀비가 돼서 영영 이 지하 수조를….”
“아, 진짜, 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이람호의 등짝을 철썩 내리쳤다. 놈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실실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우리 들어오기 전에 나가는 사람 있었어.”
“…진짜?”
“근데 퀴즈는 언제 시작하는 거지?”
말 떨어지기 무섭게 수조의 조명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칠판을 긁는 듯 불쾌한 효과음도 함께였다. 수조 안에서 커다란 기포가 부글부글 올라오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아……]
제이슨으로 추정되는 목소리도 함께 들렸다. 속이 울렁거린다.
[엄마에게 돌아가고 싶어요…]
이어 수조 안으로 영상이 나타났다. 제이슨이었다. 쇠약해진 물범 제이슨이 더러운 수조 바닥에 웅크린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자 제이슨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빛나고 꼬리가 신나게 흔들린다.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죽은 사육사인 모양이었다. 혹시나 이람호가 나만 두고 가버릴까봐 팔을 더욱 강하게 붙들고 물었다.
“사육사가 귀신이 돼서 데리러 온 건가? 제이슨도 죽어서?”
“엉? 그게 끝이야? 허무하네.”
동감이다. 우리는 팝콘 뜯는 심정으로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사육사는 제이슨을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더니 이내 음산한 목소리로 물범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그래, 착하지. 이 묘기를 성공하면 엄마한테 보내줄게]
그 말에 이람호도 나도 멍하니 굳어버렸다. 네? 사육사 선생님, 지금 뭐라고요?
[나만 믿으렴, 제이슨. 이 쇼를 성공적으로 치르면 꼭 엄마한테 돌려보내줄 테니까]
[정말? 정말이죠, 아빠?]
깨랑깨랑한 목소리가 반갑게 답했다. 그에 맞춰 물범의 몸과 입도 함께 움직였다. 저걸 참 뭐라고 해야 하나…. 소름끼친다고 할까…. 이람호의 감상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다음은 미리 알고 온 이야기였다. 사육사의 말만 믿고 필사적으로 물범 쇼의 묘기를 연습하는 제이슨, 그러나 약속은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하고, 어느 날 제이슨은 결국 깨닫게 된다. 사육사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고 자신은 평생 동물원에 갇혀 살 처지라는 것을.
[아빠가…! 아빠가 나를 속였어…!]
분노에 찬 제이슨은 모두가 잠든 새벽, 수조를 청소하러 들어온 사육사의 등을 떠밀게 되고….
“아니, 아니, 이거 좀 아니지 않냐?”
손에 땀을 쥐고 보면서도 머릿속으로 물음표가 수십 개씩 떠올랐다.
“꿈과 희망 어디 갔어. 여기 앞으로 물범 쇼는 어떻게 해먹으려고 이런 거….”
[엄마한테 돌아갈래…]
다시 한 번 제이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이람호도 동시에 굳었다. 목소리가 머리 위 수조에 달린 스피커가 아닌 발밑에서 들려온 탓이었다.
[엄…, 마…,]
우리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이번만은 이람호도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엄마한테 보내줘어억!]
귀가 찢어질 듯 시끄러운 비명 소리와 함께 발목에 뭔가 휘감겼다. 나는 기절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놀랐다. 심장이 덜컹덜컹 날뛰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발에 감긴 것은 시커먼 수초였다. 제이슨이 녹아 뭉그러졌다가 조각조각 달라붙어 재생하고 있었다. 영상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그 리얼함과 섬뜩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어어, 어, 어…!”
이놈의 이벤트를 보고 온 후로 고2짜리 아들이 밤마다 오줌을 지린다는 어느 아버지의 사연이 눈앞을 스쳐 가는 순간이었다. 발밑이 말랑말랑하게 느껴진다. 정말 수조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라, 람호야, 괜찮….”
[퀴…, 즈…]
내가 안 괜찮은 거면서 괜히 이람호를 붙들고 허세라도 부려보려는데 또다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잘못 들은 건가 고민했지만 다시 봐도 발아래 영상 속 제이슨이 이리저리 꿰맨 입을 기괴하게 벌리고 있었다.
[제이슨의…, 고향은…, 어디…, 인가…]
“…….”
이람호와 시선이 마주쳤다. 피가 식는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서서히 내려다보니 발목에 감긴 것은 단순히 수초 모양 장난감이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호츠크해…?”
정답을 말한 것은 이람호였다. 설마 이게 다야? 의문을 가득 담은 목소리였다. 그러자 곧 발목에서 수초가 떨어져 나갔다.
[정답…….]
아 예…….
[용감한 당신이 제이슨의 고향을 찾아주셨기에…, 저주는 풀렸습니다…, 앞으로도 물범 랜드에서 꿈과 희망의 시간을…]
“보낼 수가 있겠냐고요….”
덜컹, 어딘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바닥 등이 켜졌다. 비상구 표시를 따라 열심히 달려나갔다. 다른 건 모르겠고 전 세계의 동물원이 망해야 한다는 건 알겠네. 문을 벌컥 열자마자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입안에 남아 있던 비린내가 깨끗이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하…….”
무릎을 짚고 허리를 구부린 채 심호흡을 했다. 한 박자 늦게 나온 이람호도 코를 훌쩍였다.
“나오니까 알겠지? 안에 냄새 이상했던 거.”
“응?”
“비린내 엄청 심하게 나잖아.”
“…그래? 진짜 모르겠는데.”
“아니 어떻게 그 냄새를 몰라? 물비린내나 피비린내 같은 거 진동하잖아.”
으응…? 이람호가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반응이 조금씩 느려서 답답했다. 출구에 선 채 옥신각신하고 있으니 물범 코안경을 쓴 직원이 다가와 상냥하게 물었다.
“손님, 혹시 어디가 안 좋으신가요? 괜찮으세요?”
“…아…, 아뇨. 괜찮아요. 그냥 안에 냄새가 너무 이상해서.”
“그러셨군요. 이번 호러 쇼가 오감 자극 이벤트여서요. 물비린내가 나는 장치를 해뒀는데 그냥 향료일 뿐이고 인체에는 무해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래요?”
“그럼요. 즐거우셨다면 출구 맞은편에서 설문조사 참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설문 이벤트에 뽑히신 분들께는 호러 쇼 예약티켓을 증정해드리고 있어요.”
이걸 또 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칼같이 돌아서려다 멈칫했다.
“어디서요? 저기서?”
설문 장소를 확인하고 달려가는 내 곁으로 따라붙으며 이람호가 물었다.
“하고 가게?”
“내가 기필코 당첨돼서 티켓 받는다. 받아서….”
“받아서?”
“김세나 줄 거야.”
“…….”
“그리고 너랑 둘이 가라고 할 거야.”
펜을 쥔 손으로 삿대질을 대신하며 씩 웃었다. 이람호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랑? 왜?”
“둘이 친해지라고.”
“왜?”
“김세나는 지가 벌써 너랑 좀 친한 줄 알던데, 넌 아니었어?”
머릿속에 듀얼엔진이 달린 듯했다. 입으로는 이람호와 말하면서 손으로는 거침없이 오늘 본 이벤트에 대한 감상을 온갖 수식어를 붙여가며 휘갈겨 쓰고 있었다. 내가 김세나한테 이거 꼭 보여주고 만다. 당첨 안 되면 내 돈 주고 티켓 사서라도.
“김세나가 나한테 그랬는데. 너랑 술 마시면서 좀 친해졌다고.”
“…김세나 씨가?”
“그리고 너 김세나랑 반말하더만 왜 내 앞에서는 씨 자 붙이냐? 그거 좀 웃기거든.”
스크램블드에그도 해주고 말이야. 꿍얼대듯 덧붙이자 이람호가 영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림처럼 미동 없는 무표정에 눈동자만 흔들흔들. 이럴 때 피쉬가 보이면 속을 읽기 좋을 텐데 매번 아쉽다.
“저기, 태경아. 너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응?”
“내가 김세나 씨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네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해서고, 김세나 씨가 너에 대한 감정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건 그 말 그대로의 뜻이지 너더러 나 때문에 김세나 씨를 멀리하라는 말이 아니야.”
“…….”
“그러니까 나랑 김세나 씨의 관계에 네가 개입할 필요는 없어.”
손에서 펜이 툭 떨어졌다. 어, 그게, 그러니까…, 그렇지? 되뇔수록 정론이라 할 말이 없어졌다. 이어 얼굴이 불타는 듯한 쪽팔림이 몰려왔다.
“…어, 그러네. 응…. 네 말이 맞네.”
“좋은 뜻으로 한 이야기인 건 아는데.”
“어어, 응. 알아. 알아들었어.”
“…….”
“음…, 그러니까…, 그만 갈까? 너 출근 시간 다 돼간다.”
슬슬 날이 저물 기미가 보인다. 화제를 돌리느라 꺼낸 말치고는 적절했다. 나를 따라 주위를 한 번 둘러본 이람호가 그러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어떻게 할래? 우선 집으로 데려다줄까?”
“아니야, 나 택시 타면 되니까 너 바로 학원으로 가. 우리 집 들르려면 또 빙 돌잖아.”
“상관없는데….”
“괜히 시간 촉박해져서 운전 급하게 할까봐 그래. 진짜 괜찮으니까 이따 가게에서 봐.”
셔틀버스를 타고 입구까지 내려가는 내내 같은 논쟁이 반복되었다. 데려다주겠다, 안 데려다줘도 괜찮다, 그래도 데려다주겠다, 됐으니까 제발 좀 혼자 가라. 하다 보니 간지러웠다. 애인과 이런 평화로운 말다툼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가 싶었다.
* * *
“…그래서 좀비는 왜 나온 건데?”
김세나가 술맛 다 떨어진 얼굴로 물었다. …그러게, 왜 나온 걸까. 계산기를 두드리다 말고 펜 꼭지를 입에 물었다.
“제이슨이 사육사한테 속아서 물범 쇼에 출연했고 진실을 알게 된 뒤에 사육사에게 복수했다는 것까지는 이해했어. 그래서 그게 물범 공연장 지하에 좀비가 나온 거랑 무슨 상관이야?”
“글쎄 나도 그게 참 궁금하고 알고 싶네….”
“그보다 스토리 그 모양이어도 돼? 나라면 물범 랜드 두 번 다시 안 간다.”
“그래서 나도 안 가려고 했는데….”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문자함을 열어 김세나에게 보여주자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게 뭐야?”
“당첨돼 버렸네, 설문 이벤트가.”
“그게 뭔데?”
“너한테 줄 물범 좀비 쇼 티켓 두 장이 내 손에 들어온다는 말이지.”
“…….”
“보는 내내 기필코 너한테도 보여주리라 결심했거든.”
김세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예약까지 걸어 어렵게 구입했다는 신상 립스틱을 바른 입술까지 창백해진 것 같다. 귀신 좀비 괴물이라면 덮어놓고 질색하는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나였다.
“너 요새 누구 없냐? 썸타는 사람이라든가. 내가 이람호랑 돌아보니까 이거 괜찮더라. 흔들다리 효과라고 들어는 봤냐?”
“…….”
촘촘하고 긴 속눈썹 아래 컬러렌즈를 덮어놓은 눈동자가 한순간 빛이 난 듯했다. 나도 모르게 움찔하자 김세나가 조금 소리를 낮춰 물었다.
“…진짜?”
“응?”
“진짜 이람호랑 가서 효과 좋았어? 이람호가 막…, 너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하고 그랬어?”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세상에, 이거 진짜 누구 있나 보네. 핸드폰을 꽉 쥔 채 김세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누구야? 간략하게만 말해봐. 아빠는 매일 클럽이나 다니는 방탕한 놈팽이는 인정 못 한다.”
“이쪽 사람 아냐. 그….”
“뭔데, 얼른 읊어. 연봉은 얼마래? 자기 집은 있대?”
“아, 장난 그만하고.”
김세나가 내 어깨를 철썩 내리쳤다. 이거 봐라, 진지한가본데? 나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김세나는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뭐야? 언제부터야?”
“얼마 안 됐어…. 지난달에 아는 관장님이랑 식사하다가.”
“아는 관장님이라면….”
나도 모르게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물범 랜드 호러 쇼 이벤트 당첨을 알려드립니다. 건조한 글자 위로 김세나의 말이 덧입혀진다. 아는 관장님의 조카가 물범 랜드 이벤트 담당자인데….
“어엉?”
문자함을 들이밀고 물었다. 김세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썸인지 아닌지 아직 몰라. 그냥 밥만 한 번 먹었어.”
“야, 밥 먹었으면 끝난 거 아니냐? 내일쯤 반지 맞추고 다음 주쯤 식 올리면 되는 거 아니냐고.”
“쫌.”
“그래, 그래. 그만할게. 니가 이렇게 안달하는 거 처음 봐서 신기해서 그러지.”
“좋냐? 니 마음이 편하냐?”
김세나가 장난처럼 물었다. 우리에게 오랜 세월 쌓여온 규칙, 진담 반 농담 반, 그 속의 진담이 너무나 선명하더라도 모르는 척할 것.
“편하겠냐.”
“…….”
“걱정되지.”
물론 예외는 있다.
“그 사람 너에 대해서 알기는 해? 그보다 니 신비주의는 괜찮은 거야? 갤러리 관장 조카면….”
“아, 몰라. 나도 어쩌다 술술 불어버렸는지 모르겠어. 근데 그 사람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니까 나도 모르게….”
“응?”
“시대가 어느 땐데 그게 뭐라고 꽁꽁 숨기냐고 하더라고, 근데 그런 말을 완전 청순하게 하니까 내가 순간 마가 떠버려가지고….”
다른 의미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빠졌나본데. 같이 밥 한 번 먹은 게 전부라면서 이렇게 쉬워도 되는 것인가….
“착한 애들은 왜 이렇게 다 문턱이 낮냐….”
“뭐라고?”
“…아냐, 아무튼, 그 사람이 아예 이벤트 담당자면 더 잘됐네. 친구가 너무너무너무 재밌어했다고, 그래서 나도 꼭 보고 싶었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다고 해. 썸이라면 당장 같이 보자고 할 것이고 아니라면 대충 둘러대겠지.”
“오, 감별법 장난 아닌데.”
김세나가 엄지를 똑바로 세워 보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백프로 썸이다. 상대도 김세나만큼 진지할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근데 이람호 출근 안 하냐?”
털어놓고 나니 속이 좀 편해졌는지 김세나가 개운한 얼굴로 물었다.
“두 시간씩 늦게 나오라고 했어. 걔 일 끝내고 바로 와도 출근 촉박한 것 같길래.”
“두 시간? 그래도 너무 늦는 거 아냐? 지금 벌써 시간이….”
그 말을 듣고서야 시계를 보았다. 새벽 한 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게, 말도 없이 갑자기 늦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데.
“뭐 따로 연락 없었어?”
김세나는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태평한 건 나뿐이다.
“글쎄, 뭐 일 생겨서 늦나보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고개를 들었다. 김세나가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왜?”
“넌 걱정도 안 되냐? 그런 FM형 인간이 연락도 없이 늦는데. 뭐 사고라도 났으면 어쩌려고.”
“아니…, 이람호가 성실맨이긴 해도 연락이 그렇게 칼 같은 편은 아니야 원래….”
그건 사실이다. 정신이 딴 데 팔리면 연락 없이 늦어지는 일은 종종 있었다. 박정우의 편의점 사건 때 그랬고, 또….
“…….”
그때 한 번뿐인가? 기억을 더듬다가 머쓱해졌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다시 만난 후로 이람호가 내게 보인 건 하나같이 강하고 성실하고 철저한 면모뿐인데 나는 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이람호가 좀 허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골똘히 궁리하는데 김세나가 어휴, 하며 내 코트를 집어 들었다.
“가봐.”
“…응? 어딜?”
“집이든 도장이든 가보라고. 전화를 해보든지. 넌 진짜 가끔 보면 너무 태평해.”
사실 내 생각엔 김세나가 지나치게 걱정이 많다. 사람이 한 가지 걱정을 할 때마다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진다면 김세나 나라에는 홍수가 그칠 일이 없을 것이다.
“전화는 운전 중일까봐 안 하는 건데….”
“운전 중이면 안 받겠지.”
“내 전화라서 받을지도 모르잖아.”
“아, 예에, 그러시겠지요….”
혀를 내밀어 웩, 하는 시늉을 해 보인 김세나가 아예 코트를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얼떨결에 떠밀려 일어나면서 돌아본 가게는 늘 오는 일행들 덕에 그럭저럭 차 있었다.
“야, 근데 다짜고짜 나더러 가보라고 할 게 아니라…. 가게는 어쩌고.”
“내가 봐줄게. 내가 받을 수 있는 주문만 받아주면 되지. 걱정 말고 다녀와.”
“그래도….”
“말 좀 들어라. 도와준다 해도 꼭.”
김세나가 쓰읍, 하며 재는 체를 했다. 나로서는 의아할 따름이다. 아니, 사람이 한 번쯤 늦을 수도 있지 그게 뭐 대수라고.
그러나 끝까지 버티지는 못하고 결국 가게 밖으로 나섰다. 아직도 밤이면 쌀쌀하다. 목덜미로 파고드는 찬바람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눈만 끔벅이다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수신 기록 한 톨 없이 깨끗하다. 그 흔한 스팸문자 하나 오지 않은 날이었다.
태평하다거나, 무심하다거나, 사람 마음을 모른다거나….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어왔지만 단 한 번도 인정해본 적은 없던 말들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다. 내가 그렇게까지 무심한가. 조용히 엄지로 훑던 액정화면을 힘주어 길게 그었다.
뚜르르르, 건조한 신호가 울린다. 길게 이어졌지만 그뿐이었다. 간절기 밤공기에 손끝이 곱아들도록 이람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달칵,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 후에 흘러나오는 안내멘트를 끝까지 들은 후에야 통화를 종료했다.
“…….”
핸드폰 끝을 윗입술에 대었다가 혀로 볼 안쪽을 꾹 눌렀다. 그런 성실맨이 갑자기 연락도 없이 늦는 게 이상하지도 않냐, 사고라도 났으면 어쩌려고. 김세나가 내게 적셔놓은 한 방울 걱정이 곧 먹구름으로 뭉칠 기미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