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히어로
뭐 간지러운 건 간지러운 거고, 사태 수습은 수습이다.
간신히 붙잡은 택시를 타고 집에 와서도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한참 뒤척이다 깨보니 오후 세 시를 막 지난 시간이었다. 침대에 주저앉아 까치집을 누르며 고민에 빠졌다. 어쩌나, 뭔가 액션을 취해볼까, 모르는 척 저녁에 볼까.
물론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명확하다. 방해되는 것은 오로지 나의 알량한 자존심과 어리석은 아집뿐이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위로 기지개를 쭉 켰다. 온몸 구석구석까지 시원해진다.
핸드폰은 스팸이 분명한 부재중 전화들과 온갖 광고문자로 어지럽게 들어차 있었다. 하나하나 지워버리고 이람호의 연락처를 불러냈다. 이람호, 이름 석 자를 한참 바라보다 엄지로 까딱까딱 통화 아이콘 위를 훑었다. 이 녀석은 출근 준비할 시간이겠군. 나는 보통 저녁 시간까지 늘어져라 자다가 깊은 밤이 되어서야 집을 나서지만 이람호는 아침에 퇴근하고 나면 기껏해야 대여섯 시간 자고 일어나 진짜 직장으로 나가야 한다.
까딱, 까딱, 한참 움직이던 엄지 끝에 통화 아이콘이 틱 걸린다. 그대로 죽 밀었다. 뚜르르르, 건조한 연결음이 새어 나온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딴청을 피우고 싶었다. 이람호는 다행히 금방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어, 가 뭐야. 어, 가. 민망한 마음에 한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목소리가 왜 그래?]
할 말을 찾고 있는데 이람호가 먼저 물었다. 걱정스러운 어조였다. 목소리?
“목소리가 뭐?”
[잠긴 것 같은데. 감기 걸렸어?]
“아…, 아냐. 방금 일어나서 그런가 보네.”
[그래?]
그대로 잠시 침묵이었다. 입이 근질근질하다. 할 말은 있는데 첫 마디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기, 오늘,”
[오늘 말이야]
큰맘 먹고 운을 떼자마자 오디오가 겹친다. 얼른 입을 다물고 애꿎은 침대를 펑펑 내리쳤다.
“어…, 응, 말해.”
[먼저 말해]
“…그래, 내가 먼저 말할게. 오늘 우리 좀…, 볼래?”
에라 모르겠다, 다 뱉고 보자. 이람호는 또 잠시 말이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린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한참 후에야 되묻는 말이란 게 이랬다.
[오늘 가게 안 열 거야?]
“아, 아니, 하는데. 그거랑은 따로 보자고, 가게 열기 전에…. 그러니까 내가…, 그…, 너 일하는 데로 갈게.”
[…왜?]
어찌 보면 당연한 의문이었다. 왜 굳이? 어차피 밤에 가게에서 볼 텐데. 물론 그 의문에 대한 답까지는 미처 생각해놓지 못했던 탓에 멍청한 대답밖엔 할 게 없었다.
“그냥…?”
언제나 너만 나를 데려다주고 내 가게를 도와주잖아. 너는 내 가게와 내 집이 어딘지 알고, 그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속속들이 알잖아.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라고 말하면 간단한 일이다.
“그냥 가보고 싶어서.”
하지만 내가 그러지 못했기에, 또 잠시 말이 없던 이람호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문자로 주소 보낼게]
도통 속을 읽을 수가 없는 어조였다.
* * *
택시에 올라타 이람호가 보내준 주소를 그대로 불렀다. 모처럼 차려입은 옷이 구겨질까 봐 조심히 앉는데 셔츠 소매에서 삐죽 올라온 실밥이 눈에 걸린다. 어떻게든 잘라볼까 고민하다 포기하고 안쪽으로 잘 밀어 넣었다.
빳빳하게 다린 회색 셔츠에 검은 슬랙스에 무지 카디건에 목 없는 스니커즈. 너무 어려 보이지도 그렇다고 노티 나지도 않으면서 세련되고 깔끔한 코디를 찾기 위해 김세나를 들들 볶은 결과였다. 김세나는 고분고분 지시를 내려주며 크게 호령했다.
- 아, 대충 해! 프러포즈라도 하러 가냐?
프러포즈라, 나쁘지 않네. 마침 창밖으로 커다란 꽃집이 지나간다. 장미꽃 한 송이 사 가서 야, 나랑 연애 함 하자, 이래 볼까.
…미친놈 보듯 하려나.
“손님, 어디에 세울까요?”
정신이 퍼뜩 든다. 창밖으로 생전 처음 와보는 동네가 낯선 풍경으로 펼쳐져 있었다.
“어…, 여기가….”
“조기, 저게 중학교거든요.”
“…아, 네, 여기 세워주세요.”
분명히 중학교 후문에서 한 블럭 거리라고 했지. 서둘러 요금을 치르고 차에서 내렸다. 여기저기 교복 입은 남자아이들이 보였다. 삼삼오오 모여 학원이나 피씨방 등으로 흩어지는 듯했다. 신기한 마음에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나, 도, 착, 했, 어……. 이람호에게 문자를 찍어 보내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따라 날도 따뜻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미풍에 머리카락이 흔들려 간지러웠다. 꼭 이 계절마다 돌아오는 봄타령 대중가요의 한 장면 같다.
이거 참, 실밥 하나 있었지만 옷도 잘 입었고 날씨도 좋고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방문도 좋고…. 오늘 일 치르는 거 아닌가 몰라.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너스레를 떨며 가볍게 골목을 가로질렀다.
기분이 너무 좋아. 어쩐지 정말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데 문득 익숙한 빛깔이 스친다. 내려가 있던 시선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
피쉬가 있으면, 상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 알 수가 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일렁이던 푸른빛은 금방 사라졌다. 피쉬가 나타난 건지 내가 잠깐 환각을 본 건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그저 천천히 눈에 스민 그 빛을 한 번 되뇌었을 뿐이다.
내가 피쉬의 잔상을 보고 있던 바로 그 방향에서 이람호가 삐죽 튀어나왔다.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흰색 스탠드칼라 셔츠에 색 짙은 청바지를 입고 있다. 혹시 이람호는 옷차림에 신경 쓸 때 주로 청바지를 입는 걸까. 가만히 두 손을 늘어뜨리고 편안히 걷는 모양이 똑바로 균형 잡혀 있어 보기에 좋았다.
한동안은 피쉬 없는 이람호가 너무나 낯설었다. 내게 있어 이람호와 그의 피쉬는 떼어 생각하려야 그럴 수 없는 존재였다. 이람호가 곧 피쉬였고, 피쉬가 곧 이람호였다. 차고 싯푸른 공기, 눈을 깜빡이면 한 걸음씩 다가오던 파도의 잔해.
“람호야.”
손을 들며 불렀다. 시선을 내리깔고 걷고 있던 이람호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피쉬가 있었다면 그의 눈가에서 반짝 터지듯 흩어졌을 것 같다. 나의 소소한 놀이였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피쉬의 움직임 상상해보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어?”
“왔어?”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다. 아직도 기분 상해 있나.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옆으로 따라붙었다. 이람호는 나와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방향을 틀었다.
“어디 가?”
묻자 또 멈춰 선다. 일일이 멈칫거리고 당황하는 모양이 귀엽긴 하지만 그 이전에 의아했다.
“무슨 일 있어?”
“…….”
“바쁘면 나 그냥 가도 되는데.”
그제야 시선을 맞춰온다. 여러 가지 말이 들어 있는 눈동자였다. 왜, 뭐. 고개를 갸웃하며 마주 보자 한숨을 푹 내쉬더니 묻는다.
“어디 조용한 데로 갈까, 아니면…. 여기서 얘기해?”
“뭘?”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아무래도 쌍방 의사소통에 문제 있는 상황인 게 확실했다. 눈을 깜박대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 양반 대체 속으로 뭔 계산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 나 진짜 그냥 놀러 왔는데.”
“…….”
“너 일하는 데도 한 번…, 보고 싶고 그래서.”
이람호가 걸어온 방향을 가리키며 우물쭈물 대답했다. 이람호는 못 믿겠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어허, 속고만 살았니.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또 한숨을 푹 쉰다. 어이구, 땅 꺼진다.
“왜 그래, 무슨 상상을 했길래.”
“…아냐.”
“내가 프러포즈라도 하러 온 줄 알았어?”
이렇게 쫙 빼입고 말이지. 한 손으로 장미꽃 건네는 시늉을 했다. 이람호는 장난할 기분조차 들지 않는지 한쪽 눈썹을 팍 찌푸린 채 말이 없었다. 인상을 쓸 때마다 눈썹을 가로지른 흉터가 깊어지는 것 같다.
“너는 참…, 사람 간 떨어지게 하는 재주가 있어.”
이람호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나로서는 정말이지 의아할 따름이다. 모처럼 마음먹고 기특한 짓 좀 하러 왔는데 이게 다 무슨 소린지.
“헤어지자고 말하러 오는 줄 알았어.”
“……응?”
“어제 그러고 끝났는데 갑자기 각 잡고 만나러 오겠다고 하니까.”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제야 이 요상한 분위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아,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나라도 오늘 이람호가 갑자기 낮에 만나러 오겠다고 했으면 일단 긴장부터 탔을 것 같다.
“…어어, 미안. 그 점은 미처 생각을 못 했네.”
“…….”
“어제 그…, 응, 신경 쓰인 건 맞아. 그래서 온 거긴 한데….”
그렇다고 이람호가 내게 이런 식으로 겁먹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었다. 절로 실룩대는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근데, 헤어지긴 뭘 헤어져. 우리가 지금 뭔데?”
벌컥 따지듯 묻자 또다시 눈썹을 까딱거린다. 피쉬가 사라진 후로 유독 타인의 표정이 세세하게 보였다. 혹시 나는 정말 섬세한 사람인가, 김세나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뭐냐고?”
이람호가 되물었다. 짙은 눈썹, 반듯한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 우리가, 뭐냐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풀어지는가 싶더니 한결 편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가 뭔진 모르겠지만, 네가 뭔지는 말할 수 있어.”
“…뭔데.”
“칼자루 쥔 망나니.”
그것 참 기뻐해야 할지 갸우뚱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비유였다.
“이람호.”
“뭐.”
“이제 내가 좀 무서워?”
“옛날부터 내가 겁내는 건 너 하나뿐이었어.”
세상에, 이게 이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잘도 하네.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세월이란 뭘까. 그 치열하고 까끌까끌했던 이람호를 이만큼 둥글게 만들어놓은 시간이란 것은 도대체.
“너 길 가다 갑자기 남자한테 고백 받는다고 생각해봐, 안 무서운지.”
“…….”
“아니, 그래, 남자가 문제가 아니라, 진짜 뜬금없고 난데없이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부터가 일상적인 일은 아니잖아.”
그런가? 나로서는 내 스타일인 상대가 난데없이 수작 걸어오면 땡큔데. 턱을 감싸고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다른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다 퍼뜩 생각난 게 있어 얼른 삿대질을 했다.
“야, 너 기억 안 나? 이쁜 여자애가 고백하면 아무나 사귈 수 있댔잖아.”
“기억 안 나.”
“너 말야, 지금 남자랑 사귄다고 포비아였던 니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는 거야. 그걸 알아야 해.”
“뭐라는 거야. 내가 포비아였으면 너를 살려뒀겠냐.”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런데, 태경아.”
“응?”
“나 지금 남자랑 사귀냐?”
“…….”
아이고, 망했네. 외면하려다 그만 웃어버렸다. 이람호도 빙긋 웃었다.
“태경아.”
“그래, 뭐.”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던 건.”
그런 말? 입 모양으로만 되묻자 이람호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게 정말 널 위한 말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어.”
“…어떤 거 말하는 거야?”
“생각해서 하는 조언과 주제넘은 충고를 구분하지 못하던 때였어. 그래서 실수했어.”
“……?”
“미안해.”
조심스러운 사과에 그만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런 말? 주제넘은 충고? 한참 머릿속을 뒤적대고 나서야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저 좋다는 애한테 정신병원이 어쩌네 저쩌네…, 술에 혀가 꼬부라져 있던 김세나의 일갈이 귓전에 박혔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 잘 모르겠어. 그래서 네가 했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
“너는 너무 많은 말을 농담으로 얼버무리니까 헷갈릴 때가 많아.”
그래, 그렇지. 나는 모든 말을 농담처럼 해. 그래야만 빠져나갈 구석을 여기저기 남겨둘 수 있어서.
“…아, 또…. 미안, 네 탓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야.”
“알아.”
“내가 말재주가 없어.”
“그것도 알아.”
아는데, 모르는 척하고 싶었어. 네가 너를 위한 말과 남을 위한 말을 구분할 줄 몰랐던 것처럼, 나는 너를 향한 애정과 나를 향한 자기연민을 잘 구분하지 못했었어.
“람호야.”
단단한 팔을 쥐어 끌어당겼다. 이람호는 순순히 상체를 낮춰 내 입과 제 귀의 높이를 맞춰주었다.
“내가 한 가지 제안할 게 있는데.”
“…어.”
“나랑 잘래?”
가까워진 얼굴의 미세한 변화가 빠짐없이 눈에 들어온다. 바짝 치켜뜨는 눈, 움푹 패는 뺨, 핏줄이 일어서는 관자놀이까지.
“자보면 알지 않을까? 우리가 사귀는지 아닌지.”
씩 웃으며 덧붙였다. 천천히 돌아보는 시선에 못마땅해 죽겠다고 쓰여 있었다.
“심태경.”
“응.”
“넌 예나 지금이나 진짜 답 없는 망나니야.”
들을수록 대책 없이 귀여운 투정이었다. 나는 그만 파하하, 웃으며 이람호의 팔을 붙들고 매달렸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허공을 걷는 듯했다.
* * *
“중학생 반은 다섯 시부터야. 고등학생 반이 일곱 시부터고 아홉 시에 끝나.”
“호오.”
“여기 3층.”
이람호가 가리킨 것은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 깔끔한 신축 건물이었다. 상가 입주자를 찾는다는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 곰곰이 보다가 은근슬쩍 물었다.
“여기 임대료 얼마나 해?”
“글쎄? 그런 건 아버지가 알아서 하셔서 잘 모르겠는데.”
“흠….”
“왜? 가게 이리로 옮기게?”
참으로 아무렇지 않게 묻는 말에 나도 모르게 어어, 하려다 얼른 정신을 차렸다. 아니지, 그건 안 되지.
“가게를 이리로 옮길 순 없지. 한다면 다른 업종…….”
“왜?”
“…왜냐니, 중학교가 코앞이고 애들 다니는 학원도 있는 건물에 술집 들여놓으면 좀 그렇잖아.”
그것도 게이바를 말이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안 봐도 훤하다. 일주일도 못 가서 건물 앞이 시위현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람호는 여전히 이해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이 건물 뒤로 다 술집인데? 애들 다니는 시간에 영업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너는 참, 무던하다고 해야 하는지 무심하다고 해야 하는지….”
뭐? 왜? 일곱 살 어린애처럼 호기심만 많은 이람호를 꾹꾹 눌러 밀었다. 됐다, 됐어. 들어가기나 하자고.
나는 옛날부터 워낙 무서운 게 많다. 나를 보는 시선, 지나가듯 던지는 말들이 하나하나 두렵다. 이람호는 그렇지 않겠지. 그래서 부러웠었다. 이람호의 자존심을 해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의 모자란 성취뿐이다.
그런 것도 어릴 때부터 멘탈이 단련돼야 가능한 건가. 그는 가는 곳마다 시선을 몰고 다니는 스타였다. 이람호의 손짓 하나 말 한 마디에 셀 수 없이 많은 평가가 따라붙었다. 타인의 말을 너무 많이 겪다보면 이람호처럼 되는 걸까. 누가 무슨 말을 하든간에 나와는 상관없다, 그렇게.
그렇다면 부디 나에게도 언젠가는 그런 날이 왔으면.
“어.”
앞서 계단을 올라가던 이람호가 우뚝 멈춰 섰다. 왜, 뭔데. 고개를 쏙 빼고 올려다보니 계단참 앞에 선 체육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보였다. 나는 한눈에 그가 이람호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딱 봐도 30년 늙고 옆으로 퍼진 이람호였다. 고집스러운 눈매나 눈썹 모양부터 뒤로 누운 귀까지 똑같았다.
“수업은요?”
“애들 소풍날이다.”
“아.”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가던 이람호가 뒤늦게 내 존재를 의식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상하리만치 철저하게 내 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덜컹했다. 혹시 내가 이람호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알고 계신가.
“아버지, 이쪽은 친구예요. 고등학교 동창.”
“동창?”
그러나 걱정은 다음 순간 아무렇지 않게 나를 소개한 이람호에 의해 불식되었다. 이람호의 아버지는 그제야 내가 있다는 걸 알았다는 듯 슬쩍 시선을 주었다. 그 시선에 담긴 뜻 역시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얼른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심태경이라고 합니다.”
“음.”
끝이었다. 딱히 호의도 적의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에 그저 인사치레를 끝냈다는 개운함만이 엿보였다. 아, 마땅히 이람호가 당신에게 나를 먼저 소개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모르는 척 계셨던 거군.
예의범절을 철저하게 따지는 사람이구나. 그러자 오히려 알기 쉽게 느껴졌다. 반지르르한 겉치레는 내 유일한 특기다.
“그런데 여기까진 뭐하러 왔어? 어차피 이놈은 곧 수업 들어가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근처에 온 김에 잠깐 들른 거라서요.”
“그래? 고등학교 친구는 또 처음 보네, 별 일이네….”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느껴진다. 아들의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겠다는 시선과 의도를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아들에게 참 관심이 많으시군. 속으로만 픽 웃는데 이람호가 얼른 그 시선을 차단하려 끼어들었다.
“아버지는 그럼 퇴근하세요?”
“그래, 너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지.”
“네, 들어가세요.”
그러고는 고개까지 꾸벅 숙여버린다. 이 자리를 당장 파하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력하게 느껴져서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람호의 아버지는 어어, 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우리를 스쳐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별다른 인사도 없었다.
“…진짜, 피 도둑질은 못 하는 거야….”
“응?”
돌아보는 이람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도장은 깔끔했다. 상상 속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적당한 크기의 공간, 파란색 매트와 각종 훈련도구와 격파도구 같은 것들. 뒤쪽으로는 화장실과 탈의실, 그리고 큰 창이 뚫려 있는 사무실.
“애들 오려면 아직 시간 좀 있어.”
이람호가 안내하는 대로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무실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 온다고 정리한 거야?”
“어?”
물론 반쯤은 농담이었다. 이람호의 결벽증은 그동안 그를 알바로 써왔던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당연히 그는 세상에 뭐 그런 개소리가 다 있느냐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마도 이람호에겐 누군가 오기 때문에 정리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도 늘 정리하고 청소하며 살 테니까.
“얼굴 풀어, 농담이야.”
“…농담? 어느 부분이?”
“아이고, 됐습니다. 마실 거나 좀 줘. 그거 걸었다고 목마르네.”
영 미심쩍은 표정으로 사무실 구석의 작은 냉장고를 뒤지던 그거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들었다.
“아, 혹시 네 방문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긴장했느냐는 뜻이야?”
“됐다니까요, 글쎄.”
“뭐가 됐다는 거야? 부탁이니 말 좀 똑바로 해.”
이람호가 꺼내준 것은 작은 포도주스 병이었다. 차가운 병을 쥐고 끙끙대며 뚜껑을 땄다. 그러는 동안 이람호가 몇 번이나 손을 움찔거렸다. 도와줄지 말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말이야 아까보다 더 똑바로 할 방도가 없지 않냐?”
“…아까 뭐.”
“나랑 섹스하자고.”
쾅, 그가 냉장고를 부술 기세로 문을 닫았다. 아이고, 즐겁다. 낄낄대며 주스를 원샷했다. 달짝지근한 포도 향이 난다.
“우리 람호, 남자도 여자도 없었으면 여태 숫총각인가아?”
“…너, 진짜 좀….”
“귀엽다, 귀여워. 내 인생에 남자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숫총각은 없었는데.”
아, 이건 좀 멀리 나갔나. 후회는 늘 말을 뱉은 후에야 찾아온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데 그새 냉장고를 다시 열어젖힌 이람호가 생수병을 들고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다.
“…걔도 포함이야?”
“뭐…, 뭐가?”
“어제 본 어린놈도 포함이냐고. 니 인생에 수도 없이 많았던 남자.”
“…….”
하이고, 큰일이다….
“포함이겠냐? 걔랑은 입술만 비벼봤다니까.”
진짜 귀여워 죽겠네.
“넌 사람이 왜 그렇게 방탕해?”
이람호가 벌컥 따지며 돌아보았다.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방…, 뭐요?”
“나참…, 나더러는 여자한테 고백 받고 바로 사귈 수 있다 했다고 뭐라 하더니.”
“…아니, 그거랑은 얘기가 좀 다르지 않냐….”
“지는 뭐? 키스 좀 한 건 잴 것도 아니야?”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다. 이람호는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다. 농담처럼 넘길 방법을 찾기 위해. 내가 매사에 그렇게 하듯이.
“…….”
노력하고 있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
“람호야.”
“…뭐.”
“이리 와 봐.”
앉은 채 두 손을 뻗었다. 망설이던 이람호가 천천히 다가왔다. 두 뺨을 감싸 끌어당겼다. 머뭇거리면서도 순순히 몸을 맡겨온다.
“여기 뭐, CCTV 같은 건 없지?”
“…어.”
대답도 잘하고. 촉, 입술 끝을 슬쩍 맞추자 가까워진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모양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뺨을 감싼 손에서 엄지를 뻗어 눈꺼풀 위를 슬쩍 눌렀다. 지문 위를 훑어 내린 속눈썹이 예쁘게 가라앉았다.
“너 정말로 아무도 없었어?”
아랫입술을 살짝 벌리며 물었다. 이람호는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듯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정말로? 평생? 한 명도?”
아무리 나라도 그런 말은 믿기 힘들다. 나는 세상 어느 곳에서 이람호를 발견했더라도 반드시 쫓아가 자빠뜨렸을 테니까. 응? 정말로? 재차 물은 후에야 두 눈을 뜬 그가 입술이 닿은 그대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목덜미까지 더운 숨이 닿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있었어도 말 안 해.”
“왜?”
“그게 예의라고 생각하니까.”
얼씨구, 그러니까 나는 예의가 없었다 그 말이지. 괜히 심술이 나서 단정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절로 벌어진 잇새에 혀를 넣어 입천장을 쓸어 올리자 손끝에 닿은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한다, 그 이람호가.
진짜 큰일이다, 재밌어지네. 뺨을 감싼 손을 슬슬 내려 목덜미를 훑었다. 엄지 아래로 닿은 단단한 목젖이 한 번 크게 요동친다. 모르는 척 쇄골을 지나 가슴팍을 슬쩍 쥐었다. 돌덩이가 따로 없다. 웨이트 안 한다는 건 역시 뻥일 거야. 확신하며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가려는데 팔목이 붙잡혔다.
“…….”
눈을 떴다. 마주친 시선이 열기로 번득거린다. …아차. 너무 건드렸나.
“…어…, 람호야.”
“…….”
“여기 사무실이지, 응? 창도 다 뚫려 있고 곧 니네 원생 올 거고….”
“…….”
“응…, 나는 네가 그렇게 분별없는 인간은 아닐 거라 믿어. 응, 믿고 싶네….”
그러자 단단하고 뜨거운 손이 내 옆구리를 덥석 잡았다. 간지러움보다 당혹감이 먼저 들었다. 몸을 비틀어 빼내려는데 손가락을 슬슬 움직여 등까지 훑는다.
“뭐, 뭐, 뭔데.”
“뭐가.”
“왜 마, 마음대로 만지고 난리,”
“너는 안 그랬어?”
아니…, 나도 그랬지…. 조용히 입을 닫고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오늘의 교훈, 적당히만 깝죽거리자….
“밤에 마저 해, 밤에. 응?”
“…….”
“영 못 참겠으면 뭐, 대실이라도 할까? 근처에 모텔 있어?”
당연히 거절할 거라 생각하고 던진 말이건만 놀랍게도 이람호는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아이고, 일 났네. 옷이야 속옷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고 왔지만 그 외의 준비는 전혀 안 된 상태인데. 무엇보다 섹스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라고.
잊고 있었다, 이람호가 얼마나 진지한 인간인지. 그 와중에 조금 기뻤다. 키스 좀 했다고 이 정도로 발끈해버리는 모습이.
“아니면…, 손으로라도 해줄까?”
씩 웃으며 화장실을 가리켰다. 그제야 이람호가 쯧, 혀를 차고는 손을 놓았다. 학원 문이 열린 것도 그때였다. 딸그랑, 딸그랑,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왜소한 체구의 남자아이 하나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
창문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녀석도 한눈에 나를 알아본 듯했다. 어어, 어…. 나도 모르게 검지를 폈다가 얼른 손을 내렸다. 손과 입은 떨어졌지만 여전히 이람호와 나의 거리는 지나치게 가까웠다.
“정우네.”
이람호만이 태연했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떼어내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를 본 아이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정우, 그래, 박정우. 그런 이름이었다. 겨울, 내 피쉬가 사라지던 날, 알바처에서 돈을 훔쳤다는 의혹을 받고 경찰서에서 풀죽어 있던 소년.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무슨 일 있어?”
아직도 이 도장에 다니는구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는 것이 괜히 신기했다. 녀석은 내 쪽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연습 좀 하려고….”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했어? 그래, 잘했네. 옷부터 갈아입고 와.”
“…네.”
꿀떡같이 대답한 녀석은 탈의실로 향하면서도 한 번씩 나를 곁눈질했다. 어이고, 되게 의식하네. 고민하다 손을 한 번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고개를 홱 돌리고 탈의실로 들어가버린다. 어려워라, 사춘기 소년.
“어떻게 할래? 기다릴래?”
사무실로 돌아온 이람호가 소리 낮춰 물었다. 잠깐 스쳐갔던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냉랭한 얼굴이었다. 아쉽다, 입맛을 다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지, 뭐. 이따 너랑 같이 출근하면 되겠네.”
“그래…, 피곤하면 저기 서랍에 침낭 있으니까 꺼내서 자도 돼.”
“…침낭…, 같은 게 왜 있어….”
“네 가게에 이상한 트레이닝복 있는 이유랑 똑같지, 뭐. 애들이 좀 소란스럽고…, 못 보던 사람 있으면 얼쩡거리면서 귀찮게 할 테니까 차라리 자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람호가 아예 침낭을 꺼내놓았다. 내 트레이닝복과는 다르게 세련되고 깔끔한 침낭이었다. 얼굴을 들이대고 냄새를 맡았다. 향기로운 섬유 향이 났다.
“…뭐하냐.”
“네가 여기서 자는 거면 네 냄새 날 것 같아서.”
“그거 주로 아버지가 쓰시는데.”
손에서 힘이 풀렸다. 툭 내려놓자 이람호가 처음으로 소리 내서 웃었다.
“뭔데, 그렇게 싫어?”
“아니…,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농담이야, 내가 쓰는 거 맞아.”
이제는 농담까지 하셔…? 놀라운 마음에 얼른 침낭 지퍼를 열었다. 잠 같은 건 조금도 오지 않았지만 빨리 안쪽도 구경하고 싶었다. 이람호가 쓰는 침낭, 집에 가지 못 할 때면 몸을 구겨 넣고 자는 천쪼가리. 보송보송하고 바삭바삭하다. 막 껍질을 까놓은 과자처럼.
“태경아.”
슬그머니 정수리까지 지퍼를 올렸다. 끝까지 잠그기 직전 이람호의 손이 쑥 들어와 내 이마를 짚었다. 툭툭 두드리며 쓰다듬더니 뺨을 매만진다. 당황스럽지만 따뜻했다.
“금방 끝내고 올게.”
“…무슨 수로?”
“무슨 수로든.”
뺨에 닿은 손바닥에 슬쩍 입술을 묻었다. 내 표정이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크나큰 다행이었다
* * *
자는 척만 할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진짜 곯아떨어졌다. 가물가물한 의식을 뒤집어엎듯 우렁찬 구령이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차렷, 경례!” 힘 있고 낮은 목소리에 어린아이들이 일제히 답했다. 태! 권!
…맞다, 이람호가 일하는 학원에 와 있었지. 꾸물꾸물 침낭의 지퍼를 내렸다. 사무실 안은 어느새 어둑어둑했다. 부스스 일어나 머리를 정리하고 흘린 침을 닦았다. 아, 잘 잤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 수면부족 상태였던 몸이 거짓말처럼 개운해졌다.
핸드폰을 꺼내 불빛을 비춰가며 구겨진 옷매무시도 정돈했다. 소매의 실밥이 또 한 번 손에 걸린다. 순간 우스워졌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일어났어?”
사무실로 들어와 문을 닫은 이람호가 물었다. 하얀 도복에 검은 띠 차림이었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어우, 멋있네.
이람호가 도복 차림인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다. 고등학교 때 스토커처럼 검색해본 기사 사진에서나 봤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키가 자라고 어깨가 벌어진 이람호의 도복 차림은 더더욱 처음이다. 각 잡힌 곳 없이 부드러운 선을 가진 옷인데 그 안에 있는 몸매의 결이 고스란히 보이는 게 신기했다.
“정리하고 애들 하원시키려면 한 시간 정도 걸려. 더 자.”
“뭘 더 자, 일어나야지.”
도장 안은 옷을 갈아입고 저들끼리 떠드는 아이들로 시끌벅적했다. 길게 하품을 하고 몸을 풀었다. 사무실에 낯선 사람이 있다는 걸 눈치 챈 원생 몇몇이 창 앞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애들이란 참 거리낌 없구만. 머쓱함에 못 본 척 등을 돌리고 일어섰다.
“근처에 편의점 있어?”
“나가서 오른쪽으로 두 블록 가면 있어. 왜?”
“답답해서, 뭐 좀 마실 겸 다녀올게. 뭐 사다줄까?”
“난 괜찮아.”
마실 거리라면 사무실 안에 넘치도록 있다. 다만 거리감이라곤 한 톨도 없이 똘망똘망한 눈동자들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이람호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지 나를 굳이 붙들지 않았다.
두 블록 거리라. 번화가나 밀도 높은 주택가라면 그 정도 거리는 문제가 아니지만 여긴 좀 애매한가…. 역시 같은 건물에 편의점은 무리일까…. 고민하며 야속하리만치 가까운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장 낯익은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
점원 조끼를 입고 카운터를 정리하던 박정우도 나를 발견하고 눈이 둥그러니 커졌다. 어라, 아까 학원 왔던 애가 왜 벌써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 의아함에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어느 새 열 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오늘 가게 짤없이 지각이구만. 뭐 어떠랴. 내가 사장인 것을. 대수롭지 않게 털어버리고 음료수 냉장고로 다가갔다. 시선이 느껴진다.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다. 관자놀이부터 정수리에 뒤통수까지 아주 골고루 따가웠다.
대충 커피와 주스를 하나씩 골라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느릿한 동작으로 바코드를 찍은 박정우가 맥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3800원입니다.”
천 원 짜리 네 장을 꺼내 내밀었다. 아이는 익숙한 듯 돈을 받아 포스를 열고 거스름돈을 꺼내주었다. 나도 모르게 현금통에 시선이 갔다.
“왜요?”
아이들은 때로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다. 단박에 날카롭게 물은 녀석이 나를 슬쩍 노려보았다.
“뭐가?”
“방금 왜 그렇게 쳐다봤냐고요.”
마르고 가칠한 얼굴, 검은 눈밑이나 희고 갈라진 입술은 영양실조의 증상이다. 말라붙은 고목 같은 아이. 일하던 편의점의 돈을 훔쳤다는 의심을 받으면서도, “나는 안 했다” 외의 어떤 말도 입에 담지 않았던.
“여기가 그때 그 편의점인가 해서 봤어.”
어설프게 얼버무리거나 속마음을 덮어 숨긴다고 속을 것 같지 않다.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녀석은 입술을 한 번 꾹 깨물더니 이백 원을 꺼내 카운터에 탁 내려놓았다.
“그 편의점 아니에요.”
“그래?”
“사범님이 꼭 알바가 필요하면 학원이랑 가까운 데로 하라면서 여기 소개해줬어요.”
나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다. 녀석의 표정이 한층 험악해졌다.
“뭔데요? 아까부터 왜 그렇게 구린 얼굴로 보는데요?”
“내가?”
“존나 기분 개 드럽거든요. 씨발, 장애인처럼 생겨가지고.”
“허이구?”
메마르고 결핍된 아이에게서 서슴없이 튀어나온 욕설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존나, 개, 씨발까진 그렇다치고 장애인이 뭐가 어째?
“장애인처럼 생긴 게 뭔데? 이 자식 되게 위험한 말 아무렇지 않게 하네.”
“왜요, 장애인 같다니까 기분 나빠요?”
“장애인을 그런 말에 갖다 붙이는 니가 기분 나빠. 거스름돈이나 내놔.”
“줬잖아요, 거기.”
아이가 삐죽하게 답하며 턱으로 카운터를 가리켰다. 굴하지 않고 한 손을 내밀었다.
“내 손에다 내놔.”
“지랄….”
“나는 네 손에 곱게 돈을 줬는데 너는 왜 거스름돈을 아무렇게나 던져놔?”
“아저씨가 먼저 기분 드럽게 쳐다봤잖아요!”
녀석이 빽 소리를 질렀다. 두 눈의 흰자위가 벌게진 채 숨을 아무렇게나 몰아쉰다. 아무래도 나한테 쌓인 게 아주 단단히 많은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아저씨라니, 그 와중에 가슴에 못이 박힌다. 오늘 옷도 근래 들어 최고 세련되게 입었는데.
“…알았다, 그건 내가 잘못한 것 같네. 사과할게.”
“…….”
“거스름돈 줘.”
나도 그 애가 범인일 거라 생각해. 정황상 그렇지…, 다만 그렇다 해도 일단은 믿어주는 어른 하나쯤은 저 애한테 필요하지 않을까…. 이람호가 했던 말들이 다소 유순한 형태로 머릿속을 맴돈다. 어차피 내 관할도 아니고 여기서 이 애와 서로 감정을 긁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대면서도 녀석은 내팽개쳤던 동전 두 개를 다시 쥐어 내 손에 올려놓았다. 닿은 손끝이 섬뜩할 정도로 차다. 손톱 거스러미가 요란스레 일어나 여기저기 피가 맺혀 있었다. 신경 끄자, 신경 꺼. 이람호 제자고, 내 관할 아니고, 오지랖 부려봤자 좋을 일 없고….
“…….”
에휴, 한숨을 푹 내쉬고 돌아섰다. 상비약 코너로 걸어가 반창고를 꺼내 다시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녀석은 그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계산 안 해줘?”
묻자 그제야 바코드를 찍는다. 값을 마저 치르고 반창고를 녀석에게 건넸다.
“거스러미 일일이 뜯지 말고 참기 힘들면 그거라도 붙여놔. 그거 습관되면 손 다 망가진다.”
“…거스러미?”
“손톱 옆에 일어나는 각질 말이야.”
녀석이 아, 하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커피와 주스를 들고 나가려는 나를 얼른 부른다.
“어, 저기요, 반창고.”
“…너 쓰라니까.”
“네?”
되묻는 소리가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어 내가 다 당황스러웠다.
“저 준다고요? 이거요?”
“그래.”
“왜요?”
고작 천 원짜리 반창고 하나 사준다고 들을 말인가. 순간 모든 게 짜증스러워졌다. 나라고 이 녀석이 반가운 게 아니다. 저 볼품없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피쉬를 잃던 날의 자괴감과 서글픔이 속속들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싫으면 버리든가.”
“아뇨, 저기….”
더 듣지 않고 문을 밀고 나왔다. 그러자 놀랍게도 녀석이 나를 쫓아 나왔다. 당혹감에 얼른 발을 멈췄다. 뭐야, 이거.
“왜 따라와?”
“아뇨, 이거….”
“아, 너 쓰든가 버리든가 하라고.”
“그게, 이거, 왜 주는데요?”
심지어 끈질기다. 역시 괜한 짓을 했다 싶었다.
“손이 다 너덜너덜하니까 줬지, 그 외에 무슨 이유가 있는데?”
그렇다고 이 어린애랑 같은 수준으로 싸울 수도 없는 일이다. 대충 대답하자 녀석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불안하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선에 나까지 초조해진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어린애가 이내 머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그게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인 양.
“…….”
별 수 없이 느껴진다. 이 작은 행동 하나의 뒤에 깔린 이람호의 흔적이. 한숨부터 내쉬려다 간신히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
“저기, 아저씨.”
근데 이게 자꾸 아저씨, 아저씨…. 짜증스런 기색을 숨기지 않고 돌아보자 아이가 힘주어 말했다.
“내가 안 그랬어요.”
“…….”
“나 절대로 돈 훔친 적 없어요.”
물론 나로서는 믿을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본심을 드러낼 이유도 없다. 때문에 대충 고개를 주억거려 보였다. 빨리 녀석을 들여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알았으니까….”
그때 익숙한 그림자가 보였다.
어느새 편의점 입구 앞에 삼삼오오 모인 남학생 세 명이 이쪽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박정우는 뒤를 보고 있어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물론 거기 모여 있는 얼굴들이 익숙했던 건 아니다. 눈에 걸린 것은 그들의 주위로 스미듯이 물결치는 검은 피쉬였다.
“…블랙.”
“네?”
중얼거리며 무심코 눈을 깜빡였다. 피쉬는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겨움과 막막함이 가슴에 뻐근하게 남아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해졌다.
내가 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박정우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는 게 보였다. 녀석에게는 아예 아는 얼굴들인 것 같았다. 고민하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아무리 곱고 예쁜 어린애가 아니라지만 저 블랙의 소굴로 혼자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이다. 다행히 이람호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지금 여기로 좀 올 수 있어?”
[거기가 어딘데?]
왜냐고는 묻지도 않는다.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그, 네가 가르치는…. 정우 일하는 편의점 앞.”
통화 내용을 듣던 박정우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제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듯했다.
[바로 갈게]
전화가 끊기고 나는 조심스레 박정우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녀석도 어느새 내게 딱 붙어 있었다.
“아는 애들이야?”
놈들이 눈치 채지 못하길 바라며 소리 낮춰 물었다. 박정우는 아예 놈들 쪽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네.”
“친구?”
“아뇨…. 그냥 예전 학교 애들요.”
어쨌든 아직 중학생이라는 뜻이렷다. 그러자 더욱 놀랍다. 세상에, 무슨 중학생이 블랙이야. 살면서 그런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너 찾아온 거야?”
“…그런…, 것 같아요.”
“…….”
“여기로는, 온 적 없었는데….”
박정우의 턱이며 손이 와들와들 흔들린다. 그때 내 머릿속으로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쳐 지났다.
“저 녀석들이야?”
“…네?”
“저 녀석들이 시킨 짓이야? 편의점 카메라 못 쓰게 만들라고?”
박정우가 헛숨을 들이켰다. 피쉬가 안 보여도 이쯤이면 정곡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럼 그때 왜 입 다물고 있었어? 경찰한테 다 말해버리면….”
“말 안 해봤을 것 같아요?”
녀석이 본 이래 처음으로 웃었다. 불신감이 가득 담긴 씁쓸한 비웃음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솔직히 듣기 싫잖아요.”
“뭐?”
“내가 왜 그러는 건지 진짜 이유 같은 거 알기 싫잖아요. 이유를 알면 해결해줘야 하니까.”
미치겠다, 지금 어린애 투정이나 들어주고 있을 때가 아닌데. 다시 한 번 힐끔, 편의점 앞을 보았다. 세 놈의 블랙은 의도를 감출 생각조차 없다는 듯 명백히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중학생에 블랙인데 그게 세 놈이나 돼. 대체 얼마나 쓰레기인 거야? 지금 내가 사라지면 놈들이 박정우를 잡아먹으려 들 것은 분명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이람호가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애석하게도 나는 어른이지만 아무리 중학생이라 한들 블랙 셋을 상대할 자신은 없다.
“사범님도 그래서 안 물어봤던 거잖아요.”
“뭐라고?”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봇물 터진 박정우의 질타는 멈출 줄을 몰랐다. 나도 모르게 되묻자 녀석이 인상을 썼다.
“사범님 말이에요. 그 뒤로 한 번도 나한테 물어본 적 없어요.”
“물어봐? 뭘?”
“정말로 훔쳤느냐고, 안 훔쳤다면 카메라에 스티커 붙이는 짓은 왜 했냐고.”
“…….”
“이런 골치 아픈 일 끌려 나올까봐 싫었던 거 아녜요?”
왜 갑자기 나한테 마음을 활짝 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반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람호에 대한 험담 아닌 험담은 더더욱 그랬다. 나는 블랙 쪽을 너무 쳐다보지 않게 주의하면서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내가 어떻게 알아? 이람호가 뭔 생각을 하는지.”
“…….”
“너야말로 가서 물어봐. 나한테 왜 그랬는지 안 물어보냐고. 그럼 안 물어본 이유를 알려주겠지. 걘 그런 놈이야.”
무심코 단정 지어 말해버렸다. 어차피 아직 이람호는 보이지 않으니 상관없다. 그때 블랙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들끼리 뭐라 대화를 나누더니 한 놈이 앞으로 나온다. 아이고, 미치겠네.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친다. 우선 박정우를 여기서 피신시켜야 하나? 하지만 이 녀석 아르바이트 중인데 그래도 되나?
알 게 뭐야, 경험상 블랙은 사람도 죽일 수 있는 인종들이다. 가까워지는 얼굴은 도저히 중학생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눈썹은 다 밀었는지 흔적도 없고(요즘도 이런 스타일이 있다니) 풀어헤친 셔츠 안쪽으로는 문신이 보이고(정말 믿을 수가 없다) 바지는 언뜻 보고 레깅스인 줄 알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제가 얼마나 불량하고 질 나쁜 인간인지에 대한 광고로 도배해놓은 모양새였다.
“헤이, 쩡우.”
말투도 가관이다. 나도 모르게 박정우의 팔목을 움켜쥐어 내 뒤로 숨겼다. 텔레파시라도 가길 바라며 간절히 속으로 되뇌었다. 이람호, 이람호. 기 세고 몸 좋고 운동능력 뛰어난 이람호 씨, 빨리 나를 이 위기에서 좀 살려주세요!
“니들 뭐야?”
지금 이 말이 정확한 타이밍에 나타난 이람호의 입에서 나온 것이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만, 히어로는 참전 직전이니 나라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던 블랙은 그제야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았다는 듯 으응? 하며 눈을 부라렸다.
“난 쟤 친군데요, 너는 뭔데요.”
말투부터 단어 선택까지 뭐 하나 멀쩡한 곳이 없다. 한숨을 쉬는 척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이런 데서 날 때리…, 아니, 때릴 수는 있겠지만 죽이기야 하겠어.
“얘한테 너네 같은 친구 없어. 가.”
“뭔데, 존나 웃기네. 니가 어떻게 알아요? 니가 정우세요?”
블랙이 힘차게 비웃더니 바닥으로 침을 탁 뱉는다. 걸쭉한 가래침이며 다가올 때마다 풍기는 담배 냄새에 욕지기가 다 올라왔다.
“가라고 했….”
“니네 뭐야?”
이번에야말로 이람호의 목소리였다. 나야 내 얼굴을 확인할 길이 없지만 아마 구세주라도 본 표정이었을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았다. 이람호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척척 걸어오고 있었다.
“…사범님.”
박정우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습게도 나는 그 순간 이 어리고 비뚤어진 어린애에게 동지애를 느꼈다.
“니들 뭐냐니까.”
멈칫한 블랙을 향해 이람호가 재차 물었다. 머리 뒤로 후광이 다 보이는 것 같다.
“하, 나 씨발….”
물론 쉬이 꺾이면 블랙이 아니다. 또다시 침을 탁 뱉더니 이마가 와그작 구겨지도록 눈을 치뜬다. 아이고, 무서워 죽겠다. 도대체 뭔 중학생이, 세상에, 무슨 중학생이.
“정우야, 우리가 너 잡아먹냐?”
블랙은 눈으로는 이람호를 똑바로 쏘아보며 묻기는 박정우에게 물었다. 잡아먹으려고 하잖아! 지금! 나는 당장 따져 묻고 싶은 것을 참느라 주먹을 꾹꾹 쥐어야 했다.
“어? 씨발새끼야, 우리가 너 존나 씹어먹냐고.”
“니들 뭔데 여기서 얼쩡대느냐니까.”
이람호는 참으로 침착하고 평온하고 단호했다. 그렇게 의지가 될 수가 없었다. 박정우만 없다면 당장 이람호의 뒤에 숨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씨발 존나 뭔 상관인데요? 우리가 여기서 얼쩡대든 저기서 얼쩡대든. 우리가 어? 뭘 어쨌는데?”
“말장난이나 할 생각이면 가라.”
“와- 씨발 개어이없네.”
놈이 이람호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이람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 틈을 타 나는 박정우를 붙들어 슬금슬금 이람호의 등 뒤로 숨겨놓았다. 블랙이 훼까닥 돌아서 박정우에게 달려들까 걱정된 탓이었다.
“아저씨, 우리가 지금, 어?”
“가라.”
“어, 씨발, 뭐어-”
“…고 했다.”
단단한 등에서 위압감이 뿜어져 나온다. 이놈의 피쉬는 왜 이럴 때 안 보이고 난리인가. 이런 살기 어린 분노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물론 결과는 안 봐도 훤한 것이다. 막나가는 어린애들이란 짐승과도 같아서 저보다 날카로운 이를 가진 상대의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을 줄 안다. 허, 나 참, 허허, 나이거참 씨발, 탄식과 욕설을 적절히 섞어가며 슬그머니 물러선 블랙이 박정우를 한 번 노려보고는 제 친구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블랙 두 명에게서 비웃음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야, 씨, 뭐냐?”
“나중에 해, 나중에.”
“쫄았냐? 병신.”
그들은 실컷 낄낄대고 조롱하면서도 다행히 다시 덤빌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박정우가 참고 있던 숨을 훅 내쉬었다. 돌아보니 마른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사범님.”
녀석이 조심스레 이람호를 불렀다. 그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하고 덤덤한 얼굴로.
“사장님 오실 거야.”
짧게 내뱉은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저 짤려요…?”
“니가 왜 짤려. 그냥 근무시간 끝났으니까 오신다는 거지.”
“…….”
“정리하고 나와. 밥 먹게.”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이람호가 뒤늦게 나를 돌아보았다. 표정에 낭패감이 가득하다. 잠깐 내가 있다는 걸 잊은 듯했다. 용서해주기로 했다. 슈퍼히어로시니까.
“괜찮아, 먼저 갈게.”
“아, 미안해. 괜히 여태 기다리게 만들고….”
사정은 대충 알 것 같다. 아르바이트가 필요한 박정우에게 학원 근처의 가게를 소개해주고, 그 일이 끝나면 밥까지 먹여 집에 보내는 게 일과였던 거겠지. 오늘은 나라는 덤이 붙어 있었던 거고. 아, 훌륭하신 참스승.
“그러지 말고 너도 먹고 같이 가. 어차피 가게 늦었잖아.”
정말로 개의치 않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람호가 웬일로 눈치를 보느라 얼른 나를 붙들었다.
“늦었다고 아예 안 열 수는 없잖아.”
“그래도….”
“어, 저기요….”
지리하게 이어질 뻔한 말싸움을 사전에 틀어막은 것은 소심하게 한 손을 들어 올린 박정우였다.
“사범님, 저 괜찮아요. 집에 가서 먹을게요. 사장님이 도시락 챙겨주신다고 했어요.”
얼씨구.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어린애가 가증을 떠는 건가 생각해봤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이람호와 나를 번갈아 보는 눈동자가 너무나 신뢰로 가득 차 있다.
“…….”
아니, 반창고 하나 사주고, 양아치들한테서 가드 좀 쳐줬다고 사람을 이렇게 홀라당 믿을 수가 있냐? 어른 안 믿는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모조리 허세였구만. 그만 헛웃음을 뱉었다. 이래서야 그냥 가게로 먼저 가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간 이런 어린애한테 따뜻한 식당 밥 대신 차가운 편의점 도시락이나 먹게 만들 판이다.
“…알았어, 먹고 가면 되잖아.”
못 이긴 척 말하자 이람호도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애초에 남의 일터에 갑자기 찾아온 건 이쪽이니까.
* * *
부대찌개에 공깃밥을 훌훌 비우는 내내 소주 한 잔이 생각났지만 참기로 했다. 어차피 가게에 가면 사랑스러운 나의 리큐르들이 가득하다. 밥 두 공기를 싹싹 긁어 비운 박정우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가고, 나와 이람호는 건물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이제 와서 가게를 여는 게 의미가 있나 싶은 시간이었다.
“너 평소에는 어떻게 오픈시간 맞춰서 오는 거야?”
“얼마 전부터 아버지가 하원 담당이거든.”
“엥? 그래도 돼?”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 오늘은 너 때문에 그냥 들어가시라고 한 건데….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늦어질 줄은 몰랐네.”
차에 올라타 벨트를 매고 시동을 넣는 동작 하나하나가 바빠 보였다.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사는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보니 새삼스레 실감하게 된다.
“내일부턴 그냥 두 시간 늦게 나와. 바쁘게 움직이지 말고.”
“괜찮아.”
“아, 됐으니까 그렇게 해. 근무시간 빠지는 만큼 시급에서 깔 거니까.”
“…….”
“어차피 업종 바꿀 생각도 하고 있고…. 대충 해, 대충.”
이람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네비게이션이 신호를 찾는 기계음만이 차 안의 정적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삐릭, 삑, 삑….
“그런 건 잘 모르겠어.”
“…응?”
“대충 한다는 게…. 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이게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나는 대충 그런 표정을 지었을 것 같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다.
“항상 빡빡하게 살았고, 그게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더니…. 적당히 요령을 피우라든가 그냥 대충 하라든가 그런 말을 들으면 뭐 어떻게 하라는 건지 헷갈려.”
“…….”
“두 시간 늦게 출근하면 돼? 그럼 해결되는 거야?”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황당함을 굳이 감추지 않고 쳐다보다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놈인 걸 어쩌겠는가 싶었다.
“…어, 앞으로는 두 시간 늦게 출근해.”
“응.”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인 녀석이 차를 출발시켰다. 비좁고 복잡한 지하주차장을 익숙한 듯 빠져나가더니 이내 큰길가에 안착한다. 자정을 향해가는 시간, 어둠을 떠받친 가로등의 행렬이 버거워 보였다.
“밥은 네가 그냥 사먹이는 거야?”
“정우?”
“응.”
“아버지가 시킨 일이야. 애가 하루 한 끼라도 제대로 먹어야 아르바이트든 뭐든 하지 않겠느냐고.”
“학원비보다 밥값이 더 나가겠네.”
“학원비는 안 받아. 장학생이라.”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이런 동네 보습학원에 웬 장학생인가는 둘째 치고, 박정우가 장래성 있는 운동선수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자선사업하냐?”
“비슷해.”
비아냥거리면 박정우가 왜 장학금을 받을 만한 인물인지에 대한 변명이라도 나올 줄 알았건만, 이람호는 언제나 그렇듯 냉랭했다.
“그것도 아버지 결정이야. 죽기 전에 덕 좀 쌓아야겠다 싶었는지.”
“무슨 말이 그래.”
“사실이 그래. 입에 달고 살아. 덕 쌓아야 한다고.”
듣고 있자니 좀 섬뜩해진다. 이람호의 아버지는 일찍이 수억의 빚을 지고 가정을 파탄 낸 뒤 오랜 청산의 세월을 거친 후에야 돌아온 인물이 아니던가. 완고하던 얼굴이 떠오르자 못내 심란해졌다.
“…저기, 혹시.”
“응?”
“아버지 요즘 뭐 종교 활동 같은 거 하셔…?”
사이비 종교에 빠져 안 하던 짓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집안 말아먹는 인간들 이야기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니다. 내 가게에 출입하는 손님들 중에도 여럿 있었다. 이람호는 잠시 말뜻을 못 알아듣겠다는 듯 눈을 껌뻑이다 이내 아아, 했다.
“그런 거 아냐. 그냥 갱년기 증상인가봐.”
“…갱년….”
“한동안 우울해하셔서 상담 한 번 받아보시라고 했더니 받아온 처방이 그건가 보더라고. 정우도 아버지 잘 따르고, 아버지 뿌듯해하시고, 그럼 윈윈이지, 뭐.”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우울한데 불쌍한 애 밥 좀 먹여준다고 안 우울해지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람호는 그런 아버지의 방식에 별다른 회의나 의문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너, 정말 업종 바꿀 거야?”
늦은 시간이라 도로는 한산했고, 이람호의 차는 별다른 방해 없이 빠르게 달렸다. 가게까지 십오 분도 채 안 걸릴 듯했다.
“모르겠어. 생각만 해보는 거야. 일을 해도 낮에 좀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래? 아쉽네.”
“뭐가?”
“편의점에서는 향기 나는 거 못 하겠지?”
향기나는 거?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향기 나는 게 뭔데.
“네가 피우는 담배 말야.”
“아, 후카?”
“향이 좋더라고. 너한테서 나는 게 특히.”
나도 모르게 소맷부리에 코를 박았다. 킁킁, 숨을 들이쉬어 봤지만 별다른 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모르는구나. 너한테 항상 배어 있어. 가까이 오면 훅 풍겨.”
“…그래?”
“차에도 배더라. 아버지가 저번에 차 쓰시더니 뭐 향수 같은 거 뿌려놨냐고, 여자친구 생겼냐고 하던데.”
순간 멈칫했다. 무심코 그래서? 라고 되물을 뻔했다. 다행히 이람호는 금방 화제를 바꿨다.
“그래도 낮에 일하는 건 좋은 생각 같아.”
내 판단도 그렇다. 내리 낮밤이 바뀐 채 생활했더니 햇빛이 버거울 지경이다. 의자에 퍼져 앉은 채 안 돌아가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 보았다. 편의점, 카페…, 해볼 만한 업종이래봤자 그 정도고, 그중 무엇도 술보다 잘 다룰 자신은 없다.
쓸데없는 궁리 말고 하던 일이나 잘하는 게 맞나? 엄마는 어쩌면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런 유언을 남긴 건 아닐까? 물론 그럴 양반이 못 된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만.
“다 왔다.”
생각에 잠긴 사이 가게 근처에 다다라 있었다. 이람호는 잠긴 문을 풀어주고 눈짓했다.
“먼저 들어가. 주차하고 따라갈게.”
“…으응?”
“쌀쌀하잖아.”
그, 그래. 쌀쌀하지…. 애매하게 대답하고 차에서 내렸다. 밤공기는 전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적당히 선선하니 개운하게 느껴진다.
어쩔까 고민하는데 멀리서 어,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오기영이었다. 언제나처럼 친구들을 바글바글하게 끌고 길을 가던 녀석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후다닥 뛰어왔다.
“사장님! 오늘 가게 안 하는 거예요?”
“…어, 미안해요. 내가 지각.”
“지각? 그럼 이제 오픈해요?”
“응.”
“아이고, 다행이다. 먼 길 왔는데 허탕 쳤나 했잖아요.”
제 친구들을 향해 손을 휘두른 오기영이 히, 웃었다. 척 봐도 오기영 또래인 것이 돈이 될 손님상들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들락거린다는 것 자체가 반가웠다.
갑자기 업종 변경을 고민했던 것도 생각해보면 요 몇 달간의 적자행진 탓이다. 손님이 다시 활발하게 들고 흑자로 돌아서면 또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 역시 하던 걸 내려놓고 편의점이니 카페니 하는 건 무모하지…. 그래, 오늘 지각한 건 정말 잘못한 거야. 일단 예전만큼의 성실함을 되찾은 뒤에…. 속으로 중얼거리며 주머니를 뒤지다 눈을 번쩍 떴다.
“…….”
아무리 뒤져봐도 열쇠가 잡히지 않았다. 혼자 멍하니 서 있으려니 기다리다 지친 오기영과 손님들이 채근하기 시작했다. 사장님, 멀었어요? 목말라요오.
식은땀이 흐른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때는 갖고 있었다. 카드키 하나, 열쇠 하나, 주머니에 잘 챙겨 넣었는데 이게 어디로 갔지. 짚이는 건 하나뿐이다. 이람호의 침낭 안에서 자다가 흘린 게 틀림없었다.
“…아, 저기, 그게….”
“무슨 일이야?”
이번에도 슈퍼히어로가 바빴다. 믿을 수 없는 스피드로 주차를 끝내고 돌아온 이람호가 불쑥 물었다. 목소리에는 다소 불쾌감이 묻어 있다. 오기영 때문인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어, 그게….”
오기영은 해맑은 얼굴로 나와 이람호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어휴, 인간아. 이런 어린애한테 뭘 그렇게 진지하게…, 까지 생각했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까짓 거, 서비스 좀 해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람호를 똑바로 바라보고 은근히 말했다.
“…그, 어떡하지. 나 너희 집에 열쇠 흘린 것 같은데.”
오기영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이 한순간 침묵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예 쐐기를 박아둘까. 흠,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이었다.
“아까 자다 깼을 때 그랬나봐.”
오기영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녀석은 허, 하며 나를 보더니 허어, 하며 이람호를 보고는 흐어, 하며 제 친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응?”
그러나 이람호, 이 눈치 없는 숫총각은 나의 호의를 받아들일 마음이 요만큼도 없는 듯했다.
“집이라니 무슨 소리야? 아, 도장에서?”
“…….”
관두자, 그래. 한숨을 푹 쉬고 쏘아붙였다.
“어, 그래. 니네 도장. 너의 일터. 낯간지러운 일이라고는 절대 네버 일어날 수 없는 그 신성한 공간에서 내가 침낭 빌려다 온몸을 꽁꽁 싸매고 퍼질러 자고 일어났을 때 말이야. 그때 가게 열쇠가 누군가의 침입이라곤 허용하지 않는 그 단단한 침낭 안에서 떨어졌고 그대로 잃어버린 것 같다는 말이었어.”
“낯간지러운 일이 왜 일어날 수 없어? 키스까지 해놓고.”
“…….”
오기영의 친구들에게서 워어어, 야유인지 환호성인지 분간할 수 없는 함성이 튀어 나왔다. 마치 학교 축제의 공개고백 무대에서 난데없이 불려나간 기분이었다. 쪽팔리고 낯간지럽다 못해 화까지 났다. 누군가를 탓할 일도 아니다. 내가 이람호라는 인간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 패착이라면 패착이니까.
“…야, 너, 그, 무슨.”
“열쇠는 잠깐 기다려봐.”
폭탄만 툭 던져놓은 이람호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오기영과 그의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들었다.
“사장님, 우와, 뜨거우시네.”
“도장이라니 뭐예요? 알바 형 도장에서 일해요?
“사장님 저한테 이러실 수 있어요? 저를 갖고 논 거예요?”
“아, 시끄러워!”
벌컥 화를 내자 좋다고 낄낄거린다. 어린 것들에게 놀림감이 된 기분이 아주 상큼하고 좋았다. 난리다, 난리. 열쇠를 가지러 간 걸 테니 이람호가 돌아오려면 못 해도 삼십 분은 걸릴 텐데 그동안 이 호기심 많고 혈기왕성한 어린애들을 상대해야 한단 말인가.
“…미안한데, 오늘 그냥 가게….”
“어?”
누군가 낸 소리와 함께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퍼뜩 돌아보니 문 안쪽에서 나고 있었다. 기다란 그림자가 유리문의 잠금쇠를 풀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가게 안쪽에서 나타난 이람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너, 어떻게 거기서 나오….”
열쇠를 이람호가 챙겨놨었나? 아니지, 그랬다면 아까 여기서 문을 따고 들어갔겠지. 그런데 지금 이람호는 가게 뒤로 사라지고 얼마 후에 안쪽에서 나타나지 않았는가.
“어? 어어? 어떻게 들어갔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해 멍청하게 묻자 이람호는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건 비밀이지.”
“왜!”
“보안 문제잖아.”
“…야, 니가 제일 위험분자거든. 너부터 차단해야 되거든?”
타박하며 따라 들어가면서도 머릿속엔 물음표만 가득했다. 뭐야,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궁금해서 돌아가시겠네. 이람호는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