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레인보우 피쉬 2 (완결)
1. 봄보로봄봄
봄이다.
“와아아아악!”
빌어먹을 놈의 봄이 돌아왔다.
요란한 비명소리에 무언가 깨지고 미끄러지는 소리가 섞여 골목 아래까지 울렸다. 꼭 이맘때쯤의 흔한 풍경이었다. 그늘에 남아 있던 빙판을 미처 보지 못해 거침없이 밟았다가 요단강 물에 발 담그고 돌아오는 손님이 한둘이 아니다. 아파오는 머리를 쥐어 싸고 있는 힘껏 오르막길을 올랐다. 물론 발밑을 열심히 확인해가면서.
“사장님! 저 허리 나간 것 같아!”
뒤로 엎어진 채 아이고오 데이고오 난리를 피우던 아청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우는소리를 했다. 츠츠츠, 혀를 차고 발밑을 잘 고른 뒤에 손을 뻗었다. 일어나요, 일어나.
“여기는 다 좋은데 터가 너무 별로야…. 사장님, 가게 옮길 생각 없어요?”
“갈 데도 없어요. 요즘 이 일대 권리금이 얼마나 올랐는데, 아예 멀리 갈 수도 없고.”
“여긴 안 올랐어요?”
“터를 봐요, 오르겠나.”
바야흐로 3월, 꽃 피고 봄바람 부는 계절이건만 유독 어둡고 축축한 뒷골목은 여전히 써늘할 뿐이다. 아청은 한참을 더 구시렁거리고 나서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혼자 왔어요? 애인은?”
“애인 누구?”
“…저번에 같이 온 사람.”
“아이고, 우리 사장님. 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계시지?”
아청이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늘 연애를 하고 있는 인간은 크게 두 분류로 나눌 수 있다. 긴 연애가 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짧은 연애가 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청은 명백히 후자였다.
“이번엔 오래 갈 것 같더니.”
“전 아무랑도 오래 못 가요. 백일 챙겨본 적도 없는걸.”
백일 같은 건 보통 고등학교 때 졸업하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딴죽 걸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손님이니까.
“사장님은 어떻게 됐어요?”
“뭐가요?”
“알바님이랑.”
아청이 눈을 가늘게 휜 채 히쭉 웃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을 껌, 뻑, 했다. …그러게. 나는 이람호랑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당연하지만 무턱대고 내린 지하철역 플랫폼에 거짓말처럼 이람호가 서 있는 일 따위는 없었다. 핸드폰도 없었다. 고민하다 우선 택시를 타고 가게로 향했다. 라디오 뉴스에서는 앵무새처럼 올해 가장 기록적인 한파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 이건 뭐 매일 기록적인 한파래요, 어제까지는 한파도 아니었나봐. 그죠?
온화한 인상의 택시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평소 같으면 뭐라도 말을 받아 대화를 이어갔겠지만 내내 기분이 둥둥 떠 있었다. 이 하늘 아래 이 도시 어딘가에 이람호가 있다고 생각하면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빙판길을 몇 번이나 미끄러지며 언덕을 올랐다. 가게는 시커멓게 잠들어 있었다. 임시휴업 멘트가 인쇄된 종이는 모서리가 너덜너덜했다. 하아, 숨을 내뱉자 구름 같은 응어리가 졌다.
그대로 한참을 기다렸다. 무턱대고 기다렸다. 쭈그려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서성이다가 망설여가며.
이람호가 나타난 것은 장갑 속의 손이 다 곱아 들어 감각이 없어졌을 즈음이었다.
언덕 아래서 급하게 달려 올라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내가 그랬듯 몇 번이나 자빠질 뻔하면서도 용케 균형을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세나가 연락했구나. 심태경 그 얼빠진 자식이 핸드폰도 내버린 채 홀로 훌쩍 서울에 가버렸다고. 이람호는 그 말을 듣고 저렇게 급하게 달려왔고.
- …….
나를 발견한 이람호의 얼굴에 여러 가지 표정이 스쳐 지났다. 설마 했다가, 놀랐다가, 안도했다가, 화가 났다가, 종내는…, 미소 지었다.
- 라머야.
얼어붙은 혀가 울퉁불퉁한 발음을 자아냈다. 이람호가 풉, 웃었다. 이람호의 입에서도 구름이 만들어졌다.
- 너랑 어쩌고 싶은지 모르겠어.
- 응.
- 그런데 안 보는 것도 싫어.
- 그래.
- 널 보고 있으면 괴로워. 내 인생의 가장 감추고 싶은 부분들이 너한테 덕지덕지 묻어 있어서.
이람호는 웬일로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생전 저런 걸 하고 다니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다가온 그가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더니 내 목에 감아주었다. 올올이 새겨진 이람호의 체온은 내가 찬 숨을 내쉴 때마다 목덜미로 스며들었다.
- 그래도 견딜 만했어, 왜냐하면…. 나한테는 아주 강력한 아군이 있었거든.
- 아군?
- 빠짐없이 내게 알려줬어, 너에 대해서….
그런데 이제는 없어. 나를 버리고 가버렸어. 그래서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너는 나의 첫사랑이고, 나의 치부고, 나의 갈망이라서……. 단 한 순간이라도 너를 읽지 못해 실수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
- 태경아.
차고 단단한 손이 어깨를 쥐어왔다. 확신 가득 찬 몸짓이었다.
- 나는 너한테 비겁한 말 안 해.
비겁한 말? 되묻지 않고 바라보았다.
- 네 마음 넘겨짚고 네 탓으로 돌리는 짓 안 할 거라고.
- …….
- 내가 너한테서 떨어져 나가는 건, 네가 분명한 어조로 지금 당장 꺼지라고 말했을 때야.
그런 일은 지금까지 수없이 많지 않았나? 고개를 기울이며 픽 웃어버렸다. 그러자 이람호가 조금 더 힘주어 말했다.
- 그러니까 앞으로는 고민하고 말해.
- …….
- 무턱대고 뱉어놓고 수습할 게 아니라, 충분히 고심하고 고민한 뒤에, 정 나랑 못 있겠으면…, 그때 말해. 열도 없고 술도 안 마신 상태로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이람호는 비겁한 말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 그가 내게 뱉는 말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비겁한 말이다. 나는 이람호의 눈을 본 상태에서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 못한다.
- 약속할 수 있어?
그렇게만 해준다면.
- 나는 네가 나를 어떻게 대한다 해도 네 곁에 있을 거야.
“잤어요?”
아청이 불쑥 물었다. 연애사에 대해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인간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남의 침대 사정을 거침없이 묻는 게 쿨하지 못하다고 믿는 부류와 쿨하다고 믿는 부류. 아청은 이번에도 후자다.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요? 아직 우리 알바한테 관심 있나?”
“에이, 설마. 남의 건 안 먹어요.”
“근데 왜.”
“사장님이 궁금해서 그래요. 그렇게 신중하게 고르는 거 처음 봐서. 역시 첫사랑이라 다른가?”
난데없이 긴 휴업을 해버린 여파는 생각보다 크다. 그로부터 벌써 두 달이 지났는데 좀처럼 흑자로 돌아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산기를 두드릴수록 머리만 아팠다. 이래갖고는 그냥 가게를 안 여는 게 이득이겠는데.
팔아버릴까. 펜을 돌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변호사를 통해 알아본 바로 엄마의 ‘조건’은 유언장에 공증된 건 아니었다. 그냥 나한테 한 ‘부탁’ 정도.
팔고 그 돈으로 편의점이라도 차리면…, 아니다. 안 그래도 편의점 넘친다고 난리들인데 경쟁력이 없어…. 복잡한 뱃속을 달래려 후카 한 대에 숯을 당겼다. 짚이는 대로 향을 재우고 파이프를 우물거리는데 딸랑, 종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슬쩍 들었다. 청바지에 니트 차림의 이람호가 뭔가 못마땅한 얼굴로 들어서고 있었다. 날이 따뜻해져서 이람호의 좀 더 다양한 옷차림을 구경할 수 있게 된 건 좋지만, 모양새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마냥 헤벌쭉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꼴이 왜 그래?”
그렇게 밖엔 물을 말이 없다. 청바지 한쪽이 온통 진흙탕물에 젖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람호가 뒤늦게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넘어졌어, 요 앞에서.”
“…넘어져?”
“아무 생각 없이 뛰어오는데 밟아보니 빙판이더라고.”
입이 쩍 벌어진다. 세상에, 그렇다고 이람호가 넘어지다니. 이 극악의 출퇴근길을 겨우내 오가면서 단 한 번 휘청인 일조차 없었던 저 운동 귀신이.
“뭐 급하다고 뛰어왔어, 다치진 않았어?”
“괜찮아. 옷만 좀 버렸어.”
“내 츄리닝 바지 줄게, 너 청바지 얼른 헹궈서 탈수기에 넣어. 잘못하면 물들겠다.”
카운터 어딘가에 쑤셔 박아놓은 파란 츄리닝이 퍼뜩 떠올랐다. 가게에서 잘 일이 있을 때 편하게 입고 자려고 가져다 둔 것이다. 물론 몇 번 입을 기회는 없었지만.
이람호가 가지런히 정리해둔 짐들을 아무렇게나 헤쳐 가장 아래 서랍 끝에 처박힌 츄리닝 바지를 꺼냈다. 자! 의기양양하게 내밀자 이람호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나도 자연스럽게 바지 꼬라지를 다시 보았다. 먼지투성이인 건 그렇다 치고, 무릎은 늘어나고 끝단은 다 터져 영 볼품없었다.
“…그걸 급하게 빨아야 할 것 같은데.”
“이, 이래 봬도 빨아서 넣어둔 거야. 먼지 좀 쌓인 것뿐인데.”
“…….”
“싫으면 마라, 그래.”
민망한 마음에 얼른 손을 거둬들였다. 그제야 이람호가 못 이긴 척 바지를 건네받았다. 주방으로 들어가면서도 뒷머리를 긁적이는 둥 영 석연치 않은 모양새였다. 짐작은 했지만, 저 녀석 혹시 결벽증 같은 거 있나. 카운터에 턱을 얹은 채 후회에 사로잡혔다. 아이고, 젠장. 좀 좋은 바지로 가져다둘 걸. 브랜드 있는 츄리닝 새 걸로다가.
두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요즘 이런 일이 잦다. 아무 생각 없이 뱉어놓고 한참 상대의 눈치를 본다. 피쉬만 보이면 답답할 게 없는데 이게 다 뭔 난리인지. 이마를 꿍 박은 채 이람호의 기분이 별로인 이유를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1, 넘어진 게 쪽팔려서. 2, 무릎 나간 파란 츄리닝 입는 게 모양 빠져서. 3, 나의 무신경함에 실망해서.
3번만은 아니길 빌며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다리를 떨었다. 이람호는 한참이 지나도록 주방에서 나올 기미가 없었다. 오픈 시간이 다가오는 것도 문제지만 혹시나 어떤 타이밍으로 도망칠지 고민 중일까 봐 초조해진다.
“…이람호.”
주방문에 대고 개미만 한 목소리를 냈다. 다행히도 어어, 하는 대답이 들렸다.
“잠깐만. 바닥에 흙 묻은 거 닦느라고.”
“그냥 물로 쓸면 되지…. 도와줄까?”
“아냐, 거기 있어. 금방 나갈게.”
이람호도 그새 변했다. 예전과는 다르게 매사에 설명이 길다. 닫힌 주방 문 앞에 선 채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나는 이람호가 평생 남의 기분 같은 건 헤아릴 일 없이 살 줄 알았다. 잘난 인간의 인생이란 마땅히 그런 거라 믿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남이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삶. 모두가 꿈꾸지만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는 그런 특혜.
“…….”
생각해보니 쟤는 그냥 나한테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어이쿠.”
문이 열리다 말고 멈춰 섰다. 반쯤 열린 문 너머에 이람호가 오묘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뭐해, 거기서.”
“너 기다리는데.”
“…위험하게.”
순간순간 낯설도록 단정한 얼굴. 가만히 바라보며 한참을 침묵했다. 우리는 어떻게 된 걸까. 아청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봐도 알 길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 와서 낯간지럽게 사귀자는 합의가 필요한 건 아니다. 그저 이 미묘한 거리가 버겁다. 이토록 애매한 공기를 깨부술 방법 또한 알고는 있다. 대충 술 먹고 섹스 한 번 하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애인 사이가 될 테고, 거리낌 없이 가까운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테고, 내킬 때마다 섹스하고 함께 어딘가에 가고 또……. 뭐 그럴 테지만.
그런 건 알고 있지만.
“앞치마 어디 있어?”
멀어지는 의식을 붙들듯 이람호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어?”
“까만 거. 찾아봤는데 안 보이네.”
“앞치마? 그거 낡아서 버렸는데 한 번도 안 찾다가 왜 갑자기….”
“…….”
이람호가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을 했다. 세상에, 갈수록 표정도 다양해지는 것 같네. 엉덩이를 털고 주섬주섬 일어나 주방을 들여다보았다. 베이지색 니트에 파란 츄리닝 바지를 입은 이람호는 참으로…, 내가 입혀놨지만 미안한 모습이었다.
“태경아.”
“…으, 응?”
“이 바지는 남겨뒀으면서 앞치마는 낡아서 버렸다는 게 너 스스로도 좀 웃기진 않니….”
인정합니다….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괜히 주방 서랍장을 뒤적거렸다.
“입고 온 건 어쨌어? 탈수기 돌렸어?”
“응, 근데 지금 꼴이 이래서 영…, 오픈까지 얼마나 남았지?”
시계를 보니 십여 분이 남아 있었다. 집에 다녀올 만한 시간은 아니고, 근처에 적당한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있다 해도 이 시간에 열었을 리 만무하다. 어차피 손님도 없겠다, 집에 다녀온다 해도 상관없지만 이람호 같은 성실맨이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괜찮아, 어두워서 잘 안 보여. 손님들도 다 지들 술 먹느라 신경 안 쓸 거야.”
“손님들이 무슨 상관이야.”
“응?”
“니가 보잖아.”
아이고, 세상에나.
원래대로라면 농담으로 받아쳐야 할 타이밍이건만 벙찐 나머지 놓치고 말았다. 입을 헤벌린 채 멍하니 쳐다보는데 이람호가 흠, 헛기침하며 상부장을 열어젖혔다.
“어.”
그리고는 반가운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펼친 모양을 보니 앞치마였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까만 놈은 아니다. 짙은 갈색의 제법 세련된 놈이었다.
“…아.”
기억났다, 김세나가 새로 사둔 거지. 그래서 원래 있던 까만 앞치마를 버렸어. 손뼉을 딱 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람호가 주섬주섬 앞치마를 둘러매었다. 무릎길이의 앞치마가 그의 괴상한 차림을 조금이나마 중화시켜주었다.
“됐어? 만족해?”
“응.”
“…….”
“일하자.”
성큼성큼 주방을 나선 이람호가 씩씩하게 대걸레를 집어 들었다. 낮게 웃어버리고 기꺼이 그 뒤를 따랐다.
웬일인지 제법 손님이 들었다. 어디서 모임이라도 있던 모양이다. 아청이 커뮤니티에 가게 홍보를 꾸준히 해준 턱도 큰 듯했다. 기특한 손님이야. 다음에 또 이람호와의 관계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면 오늘 있던 일을 말해줘야지.
“사장님, 한잔하세요.”
오기영도 있었다. 간만에 보니 저 얼굴도 꽤 반갑다. 기꺼이 의자를 빼고 앉았다.
“사주는 거죠?”
“에이, 그럼요. 내가 응? 사장님한테 돈 내라 할까봐?”
그새 능글해진 거 봐라…. 글래스 가득 따라주는 밸런타인을 거침없이 원샷했다. 멀찍이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아, 역시 사장님이야. 보는 사람이 더 시원하게 드셔.”
“맛 좋네, 어느 집 술인지.”
따갑다, 관자놀이가 따가워. 마음 같아서는 주는 대로 꿀떡꿀떡 넘기고 싶었지만 적당히 거절하고 일어났다. 절대로 이람호의 눈치를 본 건 아니다. 그저 내가 생각하기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마시는 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을 뿐.
“사장님, 오늘 마담은 안 와요?”
이것도 간만에 듣는 호칭이다. 글쎄요, 애매하게 대답하고 돌아섰다. 김세나는 제주도에서 열린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대가로 매일같이 백화점 순회 중이시다. 허구한 날 쇼핑만 하는데 아직도 살 게 남았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요즘 바쁘다던데…. 뭐 조만간 들르지 않을까요? 근데 마담은 갑자기 왜 찾아?”
“왜 찾긴요, 보던 사람 안 보이면 궁금하니까 그러죠.”
오기영이 넉살 좋게 웃었다. 어찌하여 능글함과 넉살은 같은 속도로 자라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마담 나도 못 본 지 좀 돼서…. 내킬 때 들르겠죠, 뭐.”
“어? 저기 오시는데.”
양반은 못 되는구만. 기세 좋게 문을 열어젖힌 김세나가 종이 울리기도 전에 외쳤다.
“야! 여기 사장 누구야! 사장 나오라고 해!”
이미 거나하게 취해 계셨다.
“예, 예. 고객님. 사장 나왔는데요.”
“니가 사장이야? 뭐어야? 요즘 사장들은 다 너처럼 잘생겼어?”
차갑고 고운 손이 얼굴을 덥석 쥐어온다. 뾰족한 손톱 끝이 턱 아래를 파고들었다. 아야, 아야야.
“아니, 어디서 이렇게 마시고 온 거야.”
“오늘 같은 날 안 마시고 배길 수가 있어야지!”
“…오늘이 무슨 날인데.”
“김세나가! 마침내! 이 아이를 손에 넣은 날!”
차라리 사자후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번쩍 들어 올린 김세나의 오른손에 어디서 많이 보던 가방이 들려 있었다.
“헉, 버킨이다!”
외친 것은 아청이었다. 쪼르르 튀어나온 아청이 우와, 우와, 연신 감탄사를 내뱉어가며 김세나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거 진퉁이에요? 진짜로? 리얼?”
“놀랍게도 그러하다! 무려 반년의 웨이팅 끝에 내 손에 들어왔지!”
“…반년? 농담이라고 해주라.”
“나는…! 난 평생도 기다릴 수 있었어!”
김세나가 높이 올렸던 손을 내려 두 손으로 가방을 끌어안았다. 매우 조심스럽고 연극적인 동작이었다. 그래서 버킨이 뭔데…. 해소되지 못한 궁금증은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김세나는 자신 있게 미소 지었다.
“자기야, 나 오늘 기분이 완전 좋으니까….”
“…야, 참아. 참아라.”
“울린다, 골든벨! 오늘 여기 술값 다 내가 쏜다아아아!”
우워어어, 가게가 떠나갈 듯한 환호성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미친 계집애, 기어코 사고를 치네. 꿀밤 한 대 딱 먹이고픈 충동을 간신히 참고 녀석의 팔을 잡아끌었다.
“야, 정신 차려. 너 오늘 양주 몇 병 나갔는지는 아냐.”
“닥쳐, 그게 내 가방보다 비싸? 우리 버킨이보다 비싸냐구.”
“찬물 좀 먹어. 먹고 집에 가라. 응?”
“시끄러! 오늘 아무도 돈 못 내! 오로지 내 카드만이 결제를 통과할 것이다아!”
그래, 알고 있었지. 말려봤자 개뿔 소용도 없으리라는 것을…. 김세나의 소비생활을 두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없지만 반년을 기다려서 입이 떡 벌어지게 비싼 가방을 산 게 왜 골든벨까지 울리면서 축하할 일인지는 도저히 모를 일이었다. 앞으로도 별로 알고 싶지 않다.
“니 맘대로 해라, 하는데…. 술 깨고 나서 왜 안 말렸냐고 내 멱살 잡기만 해봐.”
“에이, 나 멀쩡해. 진짜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래.”
김세나가 배시시 웃었다. 하긴 내가 이 녀석 지갑 사정을 걱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김세나는 화가 데뷔 1년 만에 집안 빚을 다 갚고 엄마에게 용산구 소재 아파트를 선물한 인간이니까.
그런 인물이 이런 구질구질한 가게에 드나드는 것은 당연하지만 온전히 나 때문이다. 온갖 회원제 클럽 입장권을 박스째 갖고 있으면서 곧 죽어도 이 동네에서만 논다. 덕분에 김세나의 화려한 옷이나 가방이나 구두는 어딜 가든 눈에 띄었다. 주위에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근데 자기야, 오늘은 내 눈엣가시가 안 보이네?”
삐까번쩍한 신용카드를 보란 듯이 흔들며 김세나가 말했다.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지금 이람호와 김세나를 만나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안 봐도 훤했다.
“어디 있을까, 우리 국대 탈락생.”
“야, 야. 너 취했는데. 완전 만취한 것 같은데.”
“알바! 알바 어딨냐! 사장이 나와서 손님맞이를 하는데 어? 알바는 어디서 뭐하고 계시냐아!”
큰일이다. 이람호는 지금 내 파란 츄리닝을 입고 있고, 심지어 본인이 그 사실을 꽤나 신경 쓰고 있는데, 세상천지에 무서울 것도 비웃지 못할 것도 없는 김세나와 마주쳤다가는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른다. 그렇게 힘들게 구했다는 명품백을 사정없이 허공에 휘둘러대는 김세나를 열심히 추슬러 일단 자리에 앉혀놓았다.
“술 준다, 준다고. 뭐 가져다줘?”
“여기서 제일 비싼 걸로 가져와!”
“예, 예.”
건성으로 대답하고 주방 눈치를 살폈다. 이 소란을 듣지 못할 리가 없는데, 안주를 준비한다고 주방에 들어간 이람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너도 앉아, 앉아서 한 잔 따라.”
“술도 안 내왔는데요, 손님.”
애타는 내 속을 알 리 없는 김세나는 여전히 마음껏 주정 중이었다. 야아, 술은 말이야아, 자고로 미남이 따라야 맛인 거야.
“예, 마담. 저희 가게 최고의 미남이 곧 따라드릴 겁니다.”
“그게 누군데.”
“저요.”
김세나가 그제야 내 멱살을 놓고 깔깔 웃었다. 더럽고 서러워도 별수 없다. 손님이 갑인 것을.
“아, 맞다.”
뭔가 생각난 듯 웃음을 딱 멈춘 그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너 저번처럼 병에다 포카리 담아오면 죽인다.”
“…예에.”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 손을 비벼 굽실거린 뒤 후다닥 주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선반 위에 곱게 놓여 있는 내 츄리닝 바지였다.
“…….”
원래 입고 온 청바지로 갈아입은 이람호가 한참 프라이팬을 들고 휘젓는 중이었다. 슬금슬금 다가가 건너다보니 꽤 그럴싸한 스크램블드에그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옷 갈아입었어?”
“어, 다 말라서.”
그럴 리가 있냐. 아무리 탈수기 돌렸다지만 이 날씨에 지하에서 청바지가 그새 말랐을 리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 얹어보니 축축하다. 아무리 이 자식이라지만 이러다가 감기…, 까지 생각했을 때 덜컹, 하며 이람호가 크게 들썩였다.
“깜짝이야, 왜 그래? 안 다쳤어?”
마주친 눈이 여러 번 깜빡인다. 간신히 엎어지진 않은 프라이팬을 쥔 채 눈을 크게 뜬 모양이 낯설었다.
“…놀랐네.”
“어?”
“아냐.”
홱 돌아서더니 마저 프라이팬을 뒤집는다. 뭔데. 의아해하던 중 내가 아직도 이람호의 허벅지에 손을 얹고 있었음을 눈치챘다.
“…….”
아…, 환장하겠네. 슬그머니 뺀 손을 뒤통수에 얹고 돌아섰다. 차라리 오늘 진탕 마시고 호텔 끌고 가버릴까. 이 분위기 진짜 못 견디겠다.
“저기…, 김세나 왔는데.”
“어, 알아.”
“…아는구나, 그래. 알겠지. 응, 그렇다고….”
숨이 턱턱 막힌다. 여기 더 있다간 수습할 수 없을 것 같다. 괜히 잔이며 술병들을 만지작거리다 뒷걸음질 치듯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고 돌아설 때까지 이람호는 프라이팬 앞에 선 채 미동조차 없었다.
“야, 사장! 날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는 거야!”
김세나는 여전히 구름 위에 올라 계시다. 이 어둡고 가파른 골목을, 이 시간에, 명품으로 휘감고, 만취한 채 활보하는 저 무방비한 인간……. 하나하나 따지자면 끝도 없지만 결과적으로 무사히 도착했으니 접어두기로 한다. 내 잔소리를 귀담아들을 인간도 아니고.
“예, 예. 갑니다요. 저희 가게에서 제일 비싼 거요.”
“…뭔데, 그게.”
“물이요. 모든 음료 중의 으뜸은 물이죠. 이게 얼마나 비싼데.”
미지근한 생수병을 받아든 김세나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야! 알바 나와!”
“제발 좀.”
“알바! 알바 안 나와? 야! 태권도 사범!”
이람호가 여태까지처럼 못 들은 척 제 일에만 집중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기대가 무색하게도 주방 문이 열리고 프로 웨이터처럼 근사한 자세의 이람호가 나타났다. 반듯하게 든 청록색 접시에는 스크램블드에그가 예쁘게도 담겨 있었다.
“이거 줄 테니 좀 조용히 해.”
달그락, 테이블에 안착하는 멋들어진 접시에 김세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세상에, 저걸 김세나 주려고 만들고 있었단 말인가.
“…근데 왜 하필 계란이야?”
“술 깨는 데 좋다더라고.”
볼일을 끝낸 이람호가 척척 걸어가더니 또 걸레를 집어 들었다. 부지런도 하다. 보이는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 하는 놈이다.
“태경아.”
김세나의 목소리도 한층 누그러졌다. 못 볼 거 봤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 이거 먹어도 될까? 독 탄 거 아닐까?”
“독살당할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냐?”
“난 우리 좀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그랬지.”
이번엔 내가 놀랐다. 누가? 너랑 이람호가?
“그래도 너 잠수탄 동안 쟤랑 나랑 얘기 많이 했다? 술도 마셨어.”
“니 입으로 들어본 얘기 중에 제일 안 믿어진다.”
“아, 쟤랑 술 마시지 마. 술 진짜 세더라. 난 나보다 많이 마시는 인간 처음 봤어.”
그건 진짜 많이 마시는 건데. 쓸데없이 이람호의 간 건강이 걱정스러워졌다.
“아무튼 먹어. 먹고 술 좀 깨라.”
“나 진짜 멀쩡하다니까. 괜히 오버하는 거야.”
알았다고, 먹으라고. 곱게 꾸며놓은 손에 포크를 쥐여주었다. 김세나는 영 미심쩍은 얼굴로 스크램블드에그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
그대로 한참을 우물대는가 싶더니 포크를 딱, 던져버린다.
“죽었어.”
벌떡 일어나 이람호에게 달려드는 김세나를 바라보며 나도 한 입 먹어보았다. 혀에 닿자마자 미친 듯이 짠맛이 올라온다. 눈물이 다 찔끔 날 정도였다.
“야! 날 죽이려고 그랬지!”
“죽이려던 건 아니고, 잘못해서 소금이 너무 들어갔어.”
“그럼 주질 말아야지!”
“다 만든 걸 버리라고?”
대답은 어찌나 잘하는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에 왠지 아까의 긴장이 풀어지는 듯했다.
“그냥 좀 먹어라. 생각해서 만들어줬더니만.”
“생각? 무슨 생각? 게이바에서 안주 처먹다 나트륨 과다섭취로 뒈지면 사고사로 처리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이람호와 눈이 마주쳤다. 흠, 흠. 헛기침을 하고 또 괜히 일어나 서성거렸다.
“세나 누나! 오랜만이에요!”
난리법석이 났을 땐 어디서 뭘했는지 오기영이 뒤늦게 얼굴을 내밀었다. 아예 이람호의 입에 문제의 요리를 처넣을 기세로 길길이 날뛰던 김세나가 금세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어머, 우리 기영이. 오랜만이네. 소금 달걀 먹을래?”
“…아뇨, 괜찮아요. 누나, 저도 술 사주세요.”
“들었지? 사장. 술 내와라, 이번엔 진퉁으로.”
오기영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김세나가 이를 악문 채 명령했다. 모르겠다, 여차하면 가게에서 재우면 되지. 군말 없이 밸런타인 새 병을 땄다.
“그으래서!”
물론 전개는 예상대로다. 새벽 다섯 시, 손님들은 다 돌아간 지 오래인 가게에 하나 덜렁 남은 테이블 아래에는 어느새 온갖 술병이 종류별로 쌓였다. 나도 마시고, 오기영도 마시고, 김세나도 마시고, 더 이상 할 일을 찾지 못한 이람호도 언제부턴가 잔을 받고 있었다.
“내가 막 생각을 해봐써!”
당연하지만 돈 내는 사람은 김세나고, 자연스럽게 자리는 세 명이 물주의 주정을 들어주는 형태가 되었다.
“이람호를 쫓아내자! 그러믄! 내가 막! 속이 션하구!”
“왜 시원해여? 아, 누나가, 사장님 조아해스어?”
이런 자리에서 정신이 멀쩡한 것만큼 저주스러운 일도 없다. 낄낄대는 오기영의 잔을 빼앗아 남은 술을 원샷했다.
“왜냐면 이람호느은!”
은근슬쩍 김세나의 술잔도 빼앗으려 했지만 녀석이 한발 빨랐다. 술잔을 꽉 쥔 채로 검지를 치켜든 김세나가 그대로 삿대질을 시작했다.
“얘는 말이야! 어? 지 좋다는 심태경한테!”
“…야.”
“너어! 정신병원에 가보라느니! 막 그러고!”
오기영의 입을 떡 벌렸다. 이람호의 눈도 그만큼 커졌다.
“진짜요? 너무했다!”
이야, 말이 앞뒤가 잘리니까 이렇게 오해의 소지가 생기는구나. 감탄할 겨를도 없었다. 얼른 김세나의 입을 틀어막고 진정시켰다. 워, 워.
“알바 형이 왜 그랬어요? 알바 형 포비아예요? 근데 지금은 사장님이랑 사귀는 거 아녜요?”
“아니, 야, 그런 거 아니었거든.”
“엥? 사귀는 거 아니라고요?”
이미 수습 가능한 수준을 지났다. 둘은 정신을 놨고 이람호는 어안이 벙벙해 있다. 진심으로 고민했다. 바카디를 까버릴까. 얘네 아예 보내버리고 나면 어떻게든 될 것도 같은데.
“김세나, 좀 진정하고….”
“생각할수록 열받네! 너 왜 오기영이랑 안 사귀는데!”
“…….”
“이 어린애랑 입술도 비비고! 그랬으면! 하루라도 애인해줘야 맞는 거 아니야?”
아이고, 빌어먹을. 이 기집애 기어코 대형사고 치는구나.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차마 이람호의 얼굴을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맞아! 사장님 정말 나쁘다!”
오기영까지 가세해서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제발 좀 닥쳐…. 차라리 울고 싶었다.
* * *
나는 안 가겠다 더 마시겠다 난동 피우는 김세나와 오기영을 각각 다른 택시에 구겨 넣어 보낸 뒤에야 평화가 찾아왔다. 가게 안은 온통 술 냄새에 찌들어 있었다. 환풍기를 있는 대로 켜고 청소를 시작했다. 움직일 때마다 뱃속에 남은 술이 출렁거렸다.
“람호야, 그쪽에 빗자루…,”
부르다 말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람호는 닫힌 주방 문에 기대선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명백히 시위의 뜻이 느껴지는 모양새였지만 모르는 척 스스로 빗자루를 주웠다.
“…….”
피쉬가 없어도 이 정도는 읽을 수 있다.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너 아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어린놈이랑 정말 입술을 비벼댔어? 그러나 무시했다. 묻지도 않은 말에 지레 겁먹고 대답하기 싫었다. 알량한 자존심이지만 그거라도 지키고 싶었다.
“퇴근 안 해?”
그래도 이렇게까지 시비조로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람호의 한쪽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간다.
“할 말 없어?”
평소에는 직설화법 잘만 쓰면서 이럴 때는 꼭 한 바퀴를 돈다. 없는데요, 모르겠는데요. 속으로만 능글대며 바닥을 아무렇게나 쓸었다.
“나한테 할 말 없느냐고.”
“아, 제발 좀.”
물론 오래 견디지는 못했다. 빗자루를 툭 던지고 홱 돌아보았다.
“너야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난 이런 식으로 사람 떠보는 거 제일 싫어한다니까.”
“그래?”
“그래!”
“아까 그 어린놈이랑 입술 비볐다는 게 진짜야?”
그냥 꽁해서 나가버리겠거니 했는데, 내가 이 자식을 너무 우습게 봤군…. 대답을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나는 양심에 손을 얹고 티끌만큼도 이람호에게 쩔쩔맬 이유가 없다. 이람호가 가게에 나타나기 전의 일이고, 그 뒤로는 없었고,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하기가 너무 싫다고.
“진짜야.”
알량한 자존심이나 고집은 자연스레 모든 것을 망쳐놓게 마련이다. 이람호의 두 눈에 선명한 노기가 어렸다.
“왜?”
“왜냐니…, 그냥 술 먹고 잠깐 그런 거야.”
“무슨 소리야. 그게 말이 돼?”
다행히 나는 살면서 수없이 멍청한 실수를 저질러왔고, 그 실수를 최대한 빠르게 수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너 다시 만나기 전 일이야.”
1초라도 빠르게 번복하면 된다.
“그럼 내가 뭐, 니가 10년 만에 나 찾아올 거 미리 알고 수절이라도 했어야 한다는 소리야? 그 말이야, 지금?”
물론 완전히 접기는 어렵다. 이람호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겠지, 아닌 거 아는데.”
“오해한 거야. 나 만나고 나서도 걔랑 그랬다는 건가 하고.”
“…….”
“기분 상하게 해서 미안해.”
물론 쟤 혼자 저렇게 깔끔하고 어른스러운 태도를 취해버리시면 나만 새되는 거지요 네…. 속으로 꿍얼거리다 문득 데자뷰를 느꼈다. 어쩐지 이거, 김세나가 늘 나한테 하던 소리 같은데. 그렇게 너 혼자 쿨하게 반응하면 일일이 안달하는 나는 뭐가 돼?
뭐가 되긴, 일일이 안달하는 사람이 되지…. 숙연해진 채 이미 깨끗해진 바닥을 수도 없이 쓸고 또 쓸었다.
“그럼 나 퇴근할게.”
이람호가 덤덤히 통보하기 전까지는.
“…응?”
“내일 봐.”
“어…, 그래.”
혼자 퇴근하는 거야? 나 안 태워다주고? 벙쪄서 바라보는데 정말이지 산뜻하게 제 짐을 챙겨 가게를 나가버린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리고 혼자 남은 나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 이내 슬쩍 웃어버렸다.
뭐야, 쟤도 빡쳤네.
그러자 참을 수 없을 만큼 뱃속이 간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