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역행
부재중 전화가 끝없이 쏟아졌다. 대부분 김세나였고 간간이 이람호가 있었다.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핸드폰을 꺼놓지도 않았다. 충전기에 연결한 채로 뚫어져라 바라보며 화면이 끊기기만을 기다렸다.
어쩌면 이람호가 내 집에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래 봤자 나를 찾을 수는 없을 터였다. 8년 만에 돌아온 낡은 빌라는 세입자가 나간 지 한참이라 완전히 폐가 꼴이었다.
남에게 팔지 말라는 조건으로 상속된 엄마의 재산은 가게뿐만이 아니었다. 3층 빌라의 끄트머리, 해도 들지 않는 방 한 칸에 거실 하나짜리 방. 세를 줄지언정 팔지는 마, 파는 건 안 돼. 엄마는 마지막까지 내 손을 붙들고 당부했었다.
이깟 게 뭐라고. 오랜만에 다시 보니 흉물이 따로 없다. 문짝이며 창문이 온통 낡아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마지막 세입자가 떠난 게 1년 전이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보일러를 켜도 바닥이 싸늘했다. 곰팡내 나는 이불을 끌어다 쪼그려 앉았다. 아, 계속 비어 있던 집에 갑자기 난방 돌리면 관리비 폭탄 맞는다고 했는데. 좁은 창으로 새카만 바깥을 내다보다 한숨을 쉬었다. 알 게 뭐람, 이제 와서.
쿵, 벽에 옆머리를 박은 채 눈을 감았다.
“……실수.”
하지 않기 위해서 찾아왔다…….
콩, 머리를 한 번 더 박았다. 어설픈 통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기 위한 자극이 필요하다. 블랙을 떠올려 보았다. 새카만 피쉬를 두르고 있던 여장 범죄자, 머리에는 헤어피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여자 옷을 차려입고 화장도 정성스럽게 했지만 하이힐만은 신지 못했던 그놈.
어쩌면 그때도 내가 헛짚었던 건 아닐까? 애먼 사람의 섬세한 마음에 상처를 입혀 장도리를 쥐고 내게 달려들게 만들었다면? 양손으로 이마를 싸쥐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아무리 그래도 멀쩡한 사람은 그런 짓 안 해. 그럴 리 없어…….
나는 틀리지 않았어. 미친 게 아니야. 나는…….
전화벨이 울린다. 들여다보았지만 모르는 번호였다. 김세나나 이람호가 다른 번호로 거는 건가?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고민하다 통화 아이콘을 길게 그었다.
[심 사장! 지금 어디야?]
받자마자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집 앞 편의점 사장님이었다.
“…사장님? 갑자기 무슨 일로…….”
[무슨 일이고 자시고 심 사장 친구가 자네 찾는다고 온 동네 헤집고 다니고 있어. 집에 없다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
목이 뜨끈해진다. 할 말을 찾지 못해 커흠, 헛기침을 내뱉자 귀까지 뜨거워졌다. 얼굴이 불타는 것 같았다.
“아……,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싸웠어? 그래도 얼굴 보고 해결해야지, 이렇게 사람 속을 태우면 어떻게 해]
대체 이게 다 뭐하는 짓이지.
잠수는 타고 싶고 그 와중에 핸드폰은 켜놓고, 전화를 골라 받으면서 이람호의 동향이나 살피다니, 무슨 부모한테 반항하느라 가출해놓고 골목길 배회하는 중학생이냐고.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잠깐 전화 못 받았는데 오해가 있었나봐요…….”
쪽팔려서 눈물이 다 난다.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어 미간을 꼭 쥔 채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사람이 그러는 게……, 어, 왔네. 직접 통화 좀 해, 응?]
중간에 딸랑, 편의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아, 목소리가 멀어진 틈을 타 참고 있던 한숨을 힘껏 내뱉었다.
[태경아]
언제나처럼 차분한 어조였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뭐하는 건데.”
[어디야? 집에도 안 가고 어디 가 있어?]
“…….”
[내 얼굴 보기 싫은 거면 이제 안 찾아올게. 그 말하려고 계속 전화했었어]
그러니까 이 춥고 어두운 날에 집도 아닌 곳에서 홀로 청승 떨고 있지 말라는 소리였다. 듣다가 점점 더 한심해진다. 중학생도 나처럼 찌질한 짓은 안 한다.
“그런 거 아냐……. 잠깐 엄마 집에 와 있었어. 정리할 게 있어서.”
[그게 하필 지금 생겼어?]
“…그래, 하필 지금 생겼네.”
[태경아]
내 이름을 이렇게 불러주는 사람은 세상에 김세나뿐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는 그런 의미가 담긴다. 너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네 이름이 내게 중요하다는 것.
[태경아, 만나서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안 찾아온다며.”
[그래서 허락 맡으려는 거잖아]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피쉬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쯤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안 만나고 싶어.”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잔뜩 웅크렸다. 양호실에서의 일 이후 이람호는 한 번씩 내게 그런 이야기를 꺼냈었다. 야, 아직도 이상한 거 보이냐? 묻거나 무료로 상담이 가능한 청소년 케어센터 전화번호를 주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는 안다. 그건 그때 당시의 이람호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는 걸. 내가, 그때도, 어쩌면.
“람호야.”
이람호에게 나름대로 소중했으리라는 것을.
“너, 나 찾아오면서 했던 얘기 기억하지?”
[그날 했던 얘기가 워낙 많아서……. 어떤 거?]
“옛날에, 내가 귀신 보는 줄 알았다고 한 거.”
[…어]
“귀신 보는 거 아니야. 니 관심 끌어보자고 지어낸 말도 아니고.”
[……]
“내 눈에는 정말로 보였어. 나는…….”
나는 그걸 피쉬라고 불렀어. 어찌할 수 없이 외로운 날이면 무턱대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거리를 휘도는 피쉬의 물결을 바라봤었어.
“한 번도 너한테 거짓말한 적 없었어…….”
사라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불빛이 있는지. 밤에도 꺼지지 않는 가로등 불빛들이 일정한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 아, 피쉬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 눈에 비치는 풍경은 이런 거구나. 이람호도 김세나도 이런 세상을 바라보며 살았겠구나.
[…옛날에는 보였다는 건, 지금은 안 보인다는 소리야?]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가장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단 한 마디였으므로.
[태경아]
이람호가 나를 부른다. 언제나 그리웠던 목소리로.
[내가 말재주가 별로 없어]
“…알아.”
[그래서 지금도 고민이 많이 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서 다 망쳐버릴까봐]
눈을 감았다. 차가운 바닥. 언제나 이곳에서 홀로 잠들었었지. 매일이 외로웠고 하루도 빠짐없이 두려웠어.
[너를 갑자기 떠올렸던 게 아니야]
“…….”
[10년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게 아니야. 항상 생각하고 있었어. 네가 어떻게 지낼지, 뭐하고 살지, 졸업식 날에는……. 내게 왜 그런 건지]
“졸업식……?”
[너 나한테 사귀자고 했었지]
“…어.”
[그래서 그러자고 했더니 갑자기 화내면서 가버렸잖아]
“…….”
[여태 날 놀린 건가 싶었어……. 나는 그랬어]
“…….”
[화도 좀 났어. 내가 인생 실패했다고 이제 볼 일 없다 그건가 하고]
할 말이 없다. 내가 너한테 끌려다닌 게 얼마냐던 이람호의 말이 떠올랐다. 대답하지 못하자 이람호도 잠시 침묵했다.
“…그게 뭐 인생 실패한 거야. 대학 못 간 게 뭐라고…….”
쥐어짜낸 말이 고작 그따위였다. 이람호는 조금 웃었다.
[알아. 그래도 그때는 그렇게 일차원적인 생각밖에 못했어]
“…….”
[그런데 태경아]
이람호가 나더러 정신병원 가보라더라. 그렇게 말했을 때 김세나는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었다. 그 새끼 정말 안 될 새끼네! 때려치워! 뭘 때려치우라는 건지도 모른 채 나는 내가 감당해야 할 온갖 화를 김세나에게 미뤄놓고 홀로 도망쳤다.
[네가 떠오르는 순간이 지나치게 많았어]
“…….”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사실은 내가 너한테 뭔가 크게 잘못했던 게 아닐까…]
“…아냐.”
[순간순간 네가 떠오를 때마다 기억이 났어. 네가 보여주던 모든 게……. 내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어]
“…….”
[그래서 널 찾아왔어……. 이번엔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그럴 수 있었을까. 힘껏 몸을 옹송그렸다. 지나버린 과거를 되짚으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고 인정할 용기가 내게는 있었을까. 그럴 리 없지. 오히려 나는 늘 두려워했다. 행여나 이람호가 나를 찾아와 사과하는 순간이 올까봐. 그렇게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 하나를 위안으로 삼고 사는 내 불행이 희석될까봐.
[태경아]
그래, 이 사실을 알게 될까봐.
[정말 다 늦어버린 거야?]
네가 내게 이토록 아까운 사람이라는 걸.
“아무튼 그 새끼가 개새끼야!”
한 달 만에 만난 김세나는 어딘지 낯설었다. 뭐가 변했지? 분명 뭔가 변했는데. 고민하며 말고기 육회 세 접시와 소주 네 병과 홍합탕 세 그릇을 아작내고 나서야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이마에 뭐 했지!”
“드디어 알아봤구나, 자기야!”
어쩐지 자신 있게 앞머리를 넘겼다 했어. 동그라니 예뻐진 이마를 꼼꼼하게 뜯어보며 박수를 쳐주었다. 이야, 자연스럽게 잘됐네, 끝까지 모를 뻔했네.
“우리 세나, 하루하루 이뻐지는 게 곧 김태희가 되겠는데?”
“뭘 모르시네. 김태희를 워너비로 갈아엎던 시대는 지났어. 대세는 타고난 듯 자연스러운 미모란다.”
“뭐? 너는 태어났을 때부터 예뻤는데 뭐하러 그런 걸 추구해. 이왕 돈 들이는 거 김태희로 다시 태어나는 게 효율이 좋은 거 아냐?”
“쯧쯧, 말이 안 통해. 원래 예뻤던 나니까 오히려 이 방법이 맞는 거라구.”
좌우로 흔드는 검지에 가늘고 반짝이는 반지가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유난히 이쪽 손을 내 눈앞에 들이밀곤 했던 것 같다. 어디, 이것도 신상인가.
“반지는 뭐야? 예쁘네.”
“그치, 그치, 이쁘지. 이거 뭐냐면 이번에 일본 갔다 오면서 산 건데 한정품이라 몇 개 없어서 한 달 전부터 사이즈 확보해달라고 계속 전화하고 여기저기 찌르고 사정도 그런 통사정을…….”
자랑하고 싶었던 말들을 줄줄이 쏟아내는 얼굴이 활짝 핀다. 분홍빛 피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상기된 얼굴이나 반짝이는 눈만 봐도 김세나의 행복감이 전해져왔다.
“약지에 끼려구 샀는데 그새 살 빠졌는지 좀 크더라고. 근데 검지에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그래, 그러네.”
“오, 좋아. 이마 필러에 티파니 반지까지 심태경 미션 올클리어, 난 이제 레퍼토리 끝났어.”
“…….”
“이제 내 미션은 뭐야? 우리 자기가 무슨 연유로 가게도 때려치우고 제주도까지 날 찾아왔는지 물어보면 되나?”
“연유는 뭔……. 그냥 온 거지.”
몇 방울 남지도 않은 소주잔을 보란 듯이 입에 털어 넣었다. 김세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냥 온 거면 섭섭한데. 나 보고 싶어서 온 거 아니야?”
“…으응, 너 보고 싶어서 왔어.”
김세나의 다음 개인전은 제주도에서 열린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갤러리라고 했다. 그녀는 관광단지 안의 호텔을 잡아두고 매일같이 면세점 쇼핑을 즐긴다는 모양이었다.
“그냥 좀…….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응, 뭐?”
“세나야.”
한 달이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난방을 돌려도 추운 방에서 추위를 달래려 맥주를 마시고, 맥주 때문에 배가 부르면 자고, 자고 일어나면 또 맥주를 마시고……. 그렇게 빈 맥주캔으로 거실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나는 무턱대고 집을 나섰다. 무턱대고 택시를 잡고, 무턱대고 김포공항으로 가서, 무턱대고 가장 빠른 제주도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너는 나 의심한 적 없었어?”
“너를? 왜?”
“내 눈에 보이는 거 말이야. 내가 정신병이 있다거나 관심받고 싶어서 거짓말 지어낸다는 생각 한 번도 안 해봤어?”
단번에 뭐라 대답하려던 김세나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쌍꺼풀이 예쁘게 진 커다란 눈이 두어 번 깜빡이더니 순간 사나운 빛을 띤다.
“이람호가 그랬어?”
“…아, 아니.”
“그 새끼가 너한테 또 정신병이 어쩌니 한 거야?”
이 순간 피쉬가 보인다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떠올려 보려 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야, 안 그랬어. 그냥……,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생각을 해?”
낱낱이 말해주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을 기색이었다. 입을 다문 채 소주잔을 채웠다. 술 핑계라도 대지 않고는 못 늘어놓을 말이었다.
취했다고 믿고 싶은 멀쩡한 정신으로 나는 찬찬히 내게 있던 일을 털어놓았다. 피쉬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말은 제외하고. 이람호의 학원 제자가 돈을 훔쳤다는 의심을 받아 경찰서에 가게 된 일, 거기서 그 편의점 사장의 피쉬를 보고 아이가 돈을 훔쳤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일, 그러나 후에 이람호에게서 듣게 된 아이의 말까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내 말을 듣고 있던 김세나가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으이구, 내가 말했었잖아. 나한테 좋은 사람이랑 남한테도 좋은 사람은 다르다고.”
“…어?”
“애한테 그런 짓을 했어도 그 아저씨는 정말 선의였을 수도 있는 거잖아. 사람이 그래. 무식하면 죄를 짓게 돼 있어. 근데 본인 입장에서는 정말 털끝만큼도 지가 잘못한 게 아닌 거야. 그런 사람이면, 그러니까 본인은 정말 애를 생각하는 사람이고 요만큼의 죄의식도 없는 사람이면 애가 느낀 모욕감이랑은 상관없이 그런 좋은 빛을 띨 수도 있지 않겠어?”
“…….”
“야, 너 우리 아빠더러 뭐라 그랬어. 진짜 색깔이 좋다 그랬었지. 나도 우리 아빠 좋은 사람이었던 거 알아. 근데 지금 어떻게 됐냐? 결국 이혼하고 갈라섰잖아. 내가 수술한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나 지지해주고 지켜준다고 했는데 아빠는 노발대발 안 된다고 날뛰었거든. 이유가 뭔지 알아? 그런 수술하면 쟤가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 얼굴 어떻게 보냐고, 절대 안 된다 그랬어.”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김세나가 수술할 때의 이야기를 해주는 건 처음이었다. 이혼하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사정이 있는 것도 몰랐다.
“그게 우리 아빠가 나빠서였을까? 아니야. 아빠는 진심으로 내가 불행해질 거라고 믿었어. 못하게 해야만 아빠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나한테는 상처가 된 거지.”
“…….”
“네가 해준 말이 아니었으면, 네가 우리 아빠더러 색깔 좋다는 소리 안 했으면 이런 생각도 못 했을 거야. 그냥 끔찍하게 원망만 했겠지. 나 그래도 지금은 아빠랑 연락한다? 얼마 전엔 한 번 만나기도 했어. 나더러 예쁘다고 하더라. 아빠가.”
말을 맺으며 김세나가 낄낄 웃었다. 그럴 때면 가끔 옛날의 얼굴이 보였다. 짧은 머리에 남자 교복을 입고 거친 말을 달고 살던 때가. 그때도 김세나는 여자애였다. 딱 이런 여자애.
“…하지만 세나야.”
내가 오랫동안 놓지 못하고 살았던, 내게는 과분한 내 친구.
“만약에 그게 맞으면 어떡하지.”
“그러니까 뭐가?”
“내 정신에 문제가 있고, 내가 보던 건 다 환상이고, 그냥……. 넘겨짚고 끼워 맞춘 게 우연히 맞아떨어졌을 뿐이라면.”
진지한 대화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홍합탕 국물이 이미 차게 식어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은 겨울이고 여기는 야외 포장마차지. 비린 국물을 입에 흘려 넣으며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다. 지나치게 따뜻해서 도저히 내가 살던 겨울 같지가 않았다.
“그러면 뭐…….”
지치지도 않고 나를 맞아준 김세나는 여전히 예쁘고.
“네가 엄-청 섬세하다는 뜻 아니겠어?”
다정하다.
“…섬세하다고?”
“그래.”
“어딜 봐서…….”
“태경아, 내가 그런 생각해본 적이 있거든. 만약에 내 눈에도 그 피쉬라는 게 보인다면 어떨까 하고.”
“어…….”
“사람마다 다른 색깔이 보이고, 그 사람의 감정상태에 따라 또 다르게 보이고……. 그런 게 내 눈에도 보인다면 나는 어떨까. 진짜 많이 고민해봤었단 말이야.”
김세나가 내 잔을 채워주었다. 자, 쭉쭉 마셔. 마시고 쓸데없는 잡상은 다 털어버려.
“그런데 난 모르겠더라.”
“뭐를?”
“속마음이 글자로 써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의 소리가 귀로 들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뭔가 색깔 있는 빛무리가 이리 일렁 저리 일렁, 그런 걸 보고 사람 속내를 어떻게 안단 말이야?”
“…….”
“그런데도 네가 그렇게 정확하게 내 마음을 읽고 확신할 수 있었던 건, 나를 아주 자세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잖아.”
그런가? 잘 모르겠다. 아무 맛이 나지 않는 잔을 홀짝이며 김세나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첫눈에 강렬하게 다가오던, 타오르는 듯한 오렌지빛.
“환상이면 뭐 어때. 찍어 맞춘 거면 어떠냐고. 그게 가능하다는 건 네가 굉장히 관찰력이 좋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거야.”
“…….”
“내가 눈살만 살짝 찌푸려도 너는 내 기분이 왜 틀어졌는지 알려고 노력하고 예상답안을 골라 내밀고 내 기분을 풀어주려 애썼어. 단 한 번도 내 마음 외면하거나 모르는 척한 적 없었어.”
그건 김세나의 착각이다. 나는 몇 번이고 모르는 척했었다. 김세나가 내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빤히 알면서, 혹시나 그 부분을 건드리면 정말로 나를 내버리고 가버릴까 두려워서.
“내가 널 오랫동안 좋아한 건 정말 당연한 거야. 너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여자는 세상에 없어.”
아니야, 날 좋아하는 여자는 이 세상에 너뿐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빚졌다고 생각하거나 죄책감 느낄 필요도 없어.”
“…….”
“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것들에 안주하고, 너를 위안으로 삼았던 건 나도 마찬가지야.”
세나야, 너는 오랫동안 나의 위로였어.
“너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 안식처였어.”
따뜻한 겨울밤, 눈물은 나지 않는다.
“이제 와 내가 바라는 건,”
그러기엔 너무 오랜 시간 웃음을 쌓아온 관계여서.
“네가 행복해지는 것뿐이야.”
엄마를 보내던 날이 떠올랐다.
이제 와서야 생각한다. 나는 꼭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을까.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내 걱정을 하지 않는다 해서,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에 휩싸인 엄마에게 구태여 실망할 이유가 있었을까.
어차피 두 번 다시 못 볼 거라면 마지막까지 거짓으로라도 다정할 수는 없었던 걸까. 엄마가 내게 그랬듯이, 평생 험한 일하며 키운 아들이 죽음 앞에서 당신을 시험하는 말을 던져도, 화를 내는 대신 억지로 꾸며낸 사랑의 말이라도 건넸듯이.
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이라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조금이나마 다정해진 지금의 나라면.
겨울의 제주도는 놀랍도록 황량하다. 어디를 가나 텅 비어 있었다. 이왕 온 김에 관광이나 하라며 김세나가 택시를 대절해주었다.
“어디로 모실까?”
택시기사가 넉살 좋게 물었다. 어디로……. 당연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어디가 좋아요? 저 제주도 10년 만에 와서 잘 몰라요.”
“10년? 언제 왔는데?”
“고등학교 때요. 수학여행으로.”
이람호는 수학여행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말로는 훈련 때문이라고 했지만 나중에 듣기로 수학여행비가 없었다는 듯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애는 게임기 갖고 싶어하면 안 돼? 담담하지만 무게 있던 말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살아난다. 어쩌면 나는 그날 이람호에게 상처를 준 건지도 모른다.
“그럼 뭐……, 수족관 가보실려? 지은 지 몇 년 안 된 건데 엄청 커요. 서울 사람들 오면 다 수족관부터 가더라고. 아, 서울 사람 아닌가? 뭍사람은 다 서울 사람 같아서.”
“아뇨, 서울 사람 맞아요.”
“그렇지? 말투에서 티가 나더라.”
택시가 텅 빈 해안도로를 달린다. 겨울 바다는 잠잠한 회색빛이었다. 원래 여기가 지름길은 아닌데, 바다구경 좀 하시라고 이리로 가는 거야. 이어지는 설명은 직업병인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기꺼이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어나서 바다를 본 일이 손에 꼽는다. 기대했던 만큼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다. 하늘이 흐리다.
이람호는 바다를 많이 봤을까? 수학여행으로는 못 간 제주도를, 아버지가 돌아온 후에 가봤다고 했지. 한 번쯤은 둘이서 바다구경 해봐도 좋았을 텐데. 창밖을 내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수족관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태어나 그렇게 큰 건물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입구에 서서 멍하니 올려다보는데 웬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카드 만드세요, 수족관 입장권 할인되는 카드.”
“……네?”
“40퍼센트 할인돼요, 다른 혜택도 많구…….”
당장 외면하고 자리를 뜨지 않은 탓에 아주머니는 계속해서 말을 붙여왔다.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외 없는 비수기다. 오가는 사람도 몇 없었다.
“무슨 카든데요?”
알량한 선의였다. 아주머니의 얼굴이 활짝 폈다. 결국 끌려가서 연회비까지 붙은 카드를 만들고 나서야 나는 수족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시간을 잘못 맞춰 왔는지 별다른 프로그램도 없는 듯했다. 바다 속처럼 푸른 조명을 쏘아놓은 복도를 따라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갇힌 어항이 붙어 있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열대어를 전시해놓은 큰 수조가 보였다. 알록달록, 여러 가지 색깔을 띤 물고기들은 제한된 공간 안에서 저마다 열심히 헤엄치고 있었다.
“…….”
사멸회유어라고 한대. 해류에 휩쓸려 왔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물고기들.
한 무리쯤 떠내려가 돌아오지 못해도 문제없이 돌아가는 생태계라니. 다행스럽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나는 한참을 열대어 수조 앞에 서 있었다. 내가 거기 있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는 물고기들은 여전히 오가던 방향 그대로 똑같이 헤엄치고 있었다.
순간 답답해졌다.
왔던 길을 되돌아 밖으로 나갔다. 직원이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수족관 밖으로 나오면 바로 바다가 보였다. 이건 너무 이상한 위치야. 이렇게 가까이 바다가 있는데, 왜 이런 데다 건물을 지었을까. 바다가 바로 앞인데.
주저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담배 한 대가 절실했다. 후카를 가져올 걸 그랬어. 이 풍경을 바라보며 머금은 향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텐데.
이마를 감싸 쥐었다. 오래 참고 있던 눈물이 그제야 흐른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찾아왔어.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돌아갈 힘이 생길 때까지만 머물게 해주면 안 될까? 담담한 눈으로 읊조리던 애원들이 그제야 가슴을 친다. 흐윽, 차오른 숨을 뱉고 고개를 숙였다. 마음이 칼로 베이는 듯 아렸다.
곧 해가 저물 것 같았다. 유난히 빠른 노을이었다. 눈을 감고 찬바람을 들이켰다.
자박,
발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등 뒤에서, 명백히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쿵, 쿵, 맥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얼른 눈물을 훔쳐내고 쇄골 아래를 꾹 눌렀다.
아니야, 여기에 있을 리 없어. 하지만 믿고 싶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졌으면 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마주할 용기가 생길 것 같아서.
“윽…….”
힘껏 이를 악물었다. 만약에 이람호라면, 그렇게 환상처럼 다시 한 번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러면 나는…….
“…….”
나는.
“손님, 괜찮아요?”
돌아본 자리에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택시기사가 두 손을 무릎에 짚은 채 서 있었다.
“속이 안 좋으신가? 숙소로 갈까요?”
해는 완전히 저물어간다.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찬바람, 무엇도 섞여 있지 않다. 피쉬는 나를 떠났고, 겨울은 지나가고, 돌이킬 수 없는 많은 것들은 이제 가슴에 묻혀 사라져 갈 것이다.
“어이구, 이걸 어쩌나. 어떻게 뭐……. 봉지 같은 거 얻어올까?”
판타지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기에.
“손님?”
내게 남은 것은 오로지 이 두 손뿐이다.
“…공항.”
“예?”
“공항으로 가주세요.”
벌떡 일어나 주차장을 향해 뛰었다. 어어, 손님!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눈은 이제 남과 다른 것을 비추지 않는다. 무엇 하나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빨리요, 공항으로 가주세요. 비행기 오늘 타야 해요.”
놓치지 말고 잡아야 한다. 지금 내 곁을 스쳐 가는 한 줄기 확신을.
저녁 비행기를 아슬아슬하게 놓치고 밤 비행기 표를 끊었다. 라운지에 멍하니 앉아 활주로를 보고 있자니 이게 다 뭔가 싶었다. 손에 쥔 티켓이 낯설고, 오늘 만든 신용카드에 쌓인 포인트가 우습다.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 싶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입에 물었다.
김세나에게 연락해야 하나. 급히 주머니를 뒤졌지만 핸드폰이 없었다. 김세나의 숙소에 놓고 나온 것 같았다. 고민하다 그만두고 몸을 늘어뜨렸다. 반짝이는 비행기 불빛이 하나둘씩 공중으로 떠올라 유성처럼 흐른다.
제주도는 텅 빈 것 같더니, 비행기 좌석은 제법 꽉 차 있었다. 운 좋게 하나 남아 있던 창가 자리에 앉아 10년 전의 수학여행을 떠올렸다. 그때도 창가 자리를 차지했었다. 아마 내가 비행기를 처음 타본다는 말에 김세나가 양보해줬던 것 같다. 창밖으로 깔리는 구름이 금방이라도 밟고 설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맨몸으로 탔으니 내릴 때도 맨몸이었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을 지나쳐 출구로 달렸다. 택시, 손을 흔들려는데 문득 시야에 지하철 입구가 들어왔다.
“…….”
서울 들어가는 길이 막힐까. 지하철을 타본 게 언제더라. 망설임은 길지 않았고 나는 또다시 달렸다. 서울은 여전히 춥고, 수족관 앞에서 끊은 카드는 고맙게도 교통카드 기능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가는 사람 없이 휑한 지하철 플랫폼에 서서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지하철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지금의 이람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어디에 사는지, 학원 위치는 어딘지, 어떤 모습으로 일하는지, 어떤 목소리를 내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텅 빈 지하철에 홀로 앉았다. 길쭉한 창으로 어두운 터널이 지나간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열대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누구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 산란지로 돌아가기 위해 반쪽짜리 지느러미로 힘껏 헤엄치는.
핸드폰은 없어도 된다. 이람호의 전화번호는 처음 그가 나를 찾아온 그날부터 외우고 있었으니까. 지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뇌리에서 떠난 적 없는 생년월일처럼.
되돌아간 자리에 있는 것이 내가 알던 이람호가 아니어도 좋다. 어떤 기막힌 우연도 드라마틱한 운명도 필요 없다. 지금 이 순간 내 손에 쥔 시간, 이대로 넘겨버리면 또 언젠가 후회로 돌아올 하루를 돌이키기 위해 물살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는 사실이 언젠가 내게 가장 큰 위안이 되어줄 것이다.
눈을 감았다. 쓸려나가는 듯했다. 목덜미가 간지럽다. 아가미가 돋은 걸까. 누가 볼세라 두 손으로 가린 채 눈물을 삼켰다. 이 물결의 끝에 이람호가 서 있을 것을, 난처한 듯 미소 지으며 평온의 말을 건넬 것을 믿는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태어났으나, 돌고 돌아 이 물길의 끝에 닿기 위해 살아온 것이다.
다음 역은 이 열차의 종착역인 서울역, 서울역입니다……. 흐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열차 밖으로 내디딘 발끝에서부터 찌릿한 통증이 올랐다. 어디선가 이람호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기를 마음 깊이 빌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