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이별 (5/10)

5. 이별

“…니가 한 짓이냐?”

전화기 너머 김세나가 숨이 넘어가도록 깔깔대고 웃었다.

[눈치 빠르다, 자기.]

“뭔 소릴 한 거야? 이람호는 어딜 가고 남자 김세나가 저기 들어앉았어?”

[자기가 알던 이람호는 이미 없어. 내가 우주인한테 팔아치웠다!]

이 자식 취했구먼. 술 냄새가 전화선을 타고 건너오는 것 같다. 핸드폰을 얼굴에서 조금 떼어 화면을 노려보다 다시 귀에 갖다 대었다.

“아니, 뭘 어떻게 한 건데. 그 이전에 진짜 너 때문이야?”

[별말 안 했어. 그냥 너한테 잘 보이고 싶으면 니 비위 열심히 맞추라고 했지]

“…….”

[지금 누가 갑이고 을인지 생각 좀 하라 그랬어. 니가 언제까지 심태경한테 갑질하던 그 잘난 이람호일 것 같냐고]

“갑질은 무슨…….”

[갑질이 별거야? 지 처지가 좀 낫다고 사람 개무시하면 그게 갑질이지. 그 새낀 정신 좀 차려야 돼]

말을 마친 김세나가 또 깔깔 웃었다.

[걔 얼마나 웃겼는지 알아? 어제 카메라 설치하는데 슬금슬금 와갖고는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이런 건 돈이 얼마쯤 하냐고]

“…왜?”

[알 바야? 일부러 좀 뻥튀기해서 알려줬더니 한숨을 푹 쉬잖아. 왜 그러냐고 했더니 니 방에도 하나 달아놔야 될 거 같아서 물어봤대]

“…….”

[난 그 새끼 그렇게 나사 빠진 놈인 거 10년 만에 처음 알았네]

나도 처음 알았다. 방에다 카메라라니, 완전 미친놈 아녀. 내 사생활은 어쩌고?

[뭐 음침한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고 너 쓰러지고 그런 거 걱정돼서 그러는 거 같더라. 그래도 조심해. 범상치 않은 놈이야]

“…그러게.”

[아, 너무 웃긴다. 난 걔가 날 이렇게 웃길지 몰랐다]

통화로는 말의 이면을 읽을 수가 없다. 보이는 게 없으니까. 그래도 억지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세나야, 나 사실은…….”

[이제 끊어, 나 바쁘다니까. 자기가 날 사랑하는 건 알겠는데 이쯤이면 집착이야]

“…잠깐도 안 돼?”

[안 돼. 거짓말 아니고 정말 바빠. 어제부터 밥도 못 먹고 밤샘 중이야]

“뭐? 너 그 와중에 가게 들렀던 거야? 이거 정말 못 쓰겠…….”

[끊습니다, 김세나는 슈퍼스타라 바빠요, 빠이-]

전화가 정말로 툭 끊겼다. 어이가 없어 멍하니 보다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일 끝나는 대로 뭐라도 싸들고 위문 가야겠구먼. 작업에 들어간 김세나는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발휘한다. 곡기도 끊고 며칠을 내리 캔버스에 매달려 있다가 빈혈로 쓰러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통화 다 했어?”

어느새 다가온 이람호가 주문지를 내밀었다. 양주 글라스 주문이 종류별로 들어와 있었다. 슬쩍 건너다보자 명품 정장을 쫙 빼입은 남자 세 명이 가운데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오, 쟤네 돈 잘 쓰는 애들인데. 오늘 적자는 쟤네가 다 메워주겠다.”

“서비스 좀 내갈까?”

“서비스? 그럴 만한 게 있나?”

“김세나 씨가 과자나 포 같은 것도 한 박스씩 사다두고 갔는데. 저기 조리대 밑에.”

“…….”

얼른 조리대 아래 서랍을 열어보니 과연 그 말대로였다. 이쯤 되니 불안해진다. 내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을 알아챈 이람호가 아예 주방 안으로 들어왔다.

“왜 그래?”

“…너 김세나한테 뭐 다른 얘기 들은 거 없어?”

“무슨 얘기?”

“이제 가게 안 올 거라든가, 그런…….”

무슨 원양어선 타러 가는 가장이 애들한테 선물꾸러미 안겨주는 것도 아니고 이게 다 뭐람. 인상을 찌푸린 채 돌아보자 이람호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런 말은 없었는데.”

“…….”

“왜, 이제 안 오겠대?”

“안 올지도 몰라…….”

주방 바닥에 털퍽 주저앉았다. 이람호도 내 옆에 쭈그려 앉았다. 고개를 부드럽게 기울인 채 시선을 맞춰온다. 뭐가 문제야? 묻듯이.

“나 보기 싫어서?”

그리고 쉽게 내뱉는 정답. 아니, 정답은 아니지.

“아니…….”

“그럼?”

“내가 걔를 안 받아줘서.”

잠시 침묵이 흐른다. 술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지만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이람호가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 병과 글라스를 꺼내 늘어놓기 시작했다.

“옛날에도 나 되게 싫어했지, 그 사람.”

“…….”

“그때부턴가?”

야구공만 한 얼음 위로 술병을 기울이는 모양새가 프로 못지않았다. 어쩜 저렇게 뭘 해도 태가 날까. 모은 무릎에 턱을 괸 채 시름을 잊어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나 완전히 굴러온 돌이네.”

병 주둥이를 훔쳐내며 이람호가 씩 웃었다.

“너는 굴러온 돌 정도가 아니라 간첩이야, 간첩.”

“간첩은 너무하다.”

“그래, 너무하지. 죄 지은 것도 없는데.”

“…….”

“아, 그건 온더락으로 하면 안 돼.”

태가 난다 해봐야 아마추어다. 놈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새 잔에 기울였다. 내가 하는 모양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이람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

동시에 부우우, 진동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바지 뒷주머니를 짚었지만 내 핸드폰은 잠잠했다. 그런 나를 보고만 있던 이람호도 제 뒷주머니를 짚었다. 끄집어낸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화면을 바라보는 이람호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잠깐 받을게, 학생이라서.”

“…어.”

고개를 끄덕이고 시계를 보았다. 새벽 한 시를 향해가는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에 학생 전화라니,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밀려들었지만 이람호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글라스 가득 찬 쟁반을 내버려둔 채.

무거운 술잔들을 조심조심 서빙하고 슬쩍 바깥을 살폈다. 이람호는 가게 문 옆에 마련해놓은 흡연실에 들어가 있었다. 담배 한 대를 빼문 채 통화를 이어가는 표정이 자못 심각해 보였다. 피쉬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태경아.”

전화를 끊은 놈이 다소 다급한 몸짓으로 돌아왔다. 궁금함을 참고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이.

“미안한데, 한 시간만 나갔다 와도 될까.”

“무슨 일인데 그래? 급한 일이면 그냥 일찍 퇴근해.”

“아니야. 다녀올게. 할머니랑 둘이 사는 앤데 뭐 이상한 시비에 휘말려서 경찰서에 가 있다고 하네.”

“…응? 이 시간에?”

“그냥 보호자 확인만 받으면 된다고 하는데 할머니가 몸이 불편하셔서 경찰서까지 못 가시거든. 멀지 않으니까 빨리 다녀올게.”

“…아니, 아냐. 안 와도 되니까 가봐. 어차피 손님도 얼마 없고 혼자여도 충분해.”

어차피 늘 혼자서 하던 일이다. 정말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래도 이람호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색이었다.

“괜찮다니까. 가도 돼.”

“…아냐, 갔다가 올게.”

“글쎄 괜찮다는데 자꾸…….”

“올게.”

단호하게 끊어 말한 이람호가 코트를 들고 나섰다. 야, 입고 나가, 춥다니까! 계단을 훌쩍 오르는 등에 대고 외쳤지만 허사였다. 이람호는 순식간에 날듯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잠깐 열린 문 사이로 스며든 찬바람뿐이었다.

“…거 날씨 더럽게 춥네.”

훌쩍, 코를 들이켜며 투덜거렸다. 손님은 여전히 더 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장님, 저희 때문에 퇴근 못 하고 계시는 거 아니에요?”

웹툰을 한참 집중해서 보다 말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 한 테이블, 오늘 하루 매출만 백만 원을 찍게 만들어준 양주팀의 리더가 카운터로 다가와 있었다. 반사적으로 미소부터 지었다. 어휴, 고마우신 우리 고객님들.

“아뇨, 텅 빈 가게 지켜주시면 저는 고맙죠.”

“담은 것만 비우고 갈게요. 여기 술은 믿을 만해서 맘 잡고 오면 꼭 이렇게 되네요.”

음식팔이가 음식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말이기도 하고 나의 말이기도 했다. 술을 아끼고 사랑하며 신념을 지켜온 덕에 내 가게는 게이뿐만 아니라 양주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제법 유명했다.

“근데 사장님 애인은 어디 갔어요?”

리더가 슬쩍 미소를 띠고 물었다. 무심코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래, 차라리 내 애인이라고 알게 두자, 그게 낫겠다. 근데 그건 차치하고…….

“…그러게요, 온다는 시간이 지났는데 그대로 퇴근했나.”

“와, 애인이라고 너무 봐주시는 거 아니에요? 직원이 그래도 되나.”

“걘 그래도 돼요. 바닥 색깔 달라진 거 보이시죠?”

하얗게 반짝이는 시멘트 바닥을 가리키자 리더가 낮게 웃었다.

“아쉽네, 진짜 애인이에요?”

“…뭐, 그냥…….”

“그 친구 보러 오는 사람 많았을 텐데.”

그건 나도 알지. 요즘 들어 올라오는 가게 관련 글의 반수 이상이 이람호 이야기니까. 어쩔 수 없이 눈에 띈다. 모두가 나와 같은 것을 보진 못해도, 이람호가 어딘가 특별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그게 아우라라는 걸까. 남들은 어렴풋이 느끼기만 하는 것을 나는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그 정도의 차이일까. 곰곰이 생각하는데 리더가 카드를 내밀었다.

“일단 계산부터 해주세요. 사장님 아프셨다는데 저희가 너무 붙잡아뒀네.”

“아, 감사합니다.”

마음에 흡족한 금액을 결제하고 영수증과 카드를 돌려주었다. 깍듯이 인사해 배웅하고 글라스가 가득 쌓인 테이블을 치우고 설거지까지 끝냈는데도 이람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야 내가 그냥 퇴근하라고 말했지만, 꼭 오겠다더니 연락도 없이 웬일이람.

고민하다 가게 정리를 마저 끝내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꽤 길어지도록 이람호는 받지 않았다. 얘기가 길어지나? 아니면 사고라도 난 걸까. 초조한 마음으로 손톱을 뜯는데 달칵, 통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급한 마음에 달려들듯 물었다.

[어, 태경아]

이람호는 멀쩡한 목소리였다. 후우, 한숨을 쉬고 액정화면을 한 번 보았다. 이람호. 선명한 세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연락이 없길래 전화해봤어. 그쪽 일이 아직 안 끝났어?”

[아, 그게……, 잠깐만]

말이 끊기고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양해를 구하는 말도 멀리서 흘러들었다. 자리를 옮기는 모양이었다.

[응, 아직 경찰서야]

“…어, 무슨 일 있어?”

[그게 사정이 좀 내 생각보다 복잡해서……]

말에 난처한 기색이 묻어난다. 전화를 다른 쪽 귀에 대고 열쇠를 챙겼다.

“왜 그러는데? 몇 시간을 끌고 있을 만큼 큰 문제야? 별거 아닌 거 같다고 했잖아.”

[얘기가 좀 길어. 내일 설명할 테니까 너는 우선 집에 들어가. 미리 연락 못 해서 미안해]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난 걱정이.”

돼서……, 뒷말을 머금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이람호가 조금 웃은 것 같았다.

[…그게 애가 밤에 편의점 일을 하는데, 편의점 주인이 돈이 안 맞는다고……. 애가 훔친 거 아니냐고 신고를 한 건데]

“…….”

퍼뜩 얼마 전의 편의점 사건이 머리를 스쳐 지난다. 나도 모르게 열쇠를 꽉 쥐었다.

[애는 아니라고, 억울하다고 하고 점주는 애가 한 게 확실하다고 하고……. 근데 이렇다 할 증거는 없어서 얘기가 길어지고 있어]

“…어딘데?”

[어?]

“어디냐고, 내가 갈게.”

혹시, 설마, 그렇게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이 초조해졌다. 여길 온다고? 왜? 이람호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일단 주소를 알려주었다. 나는 깊이 생각할 것 없이 콜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서에 도착해 이람호를 찾자마자 튀어나온 편의점 주인은, 당연하게도 우리 집 앞 편의점 사장님이 아니었다. 그럼 그렇지, 애초에 이 지역도 아니고, 이런 우연이 있을 리도 없고.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그 생각을 못 하고 달려온 스스로가 한심해서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당신은 또 누구야? 이번엔 학교 선생이야?”

점주가 다짜고짜 삿대질을 해왔다. 가볍게 무시하고 이람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나뭇가지처럼 바짝 마른 남자애 하나가 이람호 옆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열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저런 애가 새벽 편의점 알바를 뛴다고? 의아함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학원 선생이며 학교 선생이라는 작자들이 뭘 할 수 있다고 일도 없이 북적거려? 애 부모를 불러오라니까!”

“부모님 죽었다니까요.”

점주의 울분 섞인 말에 아이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동시에 이람호의 손날이 녀석이 뒷목에 내리꽂혔다.

“조용하랬지.”

“아, 사범님은 왜 자꾸 나만…….”

살도 없는 얼굴이 부루퉁 부풀어 오른다. 쯧쯧, 혀를 차고 우선 점주를 진정시켰다.

“사장님, 이러지 마시고 차근차근 말씀하시죠. 애는 안 훔쳤다고 하잖습니까.”

“안 훔치긴! 저 자식이 틀림없다니까! 너 이 새끼 돈 훔쳐간 게 니가 아니면 그거 뭐야, 그 이상한 게임기! 그건 어디서 났어!”

“게임기야 알바한 돈으로 샀겠죠, 그게 아니라 해도…….”

조곤조곤 반박해보려는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무심코 돌아봤을 때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진녹색 피쉬였다. 피쉬는 아이의 양쪽 눈에서부터 흘러나와 부채꼴 모양으로 서 안을 깊숙이 돌고 있었다.

“…….”

살피고 있다. 눈치를 본다. 방금 그 말에 의표를 찔린 듯이. 나도 모르게 녀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곧바로 시선을 피해버렸다.

“들어보라고요, 선생. 원래 새벽타임은 아침 여섯 시까지야. 원래는 저렇게 어린애도 못 쓰게 돼 있다고. 근데 어린 게 할머니랑 사는데 돈은 필요하고 알바할 시간은 없다고 하도 사정사정을 해서, 학원 끝나고 여덟 시까지 오면 내가 저녁 먹여줄 테니 열두 시까지만 일해라, 시급은 대학생 형들이랑 똑같이 주겠다, 그렇게 말하고 쟤를 알바를 시켜줬다고요, 내가. 예?”

설명할 타이밍을 놓친 사이 점주는 이미 나를 녀석의 학교 선생님으로 확정지은 듯했다. 그래, 생각해보니 이런 경우 제일 먼저 와야 하는 것은 첫째가 부모요 둘째가 담임이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왜 안 하던 짓을 해가지고.

“다 썩어빠진 삼각김밥 몇 개 던져주고 저녁은 무슨…….”

“박정우.”

툴툴대는 아이를 향해 이람호가 낮게 엄포를 놓았다. 박정우라 불린 오늘의 문제아는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 와중에 이람호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저 새끼 말하는 싸가지 좀 봐,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니까! 내가 그런 은혜를 베풀었는데 어느 날부터 포스기 돈이 야금야금 비더라 이거예요. 처음엔 그냥 넘어갔지, 끽해야 천 원, 이천 원 이랬으니까. 근데 지난주부터는 하루에 만 원씩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이건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오늘 CCTV를 돌려봤는데 뭐가 찍혀 있었는지 알아요? 저 새끼가 카메라 렌즈에다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거야!”

“…스티커요?”

“그래, 딱 일 끝나기 십 분 전부터 온 가게 안의 카메라 렌즈마다 스티커를 붙여놨어요. 그러니 카메라에는 찍힌 게 없고, 딱 오 분 지나서 그 스티커 다 떼고 퇴근하더라 이겁니다. 그럼 그사이에 쟤가 뭘 했겠어요? 카메라 가려놓고 돈 빼간 거다, 내가 그렇게 확신한 게 이상해요?”

전혀 이상하지 않지. 오히려 신중하다 못해 멍청해 보인다. 돈이 빈 지가 언젠데 CCTV 볼 생각을 이제야 했다니.

“난 정말 끝까지 뭐 착오가 있었으려니 했어요. 애가 계산 좀 서투를 수도 있고, 그러다 찔끔찔끔 로스나는 것까지 애한테 따질 생각 없었다고요. 근데 이게 뭐냐고!”

그리하여 애 뒷덜미를 잡아끌고 경찰서에 오긴 했는데, 심증은 더없이 확실하지만 정작 중요한 ‘돈을 빼가는 장면’이 찍힌 것은 아니고 애는 죽어도 훔친 적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이 시간까지 실랑이가 안 끝났다는 소리였다. 하아, 깊은 한숨을 쉬고 박정우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도통 내 쪽을 보려 하지 않았다.

“스티커는 왜 붙여놨는데?”

“뭔 상관인데요. 그보다 누구신데요?”

“…….”

그걸 굳이 짚으시니 할 말이 없다. 입을 다물어버린 나 대신 이람호의 손날이 또 한 번 녀석의 뒷목으로 날아들었다.

“어른한테 말 그따위로 하지 말랬지.”

“어른은 저한테 이런 누명 씌워도 돼요? 사범님은 아까부터 왜 나만 갖고 그래요!”

아니 그러니까 카메라 렌즈에 스티커를 왜 붙였냐고. 그것만 물어보면 할 말이 없을 텐데 이람호는 잠잠했다. 대신 점주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너 인마 내가 다 알아봤어! 니가 쪼물락대고 다니는 그 게임기가 30만 원짜리라며! 너 이 새끼 만 원이 없어서 급식 굶고 다닌다던 새끼가 그런 걸 어디서 났냐고!”

“선물 받았다니까요!”

“그러니까 그 선물 누가 줬느냐고, 내가 확인해봐야겠다니까!”

애초에 끝이 안 날 논쟁이었다. 경찰도 이제 지친 듯 보였다.

“사장님, 어쩌실래요. 조서 쓰실래요?”

“뭐요?”

“애가 죽어도 안 했다는데 억울하시면 법대로 가셔야죠. 저런 놈들은 소년원 밥을 먹어봐야 정신 차려요.”

순간 눈이 따끔거렸다. 먼지가 들어간 것 같았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그의 말에 집중하려 했지만 머리가 어지러워 자꾸 끝말이 뭉개져 들렸다. 감기 기운이 아직 안 떨어졌나, 괜히 이런 데까지 왔나…….

“요즘 애들 얼마나 영악한데요. 다 계산하고 저지른 짓이에요. 물증 안 나오면 기소 힘들고, 미성년자니까 처벌 안 받을 거라 생각해서 뻗대는 거예요. 털면 다 나오게 돼 있어요. 사건으로 넘기실 거면 그렇게 하시죠.”

겁먹은 피쉬의 요란한 움직임이 보이는 듯하다. 아픈 눈을 찌푸린 채 슬쩍 녀석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마르고 날카로운 얼굴, 눈 밑에 깊게 드리운 검은 그림자까지 합해져 얼굴만 보면 제 나이보다 훨씬 많게도 보인다. 세상 풍파 다 안다는 듯 지친 얼굴, 얼굴…….

“…….”

얼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이상한 위화감이 든다. 그림자 진 얼굴이 유난히 강조되어 보이는 것은, 그래……, 본래 그 주위를 맴돌고 있던 피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안개 갠 바다에 떠오른 낡은 돛단배처럼.

이람호를 보았다. 그의 푸른 피쉬도 보이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 평안을 가져다주던 물결이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피쉬가 보이지 않는 일은 종종 있었다. 보이는 사람도 있고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고, 잘 보이던 사람이 흐려지기도 하고 안 그러던 사람이 어느 날 선명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방금 전까지 선명하던 피쉬가 한순간 깨끗하게 사라진 것은 처음이었다.

“…태경아?”

목소리가 멀게 들린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너무 낯설어서 내가 아는 이람호 같지가 않았다.

“왜 그래, 어지러워?”

피쉬가 없는 사람은 두렵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눈을 꽉 감았다 다시 떴다.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 것만 같았다.

“심태경.”

차오르는 공포를 눌러 내리는 시야에.

“괜찮아?”

푸른 피쉬가 흘러들어온다.

“…….”

숨을 고르고 올려다보았다. 이람호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푸르고 찬연한 빛무리를 두른 채. 입에 머금고 있던 숨을 천천히 뱉어내었다. 뒷목에 뭉쳐 있던 피가 다시 전신으로 흐르는 듯했다.

“아…, 아니야.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아서.”

뭐라 말하려던 이람호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점주도 경찰관도 아이도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이람호가 내게로 온 탓이었다.

“…그래서, 사장님. 어쩌실래요?”

자연스럽게 시선을 거둔 경찰이 점주에게 물었다. 그는 경찰과 아이를 번갈아 보더니 에휴,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이람호가 집까지 태워다주겠다는 것을 부득불 거부했다. 곧 첫차가 다닐 테니 그걸 타고 돌아가겠다는 거였다. 이람호는 난처한 눈치였고 나는 녀석의 속내를 눈치챘다.

“내가 있어서 불편한가보네.”

녀석에게 들리지 않게 소곤거리자 이람호가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뭐?”

“나 택시 잡아서 타고 갈게, 애 데려다주고 너도 들어가.”

점주는 결국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돌아갔다. 애초에 반성하며 잘못을 빌면 없던 일로 할 생각이었다며 마지막까지 역정을 냈다. 그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진실로 측은지심을 가진 어른이었다.

“박정우.”

이람호가 아이를 불렀다. 혼자 집에 가겠다, 따라오지 말라 버틸 때는 언제고 녀석은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힐끔힐끔 이람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내심 이람호가 끝까지 붙잡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방해가 되는 나를 보내놓고서.

“저기 있네, 버스 정류장.”

그러나 이람호는 참으로 깔끔하게 길 건너편 정류장을 가리켰다. 아이의 얼굴에 배신감이 떠오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성큼성큼 제 차로 향했다.

“애가 영악하네.”

조수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이람호는 대답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경찰서 정문을 빠져나가 도로에 오를 때까지 아이는 말뚝처럼 서서 이람호를 지켜보고 있었다.

“모르잖아, 사실이 어떤지는.”

백미러를 힐끗거리며 이람호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첫차 다닐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한겨울인지라 사위가 캄캄했다.

“모른다니, 답이 완벽하게 나와 있잖아. 돈 빼낼 생각이 아니면 카메라에 그런 짓을 왜 하는데.”

“말 그대로 모르지. 본인이 말을 안 하는데.”

허? 나도 모르게 그의 옆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러자 또 한 번 눈이 따끔거렸다. 이람호의 주위를 맴돌던 빛무리가 짧게 일렁였다.

“…….”

대체 왜 이러지? 아파 오는 미간을 누른 채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왜 갑자기 안 보이는 거야? 초조함에 침이 바짝바짝 마른다.

“…말을 안 하면 몰라? 그 사장님 얘기 못 들었어? 애가 카메라에 수작질을 하고 나서부터 돈이 없어졌다잖아.”

“…….”

“뻔하지, 게임긴지 뭔지 사고 싶어서 밥 굶는 불쌍한 애인 양 사정사정 알바 따냈는데 생각보다 시급은 짜고 돈은 안 모이고, 포스기에 현금은 넘치니까 한 장씩 빼서도 모르겠거니 하고…….”

“태경아, 너무 함부로 넘겨짚는 것 같다.”

“…….”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네 예측이 사실인 양 확정지어서 말하는 거야?”

신호를 받은 차가 멈춰 서고 이람호가 나를 돌아보았다. 평온한 눈동자에는 아무 말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무 말도.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피쉬가 보인다면 알았을 텐데, 이게 나를 힐난하기 위한 말인지 정말 궁금해서 묻는 말인지.

“난 애초에 게임기 이야기가 왜 계속 나오는지도 모르겠어. 할머니랑 둘이서 살고, 기초생활수급자에, 할머니가 폐지 주운 돈으로 태권도 학원 다니는 애는 게임기 하나 갖고 싶어하면 안 되는 거야?”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네가 그렇게 말했다는 게 아니라…….”

“애는 불쌍하고, 편의점 사장님은 안 불쌍해? 기껏 불쌍한 애 도와주겠다고 선심 썼는데 저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도?”

“태경아.”

“애들은 다 착한 것 같아? 순수하고 꿍꿍이도 없을 것 같아? 넌 학교 다닐 때 기억도 안 나? 아, 넌 모르겠다. 다들 너한테는 설설 기었으니까.”

말이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왔다.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초조하고 불안하다. 이미 속이 답답해서 아무것도 삼켜지지 않았다.

숨 막히는 침묵이 흐른다. 이람호가 한숨을 내쉰 것 같았다. 짧은 숨소리가 들렸다.

“애를 때렸대.”

“…….”

“심각한 건 아니……, 아니, 손찌검 자체가 심각하지. 평소에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정강이를 툭툭 차고, 머리 한 대씩 때리고 그랬대.”

“…누가, 아까 그 사장님이?”

“말끝마다 그러더래. 나한테 밥 빌어먹는 새끼가 눈빛이 안 좋다, 쓸데없이 말이 많다, 아무튼 머리 검은 짐승은 밥 먹여준 은혜를 모른다…….”

“…….”

“폭력의 강도가 심했던 건 아니야. 무슨 친근감의 표현이었니 어쩌니 하는데……. 애 입장에서는 충분히 모욕적이었겠지.”

그럴 리 없어. 원래대로였다면 단호하게 말했을 것이다. 그 사람 내가 보기엔 그런 사람 아니야. 애가 거짓말하는 거야. 내가 본 게 있으니까. 내 눈에는 전혀 다른 진실이 보였으니까.

“…….”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지금 내 눈에는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 고장이 났다. 잘못 보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이, 정우를 생각해서 그냥 묻어두겠다고 한 것 같아?”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지만 이람호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도로는 한산했지만 교통량이 전혀 없진 않았기에 나는 조금 초조해졌다.

“정우가 아까 다 얘기했어. 폐기할 삼각김밥이나 주면서 내 머리도 때리고 정강이도 걷어차지 않았느냐고. 그랬더니 뭐 아들 같아서 그랬다, 정신 좀 차리라고 그런 거다……. 그러다 저렇게 대충 끝난 거야. 저도 켕길 일이 있으니까 사건으로 만드는 건 좀 찜찜했던 거겠지.”

“…너도 아주 확정지어서 말하네, 뭐.”

“응, 그러네.”

산뜻하게 인정하니 더 할 말이 없다. 찬찬히 경찰서 안에서 본 얼굴들을 떠올려 보았다. 본인이 선한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던 편의점 주인, 그에게 평소 불만이 쌓여 있던 불행한 어린아이……. 다분히 복잡한 빛을 띠고 있던, 그리고 곧 사라져버린 피쉬들.

“그럼 너는……. 애가 훔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

“정우가 훔쳤을 거라고 생각해. 정황상 그렇지.”

…뭐하자는 건데. 나도 모르게 놈을 향해 돌아보았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동시에 푸른 공기가 밀려들었다. 부드럽고, 차갑고, 아름다운 물결이 더없이 평온하고 잔잔한 모습 그대로 이람호의 눈가에 머물러 있었다.

“단지…….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이 날 일인가 싶었을 뿐이야.”

“…하지만 훔친 게 사실이면 벌을 받아야 하잖아.”

“그래, 그게 맞아. 그게 맞는데……. 저 애한테도 마지막까지 믿어줄……, 아니, 증거도 없는데 확정짓고 몰아붙이지 않을 어른 하나는 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

“…….”

“나한테 그 정도의 책임은 있잖아.”

이람호의 눈치를 보며 나를 경계하던 아이의 지친 얼굴이 떠오른다. 앳된 구석이라곤 없이 가칠가칠한 눈빛과 메말라 있던 입술 따위가. 다음 순간 나를 덮친 것은 우습게도 격렬한 질투였다.

나는 이람호가 너와 같던 시절을 알아. 바짝 말라버린 장작 같은 얼굴로 나를 힐난하던 때가 있었어. 그런 이람호를 견뎌내며 이날 이때껏 사랑해온 건 나인데, 너는 그저 어리고 가엾다는 이유로 이토록 둥글해진 이람호의 동정을 마음껏 받는구나.

“내릴래.”

“뭐?”

조수석 문을 벌컥 열었다. 오가는 차는 없지만 도로 한가운데였다.

“심태경!”

문을 쾅 닫고 재빠른 걸음으로 도로를 건넜다. 걱정하지 않아도 내 몸을 해칠 생각은 없다. 그저 한순간이라도 빠르게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 인생의 반밖에 살지 않은 어린애한테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내 자신이 끔찍하고 싫어서.

어슴푸레하게 어두운 새벽, 홀로 길을 걸으면 늘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열여덟의 늦가을이었고, 내 마음이 참혹해지는 순간마다 청아한 공기를 몰고 나타나는 이람호에 대한 환상이 남산타워 꼭대기까지 올라 있던 시기였다.

- 나는 어떤……, 색깔을 볼 수 있어.

그런 소리를 해도.

- 그런데 네가 가진 색깔이…….

이람호가 받아들여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을 정도로.

- 정말……, 내가 평생 본 것 중에 제일…….

주절거리다 말고 입을 닫았다. 푸른 피쉬가 위아래로 크게 일렁이는 것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한쪽 눈썹을 찌푸린 얼굴이 보였다.

- …저번부터….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이람호가 물었다. 나는 대답할 말을 잊고 멍청히 놈을 쳐다보았다.

- 나 놀린다고 하는 말 아니고 진심이면 너……. 병원 가보는 게 좋지 않겠냐?

- …….

- 센터에도 있어. 계속 대련 상대 속마음이 들린다고 헛소리하던 새끼 하나가 지난달부터 치료받더니 그 증상 없어졌다고 하더라. 창피한 일 아니니까 병원부터 가봐.

내게는 그런 순간이 몇 번 있었다.

상대는 당연히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사람이고, 내 판단이 틀릴 리가 없다는 믿음이 깨지는 순간. 이람호가 내 진심을 부정하고, 이람호가 내 말을 무시하고, 이람호가 나를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바로 그 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이 틀렸다고 믿고 싶지 않아서 내가 아는 이람호만이 진짜 이람호라고 믿고 싶어서, 내가 겪은 불행의 끄트머리마다 이람호를 드라마틱하게 엮어놓고 얼기설기 덮어둔 채 좋아했던 시간들.

“세나야.”

핸드폰을 꺼내 무턱대고 번호를 눌렀다.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세나야, 혹시 정말로 내가 비정상인 걸까? 나는 오래전부터 무고한 사람을 내 멋대로 재단해온 정신병자일 뿐일까?

“심태경!”

외쳐 부르는 소리가 바로 귓전에서 들린다. 모든 게 환상이고 망상일 뿐이었다면 어떻게 하지? 이람호에게 내가 씌워놓은 그 환상을 걷어내면 내게는 뭐가 남지?

“심태경, 야!”

팔이 붙들렸다. 뿌리칠 기운도 없어 순순히 돌아섰다. 씩씩대던 이람호의 얼굴이 차차 어두워졌다.

“…왜 우는데?”

“네가 미워서.”

“…….”

“널 미워하는 나도 미워서.”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엄마의 진심을 알려주던 날카로운 피쉬만이 내 생의 일부는 아니었다. 김세나가 나를 바라볼 때의 선연한 꽃잎색과, 운동장을 달려가던 이람호의 등 뒤로 따라붙던 물결과, 아이를 안고 가는 젊은 여자의 노을빛 피쉬와……. 밤이 되면 거리를 물들이던 찬연한 빛깔들. 홀로 지새우던 밤, 창문 밖을 내다보면 그 모든 것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저마다의 진심을 보여줄 테니 외로워하지 말라는 듯이.

정신병이어도 좋아. 다 환상이고 망상이어도 좋으니 사라지지 말아줘.

“…태경아.”

이람호가 나를 부른다. 어르듯이 부드럽게, 달래듯이 상냥하게.

“왜 너를 찾아왔느냐고 물어봤었지.”

양손으로 내 어깨를 감싼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온 거야.”

“…….”

“그것뿐이야.”

아마도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 순간, 눈에 아주 가늘고 긴 바늘이 박힌 듯했다. 깜, 빡, 감았다 뜬 시야는 놀랍도록 깨끗하고 선명했다. 그때까지 필름으로만 보던 화면을 크게 인화해서 보는 것처럼.

“…….”

눈물이 뚝, 떨어지고.

“…태경아?”

피쉬는 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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