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꿈속의 회유 (4/10)

4. 꿈속의 회유

“너 열 있다.”

과연 그랬다. 도통 몸을 일으킬 수 없더라니.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체온계에 38도 4분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약 먹어보고, 오후까지 안 떨어지면 병원 가자.”

“…목 아파.”

“아픈 것 같네. 목소리 장난 아니야.”

체온계를 몇 번 흔들어 내려놓은 이람호가 곧 뭔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아, 이거 전자체온계지.”

하도 멀쩡하게 말하는 통에 그만 웃고 말았다.

“요즘은 수은체온계가 잘 없지.”

“위험하니까. 괴담도 많지 않았나? 애가 갖고 놀다 깨져서 수은중독에 걸렸다든가.”

“그거 괴담 아닐 걸…? 실제로 있는 사고라고 방송에서 본 것 같은데.”

말이 조금만 길어지면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감기다, 빼도 박도 못할 독감이야. 작년 겨울 지독히도 나를 괴롭혔던 그놈과 동류임이 분명하다.

“근데 넌 체온계 같은 걸 왜 갖고 있어?”

“가방에 넣어놨지. 애들은 열이 자주 나니까 들고 다녀야 돼.”

아하, 사범님이셨지. 내가 속 편히 누워 있는 사이 이람호는 엉망인 내 방을 치우고 한참을 주방에서 뚝딱거렸다.

이례적인 폭설이었다. 밤새 내린 눈에 이람호의 차는 타이어까지 파묻혀 버렸다. 인터넷 뉴스에는 눈길 교통사고 소식이 줄을 이었다. 그나마 갑자기 뜬 어느 연예인의 열애설에 흔적도 없이 묻혀 사라졌지만.

“오늘 가게 안 하는 날 맞지?”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건너다보니 빈 참치캔이며 썰어놓은 당근 따위가 보였다.

“맞기는 한데……. 너는?”

“난 오후에 가봐야지.”

“…이 날씨에? 차 끌고?”

“여차하면 지하철 타고. 폭설이 아니라 토네이도가 와도 입시반은 못 쉬어. 돈이 얼마짜린데.”

돈이 얼마짜린데. 이람호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지나치게 이질적인 말이었다. 시선을 느낀 이람호가 냄비를 젓다 말고 돌아보았다.

“그래도 나 꽤 잘나가. 작년에는 한 명 전국체전도 보냈어.”

“헤…….”

“박진경이라고, 원래 홍보단 뛰던 앤데 본인이 날 찾아와서…….”

멈칫, 뭐라 신나서 떠들려던 놈이 입을 다물었다.

“이런 얘기는 별로 재미없지?”

“…….”

그렇긴 하다. 흥미도 없고 재미도 없다. 하지만 이람호가 말을 멈추고 내 눈치를 살필 줄은 몰랐다.

“먹고 있어. 약 사올게.”

“약국 어딘지 알아?”

“편의점 건너편에 있던데.”

눈도 좋다. 식탁에 차려놓은 죽이 냄새부터 그럴싸했다.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다가가자 의자까지 빼준다. 어색해 미치겠구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무거운 숟가락만 들어 올렸다. 그 사이 외투를 챙겨 입은 이람호는 익숙한 동작으로 현관을 나섰다.

“모르는 사람 와도 문 열어주지 말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뭐가?”

본인이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는 자각도 없는 듯하다. 포기하고 손을 내저었다. 영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해 보인 이람호가 곧 문 너머로 사라지고 집안은 언제나처럼 조용해졌다.

혀가 까끌까끌하다. 죽 한 숟가락을 퍼서 입에 넣었다. 참치야채죽은 썩 나쁘지도, 대단히 좋지도 않았다. 그럭저럭 먹을 만한 맛이었다. 어디까지나 레서피에 충실하지만 딱히 좋은 솜씨는 아닌 그런 요리.

몇 숟갈 뜨지도 못했는데 금방 속이 울렁거린다. 포기하고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이람호가 집안 온도를 잔뜩 올려둔 탓에 잠깐 지나온 방바닥이 뜨끈뜨끈했다.

몸이 뜨겁고, 머리가 아프고, 목은 붓고, 속은 뒤집힌다. 작년에는 어떻게 했더라. 김세나가 와줬었나? 집에서 앓다가 사흘째 되던 날에 못 버티고 병원에 갔을 것이다. 수액을 맞고 몇 시간 누웠더니 열은 깨끗이 내렸다. 어떻게든 병원만은 안 가겠다고 혼자 버틴 시간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똑같은 짓 반복하지 말고 일찍부터 병원에 가는 게 나으려나. 하지만 창밖에 쌓인 눈을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람호가 있어 주어 다행이었다. 어차피 오후에는 가버린다지만.

“…….”

그래서, 그게 서운하냐.

인간이 이렇게까지 미련해도 되는 것일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다 난다. 돌아누운 시선 끝에 이람호의 핸드폰이 걸렸다.

조금 망설이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내 가방에 일부러 넣어놓고 갔던 것과는 다른 물건이었다. 역시나 잠금 따위는 걸려 있지 않았다. 사진첩과 연락처도 빡빡하게 채워져 있다. 사진첩에는 온통 학원 사진뿐이었다. 줄을 맞춰 서서 발차기 연습을 하는 아이들이나 품새 연습을 하는 고등학생들 따위의. 아마도 학부모들에게 보내주는 사진 같았다. 연락처에 빼곡히 들어찬 것도 아무개 어머니, 아무개 아버지였다.

메신저 어플은 없고 문자함이 가득하다. 업무용으로만 쓰는 폰인지도 모른다. 가장 최근 문자의 발신자는 <박진경 어머님>이었다.

[사범님 애써주신 덕에 저희 아이가 올해도 바르게 생활할 것 같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문자만 봐선 의미를 모를 말이었다. 이람호가 보낸 문자도 가관이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어머님 아버님이 진경이를 바르게 키워주신 거죠. 대회 날에 뵙겠습니다. 물과 타올 넉넉히 준비 부탁드립니다. ^^]

내 눈으로 읽고도 믿기지가 않아서 한참을 노려보았다. 혹시 이람호 아버지가 보낸 문자는 아닐까? 그러나 맨 처음 발신된 문자가 내 일말의 기대를 날려버렸다.

[진경이 어머님, 이번에 진경이 맡게 된 사범 이람호입니다. 전달사항이 있으실 땐 이 번호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살갑고 예의 바르고 성실한 말들이 이어진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범 이람호가 어떤 모습인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상상과는 다른, 아니, 돌이켜보면 딱히 상상해본 적도 없다. 일터에서의 이람호에 대해.

나는 이람호가 얼마나 운동을 싫어했는지 알고 있다. 매일 뜨거운 운동장을 달리느라 딱딱하게 메말라 있던 등, 침마저 말라붙어 괴롭게 내쉬던 숨, 피멍 든 얼굴에 얼음 주머니를 댄 채 힘없이 앉아 있던 운동장 스탠드. 보고 있는 나까지 지치게 만드는 나날. 열여덟의 이람호는 살아온 일생의 반을 그 고생에 바쳤건만, 신은 끝내 녀석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삑, 삑, 삑삑삑삑. 비밀번호 여섯 자리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훔쳐본 학생기록부에서 알아냈던 이람호의 생년월일. 도어락과 공인인증서와 각종 메일 암호에 섞어놓은 숫자. 나는 문이 열리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왜 일어나 있어?”

약국 봉투와 편의점 봉투를 쥐고 들어선 이람호가 물었다. 내 손에 들린 제 폰을 보고서도 별 반응이 없다. 하긴, 내가 보는 게 걱정되거나 꺼려졌다면 이렇게 대놓고 두고 가지도 않았겠지.

“너 완전 내숭 쩌나 보다.”

“뭐가? 문자?”

“야, 나는 무슨 국회의원 출마할 사람인 줄 알았어. 싹싹한 거 봐.”

이람호가 하하, 웃었다. 비꼬려고 한 소린데. 시큰둥하게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아버지 방침이야. 요즘은 학원 사범도 서비스업이라나.”

“…맞춰주고 있는 것만도 대단하네.”

“그냥 자판 좀 치면 되는 게 뭐 어려워. 예의 차리는 건 차라리 쉬워. 애들 대하는 게 어렵지.”

아, 그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약 봉투를 내려놓던 이람호가 식탁 위를 살피고는 멈칫했다.

“거의 안 먹었네. 맛이 없어?”

“몇 숟갈 먹긴 했는데 울렁거려서 더 못 먹겠어.”

“그래, 그럼.”

뭔가 더 잔소리가 이어질 것을 기대했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컵에 정수기 물을 받은 이람호가 약 봉투를 들고 다가왔다.

“이게 해열제고 이건 기침약. 증상별로 따로 먹는 게 나을 거래서 이렇게 샀어.”

“어…….”

“죽 남은 건 적당히 나눠 담아서 냉동시켜놓을 테니까 냄비에 물 좀 붓고 넣어서 끓여 먹어. 아예 굶지 말고 몇 입이라도.”

“…….”

“너 좋아하는 것도 사 왔어.”

씩 웃은 이람호가 편의점 봉투를 들어 올렸다. 햄계란 샌드위치와 딸기우유가 들어 있었다. 그제야 얼마 전 일이 생각났다.

“…근데 너, 내가 이거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정확히 말하면 평소에 먹을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다. 학생 때는 그나마 맛있는 간식이었고 지금 와서는 술 취했을 때 생각나는 간식 정도. 이람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너 고등학교 때 이것만 먹었잖아.”

“…그런 걸 기억해?”

“한 번 사 먹어 봤거든. 얼마나 맛있길래 맨날 먹나 싶어서.”

아청과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그 사람 좋아했나 보네. 어떤 연예인 좋아하는지 아주 유심히 봤구먼.

“진짜 이상한 맛이더라. 취향도 독특하다 싶었어.”

“…이상한 맛이라 중독성이 있는 거야.”

“그게 이해가 안 간다니까.”

우리에게 허락된 사치는 많지 않았다. 매일 쪼들렸고 하루가 멀다 하고 배고팠다. 그나마 주머니 사정이 풍족한 김세나에게 빌붙어 다니면서 사지도 않은 복권이 당첨되길 빌었다. 1억만 있으면 온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람호 국대도 만들어주고 대학도 보내주고.

그런데 웬걸, 엄마 보험료와 가게 권리금을 합치니 딱 1억이었다. 하루아침에 1억이 내 것이 되었다. 가지고 보니 절대 적은 돈은 아니지만, 원하던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만큼 큰돈도 아니었다. 그래서 우스웠고, 결국 허무해졌다.

“지금 병원 갈래?”

사온 것을 정리하던 이람호가 물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막 정오를 지난 참이다. 보통 동네 병원 점심시간이 1시부터 2시까지고, 이람호는 최소 3시 전에 출발해야 하니까 가려면 기회는 지금뿐이다.

고민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가기 싫은 마음에선지 아까보다 견딜 만한 것 같았다. 고개를 젓고 목 아래까지 이불을 끌어당겼다.

“오늘은 그냥 쉴래. 지금 나가면 괜히 더 앓을 것 같아.”

“그래도…….”

“너는 그만 가. 집에 들렀다 출근해야 할 거 아냐.”

괜히 한 번 권해보았다. 놀랍게도 이람호는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와, 갈등하네? 당연히 괜찮으니까 이따 간다고 할 줄 알았는데.”

“…어?”

“가라, 가. 솔직히 수발들기 귀찮지? 난 혼자 앓다가 혼자 죽을 테니 갈 길 가시라고요.”

이람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반응 좋고.

“아니,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얼핏 말까지 더듬는다. 아, 못 참겠다. 웃음을 터뜨리자 이람호가 크게 뜬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푸른 피쉬 조각들이 그의 눈가에서 어지러이 흔들린다.

“뭐야, 진짜 쫄았어?”

“…….”

“못 살겠다. 여자친구 한 번도 없었다는 거 진짠가 보네. 그치.”

“뭐야…?”

“뭐긴, 낚은 거지. 진짜로 가봐. 눈 더 내리면 지하철도 복잡해질 거야.”

심지어 내가 알기로 이람호의 집까지 가려면 지상철 구간을 지나야 한다. 아무리 골탕먹이고 싶다고 조난당하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차는 두고 가. 내일 찾으러 와.”

“괜찮아. 천천히 가면 돼.”

“또 오라는 소린데 그걸 못 알아듣네.”

머뭇거리며 옷을 주워 입던 이람호가 돌처럼 굳었다. 아이고, 놀리는 재미 쏠쏠하다.

“…그럼, 그, 놓고……, 그런데, 주차…….”

“또 속냐. 됐으니까 빨리 가.”

“…….”

“가, 괜찮아.”

이불 밖으로 손을 빼내 휘휘 흔들어 보였다. 이람호는 내 진의를 파악해보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것마저 훤히 보인다는 게 문제였지만.

“빨리 가. 나 좀 자려고 그러는 거야.”

“…그래?”

“문 잠긴 것만 확인해주고 가. 도어락 배터리 갈 때가 돼서 가끔 말을 안 듣더라.”

“그런 건 빨리 해결을…….”

“할 테니까 가. 졸려.”

이번엔 이불을 관자놀이까지 쓰고 돌아누웠다. 내가 내뱉은 뜨거운 숨에 덥고 답답했다. 한참 말이 없던 이람호가 마침내 입을 연 것은 온 얼굴이 축축해진 후였다.

“…밤에 다시 올게.”

그리고 또 말이 없다. 이게 정답인가? 살피는 기색이었다. 눈을 마주치면 또 웃어버릴 것 같아 못 들은척했다. 코라도 골아볼까 하다가 들킬 게 뻔해 그만두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닫히고, 삐리릭, 잠금쇠 돌아가는 소리가 날 때까지 이람호는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왔다. 복도를 울리는 남자 구두의 묵직한 발소리.

이람호가 떠나는 소리, 내게서 멀어지는 소리.

꾹 쥐고 있던 이불을 멀리 집어 던졌다. 덥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뜨거운 방바닥을 기다시피 걸어 창문에 달라붙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입구를 나서는 이람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언제나 그랬듯 놀랍도록 가벼운 차림이다. 겨울용 코트 한 장 달랑 입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거리를 태연하게 걷는다. 무게중심이 똑바로 잡혀 곧게 펴진 등. 가볍고 안정적인 발걸음. 행여나 이쪽을 돌아볼까 눈만 빼꼼 내민 보람도 없이 성큼성큼 사라져 간다.

“아…….”

이번에도 분명 나만 안달하겠지.

“거지 같네.”

창틀에 이마를 쿵, 박았다. 찬 기운에 그나마 기분이 나아진다.

누구에게든 상담하고 싶다. 10년 짝사랑이 이제 결실을 볼 것 같은데 저는 이 상황이 아주 병신 같네요, 어쩌면 좋을까요? 당연히 김세나에게는 말할 수 없다. 고민하다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역시 이럴 때는 익명의 힘이지. 거침없이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하자마자 제일 상단에 뜬 글이 눈을 사로잡았다.

[사고났어요ㅠㅠ by아프리카청춘이다]

급히 클릭해보니 역시나 아청의 글이었다.

[언덕에서 오토바이랑 같이 굴러서 오른팔 인대가 나갔습니다……. 이런 날씨에 굳이 배달주문을 시킨 손님도 부득불 배달을 보낸 사장님도 다 밉네요. 웃긴 게 꼭 다쳐도 이렇게 시답잖고 귀찮게 다쳐요. 남들은 동아리에서 축구하다 십자인대 나가서 군 면제도 받고 하던데 꼭 면제도 안 될 부상만……. 올해는 입대해야 할 텐데 답답하네요. 눈이 너무 싫어요.]

기어코 사고가 났구나. 씁쓸하고 걱정스러웠지만 아청의 연락처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잘난 척 지켜온 방침 중의 하나였다. 가게 손님과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개인적으로 친분 쌓지 않을 것.

오토바이 사고로 인대가 나갔다는 사람에게 따로 연락 한 번 못 해주는 처지에 짝사랑 고민이 다 뭐냐. 바보 같아져서 창을 닫아버렸다. 머리가 아프다. 온몸이 쑤신다. 그리고 이 집에는 나 혼자.

“…….”

이래서 집에 사람 들이지 않으려 했는데.

누운 채 아픈 머리를 감쌌다. 차라리 잠들고 싶은데 피곤하고 뻐근할 뿐 잠도 오지 않는다. 망할 놈. 두통약은 왜 안 사온 거야?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찬장에 넣어둔 진통제 비슷한 거라도 없는지 찾아볼 참이었다.

삑, 삑, 삑삑삑삑. 익숙한 리듬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누구지?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을 애써 무시했다. 기대하지 말자. 하지만 이 집 비밀번호를 아는 건 이람호뿐이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현관문 틈으로 새어드는 푸른 잔물결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어? 왜 일어나 있어?”

열린 문틈으로 시원한 바람에 든다. 마치 이람호가 몰고 온 공기 같았다. 숨통이 트이는 청량함. 목 아래까지 꽉 차 있던 더운 숨이 사르르 식는다.

“너는……? 왜 다시 왔어?”

“도어락 배터리 갈아주고 가려고.”

“…….”

“이따 왔을 때 배터리 나가 있으면 안 되잖아.”

“…뭐 쓰는지는 어떻게 알고?”

“예전에 이 회사 AS 일했었어.”

뭘 물어보든 생각도 못 했던 대답이 나오니 신비할 따름이다. 이람호의 손에는 새 배터리와 드라이버가 들려 있었다. 이람호가 자리 잡고 앉아 몇 번 뚝딱거리자 빈사 상태의 도어락이 순식간에 쌩쌩해졌다. 삐릭, 삐리릭. 기분 탓인지 소리도 한층 경쾌해진 것 같다.

“별일을 다 했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택배도 나르고 공장도 다니고……. 그나마 이게 제일 편한 일이었어.”

“…….”

“사범 제의도 몇 번 받았는데 그것만은 안 한다고 고집부리다가 허송세월했지.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는데.”

자조하는 기색은 아니다. 약간의 농담조로 들렸다. 세월이 무섭다. 그 날카롭고 예민하던 이람호가 이런 어른이 되다니.

“참, 나 스물세 살 땐가. 그때 일하던 공장장 사위 될 뻔했다.”

“…어엉?”

“자기 데릴사위하면 나중에 공장 물려주겠다고 그랬거든. 농담이겠거니 했는데 어느 날 잔뜩 차려입은 여자가 퇴근 시간 맞춰서 찾아왔더라고.”

“허얼…….”

“나보다 다섯 살 많았고……. 그러니까 그 당시에 스물여덟이네. 공장장이 어떻게든 서른 먹기 전에는 짝 찾아줘야 된다면서 난리였나 봐.”

꼴랑 스물여덟에 결혼은 무슨. 코웃음을 치고 드러누웠다. 이람호는 사온 여분의 배터리와 드라이버를 내 신발장 한 칸에 고이 넣어놓았다.

“그래서, 공장이 탐나서 결혼하려고 했냐?”

“혹하긴 했어. 결혼하면 집이 생기잖아.”

“…….”

“근데 할머니 모시고 산다고 하니까 나중에 생각하자더라고.”

“뭘 나중에 생각해?”

“나도 그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아마 우리 할머니 죽기 전까지 자기가 결혼을 못 한 상태면 그때 다시 만나주겠다는 뜻 아니었을까?”

미쳤구먼. 들으란 듯 쯧, 혀를 찼다.

“뭐 그런 게 다 있어? 젊고 싱싱한 남자 들어앉혀 놓고 살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니야?”

“뭐 누구든 싫겠지. 나라도 싫을 거야.”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득도를 해오셨는지. 잊고 있던 답답함이 다시 턱밑까지 차오른다.

“그때 생각했어. 누군가를 만난다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여야겠구나.”

생판 모르는 타인의 저녁 메뉴에 대해 읊을 때도 저 정도로 무감한 말투는 아닐 것 같다.

“내게 짐이 있는 상태로 누군가와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건.”

“…….”

“내 짐을 나눠 짊어질 사람을 찾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구나…….”

그건 대단히 서글픈 말이다. 이람호의 할머니가 아닌 이람호에게. 내가 원치 않은 모든 상황이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이.

“너 그러면.”

남 일 같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속이 비틀렸다.

“우리 엄마 죽고 없다고 했을 때 안심했어?”

이람호가 눈을 둥글게 떴다. 동시에 푸른 피쉬가 위로 솟는다. 뜨끔……, 한 건 아니고, 이제야 깨달았다는 느낌이다. 내심 그런 속내가 있었다는 것을.

“어……?”

부정할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은 들키기 싫으니까.

“…어…….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런 게……, 약간…, 은 있었던 것 같네.”

하지만 이람호는 느릿하게나마 거짓 없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솔직히 너희 어머니 좀 무서웠어. 이제 와 또 뵙는다고 상상해보니 아찔하네.”

“…언제 봤다고.”

“면담일에 오셨었잖아.”

기억을 곰곰이 더듬어보니 딱 한 번 있었다. 초중고 12년을 통틀어 엄마가 나를 보러 학교에 왔던 유일한 하루. 그래, 아마…….

“니가 어떤 놈 팔 부러뜨려서.”

…이제 겨우 잊어가고 있던 시커먼 흑역사.

- 니네 사귀냐?

역시나 열여덟, 2학년 2학기의 기말고사가 가까워지던 무렵이었다.

- 니네라는 게 누구야?

- 너랑 김세준.

- …….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유난히 덩치가 크고 험상궂게 생긴 녀석이라 별명이 바야바였다. 김세나는 열심히 내 노트를 베끼는 중이었고, 나는 그런 김세나를 약 올리는 중이었고, 바야바는 매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놈은 들고 있던 딸기우유를 김세나의 책상에 올려두고는 눈을 찡긋해 보였다.

- 뭐랬냐?

김세나가 당장 날을 세웠다. 피쉬가 한껏 뾰족해졌다. 난리 났다. 김세나는 이런 놈들이 집적거리는 거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데.

- 자기야, 우리 커밍아웃할 때가 됐나 봐.

심각해질 땐 일단 농담처럼. 슬그머니 던진 말에 김세나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 쉿, 그러지 마, 자기. 학교에선 비밀로 하기로 했잖아.

- 비밀로 하면 뭐해, 이렇게 다 들켜 버린…….

- 아, 씨발, 뭐하냐?

진심으로, 바야바가 그쯤에서 물러서길 바랐다. 그러나 놈은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눈을 부라림으로써 나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어 버렸다.

- 내가 장난치는 거 같냐?

- 진지하게 물어본 거란 말야? 좀 징그럽다.

자주 있는 일이다. 남학교에 갇혀 욕구불만에 빠진 짐승들은 김세나의 곱상한 얼굴과 날씬한 몸에 곧잘 발정하곤 했다.

- 니네 옥상에서 씹질한다며. 막…, 둘이 서로 빨아주고 그러냐?

그것도 이렇게 지저분한 형태로.

- 씨발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당장 박차고 일어서는 김세나를 우선 눌러 앉혔다. 체급 차이가 말도 안 되게 컸다.

- 왜 시비야? 끊고 가던 길 가.

- 뭔데, 니 좆집 가드치냐?

바야바는 제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더니 왼손 중지로 마구 쑤시는 시늉을 했다. 김세나의 피쉬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순간이 있다.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인간상을 마주했을 때의, 피가 빠르게 식는 기분. 대꾸 한 마디라도 하는 순간 나도 이 수준으로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어쩌면 인간이 이렇게까지 몰상식하고, 천박하고, 저질일 수가 있을까.

- 너…….

이런 인간은 무슨 이유로 살아있는 걸까.

- 그냥 가던 길 가라.

싹 다 묶어서 우주 밖으로 던져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 당장 안 꺼지면 그 잘난 좆대가리 뭉개버린다.

끝까지 내뱉고 나서야 그것이 내 입에서 나온 말임을 알았다. 싸한 분위기 속에서 김세나만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바야바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위험신호였다.

저질러놓고 어이가 없었다. 아니, 기왕 사고를 칠 거면 좀 더 신랄하게 욕하면 안 되나? 끽해야 생각한 게 좆대가리 뭉개버린다니, 치한 만난 20대 아가씨도 아니고. 심지어 ‘잘난 좆대가리’라니.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가 없잖아.

김세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게 틀림없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자마자 푸핫,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 아, 미친 거 아냐? 졸라 대박.

김세나는 숨이 넘어갈 듯 웃느라 발까지 버둥거렸다. 그러자 긴장 속에 지켜보고 있던 반 아이들 틈에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야바의 얼굴이 그제야 시커멓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탁한 구정물 빛 피쉬가 꾸덕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모르겠다, 코피 한 번 더 터지고 말지 뭐.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놈의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세나를 한껏 쏘아보기 전까지는.

- 이 씨발년이, 처웃냐?

바야바가 김세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세상이 슬로우모션으로 도는 듯했다. 저 새끼, 진짜로 때리려는 거야. 저런 놈한테 맞으면 김세나는 한 방에 저세상이야. 욕을 한 건 난데 왜 김세나한테 지랄이지?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스치고 나는 어느새 바야바에게 힘껏 발차기를 날리고 있었다.

맹세컨대 내게는 놈의 팔을 한 번에 부러뜨릴 만한 기술도 힘도 없었다.

다만 내 발차기가 바아뱌의 옆구리에 적중했고, 놈이 억,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고, 완전히 폭발해서 내게 달려들며 팔을 위로 치켜들었는데, 그러다 책상다리에 걸려 나자빠져 뒹굴면서.

- 으아악!

제 무게에 제 팔이 반대로 눌린 것이다.

우드득, 섬뜩한 소리가 났다. 아악! 아아악! 바야바의 비명은 죽음을 앞둔 야생동물의 하울링마냥 처절한 울림으로 교실 안의 공기를 찢어놓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김세나의 얼굴이 파랗게 굳었다.

- 야…….

멀찍이서 구경만 하고 있던 박송이 다가온 것도 그때였다.

- 너 좆됐다.

그러게. 허허 웃는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자다 말고 받은 전화에서 치료비, 합의금 등의 단어를 듣고 혼비백산해 머리도 못 빗고 학교로 달려왔다. 화장도 안 하고 머리에 후까시도 안 넣은 엄마는 평소보다 열 살쯤 늙어 보였다. 바야바는 이미 병원에서 깁스를 두르고 학교로 돌아와 있었고, 불려 온 바야바의 엄마는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사과 안 하니?

바야바의 엄마가 물었다. 나는 대답 없이 늙은 엄마만 바라보았다. 엄마는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바야바의 꼴을 보더니 서슴없이 내게 달려와 따귀를 때렸다.

-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엄마 손이었다. 그냥 마음만 아팠다.

- 당장 사과해! 무릎 꿇고 빌어!

담임은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바야바와 그의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 사과하기 싫어요. 내가 부러뜨린 것도 아니고 시비는 쟤가 먼저 걸었….

따귀 한 대가 더 날아왔다. 엄마는 당장에라도 뒤로 넘어갈 것처럼 흥분해 있었다.

- 한 번은 사고 칠 줄 알았어! 니 애비랑 똑같아! 심 씨 핏줄을 품어주는 게 아니었어! 그 피가 어디 가? 너도 똑같은 놈이야! 니 애비랑 똑같은 놈!

한 마디가 끊길 때마다 따귀가 한 대씩 날아왔다. 보다 못한 담임이 나서서 엄마를 내게서 떼어놓았다.

- 어머니, 진정하시고…….

- 무릎 꿇어! 안 꿇어?

엄마의 입버릇이다. 아무튼 이 집에 살았던 심 씨들은 싹 다 똑같아. 아버지와 나를 당신의 인생에서 배제시키고자 하는 말이었다. 내 생은 주로 그런 절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 …저기, 알았으니 그만하세요. 애를 왜 자꾸 때리고 그래요?

바야바의 엄마까지 한마디 거들었다. 그것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바야바 같은 인간말종을 낳아놓은 여자도, 자식을 이런 식으로 때리고 질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은 안다. 그런데 나는 뭐 그렇게 큰 잘못을 했기에 이따위 취급을 받아야 할까.

- 당장 무릎 꿇고 사과해!

합의금 같은 건 절대 못 내줘!

이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나만 들은 것은 아닐 것이다. 조용히 일어나 지도실 문을 열고 나왔다. 엄마가 뭐라 소리를 질렀지만 못 들은 척했다.

수업이 끝난 후라 학교는 고요했다. 컴컴한 복도를 가로질러 교실에 닿았다. 김세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멍하니 서 있다가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밀려드는 배신감에 그만 설움이 복받쳤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옥상에 갈까. 우리 학교는 드물게 옥상을 개방해놓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가하고 있었다. 최근 10년 내로 자살이나 추락 사고가 없었던 탓이다.

내가 틀어막아 버릴까. 나만 이렇게 답답하게 사는 건 억울하니까.

막히다 못해 지끈지끈 아픈 가슴을 누른 채 심호흡을 했다. 맞은 뺨이 그제야 얼얼하게 아파 왔다.

답답해. 물에 잠긴 것 같아. 숨이 막혀.

- …어?

이렇게 시커먼 바닥에 파묻힌 채 살아갈 거라면.

- 심태경?

물속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퍼뜩 돌아보았다. 익숙한 목소리, 이어 새파란 바람이 분다. 어두침침한 교실 안에 번져가는 푸르른 물결.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고 단 한 번도 놓아주지 않았던 맑은 공기.

- 여기서 뭐하냐?

람호야, 나는,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날 때면.

- 너 오늘 한 건 했다며?

아가미가 말라붙은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어.

- …너는 왜…….

바다가 아니어서.

- 응?

내가 뛰어들 수 없는 걸까.

“…김세나한텐 말하지 마.”

열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침이 걷잡을 수 없이 튀어 나왔다.

“뭘?”

이람호가 되물었다.

“그, 우리……, 얘기.”

“우리 얘기가 뭔데?”

“…….”

“우리 지금 뭔가 달라졌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보인다. 조금 움직임이 빨라진 푸른 피쉬. 궁금해서? 초조해서? 혹은 기대해서.

“말해봐, 심태경.”

“…뭐를.”

“우리가, 김세나가 원래 아는 사실과 뭐가 달라졌느냐고.”

김세나라고 부른다. 과거의 이름 따위는 처음부터 몰랐다는 듯 자연스럽게.

“널 모르겠어.”

알약 하나를 넘기는데도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창밖을 보니 눈발은 더욱 거세져 있다. 병원은 텄다. 물론 이람호의 안전한 귀가도.

“네가 이제 와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나?”

“옛날엔 아니었잖아. 옛날에는 너 단 한 번도…….”

“…….”

“나를 이런 식으로 본 적 없잖아.”

이람호는 신발도 벗지 않고 현관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차분한 시선은 내 코끝에 머문다. 유치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람호는 똑똑하다.

“옛날에는 내가 널 전혀 안 좋아했다?”

“…설마 부정하는 건 아니지?”

“그 이전의 문젠데……. 왜 그렇게까지 확신하는 거야?”

“…….”

“10년 전의 너와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아무것도 없진 않았다. 내가 너를 좋아했으니까.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은근히 논점 흐리지 마.”

“정답이 이미 따로 있는데 물어보면 뭐해? 무슨 대답을 듣고 싶길래?”

“…….”

“네가 정해놓은 이 대화의 결말이 뭐야? 내가 부정하길 바라?”

명치 아래가 뜨끔하니 달아오른다. 그래, 이람호는 똑똑하다. 한 번도 내 잔꾀에 속아준 적 없었다.

“애당초 이제 와서 10년 전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어.”

“…뭐?”

“나는 지금 너와 얘기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과거 따위는 깨끗이 잊고 앞으로의 일을 도모하면 그만인가. 아니, 아니지. 알고는 있다. 이게 얼마나 우스운 짓인지.

나는 그저 물어보면 된다. 이람호에게. 나를 좋아하느냐고.

“…….”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애당초 그런 간질간질한 감정으로 연애를 시작할 나이도 아니다. 그냥 이 녀석 정도면 대충 괜찮겠다, 그거라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니니까. 나는 아직도.

“난…….”

네 눈에 사랑이 담기는 순간을 상상하면 가슴이 벅차오르니까.

“…아냐, 됐어. 관두자.”

내 눈으로, 어떤 참작이나 부정의 여지조차 없는 잔혹한 현실을 목격하는 경험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죽기 전의 엄마가 그랬고, 졸업식 날의 이람호가 그랬듯이.

한 번만 더 그런 차가운 피쉬를 목격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살아갈 힘을 잃을지도 모른다.

“뭐가 삐걱거리고 있는 건 알겠어.”

관두자는 말을 못 들었는지, 혹은 들을 생각이 없는지 이람호는 꿋꿋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어. 이런 건 처음이어서.”

“…….”

“조금만 더 가르쳐주면 안 되는 거야?”

힐난하거나 비꼬는 게 아니다.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철저한 을의 포지션을 취하면서.

“태경아, 나는…….”

눈발이 점점 거세어진다.

“이번에는 실수하고 싶지 않아.”

의식이 이어진 건 거기까지였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격자무늬 천장이었다. 내 집이 아닌 것은 명백했다. 손끝을 까딱이다 위로 뻗어 올렸다. 팔오금에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태경아!”

그 팔 위로 김세나의 얼굴이 쑥 올라왔다. 어지간히 울었는지 아이라인이며 마스카라가 다 번져서 엉망진창이었다.

“허엉, 태경아. 나 너 죽는 줄 알았잖아.”

“…죽긴 누가 죽어…….”

“독감이래. 이틀은 입원해야 된대. 아까 열이 막 40도까지 올라가서 난리도 아니었어.”

김세나가 딸꾹질을 하며 내 머리맡의 양동이를 가리켰다. 반쯤 녹은 얼음이 가득 차 있었다. 열을 내린다고 찜질에 쓴 모양이었다.

“몇 시야…?”

“지금 일곱 시. 저녁.”

“…….”

“너 올해부터는 예방주사 꼭 맞아. 알았어? 왜 매년 겨울마다 이 난리를 치르면서 주사 한 대를 안 맞겠다고 고집이야?”

딱히 일부러 안 맞은 건 아니다. 고집을 부린 기억도 없다. 그냥 밤에 일하니 낮 시간을 내기 힘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걱정시킨 죄로 이 정도의 잔소리는 가만히 듣고 있기로 했다.

“…근데 넌 어떻게 알고 왔어?”

“이람호가 전화했어. 너 지금 병원에 있으니까 좀 와 달라고.”

“…….”

“아까까지 있다가 니 방에 가서 옷 같은 거 챙겨오겠다고 갔어. 나올 때 문도 제대로 안 닫은 것 같대.”

당연하지만 기억에 없다. 아까 그때가 몇 시쯤이었더라. 이람호는 곧 가야겠다고 했었는데……, 곰곰이 머리를 굴리다 퍼뜩 번개가 쳤다. 이람호는 출근해야 하는 몸이다.

“전화……, 전화 좀.”

“어?”

“이람호한테 전화 좀 걸어봐.”

“내가 걔 번호를 어떻게 알아?”

“너한테 전화 걸었다며. 착신기록 있을 거 아냐.”

“니 폰으로 왔어. 걔도 내 번호 모르잖아.”

맞는 소리다. 초조함에 얼른 주위를 살폈다.

“그럼 내 건? 내 폰은 어딨는데?”

“…나는 모르지. 이람호가 아직 갖고 있지 않겠어?”

미치겠네……. 다시 열이 오르는 것 같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드러누웠다. 김세나는 의아한 기색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왜? 뭐 급한 일 있어?”

“아니……. 걔 출근해야 한다고 했는데, 학원 나갈 시간 지났을 텐데…….”

중얼거리다 말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김세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람호가 여태 내 집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

조금 맑아진 시야에 그제야 진분홍빛 피쉬가 보인다. 화장이 번져 새카만 그녀의 눈가에 동그란 피쉬의 조각이 눈물처럼 맺혀 있었다.

나는 김세나가 지금 속내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김세나는 내가 눈치챘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에 관한 어떤 대화도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비겁하고, 김세나는 사려 깊기에.

“…미안, 갑자기 놀랐을 텐데.”

“그럼, 놀랐지. 올해는 예방접종 꼭 해. 알았어?”

“응, 그럴게.”

“…….”

“꼭 그럴게.”

참담하다.

이람호는 여덟 시가 조금 지난 후 병원으로 돌아왔다. 편의점 봉투에 뭔가 바리바리 챙긴 채였다. 김세나는 이람호가 오자마자 내게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작년에는 퇴원할 때까지 김세나가 옆자리를 지켜주었었다.

“밥은? 남은 죽 좀 싸왔는데.”

“먹었어. 넌?”

“나도 먹었어.”

빤한 거짓말을 한다. 먹을 틈이 없었을 텐데.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 봉투를 받아들었다. 내 옷장을 뒤져 찾은 듯한 속옷 몇 개와 잘 포장된 죽이 한 데 들어 있었다.

“일어나 있어도 괜찮아?”

“너 오기 전까지 계속 누워 있었어. 등이 아파서 오래 못 눕겠어.”

“그래?”

되물은 이람호가 허리를 낮춰 눈을 맞춰왔다. 가까워진 얼굴에서 한껏 눈 냄새가 난다. 차고 맑은 빛깔.

“좀 주물러줄까? 어디가 아픈데?”

“됐어, 그보다 너 출근…….”

“누워봐. 만져줄게.”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인다. 어깨에 닿은 손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도 모르게 감싸 쥘 만큼.

“장갑이라도 끼고 다녀. 뭐 이렇게 차가워.”

“그렇게 안 차가워. 네가 지금 열이 높아서 그래.”

간단히 대답하고는 이마를 감싸온다. 부드럽고 차갑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뱃속을 휘돌던 뜨거운 숨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듯했다.

“진짜 됐어. 이제 괜찮으니까 출근해.”

“안 나간다고 전화해놨어.”

“왜?”

“너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가.”

덤덤하고 태연한 대답이었다. 순간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나 싶어질 정도로.

“그래도……. 중요한 수업이라며.”

“그런 데서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사장 아들의 권한이지. 죽이나 먹어.”

사장 아들. 뿌듯함이며 자부심이 남김없이 담긴 말에 그만 우스워졌다.

“…살만해?”

그래서 물었다. 이람호는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너를 괴롭히던 할머니가 죽고, 빚에 쫓겨 도망갔던 아버지는 금의환향하고…….”

“금의환향…?”

“나는 있잖아.”

“…….”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네가 날 선택해줬으면 했어.”

단정한 얼굴이 갸웃 기울어진다. 푸른색 피쉬를 괴듯이.

“치매 노인 돌보면서 하루 열다섯 시간씩 공장에서 일할 때 널 찾아왔어야 맞다는 거야?”

“응.”

“…….”

“그랬으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널 받아줬을 거야.”

졸업식 날에도 그랬다. 대학에 가기 전에 국가대표에 선발된다, 그 목표 하나를 이루지 못해서 스폰서에게 외면받고 대학문이 닫힌 이람호가 제일 먼저 날 찾아오길 바랐다. 모든 걸 잃고 아무것도 쥔 것 없이 비참해진 마음에 내 존재가 등불처럼 떠올랐으면 했다. 이런 나라도 너는 좋다고 해주겠지? 한 가닥 희망을 품고서. 그럼 나는 그 희망을 이루어주고, 기대했던 대로 보듬어주고, 그렇게……, 이람호의 구원자가 되고 싶었다.

“나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은 사람은 싫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내가 누군가의 절대적인……, 대체 불가한……, 그런 존재가 아니면 싫어. 나 없으면 큰일 나는 사람,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어야 돼. 나는 그런 사람 아니면 곁에 두기 싫어.”

“…….”

“그런 건 무서워. 내가 아쉽지 않다는 건, 내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건, 언제든 나를 끊어내고 가던 길 갈 수 있다는 거잖아. 그건 싫어. 그럴 사람이랑은 애초에 시작을 안 하고 싶어.”

내가 이람호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는 솔직함이었다. 뱃속을 까뒤집어 보이는 듯 창피했지만 견뎌야 했다. 이람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잔잔한 눈가에 상념이 어린다. 내 말을 곱씹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한참 후에 되묻는 말이었다. 나는 너 아니면 안 되고, 너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반편이가 아니라는 뜻이야?

“아니지, 너는…….”

“그런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네 합격 기준에 들어가는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물으니 말문이 막힐 수밖에. 멍해진 나를 두고 이람호가 옆머리를 벅벅 긁었다. 처음으로 눈에 보인 초조함이었다.

“듣다 보니 이상한 게 있는데……. 너 애초에 그럼 10년 전에는 왜 내가 좋다고 한 거야?”

“…….”

“네 눈에 그때의 나는 너 없이 못 살 반편이였어?”

“아니니까 기다렸던 거야.”

“기다려?”

“너한테 나만 남는 때를.”

아, 뱉어놓고 우습다. 이 얼마나 비열한 연심인지. 그래, 나는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너의 실패만을 바라며 살았지. 네가 무엇도 이루지 못하고 나만큼 별 볼 일 없는 인생으로 같은 선상에 서주기를 바랐어.

“사멸회유가 어쩌니 했었지? 제자리로 돌아갈 힘이 생길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

“내가 왜 그래야 해? 왜 그렇게……, 언젠가 너를 만날 사람 좋은 일만 해줘야 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렇게 생겨 먹었으니까.

“난 그러기 싫어.”

내가 없는 이람호의 행복 같은 건 빌어주고 싶지 않다. 용한 점쟁이가 있다면 저주의 부적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없이 생각했었다. 세월이 흘러 나를 찾아오는 이람호,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내게 의존하며 나를 떠나지 못하는 이람호, 그래, 나는, 이람호를 통제하고 싶었다. 그것만이 내가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나를 발판으로 쓰지 마.”

그러거나 말거나 제 삶에 존재하는 모든 고난을 오롯이 혼자서 견뎌내고 돌아온 내 첫사랑은.

“제발 그러지 마.”

여전히 진중하고도 사려 깊은 눈으로 아무 말이 없어서.

입원은 이틀뿐이었지만 앓은 건 꼬박 닷새였다. 온몸을 꽁꽁 싸매고 집 밖으로 나설 만한 기운이 생겼을 때는 눈이 그친 후였다. 택시를 잡아타고 출근하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

이람호는 내가 집에서 쉬는 동안 혼자 가게를 운영했다. 난이도 높은 칵테일 몇 개만 메뉴에서 뺐다는 모양이었다. 오픈 시간은 별수 없이 저녁에서 심야가 되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던 듯했다.

<오늘의 렌피알바님!>

핸드폰으로 커뮤니티에 들어갔다가 제목만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이 미친놈들, 설마 도촬한 건 아니지? 급히 클릭해보니 다행히도 구구절절한 목격담이었다. 스탠더드칼라 화이트 셔츠를 입었는데 몸에 달라붙는 핏이 예사롭지 않더라, 등등 시시콜콜한 이야기.

<운동하는 거 있냐고 물어봤는데 따로 하는 운동은 없대요. 근데 어쩜 그렇게 몸이 좋지?>

얼씨구. 직업이 태권도 사범인데 뭔 소리래. 스크롤을 내리자 나와 같은 생각을 한 회원 하나가 달아놓은 신랄한 댓글이 보였다.

<컨셉인가 보죠. 몸 관리하는 거 숨기는 애들 꼭 있어. 난 그런 애들 별론데>

근데 막상 읽어보니 짜증이 난다. 지가 뭔데 별로래, 이람호는 너 누군지도 몰라. 댓글 작성을 클릭하고 더듬더듬 엄지로 화면을 눌렀다.

<님, 이, 별, 로, 든, 말, 든, 노, 관, 심.>

등록 아이콘에 손을 가져갔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됐다, 이런 시비는 걸어서 뭐해.

그때 진동이 울리고 이람호가 보낸 문자가 떴다.

<오늘은 출근해?>

고민하다 짧게 답장을 적었다.

<응.>

<너 없는 새에 김세나 씨가 방범 시스템 설치해놨어. 주방 문에도 오토락 달았고. 무슨 일 있으면 일단 주방으로 가서 문 닫고 싱크대 아래쪽에 있는 비상벨 눌러. 늦어도 3분 내로 사람 도착한댔어>

한참 후에야 도착한 장문의 문자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세나 이 기집애, 기어코 일을 쳤구먼. 전전긍긍하며 발만 구르다 택시가 멈추자마자 구르듯 내렸다.

“…….”

건물 입구와 지하 계단 천장에 새카맣고 커다란 감시 카메라가 붙어 있었다. 감시용이라기보단 위협용으로 보였다. 이거 봐, 찍고 있다. 허튼짓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듯한.

당장 전화를 걸었다. 벨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연결되었다.

“야! 이 미친 기집애야!”

이게 다 돈이 얼마야. 아무리 부자라지만 이게 얼마냐고. 벌컥 외치자 깔깔대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 사랑이라고 생각해]

“당장 환불해. 뭐 이렇게까지 해, 돈이 썩어?”

[안 썩어. 돈 많지만 많은 만큼 다 쓸 데 있어. 근데 너한테 그만큼 쓰고 싶어]

“…….”

[여태 카메라 하나 안 달았던 게 이상한 거야. 다른 것도 아니고 술집이면 온갖 미친놈 다 오는데]

통상적으로는 그렇지만 이곳은 어차피 오는 사람만 오는 가게다. 조금이라도 소란이 일면 소문이 쫙 깔려버리기 때문에 이미지를 중시하는 게이들은 알아서 몸을 사린다. 일전에 온 블랙이 특수한 경우였다.

“그래도 이거 너무 비싸잖아. 말도 없이 덜컥 이러면 어떻게 해.”

[너 있을 때는 못하게 했을 거잖아. 틈을 노린 거지, 뭐]

“…어디야? 일단 얼굴 보고 얘기하자.”

[됐어, 나 당분간 바빠. 개인전 일정 잡혀서]

김세나는 잘나가는 신비주의 화가다. 돈 많은 꼰대들이 줄을 서서 그녀의 새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나 미술이나 해볼까. 고3의 초봄 즈음에 김세나가 덜컥 내뱉은 말이었다. 미술은 왜? 묻자 태연하게 그랬다. 미대 가려고.

- 아는 언니가 이번에 졸업작품 전시회 한대서 구경 갔거든. 근데 보다 보니까 이 정도는 나도 그리겠다 싶더라고.

헛소리라고만 생각했다. 야, 그렇게 개나 소나 다 할 일이면 예술이 왜 예술이냐? 코웃음을 치려다 그만두고 맘에도 없는 응원을 보냈다.

- 그래, 한 번 해봐. 니가 미적 감각은 있지.

- 니 생각도 그렇지? 역시 우리 태경이뿐이야. 날 믿어주는 건 너 하나라니까.

- …….

- 사실은 용돈 모아 놨던 걸로 학원도 이미 끊어놨어. 엄마는 결사반대하는데 한 달이라도 다녀보지 뭐.

그로부터 반년 뒤, 김세나는 서울 유명 대학의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김세나만 태연했다. 내가 뭐랬어, 이 정도는 그릴 수 있댔잖아.

“…그래, 축하해.”

자신이 가진 재능이 뭔지 깨달을 기회를 갖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이람호가 아버지의 도장에서 태권도를 시작하고, 김세나가 지인의 졸업작품 전시회에 초대받았던 것처럼.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씁쓸해졌다. 나는 열아홉의 김세나를 마음 깊이 믿은 적이 없다. 그냥 잠깐 지나가는 변덕이나 헛소리려니 생각하고 입에 번드르르한 말 한마디 건넸을 뿐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김세나는 나를 믿는데,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나는 누구도 믿지 못한다. 말로 다 못할 자괴감이 들었다.

“통화했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이람호가 서 있었다. 오늘도 역시 가벼운 코트 차림이었다. 정말 춥지도 않나. 목도리에 코를 파묻으며 위아래로 살피자 의아한 눈을 한다.

“보는 내가 춥다.”

“…응?”

“목도리라도 해. 오늘 영하 5도인 건 알아?”

“그래?”

핀잔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순수하게 궁금할 지경이었다.

“근육이 많으면 추위를 안 느껴?”

“딱히 그렇지도 않을 걸…? 내가 특수한 거지.”

특수한 건 아는 모양이다. 입을 삐죽대다 또 괜히 심술이 났다.

“너 따로 운동하는 거 없다고 했다며? 손님한테.”

“내가?”

“운동이 업이면서 따로 하는 운동 없다는 건 뭐야? 컨셉이야? 별로 노력 안 해도 이 정도 된다고 어필하고 싶은 거야? 그런 거 좀 밥맛없는데.”

이람호로서는 억울할 상황이었다. 난데없이 밥맛없다느니 이게 다 뭐란 말인가. 그러나 이람호는 눈썹을 살짝 모은 채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듣고 있는지 짐작해보겠다는 듯이.

“김세나 씨랑 싸웠냐?”

“…….”

“왜 갑자기 시비야.”

이렇다니까.

“넌 한 번을 그냥 안 넘어가더라.”

“뭐? 뭐가?”

“눈에 빤히 보이는 것도 가끔은 눈감아주는 게 사랑 아니야?”

코웃음을 칠 거라 생각했다. 뭐라는 거야? 되물으면서. 그럼 나도 그러게, 뭐라는 거지, 하며 웃어넘길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람호는 한층 더 진중한 얼굴을 하는 것이었다. 내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듯이.

“…그런 거야?”

백지상태의 애정.

“뭐래, 헛소리하는 거지.”

“왜 헛소리를 하는데?”

“…….”

“내가 다 귀담아듣는 걸 알면서.”

그렇게 따져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조용히 공룡만 한 카메라만 올려다보았다. 이람호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었다.

“그 말은 누가 했어? 뭐 운동을 따로 안 하네 어쩌네…….”

“게이 커뮤니티에 올라왔어. 가게에 너 보러 오는 애들 많던데.”

“게이 커뮤니티? 그게 뭔데?”

“뭐겠냐, 게이들끼리 인터넷 카페 같은 거 만들어서 노는 데지.”

아아, 이람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게도 아무 생각이 안 드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뭐가?”

“너 우리 가게 오는 게이들한테 인기 많다니까.”

“그게 왜?”

놀랍다, 놀라워. 인간이 이렇게까지 세상만사에 아무 생각이 없기도 힘들겠다.

“아니, 기분 안 나쁘냐고. 보통 나쁘다고 하잖아.”

“인기가 많다는데 왜 기분이 나빠?”

“그냥, 여자도 아니고…….”

“보통 기분 나쁘다고 그래? 게이한테 인기 있는 남자들이?”

그렇지, 보통 그렇게 말하지. 고개를 끄덕이자 이람호가 흠, 하며 제 턱을 한 번 매만졌다.

“진짜 기분 나쁘고 불쾌하면 게이한테 인기 있다는 말 자체를 안 하지 않겠어?”

“…….”

“게이들이 나 좋아하는데 나는 기분 나쁘다, 이거 그냥 그런 거 아냐? 게이들이 나보다 급 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데 걔네들은 이상하게 날 좋아한다더라, 아, 물론 난 게이가 아니다. 근데 게이들은 내가 좋다더라. 어휴, 죄 많은 내 인생.”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 내 앞에 있는 게 이람호가 아니라 김세나인가 했다.

“너 혹시 나 테스트하는 거야? 자꾸 그런 거 물어보는 게.”

이어지는 날카로운 질문. 가슴이 뜨끔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춥다, 들어가자.”

“말 돌리고?”

“아, 춥다고.”

콜록콜록, 부러 요란하게 기침을 했다. 이람호는 긴가민가하면서도 내 뒤를 따라왔다. 한층 안전해진 가게는 입구부터 때깔이 달라 보였다.

…아니, 진짜 달랐다. 분명 회색이었던 바닥이 하얀색이 되어 있다.

“청소를 얼마나 안 했으면 때가 시커멓게 끼었더라.”

내 마음을 읽은 듯 한 마디 던진 이람호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며칠 안 나온 사이에 완전히 이람호의 가게가 된 것 같았다.

“자영업이 적성인 거 아냐?”

“지금도 자영업하는데.”

그건 그렇지. 수긍하고 불을 올렸다. 조명도 어째 환해진 것 같았다.

“너야말로 가게가 더러워서 감기 달고 산 거 아냐? 매일 청소해도 매일 먼지 구덩이던데, 어제부터 간신히 타일 색깔이 보이더라.”

“…컨셉이야, 컨셉. 빈티지 몰라?”

“빈티지가 쓰레기장이라는 뜻이던가?”

아무튼 한 마디도 안 지는 거 하곤. 승부를 포기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김세나의 말대로 오토락이 달려 있었다. 후줄근한 가게에 있기엔 지나치게 첨단 문물이었다.

“못 산다, 진짜 이 기집애…….”

혼자 중얼거리는데 이람호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비밀번호도 설정해놨어.”

“…뭘로?”

“니가 늘 쓰는 거.”

그리고는 씩 웃고 멀어져가는 것이었다. 황망한 나머지 눈만 끔벅이며 놈이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저게 누군데.

며칠 영업시간이 늦어졌던 탓인지 밤 10시가 지나도록 손님이 들지 않았다. 할 일이 없어 멍하니 있는 나를 두고 이람호는 여전히 혼자 바빠 보였다. 내내 청소만 했다더니 오늘도 청소였다. 빗자루로 구석구석 쓸어내고는 테이블을 하나씩 물걸레와 마른걸레로 번갈아 닦기 시작한다.

좀 거들어야 하나. 혼자 농땡이 치는 기분이라 괜히 찜찜하다. 고민하다 물담배를 꺼내왔다. 숯을 넣고 향료를 채우는 동안 모든 테이블을 한 번씩 훔쳐낸 이람호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그게 ‘후카’야?”

“…어.”

“이 냄새였구나.”

“어?”

“너한테 배어 있는 거.”

나한테? 나도 모르게 소매를 들어 킁킁거렸다. 별 냄새는 안 나는 것 같은데.

“매일 조금씩 다른 냄새 나더라고. 과일 향 같은 거 날 때도 있고 이런 꽃향기일 때도 있고.”

“…아, 응. 이거 맞아. 연기 때문에 냄새가 뱄나보네.”

“응, 좋더라.”

뭐가? 되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이람호를 맴도는 피쉬가 너무나 포근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

대답도 저렇게 따뜻하고 부드러울까 봐.

딸랑, 종소리가 울린다. 출근한 뒤 첫 손님이었다. 반가운 얼굴로 돌아본 자리에는 검붉은 색 피쉬의 남자 하나와 진녹색 피쉬의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둘 다 야구모자에 야구점퍼, 일자 바지에 스니커즈 차림이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봐도 게이 같지 않았다.

“여기 뭐예요? 술집이에요?”

먼저 들어온 남자가 물었다. 그럼 그렇지. 근처에 갈 만한 가게 없나 헤매다 우연히 흘러든 헤테로인 듯했다. 아주 없는 일은 아니다. 예약이 다 차 있다거나 아직 오픈 전이라는 대답으로 둘러대고 내보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내가 순간적으로 계산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으니.

“자리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두 분이십니까?”

직업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는 이놈의 알바생이었다.

“술 파는 데는 맞아요?”

“원하시면 물담배도…….”

“아, 저기, 잠깐만.”

메뉴얼을 줄줄 읊으려는 이람호를 얼른 막아섰다. 남자 둘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눈빛도 피쉬도 척 봐도 질이 나쁘다. 아무래도 안 좋은 징조였다.

“죄송한데……, 저희 가게 일부러 찾아오신 건 아니죠?”

“아닌데? 이딴 술집이 뭐 대단하다고 일부러 찾아와요?”

대답하는 꼬라지 봐라. 속으로만 혀를 차고 잠깐 머리를 굴렸다. 이람호는 그제야 뭔가 낌새를 챈 듯 말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는…….”

“뭐가 자꾸 죄송해요? 죄송할 말을 안 하면 되는 것 같은데.”

“…….”

“뭔데요? 아가씨 끼고 와야 돼요? 남자끼린 입장 안 돼?”

목소리가 높아지자 술 냄새가 훅 풍긴다. 심지어 어디서 이미 한잔 하고 온 거잖아……. 난처함에 미간을 찌푸리는데 이람호가 상체를 쑥 내밀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아직 영업 시작 전이어서요.”

이 눈치를 진작 발휘해줬으면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수습이 먼저였으므로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그러게요, 아직 영업을 안 하네요.

“뭔 개소리야. 니가 방금 테이블 안내해준다며?”

대번에 반말이 나온다. 이 미친 게 어디서, 욕부터 뱉어주려 하는데 이람호가 빨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오락가락하네요.”

“뭐? 장난해?”

“죄송합니다, 손님.”

그리고는 머리까지 숙이며 재차 사과하는 것이었다. 이람호가 누군가에게 머리를 숙이다니, 그 자체로 충격적이라 그만 말을 잊어버렸다. 진상 둘은 그의 사과가 드디어 성에 찼는지 흥, 하며 발길을 돌렸다.

낄낄대고 나서는 뒤통수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 대만 딱 때려주면 소원이 없겠다. 놈들이 문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밖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서로의 허리를 감싼 남자 둘이 안으로 들어섰다.

“사장님, 오랜만!”

아청과…, 그의 새 애인인 듯했다. 아청은 팔에 반깁스를 한 채였다.

“어……, 잘 지냈어요?”

인사를 나누는 동안 진상들은 문에 선 채 이쪽을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저들끼리 뭔가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나 훤히 보인다. 각오를 다지고 마음을 비웠다.

“아, 씨발. 술맛 버리게.”

아니나 다를까 그 새를 못 참고 들으라는 욕이 날아들었다. 나도, 이람호도, 아청과 그의 애인도 동시에 굳었다. 진상들은 문을 반쯤 열고 선 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서로에게 하는 말인 척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야, 너는 찾아도 어떻게 이런 델 왔냐.”

“닥쳐라, 후장 털어버린다.”

“너나 뒷구멍 조심해라, 여기 계속 있다간 존나 털리겠는데.”

바늘구멍처럼 작고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는다. 검붉은 색이었던 피쉬가 어느새 시커메져 있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사람은 그토록 쉽게 블랙이 된다.

“어디서 똥냄새 안 나냐?”

“누가 질질 흘리고 다니나 보지.”

이람호는 저들이 왜 저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나와 아청과 그의 애인만이 새파랗게 굳어 있었다. 진상, 아니 블랙은 실컷 웃을 만큼 웃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똥냄새 잘 맡고 갑니다, 번창하십쇼.”

문이 닫혔다. 종소리도 났다. 한참 이어진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청이었다.

“길 가다 버스에 치여서 확 뒈져버려라.”

이 정도 저주의 말은 귀엽지. 나도 모르게 픽 웃었다. 아청의 애인도 조금 표정이 풀어졌다.

“버스 기사는 무슨 죄야. 하수도에 빠져 뒈지라고 하지.”

“버스에 치여서 하수도에 빠져 뒈졌으면 좋겠다.”

“그래, 아무튼간 뒈졌으면 좋겠네.”

이람호는 그제야 상황을 대충 알아차린 것 같았다. 피쉬가 슬그머니 뾰족해진다.

“…방금 뭐야?”

“게이바인 거 알고 똥구멍이 어쩌니 하고 간 거야.”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대꾸해서 어쩔 건데. 빨리 가던 길 가게 두는 게 낫지.”

“그래도 저딴 소리를…….”

“너도 아까 저 새끼들 지랄하는 거 웃어넘기고 보냈잖아. 똑같은 거야.”

물론 나도 아까는 맞지랄을 놓으려 했다. 사람이란 게 그렇다. 잘 보이고 싶은 상대의 일에 한해서 정의의 사도가 되는 법이다.

“…사장님, 저희 오늘은 그냥 갈게요.”

애인과 뭔가 상의하던 아청이 조심스레 말했다. 하긴 마음이 상하면 술맛도 떨어지는 법이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간만에 한잔 하러 왔을 텐데.”

“사장님이 사과할 게 뭐 있어요. 저런 새끼들 한두 명도 아니고.”

그 말에 이람호의 피쉬가 크게 흔들렸다. 저런 새끼들이 한두 명도 아니라고?

“내일 좀 일찍 올게요. 내일부턴 제시간에 여는 거죠?”

“오늘도 제시간에 열었어요.”

“그렇구나.”

씩 웃은 아청이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내일 뵈어요, 그럼.”

“…그래요.”

“속상해하지 마시고.”

아청의 애인도 목례를 했다. 다시 한 번 현관 종이 딸랑, 울렸다. 다시 이람호와 둘만 남았다. 동시의 놈의 피쉬가 내 쪽으로 뾰족하게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너희 학원에도 이상한 애들이나 학부모 있지?”

모니터 프로그램은 알기 쉽고 단순하게 되어 있었다. 마우스로 이곳저곳 클릭해보며 묻자 이람호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넌 그런 사람 보면 무슨 생각해?”

“…무슨 생각?”

“뺨 때리고 싶다거나, 개망신을 주고 싶다든가, 뭐 그런 거.”

잘생긴 눈썹 사이가 한껏 좁아진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젓는다.

“글쎄, 이왕이면 대화로 좀 풀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대화라…….”

영민한 이람호는 한순간도 잘못 짚지 않는다. 나는 시시때때로 이람호를 시험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지 어떤지.

“나는 아무 말도 하기 싫어져.”

내가 아무리 뒤틀리고 꼬여 있다 해도.

“혹시나 말이 통하는 사람이어서 내 말을 알아들을까 봐.”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

“…무슨 소리야?”

“나는 저런 애들이 평생 저런 인간으로 살았으면 좋겠거든. 몰상식하고, 비논리적이고, 사람을 봐가며 까부는 양아치 찌끄러기로.”

“…….”

“평생 자기 잘못을 돌이켜보거나 뉘우칠 기회 같은 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하고.”

지금도 가끔 바야바를 떠올린다. 두려운 것은 단 한 가지다. 바야바가 혹시나 조금이라도 괜찮은 인간이 되어 있을까 봐. 과거에 나나 김세나에게 행했던 폭력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원래 그런 인간인 척 멀쩡한 얼굴로 살고 있을까 봐.

“그래서 내버려두는 거야. 저러고 살다 뒈졌으면 해서.”

이람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별수 없는 일이었다. 나라도 질릴 것 같으니까.

불을 당겨 놓은 물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고 깊이 빨아들였다. 어지럽도록 달큼한 장미 향이 폐부로 스민다. 머리가 복잡할 땐 이만한 게 없었다. 술 한 병도 까놓으면 좋지만 잔소리가 쏟아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이람호는 입을 다문 그대로 걸레를 들고 사라졌다. 그리고는 다시 가게 구석구석의 먼지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청소 못 해 죽은 귀신이 들러붙은 게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저 녀석 월급을 얼마를 줘야 하지. 시급이야 대충 말해뒀지만 최소 두 사람 몫을 거뜬히 하고 있는 걸 볼 때마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가리켰다. 여전히 손님은 한 팀도 오지 않았다. 텄다, 이번 달은 적자 확정이군.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리는데 카운터 위로 이람호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고민해봤는데.”

깜짝이야. 놀란 가슴을 붙잡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놈은 더없이 태연한 얼굴이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뭐가?”

“아까 한 얘기.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다고.”

“…….”

“그런 놈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잘 사는 것과 평생 저러고 살다 뒈지는 거……, 나도 후자 쪽이 마음에 드네.”

단정한 입술에 길고 가느다란 미소가 걸린다. 나도 모르게 입을 헤벌리고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도 딱히 진심으로 그런 놈들과 대화해보겠다고 한 건 아냐.”

“…….”

“그냥 입에 발린 말 좀 해봤어.”

“…뭐하러?”

“너한테 잘 보이려고.”

“…….”

“그렇게 말하면 니가 날 좀 좋게 볼 줄 알았지.”

말을 마친 이람호가 마른걸레로 카운터 위를 슥, 훔쳐내고 돌아섰다. 놈의 등에 휘감긴 피쉬가 봄철 나비처럼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내 비위 맞추려고 거짓말했다고?”

“응.”

대답에 망설임도 없다. 피쉬는 여전히 살랑, 살랑.

“난 그런 거 별론데.”

괜한 심술에도 까딱하지 않는다. 그래? 느긋하게 되물으며 뒷정리에 집중할 뿐이다.

“그럼 좀 더 연구해볼게.”

진짜 너 누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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