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나는 정말로 10년을 (3/10)

3. 나는 정말로 10년을

“저 새끼가 왜 여기 있어?”

김세나는 자정 즈음 들이닥쳤다. 당분간 가게 근처에 오지 말라는 문자는 살뜰히 씹어 드신 듯했다. 손님이 빠져나간 테이블을 부지런히 정리하던 이람호는 뒷목을 움켜쥐고 곧 쓰러질 기세인 김세나를 보더니 고개만 한 번 갸웃했다. 그야 의아하겠지. 이람호 입장에서는 전혀 모르는 여자일 텐데.

“어? 자기야! 쟤가 왜 여깄냐고!”

“입 다물고 나 좀 보자.”

아예 이람호에게 삿대질을 해대는 김세나를 억지로 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녀석은 그제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었는지 욕설을 멈췄다. 이 눈치를 평소 인간관계에서 좀 발휘하면 얼마나 좋을까.

“너 별일 없었어?”

“나? 나 별일 없지.”

“어제 그 새끼랑 연락처 주고받았으면 당장 번호부터 바꿔. 그 새끼 어제 장도리 들고 나 죽이러 쳐들어왔었어.”

김세나가 두 눈을 방울만 하게 떴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괘, 괘괘괘괜……, 더듬거리는 녀석의 말을 끊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바로 문 잠가서 아무 일 없었어. 이람호가 와서 도와주기도 했고.”

“…저 새끼가?”

“당분간 이람호가 가게 일 도와줄 거야. 아무 소리 하지 마.”

“뭐? 쟤가 가게 일을 왜 도와줘? 지는 일 안 해? 백수래? 저 나이에?”

뒷말은 아예 들리라는 듯 빽 질러버린다. 야, 이 웬수야. 나는 김세나의 등짝을 찰싹 때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아버지 도장에서 일하는데 새벽 시간이 빈대. 마침 나도 알바 필요하고, 어제 그 새끼 언제 또 올지 몰라서 당분간만 나와 달라고 했어.”

김세나의 표정이 금방 구겨졌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녀석의 어리광을 받아줄 수 없었다.

“오지 말라 그래. 안 그래도 내가 너 걱정돼서 경호업체 알아봤어. 경비 붙여줄게. 문도 바꿔주고 세콤도 달아줄게.”

“헛소리 말고.”

“아이씨 나 저 새끼 진짜 싫은데…….”

“넌 뭐라고 할 자격 없어. 어제 그 새끼 달고 온 게 누구야?”

“내가 그런 새낀 줄 어떻게 알……!”

뭐라 소리치려던 김세나가 이내 시무룩해졌다. “…미안.” 웅얼거리는 말에 나도 모르게 한숨부터 나온다. 잔뜩 풀죽은 녀석을 달래주려다가 그만두었다. 김세나도 좀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몇 번을 말하냐. 트젠이라고 다 좋은 사람 아니랬지. 어제 그 새끼는 트젠도 아니긴 했지만, 어디나 사람 사는 꼴은 다 똑같고 일정 비율로 이상한 새끼도 반드시 있어. 처음 만나자마자 간 쓸개 다 빼주는 짓 좀 하지 말란 말이야.”

“야, 내가 무슨 간 쓸개를 빼줬냐. 그냥 만났는데 좋은 사람 같길래 친하게 지내자 그런 걸 가지고….”

“그게 간 쓸개 빼주는 거야! 사람을 좀 천천히 보란 말이야. 넌 예쁘고 돈도 많은 게 뭘 믿고 그렇게 겁이 없어? 너 같은 애 하나 잡아서 벗겨 먹으려고 눈에 불 켜고 다니는 새끼들이 한두 명일 것 같아?”

하수들은 가진 거 없고 외로운 여자일수록 속여먹기 쉽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상 잘 속는 건 김세나 같은 여자들이다. 누군가 내게 난데없이 호감을 표현해도 의심하지 않는 여자. 나는 이 정도의 호의쯤은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여자.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보이스피싱에 걸려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남도 잘 의심하지 않는다.

“…알았어, 잘못했어. 앞으로 검증 안 된 사람은 가게에 안 데려올게.”

“내가 지금 그런 얘기 하는 게 아니잖…!”

“태경아.”

똑똑, 주방 문을 가볍게 노크한 이람호가 문 위로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어우, 키 크다.

“칵테일 주문이 들어왔는데 내가 만들 줄 모르는 거라서.”

“…어, 어, 그래. 이리 줘.”

문을 열고 주문서를 받아들었다. 확실히 오늘 막 시작한 초보에게는 어려운 칵테일뿐이었다.

“만드는 거 옆에서 봐도 될까?”

“어어…….”

이람호는 참으로 모범적인 알바생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서 할 수 없는 일은 의욕적으로 배운다. 기본적으로 성실한 놈인 건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장을 뛰는 미친 짓은 못 했을 테니까.

“아 저 새끼 진짜 더럽게 뻔뻔하네…….”

김세나가 구시렁거렸다. 나도 모르게 녀석의 옆구리를 세게 찔렀다. 야, 인마, 짜샤. 김세나는 악! 소리를 내더니 성희롱으로 신고하겠다며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신고해라, 신고해. 이틀 연속 지구대 출석 좀 해보자.”

“할 거야! 할 거라고! 넌 진짜 간도 없고 쓸개도 없고 배알도 없는 새끼야!”

“조용히 안 해? 이게 진짜.”

“나 같으면 차라리 부모를 세 번 죽인 원수랑 일하겠다! 어떻게 저 새끼를 가게에 아예 들여놓을 생각을 해?”

하여간 극단적인 계집애. 조금의 필터도 없는 욕설에 조마조마했다. 그때 우리가 옥신각신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람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태경아, 계속 궁금했는데.”

“…예? 네?”

“네 친구, 나랑 아는 사인가?”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피쉬도 잠잠하다. 이람호는 그저 궁금해서 묻고 있었다. 이 여자는 대체 누구기에 날 이렇게 싫어하는가.

“뭐? 너 나 몰라?”

흥분해서 버럭 소리친 것은 김세나였다. 이놈의 지지배야, 그럼 알겠냐.

“너 나 기억 못 해? 나 까먹었어? 와, 이거 완전 붕어새끼 아니야?”

“김세나, 야.”

“너 막, 운동할 때 뇌를 쭉 뽑아서 줄넘기했다가 도로 말아서 머리에 넣고 그랬니?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나를 까먹어?”

“김세나야, 잊으면 안 돼. 너 이람호랑 알던 거 십 년 전이야.”

십 년 전의 너는 지금처럼 어여쁜 이십 대 여성이 아니었단다. 그러나 완전히 꼭지가 나가버린 김세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이람호는 더더욱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나랑 십 년 전에 알았다고? 고등학교 때?”

“아……. 그게……. 그러니까…….”

“그래! 니가 나한테 운동화도 던졌었잖아, 이 개새끼야!”

“…얘가 그때는……. 우리 학교 애였거든.”

이람호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우리 학교?

“우리 학교 남고였잖아?”

“…그래, 그러니까.”

이람호의 피쉬가 반짝반짝, 혼란스러운 빛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냉정을 되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가 마침내 모든 것을 이해한 기색으로 탄식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었을 때, 김세나는 뭐 잘한 게 있다고 콧김을 흥, 뿜었다.

김세나가 처음부터 대놓고 이람호를 싫어했던 건 아니다. 녀석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뭐든 깎아내리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 눈치를 보기 때문에 정도를 지나치는 일은 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김세나에게 이람호가 대놓고 건수를 물려준 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이람호 운동화 투척사건이었다.

- 태갱, 매점 가자.

- 돈 없어.

- 내가 너한테 돈 내라고 할 것 같아?

김세나가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흔들었다. 미친 지지배, 매점에서 뭔 카드야. 타박하고 주머니에 남은 동전을 있는 대로 긁어모았다. 한 달 용돈 5만 원으로 매일 매점에 들르기엔 형편이 궁했다.

- 야, 눈물이 차올라서 똑바로 볼 수가 없네. 치워, 내가 사줄게.

- 어제도 니가 사줬잖아.

- 내 마음이 항상 널 향한 사랑으로 충만해서 괜찮아. 가자, 사줄게.

- 기다려봐, 소라빵 먹을 돈은 나올 것 같아.

백 원짜리 세 개, 오십 원짜리 세 개, 십 원짜리 다섯 개……, 도합 오백 원이 있었다. 쳇, 혀를 차고 김세나의 옆구리를 찔렀다.

- 모자란다. 이백 원만 꿔줘.

- 불쌍한 새끼야, 그냥 얻어먹어라. 누나가 햄계란 샌드위치에 우유도 사줄게.

- 누님, 평생 모실게요.

자존심도 없이 김세나를 쫄래쫄래 따라나섰다. 매점은 교실이 있는 건물을 나와서 옆문 쪽으로 가는 방향에 있었다. 자연히 매점에 가려면 운동장 스탠드 위를 지나게 된다. 나도 모르게 운동장 쪽을 살폈다. 이람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안 뛰나? 의아함에 갸웃거리는데 김세나가 나를 툭툭 쳤다. 그리고는 쉿, 하며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보여주었다. 자그마한 유리병이었다.

- 이게 뭔데?

-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샤-넬- 넘버 파이브란다. 향 맡아볼래?

또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샤넬이었다. 향수라니. 상상만으로 머리가 아파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학교에 그걸 왜 가져와. 뺏기면 어쩌려고.

- 그래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잖아.

- 디게 쪼끄마네. 그 쪼끄만 게 그렇게 비싸?

- 미니어처라 그래. 본품은 주머니에 못 넣지.

미니어처는 또 뭐야. 김세나가 종알거리는 말들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차피 김세나도 나의 이해를 바라고 하는 말들은 아닐 걸 알기에 대충 고개만 주억거려 주었다.

- 집에 갈 때 뿌리고 갈 거야.

- 난 향수냄새 싫은데.

- 이건 진짜 좋아. 막 코 찌르는 냄새도 아니고……, 어.

신이 나서 떠들던 김세나가 순간 멈춰 섰다. 자연히 나도 따라 멈췄다. 마악 건물에서 나오던 이람호를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이람호는 나와 김세나를 한 번 보더니 아무 반응 없이 운동장으로 향했다. 슬리퍼 차림에, 끈 달린 운동화를 손에 쥐고 있었다. 어지간히 낡고 해진 운동화였다. 불볕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땀복 입고 달릴 날씨는 아니다. 김세나가 얼굴을 팍 찌푸렸다.

- 으아, 징하네.

들릴 듯 안 들릴 듯 애매한 거리였다. 때문에 나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김세나가 그러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고, 이람호도 묵묵히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 저 새낀 땀띠도 안 나나? 보는 게 더 고문이야.

- 익숙하겠지, 뭐.

- 솔직히 정상이 아닌 거 같아. 이 날씨에 저게 말이나 되는 짓거리야? 시키는 놈이나 시킨다고 하는 놈이나.

- 그만해.

지나치다 싶었다. 어깨를 툭 쳐봤지만 소용없었다. -왜, 뭐, 내가 틀린 말했어? 어디선가 튀어 나온 양아치 김세나가 이미 샤넬이 어울리는 여자 김세나를 멀리 치운 뒤였다.

- 솔직히 병신 같아. 저러는 새끼나 저러는 걸 좋다고 헤벌레 보는 새끼나…,

슈웅, 무언가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뻐억, 김세나의 뒤통수를 후려치더니 땅으로 떨어졌다. 악 소리를 낸 김세나가 주저앉고, 녀석의 손에서 향수병이 빠져나갔다.

- …….

먼저 떨어진 것은 닳고 해진 운동화였다. 아직 안 묶은 끈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람호가 무시무시한 눈을 하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손에는 아직 안 던진 운동화 한 짝을 든 채로.

섬뜩했다. 푸른 피쉬의 끝자락이 온통 뾰족했다. 저거 잘못 건드리면 진짜 뒤지게 맞겠구만. 나는 당장 김세나를 끌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김세나는 웅크린 채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코를 찌르는 알콜 향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낙하 시의 충격으로 뚜껑이 날아간 녀석의 향수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내용물을 꼴꼴꼴 토해내고 있었다. 뒤통수를 움켜쥔 채 그 모양을 바라보는 김세나는 차라리 향수 대신 제 피가 빠져나가길 바라는 사람 같았다. 코끝부터 새빨개지더니 이를 꽉 악문다. 이어 욕을 일발 장전한 입술이 완전히 찌그러졌다.

- 어떤 새끼야, 씨팔!

돌아보자마자 이람호를 발견한 김세나의 눈에 불이 붙었다. 당장 달려들 기세인 김세나를 얼른 붙들어 당겼다. 워, 워.

- 놔 봐. 아 쫌, 놔 봐!

- 진정해, 진정. 니가 먼저 긁었잖아.

- 뭐? 너 지금 저 새끼 편드는 거야?

- 편이고 자시고 니가…….

- 개새끼야! 이거 완전 쓰레기 배신자 새끼 아냐!

아이고, 일 났다. 완전히 돌아버린 김세나는 누구도 말릴 수 없다. 그렇다고 놔주면 주제도 모르고 이람호에게 덤비다가 개떡이 되도록 맞을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열심히 김세나의 자유분방한 주먹을 잡아 내렸다. 이게 다 널 생각해서란다.

- 매점이나 가자. 향수 이거 내가 다시 사줄게. 응?

- 니가 무슨 돈으로! 소라빵 사먹을 돈도 없는 거지새끼가!

- 아, 급식비 빼서 사줄게. 가자, 응?

열심히 어르고 달래봐도 김세나는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이가 없었다. 이 계집애는 지가 잘못해놓고 왜 이렇게 뻔뻔한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이람호는 어디 한 대만 쳐보라는 듯 살기등등한 얼굴로 김세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쨌든 저놈이 사라져야 일이 끝날 것 같았다. 나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놈을 향해 말했다.

- 야, 이람호. 미안하다. 가던 길 가자.

- …….

- 니 운동화에 맞아서 얘네 엄마 선물도 다 깨졌어. 그걸로 쌤쌤하고 끝내면 안 되겠냐?

내가 해냈지만 기가 막힌 임기응변이었다. 남학교 운동장 스탠드에 풍겨 오른 생뚱맞은 향수 냄새에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던 구경꾼들도 그제야 납득한 얼굴을 했다.

- 얘 좆밥이야. 너한테 덤벼봤자 아무것도 못 해. 그러니까 그냥 가던 길 가자고.

- 대변인이냐?

이람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눈빛이 아직도 살기등등했다.

- 니가 저 새끼 대변인이냐고.

- 아니 지금 말싸움 하자는 게 아니라….

- 야, 너 팔자 럭셔리하다. 좋은 시다바리 달고 다니네.

어슬렁거리며 다가온 이람호가 김세나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미치겠네. 김세나는 이제 완전히 맛이 간 눈을 하고 있었다.

- 심태경, 말로 할 때 놔라.

- 그래, 그 새끼 놔라. 어쩌나 보게.

이람호가 운동화 끈을 쥐고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저 새끼 저거 또 던지려고. 태권도가 아니라 야구를 했어도 에이스 먹었을 새끼다. 저 거리에서 이렇게 정확하게 헤드샷을 날리다니.

- 안 그래도 기분 좆같은데 별 파리새끼 같은 게 깔짝거려…. 야, 그 새끼 놓으라고.

- 아, 진짜, 쫌…….

- 거기 뭐야! 왜 그래, 싸워?

담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구원처럼 들렸다.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모여 있던 인파를 헤집고 달려온 담임은 살벌하게 서로를 노려보는 이람호와 김세나를 번갈아 보더니 내게로 시선을 향했다. 원래 싸움판이 벌어졌을 땐 가장 가까이서 말리던 놈에게 사정청취를 하는 법이다.

- 뭐야? 왜 그래?

- 그게, 저……. 오해요, 오해 때문에.

- 오해?

- 예에, 그, 뭐냐…. 쟤가 실수로 운동화 놓쳐서 얘가 맞았는데, 일부러 던진 줄 알고, 네, 얘가 엄마 생신 선물 산 것도 깨지고, 그래서 잠깐 좀….

흐음,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담임이 곧 혀를 찼다. 여기서 일을 크게 키워봤자 이득 볼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이다. 대충 훈계나 하고 넘어갈 타이밍이었다. 담임은 여봐란 듯 이람호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 이람호, 아무리 그렇다고 너는 인마. 운동한다는 새끼가, 저렇게 쥐방울만 한 애를 패려고 그러면 돼? 일부러 한 게 아니어도 오해를 샀으면 우선 니가 사과했어야지.

- …….

- 새끼, 눈 그렇게 뜰래? 그만하고 서로 사과해. 그럼 여기서 끝낼 테니까.

- 전 사과 못 하겠는데요!

김세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이 화상아. 뺨을 힘껏 꼬집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르고 열심히 옷자락만 잡아당겼다. 지지배야, 대체 뭘 믿고 이래. 씩씩대는 김세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담임이 이람호를 향해 물었다.

- 이람호, 너는? 너도 사과 못 하겠어? 둘 다 교무실로 갈까?

위험천만한 침묵이 흐른다. 나는 이람호의 피쉬가 조용히 들끓다가 서서히 가라앉는 모양을 숨도 못 쉬고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깊이 심호흡한 녀석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 아닙니다.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 그래, 잘 생각했어. 안 그래도 더운데 뭐 쓸데없는 데까지 열을 올려? 넌 시합도 얼마 안 남았잖아, 그치?

- 예.

- 그래, 고생 많은 거 다 아니까 힘내고. 응? 자식아.

담임이 이람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이람호는 이제 완전히 평온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마인드 컨트롤 능력이 굉장하구나. 새삼스레 감탄스럽다. 김세나가 좀 보고 배웠으면 싶었다.

- 김세준이, 너는 마지막까지 사과 못 하겠다 이거지?

다음 화살은 당연하게도 김세나에게 향했다. 김세나는 금방 뒤로 넘어갈 듯했다. 조그마한 얼굴이 온통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 넌 인마 오늘부터 교직원 화장실 청소야. 종례 끝나면 교무실로 와. 알았어?

- …….

- 새끼 저거 저 눈알 굴리는 꼬라지…….

정신 차려, 인마. 담임이 김세나의 머리를 한 대 딱 때리고 돌아섰다. 붙잡은 김세나의 팔이 점점 뜨거워졌다. 이럴 때마다 낯설다. 이 녀석은 뭐가 이렇게 쉽게 억울해질까. 나는 김세나를 말리느라 용을 쓰면서 슬그머니 이람호의 눈치를 살폈다. 놈은 잠잠했다. 모든 것에 무감각한 시선에 순간 조금 두려워졌다.

김세나는 그대로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불려갈 때까지 내게 한 마디도 걸지 않았다. 묻는 말에도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그 자리에서 제 편을 들지 않은 것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나로서도 도리가 없다. 아무리 봐도 김세나가 잘못한 일인데 뭐 어쩌란 말인가.

- 청소 도와줄게.

가방을 멘 채 교무실 앞에서 기다렸다. 똥 씹은 얼굴로 나오는 김세나에게 말하자 힘껏 노려보고는 가던 길을 가버린다. 이거 오래가겠구만. 거리를 두고 졸졸 따라가며 툭툭 불렀다.

- 세나야.

- …….

- 샤넬이 잘 어울리는 김세나야.

- 학교에서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목소리를 낮추며 돌아보는 얼굴에 살기가 가득하다. 그러나 알고 있다. 녀석은 내게 오래 화내지 못한다. 그 증거로 이미 피쉬의 움직임이 누그러져 있었다.

- 김세나를 김세나라고 안 부르면 뭐라고 부르나? 누나라고 부를까?

- 저리 꺼져. 지금 니 얼굴 보기 싫어.

- 미안하다니까. 근데 거기 청소 너 혼자 못해. 나 저번에 걸려서 해봤는데 담배꽁초 때문에 변기 막힌 칸이 한두 개가 아냐.

- 뭐가 미안한데?

걸음을 멈춘 김세나가 쏘아붙였다. 어, 이건 좀 난이도 높은 질문인데.

- 뭐가 미안해서 사과하냐고. 니가 뭘 잘못했는데?

- …….

- 말해봐. 니가 뭘 잘못했냐고.

- …글쎄 크게 잘못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 근데 왜 사과해? 너 그런 점이 진짜 사람 짜증나게 하는 거야. 알아?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내가 김세나의 독설들에 상처받지 않는 것은, 녀석이 정말 진심으로 내뱉는 말이 아닌 것을 ‘봐서’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나를 공격하고 싶지 않은 것이 녀석의 본심이라 할지라도 대놓고 짜증난다는 소리를 들으면 상처는 받는다.

- …내가 되게 잘못한 거야?

나는 알 수 있다. 눈으로 보고 구분할 수 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내게 악의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개중에 내게 악의가 없고, 나를 좋아하며,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골라 사귀는 것이 내게는 가능하다. 바꿔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골라서 사귄 사람에게까지 미움받으면 정말 답이 없다는 소리다.

- 너는…….

김세나의 피쉬가 금방 소란스러워진다. 녀석은 내가 조금이라도 풀 죽은 꼴을 보면 견디지를 못한다. 한참을 와글대는 피쉬를 달고 이만 악물던 김세나가 버럭 소리쳤다.

- 넌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으면 화 좀 내!

- …….

-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나만 나쁜 사람 만들 거야?

그리고는 홱 돌아서 달려가 버렸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쫓아가서 붙잡고 싶었지만 그 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질 않았다.

-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고백을 거절했을 때, 사귈 수 없다고 말했을 때, 혹시 친구로서도 끝났어야 하는 걸까? 나쁜 쪽으로 한 번 빠진 생각을 좀처럼 다시 건져 올릴 수가 없었다. 홀로 끙끙대며 교문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야.

퍼뜩 고개를 드니 이람호였다. 여전히 후드까지 눌러쓴 긴팔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아니, 달릴 때는 그렇다 쳐도 평소에 늘 이렇게 입고 있을 필요가 있나? 김세나와의 일이 있고 보니 이람호도 짜증스러웠다.

- 그 새낀 어디 갔어?

- …누구.

- 나한테 시비 털던 쥐방울 새끼.

담임 앞에서 보이던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태도는 오간 데 없고 당장 김세나를 잡아 죽일 눈을 하고 있다. 이놈 보소. 나도 모르게 경계하느라 미간을 찌푸렸다.

- 어딨는지 알면 어쩌게.

- 뭐?

- 잡아서 팰 거야? 너 시합 나간다며. 문제 일으키면 어차피 그런 거 다 도루묵이잖아.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패기 넘치게 질러 보았지만 이람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헛웃음을 한 번 짓더니 되물어올 뿐이었다.

- 근데?

그러게. 근데 어쩌라고.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 이런 건 나보다 이람호가 더 잘 알 테고, 잘 아는데도 기어코 김세나를 잡겠다고 이러고 있는 걸 텐데.

- …야, 미안하다. 걔가 너한테 지랄한 거 다 나 때문이니까 차라리 날 패라.

이 방법밖에 없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백하자 이람호가 한쪽 눈썹을 까딱 올렸다. 뭐?

- 내가 너 좋다고 쫓아다니는 거 꼴 보기 싫어서 괜히 너한테 그러는 거야. 넌 그냥 나 때문에 불똥 맞은 거라고. 그러니까 나랑 해결 보고 끝내자고.

맞으면 많이 아프겠지. 어금니를 악물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래도 이 이상 시끄러워지는 것보다는 내가 좀 맞고 끝내는 게 낫지 싶었다. 더 이상 복잡해질 머리가 남아 있질 않았으니까.

이람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보다 어휴, 깊은 한숨을 쉬었다.

- 됐다, 그럼.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실눈을 뜨고 보니 놈은 후드를 벗고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 난 또 원래 알던 새낀가 했네.

- …어?

- 지랄하는 꼬라지가 심상치 않길래 뭐 대단한 원한이 있어 저러나 했다고. 그딴 거면 됐어.

- …….

그러더니 정말 미련 없다는 듯 툭 털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또 혼자 남겨진 채 어리둥절하다 어, 하며 놈에게 따라붙었다.

- 됐다고? 진짜로?

- 그래. 됐으니까 꺼져.

- 이제 김세준 봐도 시비 안 걸 거야?

- 내가 먼저 시비 건 적 있냐?

- …….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반박할 짬이 없었다. 따지자면 하늘을 우러러 이람호는 죄가 없는 것이다. 그저 재수가 없어서 나한테 걸리고, 또 재수가 없어서 김세나한테 걸렸을 뿐.

- 근데 니가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게 왜 그 새끼한테 눈꼴 시릴 일이냐?

이람호는 한참 걸어간 후에야 근본적인 의문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나는 머뭇거리다 우선 얼버무렸다.

- 아니, 그냥, 뭐…….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잖아?

그러자 이람호는,

- 알긴 아냐?

악의 없이 웃어 보였다.

알바가 왔다는 소문이라도 났는지 오늘따라 손님이 많았다. 오기영도 그중 하나였다. 심지어 혼자다. 저게 기어코 또 왔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일전에 물 먹인 일도 사과할 겸 엄선한 양주를 글라스에 따라 들고 녀석의 테이블에 놔주었다.

“아, 사장님….”

사연 있는 게이인 척 잔뜩 무게를 잡고 있던 녀석이 씁쓸한 미소를 보인다. 어이구, 오늘 컨셉이 좀 과하시네.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씩 웃어 보였다.

“저번에 양주 안 팔아준 거 미안해서, 서비스.”

“사장님, 오늘 저한테 다정하게 대해주지 마세요…….”

“응, 그래. 좋은 시간 보내요. 가볼게.”

네가 원하는 대답 같은 건 절대 안 해줄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럴 기분까진 안 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생글생글 웃고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뭐라 더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피쉬를 보면 애가 나쁜 녀석은 아닌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갓 스무 살 성인의 사연 많은 어른 행세를 견디기엔 나의 면역력이 너무나 연약하다.

“누구야?”

“아 깜짝아.”

어디서 찾았는지 대걸레를 든 이람호와 딱 마주쳤다. 간 떨어질 뻔했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노려보자 고개를 한 번 까딱인다.

“누군 누구야. 손님이지.”

“아는 사이 아니야?”

“단골이니까.”

흐음, 내 얼굴을 한 번 훑은 이람호의 시선이 오기영의 테이블로 향한다. 이건 또 반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급히 놈의 어깨를 주방 쪽으로 밀었다.

“뭐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그니까 뭐가.”

“니 애인 어떻게 생겼는지.”

이 인간이 근데. 김세나에게 하듯 등짝을 한 대 치려다가 직전에 간신히 멈췄다. 놈은 대걸레 자루 끝에 두 손을 겹치더니 턱을 얹어 놓았다.

“정말로 애인 아니고 그냥 단골이야? 그렇다기엔 방금 너무 친해 보이던데.”

놈은 항상 묘한 데서 감이 좋다. 나는 뺨을 긁적이다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키스는 했어. 근데 애인은 아냐. 술 먹고 한 짓이었고.”

“…….”

“왜, 뭐. 불만 있어?”

“…아니.”

명백히 불만 많은 얼굴을 하고서 아닌 척 시선을 피해버린다. 잘나셨어. 황당한 한편으로 우스웠다.

“너 이제 와 이러는 거 좀 웃긴 거 알지.”

“뭐?”

“있을 때 잘했어야지. 내가 너 좋다고- 좋다고- 난리 블루스를 출 때는 심드렁하다가 버스 다 떠나고 십 년 지난 후에야…,”

“내가 너한테 못한 건 뭔데?”

눈을 끔벅이며 묻는 소리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 어정쩡하게 되묻자 고개를 갸웃한다.

“내가 못한 건 뭐냐고. 이러나저러나 내가 너한테 끌려다닌 세월이….”

“저 미친 새끼 저거!”

마음의 소리를 대신 내질러준 것은 이번에도 김세나였다. 어느새 다가와 듣고 있던 녀석이 이람호를 향해 힘껏 삿대질을 시작했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야! 심태경! 너 이래도 이 새끼 가게에 둘 거야?!”

“세나야, 좀….”

“내가 못한 건 뭔데? 내가 못한 건 뭔데에에?”

그새 또 한 잔 걸치셨는지 작달막한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갰다. 이람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두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개새끼야! 니가 그때 그딴 짓만 안 했어도 태경이가 지금쯤…!”

“김세나!”

“넌 닥치고 있어! 이 간도 쓸개도 배알도 없는 새끼야!”

가게 안의 시선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아, 요즘 이런 일 자주 있군. 홀로 분위기에 심취해 있던 오기영까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맴돌기 시작한다.

“저 새끼 방금 말하는 거 못 들었어? 그딴 개소리를 듣고도 날 말리고 싶어?”

“알았어, 알았는데, 제정신으로 얘기하자.”

“난 지금 존나 제정신이야! 존나 제정신으로 저 새끼 엿 먹일 수 있어!”

그래, 알았어. 알았습니다. 길길이 날뛰는 김세나를 끌어안다시피 붙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이람호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그 자리에 말뚝 박힌 듯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얘기는 뭐하러 해?”

주방 문을 닫자마자 김세나를 윽박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씩씩대고 있었다.

“너 정말 저 새끼 안 내보낼 거야?”

“김세나, 좀.”

“알았어. 그럼 이제 내가 안 올게. 매번 이 지랄이 나면 곤란한 건 너니까.”

예상 밖의 차가운 말이었다. 내가 순간 굳어버리자 김세나에게도 망설임의 빛이 떠올랐지만 잠깐이었다.

“태경아, 난 네가 알고 보니 부모의 원수였어도 널 용서할 수 있지만.”

“…….”

“저 새끼 옆에 알랑거리는 꼬라지를 두 눈 똑바로 뜨고 또 보는 것만큼은 못하겠어.”

“…네가 이람호에 대해 오해한 게 많이 있어.”

“알아. 내가 아는 게 전부는 아니겠지. 그런데 뭘 더 알고 싶지도 않아. 저 새끼가 널 어떻게 대했는지, 그 결과 니가 어떤 꼴이 됐었는지, 내겐 그게 전부고 그것만이 중요해.”

“…….”

“저 새끼 알바 그만두면 연락해. 그 전까진 우리 당분간 보지 말자.”

냉랭하게 말한 김세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대로 외투와 가방을 챙기더니 척척 걸어 밖으로 나가버린다. 세나야, 부르며 쫓아갔지만 한 번 돌아보지도 않는다.

“김세나, 택시 잡아줄게.”

“꺼져.”

“택시만 잡아줄게. 어제 그 새끼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잖아.”

부득불 붙들어 끌어당겼다. 김세나는 더없이 차가운 얼굴이었다. 덜컥 겁이 난다.

“…세나야, 이러지 마.”

김세나가 결국 나를 내치지는 못할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 지금 우리 엄마 시한부 선고받았을 때보다 더 무서워.”

그래서 마음껏 비열한 인간이 된다.

“…….”

김세나의 오렌지빛 피쉬가 느리게 술렁거린다. 그녀의 피쉬는 내가 살면서 본 그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여리다. 한참 후에야 느리게 한숨을 내쉰 김세나가 제 이마를 손등으로 마구 문질렀다.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알잖아.”

“알아, 아는데 그래도….”

“그래도 내 눈앞에 저 새끼 갖다놓고 나더러 견디라는 건 너무하잖아, 태경아.”

“…….”

“그건 정말 나를……, 너무 상처 주는 거야.”

네가 그거 모르지 않잖아. 김세나가 확신을 담아 말한다. 가느다란 팔을 쥐고 있던 손에서 절로 힘이 빠져나갔다.

“아무튼 오늘은 갈게. 집에 들어가서 문자도 할게.”

“…응.”

“택시 잡아줘. 네가 잡아준 거 타고 갈 테니까.”

김세나는 나를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김세나를 좋아할 수 없다. 누군가는 말했었다. 그럼 그 애를 생각해서라도 멀리해야지. 너한테 미련 가지지 못하게 끊어내야지. 그게 정말 그 애 위하는 거지…….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단 한 번도 김세나에게 우리 좀 멀리 있자고 말한 적 없었다. 정말로 김세나가 마음을 정리하고 산뜻하게 떠나버릴까 두려웠었다. 그렇게 십 년이 흘렀다.

한때 김세나는 제가 아는 모든 게이들을 내 옆에 붙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얘 어때? 한 번 만나봐. 괜찮은 애야. 그렇게 데려오는 사람은 과연 하나같이 괜찮았다. 한국에 잘생긴 남자가 이만큼 많았나 싶을 만큼. 그래도 누구 하나 오래 사귀지는 못했다. 헤어졌다는 소식을 전할 때마다 김세나는 안타까워하거나 상대방을 욕하거나 대놓고 기뻐했다. 소모적인 시간들이었다. 김세나는 더 이상 내가 사귈 만한 남자가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그 짓을 할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그냥, 녀석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김세나가 원하는 일은 뭐든 다 해줄 수 있었다. 사귀자는 것만 빼고.

나를 좋아하지 않는 상대를 좋아하는 일이 얼마나 사람을 치졸하게 비참하게 만드는지, 혹시나 하는 기대를 마음에 품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과정이 사람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 망가뜨리는지, 김세나보다 잘 아는 것은 나였다.

“왔어?”

쓰레기봉투를 갈무리하고 있던 이람호가 물었다. 녀석은 내 가게가 얼마나 지저분하게 관리되고 있었는지 몸소 증명하려는 듯했다. 나름대로 매일 쓸고 닦았는데도 이람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청소거리가 나온다. 그 와중에 발견한 병따개, 와인오프너, 라이터, 각종 명함 따위가 카운터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건 뭐야…. 핸드폰도 있네.”

“손님이 놓고 간 거겠지. 맞는 충전기가 없어서 일단 그냥 뒀어.”

그럴 만도 하다. 한참 구식 스마트폰이었다. 몇 번 만지작거리다 내려놓고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중앙 조명이 여전히 나간 상태인데도 어딘가 화사해 보인다. 대청소의 효과였다.

“김세…, 나…, 씨는 갔어?”

이람호가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럴 만도 하다 싶어 고개만 끄덕였다. 나라도 황당하겠다. 학창 시절 앙숙이 여자가 되어 나타나다니.

“태경아.”

쓰레기봉투를 내놓고 손을 탁탁 털어낸 녀석이 재차 내 이름을 불렀다. 이럴 때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 든다.

“내가 혹시 그 사람한테 뭔가 실수했었어?”

이어지는 질문은 예상 범위 안의 것이었다. ‘그 사람’이라는 지칭이 다소 우스웠을 뿐이다. 내가 조금 웃자 이람호는 잔뜩 궁금한 얼굴을 했다.

“…김세나한테 니가 뭘 실수했냐고?”

“어. 미안한 소린데 내가 그런…, 아니, 그쪽…, 아니, 뭐든, 잘 몰라서.”

“실수한 거 없어. 김세나도 딱히 너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저러는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작은 심술이었다. 더 궁금해하고 안달하기를 바랐다. 이람호는 흠, 하며 눈을 껌뻑이더니 곧 나를 향해 다시 물었다.

“그럼 너한테는?”

“…….”

“내가 너한테는 실수했었어?”

억울한 일은 수도 없이 많다. 불만도 많고 사사건건 화도 난다. 솔직한 말로 나는, 이람호를 괴롭히고 싶다. 차가운 말로 상처 주고 등을 떠밀어 내치고 싶다. 내가 오래도록 품고 살았던 영문 모를 억울함을 놈에게도 안겨주고 싶다.

“…….”

그러나 눈을 마주치면, 복수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모자란 연심만 남는 것이다. 이해하기 때문이다. 나를 좋아하는 상대를 함께 좋아할 수 없는 마음도 결코 편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그럼, 실수했지.”

웃으며 대답하자 푸른 피쉬가 딱딱하게 굳는다. 이람호가 긴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대단히 유쾌한 일이었다.

“실수를 해도 단단히 했지. 버스 떠난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뭐? 날 만나면 나랑 사귈 것 같았어?”

“…그건.”

“야, 꿈 깨. 난 다섯 살 연하부터만 남자로 봐.”

막막한 괴로움에서 도망치는 방법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농담으로 만들면 된다. 이람호는 긴가민가한 눈빛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야. 연하가 내 식이야. 아까 내가 양주 갖다 줬던 그런 애.”

“식…?”

“아, 취향이라고.”

카운터에 팔꿈치를 올리며 검지 끝으로 오기영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녀석은 조그마한 양주잔을 반도 못 비운 채로 여전히 스스로의 분위기에 심취해 있었다.

“난 도대체 니가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어. 내가 아직까지 너 못 잊고 혼자 빌빌대고 있을 줄 알았어? 야,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데.”

살금 떨어져 나온 이람호의 피쉬 한 조각이 코앞까지 다가온다. 나를 살피고 있다. 말의 진위여부를 판단해보겠다고 촉각을 곤두세운다. 두렵지는 않다. 어차피 누구도 모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나니까 웃어넘겼지, 행여나 중학교 때 너 좋아했던 애 찾아가서 똑같은 짓하고 그러진 마라. 뺨 맞는다.”

“너 웃어넘기지 않았는데.”

“…….”

“한 대 치려는 줄 알았어.”

이람호가 제 눈썹 양 끝을 손으로 치켜 올려 보였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김세나의 일갈이 맴맴 휘돈다.

“그래, 널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겠네. 그건 내가 실수한 것 같아.”

생떼부리는 어린애를 어르고 달랠 때처럼 느릿한 어조였다. 그만 기운이 빠져버린다. 내 기분을 상하게 할까 조심하는 이람호라니, 아무리 세월이 무섭다지만 이만큼 마모된 이람호는 어색하고 낯설 뿐이다.

“그냥 내 희망사항이었어.”

“…….”

“그러니까 마음 쓰지 않아도 돼.”

김세나는 내가 세상 가장 좋은 사람이라 말하지만,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면 아직까지 김세나를 붙들어두고 있지도 않았을 거다.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면서 언젠가 이람호에게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지도 않았을 테고. 무엇보다도 십 년 만에 나타난 이람호 때문에 십 년 동안 날 좋아해 준 김세나를 상처 주지도 않았겠지.

다행히 나는 내 자신이 이렇게까지 답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오기영에게 주기 위해 열어둔 밸런타인을 온더락스로 따랐다. 주방까지 들어온 이람호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아직 근무 중이잖아?”

“이러려고 술집 하는 거야.”

“…….”

“너도 한 잔 줘?”

훌쩍 원샷하고 빈 잔을 내밀자 고개를 젓는다. “차 가져와서.” 아, 그런 문제. 그러든가 말든가 한 잔을 더 채웠다.

“적당히 마셔.”

“좋은 술은 병나발을 불어도 적당해. 걱정 말고 나가서 일 봐.”

엄마의 입버릇이었다. 좋은 술은 병나발로 마셔도 돼. 좋은 술이니까. 그러면서 집에 올 때는 완전히 엉망으로 취해 있었고, 다음 날 하루 종일 인상을 쓰고 다녔다. 그렇게 생긴 미간 주름은 주기적으로 보톡스를 맞아 없앴다. 팽팽하고 예쁜 얼굴에 두터운 화장을 얹은 엄마를, 가게 손님들은 참 좋아했다. 매일같이 이런저런 선물도 받아왔다.

그렇게 사랑받고 살았으면서 왜 나한테 나눠줄 마음은 한 점도 없었던 걸까. 나는 엄마가 받아온 온갖 고급 향수나 화장품들을 조금씩 빼돌려 김세나에게 가져다주곤 했다. 김세나는 색깔이 촌스럽다거나 제 피부에 안 맞는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그런 선물을 받는 것 자체가 기쁜 기색이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오기영의 테이블에 누군가 합석해 있었다. 어두운 녹색 피쉬를 두른 남자였다. 질이 좋은 인간은 아닌 것 같지만 위험수위는 아니다. 술주정 받아줄 인물을 놓친 게 못내 아쉬워 한 잔을 더 따랐다. 제자리로 돌아가 바닥을 쓸던 이람호가 한 번씩 내 쪽을 곁눈질하는 게 느껴졌다.

더 어릴 때라면 취한 척, 진상인 척 농담 같은 진담이라도 풀어볼 텐데 그러기엔 주량이 강하고 나이도 많다. 술 핑계로 책임지지 못할 본심을 털어놓고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것도 오기영 같은 어린애들에게나 용인되는 사치인 것이다.

“그만 마셔.”

어느새 다가온 이람호가 내 손에서 술병을 빼갔다. 오, 이런 시추에이션 아주 괜찮아.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비실 웃음이 샜다.

“괜찮다니까. 나 이거 다 비워도 안 취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오지랖 부리지 마. 이러는 것도 웃겨. 너 지금 하는 짓이 꼭 셔터맨 같은 거 알아?”

차라리 싸우고 싶다. 아예 대판 싸우고 내보내고 싶다. 일당이나 챙겨주고 두 번 안 보고 싶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눈앞의 상대가 어떤 기분이고 무슨 목적으로 이러고 있는지, 알기 싫어도 눈에 들어오니까.

“너한테 나 케어하라고 안 하니까 제발 신경 끄고 각자 할 일 합시다. 응?”

“…….”

“저기 쓸어. 저기 더럽네.”

술잔을 쥔 손끝으로 멀고 어두운 구석을 가리켰다. 이람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가 쫓아 보내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꼴좋다. 들으라고 낄낄거리며 한 잔을 더 따랐다. 오늘따라 술이 달았다.

폐점시간이 다가와 손님들이 빠져나간 가게는 휑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내일은 꼭 조명 고쳐야지. 계산하는 손님들마다 가게가 너무 어둡다, 눈이 침침하다 불만들을 늘어놓고 간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얼마 안 되는 정산을 마치고 멀뚱히 앉아 있는데 쓰레기를 내다놓은 이람호가 손을 툭툭 털며 가게로 돌아왔다.

“수고했어. 퇴근해.”

“어.”

“생각보다 일이 많지?”

“어.”

대답은 지나치게 간결하지만 화가 났다거나 토라진 것 같지는 않다. 피쉬의 움직임이 부드럽다. 가방을 챙겨든 이람호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태워다줄까?”

“…응?”

“보통 뭐 타고 퇴근해? 차는 안 끌고 다니는 것 같던데.”

“아, 괜찮아. 항상 부르는 콜택시 있어.”

“태워다줄게.”

“콜택…,”

“태워다줄게.”

어떤 흥분이나 강압도 없이 그저 덤덤하게 반복되는 권유였다. 못 보던 사이 이상한 기술을 배워왔네. 입맛을 쩝 다시다 짐을 챙겼다. 손해 볼 일도 아닌 것이다. 태워달라는 것도 아니고 태워주겠다는데.

요란한 학원 홍보문구가 인쇄된 봉고차를 예상했건만, 이람호의 손짓에 응답한 것은 멀끔한 중형 세단이었다. “학원 차가 아니네?” 묻자 의아한 얼굴을 한다. “왜?”

“아니, 차 끌고 다닌다길래 학원 차일 줄 알았지.”

“타보고 싶어? 애들이 오만 데에 다 침 묻히고 과자 부스러기 흘려놨는데.”

“…사양할게.”

애들은 딱 질색이다. 옛날부터 그랬다. 너무도 순수한 나머지 티끌만 한 해석의 여지조차 남겨놓지 않는 그들의 피쉬는 나를 쉬이 어지럽게 만든다. 마치 벌거벗고 춤추는 사람을 정면에서 보는 듯한 불쾌감이랄까. 낯 뜨겁고 어색하다.

“아버지 차야. 가끔 빌려 타는 거고.”

“흐음.”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이람호도 어색하다. 내 기억으로 녀석의 부모님이 집을 나간 건 바로 그 아버지의 빚 문제 때문이었다.

“너 아버지…, 그…, 문제는 다 해결된 거야?”

시동을 넣는 이람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관여하고 싶지 않은 한편으로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람호는 응? 되묻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는데, 배 타러 갔었대. 우리 아버지.”

“배…?”

“빚 갚는다고. 햇수로 거의 12년이었네. 할머니한테 돈도 꼬박꼬박 보내고 있었대. 근데 나한테 그런 얘기해봐야 이해도 못 할 거고, 체육장학생 되려면 경제사정이 안 좋을수록 유리하고 해서…, 빚쟁이 피해 도망갔다고 대충 퉁쳐 놨던 거라는데.”

“…….”

“엄마도 알고 있었대. 아는데 할머니랑 둘이 살기 싫어서 그냥 이혼했다고 하더라고.”

못된 생각이지만 의심부터 들었다. 배를 타러 갔는지 정말 도망친 건데 어쩌다 로또를 맞았는지 알 게 뭔가. 이제 이람호의 곁에 남은 건 그 아버지뿐인데. 나의 못마땅한 기색을 읽었는지 이람호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보였다.

“거짓말 같아?”

“…….”

“나도 그 생각부터 했어. 뭐라더라. 파산 신청 같은 거 하면 빚 없앨 수 있다는데 그거 아닌가, 하고. 그래놓고 이제 와서 돌아온 거 아닌가…….”

“…….”

“나름대로 조사해봤는데 파산 신청도 쉽게 하는 게 아니더라고. 꼬박 십 년간 일해서 빚 갚고, 2년 더 일해서 목돈 만들어갖고 돌아온 거래. 맨손으로 오기엔 염치없었다고.”

푸른 피쉬가 살살 흔들린다.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버려진 자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이상하다 했어. 아버지 빚이 얼만데 할머니랑 사는 동안 빚쟁이 찾아온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아버지가 계속 갚고 있었으니 우리를 내버려둔 거겠지.”

부릉, 엔진이 부드럽게 돌아간다. 최신형 세단의 부드러운 승차감에 몸이 잠겨드는 듯했다.

“손톱이 반토막이 나서 왔어.”

그래, 이럴 줄 알았지. 이람호는 애초에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인간인 것이다.

“계속 물고기 만지고 차가운 데서 자고 하니까…. 동창이 만성으로 생겨서 손톱이 몇 번을 빠지고 다시 나고 그랬대. 지금은 남들 반만큼도 손톱이 안 남아 있어.”

그의 생애는 언제나처럼 드라마틱하며 그가 가진 피쉬만큼이나 부드럽고 따스한 빛을 띠고 있다. 감동적인 반전. 어찌나 아름다우신지 박수라도 쳐드려야 할 것 같다. 아, 희생적인 아버지상. 모든 미디어가 극찬을 해대고 어쩐지 가정마다 하나씩은 있을 것 같지만 내 인생에는 없었던 그것.

“너희 어머니는…….”

이람호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재빠르게 눈을 감았다. 나는 나보다 행복한 사람에게 내 불행을 털어놓고 싶지 않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농담으로 툭 털어버릴 수 없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

얼굴을 훑는 시선이 느껴진다.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술도 한 병을 다 비웠다. 물론 전혀 취하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잠이 들어도 이상하다 여기지 않을 것이다.

“태경아.”

낮게 부르며 어깨를 잡는 손이 차고 딱딱했다.

“자는 거야?”

“…….”

“나 너희 집 주소 모르는데.”

“아참.”

눈을 반짝 뜨고 일어났다. 네비게이션에 대고 주소를 톡톡 찍는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이람호가 픽 웃는 것이 보였다.

“집에는 가야겠어?”

“응.”

“그래, 됐으니까 마저 자는 척해.”

“응.”

짧게 답하고 아예 시트를 뒤로 눕혔다. 온열시트인지 엉덩이가 따끈따끈하다. 옵션도 좋은 거 넣어놨네. 낮은 건물들이 창밖을 흘러간다. 달이 잘 보이는 동네였다.

전방에 사고다발지역입니다……, 네비게이션의 무미건조한 안내가 귀를 찔렀다. 실눈을 살짝 뜨고 운전석을 살폈다. 이람호는 묵묵히 앞만 보고 운전 중이었다. 핸들을 가볍게 쥔 손등에 굵은 핏줄이 일어서 있다.

엄마는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췌장암 선고를 받았다. 그냥 소화가 좀 안 된다 싶어 들른 병원이었다. 동네 병원에서는 종합병원을, 종합병원에서는 대학병원을 연결해주었다. 온갖 검사를 끝내고 사흘 만에 마주앉은 의사는 엄마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한 마디씩 결과를 늘어놓았다. 췌장암입니다. 4기고요. 이미 폐에 전이된 상태라 치료는 불가능하며 길어봐야 석 달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 인간의 생을 정리하기에 석 달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엄마는 마지막까지 우왕좌왕하다 준비 안 된 죽음을 맞았다. 엄마의 마른 손에는 더 이상 주삿바늘이 들어갈 자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메마른 손을 붙들고 물었다.

- 엄마, 그래도 나랑 있어서 좋았던 적 있었어?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순간은 있지 않았을까. 내가 처음으로 걸음마를 성공했을 때나 말문이 트였을 때, 유치원 장기자랑에서 상을 받았던 때나 색종이로 된 카네이션을 선물했을 때 같은.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가지만 엄마가 기억해준다면, 나와 함께 있던 세월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말해준다면.

- …….

엄마의 귓전에 제비꽃 같은 피쉬가 가라앉았다. 이어 밤처럼 시커먼 색으로 물들더니 모서리가 뾰족하게 일어났다. 그 피쉬만큼 굳은 눈동자를 한 엄마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 그럼.

- …….

- 엄마는 우리 아들 있어서 늘 행복했지.

사람의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 그러니까 엄마 없어도 씩씩하게 살아야 돼…. 응?

가시 같은 손가락이 뺨을 쓰다듬어왔다. 어떤 노력 없이도 나는 모든 진실을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떠나는 순간까지도 내 걱정 따위는 하고 있지 않다. 당신이 죽고 세상에 홀로 남을 내가 가엾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당신이 이렇게 어이없이 죽는 게 억울하고, 억울하고, 억울하고…….

차갑고 날카로운 손가락이 뺨을 지나 목으로 파고들었다. 손톱이 턱 아래를 비집는다. 숨이 막히고 코끝이 찡해졌다. 콜록, 치민 기침을 뱉어내자 벌린 입안으로 새카만 피쉬가 쏟아져 들어왔다. 온통 날카롭게 벼려진 검보랏빛 피쉬들이 입안을 찢고 목에 박혔다.

“헉……!”

덜컥 몸을 일으켜다 뭔가에 걸려 고개가 꺾였다. 마른기침이 폭발적으로 튀어나왔다. 한참 콜록거리며 몸에 걸린 것을 더듬어보니 안전벨트였다. 어리둥절한 채 돌아보자 운전석의 이람호가 토끼눈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래?”

“…….”

“사레 들렸어? 휴지 줄까?”

숨쉬기가 버겁다. 등이 여러 번 오르내렸다. 차는 멈춰 있었고, 창밖을 보니 집 앞이었다. 비몽사몽간에 시계를 확인하니 가게를 나온 지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난 후였다.

“…나 얼마나 잔 거야?”

“음……. 한 시간 반?”

이람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손에 쥔 스마트폰 화면에는 어울리지 않게 팬시한 퍼즐 게임이 떠 있다. 아파 오는 머리를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였다. 별 재수 없는 꿈을 다 꾼다 싶었다.

“깨우지. 오후까지 자면 어쩌려고 냅뒀어.”

“슬슬 깨우려고 했어. 금방 일어나겠지 했는데 통 안 일어나길래.”

“…….”

“나쁜 꿈 꿨어? 안색이 안 좋네.”

다가온 손이 이마를 훔쳐낸다. 크고 단단한 손. 주삿바늘 따위는 수백 번 꽂아도 끄떡없을 것만 같다.

“들어가. 이따 보자.”

가방에 핸드폰에 목도리까지 살뜰히 챙겨주며 이람호가 말했다. 위선이 허용되지 않는 관계의 끔찍함. 십 년 전의 이람호가 내게 준 것은 그런 종류의 절망이었다.

“왜 날 찾아왔어?”

좋은 술은 병으로 마셔도 괜찮아. 그래도 안 취해. 엄마의 입버릇은 어느 날 갑자기 내려진 사형선고에도 끄떡없었다. 마시나 안 마시나 석 달 뒤에 죽는 거라면 마시다 죽을래. 그러면서 마시고는 한 시간만 지나면 후회하며 울었다. 왜 말리지도 않아? 넌 내가 죽어도 괜찮아?

“네 인생 기구했던 것도 알겠고, 할머니 돌아가시고 마음 복잡했던 것도 알겠어. 근데 그게 날 찾아오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

“혹시 그거야? 기분 더러울 때 섹스하고 싶어지는 인간들 있다던데 네가 그래? 근데 누굴 만나야 군말 없이 대줄까, 궁리하다보니 내가 딱 떠올랐어?”

“태경아.”

“말했지? 너 번지수 잘못 찾았어. 완전히 잘못 짚었어. 십 년이야. 십 년간 변함없이 너한테 코 빠뜨리고 있을 줄 알았어? 자의식과잉 너무 지나친 거 아냐? 네 인생사는 나랑 아무 상관도 없어. 나 앉혀두고 백날 주절거려봐야 간지럽지도 않아!”

“알아, 태경아.”

올라온 손이 내 눈을 가렸다. 그래서 내가 울고 있던 것을 알았다. 단단한 손바닥으로 속눈썹이 닿는 자리마다 축축한 멍울이 진다.

“알아.”

“…….”

“내가 미안해.”

울거나 화내는 대신 차갑게 노려볼 수 있다면 좋겠다. 미련 한 점 남지 않은 목소리로 이별을 고하고, 평소의 내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두 번 다시 보지 말자는 말이 내 가슴에 실금만 한 상처조차 남기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정말 좋겠는데.

“이제 와서 대체 왜…….”

창밖으로 아침이 밝아오는데, 찢긴 채 얼어붙은 마음은 까딱하면 깨질 것만 같다. 이람호의 팔을 밀어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웅크린 어깨가 뻐근했다.

깨어져 흩어질 거라면 이람호가 찾아낼 수 없을 만큼 먼 곳으로 날아갔으면 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사막에서 홀로 외로움에 죽어가면서, 나를 안 찾는 게 아니라 못 찾는 거라고 믿을 수 있게.

<이람호 태권도 전국체전 남자고등부 출전 확정>

어느 날 등교하니 일자형 현수막이 학교 건물 전체 길이로 붙어 있었다. 그새 1등했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출전 확정’이었다. 그냥 대회에 나간다는 거 아닌가? 그게 현수막까지 붙을 정도로 대단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박송이 그으럼, 대단하지이, 했다.

- 전국대회잖아. 보통은 출전만 해도 대단하다고 해.

- 작년에는 우승했다면서.

- 그러니까 더 대단한 거지.

인생에서 딱히 누군가보다 잘나 본 적이 없다. 남들 다 있다는 개근상이나 백일장 상장 같은 것도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김세나도 그랬다. 녀석은 이람호가 해낸 일이 별거 아니라고 믿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 체급도 아무나 줄이는 거 아니래. 엄청 잘나가던 태권도 국대도 체급 줄여서 올림픽 나갔다가 힘 못 쓰고 경기 다 말아먹었다던데.

- 몇 킬로 왔다 갔다 하는 게 그렇게 큰일인가?

- 운동선수들은 그램 단위로 관리하잖아. 이람호처럼 변변한 팀도 없는 선수가 혼자 판단으로 체급 낮추는 건 자살행위랬어.

- 누가?

- 태권도 선수들 모이는 카페에서 그러던데.

이람호 욕할 건수를 잡겠다고 그런 카페까지 가입했다니, 너무 대단한 정성이라 이쯤 되면 나도 이람호를 좀 욕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 근데 팀이라는 게 뭐야? 코치 같은 거?

- 세계 수준인 애들한테는 원래 스폰서도 붙고 팀도 생긴대. 코치랑, 건강 관리해주는 사람이랑, 뭐 그런 거.

- 이람호는 왜 팀이 없는데? 스폰서는 있다며.

-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대답 한 번 쌈박하다. 아마 궁금해서 뒤져보긴 했는데 자세히 조사할 만한 성의는 없었던 거겠지. 김세나다웠다.

- 광고 안 찍겠다 해서 그런 거 아냐?

웬일로 듣고만 있던 박송이 끼어들었다. 광고? 눈을 둥그렇게 뜨고 보자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인다.

- 걔 스폰서가 타이어 만드는 데잖아. 거기서 잡지 광고 같은 걸 찍자 그랬는데 싫다 그랬대.

- 왜?

- 얼굴 팔리는 거 싫다고. 근데 스폰은 받으면서 광고는 안 찍겠다니 말이 안 되잖아. 어찌어찌 찍기는 찍었던 모양인데 그 일로 단단히 찍혔대.

- …그건 또 누가 그래?

- 이람호 팬카페 애들이.

시간을 한 번 확인한 박송이 재빨리 교탁에 붙은 컴퓨터로 달려갔다. 느려터진 인터넷으로 접속한 팬카페는 대단히 소소하고 조잡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회원수 1,520명…, 많은 건지 적은 건지 알 수가 없는 수였다.

- 이거 봐.

자료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순간적으로 이람호에 대한 연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준수하네 뭐네 해도 일반인일 뿐이다. 카메라로 찍어놓으니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나왔다. 옆차기를 하는 이람호의 발끝에 타이어 하나를 합성시켜놓은 사진이었다. 옆에는 대문짝만 하게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힘없는 타이어는 뻥 차버리세요!>

- …진짜 찍기 싫었겠다.

관심 없는 척 딴청을 피우고 있던 김세나가 그 말에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는 모니터 속 이람호의 사진을 보고 풉, 과장된 웃음을 터뜨렸다.

- 대박, 나 이거 사진 찍을래.

- 하지 마…. 찍어서 뭐하게.

- 뭐하긴, 쫙 돌려야지. 프린터 쓰게 해달라 그러자.

낄낄대는 김세나는 본 중에 가장 신나 보였다. 아무튼 못된 짓 할 때 유난히 빛을 발하는 미모였다. 핸드폰을 들이미는 김세나를 간신히 뜯어말리고 돌아서니 박송이 사진을 들여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역시 잘생기고 볼 일이야.

그 말에 새삼 내가 다 부끄러운 광고 사진을 다시 보았다. 쭉 뻗은 늘씬한 팔다리, 덜 여물었지만 선이 살아 있는 얼굴. 일반인 기준에서는 확실히 상위에 드는 외모였다.

- 잘생겨서 광고 찍는 거야?

- 당연한 거 아냐? 잘생기지도 않았으면 얘한텐 지금 뭐가 있다고 이런 걸 하라 그러겠어.

- …….

- 이런 게 다 투자이고 비즈니스이니라.

지금의 이람호도 내 기준에서는 아득하게 잘난 인간인데, 그래도 누군가의 눈에는 부족하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선망하는 법이고, 내겐 이람호가 갖지 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녀석이 나를 돌아볼 일도 평생 없지 않을까.

이람호와 나를 가르는 건 뭘까. 재능의 차이? 태생이나 환경 차이? 나는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알지 못한다. 남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별 쓸모도 없는 이상한 능력 하나가 전부.

- 전부터 생각한 건데 말야.

김세나가 사준 햄계란 샌드위치를 한입에 욱여넣었다. 매점에서 제일 비싸고 인기 있는 빵이었다.

- 너 그 능력, 도박판에서 쓰면 빛을 발하지 않을까?

녀석은 포부가 큰 만큼 현자의 면모를 갖고 있었다. 화장품 냄새를 풍기는 샌드위치를 열심히 씹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 도박?

- 그래, 포커 같은 거. 그건 순전히 패 읽기 싸움이라던데. 상대의 기분을 파악할 수 있다는 건, 걔가 쥐고 있는 게 금패인지 똥패인지도 알 수 있다는 거 아니야?

순간적으로 망상이 스쳐 지나간다. 멀끔하게 턱시도를 차려 입고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에 앉아 있는 나, 초능력을 발휘해 천문학적인 금액의 칩을 한 번에 쓸어오며 쿨하게 말하는 거지. 굿럭, 브라더.

- …….

아이고, 개뿔.

- 퍽이나 쓸모 있겠다. 상대 패를 읽으면 뭐해? 상대도 내 패를 읽으면 그만인데.

- 야, 그래도 차원이 다르지. 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거고 상대는 어림짐작만 하는 거잖아.

- 됐다, 됐어. 욕심부리다 패가망신하지. 이게 언제까지 먹힐지도 모르고.

김세나는 고맙게도 딸기우유까지 사주었다. 인공적인 단맛이 입안의 화장품 냄새를 개운하게 씻어주었다.

- 언제까지 먹힐지 모른다니?

- 옛날보다 좀 약해.

- 뭐가? 보이는 게?

- 옛날엔 더 선명했었어. 근데 점점 옅어지고, 어떤 사람은 아예 안 보이기도 하고 그래.

더 어릴 때는, 길을 나가보면 온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명동 거리 같은 곳에 멍하니 서 있다 보면 황홀경마저 느꼈다.

- 네가 오히려 나한텐 특이케이스야. 너처럼 선명한 피쉬는 오랜만이었어.

- 오, 칭찬 같다.

- 칭찬이지. 아무나 그런 색을 내진 못하니까.

물론 이람호는 차원이 달랐지만. 눈치껏 덧붙이지 않은 뒷말을 입안으로만 굴렸다. 김세나는 영 미심쩍어하면서도 배싯 웃었다.

- 나 말 꺼낸 김에 하나 더 물어봐도 돼?

- 뭐?

- 어떤 식으로 보이는진 알겠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어떻게 알아? 기분이 어떤지, 거짓말인지 아닌지 그런 거.

음, 나는 옆머리를 긁적이며 뜸을 들였다. 아무리 김세나라지만 이런 걸 다 말해줘도 되나 싶어서였다. 김세나는 답지 않게 재촉 없이 나를 살피고 있었다. 오렌지빛 피쉬가 그녀의 이마 근처를 지났다.

- 그냥……. 생물처럼 보인다고 해야 하나?

- 생물?

- 그 자체로 감정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 색이 연해졌다 진해졌다 하기도 하고, 반짝반짝 빛나기도 하고, 끝이 뾰족해지기도 하고 막 흔들리거나 넓게 퍼지기도 하고….

- 오…….

- 사람이 말은 화 안 났다고 해도 표정 보면 알게 될 때가 있잖아. 쟤 지금 화났구나, 뭐 그런…. 거랑 비슷해.

어차피 안 보이는 사람에게는 이해 못 할 감각이었다. 나는 때로 이 세상에 피쉬와 나만 남은 것처럼 느낄 때가 있었다.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세상에서 오로지 피쉬만이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 그럼 넌 이람호가 아니라 걔의 피쉬를 좋아하는 거야?

김세나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순간 머리가 멍했다. …어? 멍청하게 되묻자 녀석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 그렇잖아. 걔가 가진 피쉬가 예뻐서 좋다며.

- …….

- 그럼 그냥 피쉬가 좋다는 거잖아. 애초에 이상했어. 이람호에 대해서 뭘 안다고 걔를 좋아하네 마네….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럴싸하다. 나는 이람호에 대해 모른다. 모든 것은 그에 대해 서술한 기사와 남의 입을 통해 접했다. 그것도 이람호가 가진 피쉬가 아름답다는 이유로.

- …아니, 아니지. 난 이람호의 인간성을 좋아한 거지. 말했잖아. 그런 색깔을 가졌으면 당연히 인간성도 엄청….

- 그래, 만나보니 그렇디?

- …….

- 좋은 말 한마디라도 들은 적 있어?

정곡을 찌르는 말들이 날카롭고 아프다. 시무룩하게 꼬리를 내리자 김세나가 어휴, 깊은 한숨을 쉬었다.

- 들어봐, 태경아. 사람 자체가 괜찮은 사람일 순 있지. 근데 그게 꼭 나한테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거든.

- …야, 니가 그런 소리하니까 되게 낯설다.

- 우리 아빠 알잖아. 아빠 친구들이나 가게 사람들 말 들어보면 호인도 그런 호인이 없어. 근데 엄마한텐 별로 좋은 남편이 아냐. 사람이란 건 그런 거잖아.

어른들의 세계에서 호인이라 함은 결국 돈을 얼마나 잘 쓰느냐에 달린 거라고, 언젠가 김세나가 말한 적이 있다. 김세나의 아버지는 친구들끼리 모인 술자리를 당신이 계산하지 않으면 혀에 두드러기가 나는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친구 일이라면 가게도 내팽개치고 달려가는 소위 ‘의리남’이었다. 당연히 가족에게 좋은 가장일 리 없다.

- 그렇게 퍼다 바쳤는데 정작 아빠 아프다고 입원했을 때 문병 온 사람 한 명도 없었다. 얼마나 허무하냐고.

- 아니 그거야 유감이지만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 어쨌든 이람호는 너 싫어하잖아.

- …….

안쪽 깊숙이 파고드는 직구! 순간 멍해진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고 가슴을 쥐어 싸는 시늉을 했다. 으윽, 신음하니 김세나가 흥, 콧방귀를 뀐다.

- 야, 그래도 너무 대놓고 말하니까 좀 아프다.

- 현실을 깨우쳐 주는 거야.

- 그야 싫겠지. 난데없이 남자가 지 좋다는데 얼씨구나 좋다 할 놈이 어딨어.

- 야! 남자건 뭐건 무슨 상관이야, 니가 좋다는데? 너의 어디가 빠진다고 그 못생긴 놈이 지 주제에 튕겨?

그것 참 고마운 소리기는 한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남은 우유를 마저 입에 털어 넣었다. 나에 대한 김세나의 과대평가에는 별수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정도로 좋아하는 심태경이 별 볼 일 없는 인간일 리 없어, 뭐 그런.

- 그냥 대놓고 물어보면 안 돼?

- 뭘?

- 나랑 사귈래, 말래.

막 순조롭게 목으로 넘어가려던 우유가 그대로 역류했다. 에이, 디러. 인상을 찌푸린 김세나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우리 학교에서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건 김세나뿐이다.

- 뭐를 어째?

- 그렇잖아. 이람호 피쉬도 그렇게 잘 보인다며. 떡밥 던졌을 때 반응 보면 대충 감이 올 거 아냐. 이게 희망이 있는지 아닌지.

대단히 그럴싸하다. 물론 생각해본 바 없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 됐어, 몇 번을 말하냐. 걔랑 뭘 어쩌고 싶은 게 아니라니까.

- 그럼 뭘 바라는 건데? 팬카페라도 가입할 거야?

- 아니라는데…,

- 뭘 어쩌고 싶은 게 아니면 이람호한테 좋아한다는 소리도 하지 말았어야지.

입을 다물었다. 말발이 모자랄 땐 그저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김세나도 일어섰다.

- 알았어, 그만할게.

- …….

- 그냥 그 새끼가 나보다 대체 뭐가 잘났나 궁금해서 그래.

- 오, 박력.

- 웃자고 한 소리 아니거든.

정강이를 아프지 않게 걷어차는 스니커즈는 내가 김세나의 작년 생일에 선물한 것이다. 난 운동화가 너무 싫어. 왜 여자 구두는 교칙 위반이지? 허용된다고 신고 올 것도 아니면서 김세나는 괜히 툴툴거렸었다. 길을 가다 복숭아뼈 위치에 하이힐이 그려진 스니커즈를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더럽게 비쌌다. 팔만 원이나 했다. 나는 마침 주머니에 있던 급식비를 빼돌려 그것을 샀다.

그때부터 내 점심을 책임진 건 김세나니까, 결국 김세나가 산 운동화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도 김세나는 기뻐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것만 신고 다녔다. 일 년이 채 안 지났는데 벌써 밑창이 너덜너덜했다.

- 그냥 빨리 사귀자 그러고 차여버려.

- …….

- 걔도 난처할걸? 사귀는 건 됐고 좋아만 하겠다니, 그렇게 애매한 말이 어딨어?

오, 과연 현자 김세나 선생. 엄지를 척 올려 보였다. 김세나는 콧김을 흥, 뿜더니 날듯이 계단을 총총 올라갔다.

말처럼 쉬우면 고생할 일이 없다. 계단참에 기대어 복도에 달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긋지긋하게 길고 뜨거운 여름이었다. 이람호가 달리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의 뒤를 쫓아다니는 피쉬가 너무나도 특징적이니까.

가까이서 보고 싶다.

떠올렸을 때는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야! 머리 위로 김세나의 목소리가 떨어진다. 주머니에 꽂아 넣었던 손을 빼고 양손을 힘껏 휘저어 달렸다. 이람호가 피워 올린 모래 먼지가 입가에 맺힌다.

김세나가 그랬듯 모두가 내게 물을 것이다. 그 애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느냐고. 네게 무엇을 주었기에 그토록 좋아하게 되었느냐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당신들에게도 보인다면 나를 이해할 거라고.

아름다운 푸른색. 성에처럼 차고, 바다처럼 따뜻한 색. 얼어붙은 창에 그어진 눈꽃 결정 같은 색. 바라보는 것만으로 숨통을 조여 오는 색. 안식에 가까운 잠을 선사할 것 같은 색. 머리를 담그면 내 호흡기를 물들여줄 것처럼 명징한 색. 그 압도적인 존재감이 선사하는 경외와 애정.

눈을 떴다. 중천에 오른 해가 온몸을 내리쬐고 있었다. 난파선을 만나 남태평양의 해변에서 깨어나면 이런 느낌일까. 축축하고 뜨겁고 숨이 막힌다. 비몽사몽 중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보일러 설정 온도였다. 이제 막 28도를 지나고 있다. 이런 미친. 벌떡 일어나 달려가다 말고 무릎이 꺾였다. 악, 소리와 함께 뒹구는 힘없는 몸뚱이에 온갖 잡동사니며 가구들이 다 말려들었다. 와장창, 쿵탕, 철퍽.

“아오…….”

왜 거기 있는지 알 수도 없는 주전자가 발끝에 채여 나동그라졌다. 절뚝거리며 보일러를 끄고 방 안을 돌아보았다. 바닥이 어찌나 뜨끈뜨끈한지 발바닥이 델 것 같았다. 그렇다. 나는 취해서 들어오면 보일러를 최대치로 올린 뒤 옷을 다 벗고 잠드는 습관이 있다. 간만에 도진 개짓거리였다.

“아, 미치겠네……. 이렇게 갑자기 틀면 안 되는데…….”

보일러는 온수를 쓸 때만 틀고 평소엔 되도록 전기장판을 이용한다. 도통 아들의 생활을 돌보는 데엔 관심이 없었던 엄마 덕분에 일찍부터 몸에 익힌 습관이었다. 난방요금 일 원 한 장에 벌벌 떨며 살던 깜냥이 이제까지 이어지는 것은 생활비 절감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으나, 그로 인한 욕구불만 탓인지 한 번씩 이런 사고를 치고 마는 것이다.

설상가상,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편의점 봉투가 눈에 들어온다. 열어보니 술김에 사 들고 온 딸기우유와 빵 따위였다. 우유팩이 뜨끈뜨끈하다. 좌절감에 속이 다 쓰렸다. 해장은 차가운 딸기우유로 해줘야 하는데.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 샤워를 했다. 누가 내 머리통을 쥐어짜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의욕이 없다. 아픈 머리를 감싸고 침대에 도로 누웠다. 침구에서 온통 술 냄새가 났다.

가게 쉴까.

아니, 차라리 팔아버릴까. 아니, 팔 수는 없지. 세를 줘버리자. 그 돈으로 생활하면서 집에 처박혀 게임이나 하자. 아무도 안 만나고 게임만 하다 보면 세월도 금방이겠지. 정신 차리면 서른이고 또 마흔일 거야. 한 서른다섯까지만 버텨보자.

그때쯤엔 미련 없이 이람호를 떨어낼 수 있을 것 같아.

진동이 울린다. 눈알만 굴려 출처를 찾아보니 베갯맡이었다. 팔만 쭉 뻗어 핸드폰을 집었다. 커다란 액정 가운데 또렷한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람호.

“…….”

피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몸은 괜찮아?]

인사도 없이 묻는 말이 이거라니 하여튼 낭만적인 새끼.

“내 몸이 왜? 나 어디 아파?”

[술 많이 마셨잖아.]

“몇 번을 말해. 그 정도 마셔봤자 끄떡없다니까.”

[그런 것치고는 어제 정신 놓지 않았어?]

놨지. 단단히 놨지.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냐 싶었다.

“뭐, 내가 말실수했다고 쩔쩔맬 줄 알고 전화했어?”

[그런 뜻이 아니라]

“말해두겠는데 난 사과할 생각 없어. 딱히 틀린 말한 것도 아니고 마음에 없던 소리도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 너 어제 기절했었어]

“…….”

[나랑 얘기 끝내고 집에 가다가 갑자기 픽 쓰러졌어. 기억 안 나?]

머리가 딩 울린다. 눈을 껌뻑이며 일어나 앉는데 손바닥이 따끔했다. 눈앞에 펼쳐보니 손바닥 아래쪽 볼록한 살이 온통 빨갛게 쓸려 있었다.

[바로 정신 차리고 일어나긴 했는데…. 네가 병원 안 가겠다고 난리를 피워서 병원은 못 들렀어.]

“…….”

[그래서 걱정돼서 전화한 거야]

이 상처를 왜 샤워하면서 못 봤지. 뒤늦게 살펴보니 양쪽 무릎도 멍이 벌겠다. 혼란스러운 시선 끝에 편의점 봉투가 걸린다. 징하다. 그 와중에 부득불 해장하겠다고 저걸 사 왔어.

[아무튼, 괜찮아? 어지럽거나 하진 않아?]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야 나는 언제나 괜찮지. 단 하루도 괜찮지 않은 날은 없었어…….

“…저기, 나 오늘은.”

언제나 그랬었어.

“가게 못 열겠다.”

[뭐? 어디가 아픈데?]

“아니, 아플까봐.”

뭐라 더 말하려는 이람호를 무시하고 전화를 툭 끊었다. 다급하게 옷을 챙겨 입으며 이마에 흘러내린 식은땀을 닦았다. 석 달이었다. 엄마가 병원에 가기 석 달 전의 일이었다. 만취해 집으로 오다 길바닥에 쓰러졌던 것이.

“술을 좀 적당히 드세요.”

의사의 이마에 문장 하나 쓰여 있는 것 같다. <어휴, 한심한 새끼> 나는 머쓱함에 턱만 문질렀다.

“앉은 자리에서 양주 한 병을 통째로 비웠는데 사람이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죠. 그쵸?”

“…예에…….”

“당분간 금주하시고, 규칙적인 식사하시고요.”

빠른 속도로 입력되는 처방전을 멍하니 보는데 또 손바닥이 따끔하다. 그러나 여전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이 정도로 완벽하게 필름이 끊기다니. 역시 어제 그 개소리를 퍼부은 것도 술기운의 힘이었던 걸까?

“저……, 검사 같은 거 안 해봐도 될까요?”

“무슨 검사요?”

“MRI나 CT 같은 거….”

“왜 그걸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다른 증상이 더 있어요?”

의아한 질문에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증상이 있던가? 있을 수도 있지. 단지 자각하지 못했을 뿐일 수도 있잖아.

“그게 저희 어머니가…….”

엄마도 그랬다. 아무런 자각도 없이 멀쩡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암 선고를 받고 빠르게 죽어갔다.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의사의 낯빛이 조금 달라진다. 턱을 괸 채 잠깐 뭔가 생각하던 그가 이내 물어왔다.

“그럼 뭐, 간단한 검사라도 해보실래요? 그래야 안심이 되실 것 같으면.”

“…아.”

“정기검진은 받고 계시죠?”

“아뇨…….”

“가족력이 있으면 정기검진을 받으셔야죠.”

의사는 절대 틀린 말은 안 한다. 겪어봐서 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다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어느 날 병에 걸릴까 무서우면서도, 병원에서 하루 종일 버티고 있을 자신은 없었다.

“일단 간단한 검사만 할 거고요. 검진은 따로 꼭 받으세요.”

“예…….”

창피한 마음에 얼른 벗어나고만 싶었다. 터덜터덜 진료실을 나오는데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린다. 받아보니 이람호였다.

[어디야?]

“어디면.”

[병원 갔어?]

아직도 낯설다. 지금 나한테 전화하고 있는 이건 대체 누굴까.

“왔어. 별 이상 없대.”

[너 컨디션은 어떤데]

“안 좋아. 가게 안 열 거야. 너도 올 필요 없어.”

툭 끊어버렸다. 내가 이람호에게 냉정해질 수 있는 건 전화통화를 할 때뿐이다. 얼굴을 봤다간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피쉬에 또 홀리고 말 테니까.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편의점에 들렀다. 웬일로 낮부터 사장님이 나와 있다. 야간 알바가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보통 야간에는 사장님이 있고 낮에 알바가 있었는데.

“사장님, 이 시간에 계시네요.”

“어유, 심 사장. 어서 와요.”

다시 보니 눈이 퀭하다. 곁을 맴도는 크림색 피쉬도 어딘가 가라앉아 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덜컥했다.

“어디 안 좋으세요? 안색이 너무 나쁘신데.”

“아니야. 실은 알바가 펑크나서 아직 잠을 못 잤어.”

“네? 그럼 어떡해요.”

“이따 우리가 애가 와서 도와줄 거야, 괜찮아.”

시간은 오후 세 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는 벌써 열다섯 시간 째 편의점을 보고 있는 것이다.

“경철이 몇 시에 오는데요? 그때까지 제가 좀 봐 드릴게요.”

“아이구, 아니야. 심 사장도 가게 열러 가야지.”

“저 오늘 가게 안 해요. 그…, 수도관 공사해야 해서.”

급하게 지어낸 말이 제법 그럴싸했다. 도와주겠다는 처지에 아프다는 말은 할 수 없으니.

“제 방에 가서 좀 주무세요. 쓰러지실 것 같아서 그래요.”

“아니, 그래도…….”

“괜찮아요. 여기 열쇠요. 방 어딘지는 아시죠?”

이전에도 편의점 파라솔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 내 방으로 가서 잔 적이 있었다. -근데요, 사장님. 제가 게이예요. 물론 사장님한테는 요만큼도 관심 없어요. 그래도 불편하실까봐. 술을 홀짝이며 말하자 한참 눈만 껌뻑이던 사장님은 이내 크게 웃었었다. 으하하하, 당연하지. 이 친구야. 심 사장처럼 젊고 예쁜 사람이 나 같은 배불뚝이 아저씨를 뭐 어쩌고 싶겠어?

내가 고르는 ‘좋은 사람’은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해 끼치지 않는다. 등을 떼밀어 카운터에서 끌어내자 사장님은 영 미안한 기색으로 카드키를 받아들었다.

“내가 이거 미안해서….”

“아니에요. 그나저나 저 어제 뭐 실수 안 했어요?”

“어제?”

“네, 술 마시고 우유 사러 오지 않았어요?”

재차 묻자 사장님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어제? 우유 사러 왔다고?

“…안 왔어요?”

“어제는 안 왔는데. 어디 다른 편의점 뚫은 거 아니야?”

사장님이 장난스레 눈을 찡긋했다. 그럴 리가. 이 근방에 편의점이라곤 여기 하나뿐이고, 분명 이 편의점 마크가 새겨진 봉투였는데.

“그럼 제가 그걸 어디서 샀지…? 딸기우유랑 이 빵이랑 사놨던데.”

매대에서 햄계란 샌드위치를 들어 올려 보였다. 학교 다닐 때 먹던 화장품 맛 샌드위치와 가장 비슷한 맛이 나는 싸구려 샌드위치였다. 이상하게 술만 마시면 이게 먹고 싶었다.

“어……. 딸기우유랑 햄계란 샌드위치?”

“네.”

“그거 어제 웬 잘생긴 청년이 사가던데.”

“…….”

“아, 계속 뭐가 생각날 듯 말 듯했는데 그거네. 심 사장이 술 마시고 만날 사가던 조합이네.”

손가락을 퉁겨 보인 사장님이 껄껄 웃었다. 바보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이람호였다.

“그……, 래요?”

“그래. 누구 시켜서 사다 먹고 까먹은 거야? 심 사장도 술을 적당히 먹어. 그렇게 먹다가는 죽어.”

악의 없이 잔인한 농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람호가 사다 놓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궁금해서 손이 다 근질거린다. 그야 내가 술김에 시켰겠지. 해장거리를 사야 하니 딸기우유를 가져와라 하며 이 편의점을 가리켰겠지. 하지만…….

하지만.

사장님이 연신 사과하며 문을 밀고 나가자마자 또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받을 수가 없었다. 조용히 끊어버리고 한참을 포스기 버튼만 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학교 마치고 바로 온다던 사장님 아들이 PC방까지 들르시는 통에 교대는 저녁 무렵에야 할 수 있었다. 녀석은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시늉을 하며 제발 엄마에게는 이르지 말아 달라 사정을 했다.

“난 모르겠다. 근데 교대시간은 어차피 CCTV 보면 다 들키는 거 알지.”

“아아, 혀엉. 진짜 딱 한 판만 하고 왔는데에.”

“인마. 알바 탈주해서 너네 아버지 한숨도 못 주무시고 아까까지 계셨어.”

“아는데에, 그래도……. 그거 같이 안 하면 왕따되는데에….”

어른 체면에 한마디 했을 뿐이지 그다지 진심은 아니다. 따지자면 친구들 노는 시간에 편의점 카운터나 지키고 있어야 하는 이 녀석이 훨씬 억울하겠지. 아들의 친구들은 놀거나 학원 가는데 내 아들은 가게 일 시켜야 하는 사장님 마음도 말할 바가 없을 테고. 제3자는 이 정도로 입바른 소리나 하고 빠져주는 게 제일이다.

“암튼 난 아무 소리 안 할 거야. 들키면 그냥 네 신뢰도 문제인 줄 알어.”

“혀엉, 아아, 혀엉.”

“아 어쩌라고 나더러.”

퉁명스레 되묻자 한참을 우는 소리만 낸다. 저도 답답할 것이다. 까치집 일어난 머리를 한 번 더 흐트러뜨리고 카운터에서 나왔다.

“다음엔 미리 연락을 해. 시간 되면 도와줄 테니까.”

“형, 천사…….”

“시간 되면. 엉? 시간이 되면.”

엉겨 붙으려는 녀석의 이마를 밀어 떼어놓았다. 녀석은 굴하지 않고 흐흐, 웃었다. 밖이 어느새 어두웠다. 가게 오픈시간은 이미 넘겼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김세나도 이람호도 가게에 안 올 테니.

문을 밀고 나서자마자 칼바람이 뺨을 찢는다. 어으, 추워. 양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고 한껏 어깨를 움츠렸다. 지긋지긋하게 덥고 추운 날의 반복. 더위를 견디다 보면 추워지고, 추위를 견디다 보면 더워진다. 변덕스럽고 인정사정없는 계절이었다.

외롭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오른쪽 집. 부엌 하나 거실 하나 방 하나 화장실 하나. 내 한 몸 구겨 넣고 살기에 차고 넘치도록 풍족한 공간. 카드키를 사장님에게 건넨지라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삑, 삑, 삑삑삑. 적막한 복도에 흐르는 기계음에 어쩐지 쓸쓸해지던 찰나.

와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손이 멈춘다. 분명 이 문 너머였다. 순간적으로 온갖 안 좋은 상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장님이 쓰러졌나? 너무 무리해서? 내 방에서 재울 게 아니라 병원에 보내야 했나?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센서등이 어두운 방을 희끄무레하게 비춘다. 가늘게 뜬 눈에 들어온 광경은 내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어?”

사람이 둘이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주저앉은 사장님과, 그 앞에 꼿꼿이 서 있는…….

“이…, 람호?”

“죄송해요, 진짜.”

집안을 다 뒤져 꺼내온 파스를 건네며 싹싹 빌었다. 사장님은 허허 웃고만 있었다. 정작 가해자인 이람호는 팔짱을 끼고 선 채 굳은 얼굴이었다.

“야, 뭘 멀뚱히 서 있어. 사과 안 해?”

“아이고, 심 사장. 됐어. 오해할 만했잖아.”

“뭘 오해하는데요, 뭘.”

“강도인 줄 알았다잖아.”

“아니, 사장님은 내가 준 키로 들어왔고 쟤는 지 맘대로 들어왔는데 누가 누구더러…!”

쏘아대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저 새끼 비밀번호 어떻게 알았지? 여섯 자리의 숫자가 머릿속을 스쳐 지난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뭘로 해놨더라.

“정말 괜찮으니까 나 때문에 싸우지 말어. 저 친구가 심 사장 걱정을 많이 한 것 같은데.”

“그러지 마시고 저랑 병원 가요. 허리 아프죠?”

“괜찮다니까. 안 부딪쳤어. 그냥 놀라서 주저앉은 거야.”

그게 더 큰일 아닌가. 식은땀을 훔쳐내고 이람호를 쏘아보았다. 놈은 참으로 떳떳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분하고 잔잔한 피쉬가 이렇게 얄밉기는 처음이었다.

“근데 우리 애 이제야 왔어? 이놈 새끼 또 피씨방으로 흘렀구먼.”

“아녜요. 경철이는 제시간에 왔는데 제가 딴 데 좀 들렀다 오느라고 늦었어요.”

“내가 참 심 사장한테 폐가 많네. 나라도 오해할 거야. 응? 친구랑 싸우지 말어.”

“사장님, 그러지 마시고 병원….”

“알았어, 알았어. 갈게. 병원 갈게. 걱정하지 말고, 나오지 마. 응?”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은 사장님이 민망한 기색으로 일어섰다. 이람호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병원 진짜로 가셔야 돼요.”

“알았다니까.”

“이따 들를게요.”

“뭘 들러. 오지 말어. 필요한 거 있으면 경철이 편에 보낼게.”

아, 사장니임. 소매를 붙들고 늘어져 봤지만 그는 단호했다. 나오지 마, 응? 빠르게 사태를 수습하고 현관을 나서는 발걸음이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 괜찮은가. 영 미심쩍은 눈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까지 보고 돌아섰다. 돌아본 자리에는 여전히 이람호가 있었다.

“…….”

도어락 비밀번호.

“내 생일이던데.”

덤덤하기 짝이 없는 사형선고였다. 하아, 크게 한숨을 쉬고 뒷머리를 북북 긁었다.

“말해두는데.”

“어제부터 참 말해둘 것도 많네.”

“별 의미 없어. 그 당시에 외워두고 쓰다가 그냥…. 계속 썼을 뿐이야.”

“…….”

“다 그렇잖아. 한 번 지은 비밀번호 잘 안 바꾸잖아. 그래서…….”

변명이란 게 그렇다. 길어질수록 궁색해진다.

“…아니 지금 이런 게 문제가 아니라 남의 집에 왜 멋대로 들어와? 너 이거 가택침입이야. 알아?”

궁색해지면 화를 내게 된다. 벌컥 소리치자 이람호가 하아,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할 말이 그것뿐이야?”

푸른 피쉬가 낮게 일렁인다. 화가 난 건가? 나도 모르게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한참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던 이람호가 한 번 더 한숨을 쉬더니 조곤조곤 말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집에 가다가 픽 쓰러지질 않나, 전화했더니 병원이고 몸 안 좋다고 하고, 그 뒤로는 연락이 안 되고…….”

“…….”

“혹시 정말 어디 많이 아픈가, 혼자 사는데 집에서 쓰러졌으면 큰일 나는 거 아닌가.”

“…….”

“그래서 와봤어. 비밀번호는 설마 하고 눌러봤는데 열려서 나도 놀랐고……. 안 열리면 관리인 부르려고 했어.”

그랬는데 웬 덩치 큰 아저씨가 방에 있어서 일단 업어 치고 봤다는 이야기였다. 나까지 한숨이 나온다. 듣고 보니 놈도 억울할 일이 맞긴 하지만 아직은 화내야 한다. 화를 내지 않으면 기분이 좋아져 버릴 것 같으니까.

“작년에 디스크 수술도 하신 분이야. 이거야말로 큰일 났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다시 물어볼게. 너 지금 할 말이 정말 그것뿐이야?”

“…내가 그럼 너한테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그래?”

“주인도 없는 집에 사람 들여서 재우는 법이 어디 있어? 생각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입이 쩍 벌어진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이 다 내 탓이라 이건가.

“저 사장님은……. 아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니가 뭔데?”

“내가 이런 말도 못할 상황이야?”

“못할 상황이지! 너는 지금 할 말이 없어! 없어야 맞아!”

“그러면 내가 뭘 어쨌어야 하는데!”

쩌렁쩌렁한 일갈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뒷목에 오스스 소름이 일었다. 눈을 크게 뜨고 굳어버리자 이람호는 그제야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침묵이 이어진다. 내 방이 이토록 낯선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몰랐다. 물에 빠진 듯 숨이 턱턱 막혀온다. 이 감각을 안다. 뜨겁고 축축했던 여름의 교실. 끈적끈적한 목덜미에 달라붙던 시선.

“…걱정했어.”

핏발 선 눈의 첫사랑은 아무렇지 않게 내 가슴을 찌르는 말을 늘어놓는다. 힘겹게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갈가리 찢기는 듯했다.

“걱정했다고.”

나는, 이람호가 이런 입 바른 개소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걱정했다고, 심태경.”

믿고 싶어진다.

열여덟의 초가을, 이람호는 보란 듯이 전국체전에서 우승해 디펜딩 챔피언의 명예를 지켰다. 지역신문에 이람호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동안 교문 앞에서 모르는 학교 여자아이들이 녀석을 기다리는 일도 잦아졌다.

- 저것들은 덥지도 않나.

그 해는 정말 지긋지긋하게 더웠다. 9월이 다 끝나가도록 푹푹 찌는 날씨였다. 학교 측은 폭염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았다. 덥다고 불평할 기운조차 없었다. 셔츠 앞섶을 죽 늘린 채 빈 노트로 부채질을 했다.

- 솔직히 그 정도로 잘생겼나? 그냥 평범한데.

- 니네 집엔 거울이 없냐?

- 엉? 거울 없는 집이 어딨어.

- 근데 어떻게 안 깨고 버텼어.

김세나의 말에 투덜거리던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웬일로 이람호한테 좋은 소릴 다 하지. 의아하게 쳐다보자 김세나가 금방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 니가 하고 싶은 말 대신 해준 거야.

- 오, 독심술.

- 뭐래. 짜증 나거든.

무심코 내뱉더니 곧 아차 하는 얼굴을 한다.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다 한 풀 꺾어버리는 그녀를 보며 내 마음도 복잡해졌다. 사실 성질대로라면 훨씬 더 쏘아붙이고 싶겠지. 내가 약한 소리를 했던 탓에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 야, 데레사 여고도 있다.

- 뭐? 어디?

- 왼쪽에서 두 번째. 빨간 리본.

창가에 모여 있던 놈들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커졌다. 데레사 여고는 근방에서 제일 예쁜 애들이 많기로 유명한 미션스쿨이었다. 멀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아담하고 마른 체형의 긴 머리 여자애였다.

- 졸라 예쁠 것 같다. 아, 부러워.

- 이람호랑 사귈까?

- 이람호가 맘만 먹으면 사귀는 거야? 저런 애랑?

관심 없는 척 부채질에 집중하면서도 별수 없이 귀가 열린다. 부자 학교에 다니는 예쁜 여자, 똥통 학교에 다니는 재능 있는 운동선수. 아, 지나치게 어울린다. 소설이나 드라마라면 해피엔딩이 내정된 한 쌍의 커플이겠지.

- 저런 애랑 하면 어떤 기분일까.

군침만 흘리던 무리들 사이에서 마침내 그 말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요란스러운 웃음소리가 터졌다. 아, 미친 새끼. 타박하고는 있지만 다들 그게 궁금해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막…, 속살도 졸라 뽀얄 거 같지 않냐.

- 완전…, 아…, 막….

처음이 어렵지, 한 번 터뜨리면 그 후로는 일사천리다. 막 제동이 걸리려는 음담패설에 김세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희멀건 얼굴에 시뻘건 환멸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 병신들, 존나 많이 해본 것처럼 말하네.

이어서 직구. 김세나의 특기분야는 언제나 한결같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썰렁해졌다.

- 야, 뭐랬냐?

- 허세 떨지 말라고, 븅신아. 너 섹스 못 해본 거 다 티 나거든.

- 이 씨발새끼가, 너 나 아냐? 니가 뭘 아냐?

마주 일어선 놈의 관자놀이에 불뚝하니 핏줄까지 올라와 있었다. 섹스 경험 없어 보인다는 소리가 저렇게까지 분노할 말이었던가. 놈의 ‘피쉬’가 새카맣고 뾰족하게 일어나 있었다.

- 척 보면 알지. 니 면상으로 퍽도 여자 벗겨봤겠다.

- 이 좆만한 새끼가 근데…….

- 내가 좆만해? 니 좆은 이만하거든.

김세나가 새끼손가락을 착 펴 보였다. 그때까지 씩씩대던 놈의 피쉬가 한순간 밑으로 가라앉았다. 위험신호였다. 나는 재빠르게 달려들어 놈과 김세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 워어, 워. 그만합시다.

- 뭘 그만해, 씹새끼야. 저 새끼가 시비 거는 거 못 봤어?

- 더워서 그래. 더워서. 이게 다 에어컨 안 틀어줘서 그래. 그치?

- 근데 보자보자하니까 이 새끼들이 세트로 사람을…!

주먹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다. 진짜다. …물론 내 반사신경이 동체 시력을 따라갈 수 있었을 때의 이야기지만.

불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천장이 보였다. 아픈 머리를 싸쥐고 고개를 들었을 때, 뭔가 미끄럽고 뜨끈한 액체가 인중을 축축하게 적셨다. 손을 대보니 코피였다. 아주 줄줄 흘러내리는.

- …….

아오, 쪽팔려. 머리가 핑 돌았다. 뒤로 넘어가는 와중에도 이거 엿 됐구나 싶었다. 교실에서 이 추태를 보였으니 평안한 학교생활은 안녕이구나, 하고.

꿈이라는 건 이람호를 보자마자 알았다. 온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웃음을 왜 꿈에서는 볼 수 있는 걸까. 그 답도 곧 나왔다. 내게 짓는 웃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놈의 앞에는 아까 보았던 명문 미션스쿨 교복을 입은 여자애가 서 있었다.

까맣고 윤기 나는 긴 머리,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 전혀 고치지 않은 교복을 입었음에도 눈에 보이는 부드러운 몸매……. 그 앞에 서 있으니 이람호가 그렇게 우직하고 단단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자가 좋다는 건, 결국 자신의 남성적 우월성을 증명해보일 액세서리가 필요하다는 뜻은 아닌가 하고.

- …….

그딴 생각이나 하면서 양호실에 드러누워 있자니 기분이 썩 더러웠다.

- 아오…….

띵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간신히 양호실까진 두 발로 왔지만 한 번 드러누우니 좀체 운신할 수가 없었다. 다행인 점은 양호실에는 에어컨이 빠방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늘 그랬다. 교실은 냉난방이 안 돼도 양호실과 교무실은 그렇지 않았다.

- 얘, 너 수업 못 들어가겠니?

양호 선생님은 30대 초반의 여자였다. 성실하고 단호한 사람이었다. 남학교에서 여선생에게 다정함이나 상냥함은 그다지 좋은 덕목이 아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죽는시늉을 했다.

- 머리가 핑핑 도는데요. 저 큰일 났나 봐요.

- 그럼 병원에 가야지.

- 딱 한 시간만 더 누워 있으면 나을 것 같은데.

- 그럼 이번 시간까지만 쉬고, 다음 시간에도 수업 못 듣겠으면 조퇴하고 병원 가.

- 네에.

늘어지게 대답하고 두 팔을 쭉 뻗었다. 빙글빙글 어지럽다. 조퇴라. 나쁘지 않다. 어차피 집은 비어 있을 테고 김세나 얼굴 보기도 좀 불편하니까.

김세나도 내가 불편해진 걸까? 새파랗게 질려 있던 얼굴을 떠올리자 심란해졌다. 언젠가는 그런 때가 오지 않을까 싶긴 했었다. 그 애는 날 좋아하니까, 친구 관계가 평생 지속될 수는 없겠지. 아무리 내가 게이라지만 그 애는 헤테로니까.

하지만 한편으로 또한 알고 있었다. 김세나는 절대로 먼저 내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나를 대할 때 그 애의 피쉬를 보면 안다. 평생 그 애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기에 김세나를 아꼈다.

- …….

비열한 애정이다.

- 교무회의 가야 되니까 안에서 문 걸어놓고 있으렴. 누가 두드려도 열어주지 말고.

한참 부스럭거리던 양호 선생이 말했다. 네에, 늘어지게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 한참 더위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시원한 침대에 드러누워 있자니 계속 잠이 쏟아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 얘, 문 잠가. 나 나간다.

- 네에.

입으로는 대답했지만 이미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피곤하다. 이대로 잠들어서 깨어났을 땐 노인이었으면 좋겠다. 커다란 개도 있고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는 집에서, 그 어떤 불신의 여지조차 없이 애정으로 가득 찬 환대를 받고 싶다.

- 네에…….

나와 피가 이어진 어린 생명들은 이유도 묻지 않고 나를 사랑하겠지. 따뜻한 손을 내밀며 거리낌 없이 품에 안겨오겠지…….

눈을 뜬 것은 드르륵, 미닫이문을 거칠게 여는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수업이 시작한 지 20분은 지났을 시간이었다. 아차, 문을 안 잠그고 자버렸잖아. 양호 선생이 자리를 비울 때 꼭 문을 잠그는 것은 양호실을 피서지로 쓰겠다고 호시탐탐 노리는 남고생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서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흰 커튼 너머의 동태를 살폈다. 혹시 놈이 기회를 노려 제 친구들을 끌고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아주 난처해진다.

- …….

그림자는 조용했다. 고개만 한 번 두리번거렸을 뿐이었다. 어딘가 실루엣이 눈에 익었다. 나는 조심스레 손끝으로 커튼 틈을 벌렸다. 문을 등지고 선 것은 이람호였다.

- 어?

반사적인 탄성이었다. 아직 꿈인가 싶기도 했다. 아차 싶어 금방 입을 막았지만 그런다고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홱 돌아본 이람호가 척척 걸어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망설임 없이 커튼을 걷는 손에 그만 황망해졌다. 나도 모르게 차가운 시트 끝을 꼭 쥐었다. 놈은 무심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는 여상하게 물었다.

- 선생님은?

- …으응?

- 양호 선생님. 어디 갔냐고.

- 교, 교무회의…….

등신처럼 말은 왜 더듬어. 자아분열이 가능하다면 내 따귀부터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람호는 흐음, 하더니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앉았다. 순식간에 모양이 이상해진다. 꼭 내 병문안이라도 온 사람처럼 굴고 있는 것이다.

- …왜, 왜?

- 뭐가.

- 왜 거기…, 앉느냐고.

- 앉으면 안 돼?

그렇게 물으면 또 할 말이 없다. 안 될 이유는 없지.

- 너 코피 터졌다며. 쌍코피.

- …쌍코피는 아니었거든.

- 소문 쫙 퍼졌다. 웬 놈이 까불다가 핵주먹 한 대 맞고 코피를 한강처럼 흘렸다던데.

- 난 틀렸어…. 자퇴해야 돼.

진심 반 농담 반으로 뇌까렸다. 한 번 만만한 놈으로 찍혀버리면 평안한 학교생활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한다. 사실 자퇴해도 손해는 없지. 대학 갈 생각도 아니었고 학교 다니기도 귀찮으니까.

- 왜 그랬어?

이람호가 물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지 의아할 정도로. 내가 눈을 둥글게 뜨고 쳐다보자 놈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 아니, 네가 싸웠다는 게 영 이상해서.

- 싸운 거 아냐. 까불다 한 대 맞은 거지.

-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도저히 상상이 안 가잖아.

- …….

- 그게 궁금해서 와봤어.

심장이 쿵 떨어진다. 설마 이렇게 대놓고 ‘궁금해서 왔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비록 염려나 걱정이 아닌 질 낮은 호기심이라 할지라도 내게 큰 사건인 건 변하지 않는다.

- …너, 너는 그.

그래서 그만 엉뚱한 말부터 내뱉고 말았다.

- 그 여자애랑…, 사귈 거야?

- 갑자기 뭔 소리야?

- …교문 앞에서 너 기다리는 애……. 머리 이렇게 길고 교복 입은 애.

- 그런 애가 한둘이냐?

재수 없는 발언인데 재수 없게 들리지 않는다. 나는 야유하거나 타박하는 대신 이람호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을 덧붙였다.

- 데레사 여고 다니는 애 한 명 있잖아…. 엄청 예쁘던데.

- 왜, 가서 머리채라도 잡게?

- …내가 그런 짓을 왜 해?

- 너도 나 좋아한다며.

- 아니 그렇다고 어떻게 여자애 머리채를 잡아…….

진지하게 대답하자 이람호가 웃었다. 그래서 꿈에서 본 모습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한껏 웃을 때의 이람호는 코를 찡긋하는 버릇이 있다.

- 뻔하네. 또 그 쪼끄만 놈 싸움에 휘말렸지?

- …….

- 뭐가 그렇게 애틋해? 둘이 사귀냐?

어쩐지 이 질문 처음이 아닌 것 같은데. 기억을 곰곰이 더듬어 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 게 왜 궁금하지. 나는 분명 이람호를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 게이니까 남자면 아무나 다 사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 아냐?

- 넌 헤테…, 아니, 이성애자니까 여자면 아무나 다 사귈 거야? 교문 앞에 서 있는 애들 중에 한 명 골라잡아 사귀라면 그럴 수 있어?

- 응.

- …….

- 누구든 상관없는데.

이것도 뭐 그러시다니 할 말이 없다. 쩝, 입맛을 다시고 옆머리를 긁적였다.

- 뭐, 사람마다 연애관은 다른 거니까…. 근데 난 안 그래. 되게 까다롭게 골라.

- 그거 내 칭찬이야?

- 엉?

- 사람 까다롭게 고르는데 내가 좋다는 건, 그 까다로운 기준을 내가 통과했다는 거잖아.

…이 분이 오늘따라 왜 이러실까. 무슨 바람이 들어 이러실까.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날뛰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썼다.

- 날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내 칭찬 같은 건 별로 안 했었잖아.

- …칭찬이 듣고 싶었어?

- 칭찬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아하……. 머릿속에 꼬마전구 하나가 켜진 듯했다. 그러니까 이 양반, 내가 자기 팬들처럼 굴지 않는 게 의아하셨다 이거군. 하긴 고백한 후로 이렇다 할 접촉도 없었고 김세나가 엮여서 난리 치렀던 게 전부니까.

안 할래. 말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교문 앞에서 종종대고 기다리는 여자애들과 같은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여자였다면, 그리고 운 좋게 날 사랑해주는 부모를 만나 명문 미션스쿨에 다녔다면, 나 역시 이 날씨에 각종 귀여운 선물을 사 들고 저 교문 앞에 서 있었겠지.

어디서 어떤 순간에 발견했더라도 반드시 이람호를 좋아했을 테니까.

- 너는…….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주고 싶어.

- 너는 너무 특별하지.

그래서 네게 세상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 …저번에도 말했었잖아.

어린 날의 오만은 그런 식으로.

- 나는 어떤……, 색깔을 볼 수 있어.

실수의 무게에 비해 지나치게 나쁜 결과를 불러오곤 한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걱정에 가득 차 있었다. 비몽사몽 휴대폰 액정을 확인하자마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 김세나였다.

“어? 뭐가…?”

[어제 아파서 가게도 못 열었다며]

“으응…?”

[그 정도로 아프면 연락을 해야지. 병원은 다녀왔어?]

잠시 숨을 골랐다. 이렇게 될 줄 알긴 했지만 감동적이다. 입술을 꾹 물고 아픈 머리를 감쌌다.

“어……. 괜찮아. 그냥 감기였어.”

[많이 아팠어?]

“아니야. 병원 갔다 왔더니 이제 괜찮아. 오늘은 가게 열 거야.”

그래…, 느릿하게 대답한 김세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금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할 말을 찾다가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근데 어떻게 알았어? 당분간 가게 안 온다고 했잖아.”

[…그런다고 진짜 안 갔겠어? 그렇게 나를 몰라]

“…….”

[이람호가 너 아프다고 그러더라. 지가 가본다길래 냅두기는 했는데…]

말하는 김세나로서는 착잡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내 마음도 편치 않았다. 머릿속이 간지럽다.

“진짜 괜찮아. 너 그렇게 보내고 속상해서 과음 좀 했더니….”

[어이구, 그러셨어요? 나는 오죽했겠어?]

“그거 알아서 속상한 거야.”

[……]

“미안해, 세나야.”

김세나는 늘 그랬다. 두 번 안 볼 것처럼 말해놓고 반드시 돌아왔다. 나를 좋아하니까.

“미안해.”

마음은 과거를 헤매고 현실은 흙빛이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오다 말고 경철이와 마주쳤다. 녀석은 편의점 조끼를 입고 파라솔 아래 쪼그려 앉아 있었다. 입에는 사탕 하나를 문 채였다. 한숨을 푹푹 쉬는 꼴이 의아해 경철아, 부르니 토끼눈을 하고 올려다본다.

“뭐해? 손님 없어?”

“혀엉….”

당장 울 것처럼 찌그러지는 얼굴에 잘못 걸렸다 싶었다. 이제 와 후회해봐야 늦었지만. 그래, 왜, 뭐. 원하는 대로 되묻자 아예 코를 훌쩍이기 시작한다.

“돈이 비어요…….”

“뭐?”

“아까 알바 형이 넘겨줄 땐 분명히 계산 맞았는데…. 금방 아빠 나온대서 다시 맞춰보니까 이십만 원이 비어요.”

“…….”

“아빠가 나 의심하면 어떡해요? 나 사탕 하나밖에 안 먹었는데, 진짠데.”

들어보니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다. 연하늘색 피쉬가 기름 탄 물처럼 꾸덕하게 울렁거린다. 초조, 불안, 억울함. 어렵지 않게 읽어낸 감정들을 입안에 문 채 다시 물었다.

“중간에 누가 카운터에 들어온 적은 없고?”

“없어요…. CCTV도 다 돌려봤는데.”

“…….”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오전 알바가 수를 썼거나, 경철이가 수를 썼거나.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경철이는 결백하니 오전 알바에게 혐의가 갈 수밖에.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거였다.

물론 캐물어 보면 된다. 내 눈에는 보인다. 답하는 순간 그의 피쉬가 어떤 빛깔을 띠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면 나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래봤자다.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면 아무 효용도 없는 방법이었다.

“심 사장, 거기서 뭐해?”

그때 뒤에서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철이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렸다. “아빠…….” 울먹이는 목소리에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사장님의 얼굴도 조금 굳었다.

“왜 그래? 왜 울려고 그래.”

“…….”

경철이가 입만 벙긋거렸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끼어들기로 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돈이 빈대요.”

“돈이? 얼마나?”

“이십 만원…….”

경철이의 눈에 마침내 눈물이 고였다. 이십 만원. 새삼스레 곱씹어 보았다. 지금의 내게는 잃어버렸다 해봐야 잠깐 속 쓰리고 말 금액이지만 고등학생 때의 내게 이십 만원은 차마 그 쓸모를 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돈이었다.

내가 엄마 가게를 보다가 이십 만원의 로스가 났다면 엄마는 내게 어떻게 했을까. 상상하니 섬뜩해졌다. 공사장 막노동이라도 해서 채워오라며 당장 집에서 내쫓지 않았으려나. 차마 사장님 쪽을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해도 돈 앞에서까지 좋은 사람인 경우는 많지 않으니까.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골목길 빈 구석만 노려보는데 순간 경쾌한 목소리가 청량하게 쏟아졌다.

“마, 그게 뭐 울 일이야?”

내 귀를 의심하며 돌아보았다. 사장님은 황당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울지 마, 뚝. 어이구, 창피해.”

“아빠…….”

“인마, 아빠 가게에서 일 났으면 아빠 일이지, 그게 뭐 니 일이라고 울고 있어. 울지 마, 사내놈이 뭐 이런 걸로 울어, 동네 창피하게.”

“아빠, 진짜 나는 그게 왜 비는지 모르겠어요…….”

“니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자, 울지 말고 피시방 한 시간만 하고 집에 가. 알았지?”

경철이의 등을 한참 토닥여주던 사장님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경철이는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집에 갈래요….”

사장님은 그제야 조금 쓰게 웃었다. 그럴래? 하고.

“아무 걱정 말고 들어가. 엄마한테 밤에 나올 필요 없다고 하고. 응?”

“네…….”

“마, 어깨 펴. 괜찮아. 아빠는 다 알아.”

아빠는 다 알아. 그 말에야 비로소 경철이도 웃었다. 아빠는 알아. 네가 그럴 녀석이 아니라는 걸. 네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근거나 호소 따위는 필요하지 않은 절대적인 믿음. 마음이 울렁거린다.

“심 사장도 얼른 출근해. 우리 애 때문에 또 발 묶였네.”

“…….”

“됐어, 짐작이 가. 오전 애가 무슨 수를 썼겠지. 내가 내일 잘 얘기해볼게.”

“…내일 안 나오면요. 그 정도로 크게 벌였는데 그대로 잠수타지 않겠어요?”

“학교 어디 다니는지도 알고 어디 사는지도 알아. 저도 내일쯤이면 이건 아니다 싶을 거야. 괜찮아.”

과연 그럴까. 그런 양심이 남아 있다면 이렇게 철저히 일을 벌였을까. 도저히 희망적인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정말로 경철이는 의심 안 하세요?”

그래서 가장 희망적이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사장님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허 웃었다.

“심 사장 보기엔 우리 애가 그럴 애야? 스리슬쩍 돈 빼돌려놓고 저런 쇼를 할 애냐고.”

“모르죠, 저야…….”

“그래, 심 사장은 모르지. 근데 나는 알아. 절대 그럴 수 있는 애가 아니야.”

불쾌한 기색조차 없다.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피쉬였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주머니 속 주먹을 꾹 쥐었다.

“사장님이 우리 아버지였으면 좋겠어요.”

나름 농담조로 수습해보려는 시도였다. 다행히 사장님도 받아주었다.

“나 같은 남자를 만나. 그러면 되지.”

“그러게, 그럼 되네.”

“아, 그래, 그래. 맞다. 심 사장.”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뜬 사장님이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묻는 거였다.

“혹시 저번에 심 사장 집에서 본 친구, 그냥 친구가 아니고 애인이야?”

“…….”

“그런 거면 화낸 것도 당연하다 싶어서. 아직 화해 못 한 건 아니지?”

이 사람의 이해심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나도 모르게 푸하, 웃어버렸다. 가슴에 켜켜이 쌓여 있던 갑갑함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듯했다.

“사장님, 애인 생겼어요?”

가게 문이 열리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든 아청이 물었다. 커뮤니티 아이디 ‘아프리카청춘이다’, 줄여서 아청. 연두색으로 탈색한 머리가 산발이 되어 있었다.

“뭔 뜬금없는 소리예요?”

“알바가! 여기 알바가 그렇게 끝내준대매! 근데 사장님이랑 묘하대매!”

흥분한 아청이 침을 튀겨가며 제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요란뻑적지근한 커뮤니티 화면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찬찬히 살펴보니 가장 최근 글 제목이 다음과 같았다.

[이번에 <레인보우 피쉬>에 새로 온 알바 본 사람?]

인간들……. 쯧, 혀를 차고 아청의 손을 멀리 밀어냈다. 아무튼 좀 괜찮은 뉴페이스 떴다 싶으면 소문도 빠르다.

“꿈 깨요. 내 동창인데 완전 헤테로니까.”

“뭐? 진짜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이상꾸리한 가게에서 일한대?”

“지금 내 가게 모욕했냐?”

“이상꾸리한 건 사실이잖아요.”

“…사실이긴 하지.”

시계를 보니 오후 여섯 시를 지나고 있다. 이람호는 올 기미가 없었다. 설마 말싸움 좀 했다고 그대로 잠수인가. 나쁘지 않은 결과다. 이렇게 어영부영 끝나버리는 게 내게도 낫다. 어느 정도 이람호에 대한 실망감도 느낄 수 있고.

“그리고 오늘부턴 안 나올 거예요. 잠깐 도와준 거라.”

“에이, 아쉬워. 내가 꼬셔보고 싶었는데.”

“헤테로라니까 뭘 들었어?”

“알 게 뭐야? 맛있으면 됐지.”

뭐라 더 말하려다 멈추고 아청을 찬찬히 살폈다. 동그랗고 앳된 얼굴 여기저기에 촘촘히 박힌 피어스, 하도 탈색을 반복해서 가닥가닥 갈라진 머리카락, 요란한 컬러렌즈까지.

“걔는 얌전한 스타일 좋아해요.”

“정말? 맞아. 그래 보이긴 하더라.”

“학교 다닐 때도 조금이라도 날티 나는 애들이랑은 말도 안 섞고…….”

곰곰이 떠올리다 또 말문이 막혔다. 뭐 이런 걸 주절주절 설명하고 있냐. 아청은 시종일관 가벼운 웃음을 지은 채 으응? 내 말만 재촉했다.

“왜 연예인 좋아해도, 이효리보다는 이수영 좋아하고…….”

“이효리를 안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그게 진짜 헤테로 맞아?”

“…아무튼 청순파였다고요. 한 번은 이상형 월드컵하는데……. 왜 그거 있잖아요. 연예인들 사진 띄워서 한 명씩 고르는 거.”

“어, 예능에서 본 적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송혜교만 고르더라고. 웃겨.”

듣는 둥 마는 중 카운터에 놓인 박하사탕을 주워 먹던 아청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사장님, 걔 좋아했나 보네.”

“…….”

“그게 아니고서야 뭐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어요? 쟤가 대체 어떤 타입 좋아하나 아주 집중해서 봤나 보구먼.”

아무튼 눈치는 빨라서. 슬쩍 흘겨보자 헤 웃는다.

“…좋아했지.”

“오, 인정하네.”

“걔도 알아요. 내가 지 좋아했던 거.”

“어떻게?”

“내가 고백했으니까.”

우와! 아청이 탄성을 터뜨렸다.

“대박! 완전 용감해. 장난 아니야.”

“그치? 그때밖엔 못 할 짓이었어.”

“난 중학교 때 그 짓 했다가 고백받은 애가 학생부에 찔러서 퇴학당했는데!”

“…….”

거 아픈 기억을 건드려서 미안합니다. 숙연해진 내게 아청이 깔깔 웃어 보였다.

“근데 고백받고도 아직 연락하고 지내는 거 보면 그 친구가 착한가부다. 그치.”

“…그거야 뭐.”

“와, 부럽네요. 나도 걔가 내 마음 받아주진 않아도 연락이나 하고 지내줬으면 되게 고마웠을 것 같은데. 너 좋아한다고 말 꺼낸 순간에 내 코뼈를 부러뜨렸다니까.”

대단히 웃긴 얘기인 양 떠드는 아청에게서 독한 박하 향이 났다.

“학생부에서 걔가 뭐랬는지 알아요? 자기는 독실한 기독교인인데 자기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걸 믿을 수가 없대. 그랬더니 학생주임이 그러더라. 이게 다 주님께서 주시는 시련이니까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

“아니, 내가 아무리 싫다고 그게 종교의 힘으로 극복해야 할 시련씩이나 돼? 나 너무 슬펐어.”

불행히도 나는 이 이야기를 다섯 번째 듣는다. 아청을 처음 만났을 때, 가게에서 술 파티를 할 때, 아청이 누군가를 꼬시고 있을 때 등등을 포함해서. 외로운 사람들은 주로 이런 화법을 쓴다. 지금부터 나는 내 슬프고 어두운 과거를 아주 웃긴 얘기인 양 떠들 거야, 아무렇지 않은 척할 거야. 그러니 내가 얼마나 힘든 사람인지 알아줘. 물론 나를 피곤하다 여기지는 말고, 왜냐하면 난 이렇게 애쓰고 있잖아, 너한테도 보이지?

그들의 이런 어필은 끌려 나오는 기억이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기억이 될 때가 되어야 끊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고, 덕분에 나는 가게에 드나드는 손님들의 불행한 과거사와 짝사랑 스토리와 가정사를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 매번 처음 들어주는 척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사람은 어땠어요? 고백했을 때 싫은 티도 안 냈어?”

안 내기는. 호모 새끼가 어쩌니 하더니 내 정강이를 걷어차고 가버렸지. 무릎 나간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팠다고.

“…어, 착한 애라서요. 그냥…, 못 받아줘서 미안하다 그러고 끝났어.”

“우와, 대박, 대박.”

“응, 진짜 착한 애라…….”

말하다 보니 혼자 우스웠다. 이람호를 안주 삼아 내 불행을 곱씹고 싶지 않다. 진심인 동시에 자기만족이었다. 나는 눈앞의 이 불행한 어린애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은 건가. 옛날 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이 어두운 가게에서 침잠하고 있기는 매한가지면서.

“사장님은 좋겠다.”

“…….”

“나도 걔 한 번이라도 다시 보고 싶어요.”

그때 딸랑, 종이 울렸다.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 나타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감이 좋다. 좀체 빗나가지 않는다. 돌아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역시나 이람호였다.

“늦어서 미안, 학원 차가 고장 나서 수리 좀 맡기고 왔어.”

“…어.”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가방에 처박아 멀리 던져둔 핸드폰이 뇌리를 스친다. 그러고 보니 아까 진동 소리 같은 게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아직 손님 안 들었는데 뭐.”

“들었잖아, 손님.”

눈짓으로 아청을 가리킨 이람호가 주방으로 쑥 들어갔다. 소매를 착착 접고 앞치마를 찾아 입는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아청은 아주 홀린 듯한 눈으로 이람호를 쫓고 있었다.

“끝내준다아….”

“…그러고 보니, 주문 안 해요?”

“아, 저 갈게요. 오늘은 돈이 없어서. 저 사람 궁금해서 그냥 들러봤어요.”

아청이 이를 드러내고 히히, 웃었다.

“내일도 일해요? 눈 온다고 하던데.”

“일 있으면 해야죠, 뭐. 날씨 안 좋은 날엔 주문량이 많아요.”

“운전 조심해요. 눈 올 땐 웬만하면 도보 거리만 배달하지.”

“그게 제 맘대로 되면 좋겠지만요.”

물론 아청더러 뭘 어쩌라고 한 말은 아니다. 그는 지난겨울에도 빙판길에 오토바이를 끌고 가다 도로 한가운데에서 미끄러져 넘어졌다. 보험 따위는 당연히도 없었다. 그의 고용주는 오토바이 수리비를 아청에게 청구했다.

“사장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작년 겨우내 감기 달고 살았잖아요.”

짝사랑 이야기를 매번 처음 듣는 척 들어주는 대가로 아청은 내게 다정다감하다. 활짝 웃는 그에게 손을 흔들고, 문이 닫힌 걸 확인한 후에야 한숨을 쉬었다.

“감기 걸렸었어?”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심장이 벌컥 뛰었다. 아오, 깜짝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이람호는 태연했다.

“작년 얘기야, 작년.”

“아는데, 겨우내 달고 살았다며.”

“과장하는 거지. 남들 다 걸리는 감기 갖고 뭘 심란하게…….”

목덜미로 손끝이 다가온다. 얼른 쳐냈다. 그러자 다른 손이 턱밑까지 올라왔다. 양쪽 뺨을 꾹 쥐더니 기어코 제 얼굴을 보게 한다.

“…뭔데.”

마주친 눈. 쌍꺼풀 없이 길게 뻗은 눈초리 끄트머리에 푸른 피쉬 한 조각이 걸려 있다. 살랑, 살랑……. 나를 살피는 움직임. 어디선가 바람이 부는 것 같다.

“안색이 안 좋네.”

이람호가 덤덤하게 말했다.

“컨디션 나쁘면 들어가. 가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니가 뭘 어떻게 알아서 해.”

“칵테일 배워왔어. 술 종류도 외웠고, 웬만한 거 이제 다 주문받을 수 있어.”

“…….”

어이가 없어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뭐 때문에? 되묻지 못한 말을 우물대는 사이 내 얼굴을 놓은 이람호가 다시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걸 어디서 배워?”

“인터넷으로.”

“…장난해?”

“요즘 인터넷 강의 잘 돼 있던데.”

태평한 소리에 울화가 치민다. 누가 문외한 아니랄까 봐, 칵테일이 그냥 대충 섞어서 컵에 따라놓으면 그만인 줄 아나.

“됐으니까 나와. 감히 내 소중한 리큐르들에 함부로 손을 대려고?”

“할 수 있는데…….”

“됐다니까.”

보드카에 뻗는 손을 힘껏 쳐내고 밖으로 밀어냈다. 딱딱한 등이 어렵지 않게 밖으로 떠밀려 나갔다.

“그럼 니가 가르쳐주든가.”

어쩐지 순순히 물러서는가 싶더라니 주방 창문으로 얄미운 머리통이 쏙 올라온다. 가운데 손가락을 슥 들어 보이고 외면했다.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

…아니, 왜 또 갑자기 분위기 좋고 난린데? 미치겠네.

아픈 머리를 쥐어 싸고 주저앉았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누가 봐도 이럴 때 아니잖아. 뭘 좋다고 장단 맞추고 있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람호의 페이스가 너무 세다. 순식간에 휘말려 버리고 만다. 침착하자, 침착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자.

“태경아, 주문.”

그러나 틈도 없이 칵테일 이름이 적힌 종이 한 장이 쑥 들어왔다. …그래,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일은 좀 하고.

김세나는 가게 문을 닫을 즈음이 되어서야 왔다. 다행히 이람호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고 없었다. 나는 계산기를 두드리다 말고 손만 한 번 들어 올렸다.

“알바는?”

“쓰레기 버리러.”

속 보이는 질문이나마 침묵보다는 낫다. 의자를 끌어다 근처에 앉은 김세나가 한동안 꾸물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미안.”

그렇다고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뭐가?”

“그냥……. 이것저것.”

“…….”

“내가 너를 너무 편하게 대했던 것 같아.”

이런 말은 더더욱 듣고 싶지 않다. 들고 있던 영수증을 내려놓고 김세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긴 속눈썹이 둥근 뺨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왜 그래? 다시 안 볼 사람처럼.”

“에이, 우리가 어떻게 다시 안 봐.”

“그럼 왜…….”

“지겨운 소리지만 만날 그래. 너랑 싸우면 꼭 후회해. 나 혼자만 팔짝거리는 거 너무 바보 같고…….”

“…….”

“내가 바보 같아서, 날 그렇게 만드는 니가 밉고.”

왜 모르겠는가. 짝사랑이 다 그런 것이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다, 왜 나만 이런 마음고생을 해야 하나 원망스럽고, 미워서 미워하려다가도 웃는 얼굴 한 번 보면 깨끗이 녹아 사라지고.

“하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면 넌 잘못한 게 없거든.”

“…….”

“그게 진짜 사람 미치는 거야.”

이람호를 만나지 못하고 사는 동안, 이람호의 존재는 손톱 밑의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아프고 걸리적거리지만 뽑아낼 방법이 없는. 그래서 기다렸다. 손톱이 다 자라서 가시가 저절로 빠질 때까지.

“그래서 생각한 건데, 태경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게 우습다.

“내가 너한테 참 미안한 짓을 한 거였더라고.”

나는 진즉에.

“너도 계속 이런 마음이었을 텐데, 나는 좋은 말 한마디 못 해주고 닦달만 하고…….”

김세나라는 안식처를 포기해야 했다.

“그거 생각하니까 계속 너한테 미안하더라.”

그랬으면, 이런 얼토당토않은 소리는 안 들어도 됐을 텐데. 다혈질에 성격 급하던 열여덟의 김세나, 저 하고 싶은 대로 다 지르고 살아도 되었던 그녀를 이렇게 비굴한 처지로 만들지 않았을 텐데.

“…아니.”

정말 그랬을 텐데.

“아니야, 내가…….”

딸랑, 또 종이 울렸다. 빈 음식물 쓰레기통을 손에 쥔 이람호가 김세나를 발견하고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눈인사만 한 번 건네고 주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김세나는 이람호 쪽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럼 난 가볼게.”

“벌써?”

“너 퇴근해야 하잖아. 일부러 퇴근 시간 맞춰서 들렀어.”

“…기다려봐. 택시 잡아놓고 가.”

“괜찮아, 큰길 나가서 타면 돼.”

“안 돼. 기다려.”

장도리를 들고 가게로 쳐들어왔던 사기꾼의 얼굴이 뇌리를 스친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사실은 김세나가 이런 새벽에 혼자 가게까지 온 것도 기함할 일이었다.

“아, 뭐야…….”

당장 전화를 걸었지만 이상하게 콜택시 회사에 연결되지 않았다. 번호를 확인하고 다시 걸어도 신호가 길게 갈 뿐이었다. 쉬는 날……, 일 리는 없고, 회선에 문제가 생겼나? 초조함에 손톱을 뜯는데 김세나가 어깨를 툭툭 쳤다.

“진짜 괜찮아. 가볼게. 곧 해 뜨는데 뭐.”

“글쎄 안 된다고. 저번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 시간에 여자 혼자 어떻게 집에 가.”

“내 차로 가, 그럼.”

뒷말은 이람호였다. 나와 김세나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어느새 앞치마를 벗고 외투를 챙겨 입은 이람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집이 어딘데. 태워다줄게.”

“…….”

…그러고 보니 그런 방법이 있었잖아? 안락하던 이람호의 차를 떠올리고 슬그머니 김세나의 눈치를 살폈다. 속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태경이 데려다주는 김에 내려줄게. 어딘데.”

“…너 운전 잘해?”

“걱정 안 해도 될 만큼은 해.”

간절한 염원을 담아 김세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조금 내민 채 흠, 콧김을 내쉬더니 곧 선심 쓴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가는 길에 좀 부탁해.”

그리고는 또각, 또각, 들으란 듯 당당하게 앞장서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이람호에게 손짓했다.

김세나의 오피스텔은 우리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었다. 가게와는 완전히 반대편이었다. 효율을 따지자면 나를 먼저 내려주고 김세나를 내려준 뒤 돌아가는 게 나았겠지만 이람호는 망설임 없이 김세나가 찍어준 주소로 차를 몰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 차에 김세나와 단둘이 타고 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눈 온다.”

뒷좌석 오른쪽 자리에 앉아 창밖만 보고 있던 김세나가 낮게 뇌까렸다. 과연 눈이 한 송이씩 떨어지고 있었다. 아주 잠시 아청의 얼굴이 스치고, 내일 출근이 막막해졌다. 유난히 눈이 자주 오는 것 같았다.

“차 얻어 타서 다행이네, 구두 신었는데.”

“언젠 안 신고 다녔던 것처럼 말한다.”

“당분간은 안 신어야겠어. 이제 추울 때 구두 신으면 발이 너무 시리고 아파. 옛날엔 폭설이 쏟아져도 무조건 힐이었는데.”

그건 나도 기억하고 있다. 기록적인 한파에 폭설이 몰아쳤던 날에도 김세나는 꺾일 듯 높고 얇은 구두를 신고 왔었다.

“어떻게 온통 빙판인데 루부탱 신고 다닐 생각을 했을까? 다리 분질러 먹지 않은 게 용해.”

“루부탱이 뭐야?”

조용히 운전만 하고 있던 이람호가 물었다. 눈치 보다 대화에 낀 기색은 아니다. 정말 그냥 궁금했던 듯했다. 다소 심술을 담아 짧게 대답했다.

“엄청 비싼 구두 브랜드.”

“그렇구나.”

끝이었다. 잠시 뻘한 공기가 이어지고 김세나가 흠, 헛기침을 했다.

“웬만한 회사원 월급보다 그 구두 한 켤레가 더 비싸지. 손이 터져라 그림 그려다 팔아서 번 돈으로 간신히 샀던 거야.”

“그런 거면 날씨가 나쁠 땐 안 신는 게 낫지 않나? 더러워지잖아.”

백미러 속 김세나가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녀가 예상했던 대답은 저런 게 아니었을 것이다. 월급보다 비싼 구두라니 미친 거 아냐? 트렌스젠더들이 그렇게 명품에 환장을 한다더니 어쩌고저쩌고. 김세나가 휘감고 다니는 각종 명품 옷과 구두와 가방들에 무책임하게 쏟아지던 열등감 어린 말들이 이람호의 입에서만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니, 뭐……. 그렇긴 한데……. 그땐 막 샀던 거라 자랑하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겠네.”

또 끝이었다. 더 이상은 궁금한 것도 덧붙이고 싶은 말도 없는 모양이었다. 흠, 한 번 더 헛기침한 김세나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아예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에 들어가 김세나를 내려주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 나왔다. 이람호는 차가 다시 도로에 진입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너는 면허 안 따?”

“어?”

“차 몰기 힘든 형편도 아닌 것 같고, 저 친구도 신경 쓰이면 한 대 뽑는 게 낫잖아. 방금처럼 안전하게 데려다줄 수 있는데.”

“김세나 셔틀하게 차 뽑으라고?”

“…아니, 꼭 그런 건 아니더라도……. 굳이 운전 안 하는 이유가 있나 해서.”

“면허시험 떨어졌거든.”

“…….”

“도로주행 네 번인가 떨어지고 포기했어.”

잠시 침묵하던 이람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잘한 결정이네.”

내 생각도 그랬다.

“시험관이 그러더라. 당신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니까 웬만하면 대중교통 타고 다니라고.”

“푸핫.”

“또 뭐랬더라. 당신 목숨만 소중한 게 아니라 남의 목숨도 소중하게 여기랬나.”

“도대체 얼마나 못했길래 그래?”

이람호가 소리 내서 웃었다. 아, 눈부시다. 가로등 불빛에 흔들리는 눈송이가.

“몰라. 나는 똑바로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시험관이 차선변경을 하려면 깜빡이를 넣으라고 막 고래고래 소리를…….”

“그게 뭐야.”

“시험 볼 때 한 차에 시험관 한 명이랑 응시자 두 명이 타잖아. 그래서 뒷좌석에 다른 응시생 하나 앉아있었는데 내가 급발진하는 거 보더니 바로 안전벨트 매고 손잡이 잡더라.”

당시에는 속이 쓰렸다. 학원비에 강습비만 거의 100만 원을 썼는데 이 돈이 다 휴짓조각이 되다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어서. 하지만 내가 헛되이 쓴 돈과 시간이 지금 이 순간 이람호를 웃겨주고 있다는 것에 나는 비참하게도 보람을 느꼈다.

“그때 집에 가는데 드는 생각이, 도로에 차가 저렇게 많고 개나 소나 다 운전을 하는데 나는 왜 이거 하나 못하나 싶어서…….”

한편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품어온 불행은, 지금 이 순간 마음만 먹으면 끝나는 것이다.

“…….”

이람호는 물었다. 자신에게는 이제 기회가 없냐고. 이런 말도 했다. 나와 다시 만난다면, 어쩐지 그렇게 될 것 같았다고.

“그래서?”

나는 이람호와 뭘 어쩌고 싶은 걸까.

품고 있는 것이 변치 않은 연심이든 질척한 미련이든, 지금의 내가 이람호를 의식하고 놈 위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놈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이 꼴이겠지.

자존심인가? 나는 이람호가 상처 입힌 내 자존심을 회복시켜줄 만큼 충분히 비굴하게 굴기를 바라는 건가? 잔뜩 낮추고 엎드린 채 애원하는 꼴을 보고서야, 이렇게까지 하는데 별수 없다는 핑계 한 줌을 손에 쥐고 놈을 받아들일 셈인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차는 어느새 멈춰 서 있었다. 내 집 앞 골목이었다. 이람호는 좌석에 편히 등을 기댄 채 느긋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말이야.”

나는 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아까 김세나가 한 말, 거슬리지 않았어?”

“거슬려? 어떤 말이?”

“몇백만 원짜리 구두 사신고 뭐 그런 거.”

“알 게 뭐야? 지 돈인데.”

“…….”

“그보다, 개나 소나 운전하는데 나는 왜 못하나 싶어서, 그래서?”

오로지 내 말에 대해서만 궁금해한다. 나에게만 말을 이어간다. 이람호가 내게 이런 우월감을 느끼게 해주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이람호가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다. 갸웃한 시선이 관자놀이에 꽂힌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심코 내뱉었다.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더 쌓이기 전에 이람호를 보내야 할 텐데.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또 뭐가.”

“난 이제 와서 너랑 뭐 어쩔 생각 없어.”

“…….”

“그러기 싫어.”

눈도 싫고 겨울도 싫다. 눈이 오면 떠오르니까. 졸업식 날이었다. 나는 김세나의 어머니가 안겨주신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엄마는 집에서 늘어져 자고 있을 터였다. 일하는 사람이 바빠서 그렇지 뭐……, 위로하는 말에 머쓱해 그저 웃었다. 그렇다고 졸업식 날마저 김세나의 가족 사이에 끼어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한 손에는 꽃다발을 든 채 눈 오는 하굣길을 걸었다. 하늘은 검고, 땅은 희고, 꽃다발은 무거웠다.

덜컥 막막해졌다. 이제까지는 학교에 오면 김세나가 있었다. 누구든 매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어쩌지. 남은 인생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그 길고 긴 시간을 홀로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다.

그대로 돌아섰다. 체육관으로 달렸다. 이람호는 졸업식 전날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럼에도 몇몇 대학 관계자들이 놈을 만나러 학교로 찾아왔다고 했다. 꽃다발은 무겁고, 쥐고 있는 손이 시렸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체육관에 도착하자 마침 대학 이름이 붙은 체육복 차림의 남자 몇몇이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넓고 휑한 체육관 한가운데에 날카롭게 메마른 인영 하나가 서 있었다. 이람호, 부르자 돌아보는 얼굴은 딱딱하고 무감했다.

- …너 대학 가?

이람호는 내 얼굴과 꽃다발을 번갈아 보더니 다시 스트레칭에 집중했다. 대답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랑곳 않고 다가갔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두 번 다시 못 볼 얼굴이었다.

- 대학 갈 거냐고.

- 내가 무슨 돈으로 대학을 가, 병신아.

- …….

- 염장 지르지 말고 꺼져.

좀 더 다가갔다. 가까워지고 나서야 가칠한 얼굴 가득한 멍이 보였다. 이람호의 주 종목은 대련이었다. 시합에 다녀온 날이면 늘 이곳저곳 멍이 들어 있었다.

- …왜, 저 사람들 너 스카우트하러 온 거 아니야? 그럼 장학금 같은 거…….

- 장학금은 씨발, 개나 소나 다 퍼준대?

- …….

- 나한테 뭐가 있어서? 내가 뭘 이뤄놔서?

외치는 목소리 끝이 날카롭게 갈라진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천재, 유망주, 화려했던 타이틀은 스폰서의 외면 한 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패배자뿐. 너도 마찬가지야. 무엇도 갖지 못하고 여기서 끝나는 거야.

- …이람호.

우리는 이제야 같아.

- 나랑……, 사귈래?

“내가 병신 같았겠지.”

“…….”

“아니, 병신이었지.”

이람호는 말이 없다. 눈은 무서운 기세로 쌓이고 있었다. 와이퍼도 반쯤 파묻힌 뒤였다.

“그때 네가 어떤 색깔이었는지 알아?”

사귈래? 1년하고도 6개월을 꼬박 좋아하면서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못했던 말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 기름칠한 듯 미끄럽게 빠져나왔다. 먹구름이 빼곡히 끼어버린 하늘, 어두운 체육관 안에서 이람호의 피쉬만이 푸르게 빛났다.

“…너무 차가워서.”

하얀색에 한없이 가까운 푸른색. 손을 대면 핏줄마저 얼려버릴 듯했다.

“도저히 내가 알던 너 같지가 않았는데.”

사실은, 그때 이람호가 어떤 기분인지는……, 피쉬를 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 가득히 분노가 담겨 있었으니까. 분노의 출처는 비참함이다. 이람호는 내가 그런 말을 꺼낸 상황 자체에 비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네가 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어금니를 악문 채로.

- 그래.

이람호는 대답했다.

- 그러지 뭐.

그만 울어버린 것은 나였다.

“나 때문에 그 정도로 망가졌다는 게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어.”

“…….”

“그래서 도망쳤어.”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나를 어디까지 타락시키는 걸까. 너의 불행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무력해진 네 모습에 희열을 느끼는 나는 어디부터 잘못되어 있었던 걸까.

“그래, 나도 이제야 알겠어.”

내가 울어버리자 이람호는 한참 혼자서 욕을 내뱉었다. 그러다 나를 일으켜주려 다가왔었다. 나는 들고 있던 꽃다발로 이람호를 힘껏 후려쳤다. 갖가지 꽃이 흩어져 떨어지고 머리가 어찔하도록 진한 꽃향기가 났다.

“너는 잘못한 게 없었어.”

“태경아.”

“잘못된 건 나였어.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내가 잘못되어 있었어.”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었다. 덜컥, 잠겨서 열리지 않았다. 내가 잠금장치를 풀고 차 문을 밀치듯 여는 동안 이람호는 나를 제지하거나 나무라는 대신 저도 운전석 문을 열고 나왔다.

눈이 쏟아진다. 이미 축축하게 쌓여 있었다. 내딛는 발마다 꼴사납게 미끄러졌다.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나자빠진 나를 잡아 일으키며 이람호가 혀를 찼다.

“뛰지 마, 누가 잡아먹어?”

“놔.”

“정신 차리고 일어나. 좀 진정하고.”

“람호야, 나는.”

“그래, 뭐.”

“나는 정말로 지난 10년간 너만 좋아했어.”

“…….”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얼굴 한 번을 못 보고 살았는데, 1분 1초도 너를 좋아하지 않았던 시간이 없어. 이건 미친 거야. 어딘가 단단히 잘못돼 있는 거야.”

더우면 더워서,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추우면 추워서,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이람호가 생각났었다. 1년하고도 6개월, 하루를 빼곡히 이람호의 뒤만 쫓던 시간들은 모든 계절, 모든 날씨, 모든 익숙한 사물에 녀석을 새겨 놓았다.

이래서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이람호가 찾아온 첫날에 이미 깨달았던 것이다. 놈은 분명 내가 잊고 있었던 마음 전부를 깨워내, 생애 처음 겪는 열병인 양 내 안에 들어 앉히리란 것을.

무릎이 차다. 눈은 끝없이 내린다. 이람호는 이미 제 차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 좋아하느라, 김세나 그 불쌍한 계집애 그런 꼴로 만들고.”

“…걔 꼴이 뭐 어때서, 멀쩡해 보이더만.”

“다 너 때문이야. 너 만나는 게 아니었어. 과거로 돌아가면 전학부터 갈 거야. 절대로 너 안 좋아할 거야.”

“우냐?”

이람호가 내 뺨을 잡아 올렸다. 울지는 않는다. 나올 눈물도 없다. 무릎이 너무나 시릴 뿐이다.

“태경아.”

“뭐.”

“고개 숙이지 마.”

푸른빛 피쉬가 아른거린다. 물결이다. 여름 내내 달구어진 바다의 미온.

“표정이 안 보이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

“그래서 불안해져.”

표정을 보면 안다는 거야? 되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나는 모른다. 이람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피쉬를 살펴봐도 읽을 수 없다. 그래서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하다.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게 많은 거 알아.”

아니라고 했잖아. 힘껏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 잘못이라 치고 다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제 와서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아.”

차고 딱딱한 손이 양 뺨에 닿는다. 어쩌면 지금껏 나는 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눈을 뜨면 김세나의 생일파티 잔해가 어지럽게 널브러진 가게일 거야. 이토록 길고 생생한 꿈에서조차 이람호 때문에 온갖 삽질을 했다는 게 웃겨서라도 이 마음이 조금이나마 식을지도 몰라.

그러나 또한 알고 있다. 손끝의 감각. 굳은살이 촘촘히 박여 돌 같은 이 손가락. 이 감각이 꿈일 리 없다. 이람호는 10년을 넘어 내 앞에 있고, 흙으로 덮어 사라진 줄 알았던 마음은 고스란히 심장박동에 실려 발끝까지 흐른다.

“…사멸회유라는 게 있어.”

뺨을 쓸던 손이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온다. 부드럽게 매만지는 움직임에 자칫하면 잠이 들 것 같았다.

“아버지 돌아오고 얼마 후에, 할머니 모시고 같이 제주도에 갔었어. 근데 할머니가 낮 내내 주무셔서……, 할 일이 없어서 배 하나 빌려서 낚시를 나갔거든.”

“별짓을 다 했네…….”

“그래봤자 생초보한테 물고기가 잡혀줄 리 있나. 찌 던져놓고 한참을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뭐가 잡힌 거야. 건져보니까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열대어 같은 거였어. 선장님한테 이게 뭐냐고 물어봤더니 사멸회유어라고 하더라고.”

“……?”

“계절마다 서식지를 바꾸는 물고기들이 있잖아. 먹이가 풍부한 곳에 가려고 해류를 거슬러 헤엄치는 종들. 그런데 가끔, 제 의지와 상관없이 해류에 휩쓸려서 떠밀려오는 어린 물고기들이 있대.”

“…….”

“그런데 이런 물고기들은 해류를 다시 거슬러 올라갈 힘이 없대. 그래서 떠밀려온 자리에서 계절을 못 넘기고 죽는다는 거야. 그걸 사멸회유라고 한대.”

고등학교 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었다. 그때 바다 속 열대어 탐험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던 적이 있다. 저런 물고기들은 더운 나라에 사는 거 아닌가? 우리나라는 겨울에 추울 텐데 어떻게 살지?

떠올리는 데서 그쳐 버린 의문이 한 가닥 풀려나온다. 그렇구나. 겨울을 나는 게 아니었어. 매번 새로운 열대어들이 여름마다 떠밀려와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던 거야.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는 잘 모르겠어. 태경아. 나는 내 의지로 헤엄쳐온 걸까, 영문 모를 해류에 떠밀려온 걸까.”

“…….”

“그걸 확인할 때까지만 여기 있으면 안 되겠어?”

부탁하는 말에 비굴함은 묻어 있지 않다. 한 점의 비참함도 없다. 이람호는, 감히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고고해졌다. 조용하고, 단단하고, 차갑다.

“응?”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차마 시선을 마주한 채 입을 열 용기는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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