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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블랙 (2/10)

2. 블랙

- 쟤 누군지 알아?

아이스크림을 쭉쭉 빨던 김세나의 어깨를 툭 치고 운동장을 가리켰다. 물론 아직 소년의 몸뚱이를 가지고 있던 시절의 김세나다. 녀석은 쭈쭈바 꽁지를 내게 양보하며 되물었다. 누구?

- 지금 뛰고 있는 쟤.

- 뭐야, 저거 사람이야? 미친 새끼, 눈 존나 좋다.

당시의 김세나는 필요 이상으로 입이 걸었다. 굳이 필요 없는 문장에 온갖 욕설이나 비속어를 섞어 쓰곤 했다. 아마도 예쁘장한 얼굴로 남고에서 살아남기 위한 의태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 덥지도 않나? 다 싸매고 뛰어.

- 그러게, 씨바. 내가 다 덥다.

쭈쭈바 꽁지를 질겅거리며 운동장 반대편까지 멀어진 까만 그림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사이 김세나는 가만히 제 할 일 하던 반 녀석들을 들쑤시고 다니며 까만 그림자의 정체를 수소문했다.

- 이람호래. 12반.

정보를 물어오는 데는 채 일 분이 걸리지 않았다.

- 12반이면 예체능반이네.

- 어, 운동한대. 태권도. 근데 살 빼야 돼서 쉬는 시간마다 저렇게 뛴다는데.

살을 뺀다고? 어느새 반 바퀴를 돌아 다시 창문과 가까워진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키가 크고 단단한 체형이지만 군살 따위는 없어 보였다.

- 살을 왜 빼?

- 몰라.

- 감량하는 거래, 체급 바꾼다고.

심드렁한 김세나를 제치고 앞자리의 박송이 끼어들었다. 평소에는 툭하면 말참견을 해서 귀찮았지만 이런 때가 되니 반가운 오지랖으로 느껴졌다.

- 체급을 바꿔?

- 원래 라이트급인데 페더급으로 내린대. 그러려면 한 5킬로 빼야 된다고 하던데.

- 고등학생도 그런 걸 하나?

- 국가대표 시험 치려고 그런대.

국가대표라니, 친근한 듯 현실성 없는 이야기였다. 국가대표가 되거나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체급을 낮추는 경우가 있다는 건 알지만 그게 같은 학교 같은 나이의 이야기가 되니 낯설게만 느껴졌다.

- 쟤 잘해?

- 작년에 고등부 전국 우승했잖아. TV에도 나오고 학교에 현수막 걸리고 난리였는데.

그…, 랬나? 눈만 껌뻑껌뻑하자 박송이 쯧쯧, 혀를 찼다. 나는 놈과 창밖을 한 번 번갈아 보고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 근데 작년이면 1학년이잖아. 1학년이 체전 우승을 했다고?

- 그러니까 난리 난 거지. 완전 천재가 나왔다고. 어릴 때부터 유명했대. 소년체전도 다 1등 했다는데.

듣다 보니 또 의문이 생겼다.

- 그런 놈이 왜 감량까지 해? 국대면 어차피 국내 선발이잖아. 체전 1등이면 국내에 쟤만큼 잘하는 사람 없다는 소리 아냐?

- 아니지, 일반부가 있잖아. 대학생한텐 진대.

아아, 드디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건 쉽지 않겠구나.

- 올해 초 국대 선발전도 나갔는데 떨어졌대. 그래서 체급 내려서 내년에 다시 해본다고 저런다던데.

올림픽이라. 그거야말로 꿈같은 소리였다. TV 속에나 나오는 말인 줄 알았다.

- 뭐야, 졸라 구리네.

듣고만 있던 김세나가 코웃음을 쳤다. 박송도 짐짓 센 척 어어, 하며 웃었다.

- 세상이 그렇게 쉽기만 하겠어? 난다 긴다 해봤자 세계 기준에는 못 미치지.

- 그러니까, 저게 뭐하는 짓이야? 탈수로 먼저 죽겠네.

김세나와 박송이 무책임한 재단질을 해대거나 말거나 나는 또 운동장 반대편으로 멀어진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사실은 처음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빛의 잔상이 눈꼬리에 달라붙어 있던 탓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있고, 개중 특히 눈에 띄는 색을 가진 사람을 보면 아무래도 인상에 남는다. 이람호가 매달고 다니는 푸른 피쉬가 그랬다. 심해처럼 어두운 파랑과 성에처럼 밝은 파랑이 한 가지 빛깔인 듯 산란하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잠겨 들고 싶었다. 그때 이미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람호가 대단히 못생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상대는 안 된다는 원칙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못생기고 인기 없는 녀석이었으면 했다. 그래야 내가 접근했을 때 쉽게 받아줄 것 같았다.

그러나 급식실에서 몰래 훔쳐본 이람호는, 김세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쁘지 않’고 내 기준에선 대단히 준수한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멀끔한 허우대에 그 실력까지 더해져 인터넷에는 무슨 팬카페 비스무리한 것도 있다는 모양이었다. 절망스러웠다. 좋다는 여자애가 한둘이 아닐 텐데 나 같은 게이가 달라붙어 봤자 희망이 없겠지.

- 미친 호모 새끼가, 쳐 돌았냐?

물론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일 줄은 몰랐지만.

이왕 차일 거 속전속결로 가자, 결심하고 학교가 파하자마자 놈의 뒤를 졸졸 따라가다 고백했다. 이람호는 눈썹을 잔뜩 구긴 채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바닥에 침을 뱉었다.

- 뒤지게 맞기 전에 꺼져. 존나 재수가 없으려니까.

설마 포비아였다니 예상외였다. 아무리 봐도 포비아 관상도 색깔도 아닌데.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말에 차이가 있으니, 이람호가 아무리 험악한 시늉을 해봐야 무섭지가 않았다.

- 어, 기분 나빠? 미안.

그래서 가볍게 받아쳤다. 이람호는 지렁이가 직립보행하는 꼴이라도 본 양 어처구니없는 얼굴이었다.

- 뭐하는 새끼야, 너? 누구야?

쿵, 쿵, 땅을 세게 박차며 다가온 이람호에게서 진한 땀 냄새가 풍겼다. 아, 젠장. 냄새도 좋네.

- 나 4반이야. 이름 심태경이고.

- 누가 그딴 게 궁금하대?

- 그럼 뭐가 궁금한데? 다 얘기할게.

이람호는 금방 말문이 막혔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얼마나 기가 찰까. 내 생각에도 이건 미친 짓인데. 한참 씩씩거리고만 있던 녀석이 뭔가 깨달은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 …무슨 벌칙이냐, 이거?

생각이 그쪽으로 튀었군. 나는 씩 웃어버렸다.

- 아니야. 진짜 널 좋아한다니까.

- 개소리하지 말고 솔직하게 불어라. 지금 사과하면 봐줄 테니까.

- 사귈래?

말 떨어지기 무섭게 정강이로 놈의 발이 날아들었다. 뻑, 엄청난 소리에 나는 억, 하며 주저앉았다. 무릎이 끊어진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아팠다.

- 별 미친 새끼가 진짜…….

밥맛 떨어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이람호가 홱 돌아섰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절뚝거리며 그의 뒤를 쫓았다.

- 야, 무슨 운동선수가 사람을 패?

- 닥치고 꺼져.

- 아, 내 다리. 부러졌어. 완전 부러졌어. 아, 사람 살려.

물론 엄살이지만 정말 아팠다. 매워도 보통 매운 발차기가 아니었다.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또 주저앉아야 했다. 역시 얼마 못 가 멈춰선 이람호가 홱 돌아보았다.

- …야.

그제야 좀 신경 쓰이는 기색이었다. 나는 들으란 듯 한껏 아이고, 통곡하며 뒹굴기 시작했다.

- 내 다리! 내 다리 이제 못 쓰게 됐어! 절름발이로 살아야 돼!

- …저 미친 새끼가.

- 동네 사람들! 남안고 2학년 12반 이람호가 제 다리를 부러뜨렸어요!

- 야, 돌았어? 안 닥쳐?

후다닥 돌아온 이람호가 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당황한 듯 푸른 피쉬가 요란하게 일렁였다. 태양과 부딪친 파도처럼 보였다.

- 그 정도로 사람 다리 안 부러져, 일어나.

- 나는 부러져. 사실 난 뼈가 아주 잘 부러지는 체질이거든.

- ……뭐?

아무 말이나 되는 대로 주워섬기는 것은 내 오랜 특기였다.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해도 김세나가 속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는 이유였다. 그러나 김세나 같은 면역이 있을 리 없는 이람호는 순식간에 허옇게 굳은 얼굴을 했다.

- 진짜야? 진짜로 부러졌어? 진짜 부러진 거 같아?

얼마나 당황했는지 똑같은 말이 어미만 바꿔 세 번을 튀어나온다. 어, 이건 안 좋은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 아, 아니, 농담인데.

- …….

잠깐 멍하니 있던 이람호의 눈에 경멸 어린 빛이 맴돌았다. 아, 젠장. 이 자식 농담 안 통하는 타입이구나. 스스로를 쥐어박고 싶어 손끝이 근지러워졌다.

- 저기, 미안해. 그냥 해본 소린데, 아니, 아프긴 진짜 아파.

- …….

- 진짜 잠깐 부러진 줄 알았어. 근데, 운동선수들은 일반인 때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막 가중처벌된다던데.

- 꺼져.

놈의 피쉬가 순간 한 가지 빛깔로 얼어붙었다. 손대면 베일 듯 희고 차가운 색이었다.

- 정말로 뼈 나가기 싫으면 두 번 다시 얼쩡거리지 마라, 너.

낮게 경고한 놈이 이번에야말로 돌아서서 가버렸다. 나는 골목길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 뺨을 긁적였다. 거 까칠하네. 뻘쭘함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는데 쾅,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골목을 벗어나던 놈이 쓰레기통을 걷어차 넘어뜨린 듯했다.

고민하던 나는 절뚝대며 쓰레기통을 바로 세우고 흩어진 쓰레기를 도로 담았다. 그 정도의 책임은 내게 있는 것 같았다.

<어제 잘 들어갔어?>

일어나니 김세나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완벽한 걸 보니 아직 화가 안 풀린 상태다. 비몽사몽 답문을 찍고 도로 누웠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이게 다 과거의 나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병신이 다 있었을까.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한 기억들에 혼자 소리 지르며 이불을 뻥뻥 차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술을 딴 게 문제였다. 적당히 처먹어야지, 왜 무슨 술이든 한 번 까면 바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막 정오를 지난 시간인데도 하늘이 우중충했다. 일기예보에서는 눈이 올 거라고 했다. 끔찍하다. 가게도 집도 다소 언덕진 위치에 있었다. 작년 겨울에 눈이 내리자마자 얼어붙었을 때는 하루에 서너 번씩 넘어지다 결국 한의원 신세를 졌었다.

아픈 머리를 싸쥐고 끙끙대며 일어났다. 레토르트 콩나물국을 냄비에 붓고 불을 붙이자 몇 분 지나지 않아 얼큰한 냄새가 집안을 감돈다. 세상 좋아졌다. 요리라고는 쥐뿔 몰라도 매일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지. 콧노래를 부르며 즉석밥도 뜯었다.

어디선가 낯선 벨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

혹시 싶어 테이블 위의 내 핸드폰을 들어 올렸지만 잠잠할 뿐이었다. 애초에 내 핸드폰은 365일 진동 모드로 설정되어 있다. 두리번거리며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옷장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가방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어제 매고 나갔던 그 가방이었다.

혹시, 설마, 에이 설마. 조심스레 지퍼를 열었다. 그와 동시에 벨소리가 끊겼다. 수첩과 열쇠, 장부 따위가 빼곡하게 차 있는 가방 안쪽에서 뭔가 반짝반짝 점멸하고 있었다.

“…….”

본 적 없는 핸드폰이었다. 물론 누구의 것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잠금화면에 떡하니 이람호라는 이름 석 자가 떠 있었으니까. 멍하니 들여다보는데 띠롱, 하며 문자가 왔다.

<핸드폰 주인입니다 시간 될 때 전화 부탁합니다>

짧은 문장을 곰곰이 뜯어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났다. 이게 웬 구십 년대 수작이란 말인가? 이람호가 이런 걸 할 줄 아는 인간이었나? 별 고민 없이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이람호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제가 그쪽 핸드폰을 훔쳤나 본데요.”

전화 너머 목소리가 낮게 웃는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고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택배로 부칠 테니 문자로 주소 찍어주십시오, 그럼 이만.”

[아, 잠깐만. 끊지 마.]

재촉하는 와중에도 차분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오늘 필요해. 만나서 받으면 안 될까?]

“예, 알겠습니다. 퀵서비스로 부칠게요.”

[태경아.]

“대체 무슨 짓이야? 내 가방에 왜 이런 걸 넣어놔?”

그 이전에 대체 어떻게 넣은 거야? 감도 잡히지 않는다. 어제는 결국 애매한 거리에서 대화만 하다 접촉 없이 헤어졌는데.

[어제 긴 이야기를 못 할 것 같아서 그랬어.]

게다가 인정도 빠르다. 한 번쯤은 이상한 핑계라도 대서 부정할 줄 알았는데. 어제보다 두 배는 혼란스럽다. 이 수화기 너머 이람호는 정말 내가 아는 이람호가 맞나?

[언제 쉬어? 천천히 얼굴 보고 얘기 좀 하자.]

“내가 왜?”

[이유는 따지지 마. 너도 옛날에 제대로 대답한 적 없잖아.]

그러니까, 십 년 전 니가 진상짓한 게 있으니 다시 만난 내가 진상짓을 좀 해도 이해하라 그 말이렷다. 매우 아니꼽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 내가 오죽 스토킹을 했어야지.

“…대체 언제 집어넣은 거야?”

[어제, 가게 나올 때.]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주방 쪽 테이블 의자에 가방을 올려놓았던 것이 떠오른 탓이다.

“내 가방 아니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했어?”

[가게에 그런 가방 들고 다닐 만한 사람이 너뿐이었잖아.]

하긴, 다른 손님 없이 김세나와 나뿐이었지. 아파 오는 미간을 꾹꾹 누르는데 이람호가 평온한 목소리로 청해왔다.

[만나자, 심태경.]

“…….”

[얘기 좀 하자.]

옥장판이다. 이렇게 끈질긴 걸 보니 분명 옥장판…….

“…가게 오픈이 여섯 시라 그 전에 봐야 돼.”

한 개만 사줄 거야. 난방비도 아낄 겸 한 개쯤은 살 수도 있어. 두 개는 안 돼. 딱 한 개만 팔아주고 치울 거라고.

시커먼 먹구름이 피뢰침에 닿을 듯 낮게 내려와 있었다. 아무래도 쏟아질 듯했다. 신발장을 뒤져 일회용 우산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도저히 버스를 기다릴 자신이 없는 추위였다. 고민하다 택시를 잡아 몸을 구겨 넣었다. 택시기사는 비교적 가까운 목적지를 듣더니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닫아버렸다.

약속장소는 집과 가게의 중간 지점으로 잡았다. 졸업 후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동창들이 연락을 해올 때마다 방문하게 되는 카페였다. 지하철역 입구 바로 앞에 붙은 흔해 빠진 체인점.

이람호는 가게 입구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직 나를 발견하진 못한 것 같았다. 곧은 등을 쭉 편 덕에 장승마냥 우뚝 솟은 모양새였다.

나는 잠시 추위를 참고 선 채 그를 지켜보았다. 그때 카페 안에서 나오던 여자들이 문을 제대로 열지 못해 낑낑거렸다. 바람이 들이치는 탓에 문이 무거운 모양이었다. 그 모양을 힐끗 본 이람호가 한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당겨주었다. 여자들은 상냥한 얼굴로 눈인사를 하고는 저들끼리 뭐라 속삭이며 멀어져갔다.

“…….”

그래, 본래 저런 인간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랫동안 친절했을 것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라도.

빠르게 놈을 스캔했다. 서류가방이나 쇼핑백 따위는 갖고 있지 않았다. 목폴라 셔츠에 청바지, 코트 차림으로 양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을 뿐이다. 아니지, 요즘은 또 서류 같은 건 필요가 없어. 핸드폰이나 태블릿으로 다 해결할 수 있으니까.

의심을 거두지 않고 놈에게로 걸어갔다. 놈은 곧 나를 발견했다. 터무니없는 차림에도 추운 기색 하나 없이 고요한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왜 밖에서 이러고 있어?”

퉁명스레 묻자 어깨를 으쓱인다.

“나도 방금 왔어.”

아이고, 뻔한 대사.

카페 안은 언제나 그랬듯 많지도 적지도 않은 테이블이 돌아가고 있었다. 창가에서 제일 먼 구석 자리를 찾아 앉았다. 놈은 군말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새삼스레 이상한 광경이었다. 꿈이 아니지. 진짜 그 이람호가 눈앞에 있다. 밝은 곳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조금이나마 달라진 점이 보였다. 눈썹 위 흉터는 옅어지고, 얼굴선은 좀 더 단단하고 날카로워졌다. 십 년 전보다는 몸 자체도 두터워진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의 우리는 체격 차이가 있긴 했어도 둘 다 빼빼 말라 있었다. 하복 셔츠를 입고 다니던 이람호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새카맣게 그을린 팔에 바짝 올라붙은 근육의 결이 눈에 선하다.

스물여덟의 이람호는 크고, 늘씬하고, 단단하며, 옛날에 비해서는 희다. 햇빛의 흔적이 사라진 얼굴에 언뜻 부티도 흐른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전혀 딴사람이 되었는데, 어젯밤에는 어쩌면 그렇게 한 점 의심도 없이 열여덟의 이람호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고 생각했을까.

“여기 뭐가 맛있어?”

이람호가 물었다. 마치 어제 본 친구처럼 스스럼없고 편한 말투였다. 아니꼬웠지만 아니꼬운 티를 내면 그거야말로 아니꼬운 일이 될 것 같았다. 나는 뺨을 긁적이다 대충 대답했다.

“몰라. 항상 아메리카노 마셔서.”

“난 커피 안 마시는데, 다른 건 없어?”

“…주스 같은 것도 있어.”

카운터 벽에 붙은 메뉴판을 턱짓했다. 이람호는 모든 게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그 모습을 보다 문득 생각했다. 혹시 이런 데를 잘 안 다니나?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이람호가 체인점 카페에 들어가서 능숙하게 메뉴를 주문하는 모습 따위는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내가 대충 사올게. 커피만 아니면 돼?”

“어, 계산 미리 해야 돼?”

“됐어, 내가 살게.”

얼른 지갑을 꺼내 드는 놈을 만류하고 카운터로 향했다. 아메리카노 하나랑 오렌지 주스 하나요.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해주시구요. 주절주절 주문하는 동안 이람호는 부담스러울 만큼 내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금방 될 메뉴들이라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서서 기다렸다. 언제까지 쳐다보려나 궁금해서 그런 것도 있었다. 이람호는 등을 꼿꼿이 펴고 앉은 채 한순간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뚫리겠다.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시선을 꿋꿋하게 무시하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진동벨이 울렸다.

“추워?”

따뜻한 커피를 양손으로 쥔 나를 보며 이람호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춥다. 또 속절없이 콧물이 흘렀다.

“너는 안 춥냐?”

“나?”

“오늘 영하 15도야. 어떻게 꼴랑 그러고 다녀?”

“아, 내복 입어서 그래. 안 추워.”

이게 내복 한 장으로 커버 가능한 추위란 말인가? 최첨단 발열 내복이라도 되나? 곰곰이 생각하다 머릿속에 불이 탁 켜진다. 혹시 파는 게 내복인가!

“얼만데?”

“어?”

“내복 얼마냐고.”

“…글쎄…? 아버지가 사온 거 그냥 입는 건데.”

이람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의심을 풀 수는 없었다. 나는 챙겨온 냅킨으로 콧물을 닦는 척 놈의 동태를 살폈다.

“왜, 내복 필요해? 사줘?”

“…뭐?”

“필요하면 사줄게.”

얼음 동동 띄운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휘저으며 이람호가 씩 웃었다. 눈으로만 봐도 내 손이 다 시리다.

“사줄게.”

내가 못 알아들었다 생각했는지 이람호가 재차 말했다. 나는 그만 현실을 회피할 기력마저 잃고 말았다.

“…그냥 본론부터 말해봐.”

전화를 받고, 약속을 잡을 때만 해도 나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을 적당한 농담으로 얼버무릴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설령 이람호가 이제 와 나를 찾은 이유가 옥장판이나 정수기나 네트워크 마케팅이 아닌, 보험이나 영양제도 아닌, 정말 말 그대로, 어제 내게 속살거렸던 어처구니없는 핑계 그대로라면. 정말 그냥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거라면. 적당히 못 알아듣는 척, 농담인 척,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척 말을 돌리다가 적당히 놈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이람호는 아주 약간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내 문제다. 그의 목적 같은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한 점 흔들림 없이 놈의 귓전을 감싼, 너무나도 평온하고 따뜻한 푸른빛의 피쉬를 보았으니까.

“본론?”

어젯밤부터 놈은.

“그냥 너를 다시 보고 싶었다니까.”

단 한마디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

커피가 오늘따라 쓰다. 입안으로 텁텁한 맛이 감돌았다. 쩝……, 입맛을 다시고 놈의 손에서 오렌지 주스를 빼왔다.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마시자 골이 다 띵하다.

“그래, 봤는데 뭐……. 어쩌라고?”

느릿하게 물었다. 이람호는 또다시 어깨만 으쓱였다. 별로, 아무것도.

“뭐가 궁금한데?”

“그동안 잘 지냈어?”

“…….”

“그게 궁금하네.”

지난 십 년간 이람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전두엽 제거 수술이라도 받은 것일까? 아니면 국가대표 탈락 후 불교에 귀의했다가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거나.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였다. 어떤 꿍꿍이조차 없는 순수한 호의라는 점에서 특히.

“…난 네가 왜 갑자기 찾아왔는지 모르겠어.”

상대의 진심이 보인다는 것은, 어떤 의심의 여지조차 없는 확신으로 누군가를 파악한다는 것은……. 내가 그 마음을 모르는 척하기 위해서 대단히 큰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뜻이다. 위선이 허용되지 않는 관계의 끔찍함은 십 년 전에 충분히 겪었다. 두 번은 없었으면 싶었다.

“내가 보고 싶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고? 왜?”

“…….”

“이제 와서 뭘 바라고 무슨 이유로?”

다행히 나는 흥분하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를 마칠 시간은 충분했기에.

“…궁금한 게 있었어.”

영원인 듯 길었던 침묵이 지나고 이람호가 입을 열었다.

“너, 나한테 고백했었지.”

“…….”

“날 좋아한다고, 네가 호모라고 말했잖아.”

그랬지. 둘 다 사실이니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람호는 또 잠시 망설였다. 그 와중에도 그를 맴도는 푸른빛은 파도 아래 갇힌 물살처럼 조용했다.

“걱정되지 않았어?”

“…뭐가.”

“내가 소문낼 수도 있었잖아.”

의아하다. 이람호는 십 년 전에도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질문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그때와 다른 답을 듣고 싶은 걸까. 곰곰이 기억을 되짚었다. 그래, 고백한 다음 날이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인사하는 나를 기가 찬 눈으로 쳐다보던 이람호가 대뜸 물었다.

- 넌 겁도 없냐? 내가 다 소문내면 어쩌려고?

나는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알 게 뭐야? 학교야 때려치우면 그만인데.”

주스 컵을 내려놓으며 성의 없이 내뱉었다. 처음으로 이람호의 피쉬가 일렁였다. 듣고 싶었던 답이 아닌 모양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소문 좀 난다고 뭐, 나한테 나쁠 거 있나? 소식 듣고 괜찮은 놈이 미끼 물면 땡큐지.”

“…….”

“애초에 별스러운 이유가 있었을 것 같아?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 저지른 일 같냐고.”

깊은 생각이 있으면 남고에서 대뜸 고백하는 그런 짓은 안 하지. 대충 그런 뉘앙스를 깨달아주길 바랐다. 이람호의 두 눈이 말없이 잠잠해졌다. 피쉬는 바람 맞은 꽃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한다.

“…요즘도.”

그는 뭘 확인하고 싶은 걸까.

“이상한 게 보여?”

식은땀이 돋는다. 가슴을 치받은 것은 차고 날카로운 통증이었다.

“나한테서……. 뭔가 보인다고 했었어. 기억나?”

“…….”

“그것 때문에 날 믿었다고 말했어.”

듣고 싶지 않다. 그러나 머릿속을 쑤시고 들어와 잠들었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해맑은 멍청이였던 십 대의 심태경이 신이 나서 주절주절 떠들고 있었다. 내 눈에는 말이야,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색이 보이거든. 근데 너한테서 진짜 엄청 예쁜 파란색이 막 뿜어져 나와. 그래서 넌 그럴 인간이 아니라고 확신했지.

당연하게도 이람호는 더없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 허언증까지 있냐?

그걸로 끝난 대화였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나한테서 뭔가……, 이상한 색깔 같은 게 보인다고 했어.”

“내가?”

“네가.”

모르는 척 되물으면 한 번쯤 제 기억을 되짚어볼 만도 하건만 이람호는 꿋꿋하게 맞받고 있었다. 네가 그랬어. 그렇게 말했어.

“처음엔 귀신 본다는 소린가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

“…….”

“다시 한 번 말해줬으면 좋겠어.”

안타깝게도 나의 모질이 짓은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나는 거의 항상, 내가 보는 그 빛깔에 대해 이람호에게 설명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네가 얼마나 환상적인 색을 가졌는지 알아? 그 색이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알아?

“…아.”

시선을 완전히 내렸다. 테이블 아래 이람호의 회색 스니커즈가 눈에 들어온다. 깔끔하다. 그래, 이람호는 깔끔해졌다. 십 년 전 거칠게 메말랐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여유로운 어른이 되어버렸다.

“아……, 그거?”

외면한 피쉬가 눈가로 쫓아와 희뜩거린다. 간지럽고 끈질겼다.

“난 또 뭐라고……. 사람마다 보이는 색깔이 다르다 그 얘기?”

“…….”

“그거 당연히 뻥이지. 컨셉질 같은 거? 그런 거짓말하고 다니면 내가 좀 특별해 보일 줄 알았어. 중이병이 늦게 와서.”

외우다시피 한 대사였다. 국어책 읽는 것처럼 들렸을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람호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테고, 내가 다소 어설픈 거짓말을 내뱉는다 한들 놈에게는 진위를 파악할 방법이 없으니까.

“…….”

이람호는 한동안 조용했다. 일렁임은 가라앉고 시퍼런 침묵만이 남았다. 그가 내뿜는 침묵에는 그토록 고요하고 정갈한 푸른빛이 묻는다. 그 곁에서라면 나는 스스로 숨을 참아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잠긴 목소리가 돌아온다. 나는 그를 구성하는 그 무엇에도 눈을 맞추지 못한 채 입안에 담아놓은 공기만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알았어.”

“…….”

“그게 궁금했어.”

이람호가 그대로 일어나서 나가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이쯤 되면 눈치챘을 거라고.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으레 그래야 한다는 듯 제 몫의 음료수를 마시고, 나에게서 할당받은 시간을 채우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잘 지냈어?”

그토록 어설픈 질문으로.

“그냥, 뭐…….”

“가게는 언제부터 한 거야? 분위기가 독특하던데.”

“…아, 엄마가 하던 가게야. 원래는 좀…. 아저씨들 오는 바 같은 데였는데 내가 인도에 갔다가 물담배에 빠져서 그거 테마로 써보자 하고….”

“인도에 갔었어? 언제?”

“그냥, 제대하고 나서…….”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저 제대하기 일주일 전부터 인도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인도 배낭여행은 어쩐지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성공 보상으로 나를 다른 인간으로 만들어줄 것만 같은. 조그마한 저가 항공 비행기를 타고, 싸고 더러운 숙소에 묵고, 3등 칸 기차에서 강도와 소매치기를 조심하느라 배낭을 끌어안고 날밤을 새우는 그런 경험이 곧 젊음만의 특권이고 두 번 만져보지 못할 낭만이라는 환상.

결과는 처참했다. 애초에 나는 그런 고난과 역경을 견딜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노숙자 냄새를 풀풀 풍기는 옆자리 승객이나 들어 올린 침대 시트에서 후드득 떨어진 빈대는 나를 매 순간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저예산 배낭여행의 낭만을 이야기한 모든 여행 에세이 저자들의 욕조에 빈대 일가족을 풀어놓고 싶었다.

물담배는 그 와중에 건진 유일한 위안이었다. 아니, 그런 낭만적인 단어는 쓰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내 인도 여행에는 개뿔의 낭만도 없었으니까. 그래, 사업 아이템이었다. 어, 이거 한국에 가져가서 엄마 가게에 들여놓으면 괜찮겠는데, 하는.

“어땠어?”

이람호가 악의없이 물었다. 눈동자가 조금 반짝인 것 같았다.

“그냥, 뭐…….”

나는 오늘 대체 ‘그냥’과 ‘뭐’를 몇 번이나 썼을까.

“인도 좋다던데. 운동할 때 알던 선배가 인도 한 번 다녀오더니 휴가 때마다 인도에 가더라고. 얼마나 좋길래 저러나, 궁금했는데 가볼 기회가 없었어.”

“…나는 뭐 그렇게 좋진 않았어.”

“그래? 하긴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

느릿하게 대답한 이람호가 왼쪽 팔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어떤 액션인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가야겠다, 벌써 네 시네.”

“…아.”

시간 때우기가 끝난 거구나. 직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핸드폰.”

퍼뜩 스치는 생각에 얼른 가방을 열었다. 이람호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이 담아온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대로 모든 용건은 끝나고, 아무런 핑계도 남지 않으면.

그러면 정말 끝인가?

“…….”

확실한 건, 오늘 이렇게 헤어지면, 이람호는 두 번 다시 내게 연락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게 놈은 분명히…, 그런 걸 물었다. 이제 여자 좋아해? 그럼 나는 이제 가망이 없어?

뒤늦은, 그리고 소용없는 의문이 든다.

이람호는 대체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태경아?”

무슨 말이 듣고 싶었던 거지?

“어……, 핸, 드폰.”

“…….”

“미안해, 놓고……, 온 것 같은데.”

손끝에 닿은 핸드폰 끄트머리를 가방 안쪽으로 꾸욱, 밀어 넣었다. 이람호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느릿하게 되물었다. 그래?

“…미안. 다른 가방…, 들고 왔더니.”

“아냐. 애초에 나 때문인데.”

“지금 바로 가서 가져올…, 아니다, 너 가야 되니까, 퀵으로 부칠게.”

내가 더듬더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워섬기는 동안 이람호는 일어설 준비를 마쳤다. 내심, 괜찮다고 할 줄 알았다. 아니야. 핑계였어. 천천히 받아도 돼. 내일도 만날까? 그런 대답이 나오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람호는 흠, 하며 잠시 고민하더니 너무나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부탁할게.”

“…….”

“밤에 연락 올 데가 있어서…. 착불로 부쳐줘. 주소는 내 폰에 문자로 보내놓을 테니까.”

하며 웃는 얼굴에 그만 마주 웃고 말았다. 으응, 얼빠진 대답과 함께.

“그럼 먼저 일어날게. 눈 더 오기 전에 출발해야 할 거 같네.”

마지막 말은 마치 저주처럼 들렸다. 그제야 내다본 창밖으로 과연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테이블 아래에 기대놓은 우산을 꽉 쥐었다. 가져가라고 할까? 그러나 이람호는 이미 문밖으로 나선 후였다.

우산을 쥐었던 손을 놓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하필 신고 나온 것은 밑창이 미끄러운 워커였다. 눈 올 것도 알았고, 우산도 챙겼는데, 신발이 이래서야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나 자신의 멍청함에 그만 얼이 빠져버린다.

손님들이 빠르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누구나 직감한 탓이었다. 이미 건너편 가게 차양 위로 새하얀 눈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이람호의 말마따나 더 늦기 전에 일어나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대신 내 손에 남겨진 핸드폰을 쥐었다. 이 람 호. 이름 석 자 띄워진 화면을 위로 밀자 비밀번호 하나 없이 속살이 드러난다. 통화, 메시지, 뉴스, 날씨, ……, 뻔한 아이콘들을 지나 갤러리에 손끝이 닿았다. 아무런 망설임도 필요치 않았다. 애초에 이걸 내 손에 맡기면서 자물쇠 하나 걸지 않은 것은 이람호였다.

갤러리에는 사진 한 장만 덜렁 들어 있었다. 불러내기도 전에 나는 그것이 무슨 사진인지 알 수 있었다. 한 번, 엄마 애인 노릇을 하던 아저씨에게 낡은 필름 카메라를 빌려 학교에 가져간 적이 있었다. 당연히 이람호의 사진을 찍고 싶어서였다. 싫다고 발광을 하는 김세나에게 억지로 카메라를 쥐여 주고 똥 씹은 얼굴의 이람호를 끌어다가 같이 사진을 찍었다. 찍어주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중 오로지 나만 행복한 사진이었다. 나는 그 필름만 두 장 인화해서 한 장을 이람호에게 건넸다. 놈은 인상을 쓰면서도 사진을 구기거나 찢어버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오래 보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은 것이다. 그리고 핸드폰은 내 가방에 넣어놓았다. 이 번거롭고 복잡한 행동의 의미는 뭘까? 그토록 고요하고 편안한 피쉬를 두른 채, 이런 걸 들고 나를 찾아온 이람호는, 대체 나에게.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쩌면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택시를 잡을 테고, 갑자기 눈이 내리면 택시가 잘 안 잡힐 테니까. 무거운 유리문을 온몸으로 밀었다. 그대로 달려나가려던 순간, 젖은 대리석 계단에 발이 쭉 미끄러졌다.

“억…!”

이건 죽는다. 어떤 식으로 넘어져서 어디를 부딪치든 죽을 거야. 잠시 중력을 거스른 몸뚱이가 붕 떠올랐다. 머리털이 통째로 곤두서는 듯했다.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날아든 건 그때였다.

“조심……!”

이제 와 조심하면 뭐해, 시야가 느리게 흐른다. 그때 눈앞으로 쑥 뻗어온 손이 내 멱살을 콱 쥐었다. 물론 이미 뒤로 넘어간 몸을 일으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쿵, 날개뼈와 꼬리뼈가 동시에 바닥에 닿았다. 허리 나가겠다,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써늘한 냉기만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올 뿐이었다. 스리슬쩍 실눈을 떴다. 주마등 속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 이람호가 놀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반짝, 반짝……. 그의 귓전으로 산발적인 불꽃이 튄다. 놀랐구만, 엄청 놀랐어. 그 모양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나는 차분해졌다. 조심스레 바닥을 짚고 상황파악을 해보았다. 아무래도 몸이 뜬 순간에 이람호가 나를 붙들어 떨어지는 속도를 늦춰준 것 같았다.

“아, 깜짝 놀랐네.”

한숨을 내쉰 그의 왼손에 타다 만 담배꽁초가 들려 있었다. 대충 알 것 같았다. 밖에 나와서 담배 한 대 피우던 중, 갑자기 뛰쳐나오다 말고 쭉 미끄러진 나를 얼른 붙잡아준 것이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반사신경이 아닐 수 없었다.

“…담배.”

“어?”

“피우네.”

예전의 이람호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의 일과는 오로지 몸 관리와 훈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카페인은 금지, 군것질도 금지, 술과 담배는 말할 것도 없이 절대로 금지. 내 시선을 느낀 이람호가 머쓱한 듯 웃더니 꽁초의 불씨를 손끝으로 튕겼다.

“일단 일어나. 춥겠다.”

꺼진 꽁초를 담뱃갑에 도로 담은 그가 힘주어 나를 일으켰다. 계단참을 짚고 간신히 버티고 섰다.

“뭘 그렇게 급하게 나와. 무슨 일 있어?”

“……핸드폰.”

“응?”

“봤어.”

손에 꼭 쥐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람호는 내 얼굴과 핸드폰을 한 번 번갈아 보더니 설명을 요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나더러 보라고 찍어놓은 거잖아.”

“뭘?”

“사진. 내가 너 줬던 사진.”

질문이 더 이어질까 봐 부가설명을 붙였다. 너무 추웠고, 눈이 쏟아지고 있었고, 더 이상의 시간 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사진은 왜 넣어놨어?”

“…….”

“나한테 대체 뭘 물어보고 싶었어? 아니, 그걸, 그런 걸 왜 물어보고 싶었어?”

그새 혀가 굳었다. 얼어붙은 입술이 쩍쩍 갈라진다. 나의 혀뿌리에는 늘 의지와 다른 말이 산다. 한 번이라도 본심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가장 먼 말을 뱉기 위해 멋대로 움직이는 혀를 한참이나 어르고 달래야 했다.

“나한테서 무슨 대답을 듣고 싶었어?”

그건 정말 고되고 힘든 일이라.

“나더러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제일 억울하고 힘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같은 대답.”

물론 이람호에게는 더없이 쉬운 일일 것이다.

“십 년 전에, 네가 나한테 해줬던 말과 똑같은 대답.”

“…….”

“그게 듣고 싶어서 왔어.”

무엇 하나 감추지도, 꾸미거나 첨삭하지도 않고 내뱉어오는 진심.

“심태경, 나, 너에 대해서……. 정말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하니 잘 모르겠어. 그게 정말로 내가……, 네 생각만큼 괜찮은 인간이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네가 나더러 그럴 사람 아니라 하니까, 네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참고 지켰던 건지.”

“…….”

“그게 갑자기 궁금해졌어. 그래서 널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이람호에게, 너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했었다. 너는 내가 본 중 가장 아름다운 색을 가진 사람이니까.

똑같은 대답이 듣고 싶었어. 그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람호는, 자기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 나를 찾아왔다는 뜻이다. 내 입으로, 내게서 그 말을 듣고 싶어서.

그러자 궁금해진다.

“……무슨 일 있었어?”

드디어 그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

눈이 쏟아진다. 이람호의 머리카락과 어깨와 속눈썹에도 눈이 묻는다.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에서 묻어난 얼음 입자가 그의 뺨에 닿아 녹아내렸다.

“할머니가 죽었어.”

담담한 말은 녹여서 흘려버린 눈 대신 입술 끝에 얼어붙었다.

- 김세나, 나 인터넷 한 번만.

- 어엉.

우리가 열여덟이 되던 해, 김세나의 집은 작은 마트를 했다. 덕분에 녀석의 집에 가면 늘 유통기한 아슬아슬하게 지난 식료품이 넘치도록 쌓여 있었다.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거의 녀석의 방에서 각자 할 일을 하며 뒹굴대는 게 일상이었다.

- 근데 뭐 보게? 야동?

침대에 엎드린 채 만화책을 열심히 보고 있던 김세나가 물었다. 너 있는 데서 야동을 어떻게 보냐, 나는 퉁명스레 대답하고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이람호라는 이름을 쳤다.

- 나 있는 데서 왜 못 봐?

- 내가 보는 야동에는 여자 안 나와.

김세나가 만족스러운 듯 낄낄거렸다. 녀석은 내가 자신을 여자 취급해주는 상황을 더없이 좋아했다. 물론 둘이 있을 때만.

- 그럼 왜? 뭐 보는데?

- 그냥 좀 볼 거 있어.

인터넷 기사 몇 개가 뜬다. 전국체전 결과를 알리는 기사들을 거슬러 올라가다 마우스가 멈췄다. <열일곱 태권도 신동, 올림픽을 꿈꾸는 금빛 발차기> 올림픽에 나가려면 무조건 금이라는 인식이 절절히 묻은 제목이었다. 클릭하니 한쪽 발을 높이 차올린 이람호의 사진이 떴다. 작년 사진인지 머리가 좀 더 짧았다.

<그야말로 ‘사고’를 쳤다. 고등부 전국체전에서 1학년 선수가 우승을 해버린 것이다.>

역시 그게 꽤 대단한 업적인 모양이었다. 스크롤 크기가 손톱만 하게 작아졌다. 나는 한 줄 한 줄 드래그해가며 모든 문장을 꼼꼼히 읽었다. 이람호, (당시) 열일곱 살, 신장 179㎝ 체중 67㎏. 라이트급 우승.

태권도를 시작한 건 여섯 살 때. 아버지가 태권도 학원 관장이었다고 한다. …까지 읽다가 잠시 멈칫했다. 이하로는 이람호의 할머니가 한 인터뷰였다. 사연은 구구절절했다. 이람호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큰 빚을 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아버지도 빚쟁이를 피해 도망쳐버렸다. 그 후로는 할머니가 폐지를 주워 번 돈으로 손자를 키웠다고 했다. 당연히 이람호는 자신을 위해 헌신한 할머니에게 보답하기 위해 더욱 운동에 매진했고, 그를 눈여겨본 스폰서들이 장학금을 지원해주면서 태권도를 포기하지 않고 눈부신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요약하면 대략 그랬다. 마지막에는 할머니를 끌어안고 활짝 웃는 이람호의 사진이 떠 있었다.

- …거 참.

뭐 이렇게까지 드라마틱할 필요가 있나? 조금 아니꼬운 마음에 입을 죽 내밀었다. 왜? 한 번씩 내 눈치를 살피던 김세나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컴퓨터 모니터 속 이람호의 사진을 보더니 가느다란 눈썹을 팍 찌푸려 버렸다.

- 뭐야? 너 왜 내 컴퓨터로 못생긴 애 사진 봐?

- …얘가 뭐가 못생겼어.

- 졸라 짜증나네. 차라리 야동을 봐.

못생겼나? 그럴 리가. 아무리 봐도 아주 괜찮은 얼굴이다. 특히 저 우뚝한 콧대는 기가 막히게 내 취향이지.

- 너 얘 싫어해?

- 아니? 안 싫어하는데? 관심 없는데? 그냥 못생겨서 별로라는 건데?

질투구만. 김세나는 내가 좋아하거나 관심 보이는 것이라면 뭐든 물어뜯곤 했다. 그다지 거슬린 적이 없어 내버려두고는 있지만.

- 얘네 엄마랑 아빠는 빚 때문에 도망가서 할머니랑 둘이 산대.

- 아이구 졸라 눈물겹다. 쌀이나 좀 나눠줘야겠다.

- 근데 이렇게 기사 뜨면 빚쟁이들이 얘를 닦달하지 않을까?

- 지금 닦달한다고 뭐가 나오냐? 국대가 돼야지.

하긴, 내가 빚쟁이라도 기다릴 것이다. 이람호가 무럭무럭 자라서 국가대표가 되어 올림픽 메달을 따올 때까지.

아, 멀다. 이토록 교과서적인 인생. 한 십 년 후에는 자서전 같은 것도 내겠지. 제목은 <진흙 속에서도 꽃은 핀다> 정도.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어느 날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빚쟁이에 쫓기고 할머니의 폐지 리어카를 밀어주고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운동해서 인내의 열매를…….

- 얘 내년에는 국대 붙겠지?

혼잣말인 양 물었다. 김세나는 눈썹을 잔뜩 추켜올린 채 황당한 얼굴을 했다.

- 내가 알 게 뭐야?

- 고등부에는 이미 대적할 상대가 없대. 내년쯤 되면 대학생이랑 붙어도 당연히 이기지 않을까?

- 아니, 알 게 뭐냐고. 관심 없다니까.

- 얘가 정말 국가대표가 되면 아무래도 난 포기해야 할 것 같아. 너무 멀어.

- 반드시 붙을 거야. 크게 될 놈이잖아. 못생긴 새끼, 파이팅.

김세나가 모니터 속 이람호의 사진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친구 사이를 유지하는 나와 김세나만의 방식이었다. 모든 것은 농담처럼.

- 태권도 국대 선발전은 겨울에 한대. 구경 가고 싶다.

- 내가 플래카드 만들까? 같이 응원 갈까?

- 탈락한 이람호 끌어안고 달래주고 싶어.

- 무슨 소리야, 붙는다니까. 응원해줍시다, 응?

아니야, 탈락할 거야. 진담을 유난히 짙게 섞은 농담이었다. 지금도 가망 없는데 국가대표까지 돼버리면 영영 물 건너가는 거지. 이런 인간승리의 주인공이 쥐뿔 가진 거 없는 나 같은 게이한테 눈길이라도 줄 리가 있나. 쓸쓸함을 곱씹고 있으려니 김세나의 표정이 또 금방 일그러졌다.

- …야, 듣다 보니 기분 별로네. 저게 국가대표가 되든 우주대표가 되든 니가 쟤한테 꿀릴 건 뭐 있어?

- 거 고마운 소리긴 한데…….

- 태권도 잘해봤자 무슨 소용인데? 니가 쟤보다 백 배는 잘생겼고 천 배는 인간적이야. 저딴 새끼한테 쫄지 마.

- 잘생긴 건 그렇다 치고 누가 더 인간적인지는 어떻게 알아. 쟤 알지도 못하면서.

- 넌 내가 내 진짜 이름 가르쳐준 후로 한 번도 나 김세준이라고 부른 적 없잖아.

- …….

- 그럴 수 있는 인간은 너뿐일 거야. 너보다 괜찮은 사람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어.

벽에 걸려 있는 김세나의 하복 셔츠에는 ‘김세준’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김세나의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자, 김세나의 법적 이름이었다.

- 니가 나한테만 가르쳐줬으니까 그렇지.

- 너 말고 그럼 누구한테 말해? 이런 소리 꺼냈다간 우리 엄마 뒷목 잡고 쓰러질걸.

그런가? 의자를 빙글 돌리며 김세나의 어머니를 떠올려 보았다. 김세나와 많이 닮은 얼굴에, 통통하고 푸근한 인상. 아마 김세나가 처음부터 여자로 태어났다면 나이 먹어 이렇게 되겠거니 싶은 느낌이었다.

- 근데 김세나야.

- 뭐.

- 그렇게까지 놀라실까…? 내 생각엔 아닐 것 같은데.

녀석이 끌어안은 핑크색 하트 쿠션을 턱짓했다. 뿐인가. 핑크색 체크무늬 이불에 핑크색 러그에 핑크색 액자에 심지어 책상까지 핑크색. 대체 다 어디서 구해왔나 싶은 핑크색 아이템뿐인 아들 방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부모라고 생각했는데. 김세나의 성향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 …모르는 거야, 그건.

김세나가 하트 쿠션에 코를 파묻었다. 둥글고 큰 눈에 불안감이 어린다.

- 카페에서 알게 된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는 아예 어릴 때부터 엄마가 드레스를 입혀서 키웠대. 어릴 때 사진 보면 온통 공주 옷 입고 있고, 다 커서도 엄마 옷 입고 놀고 그랬어서…. 당연히 이해해줄 줄 알고 수술받고 싶다고 했는데.

- 응.

- 다음날 바로 교회로 끌려가서 삼 개월간 갇혀 있었대. 악령 쫓는 기도한다고.

- …….

- 아무리 나한테 다정하다 해도,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당연히 모른다. 그런 걸 무서워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본 김세나의 어머니는 김세나와 똑같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평소에는 밝은 오렌지색이었고, 김세나를 바라볼 때면 더없이 따뜻하고 포근한 노을빛이 되었다. 자식을 바라볼 때 그런 빛을 내뿜는 사람이, 고작 성전환수술 좀 받겠다는 소리에 김세나를 비난하거나 내버릴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아니,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이다.

- 나는 무서운 적 없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김세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 나는 너에 대해 다 알고 있잖아. 그리고 네가 원하는 대답을 다 해주잖아. 하지만 나도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할지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야?

김세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예쁘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여자애로만 보였다. 단 한 번도 이 애를 남자라고 여겨본 적 없었다.

- 네가 나한테 해준 말이, 내가 원하는 답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

한참 후에야 김세나가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난 그게 다 진심이었다고 믿어.

그러더니 왈칵,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맺힌다.

- 뭐야? 왜 그런 소리하는데? 혹시 진짜 속으로는 딴 생각해?

- 아, 아니.

- 절대 안 돼. 너 절대로 나 배신하지 마. 니가 배신하면 난 못 살아.

- 안 해, 안 했어. 그냥……. 내가 보기엔 너네 어머니 그런 분 아닌 것 같아서 해본 소리야.

김세나의 책상 위 큐빅 박힌 티슈케이스에서 티슈를 후르르 뽑아주었다. 김세나는 코를 흥, 풀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 니가 우리 엄마에 대해 뭘 알아?

- 잘 모르지, 모르는데……. 그래도 그런 분 아닌 것 같아.

- …….

- 믿든 말든 니가 알아서 할 문제지만.

어깨를 으쓱이자 아예 토라진 얼굴을 한다. 나는 인터넷 창에 급히 샤넬을 검색했다. 김세나의 기분을 풀어주는 마법 주문 같은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곁눈질로 모니터를 힐끗거리던 김세나가 곧 곁으로 다가왔다.

- 이게 그렇게 좋냐?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이는데.

- 좋아, 너무 이뻐.

난 무조건 돈을 많이 벌 거야. 그래서 수술도 하고 샤넬도 많이 살 거야. 그것은 김세나의 꿈이었다. 샤넬로 몸을 휘감은 예쁘고 늘씬한 여자.

- 너 수술하면 기념으로 내가 샤넬 열쇠고리는 사줄게.

- 정말? 정말로?

- 열쇠고리만. 더 비싼 건 못 사.

이람호는 태권도 국가대표가 되고 싶고, 김세나는 여자가 되고 싶고……. 나는 되고 싶은 게 없었다. 졸업하면 엄마 가게에서 일하다가 그거나 물려받겠지 싶었다. 나쁘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가게에서 아버지와 만났고, 나를 낳았고, 내가 채 열 살이 되기 전에 아버지와 헤어졌다. 왜 헤어졌느냐고 묻자 예쁜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그건 말하기 싫어. 내가 네 말에 무조건 다 대답해줄 거라 생각하지 마.

그녀는 늘 그런 식이었다. 네가 내 자식이라고 해서, 내가 네 엄마라고 해서, 내가 널 위해 희생하고 널 사랑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마. 너를 키우는 건 내게 존나게 힘든 일이야.

부모가 우는 소리를 잘하면 자식은 일찍 철이 든다고 하던데, 불행히도 나는 남들과 조금 다른 것을 보는 탓에 그러지 못했다. 엄마의 피쉬는 짙은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기쁜 일이 있을 때면 제비꽃처럼 풍성하고 부드러운 색이 되었다. 그러나 나를 바라볼 때면 순식간에 탁하고 침침한 빛깔로 얼어붙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위안이었던 것은, 이 세상에 그런 경우가 나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학부모 참관일이면 좋거나 싫거나 보게 되었다. 못해도 반에 서너 명 정도는 꼭 있었다. 더없이 차고 무감한 빛을 띤 채 제 아이를 바라보는 지친 부모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내가 엄마와 소통이 가능해진 시기부터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명제였다.

때문에 어느 날, 할머니와 길에서 싸우고 있는 이람호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 그만 좀 하라고!

이람호가 벌컥 소리쳤다. 낡은 리어카가 거칠게 흔들렸다. 할머니는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고래고래 내뱉으며 이람호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 니미 씨브럴, 화냥년놈의 애새끼! 기껏 멕이고 입혀놨더니 이 시커먼 거지새끼가 은혜를 몰라! 은혜를!

- 할머니, 좀!

- 니 애미가 몸 굴리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 새끼를 싸질러서 이 꼴을 만들 걸 내가 다 알았어! 더러운 연놈들! 싸지른 새끼는 나한테 떠넘기고 이 고생을 시키면서 오입질할 구멍이나 찾아다니겠지!

그날도 무시무시하게 더웠다. 이람호는 여전히 새카만 긴팔 긴바지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그을린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그 곁을 맴도는 푸른 피쉬는 기름 섞인 바닷물처럼 끈적하게 일렁였다.

- 할머니, 그만해. 그만하고 들어가.

- 니미 씨브럴, 벼락 맞아 죽을 연놈들. 반으로 쪼개져 죽을 년들…….

노인들의 피쉬는 대체로 채도가 낮다. 나이를 먹을수록 검어진다. 이람호의 할머니는 선명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한참은 더 정정하시겠군. 이람호가 가엾게 여겨졌다.

땀범벅인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던 이람호가 멈칫했다.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씨발, 낮게 욕설을 뇌까리더니 홱 돌아선다. 나는 손목에 매달아 놓은 아이스크림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김세나의 심부름이었지만 당장은 이람호에게 주고 싶었다.

- 이람호.

이름을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다. 콘크리트 바닥이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자동차 보닛에 계란을 깨면 프라이가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돌던 때였다. 보닛이 뭐냐, 콘크리트에만 떨어뜨려도 익을 것 같았다. 얇은 슬리퍼 밑창이 온통 뜨거웠다.

- 이람호, 아이스크림 먹을래?

한 번 더 불렀다. 모르긴 몰라도 녀석에겐 열을 식힐 것이 필요하다. 점점 걸음을 빨리하던 녀석이 우뚝 멈춰 섰다. 오, 효과 있나? 돌아선 녀석에게 슈퍼 봉투를 들어 보였다.

그때였다. 놈의 피쉬가 크게 흔들렸다. 다음 순간 땅을 박차고 달려든 놈이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통을 힘껏 후려쳤다. 뻐억. 엄청난 소리가 났다. 고막이 나간 게 아닌가 싶었다. 휘청하다 아이스크림이 든 봉투를 놓쳤다. 철퍽.

- 아으…….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내 머리를 때린 거지, 지금? 눈을 들어보니 잔뜩 성이 난 이람호가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너 뭐야, 개새끼야.

여차하면 한 대 더 때릴 기세였다. 안 돼, 또 맞으면 진짜 죽을 거야. 얼른 어깨를 움츠리고 물러섰다. 녀석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벌컥 외쳤다.

-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죽여 버린다고 했지!

아니야 그렇게는 말 안 했는데. 뼈 나가기 싫으면 얼쩡거리지 말라고만 했지. 기름만 부을 것이 뻔한 헛소리는 입안으로 삼키고 최대한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와, 이 자식 손버릇 정말 안 좋잖아. 무슨 스포츠맨이 이래?

- 아니, 그렇다고 때리냐…….

- 꺼져라, 좋게 말할 때.

- 언제 좋게 말했어? 다짜고짜 헤드샷부터 날려놓고.

이람호의 얼굴이 순간 허옇게 질렸다. 귓전의 피쉬도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어, 위험한데. 아무리 둔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잽싸게 떨어진 아이스크림 봉투를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 씨발새끼, 잡히면 죽여 버린다.

지옥불에서 막 올라온 듯한 목소리였다. 순간 섬뜩했다. 진짜 죽이려는 거야. 다리에 한껏 힘을 주고 달렸지만 그래 봤자 매일 운동장을 스무 바퀴씩 도는 놈을 이겨낼 리 없었다. 채 골목을 다 벗어나기도 전에 뒷덜미가 잡혔다. 으악, 으아악! 힘껏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당장 땅으로 처박거나 주먹이 날아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뒷덜미를 움켜쥔 손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을 뿐, 그 이상 나를 해치려는 동작은 없었다.

- ……?

실눈을 뜨고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람호가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니 한 손으로 내 뒷목을 잡은 채 허리를 푹 꺾은 녀석이 보였다. 다른 손으로 무릎을 짚고 있었다. 어깨며 등이 크게 오르내리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 야…, 왜, 왜 그래?

덜컥 겁이 났다. 얼른 부축하자 거칠게 손을 쳐낸다.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은 녀석이 후우, 하아, 힘껏 심호흡을 했다.

- ……물.

- 어?

- 물 좀 가져와…….

물? 물을 어디서 가져와? 우왕좌왕하는데 손목에 야무지게 걸어놓은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김세나가 제일 좋아하는 배맛 쭈쭈바는 이미 음료수가 되었을 터였다.

다 녹아버린 쭈쭈바를 따느라 손이 온통 끈적끈적해졌다. 내가 손가락을 쪽쪽 빠는 사이 이람호는 아이스크림이었던 음료수를 마시고 안색이 조금 돌아와 있었다. 아무래도 순간적으로 핏기가 빠져나간 것이 탈수증세였던 모양이다. 뺨이 온통 거칠었다.

- 감량하느라 한 끼도 안 먹는다는 게 진짜야?

당장 손이 닿진 않을 만큼의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물었다. 이람호는 더 화낼 기운도 없는지 조금 온순해져 있었다.

- …한 끼도 안 먹겠냐. 덜 먹는 거지.

- 운동을 그렇게 하는데도 안 먹어야 빠져?

- 캐묻지 마. 귀찮아.

- 그럼….

- 아, 좀 꺼지라고.

- 뭐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자꾸 꺼지래….

재빠르게 구시렁대고 가드를 올렸다. 잠잠했다. 슬쩍 보니 이람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때다 싶어 재빠르게 쏘아붙였다.

- 넌 내가 뭘 어쨌다고 그렇게 싫어해? 아이스크림 준 게 다인데.

- …….

- 되게 억울하네. 내가 뭘 잘못했는데?

- 너 호모잖아!

- 호모면 뭐!

소리를 지르기에 함께 빽 질러주었다. 이람호가 잠시 입을 뻐끔거렸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 내가 뭐 어쨌는데? 호모고, 너 좋아해서, 내가 너한테 해라도 끼쳤어?

- 기분이 더럽다고!

- 니가 기분 더러울 건 뭐 있어! 더러워도 헤드샷 맞은 내가 더러워야지!

이람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지, 할 말 없을 거다. 승점 하나 따낸 기분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 …야, 너는 진짜……. 특이하다.

한참 후에야 녀석이 쥐어짜듯 말했다. 그 시간을 고민해서 기껏 나온 말이 저거라니 순간 귀엽게 느껴졌다.

- 너만큼 특이하겠냐.

- 내가 뭐.

- 운동 같은 걸 왜 좋아해? 이 날씨에 땀복 입고 운동장 도는 게 말이 돼? 변태 같아.

입안도 손도 들척지근하다. 나는 민소매에 반바지만 입고도 푹푹 찌는데 이람호는 여태 소매 하나 걷지 않고 있었다.

- 누가 그래? 운동 좋아해서 한다고.

이람호가 황당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야말로 황당했다. 안 좋아하면 그 짓을 왜 해?

- 아니, 그래. 연습이야 싫겠지만 어쨌든 태권도는 좋아서 하는 거 아냐?

- 아닌데.

- …아니면?

- 국대 돼야 해서 하는 거야.

이람호가 쭈쭈바의 마지막 한 방울을 입안으로 짜 넣었다. 녀석이 살짝이라도 움직일 때면 반짝반짝, 눈이 부셨다.

- …무슨 차이야?

- 돈이 안 되면 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 …….

- 국가대표가 돼서 메달을 따서 광고도 많이 찍고 연금도 많이 받고 그 돈으로 큰 집을 산다……. 뭐 대충 그 정도가 우리 할머니 시나리오야.

녀석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던 노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날카롭고 공격적인 빨강이었다. 손자를 향한 할머니의 사랑 따위는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 할머니가 그러라고 너 운동시키는 거야?

- 안 그런 인간들도 있냐? 국대 준비하는 애들 보면 다 비슷해. 쫓아다니는 부모들 머릿속이 빤히 보여. 나중에 큰돈으로 안 돌아올 거 같으면 미쳤다고 그 훈련비를 감당하겠어?

- …그렇구나.

씁쓸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 정도의 관심도 받아본 적이 없긴 하지만,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영상 34도의 날씨에 땀복 입고 운동장을 달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신이 없다.

그리고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그게 어색하진 않았다. 멍하니 앞만 보고 있던 이람호가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눈치 없는 소리 할 줄 알았더니.

- 응?

- 보통 이런 말 들으면 다들 그러던데. 다 널 잘되라고 하는 일인데 뭐가 불만이냐고.

- 왜, 그러면 또 때리려고 그랬어?

퉁명스레 되묻자 이람호가 조금 웃었다. 웃다니, 처음이었다. 깊은 눈초리에 살짝 주름이 잡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 …그리고 뭐……. 할머니라고 꼭 손자를 사랑하란 법은 없지.

- …….

- 우리 엄마도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

자조적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람호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고개를 갸웃 기울인 채 한참을 궁리하다 묻는다.

- 왜? 니가 호모라서?

놈은 대단히 단순한 구석이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웃어버렸다.

- 내가 호모인 것도 모를걸? 나한테 별로 관심이 없거든.

- 흠…….

- 그래서 난 별로…, 내가 좋아하니까 너도 나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거나 그런 생각은 안 해. 우리 엄마도 안 해주는 일을 남한테 바랄 순 없지.

이람호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차 싶었다. 그나마 입이 트인 시점이었는데 도루묵이라니.

- …부담 갖지 말란 소리야. 뭘 어쩌자고 그러는 거 아니니까.

- …….

- 네가 나랑 사귀어줄 리 없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래도 내 입으로 내뱉기는 조금 서글픈 말이었다. 별수 없이 시무룩해진다. 무릎에 턱을 고이자 이마에 맺혀 있던 땀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 그래도 네가 좋아.

이람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게에 도착했을 때는 다행히 눈이 그쳐 있었다. 그래 봤자 위험한 상황이란 건 변함이 없다. 당분간은 삼 보 이상 택시다. 이미 얼어붙기 시작한 도로에 조심스레 발을 디디며 다짐했다.

오픈 준비를 끝내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김세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신삥 손님 데려갈겡 쟈기>

기분은 많이 풀린 모양이다. 다행이다. 오늘은 조금 진상 부리더라도 참아주자. 다짐하며 조명을 켰다. 그제야 중앙조명 하나가 나갔다는 게 떠올랐다. 눈이 침침할 정도로 어두운 가게를 둘러보며 고민하다 급한 대로 테이블마다 초를 켰다. 한층 음침해졌다. 누가 보면 사이비 종교 집단 은신처래도 믿을 듯한 모습이었다.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그러나 몇 분 사이에 기다리던 연락이 오진 않았다. 이람호는 눈이 더 오기 전에 가야 한다며 제 핸드폰을 챙겨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 밤에 바쁜 일이 있다는 게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연락할게. 급하게 번호를 찍으며 지어 보인 미소에 그만 홀딱 눈이 뒤집힌 나도 나지만.

연락이 올까? 텅 빈 화면을 보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온다 해도 이상하다. 더 할 말이 뭐가 있어서?

“…….”

분명 아버지 이야기를 했지. 아버지가 돌아온 건가?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새삼스럽지는 않다. 십 년이 지났고, 그건 우리가 살아온 생의 30퍼센트 남짓을 차지하는 시간이며, 그 사이 천지가 한 번 개벽했다 해도 이상할 건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건, 빚을 다 갚았다는 걸까. 그럼 이람호는 조금 자유롭게 살고 있을까.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얼굴을 하고 있었나……. 날카롭던 소년 시절과 달리 느리고 고요한 눈빛. 그런 눈을 마주하면 좋든 싫든 깨닫게 된다. 내가 여태 만나던 모든 이의 얼굴에 조금씩이나마 이람호가 묻어 있던 것을.

먼저 보내볼까. 스팸과 영업 문자뿐인 메시지 함을 몇 번이나 켰다 껐다. 그러나 할 말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열여덟 시절에는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뻔뻔하게 잘도 주워섬겼던 것 같은데, 이제 와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

망설이다 마음을 돌릴 겸 김세나에게 답장을 찍었다.

<올 때 요 앞 철물점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 좀 저장해와>

전구 생각이나 하는 게 낫지 싶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테이블이 일곱 개 남짓 나갔다. 손이 많이 가는 메뉴만 있다 보니 이 정도만 돼도 혼자 몸으로는 다소 벅찼다. 역시 알바를 쓸까. 불붙인 숯에 부채질을 해가며 똑같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지금 매출로 알바를 써봐야 알바비 빼면 남는 것도 없을 텐데. 아무리 빚 한 푼 없다지만 한 달 순익이 백만 원도 안 떨어져서야 곤란하다. 비싼 술을 살 수가 없게 되니까.

“후카 나왔습니다.”

막 숯을 넣은 후카를 내려놓았다. 일단은 마지막 주문이었다. 한숨 돌릴 생각으로 허리를 펴는데 새삼스레 가게 안 풍경이 우습다. 시커먼 지하에서 촛불에 의지해 사랑을 속삭이는 게이들이라니. 굳이 게이여야만 출입할 수 있는 가게는 아니지만, 이래서야 헤테로들이 오더라도 발길을 돌려 나갈 수밖에 없다.

딱히 가게가 엄청나게 잘 되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대충 그달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만 벌면 만족했다. 다만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나, 하는 불안은 언제나 있었다.

“자기야-!”

그때 김세나가 들이닥쳤다. 좀 쉬나 했더니. 안 보이게 혀를 차고 반가운 척 맞아주었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녀석은 이미 술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내가 비싼 술 팔아주러 왔지이.”

“그래, 그래, 앉아.”

“여어기, 내 친구들.”

김세나가 뒤로 팔을 쭉 펼쳐 보였다. 트렌스젠더들끼리 정모라도 한 것 같았다. 저마다 예쁘게 차려입은 트젠 세 명이 줄줄이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 분위기 너무 괜찮다.”

개중 긴 웨이브 머리를 한 여자가 말했다. 얼핏 삼십 대 초중반쯤 되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았다.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여어기는, 달래 언니. 그리구, 소진 언니랑…, 지나 언니.”

“얘기 많이 들었어요, 달래예요. 저 아래 쪽 클럽에서 일해요.”

긴 웨이브 머리의 ‘달래’가 악수를 청해왔다. 나는 껄쩍지근한 마음을 감추고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차갑고 단단한 손이었다.

“우리 좋은 술 줘, 오늘의 양주로 줘. 알았지이?”

“여기가 뭔 경양식집인 줄 알아?”

여자들의 방문에 다소 불편한 시선을 보내던 손님들은 그녀들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외모는 완벽하게 바꿀 수 있어도 목소리는 별수 없이 티가 난다.

그녀들이 안쪽으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나는 뚫어져라 ‘달래’를 바라보았다. 미용실에서 세팅한 듯한 웨이브펌, 몸에 착 달라붙는 미니드레스에 낮은 구두라니. 무엇보다도-

저 색깔은 대체 뭐지.

여럿이 함께 이동해서 언뜻 헷갈렸지만, 한동안 지켜본 바로 확실했다. 썩은 신문지를 짓이겨놓은 듯한 색이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저런 색을 내뿜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군대에 있을 때, 신병을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군법재판에 넘겨졌던 선임 하나가 딱 저런 색의 피쉬를 달고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았다. 혹시 그때 그 새낀가? 얼굴은 전혀 달라 보이지만 그거야 찢고 고쳤다면 알 방법이 없다. 그때 김세나가 주무운, 하며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우리 발렌타인 줘. 연식 있는 애로.”

“예, 밸런타인 14년산이요.”

“연식 있는 애!”

“어린 것부터 처먹어.”

더 묵은 건 내 거야. 꿀밤 놓는 시늉을 하자 아잉, 하며 몸을 움츠린다. 장난치는 척하며 계속 ‘달래’를 살폈다. 그녀는 김세나 옆에 딱 달라붙은 채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한 손으로 김세나의 어깨를 감싼다.

“사장님, 우리 마담이 사장님 좋아하는 거 알아요?”

둘러앉아 있던 ‘소진’과 ‘지나’가 꺄아,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맞아! 완전 좋아해!”

테이블을 쿵 내려친 김세나가 우는 시늉을 했다.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데에, 저 새끼느은, 못생긴 새끼를 좋아해.”

이 자식 벌써 취했구만. 희대의 진상 쇼가 열리겠군. 하지만 나는 오늘 김세나에게 관대하기로 마음먹었으므로 장단을 맞춰주었다.

“넌 여자라서 안 된다니까.”

“떼지 말걸!”

“그래그래, 도로 붙이고 와.”

김세나에게 장난을 거는 척 은근슬쩍 ‘달래’의 손을 김세나에게서 떼어놓았다. 달래는 순간 나를 보았지만 곧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뭐야, 사장님. 세나 되게 아끼신당.”

한껏 가늘게 뽑아내는 특유의 목소리에 간드러지는 말투. 아무래도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다. 어디서 저런 걸 데려왔지? 김세나에게 물어보려 해도 술이 끝까지 올라 있어 불가능했다.

오늘은 대충 찢어서 내보내고 내일 얘기해봐야겠어……. 당장 무슨 짓을 저지르진 않겠지. 애써 낙관하며 술을 내갈 준비를 했다. 김세나 일행은 뭐 그리 즐거운 게 많은지 숨넘어갈 기세로 웃고 있었다.

“대박, 그럼 내년에 수술하는 거야?”

김세나가 ‘지나’를 향해 물었다. 지나는 수줍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삼 년은 더 모아야 할 줄 알았는데…. 집에서 좀 도와주기로 했어.”

“잘됐다, 언니.”

“개명도 해야 하는데, 뭘로 하지?”

“쓰던 이름 쓰면 되지. 언니한텐 지나가 제일 잘 어울려.”

그런가? 지나가 긴 생머리를 손가락에 감고 배배 꼬았다. 김세나는 내가 군대에 가자마자 수술을 받았다. 큰 수술을 받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휴가를 나와서 만나자고 하면 번번이 거절했다. 그것은 김세나가 나를 친구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그래서 매번 마음이 무거웠다.

“달래 언니는? 언니는 언제쯤 해?”

김세나가 ‘달래’를 향해 물었다. 멈칫한 달래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좀 더 기다려야 해……. 이번에 막냇동생이 대학 가거든.”

“헉, 언니, 이번에도 동생 학비를 언니가 내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 내가 맏이인데 그 정도는 해야지.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잖니.”

“언니, 그럼 안 돼. 자꾸 집에다 돈 주면 언제까지고 언니 돈을 못 모은다니까.”

김세나는 진정 걱정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저놈의 오지랖. 실낱같은 유대에 집착하는 것은 소수자 집단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이었다. 나는 그녀들의 테이블에 술을 세팅하며 다시 한 번 달래를 살폈다.

빈말로라도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는 외모에, 말랐지만 단단한 몸. 머리를 자르고 화장을 지우면 누가 봐도 평범한 30대 남자처럼 보일 것이다. 무엇보다 힐을 신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머리를 이만큼 길게 기를 때까지 사이즈에 맞는 하이힐 하나 맞추지 않았다니.

“난 천천히 해도 괜찮아. 어차피 만나는 사람 있는 것도 아닌데.”

“아니이, 내 말은. 언니도! 언니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거지! 언제까지! 그렇게! 희생하며! 살! 텐가!”

나왔다, 복식호흡.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곳곳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타인을 비웃음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려 하는 멍청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나는 소리가 들린 쪽을 짧게 흘겨보고 김세나를 향해 말했다.

“뭐, 꼭 수술을 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아니지! 아닌데! 언니는 하고 싶어 하니까!”

“그래?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김세나가 대충 알아듣기를 바라고 던져보았다. 그러나 녀석은 허엉? 하며 눈썹을 한껏 추켜올릴 뿐이었다.

“뭔 소리야. 언니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데. 그치, 달래 언니이.”

“힐도 안 신었잖아. 별로 생각 없으신 거 아냐?”

내 말에 순간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모든 이의 눈이 달래의 발로 쏠렸다. 굽 없이 낮고 수수한 구두였다.

“…아, 제가……. 평발이라서요.”

달래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나는 흐응, 능청을 부리며 아예 의자를 빼고 앉았다.

“김세나는 족저근막염이 있어요.”

“…네?”

“뿐인가. 디스크도 있지. 역사가 깊어. 중딩 때부터 한의원에 침 맞으러 다니던 애예요. 허리 아프다고 체육수업은 만날 빠지고.”

“…….”

“그래도 절-대 7센티 이하 힐은 안 신어.”

엄지와 검지 틈을 벌려 대충 7센티 정도의 높이를 표현해 보았다. 달래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닌 사람도 있겠죠. 트젠이라고 다 미니스커트에 힐 신고 다니는 건 아니니까. 근데 내가 보기에 그쪽은…. 스타일이 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요?”

“그냥 그렇다는 얘기예요.”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김세나도 조금 술이 깬 얼굴이었다. 야, 왜 그래, 옆구리를 쿡 찌르는 손에서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아, 나 지금 실례한 건가? 내가 보던 타입이랑은 좀 다르길래 신기해서.”

모르는 척 묻자 김세나가 입 모양으로 그만해, 했다. 답답하다. 김세나라고 늘 죽이 맞는 것은 아니다. 그때 달래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남자다운 어깨를 한참 들썩이더니 이내 훌쩍이기 시작한다.

그녀 곁으로 더욱 구역질 나는 색이 드리워졌다. 이 정도로 질이 나쁜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김세나, 진짜 이걸 어디서 데려왔느냐고- 멱살을 짤짤 흔들며 묻고 싶었다.

“언니, 울지 마요. 야, 너 진짜 왜 그래?”

달래에게 냅킨을 건네며 김세나가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니까, 안 하던 짓을 할 때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주면 안 되겠니.

“아니야……. 처음 겪는 일도 아닌 걸, 뭐.”

“언니…….”

“내가 못생겨서 그래. 그런 주제에 이러고 다녀서…….”

나를 보는 일행의 눈들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안 되겠군. 나는 김세나에게 눈짓했다.

“잠깐 좀 보자.”

“뭘 봐! 언니한테 사과부터 해!”

“나와, 빨리.”

어르고 달랠 시간이 없었다. 단호하게 말하자 김세나의 표정도 그제야 좀 심각해졌다. 나는 그녀를 잡아끌다시피 주방으로 데려가 문을 닫았다.

“저거 누구야? 원래 알던 사람이야?”

“…달래 언니 말하는 거야?”

“언제부터 알았느냐고 묻잖아.”

“어……, 오, 오늘 처음 만났는데.”

한숨이 나온다. 그러면서 십 년 절친인 양 굴었단 말인가.

“오늘 만난 사람 가정사를 왜 꿰뚫고 있어?”

“아까 1차에서 얘기 많이 해서……. 근데 왜 그래? 너 저 언니 알아?”

김세나는 드디어 술이 거의 깬 듯했다. 나는 바깥쪽을 한 번 살펴보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저 사람 여자 아니야.”

“…어?”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니고, 트젠 아니야. 확실해.”

“뭐가 보여서 하는 소리야? 어떤데 그래?”

김세나이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고민하다 간단하게라도 설명하기로 했다. 나는 김세나의 팔을 끌어당겨 얼굴을 바짝 붙인 뒤 좀 더 목소리를 낮췄다.

“나 군대 다닐 때 있던 강간범이랑 색깔이 똑같아.”

“…….”

“동일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질이 안 좋은 건 확실해. 트젠 아닌 것도 확실하고.”

커다란 눈동자가 금방 불안으로 일그러졌다.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잠시 말이 없던 김세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너……. 뭐 나쁜 일 있었어?”

“응?”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나쁜 일? 김세나는 이내 아, 아냐,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안. 군대 다닐 때 강간범이 있었다고 하니까…….”

“…아.”

“깜짝 놀라서…….”

“아니, 아냐. 나랑 상관없는 일이었어.”

얼른 손사래를 쳤다. 김세나는 그제야 안심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내가 군대에 간다고 했을 때 김세나가 제일 걱정한 사태이기도 했다. 입대 전날 포장마차에서 김세나는 몇 번이나 강조했다. 알았어? 고문관이 되더라도 싫은 건 싫다고 해야 돼. 따라 해 봐, 안 돼요, 싫어요.

“그러니까…, 저 언니가 좀 이상한 사람 같다는 거야?”

“같은 게 아니고 확실해. 뭔가 목적이 있어서 저러고 다니는 새끼일 거야. 오늘 자리는 대충 파하고, 두 번 다시 만나지 마.”

김세나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옳지, 말도 잘 듣지. 곱게 세팅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녀석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제 뺨을 힘껏 문질렀다.

“좋은 사람 같았는데…….”

뭐라 더 말하려는 김세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아무래도 ‘달래’의 주의를 내게 돌려둘 필요가 있을 듯했다. 나를 말리는 손을 치워내며 성큼성큼 세 명의 테이블로 향했다.

“나가세요.”

“…네?”

“나가시라구요, 그쪽만.”

달래의 눈에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다른 두 명은 이제 명백히 적의에 찬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지금 떼어놓아야 한다. 이런 걸 김세나 옆에 방치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사장님, 아까부터 뭐하시는 거예요?”

지나가 날카롭게 물었다. 가게 안의 모든 손님이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힘껏 달래를 노려보았다. 이런 인간이 그동안 무탈하게 살아왔을 리 없다. 대충만 공갈해도 지레 찔려 달아날 것이다.

“나 몰라요?”

모르겠다, 지르고 보자.

“…예?”

시커먼 피쉬가 불안하게 일렁였다. 빙고.

“나 모르냐고. 나는 그쪽 누군지 아는데.”

“…….”

“어디 숨었나 했더니, 그간 이러고 다녔어? 그러니 찾을 도리가 없지.”

물론 나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 만나본 것도 난생처음이다. 하지만 뭔가의 범죄자이며 초범이 아닐 거라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늦게라도 여기서 시시비비를 가릴까? 아니면 내 가게에서 곱게 나갈래.”

“…….”

“어쩔 거야?”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을 깨달은 소진과 지나가 나와 달래를 번갈아 살폈다. 그사이 다가온 세나가 머뭇거리며 내 옆에 섰다. 달래가 두 손을 꽉 쥐었다. 핏발이 벌겋게 선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누군지 여기서 다 까발려도 괜찮아?”

아예 테이블에 두 손을 짚은 채 윽박질렀다. 제발, 이쯤에서 물러나라. 손에 쥔 패가 없으니 운에 걸 수밖에 없다. 다행히 달래는 이미 의욕을 잃은 듯했다.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핸드백을 꽉 움켜쥔 그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서 전화가, 와서, 시간이 너무 늦어서, 가봐야 될 거 같네.”

“…언니?”

“다들, 저기, 다음에 봐요.”

달래가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쿵, 쿵, 쿵, 요란하게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가게 안까지 들렸다. 쯧, 혀를 차고 돌아보자 김세나가 영 불안한 얼굴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방금 뭐야? 무슨 일이야?”

한참 후에야 소진이 김세나에게 물었다. 그러나 김세나도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알 리가 없다. 뭔가 설명을 덧붙일까, 고민하다가 안 하느니만 못할 것 같아 돌아섰다. 주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열었다. 시간은 새벽 한 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그제야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떨리는 손으로 목 아래를 누르고 등을 한껏 웅크렸다. 꿈에 나올 것만 같다. 바닥 없는 악의를 고스란히 꺼내놓은 듯 새카맣고 축축한 색깔. 나쁜 빛깔을 가진 인간은 많지만 그 정도로 무서운 색은 오랜만이었다. 속이 다 울렁거린다. 마른침을 삼키며 가슴뼈 가운데를 툭툭 두드렸다.

엄마의 가게에는 질 나쁜 진상들이 많았다. 엄마는 그들 하나하나의 특성을 들어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그것이 애정 어린 별명처럼 느껴지는 게 불만이었던 나는 엄마에게 왜 그런 작자들한테 별명씩이나 지어 주냐고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헛웃음을 짓고 대답했다.

- 귀신 쫓아낼 때도 이름부터 붙인다고 하잖니.

그래, 앞으로 저런 색을 가진 인간을 보면 ‘블랙’이라고 부르자.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무서운 게 아냐. 지금처럼만 하면 돼. 블랙은 블랙일 뿐이야….

그때 진동이 울렸다. 이 시간에 연락 올 곳이 있던가. 쥐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메시지 아이콘과 함께 익숙한 이름 세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이람호.

<가게로 가도 될까?>

용건뿐인 명료한 문자가 순간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다. 이람호의 주위를 떠도는 피쉬를 떠올리자 속도 조금 편해지는 듯했다. 핸드폰을 꼭 쥔 채로 허공에 긴 숨을 내뱉었다.

겁나는 일은 수도 없이 많다. 술에 취한 진상,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포스기의 잔돈과 식기와 컵들, 발끝을 대는 순간 미끄러지는 빙판……. 그러나 술 파는 가게를 운영하며 겪어야 하는 모든 고난과 역경을 더하고 곱해도 방금 본 블랙만큼 무섭지는 않을 것이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의식이 좀 먹힐 듯한 색깔에 그저 두려웠다.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답장을 찍었다.

<아침 다섯 시에나 끝나는데>

답장은 빨리 왔다.

<그때쯤엔 일어나니까 괜찮아>

일어난다니. 그럼 지금부터 잔다는 소린가. 새벽 한 시를 가리키는 시간을 다시 확인하고 짧게 혀를 찼다.

<뭐 급한 일 있어? 그냥 오후에 보지>

열여덟의 이람호는 핸드폰도 없었다. 있다 해도 이람호와 문자 같은 걸 주고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때는 그냥 그랬다. 핸드폰을 붙잡고 문자나 쓰는 건 어쩐지 남자답지 못한 일처럼 느껴졌다.

<오후엔 내가 시간이 없어>

심지어 이렇게 빠른 답장을 받게 될 거라고는. 한 번 더 심호흡을 하고 키패드를 눌렀다. 한 번은 다시 보자고 할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데.

<그럼 만나서 우리 집으로 가자>

아무리 내가 밤에 일한다지만 그렇다고 새벽에 만나는 게 일반적인가?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나니 그런 의문부터 든다. 그대로 한참 핸드폰을 붙들고 있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세 시를 넘어가자 손님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아마 뒷골목의 모텔촌으로들 가실 것이다. 레지던스를 잡아놨다는 김세나를 설득해 콜택시를 부르게 했다. 아까 그 블랙이 아직 밖에서 맴돌고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너는? 넌 어떡할 거야? 너도 그만 가게 접고 들어가.”

“아니, 영업시간은 채워야지. 요즘 자꾸 마음대로 쉬었는데.”

“그거야 사장 마음이지. 어차피 이 시간에 누가 또 오겠어. 너도 택시 불러서 들어가.”

“…그게, 이따 이람호가 오기로 해서.”

작고 동그란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뭐? 그 새끼가 또 와? 온다는 건 어떻게 알아?”

“…어제 잠깐 봤어. 말하자면 긴데…….”

“야! 만나지 마. 너 내가 오기영이랑 사귀라고 했지! 이제 와 그런 늙다리 추남이랑 왜 만나. 오기영 만나!”

워낙 찜찜한 일을 겪고 난 후라 이런 투정도 평화롭게만 들린다. 늙다리 추남이라니. 그야 오기영에 비하면 우리는 모두 늙다리지만…….

“그런 말 해봐야 제 살 깎아 먹기밖에 더 되냐. 그만하고 들어가.”

“아, 진짜 싫어! 걔 만나지 마! 나 걔 싫어!”

“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이제 와서 걔랑 어쩔 생각 없어.”

“…진짜?”

“응, 진짜.”

김세나가 이람호를 싫어하는 건 모두 내 탓이다. 나는 2년간 정말 끈질기게 이람호를 좋아했고, 김세나는 그때 내가 십 대의 패기로 이룩한 모든 흑역사를 하나부터 열까지 목격했다. 너는 정말 괜찮은 앤데, 이람호만 엮이면 좀 이상해져. 십 년 전 김세나가 한 말이었다.

“상식적으로 지금 다시 만난다고 뭐가 되겠어. 그때야 어리니까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그랬지만…….”

“난 그것부터 이상했어. 걔가 대체 뭐가 그렇게 좋았어?”

“…말했잖아. 색이 예뻤다고.”

“그러니까, 어떻게 그것만으로 2년을 좋아할 수가 있어?”

“…….”

“나라면 못해. 내가 널 오랫동안 포기 못 했던 건, 네가 나를 완전히 내치지 않았기 때문이야. 어쨌든 가까이에서 계속 날 보살펴줬잖아. 그런데 이람호는 너한테 뭘 해줬어? 그때 그런 짓까지 해놓고 어떻게 이제 와서…!”

“택시 왔나 보다, 세나야.”

김세나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씩씩대는 김세나를 끌고 올라가 택시에 밀어 넣었다. 그녀는 입을 삐쭉 내민 채로 내 쪽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들어가서 문자 해. 기사님, 목적지 도착할 때까지 문 꼭 잠가주시고요, 누가 중간에 아는 척하면서 태워 달라 해도 절대 열어주시면 안 돼요.”

“아이고, 그렇게 걱정이 되면 남자친구가 집까지 데려다줘야지.”

“부탁 좀 드릴게요. 택시비는 선금으로 내겠습니다. 번호판 사진 찍어도 되죠?”

“그래요, 그래. 여자친구가 이렇게 예쁜데 세상이 험해서 걱정이 많겠어.”

택시기사는 예상 운임을 훨씬 웃도는 현금다발을 받고서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내가 그 정성을 보일 때까지도 김세나는 고개를 돌린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아쁜 기집애. 속으로만 욕하고 택시를 보냈다. 황토색 택시가 좁고 얼어붙은 골목길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지켜보다가 소르르 한숨을 쉬었다. 잊고 있던 냉기가 척추를 타고 오른다.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몸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돌아선 그때였다.

뒷머리를 잡아채는 섬뜩한 감각이 있었다. 멈춰선 채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익숙한 색이 눈에 걸리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

두 블록 거리였다. 김세나에게 전화번호를 받아오라 시켰던 철물점 뒤쪽에서 흘러나오는 시커먼 색이 보였다. 천천히 몸을 돌려 자세히 살폈다. 긴 웨이브 머리가 벽 바깥으로 스르륵 흘러나온다. 이어 목을 길게 뺀 ‘달래’의 얼굴이 보였다. 새카만 시선으로 흔들림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달리면 쫓아올 것 같았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놈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못 본 척할 생각이었다. 미친 게 아닐까? 오늘의 바깥 기온은 영하 10도다. 이런 날씨에, 저런 차림으로 몇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서두르면 안 돼. 봤다는 걸 눈치채게 만들면 안 돼. 일단 가게 안까지만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경찰을…….

…그런데 경찰을 불러서 뭐라고 하지? 블랙은 내 가게에 아직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조용히 놀러 왔다가 내게 쫓겨났을 뿐이다. 이게 바로 이 능력이 쓸모없는 이유였다. 상대가 위험한 인물인 걸 알았다고 해서 예방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하로 내려와 문을 걸어 잠갔다. 우선 아래쪽 걸쇠를 걸고 의자를 문 앞으로 가져왔다. 아무래도 집에 못 가겠어. 못 나가겠어. 날이 밝을 때까지는 가게에서 버티자. 이람호에게도 오지 말라고 문자를 해두고.

그때였다. 무언가 엄청난 속도로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쿵. 보지 않아도 뭔지 알 수 있다. 놈이 뿜어내는 악의가 이미 발밑까지 밀려와 있었다.

어디서 그런 침착함이 나왔는지, 나는 조금도 떨거나 당황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걸쇠를 채웠다. 철컥, 그와 동시에 콰앙, 문밖으로 블랙이 들이닥쳤다.

“……!”

두 손을 유리문에 얹은 블랙은 처참한 꼴이었다. 온통 헝클어진 머리에 터질 듯 핏발 선 두 눈, 화장은 다 번졌고 손은 새빨갛다. 의자에서 내려온 후에야 다리에 힘이 풀렸다. 후들거리는 몸을 들키지 않으려 의자를 짚고 간신히 버티고 섰다.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제 경찰을 부를 수 있으니까.

핸드폰, 핸드폰을 찾아야 한다. 몇 번이고 휘청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동안 블랙은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 쾅, 쾅!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사장님!”

“사장님, 얘기 좀 해요!”

“사장님, 나한테 왜 그래요? 사장님? 사장님, 문 열고 얘기 좀 해요!”

어쩌면 저런 목소리가 다 있을까. 다 쉬고 갈라져 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귀신이 낫지. 망할 놈의 고물 핸드폰은 그새 얼어붙은 손가락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비상버튼이 있는 카운터까지 돌아갈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야아 이 개년아아! 나와! 나오라고!”

침착하자.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니까.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예, 지구대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꿈결 같은 구원자의 목소리였다.

“저, 여기 미친 사람이 가게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요…….”

[상황설명을 자세히 해주시겠습니까]

“가게에 왔던 손님인데, 정신이 좀 이상해 보여서 내보냈거든요. 그랬더니 다시 와서 막 행패를 부리고 있어요.”

아, 이 천재적인 상황대처능력. 통화는 짧게 끝났다. 남은 것은 이 공포스러운 공간에서 경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떨리는 두 손을 마주 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하느님, 부처님, 천지신명님. 부디 저 미친놈이 계단 옆에 있는 소화기를 발견하지 못하게 해주세요. 문이 아무리 튼튼하다지만 소화기를 집어던지면 깨질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나 내게 십일조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신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 순간 콰아앙,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소화기다. 이건 소화기야. 급한 대로 주방 문도 잠갔다. 문이 아직 깨진 것 같진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경찰에 한 번 더 전화해야 하나? 핸드폰을 쥐고 우왕좌왕하는데 액정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얼른 보니 이람호의 이름이 떠 있었다.

“…….”

콰아앙, 폭발음에 가까운 소리가 한 번 더 귓전을 찢었다.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새벽 네 시를 막 지나는 시간이었다.

“살려줘!”

맹세컨대, 그때 전화를 걸어온 것이 이람호가 아니라 부모의 원수였어도 나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수화기 너머 이람호는 당황한 듯 잠시 말이 없었다.

“나 좀 살려줘! 나 죽게 생겼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웬 미친놈이 가게 문 부수고 들어오려고 해! 날 죽일 것 같아!”

[전화 끊지 말고…, 아니, 아니다. 끊어]

그 말을 끝으로 통화는 매정하게 툭 끊겼다. 콰아앙, 폭발음이 한 번 더 들렸다. 하느님, 오늘 무사히 살아나가면 김세나가 만날 하던 잔소리대로 꼭 철문으로 바꿀게요. 제발 이번 한 번만 살려주세요. 교회도 나갈게요.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도뿐이었다.

콰아아앙, 이번에는 소리가 좀 길었다. 경찰은 언제 오는 거야? 떨리는 손으로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경찰에 전화한 게 고작 2분 전이었다. 2분이라니, 말도 안 돼. 반나절은 숨어 있었던 것 같은데.

경찰이 오기 전까지 저 문이 버틸 수 있을까? 이람호는 이제 막 일어났을 텐데, 녀석이 달려왔을 때쯤엔 이미 수습된 내 시체만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함이 한도를 넘으니 오히려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핸드폰에 유서라도 써놓을까. 참 좋은 인생이었다, 유품의 정리는 김세나에게 일임하고…….

와장창.

그전까지와는 명백히 다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깨졌다. 뭔가 깨졌어. 숨을 죽이고 털끝까지 신경을 세웠다. 곧장 블랙이 쳐들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다음 순간 들이닥친 것은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심태경!”

이람호다.

이어 또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꿈인가? 주마등 같은 거? 얼떨떨한 나머지 현실감각이 없었다. 이람호가 왜 지금 여기 있지.

멍하니 핸드폰 통화기록을 확인했다. 경찰에 전화한 게 3분 전, 이람호와 통화한 건 2분 전……. 순간이동이라도 한 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심태경! 안에 있어?”

이람호가 한 번 더 외쳤다. 아차 싶어 일어나다 그대로 자빠졌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나가야 했다. 남은 힘을 쥐어짜 걸쇠를 풀고 밖으로 나섰다.

“…….”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내 이해의 범위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것이었다. 문은 깨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쉽게 깨질 만큼 약한 유리가 아니다. 깨진 것은 계단 근처에 둔 죽은 화분이나 술병 따위였다. 그리고 이람호는……. ‘블랙’의 팔을 붙들어 바닥으로 누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람호에게 완전히 제압당한 블랙은 씨근대며 한 번씩 꿈틀거릴 뿐 얌전했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 우선 문을 열었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발이 허공에 떠 있는 듯 중심을 잘 잡을 수가 없었다. 이람호가 그런 나를 향해 침착하게 물었다.

“경찰은? 불렀어?”

“…으, 응.”

“뭐 묶을 만한 것 좀 있으면 가져와. 여자를 때릴 수도 없고.”

“…….”

“근데 무슨 여자가 힘이…….”

그때 블랙의 머리에서 뭔가 툭 떨어졌다. 이람호와 나는 동시에 굳어버렸다. 끝에 집게핀이 달린 머리카락 다발이었다.

“…….”

나도 모르게 근처에 쭈그리고 앉아 아직 놈의 머리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당겨보았다. 당기면 당기는 대로 붙여두었던 가발들이 툭툭 떨어져 나온다. 세상에……. 정수리가 본인 머리길래 의심조차 안 했는데.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마주보다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신년 벽두부터 이게 다 뭔가 싶었다.

“그러니까, 아저…, 아니, 아가씨가 트렌스젠더인데, 여기 사장님이 본인의 성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을 했고 그래서 깊은 상처를 받아서 저지른 일이다 이거죠?”

동네가 동네인 만큼 이쪽 지구대 경찰들은 게이나 트렌스젠더들의 치정 싸움에 익숙하다. 그네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호칭을 붙여주지 않을 경우 어떤 사달이 나는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발이 다 떨어져 나간 채 훌쩍거리는 ‘달래’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그건 사장님이 좀 잘못하셨네. 좋게좋게 화해하고 집에 갑시다.”

“예? 무슨 말씀이세요. 이 사람이 지금 저희 가게 기물을 다 깨부쉈는데.”

“그러니까 화해하시라는 거죠. 아가씨도, 부순 거 보상은 할 거죠?”

경찰이 블랙을 향해 물었다. 놈은 여전히 가련한 표정을 지은 채 눈물만 찍어내고 있었다.

“사장님, 물론 이 아가씨가 잘못했지만요. 사장님도 그쪽 장사하시면서 좀 조심하셨어야지……. 이런 사람들 예민한 거 우리보다도 사장님이 잘 아시잖아요.”

“아니, 이 사람 트젠 아니라니까요. 조사해보면…….”

“허 참 그런 걸 우리가 무슨 수로 조사합니까. 안 그래요?”

…그렇지. 무슨 수로 조사하겠어. 답답해하는 내 뒤에 가만히 서 있던 이람호가 앞으로 나섰다.

“아까 저 사람이 제 친구한테 찢어 죽이겠다느니 칼로 찌르겠다느니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데요. 그런 거 협박 아닙니까?”

‘친구’라니 새삼스럽고 애매한 단어였다. 이람호는 이런 자리에서 경찰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간처럼 굴었다.

“꼭 제대로 된 처벌이 아니더라도, 접근금지 신청 같은 것도 못하나요? 아무래도 정말 위험한 사람 같은데요.”

“아니 글쎄, 저 아가씨도 술김에 화가 나서 그런 거라고 하니까…….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다 협박죄 받고 접근금지 떨어지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입 떼고 삽니까?”

“…….”

“정 그러면 다시는 가게 근처에도 안 오겠다는 각서 같은 거 한 장 받으세요. 그게 차라리 효력 있을 걸요.”

다행인 건, 이람호가 정말로 블랙을 문에서 떼어놓고 제압하는 데서 그친 덕에 블랙에게 긁힌 상처 하나 없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저 커다란 남자가 저를 때리고 내동댕이쳤다는 블랙의 주장이 말끔하게 무시당하고 그나마 이 상황까지 온 것이다. 여자를 때릴 수도 없고. 이람호의 한탄스러운 말이 머리를 스친다. 그제야 조금 우스웠다.

“괜찮아?”

경찰서를 나오며 물었다. 녀석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안 괜찮을 건 뭐 있어.”

“미안, 타이밍이 안 좋았네.”

“미안할 건 또 뭐고.”

“가끔 이런 일이 있어. 술집이라서.”

떨림은 완전히 가신 뒤였다. 아무튼 김세나가 문제다. 어디서 저렇게 이상한 것만 잘도 주워오는지. 정신이 드니 의문점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선, 이람호는 어떻게 1분 만에 가게로 쳐들어온 것인가. 그러나 그런 걸 따져 묻기 전에 우선 감사의 표시를 해야 했다.

“해장국이라도 먹자. 내가 살게.”

“술 마셨어?”

“…아니, 그냥 이 시간에 여는 게 해장국집밖에 없어서.”

그래? 하며 느릿하게 웃은 이람호가 순순히 내 뒤를 따라나섰다. 걸음마다 묵직하다. 큰 키에 단단한 몸, 가볍고 날렵한 몸놀림. 이런 몸을 가지고 살면 그다지 무서울 게 없겠지. 아, 이람호가 내 가게에서 알바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보니 너 어떻게 바로 왔어?”

오래 참기는 어려운 궁금증이었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특대 해장국 두 개를 주문하자마자 물었다. 이람호는 잠시 멈칫하더니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근처에 있었어?”

내버려두면 집에 갈 때까지 침묵할 기세라 재촉하듯 물었다. 이람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젓는 것도 아닌 애매한 동작을 했다.

“그냥 뭐…….”

“으응?”

“어쩌다 보니까.”

“……?”

그냥 뭐 어쩌다 보니까 코앞에 있다가 전화하자마자 왔다는 소린가. 이쯤에서 넘어가야 하나 싶었지만 도저히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뭔데? 일찍 가게로 오려던 거야?”

“…….”

“뭐 어려운 거라고 말을 못해?”

“…밤부터 있었어.”

“……어?”

“처음 너한테 문자 했을 때부터 그쪽에 있었다고.”

문자……, 라면, 한 시쯤에 왔던 그건가……. 들은 말을 곱씹어 봐도 이해가 안 되는 점이 많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왜?”

두 눈을 부릅뜨고 묻자 뺨을 한 번 긁적인다.

“그냥, 그때쯤 일이 끝나서.”

“…….”

“집에 들어갈까 하다가…. 혹시 전처럼 네가 좀 일찍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기다려봤어.”

“…어디서? 이 추운 날에.”

“차 끌고 왔지.”

해장국이 나왔다. 거의 냉면 그릇만 한 뚝배기를 보고 이람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너 이거 다 먹을 순 있어?” 묻는 말에 콧김을 흥, 뿜어 보였다. 내 위장을 뭘로 보고.

“그러다 네가 나오길래 끝난 건가 했는데, 어떤 여자 택시만 태워주고 다시 들어가더라고. 아무래도 집에 갔다 와야겠다 했는데…….”

“…어.”

“너 들어가고 바로 어떤 여자가 따라 들어가는 게 보이는 거야.”

“…….”

“근데 그 여자가 손에 장도리를 쥐고 있더라.”

그래서 전화해봤지. 이람호는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어제 먹은 삼시 세끼 메뉴만 영혼 없이 나열해도 이보다 밋밋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무서워 죽겠는데. 곱빼기로 나온 밥을 뚝배기에 말아 넣고 숟가락으로 열심히 휘저었다. 평소에는 오 분 만에 뚝딱 먹고 가는 양인데 도저히 씹어 넘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무리해서 먹지 마.”

이람호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 술도 뜨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 안 먹어봤자 나만 손해다. 밥과 건더기를 한가득 떠서 입에 욱여넣고 열심히 씹었다.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 새끼가 또 오면 어떡하지. 한참 말없이 내 꼴만 보고 있던 이람호가 느릿하게 물었다.

“그래서, 그 여…, 아니…. 아무튼 그거 정체가 뭐야?”

“글쎄 나도 참 궁금하네…….”

“모르는 사람인데 그 난리가 난 거야?”

당연한 의문이다. 해장국을 마저 우물거리며 변명을 짜내려 애썼다. 관상을 좀 볼 줄 안다고 할까? 내가 척 봤는데 범죄자의 상이어서 그만…….

“가끔 그렇게 시커먼 놈들이 있어.”

궁색한 말들은 밥알과 함께 꿀떡 넘어가고 본심이 튀어나왔다. 뱉자마자 놈에게 먼저 했던 말과의 모순을 눈치챘다. -아, 색이 보이네 어쩌네 했던 거? 컨셉이야, 컨셉. 그걸 믿냐.

“…러니까 내 말은, 아, 뭔가 쎄한 놈들이 있다는 거지.”

“…….”

“가끔 있잖아, 왜. 눈빛이 막 이렇게 나쁘고……. 뭐 그런…….”

“그래서 가게에서 쫓아냈다고?”

“…….”

“그냥 인상이 나빠서?”

이람호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물었다. 그러나 속아주겠다는 듯이 여유로운 눈을 하고서.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럴 만한 이유였겠지. 실제로 또라이였고.”

“…….”

“우체통도 찌그러졌더라. 나중에 확인해봐. 아예 건물 입구부터 장도리 휘두르면서 들어간 것 같아.”

그 말에 또 덜컥 겁이 난다. 아, 정말로 그 새끼 또 오면 어쩌지. 피가 다 식는 기분이었다. 얼굴에서 티가 났는지 이람호가 조금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흔하다면 흔한 일이다. 트렌스젠더들을 노리는 변태성욕자거나, 그들이 수술하기 위해 모으는 돈을 노리는 사기꾼이거나. 뭔가의 목적을 위해 여자 옷을 입고 머리까지 붙여가며 애를 썼는데 내가 재를 뿌렸으니 당연히 화가 났겠지.

지나고 나서야 후회가 된다. 좀 더 티 나지 않게 할걸. 순간적으로 김세나한테서 놈을 떼어놔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바람에 그만…….

“네 여자친구 말인데.”

후회와 실의에 빠져 있던 나를 끄집어낸 건 이번에도 이람호였다.

“연락해두는 게 낫지 않겠어?”

“뭐?”

“아까 제대로 듣진 못했는데…. 여자친구가 데려온 놈이라며? 혹시 그놈이 네 여자친구 연락처나 주소를 알고 있으면 위험하잖아.”

그것 참 뭘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는지……. 막막함에 나도 모르게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람호는 그사이 벌써 뚝배기를 반 이상 비우고 있었다.

“…여자친구 아니야.”

별수 없이 그것부터였다.

“응…?”

“여자인 친구는 맞는데…. 뭐 사귀거나 그런 사이 아니라고.”

“그래?”

“…….”

“다행이네.”

툭, 던진다. 무심코 지나가다 맞아 죽기 딱 좋은 강도로. 나는 뚝배기에 코를 처박다시피 한 채 숟가락을 마구 놀렸다. 의심의 여지조차 없는 진심에 속이 다 울렁거렸다.

“…그래서 볼 일이 뭔데?”

“응?”

“새벽부터 기다릴 만큼 급한 볼일이 뭐냐고.”

“그런 거 없는데.”

“…….”

“그냥 얼굴 보려고 기다렸어.”

난리 났다. 철 지난 유행가 가사가 머릿속을 뎅뎅 울린다. 심장아 부탁해 나대지 좀 마. 목이 막힌 척 가슴을 턱턱 치다가 헛기침을 했다.

“…내 얼굴이 왜 보고 싶은데.”

“그러게, 왜 보고 싶을까.”

“…….”

“나도 잘은 모르겠어. 그냥…….”

스물여덟의 이람호가 해장국집에서 이런 말을 하리라고 십 년 전의 누군들 상상이나 했을까. 나는 이람호의 눈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그를 맴도는 푸른빛을 쫓기 시작했다. 그것은 때로 물고기처럼 보인다.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며 사람의 혼을 빼놓는다.

“…계속 네 생각을 했어.”

그래, 그래서…. 피쉬라고 부르기 시작했었지.

“갑자기 찾아간 건 미안해. 황당했을 거야.”

“…….”

“그냥 그때는……, 그랬어. 마음이 너무 급했어. 누군가에게 확인받고 싶었거든.”

“…확인?”

“내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라는 말이 듣고 싶었어. 너도 알다시피 우리 할머니 고생 많이 했잖아. 아버지 돌아오신 후에도 계속 폐지 줍고 다니셨어. 그러다 작년 겨울에 빙판에 넘어져서……. 그 후로 못 일어나고 여태 앓다가 가셨거든.”

“…….”

“그런데 별로 슬프지가 않은 거야. 눈물도 안 나더라. 장례식장에 온 사람들이나 아버지나, 하나같이 날 위로하려고 애쓰는데 난 정말 위로가 필요하지 않았거든. 부모님보다 할머니랑 살았던 기간이 더 길었는데도.”

피쉬는 고요히 이람호의 눈가를 유영하고 있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열여덟의 이람호는, 비유하자면 좁은 산등성이에 흐르는 계곡 같았다. 생명력 넘치면서도 위태로웠다. 지금의 이람호는 언젠가 사진으로만 보았던 블루홀 같다. 파랗다 못해 검다. 그래서 신비롭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도 있어. 마지막 반년 동안은 똥오줌 받아내면서 수발들었거든. 학원이 오후 다섯 시부터 밤 열 시까지 하니까 그 시간에 맞춰서 할머니를 재웠어. 끝나고 애들 다 하원시키고 집에 도착하면 한 열한 시쯤 돼. 그럼 부엌에서 찬밥에 물 한 그릇 말아먹고 새벽 내내 할머니 투정을 받아주는 거야.”

“…….”

“다들 그러지. 고생스럽겠다고 하지. 그런데 아무도 그게 이상한 일이라고는 안 하더라고.”

이람호는 어느새 해장국을 깨끗이 비운 뒤였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다. 음식을 씹고 소화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다.

“할머니가, 허리가 너무 아프니까 약이 없으면 잠을 못 자. 근데 약이 독한 거라 많이 먹으면 정신이 좀 오락가락하나 봐. 그럼 그때부터 썰을 풀기 시작해. 사람이 정신이 없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억울한 기억이래. 아버지가 용돈 주던 걸 어머니가 못 주게 한 얘기부터 날 데려다 키우는데 내가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당신 먹을 게 없었다…, 뭐 그런 것들.”

이해할 수 있다. 엄마도 그랬다. 술만 마시면 아버지 욕을 했다. 비난은 자연스럽게 내게로 흘러내려 왔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이토록 불행한데, 그 와중에도 널 키우는데, 왜 너는 내게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하는 거니?

“그래서 할머니 죽었을 땐 이제 귀 따가울 일 없어서 참 좋다 싶었는데. 잠도 실컷 잘 수 있고.”

“…어.”

“그러니까 너 찾아간 게……. 장례식 끝나고 화장까지 하고 다시 학원 나간 첫날이거든.”

“…….”

“수업 끝내고, 애들 다 바래다주고, 이제 집에 가서 씻고 자면 되는데……. 그 상황이 순간 너무 이상한 거야.”

“…….”

“그렇게 편하게 쉬어도 된다는 게 정말 너무, 이상한 거야. 기분이.”

피쉬가 한 번 넓게 흩어졌다가 다시 이람호의 목 언저리로 모였다. 무언가 곰곰이 떠올리는 사람의 피쉬는 주로 저런 형태가 된다. 나는 입을 다문 채 서서히 녀석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 혹시 내가 뭐 잘못했나?”

이람호는 조금 웃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가벼운 미소였다.

“혹시 내가 할머니한테 많이 잘못한 건가? 그 생각이 한 번 드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거야. 정신을 차려보니 집에 가서 졸업앨범을 뒤지고 있더라고.”

그리하여 앨범에 있는 연락처 중 연결이 되는 곳마다 전화를 걸며 물어물어 내 가게를 알아냈다 그 소리였다. 이람호가, 기억도 희미한 동창들에게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심태경의 연락처를 묻는다……. 내게는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알겠는데, 그게 지금 상황이랑은 무슨 상관이야?”

“응?”

“그때 네가 그런…, 복잡한 심경이어서 나를 떠올렸고 찾아왔다는 것까지는 이해했어. 근데 그게 어떻게 그……. 뭐, 지금 이런……, 거랑 연결이 되는 거냐고.”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딱히 너랑 사귀고 싶은 건 아니고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라는 의미가 전달이 될지 머리를 굴려 가면서. 이람호는 별다른 동요 없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그냥?”

“너를 다시 만난다면 왠지 그렇게 될 것 같았는데.”

언젠가 김세나가 그랬다. 넌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으면 화 좀 내라. 그녀의 표현에 따르자면 나는 어지간히 말 같지 않은 소리를 들어도 동요가 없는 편이다. 하지만 그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사람을 보면, 그리고 ‘피쉬’의 움직임을 보면, 상대가 정말 악의가 있는지 아닌지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악의 한 점 없는 상대에게 화를 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조용히 넘어간다. 언제나 그뿐이었다.

“호모라면 질색팔색하더니 그새 호모가 됐어?”

그래서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이람호는 이번엔 조금 소리 내서 웃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 후로 남자도 여자도 없었으니까.”

“진짜로?”

“내 상황이 좀…, 누구 만나고 그럴 때가 아니었어.”

빈 그릇을 치운 종업원이 자판기 커피 한 잔씩을 가져다주었다. 텁텁한 단맛에 목이 더 말라오는 듯했다.

“학원은 무슨 소리야? 학원 일해?”

“…아, 응. 태권도 학원. 아버지가 다시 차렸어. 2년 전쯤에.”

참으로 무색한 세월이 아닐 수 없다. 그 이람호가 학원에서 애들을 가르친다니. -저렇게 죽어라 운동해 봤자 기껏 사범 일이나 하겠지. 그건 세상살이 자체를 싫어하던 이람호가 개중에서도 제일 싫어하던 소리였다. 웃기고 있네. 누가 어른 돼서도 이 짓을 하고 있을 것 같아?

“먹고 살 재주라는 게 영 궁색하더라.”

마냥 씁쓸한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다. 학원을 차릴 형편이나 되면 다행인 것이다. 내가 아무 노력 없이 엄마 가게를 이어받아 어려움 모르고 사는 것처럼.

“근데 무슨 태권도 학원이 그렇게 늦게 열어서 늦게 끝나?”

“낮에 초등반까지는 아버지가 하셔. 저녁때부터 체고나 체대 입시 준비하는 애들 오면 내가 맡고. 걔네는 다 늦게까지 운동하지.”

“…어린 것들이 고생이구만.”

“사실상 취미반이야. 진짜 가능성 있어 보이는 애들은 센터 쪽에서 다 빼가니까 결국은 애매한 애들만 남거든.”

자조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어떤 욕심도 없어 보인다. 당연한가? 이람호는 애초에 좋아서 운동하던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너는? 어머니 가게 물려받아서 하는 거랬나?”

“…어, 뭐……. 그렇지.”

“그래…….”

애매하게 말꼬리를 늘인 이람호가 커피 한 모금을 머금었다. 아무래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는 기색이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피쉬가 살짝 일렁이더니 한 차례 흩어졌다. 어, 망설이네.

“저, 갑작스럽지만 너 혹시…….”

모아둔 돈 좀 있니? 집안에 우환이 있지 않니? 옥 장판 안 필요하니? 순식간에 떠오른 질문 후보들이 병렬로 늘어선다. 드디어 오나? 그래, 와라! 뭐든 받아쳐 줄…,

“알바 안 필요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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