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잊혀가던 것들에 대하여(1권) (1/10)

레인보우 피쉬 1

1. 잊혀가던 것들에 대하여

그 애는 시리도록 차가운 색을 띠고 있다.

탁한 구름을 머금은 성에의 색과 같다. 얼어붙기 직전의 강물과 같다. 푸르다 말하기엔 희고, 희다 말하기엔 푸른색. 손끝이 닿는 순간 찌릿한 통증이 일 듯한, 신경이 얼어붙고 살이 썩어들어 갈 듯한, 나를 괴사시킨 후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홀로 고고할 듯한 그런 색.

묻고 싶다. 도대체 누군들 그 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고. 뜨거운 태양 아래, 모래 먼지 가득한 운동장에서 그토록 예리하고 찬연한 빛을 두른 채 새처럼 달려가는 그 애를 직접 보았다면.

나는 그것을 피쉬라고 부른다.

마담의 생일파티가 끝난 것은 상가 1층 우편함으로 조간신문이 좌르륵 꽂힌 후였다. 밤새도록 붓고 마셔댔던 술의 잔해가 가게 바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이 미친 것들. 양주까지 다 갖다 처먹었어. 투덜거리며 술병을 치우는데 신발 끝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누군가가 고스란히 게워놓은 간밤의 흔적에 그만 어찔해진다. 멀지 않은 자리에 늘어져 있는 마담이 보였다. 텅 빈 양주병으로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누르고 세 개째의 쓰레기봉투를 갈무리했다.

마담은 이 가게의 주인은 아니다. 그냥 가게에 붙어살다시피 하는 내 친구일 뿐이다. 다만 이 가게에 드나드는 수많은 트렌스젠더 중 유일하게 수술까지 끝낸 여자라 모두가 경의를 담아 마담이라 부른다. 어제는 드디어 뒷자리가 2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를 새로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본래 주홍빛에 가까웠던 색에 살짝 핑크색이 돈다.

“사장님…, 몇 시예요?”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손님이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혀를 끌끌 차며 벽시계를 가리켰다. 아, 어떡해. 머리를 쥐어 싸던 그는 오전 수업이 있다며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갓 대학 들어간 새내기라 했던가. 애티가 나는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았다. 노란색 피쉬가 그의 귓전을 슬렁슬렁 맴돈다. 내 시선을 느낀 손님이 돌아서며 수줍게 웃었다. 나는 어제 그와 키스했다. 이름은 모른다. 굳이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오늘도 와도 돼요?”

어린 얼굴이 쑥 다가온다.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그럼, 와도 되죠.”

흔쾌히 대답하자 배시시 웃는다.

“연락처 물어봐도 돼요?”

“아뇨.”

손님이 의외라는 듯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안 돼요? 왜요?”

재차 묻는 목소리가 시무룩하다.

“그냥 가게로 와요.”

“에이…….”

“늦겠네. 건너편에서 오는 버스 아무거나 타면 다 역으로 갈 거예요.”

썩 나가라는 의미로 문을 가리켰다. 손님은 영 아쉽다는 듯 느적느적 가게를 나섰다. 덩치 큰 연하는 완벽한 내 취향이지만 저건 어려도 너무 어리다.

“야, 일어나.”

손님이 나가자마자 널브러져 있던 마담의 옆구리를 발로 밀었다. 으으음, 신음하며 돌아눕긴 해도 일어날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가지가지 해. 한숨을 내쉬고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이십오 평 남짓한 가게에 빼곡한 쓰레기와 숙취에 절어버린 인간 십 수 명……. 이게 다 내가 정리해야 할 업보란 말이지.

간신히 마담과 손님들을 내보내고 가게 정리를 대충이나마 끝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지난 후였다. 망했다. 출근이 오후 여섯 신데. 삼십 분 거리의 집까지 돌아가 씻고 다시 나올 생각을 하니 막막해진다.

차라리 오늘은 쉴까. 잠깐 떠오른 생각을 이내 지워버렸다. 휴무는 월요일이다. 정해진 휴무일 외에는 어떻게든 가게를 열고 운영할 것. 그것은 내가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살면서 지키는 단 하나의 원칙이었다.

고민하다 주방에서 대충 씻고 담요를 꺼냈다. 일단 쪽잠으로 때우고, 오늘 영업이 끝나면 돌아가서 샤워하고 편하게 자자. 치마 입은 손님들을 위해 준비해놓은 무릎담요에서는 퀴퀴하고 눅눅한 냄새가 났다.

뒤늦게야 생각한다. 어쩌면 뭔가의 계시가 아니었을까? 마담이 하필 그날 생일이었던 것, 그리하여 나를 파김치로 만들었던 것, 피곤에 절어버린 와중에도 무릎담요의 구질구질한 냄새에 순간 잠이 달아났던 것까지도- 어떻게든 그날 내가 가게를 닫게 만들고 싶었던 조상님의 자비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알람 소리에 눈을 뜨자 어지러울 만큼 강한 졸음이 밀려왔다. 앉은 채 머리를 휘적휘적 돌리다 두 손으로 뺨을 치고 일어났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새카만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켰다. 그러자 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중앙조명 중 하나가 나가버렸다.

“아……, 진짜.”

거기서라도 깨달았어야 한다. 오늘은 날이 아니라는 것을. 밤새도록 파티 뒤치다꺼리를 하고, 남의 토사물이나 밟고, 잠도 못 자고 조명은 나가고 온몸은 쑤시는데. 어차피 서울 구석의 매니악한 물 담배 가게, 못 보던 얼굴이 올 일도 없는 곳인데 왜 부득불 영업 팻말을 걸겠다고 그 애를 썼을까.

안 그래도 지하라 어두운데 조명까지 나가니 한층 우중충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조명 가게에 전화한 뒤 술 재고를 확인했다. 재료가 모자란 칵테일 몇 개를 메뉴에서 지워놓고 대걸레를 들었다.

“힘내자, 힘……. 힘…….”

중얼거리며 대충 준비를 끝내고 숯을 올렸다. 아무래도 한 대 피워야 완전히 정신이 들 것 같았다. 닦아놓은 후카를 꺼내 챔버에 물을 채우고 장미향 담배향료를 끼웠다. 숯을 올린 뒤 파이프를 입에 물자 진한 장미향이 스민다. 후욱, 폐까지 휘돈 연기를 뱉어내며 고개를 탈탈 털었다. 온몸에서 달짝지근한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딸랑, 방울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마담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머쓱하게 웃더니 새로 샀다는 샤넬 스커트가 예쁘게 퍼지도록 살랑살랑 걸어왔다.

“자기.”

“누가 니 자기야.”

퉁명스런 말과 연기를 동시에 훅 뿜었다. 마담은 굴하지 않고 아잉, 하며 내 손에서 파이프를 빼다 제 입에 물었다.

“잘못했어. 어제 너무 신 나서.”

“됐어, 난 이미 너덜너덜해졌어. 곤죽이 돼버렸다고.”

“진짜 잘못했어. 오늘 가게 내가 볼게. 자기는 쉬어.”

“됐거든. 어디 내 소중한 술들을 쓰레기로 만들려고.”

파이프를 도로 빼앗아 깊이 빨아들였다. 온 가게에 장미향이 퍼져간다. 조금이나마 마음이 안정되는 듯했다.

“근데 자기, 기영이 깠다며?”

마담이 히죽히죽 웃으며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 낮기는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만큼 예쁜 여자였다. 내가 노멀이었다면 정말 사귀었을지도 모른다.

“기영이가 누구야.”

“자기랑 어제 입술 비비던 애.”

“아, 이름을 몰라서.”

“걔가 계속 자기한테 관심 있다고 그랬는데.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깠어?”

“까긴 뭘…. 어린애를 두고.”

시큰둥한 척 넘겨버리자 마담이 흐응,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에, 와안전 자기 식이었을 텐데에.

“같은 이십 대인데 좀 어리다고 뭐. 언젠 그런 거 따졌나.”

“걔가 교복 벗은 지 일 년이 됐냐, 이 년이 됐냐.”

“그러니까 더 좋은 거지.”

아, 나도 교복 입은 애랑 사귀고 싶어! 마담이 칭얼거리며 바닥에 뒹굴기 시작했다. 아줌마 그러다 잡혀갑니다. 툭 내던지자 핑크색 입술을 한껏 삐죽거린다. 그 입술을 빤히 보다가 나도 모르게 말했다.

“비슷하네.”

“웅?”

마담이 입술을 동그랗게 모은 채 고개를 들었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한 번 궁금한 일은 끝까지 캐내는 그녀를 알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너 립스틱 색깔.”

“…….”

“니 피쉬랑 비슷하다고.”

동그란 눈을 두어 번 깜빡인 마담이 이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그녀는 내 증상에 대해 알고 있다. 유일하게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상대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다른 색이 보인다. …고 말하면 누군가는 시적인 표현이냐고 되묻고, 누군가는 지금 작업 거는 거냐 한다. 또 누군가는 그놈의 중이병 좀 졸업하라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이상한 콘셉트라며 비웃는다. 후자는 그렇다 쳐도 전자가 좀 골치 아픈 상황으로 연결될 때가 많았기 때문에 언젠가부터는 농담의 레퍼토리로만 써먹고 있었다.

나는 모두가 그런 줄만 알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에게서 색깔 있는 빛무리를 보고, 그 색의 변화에 따라 상대의 기분 따위를 파악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조금만 내게 관심이 있었다면 일찍부터 입단속을 시키거나 안과 혹은 정신과에 데려갔겠지만 애석하게도 어머니는 늘 바빴고 내가 가진 특이체질을 눈치 챌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한 사람은 원래 한 가지 색으로만 보인다고 하지 않았어?”

“톤은 조금씩 바뀌기도 해.”

“신기하네. 나 기분 좋으라고 해주는 말은 아니지?”

“뭐 떨어질 게 있다고.”

바닥이나 닦아. 아직도 여기저기 끈끈해 죽겠어. 걸레를 던지며 명령하자 냉큼 받아든다.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분홍빛 빛무리가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기분이 아주 날아가는 모양이었다.

“나 솔직히 처음에는 네 말 안 믿었었다?”

서툰 솜씨로 바닥을 훔쳐내며 마담이 고백했다.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지금은 안다. 그런 말을 한 번에 믿는 게 이상한 일이라는 걸.

“근데 지내다 보니까 믿을 수밖에 없었어. 너는 내 뒷모습만 봐도 내가 어떤 기분인지 알잖아.”

“보이니까.”

“그때야 안 믿었지. 그래서 혹시 쟤가 나를 좋아하나, 그랬다니까.”

마담을 만난 건 고등학교 때다. 물론 남고였다. 혼자만 유난히 알록달록한 색깔을 달고 있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여자나 남자의 색이 꼭 나뉘어져 있는 건 아니다. 붉은 피쉬를 달고 다니는 남자도 있고 새파란 피쉬를 두른 여자도 있다. 하지만 유난히 채도 높고 반짝반짝한 피쉬를 두르고 다니는 것은 대체로 여자였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그래서 나도 좋아했는데 설마 게이였다니.”

마담이 눈을 가늘게 접고 웃었다. 나는 어깨만 한 번 으쓱이고 말았다. 마담이 내게 고백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기 직전의 겨울방학이었다. 우리는 둘이서 놀이공원에 갔다. 유치한 머리띠도 쓰고 팔짱도 끼고 다녔다. 마담의 요구를 다 들어준 것은 그녀의 경직된 피쉬 때문이었다. 고백하려는 거구나. 만나자마자 알았다. 내가 눈치챈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 미안, 나는 남자를 좋아해.

확실한 고백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딱 잘라 거절했다. 마담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 내가 남자잖아?

되묻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잖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안 믿기가 더 어렵지.”

마담이 통탄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은 지금도 내게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아무튼 기분 좋다. 이 립스틱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거든. 너한테라도 이런 색깔로 보인다니까….”

머리를 배배 꼬던 그녀가 “아, 몰라몰라.” 하며 빠르게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나요?’ 언젠가 마담의 핸드폰 검색기록에 남아 있던 질문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게이와 여자인 게 문제 아닌가. 죽었다 깨어나도 ‘여자’는 내 연애 상대가 될 수 없으니까.

“꺅!”

상념을 깨뜨리듯 날아든 새된 비명에 이어 와장창,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오늘 정말 왜 이러냐. 부글대는 속을 누르고 돌아보자 한 손을 감싸 쥔 채 웅크린 마담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오싹했다.

“왜 그래? 다쳤어?”

“미안해, 이거 내가 깼어…….”

“아니, 그보다 다쳤냐고.”

얼른 달려가 살펴보니 손끝에 피가 살짝 맺힌 것이 보였다. 어두운 와중에 테이블을 닦다가 재떨이를 떨어뜨린 듯했다. 쯧, 혀를 차고 카운터 서랍을 열어 연고와 반창고를 꺼냈다. 마담은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미안해, 태경아.”

이름을 부른다는 건 정말 겁먹었다는 뜻이다. 뭘 이까짓 일로.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역효과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괜찮아, 싸구려야. 똑같은 거 안에 많아.”

“정말…?”

“응, 손이나 이리 줘.”

살짝 벤 상처를 살펴보고 대충 응급처치를 했다. 오픈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유리파편 들어갔을지도 모르니까 병원 갔다 와.”

“아냐, 아냐. 아프지도 않고, 그렇게 잘게 부서지지도 않았어.”

마담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딴에는 어떻게든 오늘 가게 일을 도와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고민하다가 그래, 그럼, 하며 오픈 팻말을 올렸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으로 온 계시마저 날려버리고 말았다.

“사장님!”

저녁 여덟 시가 넘어서야 손님 서너 팀이 들었다. 개중에는 아침에 본 어린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름이 기영이랬지. 영업용 미소를 띠고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요. 친구들도 왔네?”

“네, 저기, 얘네도 다 게이예요.”

어린 기영이가 해맑게 웃자 그의 친구들이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기영이는 반드시 게이나 트렌스젠더여야만 가게 출입이 가능하다고 착각한 것 같았다.

“그건 굳이 말할 필요 없는데…. 신분증이나 보여줘요.”

그 말에는 모두 화색이 돈다. 한 명씩 당당하게 꺼내어 보여주는 신분증에는 하나같이 올해 갓 스물이 되었다는 숫자가 자랑스럽게 인쇄되어 있었다. 귀엽다. 이거 보여주고 싶어서 얼마나 근질거렸을까.

“저희 다 앱으로 만난 친구들인데, 제가 여기 좋다고 하니까 가보고 싶다고 해서요.”

“그렇구나, 고마워요. 덕분에 매출 오르겠네.”

듣자 하니 요즘은 다 스마트폰 앱으로 만나서 연애한다는 모양이다. 세상 좋아졌네. 나 때는 포털 카페였는데.

“얘네 계속 데려올 테니까 연락처 주시면 안 돼요?”

기영이가 대뜸 물었다. 그의 친구들에게서 오오오, 방청객 반응이 나온다. 나는 허허 웃고 그들에게 신분증을 돌려주었다.

“양주 먹으면 생각해볼게.”

참고로 이 가게의 양주 가격은 최저 50만 원부터 시작한다. 그만큼 고급술만 들여놓긴 했지만, 팔릴 거라 기대해서 비치한 메뉴는 아니다. 내가 먹고 싶은데 오로지 그 목적으로 사기가 좀 그럴 때, 갖다놓긴 했는데 안 팔렸으니 내가 먹어야지 뭐, 하는 핑계를 만들기 위한 메뉴였다.

“그럼 저희 저 안쪽자리 앉을게요!”

그러나 기영이와 그 친구들은 너무나 해맑은 얼굴로 자리부터 잡고 보는 것이었다. 그래, 그러든지 말든지. 코웃음을 치고 애들 용 칵테일 만들 준비를 하는데 마담이 심상치 않은 얼굴로 빌지를 가지고 왔다.

“…리샤르 달라는데.”

“…….”

그녀의 손에서 빌지를 빼앗아 구석 자리로 날듯이 달려갔다. “에라, 새끼야.” 빌지로 앉아 있던 기영이의 뒤통수를 딱, 후리자 녀석이 엄청 억울한 얼굴로 올려다본다.

“왜, 왜 때려요?”

“좆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리샤르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건 내 서른 살 생일에 따려고 아껴둔 거야, 콩알만 한 게 어디서 감히.”

“사장님이 양주 시키면 연락처 준다면서요!”

“줄 생각이 있으면 그따위로 말했겠냐. 진짜 눈치 드럽게 없네.”

멀찍이서 마담이 숨넘어가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기영이는 억울해서 살 수가 없다는 얼굴로 제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뒤집어지게 웃고 있던 그의 친구들이 험, 험, 헛기침을 하더니 친구랍시고 편을 들기 시작했다.

“사장님, 걔 돈 많아요. 진짜예요.”

“코 묻은 돈이 억이 있어 봤자 코 묻은 돈이지. 버킷 칵테일이나 마시고 꺼져.”

“와, 오기영, 와아.”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대놓고 까인 놈은 비실비실 웃고, 그 친구들은 비밀을 잔뜩 품은 눈으로 한껏 히쭉거린다. 그러다 한 놈이 기영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그러는 것이었다.

“찾았네, 너의 트루 러브.”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들. 소름이 쭉 돋는다. 오기영은 입꼬리를 한껏 올린 채 나를 돌아보더니 대단히 비장한 발표라도 하는 양 눈에 힘을 주었다.

“사장님, 사실 저는……. 케이투 자동차 회사의 후계자예요.”

어쩌라고.

“사장님을 시험해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아시다시피 제 신분을 알면 사랑 없이 들이대는 남자들이 너무 많아서…….”

마담은 이제 허리를 꺾어가며 웃고 있었다. 아아, 날이 아니다. 정말로 날이 아니다. 이게 바로 오늘의 화려한 마무리구나.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후우우, 깊게 심호흡했다. 그러니까, 이 콩알만 한, 좆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가, 돈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찾기 위해, 감히 내 비장의 리샤르를 이용했다 이 말이렷다.

“그렇게 먹고 싶으면 그래, 갖다 줄게.”

“…예?”

“마담! 헤네시 리처드 병으로!”

예입, 경쾌하게 대답한 마담이 단번에 리샤르를 찾아 쪼르르 달려왔다. 심하게 초라한 테이블에 애지중지 아껴온 코냑을 내려놓자니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오기영과 그 친구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나와 리샤르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판매가 320만 원 되겠습니다, 알지?”

“어, 저기……. 사장님.”

“폰 줘. 연락처도 찍어줄게.”

“…….”

“다음엔 선물도 줘. 선물은 현찰이 제일 좋아. 알았지?”

기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녀석의 핸드폰에 번호를 찍어주었다. 시퍼렇게 어린 게 어디서 사람을 놀리려 들어? 생각할수록 관자놀이에 핏줄이 선다. 아직까지 신 나게 웃고 있는 마담을 한껏 째려보았다. 저건 지가 데려온 손님이면서 뭘 잘했다고 처웃고 있어.

“야, 김세나.”

“걸작이다, 걸작. 귀엽다, 진짜.”

“저게 귀엽냐? 내가 무슨 금잔디야? 넌 저딴 걸 어디서 끌고 왔어?”

“귀엽잖아. 생각을 해보세요, 심태경 씨. 쟤 내년만 돼도 오늘 일 떠올리면서 이불에 구멍 숱하게 낼 거라고. 일단 내가 얼굴 볼 때마다 놀려먹을 거니까.”

망할 계집애. 한껏 째려보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오기영과 그 친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뻔하다. 손댈 엄두가 안 나겠지. 자동차 회사 후계자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320만 원짜리 양주가 쉬운 입장이라면 애초에 이런 후진 가게에 올 클래스가 아니다.

“설도 지난 마당에 뭔 액땜이 끊이질 않아. 이놈의 팔자…….”

“야, 그러지 말고 좀 받아줘. 돈 많은 건 사실이고 어리고 와꾸 좋고. 뭐가 문젠데?”

“김세나.”

“미안, 미안. 그만할게.”

양손을 들어 올린 마담이 샐쭉 웃었다. 그새 덜렁덜렁해진 반창고가 눈에 띈다. 쯧, 혀를 차고 손을 내밀었다.

“손 봐봐. 다시 해줄게.”

“자기……. 나 완전 감동.”

반창고를 풀고 보니 다행히 생각보다 더 작은 상처였다. 정말로 뭐 먼지나 유리 부스러기 들어간 건 없겠지.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한참 살펴보다 다시 연고를 바르고 새 반창고를 감았다.

“근데 너 이거 오른손인데 괜찮겠어?”

“이 정도 긁힌 걸로 뭘. 자기는 아무튼 걱정이 너무 많아 탈이야.”

“너는 걱정을 좀 해라. 그림 그리는 계집애가.”

마담은 극사실주의 화가다. 육안으로는 사진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그림을 그린다. 실력이 워낙 뛰어나 이미 개인전도 몇 번 열었다고 했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싶어 한 번도 가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정말 괜찮아.”

마담이 쑥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극사실주의 화가 김세나는 철저한 신비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개인전에 직접 출석하는 일도 없으며, 인터뷰는 서면으로만 진행하고 사진은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녀의 정체를 두고 어느 유명한 화가의 서브네임이다, 정계 인사의 정부다, 전신화상 흉터가 있는 여자다, 등등 다양한 추측이 나온다는 모양이었다.

“그림 좀 못 그리면 또 어때. 이미 벌만큼 벌었는데.”

마담, 아니 화가 김세나가 비죽 웃는다. 또 허세 부린다, 또.

“아무튼 쟤 괜찮은 애야. 어려서 저래. 애는 착해.”

“니 입으로 그만한다고 했는데.”

“아까워서 그러지. 저만 한 애 잘 없는데.”

나를 향한 김세나의 정성은 일견 자학적인 면이 있다. 이럴 때마다 생각한다. 그녀는 어쩌면 내가 도태되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됐어, 진짜 그만.”

“넵.”

단호하게 뱉은 말에 드디어 녀석이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내가 어제부터 감이 안 좋았어. 그게 다 쟤 때문이었나 봐. 지뢰를 피하라는 계시였어.”

“에이, 또 뭘 지뢰까지. 내가 보기엔 니가 오늘 좀 까칠한 것 같은데.”

“…그런가?”

듣고 보니 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나는 수면부족일 때 최고로 날카로우니까.

“야……. 그럼.”

“응?”

“니가 보기엔 방금 그게 별로 큰 액이 아냐?”

오기영 쪽을 턱짓하며 물었다. 김세나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웅!” 귀여운 척하는 대답도 함께.

“나 기분 졸라 드러웠는데.”

“니가 오늘 까칠해서 그런다니까. 어제 같으면 좋다고 깔깔거렸을 걸.”

이것도 듣고 보니 그렇다. 되짚어보면 어제 저놈이 걸어온 수작도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뭐라더라. 사장님, 술 좋아하시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술이 뭔지 알아요? 그건 바로……, 사장님 입술. …이딴 소리를 하기에 오글거린다고 비명을 지르다가 뭐 이런 게 다 있냐면서 한참 웃고 귀엽다면서 머리 쓰다듬어주고 그러다가 입술도 비비고 뭐……, 그런 과정이었는데.

어제 그 장단을 다 맞춰놓고 오늘 갑자기 정색을 하니 저놈도 혼란스럽겠군. 뒤늦게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왜, 방금 그게 액땜이었어야 해? 내일 뭐 중요한 일 있어?”

“아니……. 계속 기분이 찜찜해서.”

“그럼 액땜이었다고 쳐. 끝난 거야, 끝난 거.”

마담이 손사래를 쳤다. 나는 대단히 감이 좋은 편이다. 물론 대부분은 남들에게서 풍기는 색을 보고 상대의 기분을 찍어 맞추는 거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좋은 예감이나 나쁜 예감이 빗나가는 법이 잘 없었다.

“아니면 가게 일찍 닫을래? 쟤네는 내가 잘 얘기해서 돌려보낼게.”

여전히 새 양주병을 올려두고 고사만 지내고 있는 오기영과 그 친구들을 가리키며 마담이 속삭였다. 마음이 흔들린다. 그래, 이 정도 애썼으면 됐지. 나는 한참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쟤네 좀 가라고 해. 저러다 울겠다.”

“심했다 싶지?”

씩 웃은 마담이 오기영의 테이블로 총총 달려갔다. 패기 넘치는 어린이들은 마담이 뭐라 뭐라 하자마자 반색을 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두 번 다시는 안 오겠군. 아, 내 미래의 돈줄들.

“사장님, 계산…….”

“그냥 가요. 다음부턴 이런 장난치지 말고.”

차분히 말하는데 또 울 것 같은 얼굴을 한다. 애들은 도통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어.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다. 아까 피다 만 후카 파이프를 쥐고 깊이 빨아들여 봤지만 향은 이미 다 날아간 지 오래였다.

새 향료 뜯기는 아까운데. 입맛을 다시고 어린이들을 배웅했다. 잘 가, 두 번 다시 오지 마. 마담이 살랑대며 인사하자 오기영이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렸다.

“가게 닫을 거야?”

“음…….”

그럴 생각이었는데, 막상 골칫덩이를 치워놓으니 또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그래도 닫아야겠지. 졸리니까. 아니 닫지 말까. 손님이 혹시나 늦게 왔다가 헛걸음하면 가게 평판 단번에 떨어지는데.

딸랑, 종소리가 들렸다. 젠장, 손님이네. 짜증이 치미는 한편으로 잘 됐다 싶었다. 파이프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

‘피쉬’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색을 띤 빛무리는 주로 사람의 귓가에 맴돈다. 넓게 흩어졌다가, 날카롭게 벼려졌다가, 경직되었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가 목이나 눈가로 흐른다.

누군가의 피쉬를 보고, 그 색을 가늠할 때면 반드시 눈앞에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로 뜨거운 운동장, 새카만 트레이닝복으로 온몸을 휘감고 달리던 어떤 그림자. 눈이 마주치기를 기대하며 아무리 바라봐도, 하루 종일을 기다려도 단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던……. 내가 본 중 가장 아름다운 피쉬를 가졌던 누군가.

이 색을 안다. 손이 닿으면 얼어붙을 듯 차갑고, 눈에서 놓치면 절로 한숨이 날 만큼 반짝이는 푸른색. 이 색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던 지난 7년 동안 나는 틈만 나면 비슷한 색을 찾으려 노력했었다. 남극의 빙하, 새벽의 달 표면, 시들기 직전의 제비꽃, 서리 내린 창틀과 얼어붙은 비행기 구름……. 그러나 무엇 하나 대체재가 되어주지 않았던 나의, 그립고 아픈 풍경.

“심태경.”

세월을 거슬러 나타난 빛무리가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도저히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그랬다가는 순식간에 머리채를 휘어 잡혀 십 년 전의 그 운동장으로 내던져질 것만 같았다. 나를 돌아보지 않는 녀석의 등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와르르 무너지는 가슴을 끌어안고 홀로 울던 그 밤들이, 단 한 번도 몰랐던 고통인 양 생생하게 일어나 다시 한 번 나를 주저앉힐 것만 같았다.

“……펴.”

그래서 나는.

“편한 자리로 앉으세요.”

외면하고 지나쳐 주방으로 향했다. 쾅, 문을 닫자마자 몸을 낮췄다. 심장이 목을 찢고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했다. 쿵, 쿵, 쿵, 온몸을 뒤흔드는 박동에 발끝까지 저릿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모아 쥔 채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침착, 침착하자.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없을까? 그야 없지. 저런 색을 가진, 내 이름을 아는 인간이 세상에 둘이나 존재할 리 없어. 심지어 목소리도 익숙하다. 기억 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떨림이 턱까지 번진다. 눈이 당장 튀어나올 듯 뻑뻑해졌다.

“자기, 왜 그래?”

김세나가 주방 창으로 얼굴을 쑥 내밀었다. 내 꼴을 보고는 토끼 눈을 한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거렸다. 녀석은 내 얼굴과 바깥을 번갈아 곁눈질하더니 이내 뭔가 결심한 듯 창에서 떨어져 나갔다.

음악 트는 걸 깜빡한 탓에 모든 소음이 지나치게 생생하게 들렸다. 의자를 빼고 앉는 소리, 또각또각 걸어가는 마담의 발소리. “뭐로 드릴까요?” 잠시간의 침묵과, 짧게 이어지는 대답.

“아무거나 빨리 되는 거요.”

“저희 방침상 주문은 명확하게 해주셔야 되는데. 아참, 후카는 안 하시겠어요?”

“…후카?”

“물담배 모르세요? 여기 물 담배 바인데.”

김세나의 목소리는 명랑했다. 점점 현실감각이 없어진다. 이게 다 뭐지? 무슨 상황이지? 저 녀석은 왜 여기 있고 김세나는 왜 저러고 있고 나는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떨어뜨린 시선에 가지런히 모아놓은 무릎이 하찮기만 하다.

“…….”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김세나가 구두 뒷굽을 딱딱거리기 시작했다. 초조할 때의 버릇이었다. 눈치챘을까, 저 녀석이 누군지.

“주문 안 하실 거면 나가주실래요? 곧 마감 시간이라.”

내용과 달리 한없이 친절하고 다정한 말투였다. 웅크린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고맙다, 김세나. 어제의 진상은 다 잊어주마. 다짐하고 눈을 감자마자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뚜벅, 뚜벅, 무거운 발걸음이 주방 앞을 지나 문으로 향했다.

끼익, 딸랑, 철커덕. 문이 닫히자마자 얼른 자물쇠를 채워버린 김세나가 총총 달려와 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갔어. 나와도 돼.”

“…….”

“누군데 그래? 사채라도 썼어?”

“…너 그 자식 누군지 몰라?”

묻자 예쁜 눈을 둥그렇게 뜬다. “몰라. 누군데?” 순진하게 묻는 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람호잖아.”

“누구?

“우리 학교 다닐 때, 태권도하던 이람호.”

시선을 위로 한 채 눈알만 데록 굴리던 마담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어엉?” 굵어진 목소리로 거칠게 내뱉더니 문 쪽을 얼른 째려본다.

“이람호라고? 태권도 국대?”

“국대는 못 됐었지만 아무튼….”

“방금 그게 진짜 이람호라고? 잘못 본 거 아니야?”

다다다 쏘아대는 말에 여러 가지 감정이 들어 있었다. 가장 큰 것은 분노고 다음으로 큰 것이 질투였다. 그도 그럴 게 김세나는 나를 좋아했고, 나는 이람호를 좋아했으니까. 그리고 이람호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이람호 맞아. 확실해.”

“아니, 말도 안 돼. 전혀 못 알아봤는데? 걔 좀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

마담이 양손을 뺨에 댄 채 얼굴을 위아래로 구겨버렸다.

“…걔가 언제 그렇게 생겼어. 옛날부터 생긴 건 준수했지.”

“준수해? 누가? 이람호가? 아니야, 완전 호박이었는데 뭔 소리야.”

“니가 걔 싫어했으니까 그렇게 보인 거지…….”

그랬다. 눈에 확 띄는 미남은 아니었어도, 깨끗한 눈매나 높은 콧대나 단단한 목덜미가 멋있었다. 근육 트레이닝을 할 때면 벌떡벌떡 일어나던 굵은 핏줄이나, 땀방울 맺힌 짙은 피부도.

“왜, 아까 들어온 놈은 잘생겼어?”

“…아니, 굳이 뭐, 그런 건 아닌데.”

“잘생겼나 보네. 못생겼다고 안 하는 거 보니까.”

김세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 눈 높은 계집애가 이 정도 반응을 보인다면 어지간히 괜찮다는 거지. 내가 입을 다물자 녀석이 아차, 하더니 다시 쏘아대기 시작했다.

“근데 왜 숨어? 뭘 잘못했다고? 애초에 그 새낀 널 왜 찾아왔고?”

“…일부러 찾아온 건지 아닌지는 모르잖아.”

“모르긴 뭘 몰라! 들어오자마자 너한테 직진하던데. 딱 봐도 너 보러 온 거잖아.”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 어두운 가게에서 얼핏 보자마자 내 이름을 부른 건 사실이니까.

“근데 넌 어떻게 단번에 알아봤어?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던데.”

“…….”

“오, 첫사랑이라 이거야?”

비꼬려고 한 소리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분위기를 좀 풀어보기 위한 농담에 가깝다. 그래도 순간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피쉬 있잖아.”

그래서 나도 자제하지 못했다.

“피쉬로 알아봤어.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색이라.”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한참 후에야 마담, 아니 김세나는 아, 그래, 하며 고개를 돌렸다.

“가게 닫을 거지?”

“…….”

“테이블 정리는 해놨어. 나 먼저 갈게.”

앞머리를 몇 번 쓸어 올린 김세나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재킷에 코트에 목도리에 장갑에 귀마개까지 알뜰하게 휘감더니 바닥에 굽을 쑤셔 박을 기세로 뒷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참, 쟤도 쟤고 나도 나다. 십 년째 똑같은 삽질 중이다.

어두침침한 가게를 둘러보다 아직 숯이 남은 후카 파이프를 물었다. 왜 하필 물담배야? 언젠가 마담이 물었었다. 물론 있어 보이긴 하는데, 너랑 별로 안 어울리는 것 같아. 나는 연기를 뿜어내며 동의했다. 맞아, 나랑 안 어울리지.

이람호는 갔을까.

푸른 호랑이라는 뜻인가? 처음 이름을 알았을 때엔 그 생각뿐이었다. 그의 피쉬는 내가 태어나 본 중 가장 아름다운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 빛깔이 그의 이름과 연결되었다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벅찬 우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일 몰래 들여다본 출석부에서 본 이름에는 쪽빛 람도 호랑이 호도 없었다. 그 실망감을 감추기 위해 나는, 모르는 척했다. 처음부터 그의 이름 따위는 궁금하게 여겨본 적 없다는 듯이.

옷을 챙겨 입고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어제부터 오늘까지의 일들이 순간 꿈처럼 느껴진다. 두 번 다시 내 감을 무시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문단속을 했다. 혹시나 새벽에 손님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면지도 하나 챙겼다. <사정상 하루 휴업합니다. 헛걸음하신 분들은 이 종이를 찍어 재방문 시 보여주시면 공짜 칵테일 한 잔씩 드려요.> 영업 문구를 직직 써서 클로즈 팻말 아래에 붙여놓았다. 음, 훌륭한 자영업자의 자세야.

바깥문까지 단단히 잠그고 나니 손이 온통 얼어붙어 있었다. 맹렬한 추위다. 찢어질 듯 건조한 인중으로 콧물이 들락날락한다. 에이, 디러. 코를 흥, 들이켜고 돌아서는데 건너편 가게 벽을 등지고 선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

놀라지는 않았다. 이럴 거라 생각했으니까. 모직 코트 하나 덜렁 걸친 이람호는 꽁꽁 싸맨 나나 김세나에 비해 참으로 무던해 보였다. 옛날에도 그랬지. 신기할 정도로 추위를 안 타는 녀석이었다. 그만큼 더위는 끔찍하게 싫어했지만.

“너 심태경 맞지.”

멀쩡한 목소리로 묻는 말에 한숨부터 나온다. 희고 두터운 입김이 명치까지 흘러내렸다. 다 알고 온 거겠지, 김세나의 말대로겠지……. 이게 우연일 리가 있나.

“맞느냐고.”

그 와중에 조금 억울하다. 나는 처음 한마디만 듣고도 한 점 의심 없이 확신했는데, 놈은 내게 확인을 요하고 있는 것이다.

“헷갈려서 물어보는 거야?”

되묻는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추워서 그렇겠거니 여겨줬으면 좋겠지만, 이람호는 추위가 어째서 사람을 떨리게 하는지 모를 것 같다.

“심태경 맞느냐니까.”

“기면 어쩌고 아니면 어쩔 건데, 애초에 뭐하는 건데 여기서….”

나도 모르게 주절거리다 의식적으로 입을 닫았다. 이람호는 표정변화 없이 나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열여덟의 여름이었다. 에어컨을 한계까지 틀어놓은 교실에서 반팔 교복셔츠 위에 체육복을 껴입고 버티는 호사를 부리며 창밖을 내다봤을 때였다. 온통 새카만 트레이닝복을 입고 모자까지 뒤집어쓴 이람호가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그가 견뎌내고 있을 작열 지옥과는 완전히 다른 빛깔의, 시푸르고 차가운 색을 모래바람 사이로 흩뿌리면서.

나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절에서 고스란히 꺼내온 듯한 눈앞의 이람호였다. 동요 없는 눈동자와 단단한 턱과 오른쪽 눈썹 위를 길게 그은 흉터, 아, 그 시절 나는 저 흉터를 한 번만 만져보는 게 소원이었지.

“넌 어째 변한 게 없냐.”

바로 그 이람호의 말이었다. 발끝만 보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녀석은 설핏 웃고 있었다.

“옛날에도 그랬지. 무슨 말을 해도 한 번에 제대로 대답을 하는 법이 없었어.”

그건 내가 너를 좋아했기 때문이야. 네가 나를 볼 때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는 바람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네 말을 이해하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뭘 그렇게까지 경계해?”

놀랍게도 이람호의 말에는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떨군 채 코를 들이켰다. 얼어붙은 손이 아팠다.

이런 일을 상상해보지 않았던 게 아니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생각했었다. 나를 그렇게 헌신짝 취급하고 한 번 쳐다보지도 않던 이람호가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장면을.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후회하고, 나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을……. 그러나 그럴 리 없지. 알고는 있다. 이런 경우 높은 확률로 옥장판이거나 정수기거나 다단계다. 이람호가 처음은 아니었다. 생전 연락도 없던 동창들이 용케도 가게 위치를 알고 불쑥 찾아와 땀을 뻘뻘 흘리며 있지도 않은 추억을 끄집어내다가 사실은 내가 요즘 사업을 하는데……, 하며 말문을 트는 것.

“말해두는데, 이 가게가 내 거긴 해도 대출 빼면 남는 것도 없어.”

“뭐? 니가 사장이야?”

이람호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속지 말자. 수작질일 거야. 나는 동요하지 않는 척 헛웃음을 지었다.

“용건만 빨리 말해. 물건 필요한 거 아무것도 없고 진열도 안 해줄 거야. 투자도 안 할 거고 네트워크 마케팅도 관심 없어.”

“……?”

“엄마 유언장에 써 있어. 평생 가게 처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상속한다고 했어. 못 건드려. 꿈도 꾸지 마.”

“…어머니 돌아가셨어?”

호흡마다 숨이 얼어붙는다. 이람호는 거리를 좁힐 생각조차 않은 채로 가장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에 대해 물었다. 나도 모르게 목도리에 코까지 파묻었다.

“언제?”

언젠지 알면 니가 어쩔 거야. 내뱉지 못한 말은 언 숨과 함께 입안을 할퀼 뿐이다.

“태경아.”

차라리 가까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겁먹은 척 뒤돌아 도망치면 되니까. 그러나 이람호는 처음 날 기다리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대로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발 한 짝 떼지 않을 듯했다.

“물건 팔러 온 거 아니야, 태경아.”

“…….”

“다단계도 아니야.”

“…….”

“너 보러 왔어.”

속이 치밀어 어금니를 꽉 물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겉모습뿐인 듯했다. 십 년 전의 이람호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아니다. 어쩌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십 년 전부터 이런 말투를 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이렇게 대하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아까 그 사람은 여자친구야?”

내 머릿속을 꽉 채운 혼란을 알 리 없는 이람호가 태평하게 물었다.

“이제 여자 좋아해?”

마주친 것은 여전히 평온하고 흔들림 없는 두 눈동자였다.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나는 얼어붙은 두 손을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찬 숨을 들이쉬었다.

“그거 물어보려고 기다렸어?”

“응.”

“…….”

“이제 여자 좋아하고 여자 사귀면, 나는 더 이상 가망 없나 해서.”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나온 말에 순간 멍해졌다.

그래, 이런 시나리오도 망상 속에 있었지. 아직도 내가 십 년 전 그때처럼 멍청한 스토커일 거라 믿는 이람호가 선심 쓰듯 그래, 늦었지만 내가 너와 사귀어주마, 하는. 물론 스물여덟의 나는 열여덟의 나와 달리 쿨하고 냉철한 현실 게이이므로 꿈에 부푼 이람호를 차갑게 무시하고 미련 한 점 없는 얼굴로 내 갈 길을 가야 한다.

“…….”

그러니 지금 이것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웃음을 날리며 돌아서야 할 타이밍인데, 어쩐지 꼼짝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그러긴커녕 턱밑까지 올라온- 아니야, 여전히 여자랑은 못 사귀어, 그리고 네가 방금 본 건 십 년 전에 너를 정말 끈질기게 싫어하던 김세준이라는 녀석이야.

“…아니, 그러니까……. 네가 알아서 뭐할 건데….”

등등, 시나리오 속 쿨한 내 모습과는 백만 광년쯤 거리가 있는 말들만 혀뿌리에 촘촘히 박혀 드는 것이었다.

“너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람호는 재촉하지도, 부정하지도, 화를 내거나 쓴웃음을 짓지도 않았다. 처음 나타날 때 그러했듯 그저 조용히, 무해한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

나는 지나치게 감이 좋다. 모든 건 예상대로였다. 어느새 발밑으로 그날의 모래 먼지가 밀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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