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오포드가의 귀공자-36화 (36/36)

36.(완결)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침대에 앉아있던 아름다운 여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곧 다시 앉았다가 얼마지나지않아 다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초조함에 어쩔줄 몰라하는 얼굴로 붉은 입술을 이로 조곤조곤 짓뭉개로 잇는건 에리카 라이에이드였다.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말도 안돼!!!!!

아르휜이 나타나다니..크로멜성에서 죽었는데, 죽었어야 하는데!!!!

속은 것이다. 그런 놈들에게 일을 맡기는게 아니었다.

지하감옥에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 불안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아르휜이 그놈들 손에서 살아남았을 거라고 생각해본적도 없다. 아직까지 살아있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해 본적 없었다.

그런데 야나카황자의 황제즉위식이 끝나면 이제 곧 레오포드가의 공작부인이 되는 일만 남은 이 시점에서 아르휜이 나타난것이다. 죽은줄 알았던 아르휜이, 두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서, 아르휜, 아르휜, 아르휜!!!!!

도도한 펠릭스가 드디어 손에 들어오는 것, 야나카황제의 후광을 입고 더 강대한 권력을 갖게될 레오포드가의 공작부인이 되는 것에 대한 계획이 틀어지는것보다 더 에리카를 불안하게 하는건 아르휜이 그때일을 혹시 알고 찾아온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었다. 그때 지하감옥에서 산적들을 시켜 죽이려고 했던걸 알고 찾아온 거라면 ..  끝이다. 모든게 끝이었다.

공작부인이 되지 못하는것따위를 생각할 여력도 없이 극도의 불안과 초조에 사로잡혀 쉴새없이 치맛단을 쥐었다폈다 반복하던 에리카의 눈빛이 한순간 반짝거렸다.

그,그래!! 그런 수가 있었어!!

풍성하게 퍼진 치마를 손으로 당당하고 자신있게 쥐어올린 에리카는 발걸음을 빨리해서 문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용건은 그것뿐이야..라고,

내 마지막 말이 끝나자마자 감정을 감추려는 사람처럼 펠릭스형은 두눈을 굳게 감아버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감고 있다가 그가 다시 눈을 떳을때는 화산이 곧 폭발할것처럼 들끓던 무언가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굳게 다물려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아르휜, 너를 찾아다녔다. 찾으면 너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었지.

유감스럽지만 내가 하고싶던 말은 그때 일에 대한 사과는 아니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 내린 결정이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거짓말, 그러면서 왜 시선을 못맞추는데. 후회했지? 후회하고 있었지?

최선이었다는 말은 사실이겠지만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라고 내심 후회하고 있었다는거 알아.

당신, 그 눈을 보니까.. 알겠어.  당신도 충분히 괴로워했다는걸, 고통스러워했다는걸,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이.

“..... 알아.”

대답하자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 시선은 나를 처음 봤을때보다 더 걷잡을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심장을 날카로운 검으로 찔린 사람처럼 붉은 눈동자에 확연한 고통이 흔들린다.

“...안다고?”

네가, 네가 뭘 안다는거냐!! 라고 금방이라도 격하게 튀어나올것 같은 흥분을 억지로 가라앉힌 눈을 보며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 알고있어. 아니.. 모를수도 있지.

하지만 중요한건 내가 형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때 일로 형을 원망하지도 않아.

생각이 달랐을 뿐, 형이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다는걸 알아. 그래서.. 미워할 수가 없었어.“

“하.........”

기가 막히다는듯, 비틀어진 입가로 웃음이 새어나온다. 토해지려는 무언가를 참는것처럼 입을 꽉 다물어버리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까지는 알수가 없었다.

표정을 감추려는 것처럼 한손으로 얼굴을 덮고 흥분을 가리앉히기 위해서인지 화를 삭히기 위해서인지 심호흡을 몇 번 하고있을때... 나는 그가 우는걸까..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렸을때 펠릭스형의 얼굴은 기억에 남아있는 모습보다 약간 굳어져있었을뿐 다른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반지는 내손에 없다. 다른 사람에게 있지만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겠지. 원한다면.”

아............가슴속에 싸아하게 물밀듯이 밀려드는 감정에 울컥 복받치는걸 참아내며 가슴을 조금 들썩이는 사이 펠릭스형이 이어 말했다.

“이곳에서 기다려라. 찾아올테니.

그리고.. 즉위식 때문에 아버지가 와계신다.

궁에 머물고 계시니까 다녀올동안 인사라도 드려라. 아르휜.”

........고마워...형.

입으로 꺼낼수 없는 말을 마음으로 대신하는 사이 말을 마치고 내옆을 비껴서서 가려던 펠릭스형이 멈칫 멈춰섰다. 그리고 나를, 아니 내쪽을 힐긋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 독수리를 궁 경비가 들여보내 주던가?.. ”

뭔가 이상한듯이 하는 말에 나는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펠릭스형이 보고 있는쪽, 그러니까 내 어깨위에는 독수리 아시리안이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행여나 펠릭스형과 애틋한 시선을 교환할까봐 시종 신경을 곤두세운채 눈을 부라리며!!

그래, 이해는 한다. 블랙리스트 1순위였던 프란 이전 옛날부터 펠릭스형에 대해서는 비상경보령을 선포했던거 같으니까. 그래도 의심할거 의심해야지.. 지금 상황에서 어울릴법한 오해냐고,

이상하다는듯 고개를 살짝 갸웃하긴 했지만 더 캐묻지는 않은채 펠릭스형님이 나간뒤 나는 접대용 테이블위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긴장이 사라지니까 저절로 다리가 풀려버려 테이블위에 허물어지듯 엎어지자 바로 아시리안이 투덜거렸다.

“왜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만둬, 또 그 얘기야? 피곤해.”

테이블위에 흐물흐물 늘어진채 속삭이자 내어깨위에서 폴짝 내려온 아시리안이 테이블위를 왔다갔다 거리며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이제 공격시작~이라는 준비태세에 펠릭스형과의 일에 지쳐버린 몸에 벌써부터 피곤이 밀려든다.

“일부러 귀찮은 짓을 해놓고 이제와서 피곤하다고 하는거냐?”

이렇게 아시리안이 투덜거리는 이유는 내가, 아니 우리가 처음부터 펠릭스형이 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아시리안의 마력으로 반지가 있는 곳이 보였기 때문, 황금벌레(야나카황자, 아니 황제님, 미안해요)에게 곧장 가면 되지 왜 쓸데없이 붉은 벌레(펠릭스형도 미안)에게 들려야 하냐고 닦달을 해대는 통에 공간이동으로 궁에 몰래 들어오기전부터 티격태격했던 거다.

“아직 붉은 벌레놈에게 미련있어서 그러지? 솔직히 말해봐. 화 안낼테니까”

독수리주제에 테이블을 한쪽 발로 탁탁 내려치면서 퍽 인심쓰듯 하는 말에 나는 속으로 웃었다.

아시리안, 이 순 거짓말쟁이, 그렇다고 하면 온갖 변태짓을 다해가며 들들 볶을 거면서.

“그 붉은 벌레놈이 보고싶었다고 당장 불란!!.. 흠.흠... 말을 해보라니까?”

화를 벌컥 내려다가 간신히 참아내고 은근슬쩍 살살 꼬시려는 말투에 .. 정말이지 웃음이 나왔다.

“그래. 보고싶었어.”

당장 불라고 했으면서 막상 그렇게 말하자 테이블을 한쪽발로 탁탁 치던 것도 잊고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는 독수리 아시리안의 눈을 마주보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형이니까 보고싶은게 당연하잖아.”

“그것뿐이냐?”

아시리안, 의심도 지나치면 병이라고 생각해... 라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흐응.정말 그것뿐이라 이거지?”

의심스럽다는듯 내리깐 눈초리로 나를 요리조리 훑어보며 도저히 못믿겠다는 말을 하자 정말이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건.. 일부러 그러는거라고 밖에 볼수가 없다. 지난번에 옆에 있겠다는 말을 끝까지 안한것에 대한 보복성 갈굼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지만.... 그속에 살짝 진심이 있는것도 같다. 이 바보변태.

“돌아가서 보자”

은근히 의미심장한 말투에 심장이 덜컹했다. 보자니, 뭘?

“보,보긴 뭘보겠단 거야?”

“호오~ 왜 그렇게 더듬거리지? 무슨 상상했기에?”

아.. 정말 못됐다. 창피해..열오른 얼굴을 테이블아래 숨기고 팔로 감쌌다.

“아..아무것도 아냐.”

“얼굴이나 보여주고 얘기하지?”

“무슨 얘기를 자꾸 하라는거야.”

“두고 보자는 말에 어떤 상상했는지.”

빨개질대로 빨개져서....이제 정말 창피해서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

보겠다는 말에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정말 말그대로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계단에서 자주빛 시트가 벗겨져 내려간채 아시리안이 다리사이를 벌리고 그 아래를 보던.. .. .아,차..창피하다. 정말....절대로..주..죽어도 말못해!!

아시리안의 마수에서 나를 구해준것은 그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반지를 가지러간 펠릭스형이 오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야말로 반갑게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섰고 아시리안이 그런 내속을 안다는것처럼 투덜거렸다.

[말을 안해주니까 점점 더 궁금해지는데..]

끄..끈질기다. 왠만하면 좀 포기해줘..  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을때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있어서 조금 놀랐다. 아..여긴 펠릭스형이 묵고 있으니까 당연히 펠릭스형님을 찾아왔겠구나, 라고 뒤늦게 수긍하고 있을때 남자는 의아하게도 나에게 용건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초대장을 들고서..

“아르휜님이시죠? 레오포드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펠릭스는 가야할곳으로 곧장 가지못했다. 아르휜을 남겨두고 태연하게 나오긴 했지만 부서질듯 격통이 이는 심장을 한손으로 누른채 닫힌 문에 등을 기대야만 했던 것이다. 그만큼 아르휜이 찾아온것은 충격적이었고 아르휜이 했던 말은... 했던 말은... 펠릭스의 이성을 단번에 무너뜨릴만큼 아슬아슬했다.

확, 돌아서 열고 들어갈듯 닫흰 문의 손잡이를 콰직 쥐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도어손잡이를 돌릴수도, 문을 열수도 없어 손만 부들부들 떤채 펠릭스는 문에 이마를 천천히 기대었다. 이 문 너머에 아르휜이 있다. 찾아헤매던 녀석이 있는데도.. 그 얼굴을 보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반지를 찾으러 왔다는걸 알게 된순간 어깨를 와락 붙잡고 격하게 흔들고싶어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어야했다.

아직도 사랑타령이냐!! 설마 그 마족을 아직도 사랑한다고 헛소리나 지껄이려고 온것이냐!! 정말로 그 마족을 사랑했던 것이냐!! 라고..  절규하듯 묻고 싶은걸 참아내느라 지금역시도 문에 댄 주먹이 떨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한번도 미워한적 없다고 말하는 녀석에게.. 자신을 지키기위해서 였다는걸 알고 있다고 말하는 녀석에게.. 아니다, 라고 말할수 없었다. 질투심이었다고,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잔혹하게 벌주고 싶어서 미쳐있었던 거라고,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미워할 수가 없었다고?..

나는 그 시간동안을 내내 증오했다. 너를.. 그리고 나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아직도 내 손안에는 네녀석의 피냄새가 묻어있는데..

생각이 달랐을 뿐이라고?..

아니, 너에 대한 마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꽉 쥐고있던 손잡이에서 천천히 손을 뗀채 닫흰 문을 한참 바라보던 펠릭스는 이내 한걸음 두걸음 물러서다가 몸을 돌렸다. 스르륵 돌아서며 펠릭스의 입가에는 체념과도 같은 쓰디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런데.., 너는 내게 기회조차 주지 않는군..

이제야 겨우 인정하게 되었는데..이제 미안했다고 말할수 있을것 같은데..

용서를 구하며 무릎을 꿇을수 있을것 같은데..

너는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다는 말로 사과조차 할수 없게 만드는구나.

황금무늬가 그려진 카펫이 길게 깔린 복도를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펠릭스는 걸음을 멈칫 멈추었다.

그러나 이제 잊을수 있을것 같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너의 지독히 슬픈 눈동자를..

이제 지울수 있을것 같다.

너를 두고 나오면서 등뒤에서 메아리쳐 들려오던 공허한 웃음소리를..

지금 너는 내가 지금까지 너에게서 한번도 볼수 없었던 얼굴로 웃고있으니까.

지난 일이라고 그렇게 환하게 웃고있는 너에게 과거의 시간을 돌릴수는 없겠지.

그걸로 된거다. 나는 아직도 진창을 구르고 있다고 절규할것도 분노할것도 없다.

이제 나역시 그때의 일을 과거로 돌리려고 노력할수 있을것 같으니까.

서글픈 미소를 지은채 바닥을 향해있던 펠릭스의 시선이 천천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반지를 찾아주겠다. 그게 내가 너를 위해 할수 있는 유일한 사과의 방법이라면,

야나카황자가 머무는 곳으로 가기위해 꺽어지는 복도를 돌던 펠릭스는 반대쪽에서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약점이라도 쥔양 기고만장해 공작부인이 되고자 야망을 불태우는 여자가 반대쪽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에리카 라이에이드!!

원하는대로 약혼이라는 형식을 취해준것은 여기까지였다. 야나카황자가 황제에 오르는 이상 그때일로 에리카에게 발목을 잡히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책임을 라이에이드가에 되갚아줄것이다.

아르휜을 해치려하고 레오포드가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한 계략에 대한 대가는 저여자로 하여금 앞으로 톡톡히 치르게 해줄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발톱보다는 미소를 보여야겠지, 안그런가. 레이디 에리카, 현재의 약혼녀여.

“페..펠릭스?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양볼에 홍조를 띄운채 당황한 것처럼도 보이는 모습에 펠릭스는 고개를 반쯤 숙여보였다.

“레이디 에리카야말로 무슨 일이십니까.”

“호호, 미래에 레오포드가의 안주인이 될 사람에게 너무 딱딱하게 구시는거 아닌가요. 펠릭스?”

그건 두고봐야 알 일이겠지. 레이디 에리카.

인간의 일이란건 언제 어느때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는걸 아는가? 확실한건 없는 법이지. 그대가 나의 약혼녀인건 오늘까지만이 될수도 있다는걸 포함해서.

펠릭스는 에리카가 나온 복도쪽을 힐긋 바라보고 다시 에리카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아버지를 뵙고 나오는 길인것 같은데.. 벌써부터 비밀을 가지시니 조금 서운한 생각이 드는군요”

웃으며 칼을 간다는 말이 어울릴 법한 상황이다. 그러나 펠릭스는 에리카가 레오포드공작에게 무슨 얘기를 한건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지도 못하게 펠릭스를 만나서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또한.

“서운할 거 없답니다. 펠릭스. 원래 세상에 비밀이란게 없는 법이니까요.

그럼. 황제즉위식때나 인사드리게 되겠군요. 그때 만나길 기다리겠어요.  펠릭스.”

지나치게 서두는감이 없지 않아 있는 느낌으로 서둘러 말한 에리카가 떠나간후 펠릭스는 에리카가 나온곳을 힐긋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아르휜에게 아버지와 만나 인사라도 드리라고 했지만 둘이 만나는게 좋은건지까지는 확신할수 없었다. 이미 아르휜에게 많이 실망하고 있던 아버지가 크로멜성에서 마물들에게 당해 죽었다고 알려진 아르휜을 과연 반갑다고 맞이해줄것인가...는 자신이 없는 문제.

건물에서 빠져나오자 환한 태양빛이 비춘다.

잠시 멈춰 서서 푸른 하늘에 비추고 있는 황금빛 태양을 바라보며 펠릭스는 오래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고개를 치켜올린채 눈을 살짝 감고 가만히 서있었다. 태양이 펠릭스의 붉은 머리카락을 반짝반짝이는 황금빛으로 연하게 물들여갔다.

너는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는거냐. 그렇다면 원하는대로 살아라. 아르휜.

더는 그 지하감옥안에 가두어두지도, 너를 붙잡고 있지도 않겠다.

치켜올린 고개를 천천히 내리던 펠릭스는 감은 눈을 천천히 뜨다가 멈칫,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빠져나온 건물을 돌아보았다. 이상하게 뭔가 걸린다. 도망치는 것처럼 허둥지둥 사라지던 에리카의 모습이 소화안되는 음식처럼 껄끄럽게 걸렸다. 도망치는 것처럼.. 무엇에서..?.. 라고  생각한 순간 펠릭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에리카 라이에이드, 아르휜이 온것을 알아채고.. 설마, 아버지에게 말한 것은 아니겠지?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쫒기는 것처럼 몸을 돌려세우고 빠져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던 펠릭스는 다시 멈칫, 멈춰설수밖에 없었다. 건물의 벽을 등에 지고 여유롭게 팔짱까지 끼고있는 남자가 방해하듯이 펠릭스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하워드. 아르휜과 같이 왔던 건가..라고 생각하면서 펠릭스는 프란이 무슨 볼일인지 생각하기 보다는 불길한 예감쪽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자연히 마음이 급해져서 서두르게 된다.

“프란시스 하워드. 내게 볼일 있나?”

“당신에게 볼일이야 아주 많고도 많지. 펠릭스 폰 레오포드”

시시한 이놈의 시비에 신경써줄 겨를이 없다. 프란의 옆을 스쳐 지나가려던 펠릭스는 몇걸음 못가 멈춰설수밖에 없었다. 등뒤에서 느껴지는건 차가운 살기였기 때문이다. 의도가 확실한 살기를 내뿜으며 프란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던가? 등을 보이는걸 봐주는건 그때뿐이었다고.”

등을 기대고 있던 벽에서 천천히 몸을 떼어내며 여유있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내가 한말 잊었어? 유감인데. 나는 한번도 잊은적이 없었거든.

다시 만나면 반드시 죽여주겠다. 그 때문에 아르가 울게되어도..라고 했었지.

지금이 바로 다시 만나는 반가운 순간이다. 이 비열한 개자식아!!!“

미간을 찌푸린채 뒤를 돌아보는 펠릭스를 향해 잔인한 흥분감이 깃든 얼굴의 프란이 검을 꺼내들고 달려들고 있었다. 바람이 휘몰아친다. 그 바람에 맞서서 재빨리 검을 꺼내 공격해온 프란의 검을 막으며 펠릭스가 소리쳤다.

“지금은 이럴 시간이 없다!!!”

급한 사정따위 당연히 신경쓰지 않는 프란은 공격을 막고만 있는 펠릭스에게 웃으면서 소리쳤다.

“웃기시네, 도망치지마라, 펠릭스!!! 그냥 죽어, 얌전히 죽어라!!!”

“이 바보같은 !!!!!!!!!!”

[나혼자 갔다올게]

문앞에서 심호흡을 크게 하며 말하자 아시리안은 수긍을 못하겠다는 분위기였다.

[아버지잖아. 조금 길게 대화할지도 몰라. 아시리안이 옆에 있으면 신경쓰이니까..]

부탁해..라고까지 말해서야 아시리안은 내 어깨위에서 날아올랐다. 허공에 뜬채 못마땅한듯이 바라보는 아시리안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미소를 지어주고 다시 심호흡을 크게 했다. 펠릭스형을 만나기 전보다 서너배는 더 부담스럽고 긴장감이 든다. 문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다가 아시리안을 돌아보았다.

아시리안은 여전히 자기를 떼어놓고 가는 내가 불만인듯하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등뒤를 지키고있다. 그 모습에 조금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는걸 느끼며 나는 속으로 살짝 중얼거렸다. 다녀올게.라고..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버지, 레오포드공작의 얼굴을 보기도전에 무언가가 번개처럼 스쳐지난다. 검이다..라고 인식하는 순간 고통보다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를 벤 상대를 멀겋게 바라보았다.

그 믿어지지 않는 얼굴은.... 다..당신이....왜..?

“수치도 모르는 망나니같으니, 마족과 더럽게 놀아나고도 감히 여길 찾아와?”

분노해서 씩씩거리는 숨을 들이마시며 피가 흥건한 검을 손에 쥐고있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레오포드공작에게 보고싶었다고 말하기도 전에.. 잔혹하게 칼을 댄 사람은 바로 그 장본인...

“시체를 치워라,”

시체? 시체라고? 아냐.. 난, 살아있어. 살아있어...

그러나 몸과 머리가 분리되었는데도 살아있다고 말할수 있을까..?

아르휜.. 아니, 내 몸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버지인 레오포드공작에게 목이 잘려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레오포드공작의 명령을 받고 처음에 나를 데리러왔던 그 남자가 시신을 수습하려던 순간 방안에 광풍이 휘몰아쳤다. ...아..아시리안?!!

“너..너는 누구냐!!”

레오포드공작이 경악해서 소리쳤지만 몸과 머리가 분리된 시신을 보고 분노한 아시리안은 제정신이 아닌것처럼도 보였다. 처음 시신을 수습하려고 몸을 굽히고 있던 남자의 몸뚱이가 휴지조각처럼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저만치에 서있던 다른 사내가 아시리안의 손에 자석처럼 빨려들어온다. 아시리안의 눈은 광기에 찬 것처럼 미쳐있었다.

손아귀에 빨려온 남자의 머리통이 으스러지고 으스러지는 순간 그 몸도 같이 걸레처럼 내던지고 아시리안의 흉폭한 시선은 다른 희생자를 찾아 움직인다. 안돼. 안돼. 안돼. 그러지마. 라고 말하고 싶은데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이러다간 아버지까지 죽이고 말거야!! 방안에 있던 또 다른 사내역시 거의 걸레처럼 찢겨졌다는게 맞을만큼 잔혹하게 살해된후 마지막 희생자쪽으로 아시리안의 흉폭한 시선이 꽂힌다.

어느새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채 벌벌 떠는 아버지에게로 천천히 다가가는 발을 붙잡고 싶은데 움직일수가 없다. 안돼, 아시리안, 안돼, 안돼, 그러면 안돼!!!!!!!!!!!!!!!!!!!!!!!!

핏물로 흥건한 아시리안의 손이 아버지의 머리통을 쥐는 순간이 지나고 몇초의 시간이 흐른다. 아시리안의 손은 그전처럼 쉽게 바스러트리지 못한채 무언가를 간신히 참는것처럼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 아시리안.... 아시리안.. ..제발..

“...너의 존재가...그에게 조금의 의미가 있었슴을 감사해라. 그렇지 않았다면!!”

핏물로 흥건하게 묻은 머리통을 천천히 손에서 떼어놓는 팔은 분노를 참지 못해 여전히 부들부들 떨린다.. 아시리안이 몸을 돌린후에도 레오포드공작..아버지는 숨을 컥컥 몰아쉬며 공포에 질려있었다.

그쪽에 관심을 끄고 아시리안이 오는쪽은 아.. 내게다. 따스함이 식지않은 몸을 어루만지고 눈을 감지도 못한채 분리되어 버린 머리를 끌어안는 아시리안의 어깨가 들썩이며 떨린다.

울고... 울고 있어?.. 마족인 아시리안이... ..?

누군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벌컥, 문을 열지만 차마 들어오지 못한채 멈춰선다. 프란..?.. 프란이 여기에 어떻게.. 펠릭스..형도 같이....왜.. 사이가 안좋은 둘이 같이 오는걸까.. 하다가 나는 다시 아시리안에게 시선을 맞췄다.

꽉 다물린 입가에서는 가슴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것같은 분노와 고통, 슬픔에 찬 울부짖음이 새어나오고 양손으로 피투성이의 머리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눈은 잔뜩 일그러진채 푸른 눈물을 쉴새없이 흘리고 있었다.

눈물이 아니다..피다... 저건 아시리안의 피다..다크블루의 눈동자에서 델것처럼 뜨거운 푸른 피가 머리만 끌어안겨져있는 내게로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가슴이 산채로 뜯기는것처럼 아프다.. 심장을 뜨거운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울지마.. 아시리안..

나역시 비통함에 젖어 울부짖는다. 그러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제발 울지마.. 아시리안..

울부짖는 아시리안을 끌어안아주고 싶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無..

나는 무로 돌아간걸까.... 이게 죽음이라는걸까..

그렇다면 죽음이라는건 정말 끔찍한거구나. 정말 끔찍해.

고통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알수가 없어.

슬픔을 어떻게 견뎌내야 좋을지 알수가 없어.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말이 되어 나오지가 않아.  울지마..라고,

제발 그렇게 슬퍼하지 말라고.. 한마디만 전하고 싶은건데.. 소리를 건넬수도 없어..

시야가 흐리다.

아니, 흐려진건 아시리안이 내머리를 끌어안고 비통하게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

울지마, 아시리안.. 제발.. 부탁이니까..

그..렇..게 울..지..마...목소리도 점차 사그라든다.

울..지..마..ㅇ....ㅏ .....ㅅ.......l.......ㄹ...........o....

이것이 죽음.. 죽음이라는 것.

나는 죽었다.

에필로그.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인다. 까마귀처럼 까만 날개가 달린 소년이 뭔가 불만스러운 것처러 발밑의 죄없는 돌을 툭툭 차고 있다. 어...아시리안..?..조금 어리지만.. 아시리안을 닮았네..생각하고 있는데 위를 힐긋 쳐다본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뭘 본거기에 저렇게 기분 좋은 얼굴을 하는걸까 .. 그 시선을 따라 올라가다 좀 놀랬다. 하늘을 날고있는건 나였기 때문이다. 붉은 머리카락을 바람결에 휘날리며 정말 기분좋은 것처럼 웃고있는건 나의 모습.. 그리고 아시리안과 다른 하얀 날개가 커다랗게 펼쳐져있다.

....꿈속이구나.. 꿈을 꾸는거구나..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사이에도 꿈속의 나와 아시리안은 서로 만나고 있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까만 날개와 함께 두팔을 하늘쪽으로 펼쳐든 아시리안의 품속에 하얀날개를 접어내리며 내가 안긴다.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미안,기다렸어?-

-늦었으니까 벌받아.-

저렇게 심술피우는것까지 어쩌면 저렇게 판박이일까 싶은데..내가 이마에다 입맞춤을 하자 귀가 새빨개진다. 시선도 못마주치고 고개를 내리며 헛기침을 하는게.. .. 아시리안도 저렇게 귀여울때가 있었네.. 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내 날개가 마음에 안들어. 마력이 좀 더 강해지면 감춰버릴거다-

커다란 까마귀같은 날개는 확실히 좀 보기 그렇지만.. 그래도 지금건 좀 귀여운데..그건 꿈속의 나도 비슷한 생각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왜 그런 소리를 해?-

쭈그리고 앉은 아시리안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너와 똑같은 색이 아니라서 싫어. 아나이스“

아나이스..............?..... 아나이스...라고...?

멍하게 생각하는데 어디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멀리서 들려도 애달프게 들릴만큼 서글프다. 사이좋게 앉아서 뭔가를 얘기하고 있는 아시리안과 내모습에서 시선을 치우고 뭔가 들릴듯 말듯한 소리에 귀를 귀울였지만 잘 들리지가 않아서 그쪽으로 몇걸음 걸어갔다.

살짝 돌아보자 몇걸음만 걸었을뿐인데 아시리안과 내 모습이 보이는 광경은 한참 멀어져있었다. 왠지 아쉬워져 그쪽으로 몸을 돌리려던 순간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누가 나를 부르는 거지..?

아무것도 없는 텅빈 공간을 걸어가자 저만치에 작은 빛이 새어나온다. 거기에서 소리가 들리는 건가..라고 걸음을 서둘러봤지만 빛이 새어나온 곳은 황량한 모래벌판.. 뭐야. 이런곳에서 헤매고 싶지 않아. 다시 돌아보려던 순간 나왔던 곳은 없어지고 주변엔 온통 황량한 사막바람만 휘몰아친다.

어디로 가야하는건지 .. 어디에 길이 있는건지 알수가 없어 멍하게 서있다가 한걸음 떼고 다시 한걸음 걸었다. 걸을때마다 깊게 쌓여있는 모래가 발을 잡아 어둠속으로 끌어당기는것같다. 빠져들면 다시 나오기 힘들것같아서 한걸음 한걸음 열심히 걸어가는데 어느새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온다.

힘들어..그냥.. 쉴까?... 그냥.. 여기 누울까..

모래가 될까. .. 미친듯이 부는 바람이 될까..... 어둠속에 빠져버릴까..

멈춰서버린 귓가에 다시 희미하게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야.. 부를거면 크게 불러봐..

너무 작아서 들리지가 않아. 뭐라고 하는지 안들려..

[....으....ㄴ.......]

무슨 소리인지 좀더 크게 말해. 안들려. 안들린다니까.

[....ㅈ......]

[..은준...]

아.. 내이름이다. 내이름을 부르고 있어..

발을 몇걸음 절로 내딛다가 멈칫 멈췄다. 왜 멈춰버렸는지 조차 알수 없는채로 ..

왜 이렇게 슬프게 부를까. 가슴이 아파. 하지만.. 그쪽으로 가기가 무서워. 무서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게 된다. 걸어온 걸음만큼 한발자국 뒤로, 또 한발자국 더 뒤로 옮기자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그만큼 멀어진다. 들리지 않는다. 그래, 좋아. 이걸로 됐어. 마음이 아프지도 않고. 편해. 이걸로 된거야.

“병신”

등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보자 사막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서있는건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르휜의 모습.. 나의 모습, 그러나 낯설다. 차갑고 낯설게 느껴지는 시선이 움찔, 하는 나를 비웃듯이 쳐다본다.

“너는 병신이야. 꼴도 보기 싫다. 그러니까 그만 가.”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어. 가라고? 어딜 가라는 거야. 난 갈데가 없어.

“어떻게 너같이 둔하고 멍청한게 내 반쪽일수가 있지? 정말 이해가 안가. 생긴것도 지지리 못생겼고.”

무슨 소리야. 하면서도 나는 내가 어느새 아르휜의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는걸 알았다. 키가 작아진 것이다.

“지겹고 끔찍해서 죽는줄 알았다. 재수없으니까 빨리 꺼져”

아르휜.........? ... 아르휜? 몇걸음 다가서자 곤란하다는 얼굴로 몇걸음 뒤로 물러선다.

“가, 더 살아. 보시다시피 이쪽은 끝났으니까 네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끝났다니, 선택이라니, 증명하라니, 무엇을? 무엇을?

“죽고 못사는 사랑”

사랑?

“지지리 꼴사나운 사랑”

사랑?

“빌어먹게 끔찍한 사랑”

사랑?

“그것 때문에 인간이 되길 택한거잖아.”

택하다니, 뭘?

“그러니 가서 살아. 그 죽고 못사는 꼴사납고 끔찍한 사랑타령이나 하면서 살아”

혼란스러운 머리는 아르휜의 말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왠지 마음은 알것 같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르휜이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비틀어진 말과는 다르게 따뜻하다는것도....

“가라, 하은준”

꼴도 보기 싫다는듯 말하면서도 왠지 그 시선에 아쉬움이 깃들어있다. 나도 아쉬워. 헤어지는게 아쉬워. 라고 알수없는 생각이 든다. 아르휜이 다시 재촉하듯이 말해왔다.

“빨리 가.”

재촉하는 시선에 쫒기듯이 몸을 돌리다 멈칫, 멈춰서서 아르휜을 돌아보며 말했다.

“잘있어, 아르휜 ”

“그래”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과 달리 환하게 웃는다. 잘가라고 손까지 흔든다. 속시원하다는듯이.. 보이기도 하는데 얼핏 서운하게도 보이는 이상한 웃음... 이상한 미소..... 내 감정을 공유하며 내가 짓고있을지도 모를 표정을 고스란히 비춰보이는 얼굴.. 나의 반쪽, 나의 그림자..아르휜...

“잘있어”

.....안녕.

삐....삐....삐....삐....삐...

규칙적으로 귓가에 일정하게 소리가 울린다. 병아리가 삐약삐약하는것 같다고 생각하며 숨을 쉰다. 눈을 뜨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눈은 이상할만큼 굳게 잠겨있었다. 무겁게 늘어져있는 손을 누군가가 잡아올린다. 아.. 아시리안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잡은 손은 여리고 부드러웠다. 여자의 손처럼...

“... 너무 오래 자는 구나. 교통사고 나고 ...벌써 1년이 지났어.... 1년동안이나 잠들고 싶을만큼..그동안 힘들었니? .. 우리가 너를 너무 많이 힘들게 해서.. 그래서 일부러 일어나지 않는거니? ..걱정하지마.. 니아빠도 후회많이 했어. 은호도 걱정많이 하고 있단다...더이상 괴롭게 하지 않을테니까.. 눈 좀 떠봐..응?”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여기, 어디..?.. 희미한 소독약 냄새가 나는걸 보면 병원인것 같은데 왜 내가 여기에 누워있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혼란스럽고 머리가 어지러운데 잡혀진 손에 숨결이 느껴지고 뜨거운 액체로 뒤덮이며 누군가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준아.......제발.. 눈 좀 떠...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어..”

엄마..?...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걱정어린 소리.. 한번도 잡아보지 못한 엄마의 손.. 나를 위해 흘리는 눈물...

“...그만 일어나..흐윽....흐...”

엄마가 나 때문에 가슴이 타틀어가는것처럼 애끓게 울고있다.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이상하게 기쁘다..

“은준아..흐흐흑.....은준아....”

엄마..미안해요. 울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아프게해서 미안해요. 울지 말아요. 나 때문에 울지말아요..

나역시 울고있는데 감은 눈에선 눈물 한방울조차 흘려지지 않은채 엄마에게 잡혀진 손만이 흠뻑 젖어들어갈 뿐이었다.

까물까물한 의식속에서 머리를 쓸어올리는 손이 느껴진다. ....

엄마가 아직도 가지 않고 옆을 지키고 있는건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은 이내 이마를 장난치듯 슬쩍 문지른다. ..

그리고 뺨을 가만히 가만히 쓰다듬는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아........이건 내가 아는 손이야.. .. ... 아는 손이야..

참참히 침몰해 들어가는 깊은 바닷속처럼 고요한 어둠에 감싸여

약하게 숨을 내쉬는 입술을 매만지는 손 끝에 열기가 묻어 들어온다..

뺨을 살살 쓰다듬는 손은 조심스럽고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날것같다.

.........아시리안..... .... 아시리안이구나...

꿈을 꿨어. 아주 이상한 꿈을 꿨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

아시리안, 너와 내가 나온것 같은데.. 이상하게 생각이 나지 않아..

“...정말 봐줄거라곤 하나도 없는데..

그 고생을 해가며 차원의 문까지 넘어오다니 내가 미쳤지.

이 녀석은 한심하게 실컷 늦잠이나 자고 있는데....”

이건 아시리안의 목소리다..꿈..? 병원에 누워있는 것도 꿈을 꾸고있는걸까..

그럼....눈뜨지 않을래. 싫어.

눈뜨면 사라지고 없을까봐 무서워. 두려워.

이대로 잠시만.... 눈을 감고 있을래..

편안하고 안락한 꿈을 꾸는것처럼, ...

행복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는 것처럼,

하지만 언젠간 눈을 뜨고 깨어날 수 밖에 없다는걸 안다.

아무리 행복하고 편안하고 아름다워도 꿈은 꿈일 뿐이니까

슬프고 서글프고 가혹하더라도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거니까.

그래도 깨어났을때 아시리안,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어.

지금 들리는 이 선명한 목소리처럼 나를 기다려줬으면 좋겠어..

귓가에는 아시리안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꿈속에서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그만 깨어나지 그래. 기다리기 지루하다.”

레오포드가의 귀공자 (외전)

오랜 꿈을 꾸고 일어난 사람처럼 힘겨운 눈을 떳을때 처음 보인것은 병실의 하얀 천장, 마침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길래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엄마가 쟁반에 물과 컵등을 담아 들어오고 있다가 나를 보고 멈칫,멈춰선다. 시선이 마주친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눈앞이 흔들린다. 사물이 흔들리고 엄마의 모습이 푹, 꺼져버린다 싶었지만 챙그랑, 손에 든 쟁반을 와르륵 쏟아내며 주저앉을것 같은건 엄마였다.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을 한손으로 가리고 울고있다. 울지마...울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은데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아서 눈만 감았다가 다시 한번 뜨는 사이 엄마가 울면서 병실을 뛰쳐나간다.

“간호사!!! 의,의사선생님!!! 여기,여기 좀 봐주세요!!!!!!!”

가지 마세요. 등돌리고 가지 말아요. .. 손을 뻗고 싶지만 움짝달싹 하지않는 팔과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목소리 때문에 나는 눈만 깜박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얼마후 사람들이 뛰어오는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의 손이 다가오는데 내시선은 거의 문가에 밀려나다시피한, 아니 더 이상 가까이오지 않는 엄마쪽으로 향해있었다.

서글프고 아픈 시선으로 보면서도 보듬아 줄수 없나요, 이쪽으로 와요..

먼저 저를 안아줄수는 없나요..이만큼의 거리가 무슨 의미인지 말해줘요.

그렇게 울고있는게 내가 깨어나서 기쁜거라고.... 그렇게 말해요. 엄마,

오랜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와줘서 기쁜거라고.. 그렇게 ... 그렇게... 생각해도 되나요..?

몸에서 여러개의 선들이 떨어져나가고 .. 며칠인지 모를 시간들이 흐르고... 차츰..차츰 생각들이 돌아오면서 남겨놓고 온 것들이 가슴을 아프고 먹먹하게 만들었다. 마음은 아직도 그쪽에 있는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돌아세워야 하는것처럼....아프다. 슬프다. 선명한 괴로움이 가슴깊숙이 응어리져 끊임없이... 끊임없이...피를 흘리게 한다.

펠릭스형은, 프란은 어떻게 되었을까.. 마지막에 본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표정만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사이가 안좋은 두사람이 왜 나란히 들어서던 것일까, 라는것 보다 더 신경쓰이는건 방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복도쪽에서 경악에 찬 시선으로 멈춰버린 두사람의 표정.. 그리고, 아르휜의 아버지, 레오포드공작님이 바닥에 주저앉은채 공포에 질려 숨을 컥컥 몰아쉬던 모습...

그리고...... ..... 그리고... ... ......그리고.......아시리안... 나의 아시리안..

꽉 다물린 입가로 차마 모두 막아내지 못한.. 가슴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것같은 분노와 고통, 슬픔에 찬 울부짖음..부들부들 떨리는 양손으로 피투성이의 머리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푸른 눈물을, 핏물을 쉼없이 쏟아내며 울부짖던 아시리안..

미안해,

그렇게 울게 해서 미안해.

그렇게 아프게 해서 미안해.

그렇게 괴롭게 해서 미안해.

그렇게 힘들게 해서 정말.. 미안해.

몸은 이렇게 하은준으로 돌아왔어도.. 마음은 아직 그 자리에서 벗어날수가 없어서 눈가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마음을 괴롭게 하는건 아시리안이 슬퍼하던 모습이었지만.. 심장을 옥죄는 것처럼 슬프게 하는건 이제 다시는... 다시는 못만나는건가..라는 생각. 아직도.. 생생한데.. 나를 안아주던 팔이.. 침대에서 유달리 심술맞게, 그리고 다정하게 굴던것도.. .. 머리를 쓰다듬어주던것도.. 키스하기전엔 뺨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리던 그 버릇도 .. ...  이렇게나.. 이렇게나 선명한데....

깨어나지 말것을, 눈을 뜨지 말것을, 일어나지 말것을,

이렇게 아픈게 현실이라면, 이렇게 고통스러운게 현실이라면,

계속 꿈속에서 헤매어도 좋았을것을,

이렇게 볼수 없는것보다, 아시리안을 못본채 살아가야 하는것보다...

영원히 깨지 않을 꿈을, 죽음이라는 안식을, ........

차라리...바래... 바라고.. 있어.

끊이지 않고 샘솟는 눈물을 닦아내는 손이 느껴진다. 조금 떨림을 품고 있는 손이지만 눈을 뜨지 않은채 울고있으니 .. 손의 주인이 슬픈 목소리로 말해왔다.

“울지마.. 이제 이렇게 살아났잖니. .. ”

목소리는 가까이에서, 머리위에서 들려오지만 마음은 한없는 슬픔으로 울부짖으며, 서러움으로 떨리고, 뜨거운 물기는 홍수라도 난것처럼 다시 얼굴을 적신다.

“니아버지도, 형도, 나도.. 이제 널 힘들게 안할거야... 약속해.. 조금 있으면 금방 건강해져서 다시 학교도 가고 친구들하고도 다시 만날 수 있어, 우리 은준이가 좋은 친구들을 뒀더구나. 네가 누워있는 1년동안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병원에 오던걸.... 다시 일어날 수 있을거야. 혼수상태가 길었다가 이렇게 깨어난것도 기적이라고, 점차 회복할거라고.. 의사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러니까 이제 아무 걱정 하지마. ”

그래서가 아니예요. 그래서 우는게 아니예요.

현실이 가깝게 느껴지는 만큼.. 그리워하던 것들은 멀어지기만 해서..

이렇게 살아있다고 실감하는 만큼.. 머물고 싶은 꿈은 멀어지는것 같아서...

괴롭고 안타까운 마음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수가 없어서..

이렇게 가슴이 아픈걸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래서...그래서...숨이 막혀.... 숨이 막혀서 견딜수가 없어..

살아난건 분명 좋은 거지만, 엄마가 나를 미워하는게 아니라는걸 알아서, 아버지도 은호형도 나를 미워하기만 한것은 아니라는걸 알아서 기쁘지만, ..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해. 가슴속에서 아시리안이 나를 부르는데, 나를 부르며 울고있는데, 그래서, 내 마음도, 내 심장도, 갈기갈기 찢어져나가는것 같은데.. ..

“.. 은준아, 울지마.... 내가 잘못했어... 어린 너에게 못할 짓만 하고... 엄마가 잘못했어.”

엄마의 목소리에 슬픈것도 같고 기쁜것도 같은 감정들이 눈물과 함께 묻어났지만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고 시선을 부딪치면 다시.. 물러서버릴지도 모른다고 , 아니 아마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분명 내가 깨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랬고 나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엄마는 여전히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걸 불편해할거라고.. 그때 처음 눈을 떳을때 기쁨과 회한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엄마는 나에게 와서 나를 안아주는대신 의사를 부르기위해서 등을 돌렸으니까.

슬프게 나를 보면서 문쪽에 서있는 엄마를 보는 순간 그만큼의 거리는 늘 그렇게 함께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힘들게 하지도 괴롭게 하지도 않을거라고 하지만.. 잊어버릴수는 없는거라고, 은호형처럼 나를 편하게 대할수는 없을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괜찮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에는 그렇게 태어난건 내 잘못이니까 벌을 받는건 당연하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받지 못하는건 당연하다고, 버림받는건 당연하다고, 가족들을 괴롭히는 녀석이니까 심하게 때려도 참아야하고, 미움받아도 어쩔수 없는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거다.

하지만 이제 조금 알것 같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것을.. 그렇게 태어난건 내 잘못도 아니었고 내게 온전한 애정을 주지 못하는건 엄마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와 은호형이 나를 보며 괴로운건 나역시 괴로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학대받는걸 참아온건 역시 올바른 방법은 아니었다는 것역시.. 조금 알것 같다.

그러니까 이제.. 다시 건강해지면.. 살 수 있을것같아.

그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지금은 울래요.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울게 해줘요.

시간이 지나면 다시 건강해지고..시간이 더 많이 지나면, 어떻게든 살아갈수 있을거니까.

외로움과 서글픔을 가슴속에 묻은채 그리움으로 남은 아시리안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어쩌면 다시 웃을수 있을지도 모를테니까.

똑,똑.. 문두들기는 소리가 들리고 엄마가 눈물을 닦아내며 문쪽으로 돌아섰을때라야 나는 살짝 눈을 뜨고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기억에 있던 모습보다 여위고, 마른 뒷모습을 조금 아프게 보다가 엄마가 다시 내쪽으로 돌아설까봐 얼른 눈을 감았다. 달칵, 문이 열린다. 누가 찾아온걸까..

“어서오세요. 선생님.”

습기를 머금은 목소리지만 억지로 밝은척 애를 쓰는 엄마의 목소리가 안타까웠다. 그런데 선생님이라면 누구....?

“좀 어떻습니까.”

“예, 보시면 알겠지만 많이 좋아졌어요, 아직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지만 하루에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답니다. 이게 다 그동안 꾸준히 은준이를 보살펴준 선생님덕분이에요.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문쪽에서 다시 내게로 오는 발자국소리와 함께 엄마가 하는 말을 들으며 ..의사 선생님과 같이 들어오신거구나.라고 멍하게 생각하는데 어느덧 침대옆에까지 온건지 우뚝 멈춰선다. 얼굴에 느껴지는 시선이 길게 멈춰있다. 묵묵히 내려다보는 시선에 얼굴이 간지럽다. 왜그렇게 본다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천천히 그리고 다정하게 쓸어올리는 손가락..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가락은 이내 이마를 장난치듯 슬쩍 문지른다. ..

그리고 뺨을 가만히 가만히 쓰다듬는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천천히..

아.........이건........!!.............지금 이 손의 감촉을 알아... 알고있어..

두근, 거리고 박동하는 심장소리에 맞춰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리움이 찰랑거린다.

“..아쉽군요. 이녀석이 눈뜨고 있는걸 아직도 못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꽤 오랫동안 눈을 떠주길 기다렸는데, 째째한 녀석같으니.”

이 목소리는......!!........하지만.....아냐.....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선생님도, 참...... 우리 은준이도 선생님께 고마워할거에요. 눈을 뜨면 제일먼저 선생님 얘기부터 해드릴게요.”

웃음까지 지으며 친근하게 대하는 엄마의 말에 그가 다시한번 대답해주길 애가 타게 기다렸다. 눈을 떠버리면 바로 확인이 되겠지만 무서워서 눈을 뜰수가 없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목소리는................. 목소리가....

“부디 그래주시길 바랍니다. 이녀석이 눈뜨길 오매불망 기다린 나머지 혼을 내주려고 잔뜩 벼르고 있다고 말입니다.”

짖궂고 장난기어린 말속에 섞여있는 조금의 진심어린 목소리... 이 목소리....그럴 리가 없는데, 없는데...아니라는걸 확인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뜰수가 없던 눈은 잠시잠깐 엄마와 말을 나누고 그가 돌아서려 하던때에야 겨우 떠졌다.

눈에 익은 뒷모습이 흐릿한 시야안에 잡힌다.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목소리대신 팔을 뻗으려 했지만 온몸이 묶여있는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다. 그러는사이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그는 문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기,기다려, 기다려줘, .. 제발 가지마, 부탁이니까 나를 한번만 돌아봐.. 아시리안, 아시리안..이야?.. 아시리안, 너.. 맞는거지..? .. 아시리안!!

의사선생님 복장을 한 그가 문을 완전히 나서는 순간 내심장은 안타까움으로 터질것 같았다. 그리고 뭔가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몸이 떨어져내린다. 딱딱한 병실바닥에 떨어져 부딪친 순간의 아픔보다 심장이 두근거리못해 터질것같은 마음이 들게한 쪽으로 온 신경이 쏠려 그쪽으로 시선을 어떻게든 돌리려하는데 엄마의 놀란 목소리가 비명처럼 들려왔다.

“은,은준아!!!”

괜찮아요. 그것보다.. 갔어요? 의사선생님.. 갔어요? 물어보고 싶은데 말은 커녕 고개를 돌리는것조차 할 수가 없다. 신체기관중에서 내의지대로 할수 있는건 하나도 없었다. 팔, 다리, 머리조차 내맘대로 움직일수가 없어서 조급해진다. 생각만이, 마음만이 미친듯이 활발하게 뛰고있는데 바닥에 떨어져내린 내몸옆에 누군가 천천히 내려앉는다. .. 엄마?

엄마가 아니.... 생각은 거기서 멈춰버렸다.

바닥에 쓰러진 몸을 안아올리는 익숙한 팔에 안겨지며 시선을 든 나는 눈의 깜박거림도 없이 눈앞의 그를 올려다보았고, 의사선생님은 나를 안아올리면서 놀란 엄마에게 침착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괜찮으니 걱정마시지요. 바닥을 구른 정도로 어떻게 되지는 않습니다. ”

안겨진채 들어올려진 몸은 침대에 다시 조심스럽게 눕혀지고 멍하게 바라볼뿐인 내눈을 들여다보며..의사선생님, 아니 아시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그렇지, 하은준?”

희미하게 연결된 영혼을 찾아 차원의 문을 넘었다고 말하며, 아시리안은 투덜거렸다.

“그런데 네놈은 한심하게 잠이나 자고 있었지”

언제나처럼 투덜거리는걸 들으면서도 나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내옆에 걸터앉아있는 아시리안을 올려다보고만 있었다.으슥한 어둠 때문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아시리안의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그 긴 머리카락은 어깨즈음해서 잘려 단정하게 묶여있다. 마족주제에 의사선생님이란건 또 뭐고, 그 안경은 또 뭐야...안어울린다기 보다 꽤 지적으로 보이는게 너무 잘어울려 ..

도무지 알수 없는거 투성이고, 궁금한거 투성이지만 ..그것보다는 다시는 못보는건가..라고 생각했던 아시리안을 만나서 ...그때 얼마만큼 가슴아파했었는지.그래서 지금 내가 얼마만큼 기쁜지.. 전하고 싶은데 말을 할수도 움직일수도 없어서 답답했다. 그 안타까움이 눈에 드러난건지 아시리안이 다시 웃으며 손으로 머리카락을 위쪽으로 쓸어넘기며 대신 말해준다.

“조급하게 굴것 없어. 기다려줄테니까,”

응..... 응... 아시리안.... 그래.. 알았어.

“하지만 이런건 안기다려도 되겠지?”

그게 뭔데? ... 동그랗게 뜬 눈으로 묻기도 전 이마에 가볍게 입술이 부딪친다. 코에 살짝, 입술에 살짝.. 그리고 내눈을 들여다보는 아시리안을 보며 나는 눈을 한번 깜박이다 천천히 감았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눈을 감자 입술을 부딪쳐온다. 조심스러울만큼 가벼운 입맞춤이 약간 아쉬우려는 찰나 입술사이를 가르고 말캉한 숨결이 들어왔다. 반응없는 혀를 끌어올리기전 입술을 연 상태로 한참동안이나 숨을 멈춘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가 뺨을 만지작거리기도 하면서 키스는 떨어질줄 모르고 길게 이어졌다.

입술이 점점 깊숙이 겹쳐지고 얽힌 혀의 움직임이 더없이 조심스러웠다가 격렬해졌다가 하는 변덕을 부리는 키스가 길게 이어질수록 내마음속에서는 안타까움이 흘렀다. 이렇게 키스를 받고 있는데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꿈은 아닐까, 라고 생각할만큼 두려워서.. 핏물로 엉망이된 머리를 끌어안은채 어떻게 할수 없는 아픔에 울부짖던 아시리안의 모습이 떠올라서.. 심장에서 피를 흘리는것처럼 아프고, 슬프고, 또 기쁘고, 감사한 마음에 감은 눈사이로 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참동안 맞붙어있던 입술이 떨어지는 느낌에 가만히 눈을 뜨자 얼굴이 흥건하게 젖을만큼 흘러내린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며 양쪽 뺨을 감싸온다. 그렇게 내얼굴을 양손으로 감싼채 아시리안이 한참동안 내 눈을 들여다보는데....그 다크블루의 눈빛안에 뭐라 표현할수 없을만큼의 감정들이 넘쳐났다. 그때 나를 잃어서.. 얼마나 많이 고통스러웠는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그래서 지금 얼마만큼 기뻐하고 있는지.. 그것들은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수도 표현할수도 없다고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알아.. 알고있어.. .. 말하지 않아도... 알아.. 일일히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아..

왜냐면 똑같으니까. 나도.. 아시리안과 같으니까..

이런 생각들로 감동에 겨워하고 있는데 아시리안이 갑자기 불쑥 말해왔다.

“...그런데 너말이야.너무 평범한데다가 볼거하나 없이 생겼다고 생각안하나? 아르였을때는 인간치고 그럭저럭 봐줄만한 외모였는데, 이 얼굴은 너무 심심하게 생겼잖아.”

가까이에서 눈을 들여다보며 너무 진지한 얼굴로 말하니까 내가 어디가 어때서, 라고 화내고 싶어지기 보다는 이렇게 볼거없이 생겨서 미안, 이라고 사과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정말 못마땅해하는것 같아서.. 내가 이렇게 생긴데 보태준거 있냐고 대략 어이없어지려는 찰나 아시리안이 이어 혀를 차며 말했다.

“쯪....조그만 데다가 몸도 삐쩍 말라서 안을 맛도 안나겠어.”

뭐야? 안아달라고 사정안해, 그런거 신경쓰지 말란말이야. 발끈, 하고 싶어도 목소리가 아직 안나와서 눈으로 샐쭉하게 노려보자 심술맞게 미소를 피식, 하고 짓는다.

“그래도 차원의 문까지 넘어왔는데 이제와서 내팽개칠수는 없지. 좀 실망스러워도 참고 안아주마”

실망스러워? 거만한 표정으로 무척이나 큰 인심 써준다는 말투로 나를 한참 어이없게 만들어논 아시리안은 조그맣고 삐쩍 마른데다가 볼거하나없이 생겼다던 녀석의 상의를 뻔뻔하게 들추고 있었다.

기가 막혀, 도대체 뭐하는거야. 싶은데 병원복 상의를 밀어올리며 들어온 손은 성급하게 가슴과 배를 쓸어내린다. 깜짝 놀랐다. 뭐하는거야.!! 조금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자 표정없는 아시리안의 시선대신 정직한 손이 지금 하려는 일을 알려주려는듯 배아래로 쓰윽, 내려간다. 고무줄바지속으로 단숨에 들어온 손이 다리사이의 축늘어져있는 분신을 확인하듯 만지고 모르는척 다시 올라간다.

아시리안, 너는 의사고, 나는 환자야.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한테 이러는거 범죄야..이거 성추행이라고, 항의하고 있는 눈을 모르는건지 알면서도 그러는건지... 아시리안은 병원상의를 들추고 슬그머니 들어온 손으로 꽤 뻔뻔한 짓을 계속했다.

편편하고 마른 가슴에서 작게 솟아있는 돌기가 살짝 쓰다듬어진다. 조심스럽게 만져지고 대담하게 엄지로 살살 굴리는가 싶더니 아예 손가락으로 잡아 슬쩍 비틀면서도 아시리안은 내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 반응을 살피는것도 같은 집요한 시선에...뭔지 모르게 조금 미안하기도하고 안타까운 마음도 들지만.. 몸에 감각도 없고..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느껴질 리가 없다.. 바보, 무리야. 무리.. 될 리가 없어.

그러나 집요하리만큼 끈질기게 젖꼭지부분을 자극하는 손때문인지, 아니면 내눈을 구애하듯이 바라보는 아시리안의 눈때문인지 가슴속이 살살 간지러워진다. 그리고 아시리안은 내눈에서인지 아니면 만지던 곳에서인지 마침내 원하는 반응을 찾아낸것처럼 짖궂게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 귀여운 부분이 딱딱해졌군 ”

바,바보!!!  발끈했지만 손가락 두 개로 잡힌 돌기를 위로 잡아올리자 움찔, 움직여지지 않는 몸안이 떨린다.

“조금 시간을 들여야 하겠지만.. 뭐, 이런것도 괜찮겠지.”

그,그렇게 혼자 멋대로 정의내리지마, 전혀 괜찮지 않아!! 소리내지 못하는 내 분함은 목안에서만 맴돌뿐이고 가슴위까지 끌여올려진 상의자락이 쭈욱 내려온다싶더니 단추가 하나 둘 풀려지고.. 기가막혀서 쳐다보고 있는 내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아시리안이 말했다.

“..기다리게 한 벌로 눈뜨면 혼내주려고 벼르고 있다는 말 들었겠지?”

글쎄.. 혼내고 있다고 보기엔 엄청 즐거워보인다고, 표정관리 좀 해야될것 같아. 아시리안..

단추가 풀어헤쳐진 환자복이 걷어올리는 손에 의해 활짝 젖혀진다. 아시리안이 바라보는 시선이 드러나있는 상체로 향하자 조금 창피해졌다. 정말이지..그 아르휜이었을때 몸에 비교할바 못되는지라 자신없어진다. 아시리안의 말마따나 아르휜은 남자라해도 아름다웠다지만.. 지금 하은준으로서의 나는 평범하기만해서, 절대미를 추구하는 아시리안에게 정말 볼품없어 보일것 같아서.... 정말 그 안을 맛이 안나면 어떻하나, 이런 고민을 하는 사이 아시리안이 고개를 어색하리만큼 천천히 숙여온다.

“...”

할짝, 혀로 핥는다. 전에는 아시리안에게 늘어져있는 긴 머리카락 때문에 뭐라고할까.. 자세히 볼수가 없었다고나 해야하나.. 암튼 그런데.. 지금은 단정하게 묶고 있어, 아시리안이 내 몸에 키스할때는 저런 얼굴을 하는 구나..라고 멍하게 생각했다. 나무토막처럼 늘어져있는 몸에 참 다정하고 세심하리만큼 꼼꼼히 키스해온다. 특히 예민해서 느끼기 쉬운 유두부분은 아시리안의 입에 들어가있지 않으면 손으로 잡고 비비듯 자극을 해오고.. 그때마다 미약하게 움직이지 않는 몸대신 가슴속이 움찔거렸다.

“..!!”

한손으로 허리를 쓰윽 쓸어내리며 그대로 고무줄 바지와 속옷이 무릎아래로 벗겨내려진다. 얼굴에 열이 확 몰려오는것 같은 느낌이다. 상체에 입술을 묻은채 손만 길게 뻗어 여전히 축늘어져있는 분신을 잡아오자 나는 더 참을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안돼, 감각이 없단 말이야. 느껴질리 없어. 하지마.. 바보야.

전에는 키스만으로도 찌릿한 전기가 들어온것처럼 몸이 달아올랐다. 지금은 아무리 열심인 애무도, 집요한 키스도.. 무감각하기만 한 신체에 아무 느낌도 주지 않아서, 서러움에 눈물이 날것 같았다. 그렇게 노력하지마, .. 뭔가 필사적이라는 말이 나올만큼의 노력으로 아시리안은 아직 잠들어있는 신체의 감각을 깨우려는듯했지만 그 미안할만큼의 정성스런 노력이 무색하게 내몸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초라하게 죽어있는 분신을 한손으로 움켜쥐어 돌리고 강약을 줘가도 ..좀체 힘이 들어가지 않자 아시리안이 키스마크를 만들고 있던 상체에서 입술을 뗐다. 하지마, 그만해..그만 포기해.. 눈으로 애원하고 싶지만 내쪽을 쳐다보지 않아서 말을 전할 수가 없는 사이 아시리안은 으슥한 어둠사이에 바지가 벗겨져 드러나있는 하체쪽을 잠시 바라보더니 힘없이 늘어진 두다리를 잡아 양쪽으로 넓게 벌려놓고 볼품없이 늘어져있는 분신을 입에 머금었다.

아... 차마 그 모습을 마주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소리까지 들을수 없는건 아닌지라 질척한 타액과 엉켜 매끄러운 혀가 위로하듯이 쓰다듬고 따뜻하게 감싸 오므리는 입의 그 미묘한 접촉소리까지 모른척 할 수는 없었다. 그만해, 그만해..제발, 그만해..

“....아.......흐...”

목구멍에서 나오는듯한 기이한 울음소리가 어둠속에 울려퍼지자 쪼그라든 분신을 입안에 넣고 이런저런 애무를 하던 아시리안이 행동을 딱 멈추고 나역시 너무 놀라서 울음을 딱 멈추었다.. 목소리가, 목소리가....!! 아시리안, 내 목소리 들었어?

여전히 분신을 입에 머금은채 나를 힐긋 바라보는 아시리안의 시선은 조금 놀란 나를 보며 웃고있는듯했다. 나는 조금 더 노력해보기로 했다. 목에 힘을 주고 .. 부르고 싶었던.. 내내 불러주고 싶었던 이름을 천천히 부르려고..

“......아..시...리.........”

아...나온다...그때 녹색마족에게 목이 졸렸을때보다 더 형편없이 갈라지고 들어주기 힘든 목소리기 했지만 말이 나온다.. 그 사실에 기뻐하는 나를 대신하듯 아시리안이 분신을 천천히 놓아주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나직하게 속삭인다.

“다시 불러봐.”

응, 응!!

“...아...시..리...안...........아시..리...안....”

아................크게 떠진 눈에 맑은 액체를 담은채 부들부들 떨리는 입가로 미소비슷한걸 짓고있을 나를 바라보며 아시리안은 정말이지.. 이보다 더, 라고 할수 없을만큼 기분좋은 얼굴을 하며 눈을 감아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덩달아 행복해진 나는 지금 막 궁금해진 것을 묻기로 했다.

“..아..시...리..안.. ..... 마, 마..력..은?”

전에는 조금만 다쳐도 치료해주곤 했기 때문에, 조금 이상해져서 물어본건데.. 내가 그말을 하자마자 기분좋은 표정은 확 걷어치우고 나를 못마땅한듯이 노려본 아시리안이 투덜거렸다.

“내 치유력이 들었다면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었을거 같나? 차원이동해서 넘어오느라 마력을 많이 소진하긴 했지만.. 네놈의 문제는 몸보다 이쪽에 있는것 같으니까 말이지.”

이쪽이라고 말하며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 찔러온다.

나를 자극하려고 일부러 이런짓을 할만큼 아시리안은 초조했던걸까..

차원의 문까지 넘어가며 겨우 왔는데 깨어나지 않고있는 나를 바라보며 아시리안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나를 깨우려고 한걸까..

“..........미..안..해..”

올려다보며 울것처럼 눈을 찡그리자 내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손가락들로 빗어올리며 웃는다.

“조금전에 한말 잊었냐, 조급하게 굴것 없다고 했다.

얼마든지 기다려준다고도 했고.. .. 하지만, 이런건 기다리지 않는다고 말했지?”

하지만,을 말하며 배아래로 길게 손을 뻗은 아시리안이 [이런건]을 말할때는 쪼그라든 분신을 다시 손에 쥐고 있었다. 아..정말이지 못말려...끈질기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울면서 웃고있었다. 일방적인 통보였고 대답을 바라지도 않는것 같았지만 이미 내 마음속에서 대답은 나와있다. 아시리안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좋아....라고,

그로부터 몸을 움직이게 된것은 사오일정도 경과된 후였다. 1년동안이나 깊은 잠에 빠져있던 몸을 움직이려면 여전히 녹슨 기계처럼 삐꺽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고 했지만 이정도로 빠르게 완쾌되어 가는것도 드문 일이라고 말하는 간호사들의 수근거림을 기쁘게 들으며 나는 이제 누워있을때보다 병원침대에 앉아있을때가 많아졌고 가끔씩 아시리안의 부축을 받아 산책을 나서곤 했으며 음.. 그 부끄러운 행위에 조금씩 반응하곤 했다.

그것도 아시리안이 안을맛도 안나겠다고  투덜거린 것과 달리 집요하기까지한 끈질긴 애무를 거듭해야만 느리게나마 겨우 반응하는 정도지만 그 조금의 반응에도 굉장히 기뻐하는것같아서 그만두라고 하지도 못한채 아시리안에게 틈만 나면 휘둘리고 있는것만 제외하면 무척 평화로운 시간들이었다.

몸을 움직이는게 조금 불편하다고 해도 다시 맞이하는 세상은 그 전에 알던 세상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아르휜이 되기전보다.. 아르휜이 되었을때보다.. 아르로 살았을때보다 더 소중하게 주어진 삶, 그것은 아무것도 느낄수 없던 절망과도 같던 죽음을 느끼고 나서 더 그러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눈을 떳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찾아와 어색하게 얼굴을 내밀어준 아버지와 은호형을 보았을때도 그러했고...아시리안에게 부축을 받긴 했지만 처음 내발로 바닥에 발을 내딛었을때도 그러했다.

내가 아시리안의 도움을 받으며 갓난아기가 처음 두발을 딛고 서는 것처럼 한발자국 내딛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지만 세상은 예전과 달라진게 없었다. 사람들 역시 그러했다. 나를 스쳐가는 이 공기도, 둘러싼 환경도 전과 같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변한것 같다라고 느껴지는건 내가 변해버렸기 때문인걸까. 내가 세상을 보는 시선이, 사람들을 보는 시선이 변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지금은 알수 없지만 ... 열심히, 힘차게 살아갈 밖에. 답은 살아가면서 천천히 나올테니까.

내가 깨어나지 않는 사이 일주일에 한번씩은 꼬박꼬박 왔다고 하는 친구들이 내소식을 듣고 뒤늦게 찾아온것도 그 즈음이다. 병실문을 열고 들어서는 반가운 얼굴들을 누워서가 아니라 앉아서 맞을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나는 기쁜 미소를 지었다.

“안녕”

어제 만난 사람처럼 웃으며 인사하자 뭐랄까, 관뚜껑을 열고 일어난 유령을 본 사람처럼이나 굳은 표정들에서 이내 천천히 미소가 번져간다.

“여어,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드디어 일어나셨네.”

1년이 아니라 늦잠을 자다 일어났을때 나를 대하듯 웃는 정우의 모습을 보자 1년의 공백은 마음속에서 금새 사라졌다. 느긋한 정우에 비해 성격이 좀 급한 편인 승호는 한달음에 달려와 내목에 헤드락을 걸고 머리카락을 스스슥 헤집으며 약간 젖은 목소리로 말해왔다.

“잠은 다 잤냐. 이 굼벵이 자식아.”

“응, 미안..그리고 고마워. 기다려줘서..”

1년이 그리 길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제 대학교 입학을 앞에 두고있을 정우와 승호는 벌써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해버린 것처럼 조금 어른스러워보였다. 온갖 말썽의 중심에 있던 녀석들이긴 하지만 공부는 꽤 잘했으니까 둘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갈거라고 믿고 있지만 이렇게 마주대하고 있자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새삼 궁금해진다.

내가 잠들어있는사이 너희들은 어른이 되었구나..라고 조금쯤 서운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시간의 흐름이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준다. 아무것도 변한게 없고, 시간조차 흐르지 않은채로 눈을 떠버렸다면 무척 슬퍼졌을테니까.

아르란 이름으로 지내온 시간들이 정말 꿈이었나 하고.. 그리운 사람들역시 아무것도 아닌 꿈일뿐이었나 하고..  프란, 이리타, 데런, 시오니, 케드릭... 그리고 펠릭스형에 대한 보고싶은 마음역시..

“그건 그렇고, 하은준.. 너 말이야.”

뭔가 굉장히 묻고 싶은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던 정우가 입을 열기전 병실문이 노크도 없이 열렸다. 당연히 문열리는 소리에 돌아보는 우리 세사람의 시선에 아무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들어선건 아시리안...

음.. 아시리안을 뭐라고 설명하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침대옆에 앉아있던 정우와 승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가 의아할 틈도 주지 않고 꾸벅 인사했다. 그것도 허리까지 굽혀서... .. 저건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각이 딱 잡혔네..

“한선생님, 오셨습니까.”

왜이렇게 군기가 바짝 들었다지. 어떻게 구워삶았길래....라는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나는 예의바른 녀석들이 아닌 정우와 승호의 정중한 모습을, 그리고 인사를 능구렁이처럼 태연하게 받고 있는 아시리안을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한선생님? 누가? 아시리안이?

누가 내게 설명을 좀 해주길 바라지만 아시리안은 물론이고 정우도 그렇고 승호도 그렇고 전혀 설명할 기색이 아니다. 궁금증을 잠시 접어두는 사이 내가 앉아있는 침대맡에 털썩 앉은 아시리안, 아니 한선생님은 어리둥절해서 바라보는 내 얼굴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앗, 깜짝 놀라서 정우와 승호쪽을 바라보자 두녀석은 정말 이상하게도 부동자세로 얌전히 서있을 뿐이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은준아, 또 올게.”

“어?...응...그래..잘가..”

왠지 돌아서는 정우와 승호의 뒷모습이 조금 처량맞게 보인다.

귀가 있다면 양옆으로 축 늘어진것처럼 보일만큼... ....왜들 저러는 거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갑자기 돌아가겠다고 해서 아쉽기도 하고 두녀석이 축쳐져서 돌아간것도 마음에 걸리고 해서 문이 조용히 닫히는 순간까지 바라보고 약간 한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뺨을 꾹 잡아누른 손이 내 얼굴의 방향을 돌려놓았다. ... 아시리안?

“왜?”

뭔가 마음에 안들어서 투덜거리고 싶은걸 참는듯한 얼굴이라 눈을 깜박거리며 묻자 갑자기 머리위에 턱, 손을 올려놓고 머리카락을 부스스하게 흐트러트린다.

“왜, 왜그래.”

아시리안은 정말 이유를 알수가 없어 물어보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보며 단 한마디 했을뿐이다.

“둔한 놈.”

그리고 내가 왜 둔하다는 것인지 납득할 시간을 주지 않은채 곧바로 내 몸을 침대속에 눕혀논다. 목을 뜨거운 혀로 스윽, 핥아내면서 헐거운 환자복 상의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둥글게 마사지하듯 빙글빙글 돌리다가 가운데 한지점의 꼭지를 엄지로 꾸욱 누른다.

“아, 아시리안!!”

누가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들키는데, 다짜고짜 이런 짓을 하는게 기가막혀 좀 말려보려고 했지만 밀어내려한 양손을 붙잡아 아예 머리위로 올리고는 상의자락이 한껏 위로 말려가 드러난 조그만 젖꼭지를 입안으로 삼키고 혀로 굴린다. 다른 손으로 반대쪽의 돌기를 잡아 비비고 자극을 줘가며 서서히 내 몸에 열을 지피던 아시리안이 갑자기 코를 바짝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왜...왜?”

아침에 샤워했는데.. 냄새나나?

은근히 신경쓰여서 묻자 킁킁거리던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곧 쳇, 하는 듯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왜냐고? 묻고 싶은건 나다. 냄새도 안나는데 왜 이렇게 귀찮은 날벌레들이 많이 꼬여?”

귀찮은 날벌레들이라니 누가... 그제야 오래전에 내꿈을 훔쳐보았던 아시리안이 정우와 승호를 비롯해 경비아저씨한테까지 트집잡았던걸 떠올린 나는 잠시 얼이 빠졌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바보, 그런걸 신경쓰는 아시리안이 이상한거야. 나처럼 볼거없고 심심하게 생긴 녀석한테 이런 짓을 하고 싶은 것도 아시리안밖에 없을걸? 밖에 산책이라도 나가봐. 옆에있는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들 아시리안밖에 안쳐다본다고.”

웃고있는 내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본 아시리안이 픽, 하는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네놈이 볼거없이 생겼다는 걸 알기는 아는건가?”

웃음을 뚝 그친 나는 아시리안을 뚫어지게 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시리안이 너무 부담스럽게 생긴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아시리안을 쳐다보는건 어쩔수 없지만, 아시리안이 다른 사람을 쳐다보면 나. 화낼거야. 모르고 있나본데 나, 질투의 화신이라고.”

내가 화를 낼거라고 엄포를 놓는 동안에 한동안 표정이 묘해진 아시리안은 곧 내 이마를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웃음을 참는것같은 얼굴로 뒤늦게 대꾸했다.

“외모는 못생겨졌지만, 그 마음가짐 만큼은 바람직하군.”

못생겼다는 말에는 결단코 동의할수 없다. 아시리안이 너무 잘난 외모인것 뿐이다, 라고 항의하려 했지만 머리카락을 걷어낸 이마에 입술을 꾹 눌러오는 입맞춤이 따뜻해서 말할 타이밍을 놓쳤고, 못생긴 녀석이라고 했으면서 그 못생긴 녀석의 얼굴 여기저기에 꾹, 꾹, 도장을 눌러찍는 것처럼 입을 맞춰오는 통에 웃느라고 말하는걸 잊어버렸다.

“큭큭.. 하지마. 간지러...음.”

간지러워서 키득거리며 이리저리 고개를 피하려 하자 턱아래를 아예 꾹 잡아눌러 고정시키고 엄지손으로 살살 애무하더니 이내 입술을 맞춰온다. 그리고 다른 손이 내 옷의 단추를 풀러내기 시작했다. 그 본격적인 전희의 시작에 나는 잠시 잠궈지지 않은 문에 시선을 두었지만 아시리안의 뜨거운 손이 몸을 지분거리기 시작하자 이내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사랑해... 사랑해.. 아시리안...

아직 살아온 날보다 살아가야 할 날이 많겠지만,

아르휜, 이번엔 내 선택이 옳았다고 증명할 수 있을것 같아.

인간이 되기로 한건 역시 잘한 선택........같...

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고개를 갸웃거렸던 나는 내가 집중하지 못하는걸 벌주는듯 심술궂게 성기를 잡아 흔드는 손에 학, 하는 신음을 삼키며 곧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러나 서서히 지펴진 열꽃이 군데군데 피어 몸이 따듯하게 달아오르는데도 머릿속에선 이내 다른 생각들이 들었다.

차원이동을 할때 마력을 소진하다고 하긴 했지만 아시리안의 마력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이 다시 생성된다고 했으니까.. 다음에 다시 가볼수도 있지 않을까... 프란도, 이리타도, 케드릭도, 데런도, 펠릭스형도, ... 모두, .. 보고싶으니까. ..열심히 살아갈거라고 믿고 있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보고싶으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아시리안에게 졸라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 감정은 희망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꽃,

온몸을 따듯한 열로 데워주는건 사랑이라는 이름의 숭고한 낙인.

감사함으로 나를 울게 만드는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과거의 시간들.

지금은 이렇게 행복해도, 이렇게 껴안고 있는게 너무.. 너무 기쁘지만..

아시리안과 내가 아무리 서로를 사랑해도 시련은 항상 그림자처럼 옆에 있겠지.

살아간다는건 사랑만으로 헤쳐나갈수 없는 어려움도 , 고단함도 포함되어 있는거니까.

그러나 그 어떤 시련이 찾아와도,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제 행복할수 있을것 같다. 나는,

이제는 내손으로 행복을 잡을 수 있을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아시리안과, 나를 사랑하는 아시리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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