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오포드가의 귀공자-35화 (35/36)

35

“결국 이렇게 되는군.”

마물들과 인간들의 썩은 시체가 뒤엉켜 참혹하게 변해버린 대지를 바라보며 프란이 중얼거렸다. 야나카황자가 주둔해있는 로트레아성을 공격했던 보나스왕자의 반란군은 로트레아성 탈환 일주일만에 백기를 들어야했다. 그것도 야나카황자의 재공격때문이 아니라 마물들의 공격으로부터 로트레아를 지킬 능력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뭐야, 아직도 내가 엉터리 점쟁이라고 생각하는거야?”

시신이 썩어가는 대지위에서 올라오는 고약한 냄새가 바람결에 섞여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데도 상큼하게 웃으며 말하는 이리타를 힐긋 노려보며 프란은 뭔가를 말하려다 할수없다는듯 입을 다물었다.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미친듯이 휘날리는 푸른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올리며 대신 앞을 바라본다. 참담하게 시신들로 뒤덮인 대지.. 그 너머를 바라보며 프란이 입을 연것은 한참후였다.

“.. 이제 수도로 돌아갈거냐?”

프란의 말을 듣지 못한듯 이리타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황금빛 블론디가 바람에 펄럭거리는걸 마치 즐기기라도 하듯이 눈을 감은 이리타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것을 옆눈길로 보며 넌 코도 없냐고 구박하려던 프란의 입을 막은것은 상쾌한 향이라도 들이마시는것처럼 기분좋은 얼굴을 하고있는 이리타였다.

“그럼,수도까지 잘부탁해. 호모”

뜬금없는 이리타의 억지말에 프란의 얼굴이 구겨졌다.

“누구맘대로?”

“어머, 그럼 나혼자 보내려고 했어?

나처럼 아리따운 미모의 여자가 혼자 여행하다 몹쓸일이라도 당하면 무지 후회할걸?”

“몹쓸일을 당해? 몹쓸일을 저지르는게 아니고?”

어이없는 사람의 전형적인 표정을 보여주는 프란의 티껍다는 반응에 이리타가 빙긋 웃었다.

“어차피 목적지는 수도잖아. 안그래?”

순진하게 쳐다보는 이리타의 말에 아무대답없이 프란은 떨떠름하다는 얼굴을 할수밖에 없었다. 이리타의 말마따나 프란의 목적지는 수도였기 때문이다. 외팔이 용병놈 케드릭은 처음에 산적질을 같이 했던 그 외팔이놈들이 떼로 뭉쳐있는 네레이드성에 가기로 했고 데런역시 결혼은 관심없다고 누누이 외쳐대더니 네레이드의 비운의 아가씨가 그리웠는지 그쪽으로 가기로 했고...

프란은 시큼하고 역한 냄새를 풍기는 대지를 바라보며 그날, 검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마족 아시리안의 품에 안겨있던 아르의 모습을 떠올렸다.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이미 벌써 죽어있는거나 다름없던 아르의 모습을, 그리고 이년전에 크로멜성에서 소멸당한 줄 알았던 마족의 모습을.. ...떠올린다.

감히 누구도 끼어들 수 없을것 같은 분위기였다.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결국 펠릭스도 자신도 아르의 마음을 잡을 수는 없었던 거다.

프란의 얼굴에 언뜻 쓸쓸해 보이는 웃음이 지어졌다.

그게 너의 운명, 이라는 거야?.. 그래서 행복하냐. 지금은?

아르가 그 마족과 함께 있을 어딘가를 향하는것처럼 대지와 하늘이 만나는 수평선부근에 시선을 던졌다.이리타에게 자세히 묻지는 않았지만 다크엘프 시오니가 돌아올수 없는 길을 떠났다는것 알고있다. 피를 즐기고 강한 자와의 싸움을 즐긴다고 , 그것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 죽고 사는것에 연연해하지 않을 만큼 단호하고 당당한 의지가 담긴 사나이의 눈빛이었다.

그것이 다크엘프 시오니가 스스로 선택한 운명의 끝이라면 어쩔수 없는 일이겠지.

그 마족과 그토록 비참하게 헤어져놓고서도 끊어지지 않는 실이 이어져있는게

아르, 너의 운명이라면 그것 역시 어쩔수 없는 일이겠지.

그러니, 지금 내가 하려는 일 역시 어쩔수 없는 내 운명이라고 용서해주겠어?

썩은 시체들이 뒹구는 대지를 바라보는 프란의 눈빛이 더없이 즐거운듯 반짝이며 축축한 혀로 메마른 입술을 슬쩍 축이곤 이내 미소를 지었다.

말했었지? 용서하지 않겠다고, 아르. 네가 용서해도 나는 용서하지 못한다고.

잔인한 살기를 띄운 눈동자를 걱정스러운듯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알지못한채 프란은 즐거운 미소를 짓고있었다.

아........또 그 꿈속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량한 벌판..

불어오는 모래폭풍속에서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는 내가 보인다.

휘이이잉- 휘몰아치는 바람소리와 함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미친듯이 펄럭거린다.

조금더.. 조금만 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세찬 바람결에 흔들리는 몸을 움츠리자

포근하게 감싸주는 알수없는 느낌이 들었다.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걷던 걸음을 멈춰서서 주위를 돌아보다 모래바람 때문에 눈을 찡그리고 살짝 감자

찡그린 미간을 슬쩍 문지르는 무언가가 다시 느껴진다.

아........이건 내가 아는 손이야..

귓가에 들리는건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소리..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아시리안의 느낌..

꿈인지 현실인지 몽롱한 경계즈음에서야 바람소리가 잔잔해진다.

참참히 침몰해 들어가는 깊은 바닷속처럼 어둡지만 외롭지않은 고요함에 싸여

숨을 내쉬는 입술을 매만지는 손 끝에 열기가 묻어 들어온다..

뺨을 살살 간질이는 손가락들은 조심스럽고...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 다정해서 가슴이 아프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래..조금 더 이렇게 있고 싶어.

편안하고 안락한 꿈을 꾸는것처럼, ...행복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는 것처럼,

영원히 함께 있을수 있다고.. 지금은 생각할래.

목을 간질이던게 그아래로 미끌어져내린다.

가물가물한 의식으로 가벼운 깃털로 쓸어가는것처럼 간지러워 움추리는데 가슴을 살살 문지르고 뭔가가 물어뜯는 느낌에 뭐지..하고 눈을 떳다.

흐린 시야로 맨처음 눈에 띈건 까마득히 높고 넓은 회색천장에 보이는 마법언어로 쓰여진것 같은 문양들이었다. 왜.. 하다가 아..그렇지, 라고 생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동안에도 몸은 가벼운 뭔가가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여전히 비몽사몽인 시선을 내리자 가슴쪽에 흩어져 꿈틀거리는 검푸른 머릿결이 보인다. 한손으로 졸린 눈을 비비자 좀 더 뚜렷하게 보이는 아시리안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아프지 않을정도로 살짝이지만 물어뜯고있다는 느낌은 확실하게 전해질만큼..조금씩 가슴이 따끔거리고.. 도대체 뭐하는...

“...아..시리안..? ”

가슴부분에 흩어진 검푸른 머리카락들을 손으로 쓸어올리며 묻자 가슴살을 입안에 물고 빨아당기던 모습에서 잠시 정지했던 아시리안이 방해하지 말라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던 손목을 얌전히 잡아 옆으로 치우게 하고 다시 행동을 개시했다.

머릿속은 여전히 비몽사몽인데 새가 쪼는 것처럼 살짝 살짝 키스해오는 자극에 몸이 먼저 움찔거리고 반응해간다.

“..아시리안.. 뭐해...?”

잠에 취해있는 머릿속이 몸에 오는 자극에 따라 점차 깨어나면서.. 잠자고 있는 상대를 덮치고있는 변태가 어이없어 조금 큰소리로 묻자 아시리안이 못마땅한듯 그제야 시선을 맞춰온다.

기가막혀.. 잘자고 있는데 깨워놓고..지금 성질낼 사람이 누군데..

황당해서 잠이 완전 달아났는데 아시리안이 뻔뻔한 얼굴로 어린애 달래듯 뺨을 톡톡 두들기며 나직하게 말했다.

“더자라”

뭐야?.. 어이없어서 아무말도 못하는 사이 아시리안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붉은 자국들이 난무하는 가슴쪽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태연하고 당연한 듯한 태도에 어안이 벙벙.. 뭐라고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손이 먼저 배와 사타구니쪽으로 쓰윽 매끄럽게 쓰다듬어오자 잠자다 깨워진 불만 대신 짜릿한 열기가 하반신을 타고 찌르르 올라온다.

“웃.......”

가까이 왔지만 분신쪽을 만지지않고 다시 올라가는 손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는사이 붉은 돌기는 아시리안의 입안에서 굴려지고 있었다. 입을 열어 불만을 따질 겨를도 없이 이미 감질나는 애무에 반쯤 달아올라있던 몸이 더 깊은 자극을 원하는것처럼 뒤틀린다.

....뭐..야.. 자라더니..?... 바보변태.. 이 상태로 만들어놓고 어떻게 자라는거야.

조금 얄미워져서 원망스럽게 흘겨보는사이 딱딱하게 굳은 붉은 유두의 끝을 입에 물고 잡아끄는대로 침대에 잠겨있던 상체가 허공으로 휘었다. 내 스스로 띄운건지 아시리안이 허리를 받쳐올린 손에 의해 뜬거지 알수없는채 비스듬히 끌어올려져 품에 안긴다.

끌어안긴 품에 하악..하고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양손으로 아시리안의 어깨를 매달리듯이 꽉 쥐자 경직된 등의 날깨뼈사이와 허리를 곧게 쓸어내린다.

아... 아시리안의 손이 미묘한 열을 품은채 허리까지 내려오자 가벼운 긴장으로 몸이 움츠러들자 내 반응을 놀리는것처럼 양쪽으로 갈라진 엉덩이부근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버린다. 자연스럽게 그부분을 더듬어올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터라 아시리안이 지금 나를 놀리는건가 싶은데..다시 앞쪽으로 건너온 손에 생각이 멈춰진다.

그러나 아시리안은 만져주길 원하는 부분을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그 근처만을 간질이듯 만져댈뿐 직접적인 자극은 하지 않고 있었다.. 왜그러는건지 싶어지게 살살 애를 태울뿐이라 아시리안이 주는 뜨거움을 기억하는 몸이 먼저 들썩인다.

“..아....아시리안..”

어떻게든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애가 타서 애원하듯 부르지만 아시리안의 손은 결정적인 부분만을 피한채 허벅지아래와 엉덩이를 살짝 감아쥘 뿐이다. 바르르 떨리는 어깨를 뜨거운 인장을 박듯 입술로 찍어누르며 아시리안이 귓가에 속삭인다.

“아르, 원하는걸 말해봐.”

못해. 그런 창피한 말을 어떻게...만져줘..같은 부끄러운 말은 죽어도 할수 없을거야.

아시리안이 일부러 심술맞게 구는것 같아 원망스러움과 서러움이 흘러넘친다.

“시..싫어....”

열이 달아오른 머리를 휘젖자 머리위에서 아시리안이 왠지 즐거워보이는 웃음소리를 냈다.

“바보같으니, 이제와서 창피해할거 없잖아. 그렇게 안겨놓고서..”

얼굴이 확 붉어진채 아시리안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건 아시리안이 억지로....!!”

억지로.. 다음의 말이 나오지가 않아서 노려본채 입을 꾹 다물어버리자 아시리안이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내가 미처 못한 말을  나직하게 말했다.

“억지로....그래, 내가 너를 강제로 안았지.”

그 말과 동시에 허벅지에 있던 손이 뜨거움을 담은채 분신을 단숨에 쥐어온다. 불시에 공격당해 헉, 하고 놀람을 삼키며 머리에서 미처 자극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이 정직한 몸은 아시리안의 손에 뜨겁게 반응했다. 그러나 가볍게 앞을 주물거리던 손은 다시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아..”

왜....하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자 아시리안이 뭔지 모를 기이한 열을 품은 시선으로 내눈을 응시한채 허리아래 양쪽으로 갈라진 골짜기 사이로 손을 넣어 천천히 가르고 들어왔다. 닿기전부터 움찔거리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아시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러니 이제 네가 원하는걸 말해봐.”

아시리안의 눈빛은....나를 원한다고 말해, 라고 말하고 있었다.

원해, 원하고 있어.. 그러나 아시리안이 바라고있는건 지금 현재 아시리안의 손에 의해 쉽게 달아올라버린 내 몸이 하고있는 대답이 아닌 보다 다른것.. . 그래서 쉽게 대답할 수가 없다.

이년전에 크로멜성에서 함께 가자고, 함께 있자고 살살 꼬시던 것과 같은 눈이니까.

대답할 수가 없다. 시선을 피하자 오밀조밀 주름이 맞물린 곳에 손가락을 스윽 넣어온다. 습기없이 뻑뻑하게 들어오는 이물감에 하악, 내뱉어지는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숙이자 아시리안이 머리위에서 다정한 목소리로 채근했다.

“대답해라”

“이..이렇게 갑자기 다그치지마”

그것은 아시리안이 원한 대답은 아닐것이다.

맘에 안드는 대답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이 하나로도 뻑뻑한 곳에 손가락이 하나 더 들이밀어진다. 윽..하는 신음을 삼키며 그 불편한 압박에 적응하기도 전 다시 한 개가 더 침입을 시도했다.

이번엔 확실히 아파져서 가쁜 숨을 삼키며 어깨를 들썩거리자 아시리안이 바르르 떨리는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말안듣는 어린애 혼내는 것처럼 못되게 굴면서 등을 쓰다듬어 내리는 손은 정말 못말린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만큼 다정했다.

“대답해.”

두 번째 대답을 요구하는 아시리안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게 들릴만큼 조용했지만 안에 들어온 손은 결코 얌전하지 않았다. 얼른 대답하지 않는 걸 벌주는 것처럼 안에 꽉찬 세 개의 손가락이 가볍게 움직인다. 달콤함과 아픔을 적절히 배합한 감각을 견디려 아시리안의 어깨에 매달리듯이 쥔 손에 잔뜩 힘을 주고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자 가볍게 혀를 차는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르”

어르고 달래는것처럼 이름을 부르며 다시 채근하는 아시리안의 목소리에 약간의 초조함이 묻어있는 것도 같았지만 나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건....한가지..그 하나의 소망을 말하는건 쉬운일이다..

좋아해..좋아하니까 함께 있고 싶어..라고..말하는건 간단하다.

그러나....

기억속에서 펠릭스형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엄마..아버지..형, 친구들의 모습이 비쳐졌다가 사라지고 프란,이리타, 시오니, 데런, 케드릭등..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모습들이 잠시 잠깐동안 머릿속에 수없이 스쳐지나간다..

좋아해.. 사랑해....너를.. 정말 사랑해...

아시리안...... 나를 좋아하는거 알아.. 옆에 있겠다는 말을 바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우리가 좋아한다고해서 함께있는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간단하지가 않다고....

아픔에 바들바들 떨면서도 끝까지 대답하지 않자 안에 있던 손가락들이 천천히 빠져나간다. 아시리안이 금방 포기해서 쉽게 놓여나는것에 안심하는 한편 왠지 말로 표현할수 없는 안타까움에 서러워져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뺨을 따라 흐르다가 턱 끝에 맺힌 눈물이 나를 안고있는 아시리안의 팔에 뚝 떨어져 내린다. 그러자 할수없다는듯 아시리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울지마....대답안해도 상관없으니까.”

함께있는건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한것과 달리 막상 아시리안이 그렇게 말하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뭐야.. 그게.. 그렇게 쉽게...

새로 차오른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흐르는걸 막아낼 생각도 못하고 아시리안을 멀겋게 올려다보았다.  가슴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

아시리안.......내가 지겨워졌어..?......그래서...

그래서.....너도.. 나를 버릴거야...?..

나는...나는.. 너없이는 살수가 없는데?..

“......그...그래.. 알았어.. 그럼, 나.. 보내줘.. 갈래.”

안겨있던 팔에서 벗어나려고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비척거리는데 쉽게 빠져나갈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아시리안의 어깨를 밀며 충격과 슬픔으로 어찌할바를 모르겠어서 좀 더 세게 몸을 비틀었다.

“놔줘... 놔,.. 놓으란...!!”

빠져나가려고 억지로 몸을 비틀어서 비스듬히 꺽여있던 어깨가 잡혀서 몸이 돌아간다. 뒷머리를 움직이지 못할만큼 강하게 움켜쥐는 힘과 함께 덮치듯 달려든 아시리안에게 입술이 막혔다.

가득 차오른 눈물이 떨어져 내린 시야로 .. 바보, 멍청한 놈..이라고 꾸짖는것 같은 아시리안의 검푸른 눈동자가 보이고 눈을 감아내리자 벌려진 입안으로 짭짤한 눈물과 함께 힘차게 약동하는 혀가 안을 헤집으며 혀를 얽어온다.

바보같은 생각들을 빼내려는 것처럼 단숨에 입안을 훑어 내 반항을 완벽하게 저지한 아시리안은 이내 얌전해진 나를 바라보며 집요하고 단호하고.. 또 조금 못마땅한 것처럼 말을 꺼냈다.

“스스로 오지 않겠다는건 괘씸하지만 그런다고 놓아주겠다는 말이 아니야.

도망칠수 있을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하지마.

내옆에 있을수 없다고 울고불고해도 이제는 내가 너를 보낼수 없어.

이미 내것이니까. 네녀석의 대답이 필요없다는건 그 때문이다.“

아아..............아시리안... ... ....

나 때문에 그렇게 다쳤는데도..

나를 원한다고, 지금도 나만을 원한다고 말해주는구나. 너는..

아시리안은 흔들림없는 눈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겁많은 내가 선택하지 못하는걸 대신 결정해주고 있었다.

상처받을까봐 두려워서 마음과는 다른 거짓말만 하는 겁쟁이라서 미안해,

버림받을까봐 무서워서 원하는걸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겁쟁이라서 미안해,

내가 바라고 있는건.

내가 원하고 있는건.

아시리안뿐이라고..

“네놈이 죽고.. 다음생에 태어나도..또 다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도..

그게 어떤 모습이든 너는 나를 만나게 될거다. 내가 너를 끈질기게 쫒을테니까. “

집요해서 무섭기까지 한 아시리안의 말을 들으며 눈물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나는 영혼을 구속한다고 했던 아시리안의 반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지킬힘이 없어서 펠릭스형에게 빼앗겨버린 아시리안의 반지를..

....찾아야겠다고... 이제.. 다시 손가락에 낄수 있을것같다고...생각했다.

....이제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것 같으니까..

결국 주둔하던 로트레아성을 무너뜨린건 마물들이 아니라 같은 인간들의 공격에 의해서였다. 어리석은 반란은 어이없을만큼 빨리 끝났지만 에오포니아는 다시 피를 흘려야했다. 절대로 져서는 안되는 싸움에서 승리했고 원하는것을 얻어낸 셈이지만.. 이런식으로 얻어지는 결과란 씁쓸했다. 어깨에 남은 상처를 누르며 펠릭스는 창백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로트레아성이 보나스왕자의 반란으로 무너진후 야나카황자, 아니 이제 황제가 될 야나카가 에오포니아의 수도로 왔기 때문에 펠릭스또한 지금 왕성에 머물고 있었다. 왕성에 머무는건 펠릭스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며칠 안남은 황제대관식 때문에 귀족들이 속속들이 당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중 누군가는 야나카를 지지하기도 했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다른 황자쪽을 지지 했을수도 있다.

그러나 사태는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결정되어졌다.

이번 반란후 양위는 빠르게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반란이 벌어진것은 황제가 병석에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황제 스스로 깨달았다고나 할까. 반란이 아니었다면 좀 더 복잡해졌을 황권이 쉽게 들어온 셈이니.. 어리석은 보나스왕자가 야나카를 도운 셈이 된것이다.

인간이 사는건 이래서 재미있다고 하는거겠지.

언제 어느때건 변수란게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고급스럽게 수놓아진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려던 펠릭스는 어깨에서 오는 통증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곧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일어나 앉긴 했으나 곧 무슨 표정을 보일지 알수없는 스스로의 얼굴을 가리듯 한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 변수... 변수겠지..”

어디까지나 변수인것이다. 곤란한 상대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해있다는걸 알게된것에 대한 당혹감. 황당할 정도의 어이없슴.  가물가물한 의식으로 느껴지던 맞닿은 입술로 뜨겁게 토해지던 한숨같은 열기를 어렵지 않게 기억해내며 펠릭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그자는..

또다른 변수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흔들리는 마음..

만약 야나카황자가 펠릭스를 무너뜨리려고 마음먹었다면 정말 적시에, 라고 할법한 공략을 한것이다. 가장 약해졌을때.. 가장 흔들리고 있을때.. 약해질대로 약해져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있는 상대를 쓰러트리는건 손가락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펠릭스는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그런걸 생각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야나카황자의 황제즉위식을 전후해서 온갖 귀족들이 다 몰려드는 지금 승냥이처럼 약점을 물어뜯고 공략해올 상대들을 물색하고 다른 꿍꿍이가 있는 하이에나들을 쳐내야 한다. 가운을 벗어던지고 의복을 정제하고 있는데 가벼운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펠릭스님, 동생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동생? 이상하군. 펠릭스의 머릿속에선 당연하게 유테르를 떠올렸다. 황제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버지인 레오포드공작은 며칠전에 수도로 올라와있었지만 유테르와 새어머니는 카레인 영지 자택에 있을텐데... 아버지가 유테르를 데리고 왔었던가. 라고 생각하며 들어오라고 허락을 내리자 곧 굳게 닫혀진 문이 열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사박사박 발소리가 들려도 옷을 입고있어 돌아보지않고있던 펠릭스는 유테르가 아무말도 없자 겉옷을 마저 입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유테르, 아버지를 따라 수도에 온거냐.”

어차피 그다지 형제의 정따윈 못느끼고 살았다. 다정하게 대해주지 못했으니 살갑게 반기는것도 바라지 않는다. 여기까지 찾아왔을때는 용건이 있었을테지만 유테르는 지나칠만큼 말이 없었다. 평소 컨디션의 펠릭스였다면 들어오는 인기척만으로도 발자국소리가 유테르와 틀리다는걸 알았겠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잡아채지 못한채 펠릭스는 다시 이어 말했다.

“어쩐 일이냐, 여기까지.”

그래서 등뒤에 서있던 상대가 늦은 대답을 해왔을때 숨쉬는 것조차 잊어버린것처럼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펠릭스형님, 오랜만입니다,”

".!!!..."

얼어붙은 뇌속으로 들어온 목소리는 아르휜의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몸을 돌려 확인할 생각도 못한채 심장까지 멎은것처럼 굳어있는 펠릭스에게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붉은 눈동자였다. 굳어버린채 경악으로 크게 떠진 붉은 눈동자가 걷잡을수 없이 흔들리고 있을때 잠시의 틈을 주지 않고 뒤에서 아르휜이 다시 말을 해왔다.

“아니.. 오랜만이야. 형”

오랜만이야..란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만히 서있는게 어색하게 느껴질만큼 조금, 아니 많이 시간이 흐른후 펠릭스형이 내쪽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슬프고, 아프고, 서글픈 기억들에 폭풍우처럼 휘몰리면서도 나는 조금 웃고 싶어졌다.

크로멜성에서 오랜 잠을 자고 깬후 재회했을때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려진 어깨에 피묻은 붕대를 메고 있던 것처럼, 그때와 똑같이 창백한 얼굴로 펠릭스형은 나를 흔들리는 눈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병자같아?  어디 아파? 라고 묻고 싶어지는걸 쓴 웃음으로 넘기며 아무렇지않은척 시선을 맞추었다. 아르휜이 사랑한 펠릭스, 아르휜이 보고싶어하던 펠릭스, 늘 아르휜의 기억속에 살아있어 가슴을 시큼하게 울리게 만들던 그가 눈앞에 있었다.

이제 아무렇지 않을거라고, 만나는게 편하지는 않겠지만 고통스럽지도 않을거라고, 생각했고, 다짐했고, 각오했던 그 모든 것들이 눈을 마주친 순간 먼지처럼 버석거리며 흩어져내린다.

울부짖고 싶어, 그때처럼 끊임없이 눈물이 날것 같아. 당신을 보는게 아프고, 슬프고, 괴롭고, 힘들어. 왜그랬어, 왜그랬어, 왜그랬어!! 왜그랬어!! 왜그랬어!!! 라고 가슴속의 응어리진 분노를, 슬픔을, 당사자에게 토해버리고 싶다.

그러나 아픔도, 슬픔도, 서러움도, 원망도, 증오도 모두 희미하기만 하다..

지금 남은건.. 가슴속에 남아있는건 미워할수 없는 사람에 대한 조금의 원망뿐.

전에 은호형이나 아버지가 내게 난폭하게 폭행을 휘둘렀어도 진심으로 미웠던적이 없던 것처럼, 지금 이순간 역시 쓰리고 안타까운 슬픔만이 나를 잔잔하게 흔들고 있을뿐.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내게 한짓은 용서할수 있어도 아시리안을 다치게 한것만은 용서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이렇게 시선을 부딪친 순간 나는 내가 이미 펠릭스형을 용서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니,오래전부터 용서하고 있었슴을 깨닫자 불편한 마음이 약간의 어색함을 남기고 사라진다. 누군가를 미워하는것은 누군가에게 미움받는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니까..

더 이상 펠릭스형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 다행이야..

그래서 어쩐일로 온거냐는 한참 전의 물음을 뒤늦게서야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솔직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수가 있었다.

“찾으러왔어. 형이 가지고있는 내물건.”

창백하게 흔들리던 시선이 대번에 안색이 확 변해서 뭔가를 말하려했지만 펠릭스형이 말을 꺼내기전 내가 먼저 이어 말했다. 어떤 말을 한다해도 소용없어. 전에 왜 그랬던건지 궁금하지도 듣고 싶지도 않아. 내가 당신에게 온것은 오직 한가지 이유밖에 없어. 그것은 아시리안의 반지를 찾는것.

“돌려주길 바래.”

그건 당신의 물건이 아니니까. 펠릭스.. 당신이 가지고 있을 권리, 없어.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붉은 눈동자를 보며 다시한번 침착하게 용건을 말했다.

“돌려줘,”

할말을 잃어버린 것처럼, 아니 폭팔하기 직전인 것처럼 붉은색 눈가가 경련이 인다.

그 눈에서 시선을 피하지 않은채 똑바로 응시하며 , 확인 사살이란 것을 하듯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전했다.

“용건은 그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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