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던 남자의 이름은 카자르였다. 이리타를 쫒아온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대장처럼 보이고 또 나에게 굉장한 유감을 가지고 있는것 같은 사람, 카자르는 우리를 바로 죽이는건 자신의 노력에 비해 너무 허무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우리를 굴비묶듯이 결박한채 어딘가로 끌고 가고 있었다.
“내가 왜 너를 안죽이는지 궁금하지않나. 애송이?”
목이 아프기도 하고 대답하기도 싫고 해서 대답을 하지 않는 나를 바라보며 카자르는 뺨에 난 칼자국이 흔들릴만큼 웃어댔다.
“크크큭, 그렇게 쉽게 죽일수야 없지. 들어야 할말도 있고, ”
쉽게 죽일수 없다는 말에 역시.. 하고 들어야 할말이라는거에 의문점이 드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내 뒤쪽에서 들려왔다.
“우리를 쉽게 죽이지 않겠다는건 잘한 결정이야. 당신.”
프란..? 무슨 생각으로... 옆에 있던 카자르의 시선이 프란쪽으로 돌아갔다.
“그래? 그건 서로 의견이 일치하는것 같아 다행이로군. 정령사. 제법 실력이 쓸만하던데.. 뭐, 그건 차차 얘기해보자고”
“실력만 쓸만한건 아니지, 나는 지금 우리의 이용가치에 대해 얘기하는거라고.”
“이용가치?”
프란의 말에 흥미가 생긴건지 말을 타고 가던 중이던 카자르가 걷고있던 프란쪽으로 시선을 내리깔며 눈썹을 힐긋 치켜올렸다. 프란의 말을 이어받은건 이리타였다. 핏기없는 얼굴에 희미하긴 하지만 상큼해보이기까지하는 미소를 지은채 이리타가 말했다.
“그래요. 이용가치, 여기 이 사람들 보기보다 꽤 대단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래? 점쟁이를 살려두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단 말인가?”
점쟁이란 말은 이리타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데.. 어쨌거나 지금 그말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기가 몹시 불편한 상황이라는걸 감안한건지 점쟁이란 말은 흘려듣고 이리타가 넉살좋게 대답했다.
“아마 그럴걸요. 여기 당신이 줄줄이 끌고가는 사람들, 에오포니아의 귀한 집 자제들이라는거 알라나 몰라. 다들 이름만 대면 입벌어지는 자제들이니, 살려두면 몸값은 빵빵하게 챙겨줄걸요.”
몸값이라.... 그건 나와 관계없는 말인데.
“흐응, 그래? 계속해봐”
“이 정령사는 프란시스 하워드, 하워드가 둘째아들이죠, 그 뒤에는 데런 갤러웨이, 갤러웨이가의 장남이고, 그 당신옆에 있는건...”
이리타가 말을 계속하기전 내가 잔뜩 쉬어 듣기싫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리타, 내겐 다른 이름으로.. 불려질 이름..같은거 없어요.”
그건 내가 아르휜 폰 레오포드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는걸 거부하는 뜻이었다. 어떻게 해석한건지 이리타가 말을 멈추자 카자르의 시선이 내쪽으로 왔고 나는 걸음을 멈출수밖에 없었다. 카자르가 꺼낸 롱소드가 내목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목을 찌를듯이.
“왜이래? 아직 상황파악이 안돼? 네놈에게 여러 가지를 들을 생각이지만 일단은 네놈의 이름부터 듣고싶다고”
목에 아슬아슬하게 닿아있는 날카로운 칼끝을 따라 카자르를 올려다보자 다시 그 즐거운 웃음을 웃고있었다.
어쩌겠다는거야. 찌르겠다는거야? 아직 죽일 생각도 없을텐데.. 당신?
내 생각과 달리 검이 내목을 금방이라도 꿰뚫어버릴거라고 염려한 탓인지 프란이 좀 급해보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르휜이다, 아르휜 폰 레오포드.”
프란의 입에서 불려지는 이름을 들으며 나는 사형선고라도 받은 피고처럼 눈을 감아내렸다.
틀려... 그렇지 않아. 나는 아르휜이 아니야. 한번도 아르휜이었던적 없어.
그러나 머릿속에선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말? ... 아니라고 단정할수 있어?..- 라고, 차갑고 비틀린 목소리,
아르휜의 기억속에서... 아르휜의 모습을 하고,... 슬쩍 비꼬듯이 쳐다보는 눈이 나를 응시해온다.
그 눈을 지워버리려, 끈끈하게 감아오는 목소리를 털어버리려 머리를 흔드는 사이 머리위에선 카자르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하하하하..이거이거.. 생각보다 귀한 집 자식들이셨군. 대접이 소홀해서 미안할 지경인걸. 좋은 정보야. 암, 좋은 정보고 말고, 살려두면 나중에 협상에서 유용하게 써먹을수 있겠어.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버티는 영감들한테 당신들 자식이 이손안에 있소이다, 라고 하면 그래, 보나스님에게 협조할수밖에 없겠지. ”
“협조라니.. 무슨!!”
카자르의 말에서 나온 협상과 협조란 말에 우리가 동시에 카자르를 올려다보자 카자르는 바보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내려보고 있었다.
“후후. 아직도 모르겠나? 이제 저 점쟁이 계집년이 살아있든 죽어있든 크게 상관이 없어졌단 말이다. 아니, 오히려 살아서 앵무새처럼 지껄여주기만 하면 되지, 황위에 오를 분은 보나스님뿐이었다고, 처음부터 그리 예언되어졌다고 말이지”
이리타의 눈이 크게 떠진채 흔들렸다.
“설마..반란을 하려는 건가요?”
이리타의 질문에 카자르가 웃으며 한말은 이것이었다.
“어리석은 계집같으니, 이래서 소문은 믿을게 못된다는 거지, 미래를 비추는 눈이라고 알려진 로키타이가 이런 멍청한 계집년인줄 누가 알았겠어. 후훗..”
카자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맙소사....이미 시작된거야. 반란이..
“서..설마 로트레아성을 공격한건가?”
데런의 경악한 음성에 나는 흠칫, 놀라서 카자르를 올려다보았다. 한껏 비웃듯이 우리를 내려다보는 표정은 이미 긍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로트레아성을 공격했다고.....로트레아성을.......그럼.... 그럼.. 펠릭스형은..........?
불길함에 몸이 오싹 떨려왔다. ...무슨 짓들을 하는걸까. 이사람들은.
마물들과의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같은 인간들끼리 서로 피를 흘리며 뭘 얻겠다는거지..
도대체 무엇을....위해서...!!!....무엇 때문에..!!
페르산맥에서 내려와 바라보는 수평선에선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수없는 지금도 변함없이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어떤 알수없는 배반감까지 느껴졌다. 인간세상의 일따위 알바아니라는것처럼 아름답기만 한 새벽은 무서운 예감과 함께 그렇게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이 밝아오며 보이기 시작한 페르산맥은 희미한 안개가 껴있다. 나무들이 빽빽이 차있는 숲속에서 한가운데에 원자폭탄이 투하된것같은 모양새로 처참하게 훼손된 공간은 간밤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몸통이 반쯤 뜯겨있는 나무에 기댄체 앉아있는 아시리안의 몸역시 여기저기가 찢긴채 푸른 액체를 흘렀다. 그러나 그 상처들은 저절로 자연히 치유되고 있어 조금후에는 완전히 사라져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지체했다. 카레인 그 미친녀석이 걸레처럼 찢기면서도 끈질기게 매달린 통에 이꼴이 되어 아시리안은 적잖게 짜증이 나있었다. 결국은 새벽이 오기전에 공간이동으로 달아나긴 했지만 갈기갈기 찢겨진 몸을 끌고 도망치면서도 미친듯이 웃고있던 카레인을 생각하자 짜증과 분노가 치솟아오른다.
험악한 표정을 짓던 아시리안은 이내 눈을 감고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언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감정이란건.....절실하게 원하는 그리움은, 이런것인가....
기다리고 있을 녀석이.. 이렇게 보고싶다니. 만나는 시간을 기대하며 이렇게 들뜬 마음이 들다니..
익숙하지 못한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가 어색하고 쑥쓰러워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면서도 가슴속이 간질간질 해진다.
호숫가에서 새의 부리를 긁어주며 웃던 아르의 모습을 떠올리는 찰나 아시리안은 문득 눈썹을 치켜올렸다.
호숫가에 앉아있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르의 모습과 그옆에 편하게 앉아서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는 자신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두운 성의 복도에서 싸늘한 바람에 휘감겨 서있는 아르의 모습과 울고있는 녀석과의 입맞춤도..
뭐지..이 기억은? 꿈을 꾸지 않는 마족에게 있어 추억이란 현실에서 겪은 것만을 기억하는 것.
불쑥 나타난 알수없는 기억의 조각들에 의문점이 들려는찰나 갑자기 느껴지는 불청객의 기척에 아시리안은 인상을 사납게 구겼다..
카레인....이 미친 마족놈이 결국 끝장을 보자는 거냐!!!
광포하게 분노한 표정으로 이를 갈며 공간안에 들어선 누군가를 향해 공격을 가하려던 아시리안은 이내 멈칫, 행동을 멈췄다. 카레인이 만든 결계를 찢고 안에 들어온건 카레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시리안이 공격하기전에 가까스로 멈춘건 카레인이 아니어서가 아니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의 청보랏빛 눈동자와 길다란 청색 머리카락의 사이로 뾰족한 귀가 솟아나있는 저 다크엘프놈이 아르의 일행이기 때문이었다.
다크엘프 시오니가 아시리안쪽으로 곧장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인사하게 되는건 처음인것 같군.”
아시리안의 입꼬리가 이것봐라? 하듯이 살짝 올라갔다. .. 제법이군, 알고 있었다. 이건데..
“그래서?”
“찾고있는 마족이 있다.”
“그게 네눈앞의 마족은 아니다. 이건가?”
아시리안의 비웃음에 별동요없이 시오니가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처음엔 당신을 택할까 싶었지만, 그건 옳지 않은 일 같았다.”
“그거참 다행이로군. 가뜩이나 지쳐있는데. 하지만 원한다면.”
슬슬 짜증이 난 아시리안이 나무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석 때문에 봐주는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지, 다크엘프.
“당신이 나를 죽이면 그 인간, 아르가 슬퍼할테니까.”
아시리안은 눈살을 찌푸린채 다크엘프 시오니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죽을 자리를 찾는거냐. 다크엘프?”
아시리안의 말에 시오니의 입가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생겼다.
“나는 전사로써 내가 택한 상대와 싸우고 싶을 뿐이지.”
결국은 그게 그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아시리안은 눈앞의 다크엘프를 관찰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분명히 일반 엘프들보다야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마족을 상대하기엔 모자랄텐데.. 라는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확인까지 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힘조절을 잘못해서 정말 이 다크엘프놈을 자기손으로 죽여버리면 인간놈, 아니 아르를 볼 면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레인을 선택한건가? 카레인을 어디서 찾아야하는지 알려줄수는 있지만 글쎄, 참는게 좋을텐데..꽤 지저분한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희미한 미소를 지은 시오니가 아시리안에게 대답했다.
“당신이 내가 원하는걸 알려준다면 나역시 당신이 아직 모르고 있는걸 알려주겠다.”
농담반, 진담반의 태도로 일관하던 표정에서 장난스런 부분이 싹 가시고 아시리안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라. 성질 급한 내손이 네놈의 목을 비틀어버리기전에”
손이 아프다. 뒤로 묶여서인가라고.. 생각하다가 이내 그것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아픈쪽은 잘려진 손가락이었다.
프란에게 말했던 것처럼 만나도 상관없다고,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 나역시 아직 그때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거다.
용서하지 못한다고, 아시리안을 다치게 한것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 .. 로트레아성이 공격당해 펠릭스형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에 느끼고 있는 지금 이 감정이 걱정과 염려가 아니라고 나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아니야. 이건 아르휜의 감정일뿐이야. 내가 느끼고 있는게 아니야. ...... 나는, 나는,..
-괜찮다고...?..그 개자식이 네게 한짓을 용서하는거야? 이렇게 쉽게? 이렇게 빨리? 어떻게 그럴수 있어, 어떻게!!!-
어젯밤 프란이 내게 퍼부은 말들이 떠올랐다.
내게 한짓은 용서할수 있어, 하지만 아시리안을 다치게 한건 용서하지 않아. ....... 절대로 용서안해.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건, 아니 환상처럼 눈앞에 떠오르는건.......그렇게 떠올리지 않으려고 악을 쓰고 거부했던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누군가의 모습이었다. 그때 크로멜성에서 와이번들에게 공격당해 위태해보이던 펠릭스형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지금 로트레아성에서 벌어질 전쟁터에서 위험에 처해있을지 모를 모습이 환영처럼 머릿속을 휘저었다.
혼란스러워.. 머리가 아파.. ... 머리가...아파...
발밑이 흔들리고..무언가 발에 걸린다 싶은순간 몸을 추스릴 새도없이 풀썩, 몸이 밑으로 꺼진다. 발밑의 돌맹이를 못보고 발이 걸려 넘어진 것인지 아니면 몸에 힘이 없어서인지 땅바닥에 쓰러진채 숨을 몰아쉬다가 흙먼지가 입안으로 들어와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일어서려는데 등뒤로 손이 묶여있어 바로 일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빨리 일어나지 못해!!”
사납게 일갈하는 소리가 들리고 일어서라는건지 말라는건지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등에 채찍이 감겨 일어서려던 몸을 웅크릴수밖에 없었다. 숙여진 고개로 흑먼지가 부은 목안에 들어와 입밖으로는 계속 기침이 토해졌다.
“무슨 짓이냐!!!”
프란이 내앞을 가로막듯 나섰다. 그리고 나를 때린것같은 카자르를 올려다보며 어둡게 가라앉아 이를 가는 목소리로 한자한자 내뱉었다.
“나중을 생각한다면 지금 현명하게 구는게 좋을거다.”
“아하, 그 이용가치란 것에 대해서 말인가? 유감이로군. 나로선 네놈들을 그냥 살려두기만 해도 충분할것 같은데 말이야. 무슨 뜻인줄 알겠나. 정령사. 다시말하면 팔이 하나 남든 사지가 다 없어지든 네놈들을 살려두기만 하면 된다는 소리지. 크큭..”
“말을 내뱉을땐 신중하게 해. 지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참고 있지않아. 목숨따위 상관없다고 몰리면 당신들도 여기서 피를 봐야할거야.”
끝장을 볼수도 있다는 목소리에서 뭔가 알수없는 오라가 느껴졌는지 카자르가 한순간 말을 멈춘 틈을 타 나는 기침 때문에 더 까끌해진 입을 열었다.
“....프...란..그러지...”
마..라고 말을 하려는데 문득 시야에 구름 한자락없이 푸른 하늘이 보인다. 그리고 무언가가 보였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뜨는데 이번엔 좀더 분명하게 까만점이 보였다. 잘못 본건가 싶어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하나였던 점은 여러개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 까만 점들은 점점 수가 늘어가고...........아.............저건!!!! 눈을 크게 뜬채 나는 떨리는 입술을 짓깨물었다. ...... 저건 골치아픈 와이번들이다!!
-끼아아아아- 라고 희미하게 울리는 괴성의 소리들...........처음엔 점이었던 것들은 가까이 다가오면서 점점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와이번입니다!! 카자르님!!”
“저것들이!!! !!”
시건방진 포로들에게서 신경을 끈 카자르와 그 일당들이 모두들 하늘로 고개를 치켜든순간 프란이 데런쪽으로 알수없는 눈짓을 하자 데런이 꼼지락거리더니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작은 소도였다. 와이번들의 공격에 우리쪽으로 신경을 못돌리는 틈을 타 작은 소도로 밧줄을 푼 우리였지만 우리역시 와이번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상태. 흉폭해보이는 거대한 와이번 수십마리가 땅위의 인간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사냥을 시작하고 있었다.
와이번들이 골치아픈 것은 날카로운 발톱이나 소름끼치는 이빨이외에 날개가 있어 허공을 날아다니며 빠르고 쉽게 공격할수 있다는 것때문. 당연히 방어하기도 범위가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 어느쪽에서 공격해올지 알수가 없으니까.
“빨리 무기를 찾아!!”
모여있으면 공격받기가 쉬워서 따로 흩어지며 각자 무기를 찾았다. 최대한 빨리 달리는데 땅바닥에 커다란 새의 몸짓이 그림자로 비춰졌다. 등뒤가 할퀴어진다 싶은 순간 본능적으로 바닥을 구르고 흙더미를 손에 움켜쥐었다. 빠른 속도로 몸을 옆으로 굴리자 날카로운 발톱이 내가 있던 누워있던 자리를 콱,파헤친다. 헛발질을 해 화가난 눈으로 희번득거리는 와이번을 향해 한가득 손에 움켜쥔 흙을 화악, 뿌렸다.
-끼아아아-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주춤한 틈을 타 달리는 눈앞에 검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뜯겨져 나간 팔과 함께 손에 아직 쥐어진 검이었지만.. 한순간의 망설임을 떨치고 그 검을 쥐며 몸을 재빨리 숙였다. 다시 허공을 슈칵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숙인 등에 스치듯 지나가는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졌다.
“크윽...!!”
아픔을 참고 몸을 돌리며 그대로 검을 쑤셔넣었다. 발톱으로 나를 움켜쥐려던 자세의 와이번이 다시 고약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그대로 검을 뽑아 머리위에서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와이번을 향해 찔렀다. 날쌘 몸놀림으로 검을 피한 와이번이 날개를 위협적으로 파닥거리며 쇠같은 발톱으로 검을 쳐내려했다. 그 무서운 기세에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는척 하다가 기세좋게 달려드는 와이번의 옆을 공격했다.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와이번의 한쪽 날개죽지가 길게 갈라져 쓰러지자 와이번들과 인간들의 치열한 싸움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땅바닥에 쓰러진 인간의 몸에 떼로 달라붙어 식욕을 채우는 와이번들의 끔찍한 모습들과 그 아우성 와중에 케드릭, 데런, 프란, 이리타들의 모습이 간간히 눈에 띄었다. 각자 무기를 챙겨들고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모습들이..
비명소리와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것처럼 희미하게 들려오고 귓가로 내입에서 뱉어지는 거칠어진 숨소리가 웅웅거리듯 크게 들려왔다.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박동처럼 불규칙한 숨소리... 불에 타는 것 같은 등의 아픔.... 손에서 자꾸만 미끌어져 내릴것 같은 검이 무거워진다 싶은 순간 눈앞에 까만 어둠이 덥치듯 덤벼든다.
-바보같은 자식..이건 널 위해서였어, 널 위해서였단 말이다!!!!!-
그때 크로멜성에서 빠져나온 이후로 생각해본적 없던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고통을 준건 자기면서 오히려 더 고통스러워보였던 그 음성...... 그리고 일그러진 붉은 눈동자...
간밤에 우리를 공격했던 마족의 눈처럼...모든게 네잘못이야, 라는 눈이었다. 모든게 네탓이다, 라는 눈이었다. 너만 아니었으면!!! ..이런 증오서린 눈이었다. 그 눈에 아직도 목이 졸려지고 있는것 같아 아픈 목을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러다 멈칫, 멈추고 새끼손가락이 잘려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 아프다, 방금 잘린 것처럼 고통을 호소하는 손가락을 멍하게 내려보다가 흠칫.. 정신을 차렸다. 지금 무슨짓을...!!
안돼, 지금은 생각하기에 적당하지 않아.
머리를 잘잘 흔들고 손에 쥐어진 검의 감각을 느끼며 꽉 움켜쥐려고 해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움직여야 할 때라는걸 알고있는데.. 몸은 제기능을 잃어버린것처럼 축 늘어지고 발밑이 자꾸만 꺼져가려 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땅을 내려다보자 멍하게 서있던 자리엔 붉은 핏물이 땅에 스며들어있고 그 위에 새로운 핏물이 뚝, 뚝 떨어져내린다.
등이 아파......그때처럼.. 지하감옥에서 채찍을 맞았을때처럼......아..파.. .....아시리안....
발밑이 푹 꺼진다 싶은 순간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르!!!!!!!!!!!!!!!!!!”
아득하게 먼곳에서 들려오는것 같은 프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끔찍한 참상이 벌어지는 지상과는 다르게 눈부시게 푸르고 푸른 하늘을..
비명으로 흔들리는 대지에 비해 잔인할만큼 고요한 하늘을..
등이...아파.........아시리안... 등이....너무..아....파.........
“안돼!!!!!!!!!!!!!!”
어디선가 들리는 심장을 잡아뜯는것 같은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몽롱한 눈을 뜬 내 시야 한가득 채운건 와이번의 날개였다. 푹, 가슴쪽으로 살을 찢는 날카로운 아픔이 파고들었다. 가슴에서 쏟아지는 핏물처럼 입밖으로 한웅큼 피를 토해내며 나는 천천히 손에 쥐고있는 검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시리안....
안돼, 라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와이번의 날카로운 발톱에 꿰뚫린 아르에게로 달려가려던 프란은 몸을 멈출수밖에 없었다. 프란뿐만이 아니라 데런, 케드릭, 이리타들도 모두들 얼어붙은듯 멈춰있었다. 그리고 와이번들과 싸우느라 정신없던 카자르일행들 역시 멈출수밖에 없었다. 방금전까지 살기등등해서 달려들던 와이번들이 모두 땅바닥에 떨어진채 고통스럽게 날개와 몸뚱이를 비비적거리며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좋아졌지만 이해할 수가 없어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카자르는 화들짝 놀라서 주춤 뒤로 물러섰다. 말이 나오지 않아 버벅거리며 그가 손짓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에 보이는건 2년전에 그 악독한 마법사놈이 자리하고 있었다.
절대로 잊을수 없는 악몽을 준 놈!! 저놈에게 당해 거의 죽을뻔했다. 힐링포션이란 힐링포션은 전부 들이붓고 치유마법이란 치유마법은 있는대로 받고 몇 개월만에 겨우겨우 낫긴 했지만 몸은 전체적으로 끔찍한 흉터로 뒤덮인데다가 결정적으로 남성기능이 정지해버렸다. 그러니 카자르에게 있어 저 마법사놈, 그리고 그때 마법사놈이 구해간 저 애송이놈은 철천지 원수보다 더한 존재들이었다.
일단 애송이놈을 사로잡았으니 여러 가지 고문을 동원해 마법사놈을 알아내 잡아들이리라.. 이를 갈았건만, 그 이가 갈리게 증오스러운 두녀석이 딱하니 눈앞에 붙어있는데도 이 원수!! 라고 감히 덤벼들지 못하는건 이유가 있었다.
와이번 수십마리들이 동시에 땅바닥에서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며 눈알을 희번득거리는 희귀한 광경보다 주위에 늘어선 사람들이 얼이 빠져서 동시에 쳐다보는 곳에 있는건.. 바람 한점 안부는데 긴 머리카락을 미친듯이 휘날리고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에서 나오는 눈부신 파란 빛이 가슴과 등이 피투성이가 돼서 안겨있는 애송이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 죽어라. 비천한 것들아” 라고 차가운 목소리가 내뱉어진 순간 아르를 제외하고 이 자리에서 아시리안을 알고있는 세사람중의 한명에 속하는 케드릭이 자기도 모르게 물러서려고 하다 발을 헛디뎠는지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던 케드릭은 [죽은 비천한 것들]이 자신들이 아니라 와이번들만임을 알아차렸다. 땅바닥에 떨어진채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고 경련하며 비비적거리는 와이번들이 모두 움직임이 멈춰있었던것이다. 한순간에.
케드릭은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은채 눈을 경악으로 크게 떳다. 이제야 저 소름끼치게 강한 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저...저자도..........그 녹색마족처럼.. 마족.... ...!!!!!!. 마..마...마족은 마족인데... 마족인데....마..마족이 왜 아르놈을.. 왜...
검푸른 머릿결을 출렁거리는 마족이 축늘어진 아르를 품에 안은채 일어서는걸 멍하게 바라보던 프란이 한발자국 앞으로 내딛었다. 그리고 결심한듯 다시 한걸음 내딛고 마족에게 아니 아르에게 다가섰다. 가까이서 본 아르는 이제 상처가 없어 자는것처럼도 보였지만 안색에 핏기가 전혀 없었다.
“...주..죽은겁니까?”
그정도의 상처를 입고 살아있길 기대하는게 힘들겠지만 그래도 .. 싶어 프란이 억지로 끄집어내듯 말하자 아시리안이 대답했다.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말은 프란의 말에 대한 대답이라고 보기 모호했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인지.. 죽어있다는 말인지.... 게다가 프란에게가 아니라 온몸을 축 늘어뜨린채로 안겨있는 아르를 쳐다보며 한 말이라 더 그러했다. 몸속의 피가 전부 빠져나가버린것처럼 하얗게 질려있어 시체처럼 보이는 아르를 들여다보며 자기자신에게 말하듯.. 아니, 듣지 못하는 아르에게 말을 거는것처럼 아시리안이 다시한번 힘줘서 말했다.
“죽게 내버려두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