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오포드가의 귀공자-32화 (32/36)

32.

무시무시할만큼 거대한 녹색의 빛을 발하는 무언가가 눈앞을 향해 달려드는 찰나 둥그스런 원형막에 부딪쳐 사라졌다. 너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어 조금 나중에야 우리앞에 방어막이 쳐져있는것을 눈치챌수 있었다.

나는 이리타, 프란, 데런등이 바라보고 있는 저녁하늘을 따라서 올려다보며 멍하게 입을 크게 벌렸다.

뭐...뭐야..저..저건??

우리를 공격한 녹색빛의 주인공은 허공에 떠있는 기묘한 차림새의 인간인듯 싶었다. 인간이 맞다면의 얘기지만.

공격이 무산으로 돌아가 화가 난건지 녹색 인간의 몸을 감싸고 허공으로 이리저리 흩날리은 녹색 줄기들이 성내듯이 빠르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속살이 거의 비치는 야시시한 차림새로 양손을 넓게 벌린 녹색 인간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지마라!!!!!“

녹색인간을 올려다보며 시오니가 입가를 비틀듯 웃으며 높낮이 없는 말투로 대꾸했다.

"당신이 뭘 원하는지야 내 알바 아니지. 왜 인간들을 공격하는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그러나 인간들을 죽이는 일은 나를 상대한 후에야 가능할거다. "

“감히 엘프따위가 나를 막을수 있으리라 보는가!!"

살기등등하게 분노한 그가 우리쪽으로 다시 한손을 내뻗어내자 손가락끝에서 녹색빛이 뿜어져나왔다.

저.. 빛은...그래, 그거야.....아시리안의 푸른빛과 비슷한....!!!

"저...저게 뭐지? 처..천사인가?"

케드릭...어떻게 저모습이 천사로 보일수가 있어요? 저 이상한 풀갈퀴들이 공격적으로 흉흉하게 날뛰잖아.

아마..저건.... 내가 짐작하고 있는 바를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한건 프란이었다.

"멍청한 외팔이놈같으니!!!!! ..........저건....저건.. 마족이다!!"

아무리 막나가기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프란일지라도 지금 상황에서 쫄지 않을수 없었는지  케드릭을 구박하는 프란의 목소리에는 다소 힘이 없었다. 그말을 시작으로 목구멍이 탁,막혔던 말문이 조금 트였는지 데런이 신음하듯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마...마족이 왜 우리를 공격하지? 지금 저거 우리를 공격하는거 맞지?"

우리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유에프오를 본 지구인처럼이나 얼이 빠져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뿐이라 한가롭게 수다나 떨고 있을 여유가 없다는게 정답일것이다. 어쨌거나..저사람, 아니 저 마족이 저렇게 눈찢어지게 노려보는것좀 보라고. 데런.. 그럼 저게 그냥 인사나 나누자는 거 같아?

아시리안의 푸른빛처럼 강력한 녹색빛의 공격을 막아주고 있는건 시오니인듯.. 마족에 맞서 일행주변에 방어막을 치고있는 시오니가 엄청 대단하다 싶었지만 검은 피부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는건 시오니에게도 그다지 여유가 없다는걸 뜻했다.

왜 나타난거지?...왜..우릴 공격하는거지?...혹시.. 아시리안과 관계가 있지는 않을까.

"야, 점쟁이!! 너는 마족이 나타날거라는 것도 못마추냐? 이거 순 엉터리 뻥쟁이로세!!!"

"말조심해!! 이 날라리정령사, 나는 운명과 카드점만 보지 1초후에 무슨일이 벌어질지까지 알수는 없다고!!"

"이런 사이비점술사를 쫒아서 아까운 병사들이나 보내다니 어떤 황자인지 싹수가 노랗다. 노래!"

프란...이리타.. 나는 지금 이말을 하고 싶어. 마족이 저렇게 째려보고 있는데 지금 그렇게 말싸움 할때냐고.

시오니의 방어에 틈이 생겨 녹색빛이 몸에 살짝 닿기라도 하면 우리는 산채로 맷돼지통구이처럼 되어버릴걸?

나는 허리춤에 꽂혀있는 검집에서 검을 빼들었다.

우리가 다 떼로 덤빈다해도 저 마족을 이길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죽여라, 라고 의연하게 얌전히 죽어줄 마음도 결단코 없다.

"실피드!!! 한밤중에 멋대로 찾아온 방문객에 예의를 좀 가르쳐줄까?"

아마도 저렇게 기습공격하는데 대단히 재미들린것 같은 프란이 외치자 녹색마족의 하늘거리는 녹색줄기가 강하게 한쪽방향으로 휩쓸렸다. 그러자 마치 개미에라도 물린것 같은 귀찮은 표정으로 아름다운 미간을 살짝 찡그린 마족은 허공에서 무언가를 잡아채듯 손을 흔들고 뭘 비틀었다.. 쿨럭, 기침을 하는 프란의 입에서 핏물이 새어나왔다.

“프란!!!”

나도모르게 놀라서 부르자 괜찮다는듯 한손을 들어보이며 프란이 전혀 괜찮지 않은 창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길..강제소환이란 말이지..... .."

구슬땀을 흘리며 시오니가 중얼거렸다.

“정령사, 방어막 칠수 있겠나?”

계속 방어막을 치고있어서 공격을 못하겠던지 시오니가 말하자 프란이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신경을 좀 돌려놓을수는 있을거야. 그때를 놓치지마”

품안에서 여러개의 암기를 꺼낸 이리타가 말을 마치고 녹색마족 쪽으로 암기를 휙 내던졌다. 그러나 녹색마족이 귀찮은 표정으로 손을 휘젖자 날아오는 암기의 방향이 우리쪽으로 바뀌고 프란과 시오니가 그순간 공격과 방어를 맞바꾸었다.

시오니가 공격주문을 외우고 허공쪽을 날카롭게 바라보자 녹색마족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겨우 엘프따위에게 내가 질것같은...........크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 녹색마족이 허공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져내리는 동시에 이리타가 뒤로 쓰러졌다.

“이리타!!!”

이리타의 어깨엔 방금전 녹색마족이 우리쪽으로 되돌려보낸 암기 하나가 꽂혀있었다. 피가 줄줄 새어나오는 이리타를 돌볼 틈없이 우리는 뒤쪽으로 다시 돌아서야했다. 땅바닥에 추락한 녹색마족이 흉흉한 표정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내려 기괴하게 꺽인 목과 팔다리들이 눈앞에서 천천히 원상태로 되돌아오는데 보고있는 우리가 다 섬찟할 정도였다.

검을 들고 방어막밖으로 뛰쳐나가자 뒤에서 프란이 내이름을 불렀다.

“..큭, 아,아르!!!!!!!”

기회는 지금뿐일지도 몰라. 저 마족의 모습이 원상복귀가 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프란은 내상 당했고 이리타도 다쳤고 시오니역시 마법을 쓸수있는 마나가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언제까지 방어막안에 숨어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공격이 최상의 방어인 셈이다.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꺽인 고개를 원상복구시키고 있는 기괴한 모습의 녹색마족을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기괴하게 맞춰지던 마족의 얼굴에서 사납게 치켜뜬 차디찬 녹색 눈빛이 곧바로 나를 쏘아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녹색마족이 번개같은 손놀림으로 내목을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윽!!!”

내검은 마족의 가슴을 단숨에 꿰뚫었다. 그러나 검을 가슴에 꽂은채 찐득한 녹색물질을 토해내면서도 목을 조르고있는 손아귀의 힘은 줄지 않고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 힘을 줘서 졸라왔다. ..수..숨막혀..눈앞이 가물해져오는 걸 느끼면서도 필사적으로 아직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더 깊숙이 찔렀다. 푸욱, 들어가는 검과 함께 나를 노려보는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지만 그럼에도 내목을 쥔 손아귀의 힘은 악착같았다. 나는 점점 더 검을 집어넣었고 마족은 내목을 틀어쥔 손아귀에 힘을 점점 더 가하고.....

검의 손잡이를 쥔 부분까지 완전히 박아넣자 눈앞이 가물가물해져왔다.

숨막혀 죽기전에 목이 부러져서 죽을것같아....

.........아시리안.......

“크크...감히..감히..너같은 인간 따위가...너같은..인간따위..가..!!”

끔찍하게 뒤틀린채 목에 비스듬히 꺽여있는 머리에서 소름끼치게 차가운 녹색눈동자만이 무시무시한 증오를 품고 나를 노려보며 이를 가는 증오를 토해낸다.

“너같은 인간 따위가..그를 가질수 있을것 같....”

무슨 소리야.. 그라니, 가진다니..?.. 무슨... 하다가 머릿속으로 아시리안을 떠올렸다.

설마........설마.........아시리안을.. 아시리안 때문에....이런 짓을 한거라고.. 그런거라고 말하는건 아니겠지..?

목이 졸려 숨이 막혀오면서도 증오를 품고있는 녹색눈동자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숨이 탁, 막힌다 싶은 순간,

“아르!!!”

내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목을 조르는 손아귀에서 놓여났다. 아니, 손아귀에서 놓여난건 아니었다. 내목을 쥔 녹색마족의 팔을 데런이 검으로 서걱 잘라내 버린것이다. 그리고 검에 꿰뚫려있는 마족의 몸에 케드릭이 할버드를 찔러넣었다. 목을 쥔 팔과 함께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급작스럽게 들어오는 산소에 고통스러워하는데 귓가에 마족이 지르는 비명이 뒤늦게 울렸다.

“크아아아아악!!!!!”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바라보자 녹색마족은 한층 처참한 몰골로 케드릭과 데런, 시오니, 프란들에게 공격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순간 찐득한 녹색물질을 질질 흘리면서 뒤로 물러서던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내쪽을 노려보았다.

가슴한복판이 검에 꿰뚫린채 한걸음, 두걸음 물러서면서도 악에 찬 증오의 눈길로 원초적인 증오의 감정을 토해낸다.

“크....큭...용...서..못..해.................용..서..못..”

그 증오속에 숨겨진 무언가를 헤아리기도 전에 녹색마족이 기괴한 형상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녹색마족이 사라진뒤에도 나는 어둑어둑한 저녁의 풍경아래에 땅바닥에 처참하게 떨어져있는 녹색마족의 팔에서 시선을 뗄수가 없었다. 뒤늦게야 주저앉아 있는 몸이 덜덜 떨렸다. 지난번 조브의 저택에서 아시리안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광경이 싫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가 떨고있다는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채 마족이 움켜쥐었던 목을 손으로 감싸는 내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얹어질때까지..나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아르, 괜찮아?”

너야말로 괜찮지 않아보이는걸, 프란,

정령이 강제소환당하면 정령을 소환한 정령사가 강한 타격을 입기 때문에 프란역시 상당한 데미지를 참고 있을 것이었다.

“아...괘.....”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목소리가 안나와서 얼굴을 찡그리자 마족의 팔을 검으로 쿡쿡 찔러보던 데런이 말했다.

“목을 너무 심하게 졸려서 그럴거야. 말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있어. 좀 지나면 나아질테니까.. 그건 그렇고, 내가 마족을 만나게 될줄은 몰랐는데.. .. 게다가 마족이 도망치기도 하고.. ”

도망치듯이 모습을 감춘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쪽의 피해도 컸다.

이리타는 어깨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프란도 겉으로 보이는것보다 심한 내상을 입은것같았다.

게다가 간신히 도망치게만 할수 있었을뿐 ..검을 손잡이까지 찔러넣었고 팔을 잘라내고 할버드로 베고 .. 그뒤에 데런, 케드릭,시오니와 프란등이 여러차례 공격을 해댔는데도 죽이지는 못했다. 그것도 그 녹색마족이 내가 검을 찔러넣는 순간 내목을 조르는 일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 땅바닥을 구르고 있는건 마족의 팔 한쪽이 아니라 우리들이 될수도 있었다.

처음부터 시오니가 없었다면....우린 저 마족의 손에 몰살됐을거야...라고 생각하며 시오니쪽을 보자 시오니는 무리하게 마나를 운용한 탓인지 입가에 조금 흘러나온 피를 닦으며 녹색마족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세상에 저 시오니가 웃다니.. 게다가 .. 기분도 엄청 좋아보여.. 원래 아는 사이냐고 물어보고 싶을만큼...말이지..

어쨌건 우리들중의 누군가가 얼빠진 공황상태에서 간신히 탈피해서 그 마족과 아는사이였냐고 시오니에게 정중히 물으려던 찰나 시오니가 입을 열었다.  피흘리며 누워있는 이리타를 향해 (마족의 엄청난 공격을 받고 얼이빠진 보통사람들인)우리가 들으면 끔찍할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당신 말이 맞군. 당신옆에 있으면 강한 상대를 만날수 있다는. 그게 마족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나쁘지는 않군"

“....훗...다..당연..하..지..”

통증 때문에 덜덜 떨리는 입술을 깨물면서도 이리타는 파리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시오니가 아무리 마법을 잘써도 살아있는게 마력 그 자체인 마족과 비할까.. 자칫, 죽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는데 시오니는 진심으로 즐겁다는듯 웃고 있었다.

"아무리 다크엘프라 해도 엘프가 싸움을 즐긴다는건 못들어봤는데?"

창백한 얼굴로 쿨럭거리며 프란이 묻자  시오니가 입술을 실룩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변종이겠지. 나는 강한자와의 싸움을, 그리고 피를 즐기니까"

입술의 피를 닦은 손등을 혀로 낼름 핥으며 말하는 시오니의 눈과 내눈이 마주쳤다.

...진심이다. 지나번에 시오니가 독수리인 아시리안에게 조금 관심을 보인건 말그대로 한판 붙어볼 생각이었던 걸까?..

제발, 그건 좀 참아줘요. 시오니, 아시리안의 성질은 가끔 감당이 안될만큼 고약하다구요.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나는 어둑어둑한 땅바닥에 떨어져있는 마족의 팔쪽에 다시 시선을 보냈다.

그 마족은 왜 자기 팔이 잘리는것도 모를정도로 내 목을 조르는 일에 집중했을까,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노려봤을까..

모든게 네잘못이야, 라는 눈이었다. 모든게 네탓이다, 라는 눈이었다. 너만 아니었으면!!! ..이런 증오서린 눈이었다.

억지로 시선을 떼고 스산한 검은 구름이 짙게 흩어져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이 깔리기 직전인 하늘..... 아직 아시리안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리타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남아있는 힐링포션을 다 들이붓고나서야 겨우 지혈이 되었으니까.

“될수있으면 가고자 하는곳까지 동행했으면 좋았을텐데, 함께 가는건 여기까지가 될것 같군.”

이리타의 상처를 돌보고 있던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시오니의 말에 시오니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시오니가 바라보는 쪽은 그가 처음부터 함께 있었던 이리타쪽이었다. 이리타는 우리가 놀란것만큼 놀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헤어지자는 말인데도 서운한 표정은 커녕 핏기가 없어 피곤해보이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까지 지은 이리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원하는것은 찾은거야?”

원하는것? 그게 무슨.... 이리타의 말에 의아해서 바라보는 시오니의 표정은 뭔가 후련해보이기도 했다.

“잠깐, 잠깐만요. 이리타, 그리고 시오니, 그렇게 급하게 떠날건 없잖습니까. 이왕이면 로트레아성까지 함께 간다음에 떠나는게 어때요?”

데런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짐작할수 있다. 이리타를 쫒고 있는 사람들이 신경쓰이기 때문이라는걸.

로트레아성까지 말을 줄곧 달리면 만 하루정도의 시간이 소요될테고..  그러니 로트레아성까지 무사히 도착하면 그때 떠나는게 좋지 않느냐.. 뭐 이런뜻인것 같지만..  시오니가 가겠다고 하는건 분명 그만의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늦어지면 안되는 그만의 이유가. 그리고 우리들중 유일하게 그 이유를 알고있을 이리타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 잘가. 시오니.”

“아니, 이봐요. 이리타!!”

시오니를 제일 붙잡고 늘어져야할 장본인이 서운한 기색도 없이 안녕을 고하자 데런이 깜짝 놀라 이리타를 말리려고 들었지만 나는 우리들중 누구도, 이리타역시 시오니를 말릴수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오니에게서 느껴지는건 말려도 소용없었을 것 같은 단호함, 아니.. 다른 사람이 말릴 수 없는 자신만의 의지.

어차피 이리타를 제외하곤 일행들과 말한마디 안섞는 시오니가 이리타에게만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향한 쪽은 페르산맥쪽이었다. 오크들이 우글우글 거리는 지옥같은 페르산맥으로 왜 다시 올라가려는 거지..라고 의문이 든 순간 조금전.. 돌위에 앉아있던 자주빛 머리카락의 이상한 미남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유유자적하게 긴풀잎을 조곤조곤 씹으며..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것도 같은 남자..........

그리고 그 남자가 페르산맥으로 올라간후 얼마 안있어 하늘위로 솟구쳐 오른 아시리안..그리고 우리를 공격해온 마족...

아........., 그가 기다린건 ..... 아시리안.. 이었어, 아시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어떤 예감 때문에 나는 어두움이 불길하게 물든 페르산맥으로 올라가려는 시오니의 뒤를 쫒아갔다.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를 들은 시오니가 뒤돌아서 나를 확인하는 것을 보면서도 말이 나오지 않아 급한 마음에 시오니의 팔을 잡았다.

“...시오..니....혹..시..”

혹시 당신은 그남자를 찾아가는 건가요..당신이 원하는건 ..설마... 목이 심하게 졸려진 탓에 목소리가 안나와서라기 보다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좋을지 모르겠어서 쉽게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시오니가 피식, 웃었다. 그 비싼 미소를 대폭 바겐세일한건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마음이 불안했다.

시오니가 아까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했던건 그역시 마족이라는 뜻이었을까.

그남자가 걸어가자 하늘위로 날아간 아시리안....아시리안이 사라지자 때를 맞춰서 공격한 녹색마족.....

그렇다면 그 마족은 아시리안을 유인하려 나타났던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녹색마족은 우리를, 아니 나를 무시무시하게 원한에 찬 눈으로 노려보며 죽이려 했으니까.

눈이 마주친 순간 알수 있었다. 녹색마족이 죽이려고 했던 것은 바로 나였다는 것을.

“독수리의 모습을 하고 있던건.. 역시 마족이었던 건가?”

흠칫, 놀라는 내 눈동자를 보고 대답을 알아차린 시오니가 이어 말했다.

“정말 이상하군. 어째서 마족이 인간을 보호하려 했던거지?”

“보호..하려.. 했다니..그건..”

“길목을 가로막고있던 마족에게서, 그 마족의 눈은 당장이라도 결판을 내고 싶어 초조하고 조급해보이는 눈이었다. 그 살기어린 눈을 참게 만든건 너와 함께 다니는 독수리였지.., 우리를 공격했던 마족은 아마도 힘이 약한 마족일거다. 그래서 그 다른 마족이 유인하는 역할을 담당했을테지”

그래요. 그런건 짐작하고 있었어. 지금 내가 궁금한건.. 아니, 알고싶은건..

“걱정할거 없다. 인간, 내가 찾아가는건 너와 함께 다니는 독수리가 아니니까.”

시오니, 나는 아시리안만 걱정하고 있는게 아니야..당신역시 걱정스럽다고 생각해요.

당신, 왠지 불안하고 위태해 보여.. ....

“....조심..하세요..시오니..”

듣기 싫게 갈라진 목소리로 내가 말하자 뭔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던 시오니가 아직 팔을 잡고있던 내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아차..싶어 손을 떼려는데 그전에 시오니가 내손등에 손을 얹었다.

시오니?.... 내손이 싫어서 떼어내는거라고 보기엔 어려울만큼 오래 겹치고있던 시오니의 손이 슬그머니 내손을 놓아주고.. 그뒤에야 시오니의 시선이 다시 내게 건너왔다.

“지난번에 이리타가 한말은 사실이다. 인간.”

지난번에 이리타가 한말이라고? 그게 무슨..?  하는데 뭔가 웃고있는것 같기도 하고.. 뭔가 아쉬운것 같기도 한..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시오니가 말했다.

“너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말,”

그 말의 의미를 해석하기도 전에 돌아선 시오니는 어둠이 완연한 페르산맥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시오니의 모습이 어둠에 물들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나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이 시오니를 보는 마지막 순간이 될거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느껴졌다.

시오니가 자신만의 의지로 찾아가는건.. 그 자주빛 머리카락을 한 남자, 아니 마족이었으니까.

깊은 어둠속  작게 쌓아올린 장작더미에서 타닥타닥 불꽃이 타오른다. 우리는 결국 페르산맥을 내려가지 못했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로트레아성에 빨리 도착하는게 시급하지만 이리타의 상처도 힐링포션으론 해결되지 않을만큼 깊었고 프란의 내상도 생각보다 더 심한듯했고 나역시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목이 심하게 졸려질때는 부러지는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정도였지만 다행히 목뼈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목은 거뭇거뭇한 멍과 함께 심하게 부어있었다. 해서 말하는게 편치않은건 물론이고 먹을것은 고사하고 물을 마실때조차 목구멍안으로 넘길수가 없는데다.. 지금은 힐링포션까지 떨어져 붓기가 좀 가라앉을때까지는 참을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 몸상태가 안좋은것 보다는 아시리안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어 걱정하고 있었다.

“아르,”

타닥타닥 불꽃이 타오르는 장작더미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나무에 기대 비스듬히 누운채인 프란이 보였다. 자고있는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잠을 자지 않은건지, 아니면 자다가 깬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프란은 모닥불앞에 앉아있던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잤..어?”

갈라지고 비틀려 도무지 내 목소리 같지않은 쉰 목소리로 말하는 사이 프란은 비스듬히 누워있던 자리에서 주섬주섬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목은 좀 어때?”

나는 불꽃 때문에 이리저리 흔들려보이는 프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너...는?”

프란역시 피식, 웃었고 우리는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나는 소리없이 끄끄..거리는 괴상한 웃음을 지어야 했지만..어쨌거나 우리꼴이 서로 말이 아닌건 사실이니까. 시오니는 녹색마족이 약한 마족일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마족을 상대로 이정도의 부상만 입은걸 대단하다고 해야하나.. ..그것도 시오니가 없었으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마주보고 있지도 못하겠지. 프란과 이렇게 웃고 있지도 못했을테고.  이런저런걸 생각하며 웃음이 차츰 가라앉아 가던때 프란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르, 페르산맥만 내려가면 나와 함께 가자.”

대답대신 응? 하는 얼굴로 돌아보자 프란은 붉은 불꽃이 일렁거리는 모닥불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로트레아성으로 가선 안돼.”

안돼? 왜? 하다가 나는 왠지 다시 소리없이 웃음을 지었다. 끄끄..거리는 웃음을 웃자 프란이 이상하다는듯 나를 돌아보았다. 자기말을 못알아듣는다고 생각해선지 답답하다는 얼굴의 프란이 이내 뭔가를 말하려는걸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만나도..상관없..어..”

“...뭐..?.....너...”

그래, 로트레아성에는 야나카황자가 있고 야나카황자옆에는 펠릭스형이 있겠지. 프란,

너는 그래서 로트레아성에 가지 말라고 하는것일테고,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정말로 더 이상 무섭지 않아.

물론 편하게 볼수는 없겠지만.....더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아.

“...무슨 소릴 하는거야!!! 그놈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 잊었어?!!!”

급작스런 무언가를 쏟아내듯 울컥, 하며 내쪽을 돌아본 프란은 미처 피할새도 없이 내 양어깨를 움켜쥔채 낮게 소리쳤다.

.........프란........??....프란이 왜 화를 내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아니 이런 상황이 이해가지가 않아서 나는 프란이 꽉 쥐고있는 양어깨가 아파와도 눈만 깜박거릴수밖에 없었다.

“그 개새끼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프..란.....?....아파...놔..줘..”

쉰 목소리로 말하는데도 프란은 내 양어깨를 움켜쥔 손을 놓지 않았다. 단지 손아귀에 꽉 쥐었던 힘을 뺐을뿐..

무언가를 묻고 싶은 시선이, 마치 물어봐선 안되는것을 억지로 물어보는것 같은 시선이 ..나를 아프게 응시하고 있었다.

..크로멜성의 지하감옥에서 펠릭스형에게 난폭하게 폭행당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나를 보던 그때처럼..

“...나는..이제..괜찮아..”

나는 괜찮아졌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건 너잖아. 프란.. 그때와 똑같은 눈으로 나를 보는건 너라고...

“하.....괜찮다고...?..그 개자식이 네게 한짓을 용서하는거야? 이렇게 쉽게? 이렇게 빨리? 어떻게 그럴수 있어, 어떻게!!!”

이리타나 케드릭, 데런등이 깰지도 모르는데 프란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프란..?”

“그 미친 개자식이!!! 그 개자식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그런짓을 해놓고 그자식이 지금 누구와 약혼했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약혼? ..펠릭스형이 약혼을..........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가 약혼한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거지..?

그게 왜.. 하는데 갑자기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프란이 내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떠밀리듯이 상체가 뒤로 벌렁 넘어가고 풀위에 털썩 눕혀져 위를 바라보자 초췌해보이는 이리타가 유달리 개운한 얼굴로 미소짓고 있는게 보였다. 그리고 이리타의 손에는 방금 프란의 뒷통수를 가격하는데 쓰인것 같은 냄비가 들려 있었다.

“..이..리타?”

놀라서 갈라진 목소리로 이리타의 이름을 부르는 사이 내 가슴쪽에서 꿈틀거리며 뒷머리를 감싸쥐고 일어난 프란이 이리타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무슨 짓이야!!! 이 점쟁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프란이었지만 이리타는 태연하게 손에 쥔 냄비를 흔들면서 맞받아쳤다.

“나중에 울고짜고 할까봐 도와준거야. 호모씨, 후회는 너무 늦게 해서 후회인거야. 하면 안되는짓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지.”

“내가 무슨짓을 했다고!!!!”

“어머, 아르를 덮치려는거 아니었어?”

노여움에 길길히 날뛰는 프란을 향해 가증스럽게도 순진한척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리타가 한말에 나는 풀밭에 벌렁 누운채 할말을 잃어버렸고 프란은 아픈 뒷머리를 움켜쥔채 돌이 되어 굳어버렸다. ...이리타, 오해예요. 오해...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걸? 저걸 보라고.”

어깨를 으쓱하며 이리타가 가리키는 쪽을 보고 나는 더더욱 할말을 잃어버렸다. 케드릭은 무지 고민되는 얼굴로 할버드를 손에 쥘락말락 한 자세였고 데런역시 친구가 죄를 범하는걸 보느니 단칼에 응징하는걸 택하기로 결정했는지 검을 손에 쥐고 있다가 프란과 내가 쳐다보자 헛기침을 해대며 슬그머니 허리춤에 다시 집어넣고 있었다.

정말이지.. 다들 무슨 생각들을 한거야..그건 그렇고 그럼..깨있으면서 지금까지 모른척 했다는거잖아? ..사람들 참..음흉하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으며 벌렁 눕혀진 상체를 일으키면서 프란에게 물었다.

“..그래서..?”

쉰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일어서서 이리타를 노려보고있던 프란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

“..펠릭스형이 결혼, 아니..약혼하는 사람.. 누군데?”

나를 내려다보면서 프란은 한참동안이나 대답을 하지 않았다. 조금전 기세좋게 밀어붙이던 것은 냄비로 뒷통수를 얻어맞으면서 까먹었는지 지루할만큼 시간이 흐른뒤에야 프란은 구겨진 얼굴로 할수없다는듯이 대답했다.

“라이에이드”

라이에이드?.. ............아, 그건. 내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이름은 곧 프란의 입에서 튕겨지듯 나왔다.

“에리카 라이에이드와 약혼했다더라. 네 거지같은 형, 펠릭스 폰 레오포드가.”

아........왜.....왜...하필이면 그여자와............어떤 얼굴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그 순간이었다. 펠릭스형이 약혼했다는 사실보다는 왜 케드릭들을 매수해서 나를 죽이려고 했던 그여자와 결혼을 하려는건지 생각하며 대략 멍해진 순간 우리 주위에 수십개의 불꽃이 나타나있었다. ...뭐지?..

유심히 바라보자 어둠속에서 보이는 수십개의 불꽃주변엔 어느새 우리를 빙둘러싸고 있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늘어서있었다....!! .....저사람들, 불붙인 화살을 겨누고 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내가 검을 뽑으려던 순간 그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꼼짝도 안하는게 좋을거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 불화살들이 네놈들을 구워버릴테니까 말이지. 그래,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건데 그쪽 정령사도 방어막으로 막을 생각따윈 버려두고 얌전히 있는게 좋을거야.”

말을 하며 스윽, 앞으로 나선건 지난번에 우리를 공격했던 뺨에 칼자국이 나있는 바로 그 사내였다.

즐거운듯이 웃고있는 남자의 시선이 움직이지 않는 우리일행을 주욱 훑다가 내게 시선이 멎었다.

지난번의 불유쾌한 접촉이후 목표는 이리타만이 아니었던듯.. 나를 보는 남자의 입꼬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만큼 기쁨을 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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