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믿을수 없군.”
어디서부터가 시작이고 어디서부터가 끝인지 알수없는 공간속에서 누군가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빈공간을 채웠다.
동그란 녹색원형의 구를 바라보며 서있는건 녹색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사내였다. 옷을 입은듯 안입은듯 날씬하게 비추이는 나신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는건 칡넝쿨처럼 휘감겨 하늘하늘 춤추고 있는 녹색의 천.
허공에 뜬 녹색의 구를 바라보는 나엘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아 흔들리고 있었다.
기억을 삼켜 봉인했던 구에 금이 가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는건 아시리안이 기억을 찾게 된다는걸 의미한다. 그것도 ‘곧’.
..시간이 없어. 그전에 그 하찮은 인간을 처치해야해. 금이 가기전에, 봉인했던 기억이 새어나가기 전에 .. 서둘러야한다.
녹색원형의 구에서 시선을 뗀 나엘은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그순간 나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남아있는것은 녹색원형의 구만이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가 환하게 밝아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을 뿐.
나엘이 다시 나타난것은 거대하고 커다란 붉은 흉탑이 서있는 곳이었다. 허공에서 떠있는 나엘의 전신에서 하늘거리는 녹색풀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약간 망설이는듯도 싶던 눈길로 붉은 흉탑을 잠시 바라보던 나엘의 모습이 허공에서 다시 사라졌다.
피처럼 붉은 카펫이 길게 깔린 파티홀처럼도 보이는 공간에 다시 나타난 나엘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원형의 공간을 빙둘러 수십개가 걸려있는 커다란 새장이 보였다. 새장안에는 수십의 여자, 남자, 소년, 소녀들이 벌거벗은채 치부를 감출생각도 없이 드러낸채 몽롱하게 풀린 눈빛으로 갇혀있었다.
갇혀있는 인간들은 양팔이 위로 가게 묶여있기도 하고 양발을 하나로 모아 거꾸로 매달아놓기도 하고 쇠고랑에 손목이 하나씩 잡혀 묶여있기도 하고 .. 일률적으로 통일된것은 정상적인 신체로 있는 인간이 없다는것. 기형적으로 다리가 비틀린채 늘어진 자, 등에 채찍자국이 길게 나있는 소년, 양쪽 가슴이 도려진 소녀, 귀가 도려진 여자, 성기가 반이상 뜯겨나간 남자, 양쪽 눈이 파여져 피가 나는 여자, 다리사이로 허연 액체와 핏물, 노란 고름이 흐르는 남자등등의 모습들은 이곳 붉은 흉탑 주인의 유희이자 취미가 어떠한 것인지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마족과는 비교도 안되지만 그나마 게중 용모가 괜찮은, 인간세상에서 미남미녀라고 불릴만한 자들을 사냥해서 망가뜨리면서 가학적인 충족감을 맛보는 이 붉은 흉탑 주인의 파장을 찾아 나엘이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때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게 누구야.,”
홀에 서있던 나엘이 목소리가 들리는 머리위쪽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나엘이 확인하기도전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서 거꾸로 떨어져내리는 자주색의 무언가가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엘 앞을 가로막듯이 모습을 드러낸건 어느 누가 보더라도 거부할수 없을만큼 퇴폐적인 유혹을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남자였다.
“ 여기까지 찾아주다니, 기뻐서 참을수가 없군. 나엘, 여긴 어쩐일이지?”
남자의 자주빛 머리카락은 전신을 타고 흘러내려 홀바닥에까지 길게 늘어져있었다. 즐거운듯이 웃고 있는 눈동자가 핥는것처럼 나엘의 전신을 훑어내렸다. 하늘하늘 거리는 천으로 아슬아슬하게 중요부위만을 가려놓은 몸을 아쉬운듯이 바라보는 자주빛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나엘이 입꼬리를 치켜올리듯 웃었다.
“카레인님, 저와 함께 즐거운 사냥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호오~ 사냥을? 계속해봐”
흥미있다는듯 눈을 반짝이면서도 붉은 흉탑의 주인 카레인의 음흉한 시선은 그 [즐거운 사냥]대신 앞에 놓인 나엘을 머릿속에서 난도질하며 즐기는 상상을 하듯이 나엘의 전신을 훑어내리고 있었다.
“사냥감은 인간입니다, 인간이면서.... 아시리안님의 연인이기도 하지요.”
인간입니다,라는 말에 겨우 인간따위를 사냥하자고 하는건가..라며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려던 카레인의 눈빛이 아시리안의 연인이라는 소리에 번쩍 뜨였다. 설마,.. 그 자존심 강하고 오만한 아시리안을 말하는건 아니겠지.. ? 그래, 아닐거야. 그렇지? 아무렴..아시리안이.. 인간따위를? 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나엘을 바라보던 카레인이 이내 천천히 입술을 비틀더니 픽,픽 풍선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다가 커다랗게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하하...그놈이 미쳤구나, 나보다 더 미친 놈이 아닌가, 어찌 인간을, 벌레만도 못한 인간을”
배까지 움켜쥐고 웃는 통에 홀바닥에까지 깔려있는 자주빛 머리카락들이 파도치듯 출렁거렸다.
한참동안 웃다가 겨우 웃음을 멈춘 카레인이 나엘쪽으로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크크크큭...그래,그래. 그럴 수 있어. 원래 잘난척하는 놈들이 돌아버리기도 잘 돌아버리니까, 크크.. 그래도 이건 정말이지 초대박이야. 아시리안이, 그 아시리안이 인간따위와 사랑놀음을 할지 누가 알았겠어. 그런데.. 이렇게 일부러 날 웃겨주려 온것 같지는 않고.. 음, 그래. 아까 뭐라고 했더라. 사냥을 하자고? 아하, 그 아시리안이 연애놀음하는 인간을? 그러면 그 성질고약한 아시리안이 펄쩍 펄쩍 뛰지 않을까. 에이, 귀찮아. 죽이겠다고 길길히 날뛰는것도 곤란하다고..”
너무 웃다 못해 눈물까지 찔금찔금 흘려대는 시늉을 하며 말을 하는 카레인을 별동요없이 바라보고있는 나엘이 기다렸다는듯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아닙니까. 그리고 아시리안님을 꼬여낸 자이기도 하지요. 어떤 자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조금 호기심이 동해 쳐다보는 카레인을 시선을 느끼며 나엘은 충분히 의도적인 제스쳐로 벽에 걸린 수십개의 커다란 새장, 그 안에 잡힌 벌레같은 인간들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보다가 카레인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같은 인간이라 해도, 아시리안님이 연인으로 택한 자입니다. 분명 색다른 맛이 느껴지겠지요.
더구나 사랑에 빠진 인간일수록 반항은 더 거센 법이니.. 카레인님의 유희는 충족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실드!!”
바람으로 세 마리의 오크들을 나무그루터기쪽에 쳐박히게 한 프란이 몸을 돌려 한 마리의 오크를 검으로 베어냈다. 그사이 케드릭도 한팔로 할버드를 이리저리 휘둘러대며 떼거지로 덤벼드는 오크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데런도 이놈들은 식사예절도 모르나, 밥먹을땐 뭐도 안건드린다더니..등등을 중얼거리며 검으로 오크의 목을 잘라내고 있었다.
이리타는 점쟁이(..미안하지만 한번 들으니 잊혀지지가 않아서..)하기엔 아까울만큼 훌륭한 검솜씨로 오크들을 날렵하게 상대하고 있고, 시오니역시 마법대신 검으로 오크떼들과 싸우고 있었다.
마력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마족과 달리 엘프인 시오니가 마법을 쓰기위해선 마나라는게 필요한데, 그 마나가 무한정 샘솟는게 아니라서 아껴두려고 하는것 같았다. 진짜 우리의 적은 이런 오크떼들이 아니라 우리를, 아니 이리타를 쫒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쪽엔 마법사들까지 있으니 시오니가 마나를 아껴두는건 그때문인듯.
내손에 들고있는 바스타드소드도 이미 오래전부터 오크의 핏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지겨울만큼 덤벼드는 마물들과의 숫적 싸움에서 턱없이 적은 우리지만 그나마 다행인건 싸우는 장소가 평지가 아니라 비탈진 숲이라는것이었다.
[언제까지 그 오크따위에게 쩔쩔맬거지? 한심해서 못봐주겠군]
머릿속으로 울리는 전음소리에 나는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들어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하늘의 제왕답게 까마득히 솟아있는 나무의 맨꼭대기에 날개를 접고 앉아 지겨운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아시리안이 있는 쪽이었다.
[그럼, 안보면 되잖아!!]
한입거리도 안되는 것들이 서로 죽어라고 싸우고 있으니...마족인 아시리안이 지켜보기엔 지루한 싸움이겠지만....
남은 바빠죽겠는데 계속 투덜거리기나 하고, 심심하면 낮잠이라도 자란 말이야.
“..빌어먹을, 퉤, 이번이 도대체 몇번째냐고.”
케드릭이 투덜거렸다. 프란과 함께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가급적 큰소리를 내지않던걸 보면 어지간히 짜증이 났나보다.
평소같으면 케드릭을 쥐잡듯이 했을 프란도 조금 지쳤는지 케드릭의 말은 신경쓰지도 않은채 이맛살을 조금 구긴채 검에 묻은 찐득한 오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조금만 참으면 되겠지. 이제 지긋지긋한 페르산맥도 거의 넘었으니까.”
피곤에 절은 얼굴이긴 했지만 그나마 우리 일행중에 제일 성격좋은 데런이 힘을 복두으려는듯 한마디 했지만 아무도 그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떠들기 좋아하는 이리타역시 그 예쁜 미모가 말이 아닌 꼴로 지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니....
곧 말하기 좋아하는 프란이 입을 열었지만 그 말은 데런의 말에 맞장구쳐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 짜증나는 페르산맥을 넘어야하는 이유는?”
짜증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말하고 우리의 고용주 이리타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째릿, 쳐다본다. 당연히 이리타는 프란이 노려보든 말든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태평하게 아, 덥다....라고 큰소리로 말을 돌리는데 프란은 이쯤에서 멈출 생각이 없는지 이번엔 공격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말돌릴 생각 하지마. 들어야겠으니까.”
지난번 사람들에게 공격당해 우리의 적이 마물들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된후 이리타에 대한 프란의 시비는 이제 거의 시도때도 없었다. 이까지 으르릉대며 피곤할 정도로 들들 볶아대는데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리타가 대단하게 생각될 뿐이다.
“도대체 고용주를 뭘로 아는거야. 계약을 했으면 지켜. 호모씨”
손부채를 만들어 여유있게 땀을 식히며 샐쭉하게 눈을 뜬 이리타가 말하자 프란은 평소의 그 여유와 장난끼는 다 어디내팽개쳤는지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의심스럽다는듯이 이리타를 이리저리 보고있는 프란이 이리타에게 다시 시비를 걸까봐서인지 데런이 프란에게 말했다.
“페르산맥만 넘으면 숨 좀 돌릴수 있을텐데. 뭘,”
“그게 뭔 소리야”
“응? 페르산맥만 넘으면 로트레아성이 있잖아? 프레임시야 어차피 마물들 때문에 쑥대밭이 되었을테니..거길 가는거 아닌가?”
데런의 말을 들은 프란이 갑자기 안색이 확 변한 얼굴로 이리타를 쳐다봤다.
“........너. 뭘 알고 있는거지?”
무슨 소리지? 천하의 프란이 안색까지 변하다니.. 무슨 일인지 해서 찐득한 오크피로 더럽혀진 검을 닦아내던 손을 멈칫 멈추었다. 그때 높은 나무꼭대기에 앉아있던 아시리안이 날개를 활짝 편채 날아와 내어깨에 사뿐 내려앉았다. 습관적으로 어깨에 내려앉은 독수리의 부드러운 깃털을 어루만지면서도 나는 프란과 이리타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훗, 점보려면 복채를 내라고 했을텐데?”
여유있게 웃으면서 되받아치는 이리타의 표정도 뭔가 평소와 조금 다른것 같다.
“정말로 로트레아성으로 가는거라면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어, 답을 아니까.”
도무지 궁금증을 참을수가 없어서 아시리안의 깃털을 쓰다듬으며 프란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야? 답을 안다니?”
프란의 시선이 내쪽으로 다가왔지만 뭔가 인상을 찡그린채였다.
프란이 머뭇거리는 사이 대답은 프란과 마찬가지로 안색이 변한 데런에게서 나왔다.
“이런, 그럴수가.....그거였군!!! 로트레아성으로 가는거라면!!!!”
그래. 데런, 그러니까 그게 뭔데. 데런의 말을 맞받아치듯 프란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프란에게서 좀처럼 볼수없는 무거운 표정이긴 했지만 그사실보다는 말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서 얌전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조금 머뭇거리다 한숨쉬듯 말을 한건 한참후였다.
“.............로트레아성에는 야나카황자가 있어.아르”
야나카황자가? 그게 뭐? 하다가 이내 나역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그렇다는건!!!
점쟁이 이리타는 쫒기고 있다. 아마도 누가 황제가 될것인지를 묻는 황자들측근이겠지.
그런 그녀가 갈곳은... 아니, 일부러 찾아가는 곳이라면 더 이상 쫒기지 않아도 되는 사람,
누가 황제가 될것인지 얼마든지 말해도 목이 뎅겅 나가지 않을 사람, 오히려 좋아라 할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한사람밖에 없지 않은가. 바로 에오포니아의 황제가 될 사람.
그러니까...그게 바로..............야나카황자라고?
“.. 지금부터는 좀더 조심해야겠는걸”
“그.그게 무슨 말입니까?”
데런이 기막힌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아직도 여전히 이리타가 로트레아성을 가는 이유와 로트레아성에 야나카황자가 있는것에 대해 연관을 짓지 못한 케드릭이 뻘쭘한 얼굴로 물었지만 대답해주는 이가 없어 궁금증을 풀수는 없었다.
[흐응, 벌레놈들이 죽기살기로 덤벼들겠군]
인간들의 사고방식은 도무지 이해할수 없다는듯 아시리안이 전음으로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크로멜성에서 보았던 야나카황자의 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리고 있었다. 황금빛 머리카락, 부드럽게 눈웃음짓지만 그게 진짜 눈웃음인지는 잘 모르겠던 황금빛 눈동자. 크로멜성에서 했던 잠깐잠깐의 의미심장한 행동들.... 그사람은 에오포니아를 원했던거야. 결국은 원하는걸 손에 넣겠구나
그리고 그는 펠릭스형을 원한다고 했던 남자......그래서.. 펠릭스형또한 손에 넣었을까.
잘려진 새끼손가락이 다시 통증을 호소한다.
이제 흉한 상처만이 남아있을뿐인데..... 사라지지 않는 그날밤의 끔찍한 악몽처럼 아픔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이상하다는듯이 아시리안이 전음으로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늘게 떨린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는걸 느꼈다.
그래. 두려워할것 없어. 무서워할것 없어, 이제 그사람은 나를 상처줄수 없으니까. 이제 아시리안이 옆에 있으니까.
[응...아시리안...아무것도 아니야.]
전음으로 대답하며 아시리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르르...바람이 어딘가에서 약하게 불어온다. 서늘하게 풍겨오는 바람결에 싱그러운 숲의 냄새대신 죽은 오크들로 인한 지독한 악취가 코끝을 마비시킬것 같았지만 나는 미소짓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고 빤히 쳐다보는 독수리의 눈동자너머에 있는건....아시리안의 다크블루의 눈빛..
빨려들어갈것처럼 나를 응시하는 눈을 마주보다가 충동적으로 부드럽고 보송보송한 털에 입술을 묻었다.
[....아르?]
내 행동에 뭔가 수상쩍다는듯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는 눈빛이라 기분이 살짝 상했지만 뭐, 아무렴어때..하고 속으로 웃고있는데 머릿속에 아시리안의 전음이 들려왔다.
[흐음.... 이런 모습이 아닐때 그렇게 적극성을 보여주면 좋겠는데..]
아시리안답지 않은 쑥쑤러운 듯한 말투.. 뭔가 의미심장한 말....이런 모습이 아닐때...라고?....아..!!!...
이..이 변태 독수리가!!! 얼굴이 새빨개진 나는 변태독수리에게서 얼른 떨어져나가는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시나마 쉬었다 가기로 한 곳에서 이리타만 데리고 나온 프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봐, 고용주. 페르산맥만 넘으면 계약완결이야”
“어머, 그걸 결정해도 좋다고 누가 그래? 고용주는 나고 계약자는....”
이리타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프란이 득달같이 입을 열었다.
“닥쳐!!! 아르를 로트레아성까지 끌고갈 셈이냐? 그건 절대로 안돼!!!”
지금까지 예의따위 무시하고 말해온 프란이지만 이런식으로 감정적으로 사납게 나온적은 없어서 말을 잠시 멈칫한 이리타가 이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바람결에 휘날리는 프란의 푸른 머리카락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안돼? 그걸 결정하는건 누구지?”
바람결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푸른 머리카락들사이로 조금 찡그린듯도 싶은 푸른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리타는 양손을 등뒤로 돌려 깍지꼈다. 천진한 어린소녀가 할법한 예쁜 동작이었지만 이리타에게도 퍽 어울리는 몸짓이었다. 오크들과의 싸움들로 지쳐있고 평소엔 남자보다 더 심한 짓들도 곧잘 하지만 바람결에 황금빛 블론디 머릿결이 부서질듯 흩날리는 모습은 꽤 여려보이기까지 했다.
“당신은 원하는걸 가질수 없을거야. 당신이 바라는건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당신은 평생을 그리움을 간직한채 살게 될거야. 그러나 너무 억울해하지마. 다른 누군가역시 당신을 평생토록 그리워할테니까.“
조곤조곤 말하는 이리타의 묘한 웃음에 프란은 얼굴을 찌푸렸다가 흥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뭐야? 복채가 비싸다더니?”
별 반응없이 퉁명스럽게 말한 프란에게 이리타가 묘한 미소를 지은채 대꾸했다.
“맛보기”
맛보기? 프란은 속으로 가볍게 실소했다. 이미 제일 중요한 정보는 다 말해놓고서 맛보기라니..
아니, 이미 알고있었다. 가질수 없다는것을. 그러나 처음부터 손에 넣기를 바라고 시작한게 아니다.
단지 행복하기를, 웃어주기를, 바라고 원할뿐. 그러니, 절대 로트레아성에는 안보내. 못보내. 보낼수 없어.
그래, 절대로. 프란의 푸른 눈동자에 스친 집착과도 감정을 바라보며 이리타가 한숨쉬듯 말했다.
“내가 아르를 만난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프란, 당신을 만난게 우연이라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는 다 끈이 있어. 운명의 붉은 실로 뒤죽박죽 엉켜있지. 그 매듭을 푸는것도 각자 본인 몫이야. 누가 해결해줄수 있는게 아니야.”
해결해줄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크로멜성에서 지독한 꼴을 당하는 녀석의 옆에 결국 방관자로 있을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 치가 떨리는 이중인격자 펠릭스를 다시 만나게 할 수는 없었다.
아니, 아르는 물론이고 자신역시 펠릭스와 부딪치지 않는게 좋을것이다.
부딪치는 즉시 그 비열하고 냉혈한인 개자식 펠릭스를 죽이고야 말테니까.
용솟음치는 분노와 증오를 숨긴채 프란은 씨익,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것봐. 이리타, 네가 얼마나 대단한 점쟁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운명이니 뭐니 결국은 사람이 결정하는거야.
운명을 선택하는건 자기자신이라고, 그러니 아르의 운명이 로트레아에 있다해도 내가 보낼수 없어.”
묘하게 슬픈 시선으로 프란을 바라보던 이리타였지만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평소의 털털한 어조로 대꾸했다.
“맘대로 하시지. 호모양반. 말해도 못알아듣는 바보에겐 말이 아까운 법이니까”
두손들었다는듯이 양손바닥을 들어보이는 이리타를 못마땅한듯이 째려본 프란은 별 대꾸없이 몸을 돌려 걸음을 걷다가 몇걸음 걷기도 전에 우뚝 멈추었다.
“그런데.. 무슨 뜻이지? 내가 바라는게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니?”
“복채줄꺼야?”
“돈독이 올랐군. 엉터리 점쟁이 주제에, 얼마면 되는데?”
“어머, 장난이야. 장난.... 미안하지만..”
장난스럽게 웃은 이리타는 고개를 저었다.
“말해줄게 없어. 그건 나역시 이해할수 없는 거니까.”
이리타를 힐긋 노려보며 프란이 투덜거렸다.
“역시 엉터리 점쟁이로군”
“남자뒤꽁무니나 졸졸 쫒아다니면서도 매번 퇴짜만 맞는 변변찮은 호모에게 엉터리란 말은 듣기 싫어”
쉬는 시간에 잠시 사라졌다가 한참후에야 사이좋게 투닥거리며 이리타와 프란이 돌아온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출발했다.
무슨 은밀한 밀담을 나누고 온건지 알수없지만 뭔가 아슬아슬한 공기가 소강상태에 접어든것 같은건 다행한 일이다. 그렇다고 앙숙인 이리타와 프란이 서로 다정하게 대한다는것은 아니지만....뭐..그런 분위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짜 안어울려.
어쨌건 꾸물거리다가 오크떼들에게 발목이 잡혀버리면 페르산맥에서 다시 밤을 맞아야 되니 다들 서두르는 분위기였다. 우리가 페르산맥을 거의 넘어올 무렵, 말을 타고 숲의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던 맨앞의 이리타가 갑자기 달리던 말을 멈췄다. 나역시 달리던 말을 멈추게 한후 우리를 멈추게 한, 아니 이리타를 멈추게 한것같은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누구지? 이리타를 쫒는 사람들중의 하나라고 보기엔..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안보이고, 분위기도 그게 아닌것 같기도하고.. 그게 아니라면 페르산맥을 혼자 오르려고 하는 걸까?
상당히 이것저것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의문 투성이의 남자는 결좋은 자주빛의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내리막길옆에 있는 돌위에 태평하게 앉아 긴 풀을 입에 물고 조곤조곤 씹고 있었다. 게다가 아시리안처럼 굉장한 미남이다.
그러면 그렇지..하고 이리타를 보는데 눈에 번쩍 띄이는 왕미남이 눈앞에 자리잡고 있는데도 이리타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사이 돌위에서 앉아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킨 미남자가 선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다들 훌룡한 미남미녀....시로군요.”
다들 훌룡한 미남미녀하면서 일행을 쭈욱 훑어보던 남자의 시선이 외팔이 케드릭에게 멎더니 살짝 찌푸려지고 재빨리 휙,하고 못본척 고개를 돌렸다. 마치 저렇게 생긴건 내 취향 아니야, 내지는 눈버렸네..등등의 감정이 느껴지는 너무 정직한 시선이라 어이가 없다고 해야하나... 그러다 마지막으로 다크엘프인 시오니쪽으로 온 시선은 뚝 멈춰선채 저러다 침흘리지..싶을만큼, 반응이 미남을 눈앞에 둔 이리타의 눈빛만큼 탐욕스럽다고 해야하나. 왜저런데. 멀쩡하게 생겨서는..
“게다가.. 다크엘프도 있으시고..”
반짝, 빛나는 자주빛의 눈동자가 얼핏 내쪽으로 왔다가 슬쩍 웃었던것도 같다.
...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 내 어깨위에 앉아있는 아시리안역시 기분이 상당히 별로인듯 발톱에 힘이 들어가있었다.
“..폐르산맥을 넘으시려는 겁니까?”
사람을 그닥 가리지 않는 데런이 붙임성있게 말을 걸자 남자가 아차, 하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그렇지요. 보아하니 페르산맥에서 내려오시는것 같은데.. 정보나 좀 얻어갈까 해서 말이죠”
혼자서 페르산맥을 넘는다고? 그건 말리고 싶은데요.. 생각하는 사이 데런이 대답했다.
“오크들이 극성이라 힘드실 겁니다. 차라리 일행이 모이면 그때 떠나시는게 좋을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그러나.. 꼭 넘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죠.”
여기서 다시 의미심장하게 내리깐 시선으로 내쪽을 슬쩍 보는것이..
아니, 나를 보는 시선이 아니다. 아시리안을, 아시리안을 보고있어?
“어쩔수 없다면 말릴수는 없겠지만.. .. 별수 없지요. 그럼, 조심하십시오”
“아, 예, 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
데런의 말을 건성으로 들은 남자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시오니를 아쉬운듯 힐끔거리다가 마치 유혹을 이겨내는 성자처럼 경건한 한숨을 내쉬고 우리가 고생고생해서 내려온 페르산맥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자가 몇걸음 걸어가기전에 아시리안이 내어깨에서 허공으로 솟구쳐오르며 날개를 폈다.
[...아시리안?]
[잠깐 다녀올테니까 기다려]
[...어?...그래.....]
까마득히 높은 하늘로 솟구쳐 올라 구름위로 날아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버린 아시리안을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어슬렁거리며 페르산맥을 오르는 남자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사람.. ...화사하게 웃고 있으면서도 자주빛 눈동자는 전혀 웃고있지 않았어.
그 이상한 태도도 그렇고..오크떼들이 우글거리는 페르산맥을 혼자서 오르고 있으면서 전혀 긴장감이 없는 여유로운 모습도 그렇고.. 마치 소풍이라도 온것처럼 유유자적하게 걸어올라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어이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재촉하려 했을때 이리타가 시오니에게 말했다.
“... 저거 사람 아니지?”
이리타의 이상한 말에 즉각 대답을 한건 프란이었다. 아니, 대답이 아니라 질문쪽에 가까웠지만.
“그게 무슨 소리지? 사람이 아니라니?”
이제 까마득히 멀어져서 점으로만 보이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리타가 뭔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모르겠어, 얼굴을 본 순간.. 아니, 눈을 마주친 순간.. 기분나쁜 예감이 들었다랄까. 별로 좋지 않아. 정말.. 좋지 않아..”
눈을 찡그린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리타가 그사람이 올라간 페르산맥쪽을 뚫어지게 응시하고있는 시오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오니?”
“...인간의 냄새는 나지않았다.”
인간이 아니라면..그럼, 무엇?
나는 아시리안이 날아간 하늘쪽을 무의식적으로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어둠이 밀려들것 같은 하늘의 구름사이사이에 아시리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시리안......
“결계를 쳐두고 초대를 한건가? 주제에 머리를 좀 썼군.”
아시리안은 심한 불쾌감을 느끼며 높은 하늘위에서 숲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곧 독수리의 모습에서 빠른 속도로 모습을 변화시키며 숲쪽으로 낙하했다.
인간으로선 보일리 없는 육안의 너머로 팽팽하게 느껴지는 '힘'의 기운은 마족의 기운이었다.
마찬가지로 아시리안의 파장을 느끼고 있을 그쪽에서 먼저 나타나줘서 부러 찾는 수고는 덜었다고 하지만 어두운 숲속의 공간이 흔들리고 나타난 존재의 모습에 아시리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공간을 찢고 나무에 등을 기댄 자세로 나타난건 조금전 나타났던 인물과 동일인물, 틀린건 어깨까지 닿던 머리카락이 바닥을 질질 끌만큼 길어졌다는것과 수수한 옷차림이 화려하게 변했다는것이었다.
자주빛 머리카락을 땅바닥까지 길게 늘어뜨린 카레인과 등을 기댄 나무 주변에서 신비한 빛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커다랗고 굵은 나무의 잎사귀들이 처연하게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은 얼핏 등을 기대고 선 카레인을 향해 스스로 복종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듯도 보였지만 마법으로 일부러 그럴싸하게 장신구를 갖춰논것 뿐이다.
"카레인"
아시리안의 불쾌감이 잔뜩 묻은 음성에 샤륵 눈을 뜬 카레인이 빙긋이 웃었다.
"어이, 아시리안, 오랜만?"
오랜만? 사이좋게 인사나 나눌만큼 가까운 사이도, 또 가깝게 지내고 싶지도 않은 놈이라 카레인을 보는 아시리안의 시선은 얼음이라도 벨듯 차가웠다.
"그래서, 반갑지않은 얼굴을 들이민 이유는?"
"이런, 너무하잖아. 아시리안. 인간옆에서 귀여운 독수리로도 변신해주더니 같은 동족인 나를 보는 시선은 이리도 차갑다니..어쨌든 역시 오래 살고 보니 이런 날도 오게 되는군, 도도한 아시리안이 겨우 인간따위에게 넘어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살살 약올리는것처럼 하는말에 아시리안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유감이지만 네가 간과한게 있군. 인간도 마음에 안들지만 네놈이 하는 짓거리는 더더욱 마음에 안들어한다는걸 말이다"
아시리안의 말에 불쾌감을 표하기는 커녕 자주빛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카레인이 유쾌한듯 크크큭, 거리고 웃어댔다.
"멋져, 멋져!! 아시리안, 너의 그 오만한 독설은 언제들어도 최고야!!"
간드러지듯 웃는 아름답고 퇴페적인 마족 카레인은 [어떤 이든 유혹할수 있다. 신의 사명을 받는 천사라해도] 라는 악명에 걸맞게 지독히 유혹적인 향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카레인을 바라보는 아시리안의 차가운 시선엔 짜증이 적지않게 묻어있었다. 아시리안에게 눈앞의 카레인은 무한한 마력과 함께 영원을 살아가는 삶을....무의미한 생이 지속됨에 따라 느끼는 환멸과 공허를 견디지 못하고 자멸해가고있는 미친 마족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을 괴롭혀 인간들의 절망, 울부짖음, 고통에서 충족받고 싶어하는건.. 하등한 인간따위에게 느끼는 부러움..
저주받은 신처럼 죽음과 재앙을 내리며 우월의식을 느끼고 보상받으려하는..재수없게 맛이 가버린 마족놈일뿐..
미친듯이 웃던 웃음을 별안간 뚝 그친 카레인이 자주빛색채의 눈동자를 기묘하게 번득이며 아시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시리안.. 나와 함께 영원을 보내지 않겠어? 너와 함께라면 이 지리멸렬하고 무료한 영원도 심심하지만은 않을것 같은데"
자주빛머리카락을 바닥까지 길게 늘어뜨린 지독히 아름다운 카레인의 모습은 남성체에서 여성체로 다시 남성체로 여러번 뒤바뀌며 유혹하듯 입술끝을 살짝 올리고 있었지만 아시리안은 별생각할 시간도 없이 바로 차갑게 대꾸했다.
"닥쳐라. 네놈의 헛소리에 귀가 썩는다.“
마치 구원을 바라듯 절박하게 지었던 애절한 눈빛이 순식간에 커다란 웃음으로 바뀌고 그 와중에도 남자,여자,남자,여자로 쉴새없이 바뀌는 모습으로 카레인이 웃으며 말했다.
"아시리안,아시리안.. 넌 정말 재미있다니까,"
...강하고 오만하면서 열정적이고 순수하지. 훗. 그래서 나엘이 너에게 집착하는것일지도..
속으로 생각하며 카레인은 눈꼬리를 가늘게 휘며 아시리안을 바라보았다.
....영원을 살아도 한치의 앞을 내다볼수 없다는건.. 재미있는 일이야. 안그런가. 아시리안..
오만한 네놈이 그 자존심에 겨우 인간따위와 사랑에 빠지다니 말이야. ... 어울리지 않아, 어울리지 않는다고.. 아시리안.
그 인간놈이 죽으면 너는 미치지않을 자신이 있는가? 타락하고 절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어차피 자신은 미끼라는걸 알고있었다. 나엘이 사냥감 운운하며 꼬시고 있는걸 그냥 넘어가 준 것뿐이다.
처음부터 그 인간을 넘겨줄 생각같은건 없었겠지.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는 눈이었거든.
아아, 아시리안, 아시리안.
지금쯤 나엘이 네가 애지중지하는 인간의 살을 갈기갈기 찢어 파헤치고 심장을 파먹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내장을 전부 쏟아낸 인간을 바라보며 너는 어떤 얼굴을 보여줄거냐.
슬픈얼굴? 비통한 얼굴? 고통스러운 얼굴? 물론, 그럴거야. 그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렇겠지.
그 장면을 상상하는것만으로도 오싹오싹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것 같아 카레인의 혈액이 미친듯이 역류하고 흥분으로 팔딱거렸다.
소중한 것을 빼앗기고 미쳐날뛰는 너와 손을 잡고 파괴와 파멸의 끝으로 치닫는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거야.
살아있는 모든건 끝을 향해 나아가는 유한의 존재들일뿐, 그러니 그 허무한 끝을 앞당기는건 죄가 아니지. 아니고말고,
묘한 눈길로 아시리안을 바라보며 카레인은 길다란 손톱을 축축한 혀로 핥으며 씨익, 웃었다.
좋아, 나엘, 충분히 시간을 끌어주지. 기꺼이 이용당해주겠어, 이런것도 꽤 재미있으니까. 대신 그 인간을 죽여라.
못죽이면 .. 크크.. 내 귀여운 새장안에 갇히는건 네놈이 될테니까.
다크엘프녀석이 제법 쓸만해보였는데.. 나를 이렇게 아까운 기분이 들게 만들었으니 그 책임은 져야지, 안그래?
“크크크크...아시리안, 어디 실력이 예전만 한지 확인해볼까?”
핥은 손톱을 앞으로 쭉 뻗으며 달려드는 카레인의 공격을 피하며 아시리안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얼마든지!!”
멀리서보면 아름다운 녹색식물 처럼도 보이는 나엘이 허공에 떠서 어느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숲을 내려가는 인간들을 노려보는 얼음처럼 차디찬 녹색눈빛이 어둑해져가는 저녁하늘에 유난히 빛을 발했다.
.....왜 함께 있는거지? ....운명이라는건가?.. 네가, 겨우 너 따위의 인간의 그의 운명의 상대가 될수 있다는건가?
그게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부숴버리겠어!!!!!!!!!!!!!!!!
카레인에게 저 인간을 넘겨줄 생각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물론, 카레인의 수중에 떨어져 지독히 괴로워할 벌레같은 놈이 보고싶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화근은 없애버려야한다. 저인간이 살아있으면 아시리안과 다시 연결될 수도 있으니까.카레인이 아시리안을 따돌리고 있는 지금이 두 번 다시 올수 없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었다. 그리고 저 건방진 인간놈을 갈기갈기 찢기엔 충분한 시간이 될것이다.
죽였어야 했다. 그때, 아시리안님이 저 인간으로 인해서 하찮은 인간들의 손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때 기억의 봉인만 해두는게 아니라 저 인간을 없애버렸어야 했다.
충분히 후회해. 이가 갈릴만큼 후회하고있다. 네놈을 방치해두었던것을. 그러니, 이번엔 실수하지 않는다.
나엘이 번쩍 눈을 크게 뜨고 힘을 개방했다.
“두 번 실수는 하지 않아!!!!!!! 죽어라, 벌레같은 인간아!!!!!”
녹색빛이 나엘의 주변에 퍼지는 순간 숲을 내려가던 시오니가 달리던 말을 멈추고 빛이 퍼지는 쪽 허공으로 힐긋 시선을 던졌다. 우중충한 저녁하늘가운데 녹색빛의 오오라를 발하는 나엘의 존재를 발견한 시오니의 무미건조한 표정에서 마치 웃는것처럼 입술끝이 비죽 올라갔다.
달리던 말을 멈추고 뭔가를 중얼거리는 시오니쪽으로 그제야 돌아보는 일행들의 눈이 경악으로 떠졌다.
무시무시할만큼 거대한 녹색의 빛을 발하는 원형의 무언가가 바로 눈앞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