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자, 여기서 좀 쉬었다갈까?"
이리타가 말하자 다들 달리던 말을 멈춰섰다. 나를 망신주고 약올릴만큼 약올릴 심산인지 하늘에서 유.유.히 날아다닐뿐 내려오지 않는 아시리안을 향해 이를 뿌득뿌득 가느라 해가 반쯤 기울었다는것도 알지 못하던 나역시 말을 멈추고 아직도 유유히 하늘을 날고있는 망할 독수리를 노려보다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둘러선 나무들에 말들을 각각 매어놓는 일행을 주욱 둘러보던 고용주 이리타는 내게서 잠시 시선을 멈추더니 뭔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르, 점심 먹기전에 너의 그 머리를 좀 어떻게 하는게...음..(여기서 웃음을 참듯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말을 멈춘 이리타였다.) ...우리야 후각이 예민하지 않으니 괜찮은데 시오니는 좀 괴로운 모양... 풋...미..미안, 아하하하하하하.."
미안? 전혀 미안한 얼굴이 아니잖아요!!! 이리타가 말을 꺼낸 시점부터 삐죽삐죽 솟아나던 웃음을 참고있던 일행들이 시오니만 빼고 모두다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 시오니까지 한쪽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머리카락이 조금 흔들리는게 보이자 나는 뭔지 모를 배신감까지 느끼며 얼굴이 시뻘개진채 몸을 돌릴수밖에 없었다.
그래, 웃어, 실컷 웃어요......젠장, ..이 망할놈의 독수리놈!!!
말을 나무에 매어두고 다른 사람들이 식사준비를 하는동안 머리를 감으려고 냇가쪽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숲속을 조금 걸어가다 비탈길을 내려가자 계곡이라고 하기엔 조금 얕은 냇가가 보였다. 그속에 투명하게 비추인 돌들이 햇빛에 반짝반짝 빛난다.
빌.어.먹.을.독.수.리.똥이 말라붙은 머리를 푹 물속에 집어넣어 한참 씻어내고 푸우,푸우, 신경질적으로 세수까지 한뒤 젖은 얼굴을 들자 내존재로 출렁이던 물살이 잔잔해지며 내모습이 비춰진다.
검은꽃물을 다시 들일때가 된걸까...검게 물들인 색이 조금 빠져서 햇볕을 받은 부분에 옅은 붉은기가 살짝 도는 짧은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달라붙은 얼굴은 바싹 약이 오른 사람의 표정이다. 화가나서 고양이처럼 치켜져 올라가있는 붉은 눈동자까지 감정의 색채가 뚜렷해 보이는 얼굴을 가만히 보자 어쩐지 좀 어색해져서 낯선 모습이 비추이는 물속에 손을 집어넣어 헝크러뜨렸다.
이렇게 감정적인 모습으로 있어본건 오랜만이었다. 어쩐지.. 다들 그렇게 대놓고 웃어댔던거 화를 내는 내모습이 신기했던건 아닐까, 라고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마..내가 얼마나 화를 잘내는...하긴.. 아시리안에게만, 이네..
아시리안이 나를 화나게 만들기때문이기도 하지만..사실 다른 일행들.. 프란에게까지도 조금 거리감을 두고대하는 내가 자기가 퍽 잘난줄 아는 마족 아시리안에게는 있는대로 신경질을 부리고 화를 내고 있는건 예전부터 나도 알고있었다.
아시리안이 만만해서라기보다는...누구보다도 더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시리안앞에서는 어떤 모습이든 숨기지않고 솔직하게 표현할수가 있는거다.
내 맘도 모르면서.. 바보, 멍청이, 둔하긴 누가 둔하다는 거야.
내가 어떤 마음으로 함께 가자고 한건줄도 모르면서...... 이상한 트집이나 잡아서 화만 내고!!!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내듯 짧은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물기를 잘잘 털어내고 일어서려던 나는 멈칫, 멈춰섰다.
언제 내려온건지..독수리가 아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시리안이 일어서려다 멈칫하는 나를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막혀. 도대체 뭐야. 그 뻔뻔한 시선은? 어제 그런짓을 해놓고, 내머리에 독수리똥을 갈긴 주제에!!!
주먹에 힘을 불끈 쥐고 전투태세로 돌입해서 막 입을 열려는데 아시리안이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어이, 인간. 이름을 불러달라고?”
아...뭐야..갑자기....
대머리 독수리로 만들어버리겠다고 길길히 날뛰던것을 잊고 내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입술이 달싹거리다가 이내 깨물어지고 고개를 숙이고 마는 나를 대신해 아시리안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너를, 이름을 가진 존재로 불러달라고 하는건 영원을 사는 이 내게 너를 기억하라고 하는것과 똑같아"
저 얘기는 영원을 살아가는 마족인 아시리안이 보자면 하루살이만큼이나 순간을 사는 인간인 내가 나를 영원히 기억하라고 떼를 쓰는것과 똑같다...이 얘긴가. 내가 죽고난뒤까지 [나]를 기억하기 싫다고 투덜거리는 말이라서...뭐랄까.. 좀 서운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그게뭐야, 나는 단지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을뿐이라고, 싶었지만.... 어젯밤.. 내가 했던 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에 좀 고마워졌다가 ...그래도 기억할수 없는 존재를 가질수 없는건 좀 쓸쓸하겠네.. 라는 생각에 나도 마음이 쓸쓸해졌다. 아니, 내가 아시리안을 좋아한다고 해도 아시리안이 살아갈 영원동안 함께할수 없다는게 쓸쓸한걸지도....
"아시리안, 난 역시.. 내가 인간인게 더 마음에 들어...그러니까 너는 내이름을 기억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나는 너를 잊지 않을거야. 그쪽이 훨씬 좋으니까"
나는 너와 함께 지냈던 기억들은 잊고 싶지 않아. 지금 함께 있는 이순간 역시..,
"...꽤 건방진 말을 하는군. 한심한 인간주제에"
눈을 가늘게 뜨고 티껍다는듯이 보는 아시리안에게 ....자신이 불리할것 같으면 입만 산 멍청이라고 욕을 하던걸 떠올리며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뭐..나는, 입만 살아있는 녀석이니까...그리고.."
그리고....다음을 말하기전 고개를 숙인채 헛기침을 한번 하고 입을 열었다.
“아시리안과 했던 일.. 프란뿐만이 아니라 다른 누구하고도 생각해본적 없어. 앞으로도 그건 마찬가지야.”
바보, 어떻게 그런걸 신경쓸수가 있단 말인가.. 하면서도 나는 이리타가 아시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을때 분명히 싫은 느낌을 가졌던걸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질투였다. 아시리안이 손대는걸 허락하는건 무의식적으로 나뿐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어쨌든 어려운 숙제를 해버리는 심정으로 꽤나 부끄러운 말을 내뱉은후 얼굴이 달아오르는걸 숨기려고 몸을 돌리자 아시리안이 등뒤에서 투덜거리듯 말했다.
“멍청한 인간의 이름을 하나쯤 기억하는것도 나쁘진 않겠지.”
너무 놀라서 돌아보자 아시리안은 마치 자기자신에게 설명하는것처럼 투덜투덜 거리고 있었다.
“함께 여행하려면 이름을 부르는게 좋을것 같고..게다가 네놈의 이름따윈 이미 알고 있기도 하고..그러니..원하는대로 해주지. 인간, 아니.............”
....................아시리안??!! 너무 놀라서 눈을 크게 뜬채인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아시리안이 내이름을 불렀다.
“아르”
분명 지금 어떤 얼굴을 해야 좋을지 알수없는 표정일 것이다. .
아시리안은 예전에 내게 자기 이름을 불러달라고 채근한 적이 있었고 내가 이름을 불러주자 굉장히 기쁜것 같은 얼굴을 했었다.
............그 마음, 알 수 있어. 아시리안...내가 지금 그런것 같으니까.. 너무 기뻐서 심장이 울렁거려...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차가운 물방울들이 뺨으로 톡..떨어져내리고..나는 뒤늦게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아시리안..”
다시 독수리로 변한 아시리안과 함께 일행쪽으로 돌아가는 내내 처음으로 조용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아시리안과 만나서 투닥거리지 않은적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사이좋게 걸어가는게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투덜거리기 좋아하는 아시리안이 말한마디없는게 좀 이상하기도 했지만 왠지 아시리안과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선 느낌이 들었다.
입이 조개처럼 딱 달라붙어있던 아시리안이 별안간 갑자기 입을 열었다.
".... 걸음소릴 줄여"
의아해서 걸음을 멈추자 아시리안이 다시 말했다.
“매복이다. 벌레놈들 수도 많고..”
어...?...사삭, 하고 나무뒤에 숨어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자 아시리안의 말처럼 수십명의 사내들이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태평하게 식사준비를 하다가 이건 뭐하는 것들이야..하는 얼굴들로 어슬렁거리며 일어서는 일행들을 빙둘러 에워싼 사람들을 산적인가..라고 의심하지 않은것은 그 일률적으로 움직이는게 정규적으로 훈련을 받은 몸짓같기도 했고 또 검은 갑옷을 입은 수십명이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것처럼 일사분란하게 착착 행동했기 때문이다.
나무뒤에 등을 숨긴채 숨을 후우...들이키며 검을 빼어들고 나는 아시리안에게 속삭였다.
"...절대로 나서지마. 위험하다고 생각되어도 끼어들지마,"
"...뭐라고?"
"....이건 내일이고, 인간들의 일에 마족인 너의 도움은 받기 싫어"
냉정하게 들릴지 모를 말이라는건 알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전처럼 아시리안이 나때문에 마법을 쓰고 마족이란게 들키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기는 싫으니까..그리고 조브의 저택에서 보았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다시한번 확실히 깨달았으니까. 마족에게 인간은 상대가 안된다는 것을, 그러니까 인간들의 일에 마족인 아시리안이 끼어들어선 안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아시리안에게 내가 말을 하는 사이에 일행을 빙 둘러싼 수십명의 병사들중 대장격인 사람이 항복을 종용할 생각인지 곧바로 덤벼들진 않고 큰소리로 말을 걸고있었다.
"여자를 이쪽으로 보내라, 그러면 쓸모없는 피를 볼 필요는 없다."
여자..라면 이리타?...저사람들..이리타를 쫒아온 건가?
사내의 말에 프란이 이리타를 보며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들었지? 별수없군, 얼른 저쪽으로 가라, 너"
황당한 말을 들은 이리타본인은 물론이고 일행들이, 병사들도, 그리고 말을 꺼낸 사내까지도 엥? 하는 얼굴로 다들 프란과 이리타를 번갈아 보았다. 절대 못내놓는다. 그런 비겁한 짓을 하느니 목숨걸고 싸우겠다. 이러고 나와야 할 사내대장부가 목숨이 위험하니 레이디고 고용주고 간에 홀랑 건네주겠다고 오히려 등을 떠밀고 있으니 ...아무리 프란이 원래 저렇게 제멋대로 생겨먹은걸 알고있었다고는 해도 좀 어이가 없긴 하다..
아마도 이상황에서 가장 어이없을 이리타가 잘록한 허리에 양손을 척, 올린채 프란을 샐쭉하게 노려보았다.
"이보셔, 잘생긴 호모씨, 나를 지켜줘야 할거 아냐. 이런 경우를 대비해 내가 댁을 고용한거 잊었어?"
이리타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프란이 오히려 기다렸다는듯 여유만만인 얼굴로 씨익, 웃었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네가 고용한건 아르,란걸 잊었냐? 우리야 아르를 그저 따라온것 뿐이고, 아르는 지금 없고..그러니 이 골치아픈 일일랑 혼자서 잘해보셔"
"뭐, 이렇게 치사한 남자가 다있냐!! 치사하다, 치사해!!"
이 의외의 어이없는 내분사태에 생각보다 일이 수월히 풀리겠다고 예상했는지 말을 꺼낸 사내의 얼굴이 좀 부드러워졌다. 뭐..부드러워졌어도 뺨에 진 칼자국때문에 인상이 더러워보이기는 하지만...근데 저사람 ..어째 낯이 익네?... 뺨에 난 인상적인 칼자국..무서운 눈초리.. 성질있어보이는 얼굴.. 흔한 인상은 아닌데...저사람을 어디서 봤더라..??
이와중에도 뻔뻔하고 싸가지가 바가지로 없는데다 다른사람의 이목따윈 신경도 안쓰는 프란은 안가고 버티고 있는 이리타의 등을 병사들쪽으로 떠밀기까지 하고 있었다.
"아르녀석 오기전에 빨리 좀 가라"
"아니, 진짜 이 호모가!! 너 진짜 이럴거야!!"
황당해하는 이리타의 등을 프란이 더 떠밀었다.
"떠들지 말고 빨리 가라니............실드!!!!!!"
휴우..이리타를 넘길 생각은 아니었나보다. 프란은 등을 떠미는척 하다가 바람으로 일행 주위에 바리케이트를 쳤다.
...그래도 아예 몹쓸 놈은 아니었구나..
"호오, 쓸만한데?"
프란의 옆구리를 툭, 팔굽으로 치며 헛기침을 한 이리타가 칭찬하자 프란이 얄미울만큼 씨익 웃으며 냉큼 말했다.
"널 위한게 아니니 감격은 그쯤에서 때려치워, 아르에게 미움받기 싫어서니까"
"역시, 그럴줄 알았어"
수십명의 병사들이 에워싸고 있어도 전혀 긴장감이 없는 프란과 손바닥까지 부딪치며 맞장구치는 이리타,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똥밟았다라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사실 이가운데 제일 험상궂어보이는 케드릭, 밥먹을때 누가 건드리는걸 되게 싫어하던 평소의 데런답게 씩씩거리고있는 데런.. 떼거지로 우르르 몰려든 인간들이 화살을 겨누고 있건 말건 무관심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채 서있는 시오니....정말 내가 봐도 무지하게 태평들하다.
배짱좋은 인간들을 향해 나보다 더 기가막힌 시선들을 보내고 있는 상대쪽에서 뭔가 태도를 취하기전에 암만봐도 나와 면식이 있는게 분명하지만 누군지 생각은 나지 않는 사내가 얼핏 당황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검은 엘프놈이 마법시전어를 외운다, 방어해!!"
병사들말고라도 여러명의 마법사가 섞여있었는지 방어막을 치자 시오니가 만들어낸 빛의 소용돌이가 그 방어막에 부딪쳐 흩어진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친 방어막에 둥글게 에워싼 인원 전부를 다 보호할수는 없는지 도넛모양의 대열에서 쥐가 파먹은듯 한쪽대열이 와르르 무너졌다.그때를 놓치지않고 시오니가 검을 뽑아들며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마법사들은 내가 맡는다"
시오니가 방어막을 나서자 밥을 굶어서 불만이 극에 달한것 같은 데런이 긴 장검을 뽑아들으며 '동쪽'이라고 말했고 열히 말다툼을 하던 이리타와 프란도 각각 한방향씩을 맡고 이판사판이라는 표정의 케드릭도 할버드를 붕붕 돌리며 병사들을 위협했다.
나역시 동서남북으로 빙 둘러서서 싸우는 일행중에서 본인이 들으면 기분나빠하겠지만 그래도 제일 취약해 보이는 케드릭쪽으로 방향을 잡고 뛰어들었다. 베는건 오크가 아니다..똑같은 사람.. 비릿한 혈향을 풍기는 똑같은 인간..
죽이지 않으면 돼. 움직일수만 없게 만들면 돼...라고 두근..두근..두근..거세게 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억누르며 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으아악!!!!"
"너,넌 뭐야!!!!"
"뭐긴 뭐야...당신들이 공격하고 있는 쪽이랑 같은 편이지!!"
뭐냐고 묻길래 성실하게 대답까지 해주며 손에 익은 바스타드소드를 능숙하게 휘둘렀지만 싸우는게 사람이라서인지 급소를 공격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물들을 해치울때보다 칼을 휘두르기전 먼저 멈칫,하게 되는 등뒤에서 갑자기 뜬금없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이놈의 독수리는 뭐야!!!"
독수리? 깜짝 놀라서 돌아보자 독.수.리. 아시리안이 내 등뒤를 공격하려던 병사의 얼굴에 날카로운 발톱으로 논두렁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니 끼어들지 말라고 한게 떠올랐는지 나를 사납게 노려보며 흥하는 표정으로 보란듯이 병사의 머리통을 앞발로 파바박 내려친다.
그 신경질적인 모습에 기가차서 바라보다가 위협적으로 내려치는 칼을 간신히 막아냈다. 어...? 당신.........??
"점쟁이 계집이 이런 애송이를 용병으로 고용하다니, 개가 웃을 일이로군"
애송이? 이것보시죠, 이 애송이하고 어디서 만난것 같지는 않으신가요?
난 당신이 생각났는데 말이지...더불어 갚아야할 빚이 좀 있다는것도 생각났고,
"그 애송이에게 당신이 지면, 개가 울게 되는 건가?"
내말에 눈을 부라리며 달려드는 칼을 쳐내는 나와 칼자국난 인상더러운 남자의 눈빛이 부딪쳤다. 어디선가 본것 같지만 좀체 생각은 나지 않는지 남자의 얼굴이 구겨지길래 그 나쁜 머리에 좀 도움이라도 줘볼까 해서 슬쩍 힌트를 줬다.
"그렇게 말채찍으로 신나게 때려놓고 기억을 못해주다니, 서운하네"
내가 빙긋 웃자 구겨진 얼굴이 더 구겨지고 뺨에 난 칼자국까지 사납게 일그러지며 남자의 눈빛도 꿈틀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 설마하는 인물이 제가 맞습니다만? 머리색깔은 좀 바뀌었을지 몰라도.
"........설마......너, ...............네..네놈은!!!!!!!!!!!“
딩동댕, 하고 울리는 실로폰대신 챙하고 날카롭게 소리를 울리며 검과 검이 부딪쳤다.
똑같은 바스타드 소드였지만 체격이 상대가 더 좋아서인지 맞부딪친 힘에서 내쪽이 조금 딸린다.
게다가 내가 상대하는건 이 성질더러운 남자만이 아니라서 옆구리를 찌르고 오는 여러개의 칼날에서 매번 아슬아슬하게 몸을 돌려 피했다.
이 남자.. 아시리안에게 죽은 줄 알았었는데..어쨌건 서로 다시 만나서 반가울 사이가 아닌건 분명했다.
내가 나름 원한이 있는것만큼 이남자도 내게 말도 못하게 사무친 원한이 있는것 같으니까.
어지간히 화가났는지 살벌하게 휘둘러오는 칼날들을 피해 재빨리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흉부를 날카롭게 스치고가는 예리한 감각과 함께 통증이 느껴졌다. 베인건가..싶은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아시리안쪽으로 전음을 실어보냈다.
[안돼!! 끼어들지마!!]
아시리안이 무슨 짓을 할지까지 감시할만큼의 여유는 없었지만 그건 본능적으로 외친 소리였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변하는 그 순간을 놓치지않고 바로 가까이 달려들어 검을 힘껏 쳐냈다.
찔린 다음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방심한 남자의 손에서 챙강,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떨어진다. 검사로서는 지독히 수치스럽게 검을 떨어뜨려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참혹하게 일그러진 사내의 목에 검을 겨눈채 나는 씨익, 웃었다.
"이제...개가 우는 일만 남았네요?"
마주하고 있는 눈은 피를 머금은 잔인한 눈빛....입장이 바뀌었다면 얼마든지 내목을 베어버렸겠지..이남자는, 이해관계가 달라서가 아니라..단지 죽이고 싶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약한 자는 얼마든지 짓밟혀도 할말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눈빛.. 조브일당들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
그러나 살짝 베고있는 칼끝을 타고 방울방울 피가 떨어지고 있는 목을 차마 베어버릴수가 없다.
내가 잠시 망설인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않고 재빨리 뒤로 물러선 남자의 몸을 보호하듯 다른 사내들이 금새 에워쌌다. 둘러선 남자들속에서 목에 흐르는 피를 손으로 닦아내며 더러운 인상을 더 사납게 구긴 남자는 이제 나를 산채로 갈기갈기 찢어죽일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접전에 푸드득거리는 날개짓과 함께 아시리안이 가볍게 어깨에 안착하는걸 느끼며 나는 보일듯 말듯 웃음을 지었다.
[...어리석은 놈, 네놈의 목숨을 노리는 벌레따위를 살려줘? 그건 동정도 자비도 아니야. 머뭇거리다가 멍청하게 다치기나하고!!!!]
[...미안, 그리고 고마워.]
[도와주지 않아서 고맙다고 말하는 인간은 너밖에 없을거다. 멍청한 벌레놈같으니!!]
......그게 그렇게 되는건가...
"이 빚은 잊지 않고 갚아주지, 애송이"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던 남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목에 난 상처를 감싼 남자가 이를 갈듯 토해내는 소리와 함께 살아남은 병사들의 모습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공간이동 마법으로 덤벼들던 적들이 사라진뒤 남겨진건 여기저기 흩어진 피들과 이십여구의 시체들과 숨을 헐떡이는 우리 일행만이 썰렁하게 남아있을뿐.
"잽싸게도 도망치네. 저것들.."
뭔가를 베려다만것처럼 검을 치켜들고있는 뻘쭘한 자세로 서있다가 어색하게 검을 내리며 데런이 말했지만 아무도 그말에 대꾸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프란이라도 시체들을 앞에두고 속편하게 농담할수는 없겠지, 라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프란은 크게 떠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르!!!!!!!!!!!"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방금 죽은 사람들에 대한 존중심은 눈꼽만큼도 없는지 시체들을 쓰레기봉투처럼 마구 짓밟으며 득달같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래..넌 이런 녀석이었지..오해해서 미안하다.. 프란..
힐링포션으로 상처를 지혈하고 붕대로 꼼꼼히 휘어감은 뒤에야 프란이 이리타를 향해 설명하라는듯 눈을 부라리며 윽박질렀다.
"마물들을 만날까봐가 아니라 쫒기고 있기때문에 우리들을 고용한건가?
그런건 미리 말했어야 되는거 아냐? 사람을 죽여야 되는줄 알았다면!!!"
말을 멈춘 프란이 나를 힐긋 돌아보고 다시 이리타를 보며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를 절대 이쪽으로 데려오지 않았어!!"
"아하, 드디어 본심이 나오시는군? 아르가 당신거야? 그런건 아르에게 물어봐야 하는거 아냐?
본심은 다른것인 주제에 보호자인척 굴지마, 보기흉하니까 어리광도 정도껏 부리라고!!"
"말이면 단줄 알아? 흉한건 어느쪽이라 생각하는 거지? 쫒기고 있는걸 말하지 않은건 우리를 지금까지 속인거다!! 이 사기꾼같은!!!"
"잠깐, 프란. 화난거야 이해하지만 사기꾼이라니..말이 너무 심해. 감정을 좀 가라앉혀"
화난걸 이해한다고 하며 데런이 나를 슬쩍 내려다보는것이.. 암만봐도 내가 다친게 프란을 심각하게 열받게 만든 모양이라는 뜻..?
"속였다는 의견엔 나도 동감, 이제 누구때문에 더이상 사람을 죽이는 일은 안하게 될줄 알았는데 손에 사람의 피를 묻혀서 기분이 더럽군"
누구때문에..라고 말하며 케드릭이 슬쩍 나를 보는것이 또 굉장히 부담스럽다..왜 다들 나를 보는거냐고오..
“그래, 모두 내 잘못이다 이거지!! 정말 너무들 하네, 숙녀를 이렇게 몰아세워도 되는거야?!!”
“숙녀 좋아하시네!! 너랑 맺은 용병계약은 당장 무효야!!!”
“잠깐, 그렇다고 갑자기 계약무효까지는..”
당장이라도 이리타의 멱살을 잡아채서 잘잘 흔들거같은 프란, 눈에 쌍심지를 키고있는 이리타, 프란과 이리타를 말리느라 더 큰리를 지르고 있는 데런등등으로 조용한 숲이 귀가 따가울만큼 소음으로 뒤덮이자 이사태를 울며겨자먹기로 수습해야할 왠지모를 사명감에 나는 왈가불가 내분이 일어난 일행들에게 폭탄투하하는 심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아까 그 대장처럼 보이는 사람이 내게 [점쟁이 계집이 고용한 용병]이라고 했는데.. 이리타, 당신이 그 [점쟁이]인가요?"
내말이 끝나자마자 합죽이가 된 일행들의 시선이 나를 한번 보고 그리고 이리타에게로 시선이 옮겨갔다. 말많고 수다스럽고 술잘마시고 노는것 좋아하고 예쁘고 쾌활하고 털털하고 밥먹은뒤 트림, 방구 아무렇지도 않게 뀌어대는 이리타가 [점.쟁.이]라고? 다들 농.담.하.지.마. 이런 표정으로 꿀먹은 벙어리가 되서 동시에 이리타쪽을 보자 이리타는 한참뒤 인상을 구기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런 제기랄!!!!"
그순간 내 머릿속에선 로드리고시에서 만났던 그 두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을 볼수 없었던 두사람.. 그리고 여자의 목소리.
-처음, 그 자리로 가봐요. 어쩌면 거기에 당신이 찾고 있는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건...설마...........이리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