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여러가지의 장식물없이 필요한것만 간단히 갖춰져있는 집무실의 탁자위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아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편지형식으로 된 꼼꼼한 보고서를 읽고있었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내용중 여러번 반복해서 시선이 멈춘 부분에는...
[....해서 로드리고시를 거쳐서 찾아간 네레이드성에 '아르'란 이름의 용병이 있었다는 것까지는 확인했습니다만 실제로 얼굴을 뵌것은 아니라 아르휜님이었는지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재미있는것은.. 최근까지 네레이드성에 하워드백작가의 차남이신 프란시스 하워드님이 친구분과 함께 머물던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저희가 네레이드성에 도착할때즈음 갑자기 사라진걸로 알려져...]
깔끔한 알프레드의 글씨체로 그 외 레오포드가의 근황들이 상세히 적인 종이를 내리깐 시선으로 보고있는 펠릭스 폰 레오포드의 표정엔 섬뜩할만큼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생각도 없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오래 내려다보던 펠릭스가 이윽고 손안에 들고있던 종이를 반으로 접어 탁자위에 탁, 하고 떨어뜨렸을때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음에도 미세한 공기의 파동으로 고개를 들자 노크도 없이 문을 연 불청객이 허락도 구하지 않은채 뻔뻔스러우리만치 당당하게 들어오고 있는게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야나카황자님,"
눈앞에 보이는 남자는 정중하지만 차갑다. 예의바르지만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정직하고 청렴해보이지만 똑바로 쳐다보는 붉은색 눈빛에 담긴 표정을 읽을수가 없다. 전쟁터에선 강하고 용맹무쌍한 무장에.. 마족에게 조종당한 친동생의 손가락을 자를정도로 단호하고 독한 남자지만 그 소름끼칠만큼의 냉정함이 오히려 더 위태해보인다고 하면 이 사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펠릭스를 보는 야나카황자의 눈꼬리가 즐거운듯 아닌듯 기묘하게 휘었다.
"무슨일이 있는건 자네같은데? 안색이 좋지않군. 레오포드가에서 연락이 왔다고 하더니.. 집안에 우환이라도 생긴건가?"
야나카의 시선이 탁자위에 반쯤 접혀있는 종이쪽으로 갔다가 다시 펠릭스에게 향했다. 펠릭스의 등뒤로 나있는 커다란 창에서 쏟아지는 피처럼 붉은 황혼을 받아 붉게 뷸타오르는것 같은 붉은 머리카락은 크로멜성에 막 도착했을때 온통 피를 뒤집어쓰고 있으면서도 한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고 서있던 그 강렬한 인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태평하시군요. 일황자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아, 펠릭스, 차가운 그대가 내 걱정까지 해주니, 이거야 감격이로군"
"에오포니아의 주인이 결정되는 순간 레오포드가의 미래도 달라지게 될테니까... 그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레오포드가가 야나카황자쪽으로 돌아선게 이제 공공연해진 마당에 야나카황자가 에오포니아의 주인이 되지 않는다면 레오포드가의 미래역시 끝이다. 짜증이 묻은 펠릭스의 시선에 야나카황자의 황금빛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은채 반달형으로 휘었다.
"물론.. 요나스형님이 마물들 해치우는것보다는 다른걸 먼저 해치우고 싶어하는거야 충분히 알고있지.. 그저 단지, 조금 영리하게 굴어주기를 바라지만.. 지금까지의 그를 보면 좀 무리일수도 있겠어"
가벼운 어조로 말하는 야나카를 보다가 펠릭스는 어둠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일황자쪽에서 엉뚱한 일을 벌일수도 있다는걸 각오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각오라.. 글쎄, 예상하고 있다..라고만 말해두지 ."
야나카황자의 황금색 눈동자가 꿈틀, 요동치는걸 바라보다가 펠릭스는 커다랗게 아치형으로 나있는 창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미리 예고하듯 피처럼 붉은 황혼이 한층 짙어진채 대지를 붉게 비추고 있었다. .
공통의 적.. 마물들을 앞에 두고있어도 황좌앞에 공존과 화해의 길따윈 있을수 없다.
약한쪽은 먹히고 강한자만이 살아남는건 자연의 법칙만이 아닌 것이다.. ....
마물들을 물리치는것만큼이나 이것역시 절대로 져서는 안되는 싸움.
집무실안에 숨막힐정도로 가라앉아있던 무거운 침묵을 먼저 깬건 야나카황자의 목소리였다.
“.. 나는 지지 않는다. 펠릭스,”
아치형 창에서 비춰오는 핏빛 황혼을 등에 진채 황금빛 눈동자에 기이한 열기를 뿜어내며 야나카황자가 다시 말했다.
“..질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거든.”
말을 하루종일 달려 숲을 넘어 도착한 곳의 이름은 로뎀시. 소도시라기 보다는 작은 마을이라고 하는게 더 어울릴법한 곳이다. 로뎀시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그나마 큰 도시가 나오지만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는 아니었다. 이리타의 목적지는 남쪽..이라고 했으니 로뎀시가 편하게 쉴수 있는 마지막 휴식지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뎀시를 지나 페르산맥으로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마물들이 공격을 해올테니 잠잘때도 교대로 보초를 서가면서 자야할테고...
이리타는 왜 그 위험한 곳을 가려고 하는걸까... 궁금해졌지만 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시내로 들어와서 주변을 경계하듯이 쳐다보는것도 물론.. 사정이 있을테고..
주변은 어둑어둑해져있었지만 작은 마을에서 여행객을 위한 여관을 찾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럴싸한 여관을 기대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여관이 작아서 방이 모자라다는게 문제라면 문제.
“지금 남아있는 방은 두 개뿐이니 알아서 나누셔야 되겠는데요.”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여관주인의 눈은 방두개로 나눠지기가 곤란한 우리 일행을 주우욱 눈으로 훑고 있었다. 장정 다섯에 여자하나, 작은 방하나에 장정 다섯을 들이밀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자인 이리타에게 남자들과 같이 자라고 할수도 없어 난감한 현실은 이리타가 아무렇지도 않게 상황을 받아들이는걸로 간단하게 결론이 났다.
“어차피 시오니야 내가 발가벗고 있어도 어차피 관심없으니까 같이 뒹굴어도 상관없고, 나머지 한명은 아르로 하지. 뭐. 그럼, 셋씩 나눠 자면 되는거지. 자, 이제 각자의 방으로 출발. 그럼. 갈까. 아르?”
이리타가 다정하게 내팔에 팔짱을 끼자 프란이 속이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석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가만안둘줄 알아.”
“어머, 그거야 내맘이지.”
아무래도 일부러 프란을 자극하는것만 같은 이리타의 손에 이끌려 방안에 도착한 나는 뒤늦게 이리타의 진정한 목적을 눈치챘다. 방에 오자마자 나를 침대에 앉히고본 이리타가 한것은... 내 어깨위에 얌전히 앉아있는 독수리 아시리안을 요리조리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신기하네. 독수리는 잘 길들여지지 않는데 말이야. 시오니, 안그래?”
뒤따라 들어온 시오니를 향해 이리타가 물었을때 나는 시오니가 별 대답없이 고개를 돌릴줄 알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시오니는 아시리안을, 그리고 나를 슬쩍 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곧 대답했다.
“새끼때부터 인간의 손에 자랐다면 몰라도 야생독수리는 쉽게 길들여지지 않지. 하지만.. 예외도 있는 법이니까”
“흐응..예외라 이거지?.. 어쨌건 눈매가 제법 성깔 있어보이는게 귀여워”
“그래요?”
글쎄요. 실제로 보면 그다지 귀엽지않을걸요. 머릿속으로 생각하는데 이리타가 아시리안쪽으로 불쑥 손을 뻗어왔다. 깜짝 놀라 말리려고 했지만 이리타의 손은 벌써 독수리의 머리를 대책없이 쓰다듬고 있었다. 이리타..자신이 지금 위험천만한 마족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는걸 알기나 할까.. 라고 생각하다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시리안이 이리타의 손을 물어뜯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해야 하는데.. 이리타가 아시리안을 만지는게.. 아시리안이 그걸 눈감아준다는게.. 왠지 조금 싫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안의 유치한 감정의 이름을 헤아리기전 이리타가 먼저 아시리안에게서 손을 떼고 일어서며 기지개를 요란하게 켰다.
“후아아암. 식사하러 내려가자. 밥먹고 늘어지게 자고 싶어.”
짐을 내려놓고 이리타들과 다시 1층으로 내려오자 케드릭,프란, 데런등은 벌써 내려와서 복작거리는 테이블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들 좀 들떠있는것 같네. 무슨 일 있나. 프란도 기분좋아보이고 데런도 웃음이 활짝 핀 얼굴이고 프란앞에 서면 고양이앞의 쥐가 되는 케드릭마저 혈색도는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 나가자.”
“응?”
뭐랄까. 기분이 좋아보여서 다행이긴한데..뭐야. 저 부담스럽게 반짝거리는 눈빛은.
“우리도 축제를 즐기러 가야지!!”
프란의 말에 재깍 반응한건 이리타였다.
“축제?!!!!”
“오늘이 삼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로뎀시의 축제랍니다.”
“재,재밌겠다아!!!”
밥먹고 늘어지게 자고 싶다더니... 어린애처럼 좋아라하며 이리타가 먼저 식당밖으로 쏜살같이 뛰쳐나가고 엉덩이가 들썩들썩 해보이던 데런, 케드릭이 그 다음주자로 쌩- , 그리고 프란이 내팔을 잡아끌며 쌩- .
술을 실컷마실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입맛을 다시는 케드릭이야 두말할것 없고 활발하고 거침없는 성격에 노는것도 무지 좋아하는지 [축제]라는 말에 입이 귀에 걸린 이리타..역시 술과 춤추는것, 예쁜여자들.. 이 삼박자를 두루두루 좋아라하는 프란과 데런도 생선가게로 뛰어가는 고양이만큼이나 신나보이고.
시오니가 궁금해져서 뒤를 돌아봤을때 나는 웃을수밖에 없었다. 다크엘프라는걸 들키기 싫었는지 마을로 들어와서 한번도 벗지않았던 로브의 후드를 벗어내린 시오니가 우리 뒤쪽에서 느긋하게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장작더미에 기름을 뿌리고 그위에 작은 불꽃이 던져지자 불꽃은 순식간에 장작을 먹어치울듯 부풀어올라 화르륵 하늘높이 타올랐다. 불꽃이 밤하늘로 치솟는순간 사람들의 환호성이 그뒤를 따른다. 기다렸다는듯이 악기들이 연주하는 음악소리와 함께 절로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흥겨운 분위기가 퍼지고 그 즐거움에 취해 모닥불 주위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을 구경하고있는데 복잡거리는 틈바구니에서도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일행들의 모습이 자연히 눈에 들어왔다.
케드릭은 한쪽에서 거나하게 취해있는 남자들틈에 껴서 술을 동이째로 들이키는 중이고..
프란과 데런은 눈에 하트를 매단 마을아가씨들과 춤을 추고 있고...
이리타는 변죽좋은 성격답게 낯선 사람들과 함께 어깨동무까지하며 수다를 떨고있고..
시오니는.....?...하고 돌아보다가 나는 속으로 웃었다.
한쪽 구석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채 서서 나처럼 구경만 하던 시오니는 흔하지않은 다크엘프를 신기하게 구경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곤욕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노랫소리...음악소리...타오르는 불꽃과...사람들의 웃음소리...
모두들 웃고있었다. ..슬픈 일은 없다는듯이 행복하게 웃고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낯선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언젠간 평화로운 이곳에도 전쟁의 피바람이 불어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따위 한심하다는것은 알지만
우리가 웃고있는 지금 이순간에도 비명과 함께 스러져갈 무수한 사람들이 아른거려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타오르는 불꽃속에서 대지위를 질척이게 할 끔찍한 피의 영상이 지워지지 않아서.. ...
이렇게 있으니까 용병으로 떠돌면서 겪은 마물들과의 참혹한 전쟁은 꿈처럼 느껴진다.
아니..어쩌면 지금 이순간이 평화로운 한순간의 꿈일지도.....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아시리안이 퉁명스럽게 보내온 전음에 그제야 어깨위에 앉아있는 독수리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족이니까 인간들이 벌이는 축제에 동참하는거 별로라고 생각하는지 알수없지만 왠지 독수리로 변해달라고 부탁한게 미안해졌다. 아시리안이 독수리로 변해있으니까 전음이 아니면 얘기나누는것도 못하고.... 손을 잡는 것도 할수 없고.... 같이 춤을 출 수도 없고..
[미안. 이런거 재미없지?]
[너와 함께 다니는 시끄러운 머저리들도 그렇고 여기있는 다른 벌레들도 모두 즐거워보이는데 너는 별로 그런것 같지 않군.]
다들 춤추고 술마시고 즐거워하는데 앉아서 구경만 하고있는 내가 이상한듯 아시리안이 말하자 나는 가만히 웃었다.
[내가 왕따같아?]
[왕따? 그게 뭐지?]
[으음...다른사람들에게 소외당하는 외로운 사람..이랄까.]
내쪽을 보는 검은 독수리의 한쪽면은 붉게 타오르는 불꽃에 비춰져 온통 새빨갰다. 내가 혼자있으니까 걱정해주는건가..싶어져서 웃으면서 다시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지금은 혼자가 아니잖아. 아시리안과 함께 있다고]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동자에 비추인 불꽃너머로 익숙한 다크블루의 시선이 빨아들일듯이 내눈을 응시했다.
바람이 불자 거대한 모닥불꽃에서 솟아오른 불씨가 탁,탁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튀고 음식냄새, 술냄새에 섞여 나무타는 냄새가 섞여 코끝을 스친다. 이마를 덮고있는 머리카락이 부스스 흐트려지는 사이로 아시리안의 깃털이 자잘하게 흔들리는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살짝 머리를 쓰다듬자 자존심강한 독.수.리 아시리안이 펄쩍펄쩍 뛰며 벌컥, 화를 냈다.
[건방진 손 치우지 못해?!!]
째째하긴,..정체가 마족이건 변태건간에 어쨌거나 지금은 귀여운 독.수.리인 주제에.. 겨우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화를 내는게 귀여워서 큭큭 웃자 나를 잡아죽일듯이 노려보던 아시리안이 머릿속으로 전음을 실어 보냈다.
[....구경다했으면 이만 일어나지. 인간? 너는 나와 해야할 일이 있을텐데?]
키득거리고 웃다가 뒷통수를 한대 후려맞은 사람의 심정으로 켁,하고 놀라 아무말도 못하는 내게 이번엔 좀더 강한 어조로 아시리안이 전음을 실어 보냈다.
[설마 감히 나를 이꼴을 하게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고 하는건 아.니.겠.지?]
아.........나..난처하다.... 일생일대의 대위기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음험스러운 분위기에 안절부절 못하는 내게 갑작스런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같이 추시겠어요?"
바로 머리위에서 들리는 말에 고개를 들자 예쁘장하게 생긴 낯선 아가씨가 수줍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아시리안이 당장 나를 끌고 이짓저짓하러 갈것 같아서 나름 절박했던 심정이라 나는 속이 뻔히 보인다는걸 알면서도 냉큼 자리에서 일어서서 대답했다.
"아...예....그..그럼..."
좋습니다,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아가씨의 뒤에서 느긋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런저런..곤란한데요? 선약은 이쪽이 먼저라서"
의외의 사태에 눈을 동그랗게 뜬 아가씨를 지나쳐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내게 다가온 프란이 내 허리를 팔로 휘어감으며 여자를 향해 -그럼 실례- 라는듯 간단하게 고개를 숙이고 나를 끌어당겼다. 실망한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것 같기도 한 아가씨를 보다가 뻣뻣한 몸을 용케 잘 리드하고 있는 프란에게 쓴웃음을 슬쩍 지었다.
"...선약?"
"굳이 말하자면 너에 대한 우선권이라고나 할까"
뻔뻔한 이론에 동조할수는 없지만 싱긋, 웃는 프란을 보며 나도 웃었다. 흥겨웠던 음악은 어느새 달콤하고 느린템포로 바뀌어있었다. 남녀커플들이 부르스 추는 틈에 남자둘이 다정하게 달라붙어서서 춤을 추고 있으니 분위기가 상당히 묘하다. 거기다 둘러선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들도 심상치가 않고 무엇보다 어깨를 움켜쥔 아시리안의 발톱에 힘이 들어간것 같은건...착각이겠지?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들이야 대놓고 무시해도 날카로운 독수리가 가까이에서 심상찮게 노려보는 것은 무시해버리기가 힘들었는지 프란이 뻘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아르...그 독수리는 좀 쫒아보내지 그래? 내눈을 발톱으로 할퀼것처럼 노려보는데?"
아마 소용이 없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시리안의 이름을 전음으로 부르려고 하자 내가 말하기전 아시리안이 먼저 전음으로 말했다.
[절.대.안.돼. 일단은 우선권 운운하는 벌레놈하고 열심히 춤이나 춰두시지. 나를 쫒아낼 걱정보다는 조금뒤 걱정이나 미리 해두는게 좋을거다.]
아시리안이 음산하게 뱉어내는 말을 듣자 정말 이것저것.. 독수리로 변신하게 한거나.. 도시락이라는 등..못생긴 독수리라는등의 말을 듣게 한 일에 대한 후환이 두려워져서 프란과 춤을 추는 와중에 슬쩍 아시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아시리안도 춤출수 있어?]
[하등한 인간들이 하는 일을 마족인 이 내가 못할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왜 묻지?]
...그래. 너 잘났다. 하면서도 좀 망설이다가 물었다.
[..나하고 춤출래?]
[흥,다른 벌레놈들이 있는데서는 변하지 말아달라고 한건 너아닌가?]
으휴..꼬장꼬장하게 따지고 들긴..
[독수리로도 변신했으니까 다른 사람으로도 모습을 바꿀수가 있잖아?]
뭐랄까..원래는 안.는.다.고 이를 가는 성격나쁜 독수리의 심기를 다른쪽으로 돌리려 머리를 짜낸 거지만 이거 왠지 사탕한개 사달라고 엄마의 치맛자락 붙들고 떼를 쓰는 땡깡쟁이가 된것 같아서 내가 거의 포기하고 있을때쯤 푸드득하는 새의 날개짓 소리와 함께 아시리안이 밤하늘로 날아갔다.
[..................아시리안??]
별안간 날아가버린 아시리안쪽을 바라보고 있자 프란이 이제 속이 시원하다는듯이 말했다.
“이제 갔군. 눈치없는 애완동물따윈 일찌감치 버려.”
애완동물이라........아시리안이 옆에 없는게 무진장 다행인 위험천만한 발언이다. 아시리안이 그말까지 들었으면 프란의 눈을 정말로 할퀴어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아시리안이 발톱으로 프란의 뺨을 할퀴려 달려드는 장면을 어렵지않게 상상해낸 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있을때 차가운 바람이 훅, 하고 부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가볍게 날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습관처럼 쓸어올리려다가 멈칫, 멈추는 나에게 날제비만큼이나 가벼운 몸짓으로 리드하며 프란이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채 물었다.
"너.... 그때 레오포드가를 다녀온거지?"
그때?...아, 로드리고시까지 와서 케드릭을 만났으니 프란역시 눈치챘겠구나 싶었다. 로드리고시옆에는 레오포드가가 있는 카레인시였으니까. 내가 케드릭에게 잠시 다녀올곳이 있다고 한것을 프란은 레오포드가에 들르려고 한 것으로 생각할수도 있었다. 사실 내목적지는 아시리안과 처음 만났던 사창가 골목길이었지만.. 레오포드가를 들른 것도 사실이니까.
" 가까이 가긴 했지만 만나지는 못했어. 아마 알프레드가 찾아온건.. 마을을 지나칠때 내얼굴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던것 같기도 하고.."
"돌아갈 생각은 아예 없어? 아니..네가 돌아가지 않는것은..."
목소리가 꺼내기 싫은것을 억지로 꺼내듯이, 아니면 꺼낼까말까 망설이듯이 점차 말끝이 흐려진다.
프란, 펠릭스형에 대한거라면 얘기하지 말아줘. 아직은 그사람의 얘기를 아무렇지않게 들을 수 없어.
아시리안과 나에게 그사람이 했던 짓을 아직은.. 용서할수 없어...
프란이 망설이는것을 보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때 프란의 뒤에서 갑작스럽게 말을 끊는것처럼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쯤해서 숙녀에게 양보 좀 하시지? 호모양반"
등을 찰싹, 손바닥으로 때리며 말한 이리타는 프란이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돌아보기도 전 솜씨있게 내손을 잡아채 카바레에서 아줌마들 손을 꽤 잡아준듯한 날렵한 제비처럼 빙글 허리에 팔을 감아 가로챘다.
"귀여운 아르를 혼자서 독차지 할 셈이야? 그건 안되지"
귀여운?? 이리타..그건 좀 아니라고 봅니다. 뭣보다 나보다 머리하나는 적은 당신이 할말은 아니라 그거지요..
무척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던 프란이 별수없다는듯 뒤로 물러서자 이리타가 대놓고 깔깔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드디어 일어섰네. 아르.. 언제까지 심심하게 구경만 하려는지 궁금했어.즐겁잖아? 축제도 오랜만이고.. "
"그게..조금 낯설어서요.."
"낯설어도 즐길수 있을때 즐기고 웃을수 있을때 충분히 웃고 놀수 있을때 맘껏 놀아두라고.
그리고 힘든일이 닥쳐오면 그땐 그때가서 생각을 하면 되는거지. 뭐."
이리타의 황금빛 블론디 머리카락에 부서질듯 비춰든 붉은 불꽃의 여운을 바라보며 솜씨좋게 나를 이끄는 이리타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충분히 즐거웠어요. 이리.."
"거짓말"
내말을 완전히 부정하는 단호한 말에 조금 놀라서 바라보자 이리타가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즐겁다..라고 말하면서 왜 그렇게 슬픈 눈을 하는데? 마치 울고싶은것처럼 웃고있잖아?"
울고싶은것처럼....웃고있다고? 내가 이리타의 손을 놓은건지 이리타가 내손을 놓은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춤추는 사람들사이에서 춤을 멈추고 돌처럼 굳어있는 내게 속을 짐작할수 없는 이리타가 경쾌하고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보는 사람이 다 위태위태해. 그런주제에 저 남자의 어리광까지 너무 받아주지는 마"
프란이 사라진 쪽을 턱짓으로 힐긋 가리키며 하는 이리타의 말에 나는 서둘러 부정했다.
어리광을 받아주다니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본적 없다. 오히려 프란쪽이 더...
"그렇지 않아요. 이리타..프란은..!!"
내가 말을 꺼내기전 이리타가 다시 말을 가로채듯 끼어들었다.
"프란 저 남자는 아르가 생각하는것보다, 겉에서 보는것보다 훨씬 집요하지. 그게 우정뿐일거라고 생각해? 받아줄 생각이 없다면 적당히 거리를 둬. 안그러면 언젠가 아르를 꽤 곤란하게 만들지도 모르니까"
생각지도 못한 이리타의 말에 할말을 잃었다. 어리광이라... 프란과의 관계에선 항상 프란이 나를 걱정하고 챙겨주는 쪽이었기때문에 이리타의 얘기는 조금 의외였다... 게다가 [우정뿐이라고 생각해?]..라니...
"뭐...너무 골치아프게 생각하지마. 안그래도 아르의 문제점은 너무 생각이 많다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