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막사로 비춰드는 어스름한 황혼의 빛이 피처럼 붉디붉다. 종일 이어진 전투가 끝나고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프란과 얘기를 나눌틈이 없어 나는 아무도 없는 빈 용병막사로 먼저 돌아와있었다. 막사전체를 꽉채운 침상대용으로 길게 이어진 딱딱한 나무침대위에 엉덩이를 걸치듯앉았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니 허름하게 낡아있는 신이 시야에 잡혔다.
이곳에서의 신은 거의 대부분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지만 용병이 신을수 있는 신이래야 제일 질이 낮은 가죽에 끈을 교차해서 묶는 군화비슷하게 생긴것이라 하루종일 움직이고 나면 땀이 많이 찼다. 그나마 이런 질낮은 신도 용병의 봉급으로 맘놓고 사기에는 가격이 만만치가 않고 금새 허름해지고 낡아지기 때문에 몬스터들과의 전투후 피비린내나는 시신들에게서 신발을 벗겨가는 모습들은 이제 그다지 낯설지않은 서글픈 풍경중의 하나.
땀이 끈적하게 차있는 신을 벗으려 몸을 숙이려다 머리가 어지러워 잠시 멈칫, 멈췄다. 손을 대고있는 이마에 약간의 미열이 느껴졌다. 한밤중에 찬물로 샤워하기엔 확실히 좀 쌀쌀했는지도.. 게다가 아시리안과의 일도 있었고..
이제.. 정말 끝이야..다시 만나면 산채로 갈기갈기 찢어 심장을 꺼내겠다는 아시리안의 말은 진심이었으니까.
"후우...........“
아시리안에 대한 생각을 떨치려 신을 마저 벗으려하다가 멈칫, 멈추었다. 문쪽에서 나를 응시하는듯한 시선이 느껴져서 신의 끈을 푸르는 자세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자 언제온건지.. 아니 언제부터 보고있었는지 막사천을 걷어올린 자세로 멈춰서있는 프란이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무슨생각을 하고있었던건지 알수없는 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시선과 눈이 마주친다.
아...프란과 마지막 만났을때가 크로멜성의 지하감옥에서 아시리안이 죽은줄 알고 반쯤 정신나가있었던 때..였었지..
나를 찾아준게 고맙고... 매번 나를 찾으러 다니게 해서 미안하고....사람과 사람사이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의 차이가 다르니 공평해질수 없는게 어쩌면 당연한건지도 모르지만 프란이 나와의 관계에서는 늘 프란이 손해보는 입장에 서게되는것 같아 쉽게 미안하다는 말도 할수 없게 된다..
"너....머리가 왜 그모양이냐?"
불만스럽게 묻는 말에 나는 짧은 검은머리카락을 그제야 의식하며 쑥쓰럽게 웃었다.
"...그렇게 됐어..."
"제길.. 검은머리색으로 물들인줄도 모르고 붉은 머리카락만 찾아다녔으니.. 못찾고있었던게 당연한건가."
미처 그것까지 생각해내지못한 자신이 한심하다는듯이 푸른 머리카락을 북북 문지르며 문쪽에서 다가온 프란이 내가 앉아있는 내발앞에 쭈그리고 앉아 물었다.
"....기억은 돌아온거야?"
..프란이 내게서 찾는건 아르휜으로서의 모습일까. 아니면 기억을 잃었을때의 아르로서의 모습일까.
둘중 어느것을 찾는다해도 지금의 난.. ...아무 대답도 해줄수 없는데...
어쩌면 나는 계속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네가 찾고있는건 어느쪽인데. 기억을 찾은 아르휜?. 아니면 기억을 잃은채인 아르?"
내가 생각해도 우스운 질문이다. 그리고 프란역시 내 질문이 이상했는지 시선을 부딪쳐왔다.
내가 느끼는 혼란까지야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내눈이 불안하게 흔들리는걸 가만히 응시하더니 프란이 갑자기 팔을 뻗어왔다. 뻗은 팔로 내목에 휘감아져 어...? 할 사이도 없이 끌어내려진다. 그렇게 앉은채로 엉거주춤한 자세로 안긴 내게 프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상관없어. 어느쪽이든. 모두 너니까"
아............그..그래...그렇구나....
기억을 잃은 아르이든 기억을 찾은 아르휜이든 어느쪽이든 너니까 받아들이겠다고 당연하게 말해준다.
빛의 화살처럼 관통하는 한가지 생각에 나는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모를 기분이 되었다.
나를 기억하든...기억하지 못하든.....아시리안이 아시리안인건 변함없는 것처럼.....?
그렇다.. ... 아시리안은 변한게 하나도없었다.
잘난척하고 거만한 성격도 그대로고.. 심술맞게 구는 주제에 나를 도와주는 것도 그대로고....살살 약올려대며 괴롭히는 주제에 묘한데서 친절하게 구는것도.. 그대로고.....
단지 나와 함께 했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할뿐... 내가 그리워하던 그대로의 모습이었잖아..
왠지 눈물이 날것같아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아시리안을 다시 만나고 한번도 맘껏 기뻐하지 못했다.
아시리안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게 너무 슬퍼서.. ... 너무 아파서..
감옥에서 울고있을때 나타나서 채찍에 맞은 상처를 치료해주고.. 쇠사슬에 묶인걸 풀어주고.. 식인꽃에게 잡아먹힐뻔한걸 도와줬는데도.. 나는 한번도 아시리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시리안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워서.... 아시리안을 잃어버린것만 같아서... 피하려고만 들었다.
가라고 소리쳤지만 사실 하고 싶은 말은 그 반대.
.............................가지마. 아시리안.
죽이고 싶으면 죽이라고 소리쳤지만 사실 하고 싶었던 말은 그 반대.
......보고싶었어. 아주 오랫동안.......외로웠어.. 많이 그리웠어.
어스름한 황혼의 빛이 피처럼 붉디붉다. 세차게 불어오는 저녁바람에는 어지러울만큼 피비린내가 불어오고 있었다.
차가운 성벽위를 불어닥치는 바람보다 더 싸늘하고 음침한 시선에 옆얼굴이 뚫릴것 같아서 나는 한숨쉬듯 재차 말했다.
"미안해요. 미안하다고요. 케드릭"
"어딜가면 간.다.고 얘길 해야 될거 아냐, 이 망할 개자식아!!!"
"금방 돌아오려고 했는데.. 중간에 일이 생겨서 바로 못왔어요. 이렇게 늦어질줄은 몰라서 말안한거라고요."
....아시리안을 만날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우연이란건 어떻게 만들어지는건지..새삼 신기해졌다. 내가 그때 로드리고시에서 움직이지 않았더라면...처음 아시리안을 만난 사창가거리를 지나쳐오지 않았다면 아시리안을 다시 만날 우연같은건 없었을테고.. 어쩌면 처음부터 프란의 손에 이끌려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예 만나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내가 예상보다 네레이드성에 오는게 늦어지자 프란의 만행에 얼마나 시달린건지.. 단 몇일만에 그 건장한 체구가 헬쓱해지고 두눈까지 쾡해진 케드릭은 불구대천지 원수보는듯한 시선을 내게서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랜만에 만난 베논들도 나를 반가워하기보다는 원망어린 시선으로 봤었지..
프란..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한숨을 쉬며 성벽의 계단을 케드릭과 내려오던 나는 성문을 통과하는 낯선 일행들을 무심코 시선으로 훑다가 흠칫 놀랐다. 말을 타고 성안으로 들어선 몇사람중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이미 내가 알고있는 사람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 알프레드?!!!!
성벽이 만들어낸 어두운 그늘에 몸을 숨긴채 말에서 내려 병사들과 얘기를 나누는 알프레드의 모습쪽을 힐긋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네레이드성까지 온거지?....멀어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우연히 지나가다 들른것 같지는 않다
"아르, 지명수배자였어?"
으슥한 어둠과는 어울리지 않는 밝고 경쾌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 이리타가 안녕? 하듯이 손을 흔들고 있다. 그 이리타의 뒤에는 팔짱을 낀채 모든것에 관심없다는듯 무상무심인 표정의 시오니가 서있었다.
“무슨..소리예요?”
“저사람들 누굴 찾고 있던데? 검은 머리카락의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 그거 아르지?”
설마,했던게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내가 네레이드성에 올거란걸 어..어떻게 안거지?...하다가 아시리안과 보란듯이 돌아다닌 거리가 레오포드공작가가 버젓이 버티고 있는 카레인시였다는데에 생각이 미쳤다. 아무리 머리카락을 염색했다고 하더라도 지나치는 사람들중 하나는 아르휜의 모습을 떠올렸을수도 있는데 그렇게 대놓고 돌아다녔으니...조브일당들과 소란까지 피웠고....카레인시에서 로드리고시까지 내 행적을 쫒는건 어렵지 않았을것이다. 숲을 넘으면 바로 보이는게 네레이드성이니까 여기를 곧장 찾아왔겠지만.. .....나를, 왜 찾고 있는거지? 레오포드공장님이 찾고있는걸까? 아니면 펠릭스형이? ..........
심장이 지끈지끈 거리고 머릿속이 쿵쿵 울리고 있을때 이리타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 뭐, 지명수배자이든 범죄자이든 잘생기면 모든 죄는 용서가 되는 법이지."
굉장이 위험하고 터무니없는 발상을 말하면서도 표정은 더할나위없이 진지하니....농담인지 아닌지 분간할수가 없어 애매하다.
"어쨌든 상관없다는 얘기지. 내가 필요한건 용병이니까. 나와 함께 가겠어?"
".....무슨...?........."
“나, 아르를 용병으로 고용하고싶다고 말하는거야”
들키기전에 서둘러 이곳에서 떠나야겠다, 생각하긴 했지만 워낙 뜻밖의 제안이라 선뜻 말을 못하는 나를 보고 이리타가 호감가는 외모를 십분 활용하기로 마음먹은듯 빙긋 웃었다.
"어차피 이성에 들른건 말이 필요하기도 해서였지만 용병을 몇사람 구할 생각도 있었으니까. 아르가 온다고 하면 아르의 호모애인과 애인친구도 오겠지? 실력이야 이미 봤고, 그 셋이면 충분해"
“넷이겠지.”
도대체 누가 누구의 애인이라는거야.. 하고 있는데 내뒤에서 아직도 화가 안풀렸는지 여전히 음침한 표정의 케드릭이 스윽, 나서며 말했다.
“어머, 당신까진 바라지 않았지만 뭐.. 좋아요.”
이리타? 저기..나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는데요. 게다가 내가 간다고 프란이나 프란친구가 날 따라온다는 보장이 어딨어.. 내가 막 대답하기도 전에 대답은 다른쪽에서 들려왔다.
"좋아, 함께 간다."
대답한건 바로 이리타에게 나의 호모애인이라고 매도된 프란이었다. 함께 간다고? 가긴 어딜가..잠깐, 그러기 전에 나는 아직 대답을..
"훗, 역시 꾸물거리지않고 시원시원한게 좋네. 역시 내가 사람보는 눈은 있어. 호모만 아니면 그쪽도 내 취향인데"
이리타... 지금 입술을 날름 혀로 핥는건 입맛 다시는거??
"그래? 어쩌지. 굳이 아르가 아니어도 당신같은 여자는 내 스타일이 아닌데.."
"어머나, 어련하시려고. 남자의 단단한 엉덩이를 보고 군침이나 흘리는 주제에 나처럼 나긋나긋한 미모의 여자가 눈에 들어올리가 있겠어?"
"군침을 흘리는건 아무래도 그쪽같은데? 입가에 흘러내리는 침이나 닦으시지?"
도..도..도대체 이게 다 무슨 대화들이야. 어딘지도 모르고 덥썩 따라간다고 말하는 프란이나 함께 가자고 했던것도 아예 잊은듯 프란과 신이나서 말씨름을 벌이는 이리타나.. 제멋대로인 여자와 제멋대로인 남자 둘이서 쿵짝이 맞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걸 벙쪄서 바라보던 나는 입씨름을 하는 인간 둘을 한심하다는듯이 쳐다보는 무뚝뚝한 다크엘프의 시선에 같은 인간으로서 좀 창피해졌다.
시오니...모든 인간들이 다 이렇지는 않아요...
다음날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기전 남장여인 이리타, 다크엘프 시오니, 오랜만에 만난 프란, 아직 어떤사람인지 알수 없지만 성격이 서글서글해보이는 프란의 친구 데런, 프란을 무지 불편해라 하는것같은데 용감하게 나와 함께 가겠다고 나서준 케드릭, 그리고 나.... 결코 평범하다고 할수없는 일행 여섯이 오붓하게 말을 타고 사이좋게 네레이드성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함께 갈래? 라는 말에 당사자인 내가 동의도 하기전 얼렁뚱땅 이뤄어진 급떠남의 길이었지만 레오포드가에서 나를 찾아내기전 떠나야했으니까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의인 셈, 오히려 이렇게 서둘러서 떠나는게 나로서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한참 달리고 나서야 말을 멈추고 멀리 떨어져서 깨알만큼 작아보이는 네레이드성을 잠시 돌아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을 가장해서 가족들을 만날 용기가 없는 지금 내게 최선은 알수없는 후일을 기약하는것밖에는 없었다.
도망치고 있는게 생각하는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이름의 펠릭스형에게서인지.. 엄격하고 냉혹한 아버지에게서인지, 아르휜 폰 레오포드라는 이름앞에 한번도 행복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했던 삶에서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그래서 더 지금은 돌아갈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득하게 멀어진 네레이드성, 아니 그 먼 방향..레오포드가가 있는 쪽을 바라보다가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뒤늦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수선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어지럽게 휘몰아치는 눈빛을 숨기며 프란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냥..."
“아르.”
“응?”
뭔가 할말이 있는것 같은데 쉽게 말을 꺼낼수 없다는.. 그런 표정으로 프란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안어울려. 안어울린다고.프란. 언제부터 그렇게 꾸물거리며 하고싶은말 못했다고...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바람이 휘몰아친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푸른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휘날리고, 등을 돌리고선채 프란은 곧 그 특유의 얄미운 어조로 경쾌하게 말했다.
"굼벵이처럼 게으름 피우면 두고갈테니까 부지런히 쫒아와"
말을 내뱉으며 쏜쌀같이 달려가는 프란의 뒤를 나도 이럇,하고 타고있는 말을 독려해서 쫒기시작했다.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울부짖음.. 토해버릴수 없는 비명소리.. 오솔오솔하게 덮쳐드는 한기와도 같은 외로움.. 사라진 아시리안의 모습등을 몸을 휘쓸고 가는 차가운 바람과 함께 지워버리려 애쓰며...
인간이라는 종족의 평균수명은 길게 잡아도 겨우 백년, 마족에 비하면야 하루살이보다도 못한 삶이다. 그 짧은 시간동안에 오만가지 변덕과 갖가지 추악한 욕망을 추구하다 쉬이 늙고 소멸하고 다시 태어나고 똑같은 짓을 반복하다가 다시 소멸하는 인간이란 생물.. 신의 불완전한 장난감따위 관심없지만 아시리안은 백년도 못사는 하루살이들중 하나이고 감히 자신을 괴상한 별명으로 불러댄 건방진 인간을 노려보고 있는중이었다.
몇번이고 구해준 내게는 한번도 저렇게 웃어준적이 없으면서..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음흉한 벌레놈과 사이좋게 달라붙어서는..아주.. 신이 나셨군?
안절부절을 할수가 없을만큼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검푸른 머리카락들이 광폭하게 허공에서 미친듯이 휘날리고 아시리안이 걸치고있는 옷자락의 끝이 품고있는 위험한 기운으로인해 파지직,파지직, 공기를 벨것같은 예리한 기운이 흘러넘쳤다.
겨우 일이십년이면 살덩이가 흐물흐물해질 비천한 고깃덩이주제에.. !!
오만한 자존심이 빠직, 빠직 금가고 있었다.
혼자서 멍청하게 울고있는것도 마음에 안들었지만 저렇게 다른 인간들과 웃고 있는 모습도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죽여도 좋다고 했던가, 오냐, 벌레같은 인간, 소원대로 죽여주지. 산채로 갈기갈기 찢어서 심장을 꺼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