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오포드가의 귀공자-22화 (22/36)

22.

"멍청한 인간놈!!! 한심하고 어리석고 멍청하기 이를데없어!!!!"

주변을 초토화시키며 분노를 쏟아내던 아시리안은 확, 뒤를 돌아보았다.

저택을 무사히 빠져나와 휘청거리며 위태롭게 걸어가던 인간은 어둠속에 쭈그리고 앉아 다시 토하고 있었다.

정신을 조종한 새의 눈을 통해 보는것이라 지금 새가 보는것을 아시리안도 보고있는 셈이었다. 지하감옥에서부터 내내 ..........보고있었다.

말을 거는 것을, 우스운듯이 미소 짓는 표정을, 채찍을 맞으며 비명을 참는 모습을, 혼자 남겨지자 연약한 짐승처럼 약하게 혼자 우는것을..

시체만큼이나 창백한 표정을 한 채 일어서다가 비틀, 잠시 숨을 고른후 걷기 시작하는 인간을 바라보며 아시리안은 다시 화가 치미는것을 느꼈다.

지하감옥에서 실제로 있었던것은 새이지만 직접 보고있는건 아시리안의 눈이었다.

멍청하게 쓸데없이 동정심이나 베풀어 그런 꼴을 당하는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벌레놈들이 채찍을 내려칠때마다 안절부절 할 수가 없었다.

피가 튀는 어깨가.. 고통을 참는 표정이.. 신경쓰여서 참을수가 없었다.

어둠속에서 숨죽여 우는게 연약한 짐승처럼 애처로워보여서 그대로 내버려둘수가 없었다.

그러나 더 참을수 없는건 처음으로 두려운 표정이 되었다는것. 공포심에 질려 도망치려고 몸을 돌렸다는것. 벌레들이 벌려논 재미있는 풍경에 충격을 받았는지 멍청하게 서서 정신나간 표정이길래 먼저 움직인것 뿐이다. 그런데..그 표정은 뭐란 말인가.

하긴, 당연하지, 그게 당연한 일이지. 너처럼 벌레같은 인간이야 마족을 두려워하는게 당연하고 말고,

별수없는 인간이다, 나약하고 하찮은 인간에 불과하다. 라고 함께 죽이려고 했건만... 그럴수가 없었다.

왜 저 멍청하고 하찮은 벌레따위를 죽일수 없는가 ... 왜 이렇게 안절부절을 할수가 없을만큼 신경이 쓰이는가...

불쾌감을 동반한 짜증.. 신경에 거슬리는 무언가가 머릿속 어딘가에 요사스런 뱀이 또아리를 틀듯 도사리고 있다. 저 인간에게서 풍기는 무언가가 아시리안으로 하여금 불쾌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뭔가..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알수없는 기분... 불쾌함과 짜증의 원인은 바로 그것이었다.

악몽같은 밤이 지나가고 태양이 어김없이 지평선의 끝에서 일렁거릴때 나는 드디어 카레인시를 벗어나고 있었다. 습한 바람이 이는 아득한 지평선의 끝을 바라보며 멈춰선 내등뒤로 싸늘한 바람이 어서 걸어가라고 재촉하듯 등뒤를 부드럽게 민다. 나는 바람이 부는 방향, 내가 있어야할 곳을 찾아 걸음을 재촉했다.내가 있어야할곳, 머물곳은 마족인 아시리안의 옆이 아니다.

인간인 나는 이곳 인간들의 세상에 속하고 아시리안은 마족인 그의 공간에.. 그걸로 된거다. 그것으로...

오전내내 걷고 지치면 쓰러져서 죽은듯이 자고 다시 일어나 걷는 사이에 어느새 로드리고시를 지나 숲에 도착했다.

일단 숲에 들어가면 오크들의 공격을 받을수도 있어서 허리춤을 더듬거려 검이 제대로 있는지부터 확인부터하고..

숲에 한참 들어서서 지난번에 건너올때 봐두었던 호숫가를 어렵지 않게 찾을수 있었다.

목마려워.......... 더러워진 손에 상관없이 물을 떠서 한모금 마시자 이제야 좀 살것같아 후우..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꼴이 말이 아닐 얼굴까지 씻고 호숫가에 앉아있는데 며칠동안 음식물이 안들어간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나무에서 과일을 몇 개 딴후 다시 호숫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와삭... 와삭.... 과일을 씹고 있어도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때처럼 호숫가에 앉아있자 아련하게 아시리안과 내모습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와..심술부리면서도 꽤 다정했던 아시리안의 모습이 파노라마 처럼 스쳐지나가고 ...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아시리안이 내게 강제로 키스했던것도 떠올랐다.

......화를 내고 있었다. 왜 화가 난건지는 알수 없지만, 분명.. 화를 내고 있었다. 아시리안은.

..왜 돌아온건지.. 왜 나를 도와준건지..왜 나한테 키스한건지..그리고 그 지하감옥에는 어떻게 온건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가 없어서 머리를 흔들고 다시 과일을 입에 가져다대는데 언제 날라온건지 새가 한 마리 내옆에 앉아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 이상하네..지난번에 지하감옥에서 본 새와 비슷한 생김새같기도 한데... 설마 그 새가 여기까지 날 쫒아왔을 리가 없겠지?

“이거.. 먹을래?”

새야 애벌레같은걸 먹겠지만 혼자 먹는게 미안해서 웃으며 권하자 고개를 갸웃하며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종종 걸어와 내민 과일위에 폴짝 뛰는것처럼 올라온다. 신기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부리를 긁어주자 아마 내 착각이겠지만 기분좋은 표정을 짓는다.

“친구들은 어디에 두고 혼자 다니는거야?”

웃으면서 말을 걸자 또 빤히 쳐다본다. 나는 지친 얼굴로 다시 웃었다.

“그렇게 보지마, 정말 내 말을 알아듣는건가 라고 생각하게 된단 말이야”

웃으면서 새의 부리를 다시 긁어주려는데....갑자기  크르르르 하는 소리가 바람소리에 희미하게 실려왔다. 휙, 몸을 돌리자 과일위에 앉아있던 새가 위로 날아올랐지만 이미 내신경은 다른쪽에 있었다. ...오크들이야!!

싸우고 있는건지 사나운 울부짖음 .. 그속에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게 비명소리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그쪽을 향해 반사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지않아 오크떼들의 모습이 보였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면 돕지않을 생각이었지만 오크들 수십마리에 에워쌓여있는 사람들의 수는 겉으로 보기에 몇인지 보이지가 않는다. 허리에 꽂힌 검을 뽑아 내달리며 둘러싼 인간들쪽으로만 신경을 쓰는 오크들을 베기 시작하자 취익,취익..하는 신경질을 내며 오크들이 내쪽으로 돌아섰다.

등뒤에서 공격했다고 비겁하다고 신경질을 내지 마, 대신 너희들은 숫자가 많잖아? .. 속으로 변명하듯 중얼거리고 검을 휘둘렀다. 검에 오크들의 살점이 베어지고 지독한 악취가 풍긴다. 무언가를 죽일때의 이 더러운 기분은 상처받는게 익숙하다고 해서 새로 생긴 상처가 아프지 않은것은 아닌것처럼 일곱번 넘어진 사람이 여덟번 넘어졌을때 아무렇지도 않은것은 아닌것처럼 매번 나를 괴롭혔다. 이 더러운 마물, 죽어라!! 라고 말할수 있는 단호함이 내게는 없다. 아무리 하찮은 벌레들도 살기위해 몸부림친다. 인간이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것처럼 이 몬스터들이라는 종족도 살기위해 몸부림치고 있는거니까.

그때 아시리안은 사람을 죽이라면서 내앞에 내던졌었지.. 아시리안이 왜 그랬는지 알수는 없지만 사람을 죽이는건 내게 쉬운일이 아니었다.. 죄없는 모녀를 그리 참혹하게 죽인 나쁜 사람들인데도.. 정말 이세상에서 살아져야하는게 마땅할지 모를 악인들인데도..... 연민이나 동정심이 아니다.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나를 채찍으로 내려치면서 비웃었던 사람이고 어린소녀가 미친변태에게 잔혹하게 유린당하는것을 분명 아무렇지않게 보고 있었을 테지만.. .................할 수가 없었다. .........죽일수가 없었다.

복잡한 마음을 떨쳐버리려 양손으로 움켜쥔 바스타드소드를 힘껏 휘둘렀다. 쾌액- 하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오크의 핏물이 허공으로 분수처럼 솟구치며 목과 몸이 분리된 몸통이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떨어진다. 오크들을 베면서도 머릿속엔 해결못한 과제로 달려가듯이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아시리안은 그때 왜 그랬던 걸까. 귀찮은 일은 질색이라면서 ..인간들의 일따위 상관없다는듯 방관자처럼 팔짱을 끼고 있었으면서.. 왜 갑자기..끼어든걸까. .....그리고 왜 화를 낸걸까...

"난 이리타에요. 이쪽은 시오니. 당신은?"

몬스터들을 해치우고 한숨 돌리기도전에 시원스럽게 말을 걸어온건 황금빛블론디에 커다란 눈망울이 인상적인 남장차림의 여자였다. 여행하기에 편하기때문인지 남자들이 입고있는옷을 걸치고 있기는 했지만 그 수수한 차림새에도 남자라고는 봐주기 힘들만큼 아름답고 묘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자신을 이리타라고 소개하면서 내게 척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시오니라고 소개받은 사람의 특이한 외모를 보느라 한박자늦게 내밀어진 손을 발견했다. ...사람이라면 이겠지만.. 놀라서 너무 노골적으로 보고있었나 싶은 마음에 서둘러 고개를 내리고 아직 내밀고있는 이리타의 손을 마주잡았다.

"아..저는 아르라고..."

더듬거리며 말하는 내대답을 기다리지않고 성격이 급한건지 이리타가 내표정을 보고 알만하다는듯이 말했다.

"다크엘프를 처음보시나 보죠?"

다,다크엘프? 내 반응을 살피고있었는지 순간 당황하는 나를 보고 이리타가 깔깔거리며 큰소리로 웃었고 [시오니]가 그녀를 무뚝뚝하게 흘겨보았다.

"표정을 숨기시는게 무척 서투네요. 당신"

"죄..죄송합니다. 불쾌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검게 그을린 피부의 청보랏빛 눈동자와 길다란 청색 머리카락의 사이로 뾰족한 귀가 솟아난 시오니를 향해 말했지만 그 시오니는 내 반응도 내 사과도 애초에 나따위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는지 무덤덤했다. 단지 더 당황하는 나를 보고 이리타,라는 아가씨가 배를 잡고 웃어대서 나를 민망하게 했을뿐.

"도움을 받았으니.. 이렇게 웃는게 예의에 어긋날지 몰라도 차갑게 생긴것 답지않게 당신, 아..아르라고 했죠? 아르, 당신이 너무 순진하게 반응해서.."

"그..그런가요?"

이리타는 내게 도움을 받았다고 햇지만 얼핏 봤을때 이리타도 시오니도 실력이 상당해서 나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도운건가..라고 생각하던 참이라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런데 어디를 가시던 길인가요?"

"..잠시 일행과 떨어져서 다시 돌아가던 중입니다."

"그럼 이부근일테고.. 혹시 네레이드성으로? 오, 잘됐군요. 시오니와 나도 그쪽으로 가려던 길인데.. 원래는 오늘 밤안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보시다시피 방해꾼들이 있어서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해야할것 같은데... 아르도 우리와 같이 움직일거죠?"

빙긋 웃으며 말하는 이리타의 말에 나는 주변에 어수선하게 둘러있는 오크들의 시체를 둘러보았다. 어스름한 저녁이라 쉬었다 가자는 말에 이의는 없지만.....여기서 쉬자고? 이여자, 생각보다 비위도 좋다.

“하지만..여기서는..”

질린듯한 내 표정에 다시 빙긋 의미심장하게 웃은 이리타가 시오니쪽을 보며 부탁해,라고 뜻모를 말을 던졌고 무뚝뚝한 다크엘프 시오니가 입속으로 뭐라뭐라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믿기 힘들게도 여기저기 널려있는 오크들의 시체가 감쪽같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대..대단하네요.."

감쪽같이 사라진 오크들의 시체에 감탄을 내뱉자 다크엘프인 시오니의 시선이 힐긋 내게 머물렀다가 금새 다시 사라졌다. 엘프는 아름다운 외모에 뾰족한 귀.. 자연친화적인 종족으로 알려져있지만 인간세상에서 엘프를 보는게 흔한 일은 아니니 이런 신기하게 보는 시선, 아마 많이 경험했을테고 , 그래서 사람이 힐긋거리는 시선이 불편한건가..도 싶었다.

예전에는 엘프들도 사람들과 많이 어울리곤 했다고 하지만 요즘에 인간세상으로 나오는 엘프는 극히 드물어서 나로서는 시오니를 만난 지금 이순간이 다크엘프뿐만이 아니라 엘프라는 종족을 보는게 처음인 셈이었다. 그런데 원래 엘프들은 성격이 다 저렇게 다 차가운걸까. 아니면 내모습이 이상......아,!!

머리는 부스스하게 엉켜있고 옷은 다 헤어지고 찢겨지고 그나마 멀쩡해보이는 로브도 피얼룩이 져서 정말 거지중의 상거지가 따로 없겠네.. .... 이 꼴인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걸고 상냥하게 대해준 이리타의 비위가 대단한건지도..

나무들을 주워모으는 사이 주위는 금방 어둑어둑 해졌다. 오크들의 시체가 깨끗히 치워진 곳에 모닥불이 피워지고 나는 이리타들에게 육포를 얻어먹은걸로도 모자라 시오니의 옷까지 빌려입은 상태라 거지꼴은 간신히 면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사람들, 아니 이사람과 다크엘프는 왜 단둘이 여행을 하는걸까.. 머릿속에서 로드리고시의 여관에서 케드릭과 내옆에 앉았던 사람들이 잠깐 떠올랐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도 알아볼수 없었는걸..

어쨌건 나야 사정이 있어서였지만.. 본래 숲을 넘을땐 오크들의 습격이 잦아서 왠만해선 소수의 인원으로 움직이지 않는 법인데....이 사람들, 아니 이리타와 다크엘프인 시오니도 뭔가 급한 사정이 있었던 걸까. 라고 생각할 때 이리타가 말을 걸어왔다.

"아르, 용병이라고 했죠? 용병생활은 오래하셨나요?"

"예?...아..아뇨.."

다른 생각에 빠져있다가 한템포 늦게 대답하자 모닥불건너편에 앉아있던 이리타가 발랄해보이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럴줄 알았어요."

"...예?"

"그냥.. 아르, 당신에게서 피냄새가 많이 느껴지지가 않는다고 시오니가 말하거든요"

피냄새? 그런것도 맡을수 있나? 호기심어린 눈동자로 무뚝뚝한 다크엘프쪽을 슬금 쳐다보자 장본인이 왠지 왜 내허락도 구하지않고 그런말을 하지? 이런 책망어린 시선으로 이리타를 힐끗 못마땅한듯이 보는 걸로 봐서 그런걸 물으면 안될것같다. 귀찮게 하면 아까 치워버린 오크처럼 나도 이 자리에서 싹, 치워버릴지 모르니....

"그건, 엘프인 시오니의 느낌이고, 내가 본 아르는 흐음..왠지 가출한 귀족도련님인것 같은걸요?"

흠칫, 해서 이리타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지만 곧 별뜻없이 그냥 한 말이라는걸 알수 있었다. 하긴.. 이리타가 레오포드가의 아르휜을 알 리가 없겠지. 소문으로 알고있다고 해도 그 아르휜이 이런 꾀죄죄한 거지꼴을 한 용병과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테니까.

“...그럴리가요.”

가출인걸까..나는,......글쎄... 어쨌든 귀족이었던건 맞으니까..가볍고 경쾌해보여도 이리타의 눈치는 상당히 빠른것같다. 하지만 자꾸 내얘기를 화제로 삼는것은 자신들의 얘기는 하고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가볍게 대답만 해주고 될수있으면 질문을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든 하고싶지 않은 말은 있는거니까. 나자신에 대해 어느누구에게도 솔직하게 말할수 없는 나처럼..

“어쨌든 아르를 만나서 다행이예요. 여러 가지로 말이죠, 여기있는 시오니가 보시다시피 이모양이라 나, 정말 심심했었거든요.”

“아...네..”

보시다시피 이모양.....이라고 소개된 시오니는 이리타의 일방적이고 무자비한 소개에 익숙한건지 끄떡하지도 않는 표정이었다...지나치게 거침없고 활달한 이리타, 그리고 지나치게 과묵하고 조용한 시오니..... 뭔가 짝이 안맞는 일행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내 어울리지 않기로 치자면 더할나위없이 안어울리는 케드릭과 나를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첫만남부터가 최악이었어.. 게다가 이말저말 못하는 욕이 없으면서, 뭐랄까..케드릭은 겉으로 꽤나 터프한척 하는 반면에 소심한 편이었다. 처음에 내가 못알아듣는줄 알고 속에 있는말 없는말 다 털어논게 창피해서 말도 못붙일만큼..  용병으로 같이 들어가면서 껄끄러움은 자연히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럼, 잘자요. 아르”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길의 맞은편에서 이리타는 피곤했던건지 로브를 이불삼아 금새 잠들었다. 여자이면서도 이런 야영에 익숙한건지 아무렇게나 누워 잘도 잔다.. 다크엘프 시오니는 굵은 나무에 등을 기댄채 앉아서 눈을 감고 있어서 잠이 든건지 안든건지 알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쉽게 잠들수가 없었다.어지간히 피곤에 절어있으면서도 잠이 오지않아 반쯤 타들어가는 모닥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붉은 불꽃보다 더 아름답고 신비한 푸른 불꽃을 알고있다. 어둡고 강렬하고 다정하고 차갑고 열정적이고 신비한.. 푸른 불꽃을 담은 눈동자..... 다시 만날수 없다. 이제 기다려서도 기대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해도 심장이 욱씬욱씬 저려오는 고통까지 무시할수는 없었다. 마지막에 남자에게서 심장을 뽑아낸 아시리안이 손에 묻은 핏물을 혀로 핥으며 나를 바라보던 그 눈동자가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무서웠다. 처음으로 아시리안이 두려웠었다. 진심으로..

가슴이 아파서 세운 무릎에 머리를 묻었다가 나는 곧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자 불쾌한 향이 솔솔 올라온다. 며칠동안 씻지도 못한게 그제야 생각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돌리자 불쑥, 다크엘프 시오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가는거지?"

까.깜짝이야.. 자고있는게 아니었나?.. 잠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목소리쪽으로 놀란 얼굴로 돌아보자 그저 눈을 감고있었던듯 나무에 등을 기댄 자세 그대로 나를 보고있는 시오니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부터 내게 호의적이었던 이리타와는 달리 무뚝뚝한 시오니는 나를 그다지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였는데 지금 걱정해주는건가 싶으니 뭔가 얼떨떨해져서 가만히 있다가 대답을 재촉하는 시선에 뒤늦게 얼른 대답했다.

" 저..저쪽 호수에 볼일이 좀 있어서요."

"오크들이 완전히 물러난게 아니다."

"..조심할게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시오니"

"별로, 널 걱정한건 아니야"

무뚝하게 대답하고 그대로 다시 눈을 감는 시오니를 보고 나는 멋적어져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말의 높낮이가 전혀 없는 말투라 진의를 파악하기가 어려워서였지만..어쨌든 걱정하는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조심하라는 경고는 안해줬겠지.. 라고 생각하고 나는 으슥한 어둠속으로 조금 들어갔다.

나무잎사귀사이로 스산하게 비추이는 달빛을 따라 조금 걷자 얼마 안가 아까 잠시 머물던 호숫가가 보였다. 쭈그리고앉아 손을 넣어 물을 한모금 마시고 걸치고있던 로브를 벗고 옷가지를 몸에서 걷어냈다. 완전히 벌거벗은 홀가분한 몸으로 찰랑,찰랑거리는 물속에 점점 발을 집어넣자 차가운 물이 기분좋게 몸에 감겨든다.

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달이 떠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멈칫, 행동을 멈추었다.

으슥한 어둠속을 비추는 은빛의 달과 그 그림자처럼 호수에 비쳐서 일렁일렁거리는 달빛..

두개의 달.. 밤하늘에 떠있는 달과 내가 서있는 호수속에 비친 달... 의 모습은 마치 지금의 나처럼 나같다.

하은준이면서 아르휜이고 아르휜이면서 하은준인 나자신.

알수없는건 아르휜이 하은준의 그림자인지.. 하은준이 아르휜의 그림자인지 알수가 없다는것...

이제..나는 내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확신할수 없었다.

펠릭스형에 대한 원망의 한켠에 남은 안타까운 마음의 한조각이 내것인지 아닌지 확신할수 없는 것처럼..

손가락이 하나 없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아시리안의 반지가 끼워있었던 부분을 천천히 쓰다듬어보았다.

펠릭스형이 손가락을 자르면서 함께 빼앗아간 아시리안의 반지.....그때의 아픔이, 슬픔이, 절망이 고스란히 남아있지만.........이제.. 소용없어. ........ 반지같은거.....아쉬워할 필요 없어..

벌거벗은 알몸으로 느껴지는 알수없는 한기에 몸을 움츠리면서 눈을 감고 가만히 서있던 나는 갑자기 바람의 세기가 달라진 느낌에 흠칫, 눈을 떴다.

뭔가..뭔가 있어!!!!!

휙, 몸을 돌려 주위를 돌아보려했지만 정작 위험은 물속에서 솟구쳐나왔다. 팟, 하고 빠른 속도로 솟구쳐나온 길다란 줄기가 깜짝 놀랄틈도 없이 순식간에 내허리를 휘어감았다. 길다란 줄기에 매달린채 위로 솟구치다가 거꾸로 허공에 들려져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호수위로 둥둥 떠오른 꽃이 보였다. 송곳같은 이가 달린 커다란 입을 쩍벌린 결코 귀엽지 않은 꽃이.

꽃은 꽃이로되 호감가지 않는 이빨로 사람을 잡아먹는 좋지못한 취미를 가지고있는 식인꽃. 네리아.. 보통 늪지에만 서식하는데, 젠장, 호수밑에도 있었던가. 거대한 입을 벌리고 먹잇감인 나를 향해 빠른속도로 쐐액 달려드는 커다란 꽃의 턱쪽을 발끝으로 퍽 찼다. 먹잇감의 저항이 신경질나는지 크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공격범위에서 물러난 네리아가 화풀이인듯 허리를 묶은 줄기를 더 조여와서 나는 윽,하고 신음을 질렀다.

크륵크륵 거리는 식인꽃 네리아의 붉은 꽃망울에서 뚝,뚝 떨어져니리는 물기가 마치 핏물처럼 느껴져서 그다지 보기좋은 광경도 아니었지만 얌전히 꽃의 먹이나 되어줄 생각은 없기때문에 크륵거리고 틈을 노리는 네리아를 노려보았다. 젠장, 단검이라도 있으면..

시시각각 조여오는 줄기의 고통에 다시 큭,하는 신음을 내뱉는 순간 네리아가 때를 놓치지않고 번개처럼 달려든다.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드는 네리아가 나를 물어삼키기전 송곳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양손으로 콱, 붙잡아 저지했다.

화가 난 네리아가 고개를 이리저리 휘젓는다. 필사적으로 붙잡고는 있었지만 힘이 딸려 양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손에서 조금이라도 힘이 빠지면 식인꽃이 나를 꿀떡 삼킬판.. 네리아의 입에서 흘러내린 침인지 물인지가 내머리위에 비오듯이 떨어져내리고 이마로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힘의 균형은 쉽게 무너졌다. 네리아가 다른 줄기로 내 목을 휘어감자 송곳같은 이빨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친것이다. 이때를 기다렸다는듯 네리아가 입을 쩍 벌리고 순식간에 내게 달려들었다.

느,늦었다 싶어 날카로운 이빨이 목의 살점을 물어뜯는걸 각오하고 질끈 눈을 감는순간 네리아의 입에서 크아아아,하는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퍼졌다.

어...? 눈을 반짝 뜬 나는 꽃봉오리가 줄기에서 뎅겅 떨어져나가 물속으로 추락해가는 네리아를 발견했다. 어.어떻게 된거지..라는 의문은 허리를 묶은 줄기가 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낙하하기 시작하는 내몸을 다른것이 휘감아올리는걸로 대체하며 풀렸다. 갑작스러운 네리아의 습격만큼이나 지금의 내겐 정말이지 달갑지 않는 존재.

... 아시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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