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오포드가의 귀공자-21화 (21/36)

21.

철컹, 철컹, 쇠사슬을 아무리 흔들어봤자 끊어질 리가 없겠지?  헛일을 그만두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까무잡잡한 얼룩이 얼룩덜룩 묻어있는 돌로 된 바닥에 무릎을 꿇은채 양팔은 머리위로 치켜세워져 천장에서 내려오게 되어있는 쇠사슬에 양손목이 묶여진채 눈을 뜬게 조금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보니 이런 상태라 내가 왜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묶여있는건지 알수가 없었다.

양쪽 돌벽에는 중간즈음에 있는 횃불이 바람결에 일렁일렁 거리고있어 어둠속에 희미한 내 그림자도 어지러운 내마음만큼이나..어지럽게 춤추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런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아시리안은 나를 남겨두고 간것이다. ..그래. 잘됐어. 잘된거야.

이걸로 된거라고, 정말로 이걸로 된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찢어질것처럼 아프다. 너 때문에 아프다고, 네가 옆에 있기 때문에 힘들다고 쫒아보낸건 나면서.... 아시리안이 사라지고 없는 지금, 묘하게도 나는 버려진 강아지가 된것처럼 다시 상처받고 있었다. 떨리는 입술을 콰직, 깨물어 목울대로 넘어오려는 울음을 삼켜냈다.

살랑, 약하게 불어오는 바람 한줄기에 머리가 부스스 흐트러뜨려지며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지하감옥인것같은데.. 바람이 어디에서 오는거지?...머리위쪽에서 불어오는것 같아 고개를 치켜들자 천장과 거의 가까운 쪽에 작은 창문이 보였다. 바람은 그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듯.. 내가 있는 곳 바로 위가 지상인가..라고 생각하다가 눈을 조금 크게 떳다.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건 바람만이 아니었기 때문, 갑자기 새가 한 마리 날아들더니 천장쪽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지하감옥에 들어와 날아다니는 새가 신기하기만 해서 고개를 아예 꺽고 올려다보고 있는데 새가 천천히 내려오더니 무릎꿇고 서있는 내 바로 앞에 앉았다.

“이렇게 퀘퀘한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들다니.. 너, 비위도 좋구나.”

내려다보면서 말을 걸자 새가 말을 알아듣는듯 홱 나를 쳐다보는게 우스워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이런곳은 쉬기에 적당하지 않아. 그러니까 저 창문으로 다시 날아가도록 해”

운없게 이런곳으로 날아든 새를 나름 걱정해서 한말이었지만 계속 내가 무릎꿇고 있는 주변에서 아장아장 걸어댈뿐이라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새가 내말을 알아들었을 리가 없잖아....묶인채로 웃음을 터트리자 새가 다시 빤히 쳐다보았다. 저러니까 진짜 내말을 알아듣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대체 누가 나를 잡아들인걸까. 설마 레오포드가와 연관된 사람들은 아니겠지...?..

미간의 주름이 깊어지려는 찰나 등뒤에서 쇠고랑으로 된 철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벽쪽을 향해 묶여있는지라 누가 들어오는지 보려고 고개를 뒤로 돌린 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다행히 레오포드가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팔에 보란듯이 피묻은 붕대를 메고 들어오는 두명의 사내는 그때 내가 망신을 줘서 쫒아보낸 자들이었다.

이제 내가 왜 이곳에 잡혀왔는지는 알거같고 저들이 나에게 보복을 가할 생각이라는것도 알겠는데.. 그 모녀가 다시 걱정스러워졌다. 무사히 잘 도망쳤을까. 정신을 잃고 있어 시간이 얼마나 경과된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를 이렇게 빨리 잡아들인것을 보면 조브인지 조랑말인지하는 일당들의 행동이 빠르다는것이고 그들의 손아귀에서 그 모녀가 무사하리라는 보장도 없는거니까..

“하하, 이 거지자식아, 어떠냐, 이런 꼴이 될줄은 몰랐겠지?”

“그러니까 사람은 자고로 주제를 잘 파악해야지. 안그래? 거지? ”

그래, 실컷 조롱해요. 내가 어리석었어. 죽이지않고도 쫒아올수없게는 만들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나를 어쩌려는 거지?”

“건방지게 조브님의 일에 끼어들었으니 네놈의 처분도 조브님이 결정하게 될거다. 하지만 그전에..”

두명의 사내중 한명이 바지뒷주머니에서 돌돌 말린 긴채찍을 꺼냈다. 나를 미리 겁주기위해서인지 아니면 채찍이 얼마만큼 위력을 발휘하는지 시험하고 싶었는지 사내가 채찍을 한번 휘둘렀다..휘릭, 채찍이 타원형으로 길게 원형을 그리며 철썩- 하고 바닥에 세차게 부딪치는 소리에 만족한듯 사내들의 얼굴에 가학적인 즐거움이 번졌다.

“먼저 우리가 네놈에게 당한 빚은 갚아줘야겠어!!.”

우악스럽게 잡아찢는 손에 찌이익- 비명지르듯  등부분을 가린 옷이 찢겨져 나간다. 옷이 찢겨져나가 서늘해진 등이 오싹 떨렸다.

“건방진 자식, 감히 사람들앞에서 우리를 망신줬겠다??”

살기등등한 분기로 봐서 어느정도 각오를 해야할것같아 곧 다가올 고통에 숨을 크게 내쉬고 이를 악물었다. 휘릭- 채찍이 크게 원을 그리는 소리와 함께 눈을 질끈 감으려다가 나는 곧 상황에 맞지않는 의아함으로 눈을 크게 떳다. 너..아직도 거기 있었.............?

".......!!!"

철썩, 등에 부딪치는 채찍소리와 함께 학, 하는 신음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윽..역시..아프잖아..이거.  다시 철썩, 부딪치는 고통에 어깨가 움츠러든다. 비명을 질러서 저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입술을 꽉 물고 있었지만 채찍이 살갗을 내려칠때마다 목소리대신 몸이 비명을 지르는것처럼 휘청거렸다. 손목을 휘감고있는 쇠사슬만 아니라면 매질을 얼마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버렸을만큼 가혹한 채찍에는 인정이 없었다.

“크하하하, 맛이 어떠냐, 이 거지놈아!!”

주..죽을..맛이다, 왜!! .......하악, 하악.. 숨죽인 신음을 내뱉다가 나는 다시 새와 눈이 마주쳤다.

새와 눈이 마주친다는게 우스운 표현이지만 조금전 창문에서 날아왔다가 내앞에서 얼쩡얼쩡대던 새가 아까부터 짐승처럼 채찍질당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눈이 마주친것처럼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빤히 쳐다보는게 나를 걱정하는것 같아서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아프지않아. 이런걸로 아프지 않아.. 정말 아픈건.. 정말 죽을것처럼 아픈건..따로 있거든.

눈으로 대신 마음을 전하는 중에도 몇 번 더 채찍이 철썩거리며 등을 쳐대다가 지금 나를 죽일 생각은 아닌건지 채찍질이 멈췄다. 비명을 지르지않는 나를 향해 사내들중 하나가 질린듯이 말했다.

“지독한 놈!! 재수없는 거지새끼 같으니”

아..정말이지.. 사람 말 못알아듣는 사람이다. 새끼라니요.. 나는 그러니까 당신같은 사람을 아버지로 부르고 싶지 않다니까 그러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피식 웃었지만 고개는 이미 땅으로 꺼질듯이 푹 숙인채였다. 고통으로 정신이 몽롱하다. 사내들이 하는 말따위는 정확하게 귀에 들어오지도 않은채 귓전에서 웅웅거릴뿐..

“됐어, 나머지는 조브님이 알아서 하실거다”

다시 감옥의 쇠고랑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제야 약한 한숨을 내뱉었다.

위로 올려져 묶여진 팔이, 버티고 선 무릎이 고통으로 경련하듯 부들부들 떨리고 찢겨져 피가 흐르는 등은 쓰라렸다.

가물가물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케드릭은 네레이드성에 지금쯤 도착했을까.. 지금쯤 베논들이랑 만나서 기뻐하겠지.. 난......난, 좀 늦어질지도 모르겠어요.. 미안..케드릭.

천장에서 내려와 손을 묶고있는 쇠사슬은 무릎꿇은 자세로 설만큼의 여유밖에 없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힘이 잃은 고개가 뒤로 꺽인다. 쇠사슬에 양팔이 묶여있어 매달린채로 기절하려던 찰나 파닥, 거리는 새의 날개짓 소리가 들려 눈을 힘없이 떴다. 천장으로 날아오른 새가 나를 내려다보는것처럼 원을 그리며 배회하고 있었다. 작은 창문으로 빠져나가는 새의 모습을 흐릿한 시야로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등이..아파......등이 타는것 같아...............아시리안..

팔도 왠지 누군가가 사정없이 잡아 당기는 것처럼 아프다고 생각하며 얼핏 눈을 뜬 내눈에 제일먼저 보인건 어둠속에 기괴한 형체처럼 드러나있는 ...천장에서 길게 내려와있는 쇠사슬이었다.

얼마만큼 시간이 흐른걸까. 기름이 거의 다한건지 횃불에서 나오는 불꽃은 희미하기만 해서 감옥안은 어둠이 짙게 가라앉아 거의 실루엣만 구분할 수 있을정도... 형광등이 여러번 깜박거리다 켜지는 것처럼 몽롱한 정신에 차츰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이 생각나고 내가 처해있는 안좋은 현실도 깨달아졌다.

아시리안은 나를 잊어버렸고 여관에서 말도없이 빌려온 말은 죽어버렸고 네레이드성에서 케드릭과 만나기로 했는데 네레이드성은 고사하고 아직 로드리고시까지도 가지 못한데다가 더 안좋은 것은 내가 아직도 카레인시에 발이 묶여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나를 혼내주려고 독오른 고양이처럼 잔뜩 벼르고 있는 조브님인지 조랑말인지의 일당들 손아귀에. 그리고 더더욱 곤란한것은 몸상태가 말도 안나오게 안좋다는것..  ........최악이잖아. 이거.

이래서야 빠져나가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곧 웃음을 터트렸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니.. 이미 죽었잖아. 예전에 죽었으면서도 다시 죽는게 무서워?

무서운건 살아가는 거야.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모르면서 살아가야 한다는거야. 이제 아무 희망도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거야.

하지만......자신없어.........이제....아무렇지않게..살아갈..자신이 없어..

어둠속인데도 눈물을 들킬까봐 올려진 한쪽팔에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자 새어나온 눈물로 옷이 젖어간다. 등이 아프다. 타는것처럼, 그러나 더 아픈건 마음이었다. 고통스러운건 마음이었다. 형체도 없는 마음의 상처가 너덜하게 찢긴 등의 상처따위보다 아파서..  이를 악물고 울음소리를 억누르려했지만 신음처럼 새어나오는 소리까지 막을수는 없다.

“윽.................흐.......................”

이걸로 된거라고..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해도...아시리안이 살아있으니까...그걸로 충분하다고 .. 마음을 달래보지만 막막한 서러움을, 아시리안을 향한 원망을 막을수가 없다.

이걸로 된거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아시리안의 목소리가 계속 되풀이 되고 있었다.

-...돌아오겠다..아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모르겠어..

“이봐, 인간”

아.......... 이 목소리는........? .......................팔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목소리가 들린쪽은 어둠에 가려진 옆쪽...그쪽을 돌아보자 눈물이 남아있어 흐릿한 시야안에 어둠속에 실루엣만 보이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어둠속에서 한발자국 한발자국 천천히 몇걸음 나서자 실루엣 대신 어둠속이라 완전하진 않지만 아시리안의 희미한 모습이 보였다.

“왜 울고있는거지?”

눈을 크게 뜬채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 내게 천천히 다가오는 아시리안에게서 물러설수가 없는걸 알면서도 아시리안이 막상 내가까이에 다가오자 주춤거리며 뒤로 조금 물러섰다.

움직임의 폭은 작았지만 몸을 움직이자 거세게 저항하듯 쇠사슬이 철컹, 소리를 낸다. 고요한 침묵속에 쇠사슬이 철컹거리는 소리는 내 심장이 뛰고있는 소리만큼이나 컸다.

양손목을 구속하고있는 쇠사슬의 길이 때문에 더 물러나지 못하고 무릎꿇고 서서 올려다보는 내게 아시리안이 천천히 손을 뻗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아시리안의 손이 내얼굴에 닿기 직전에야 주술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홱 고개를 돌리고 가까스로 소리쳤다.

"...........소......손대지...."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돌린 고개의 턱아래에 아시리안의 손이 들어왔다. 흠칫, 굳어서 손을 피하려하는데 약간의 저항쯤 우습다는듯 턱이 아시리안의 손에 손쉽게 잡혀 고개가 한껏 꺽여올려진다. 어둠 때문에 표정을 알수없는 아시리안이 한참동안이나 들려진 내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무슨 생각을 하는거야...아시리안.......... 왜 ...... ......돌아왔어?

..........나를 기억하지 못하면서...하찮은 벌레라고 했으면서.........왜...............왜.........?

심장이 방망이로 두드리는것처럼 거세게 뛰고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아시리안이 나머지 손으로 내뺨을 감싸왔다.

내리깐 시선으로 내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뺨을 천천히 쓰다듬자 애무하는것처럼도 느껴져서 울고싶어진다. 마음속을 들킬것같아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자 아플만큼 턱을 꽉 쥐어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 채 아시리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귀찮은 일은 질색인데.. 정말 신경에 거슬려. 너라는 인간.”

뭐..뭐라는거야.. 아시리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알수없지만..마음이 흔들리는게 두렵다. 다시 상처받을까봐 두렵다. 아니, 아시리안에게 내마음을 들킬까봐 두렵다. 돌아와서 기쁘다고, 다시와서 기쁘다고 말하고 있는 내 마음을..

아시리안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온몸으로 강하게 저항하며 소리쳤다.

“시..신경끄라고 했지. 손대지 말라고 했지!! 죽이고 싶으면 이따위 장난치지 말고 당장 죽이란...........읍!!!”

내가 몸을 흔들자 철컹,철컹,거센 비명을 질러대며 같이 흔들리던 쇠사슬이 내가 말을 멈춘, 아니 강제로 멈춰진 순간 딱 멈췄다. 너무 놀라서 경직된채 얼음처럼 굳어진 내입을 막고있는건 아시리안의 입술이었다. 허리를 반쯤 숙인 아시리안에게 먹히듯이 입술이 한입에 삼켜진채로 눈을 크게 부릅뜬 나를 바라보며 아시리안의 다크블루눈빛이 쿡, 하고 웃음을 짓는것처럼 작게 일렁거린다.

“역시.. 너를 얌전하게 만드는 방법은 이건가. 인간.”

눈을 치켜뜬채로 얼음처럼 굳어있는사이 파들파들 떠는 윗입술을 부드럽게 잘근 이로 물어뜯는다. 그리고 와이번의 날카로운 발톱에 채인 생쥐만큼이나 불쌍하게 떨어대는 입술을 놀리듯이 혀로 할짝, 할짝 핥는다. 잠시 전기가 나갔다가 다시 스위치가 켜진것처럼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 아시리안이 내게 무슨짓을 하고 있는지.

“흡..........으으읍!!!!!!!”

동상처럼 굳어져있던 몸을 간신히 비틀듯이 움직이다가 갑자기 발작하듯이 격렬하게 저항하며 몸부림치기 시작하자 숨을 빼앗듯 강하게 흡입하며 나를 농락하던 입술이 쉽게 떨어져나간다.

“하.....하아.........무..무슨 짓이야!!”

"버림받은 애처럼 울고있으니 위로해달라고 하는것 같아서 말이지..내위로가 마음에 안드나보지?"

잔뜩 비꼬인 비웃음에 너무 화가 나서 미처 생각할 겨를없이 손이 나갔다. 철썩,하고 울리는 소리가 나서야 내가 무슨짓을 했는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내가..아시리안을.....!!...아시리안을 때렸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손을 보다가 아시리안을 바라보자 정작 아시리안은 별 반응없이 그저 파리가 귀찮게 달라붙은것처럼 내손이 부딪쳤던 뺨을 손가락으로 슬쩍 만지며 기분나쁜 표정만 짓고 있을뿐 진짜 화가 난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는건 설마 일부러 맞아준건가? 이 성격나쁜 아시리안이?

"....위로가 필요하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더 귀여울텐데.. 인간"

"누.누가................!!!!!!"

얼굴이 빨개진채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쇠사슬이.. 양손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없다...?

자유로운 손을 들여다보고 비어있는 천장쪽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을 통해 내손목을 묶고 있던 쇠사슬은 어떻게 된건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그러고보니 등도 아프지 않아...  손을 돌려 등을 쓸자 상처는 남아있지 않았다.

아시리안을 슬쩍 올려다보자 아시리안이 할말있으면 해보라는 것처럼 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이제야 깨달았냐는듯 한심하기 이를데없다는 시선이긴 했지만.........왜...도와준거지?..왜...?

“..뭐...뭐야...도..도와달라고 한적 없어..나는.”

당황해서 나오는 변명처럼도 느껴지는 내말에 별 시비없이 아시리안이 쇠고랑너머쪽을 힐긋 쳐다보았다.

“다른 벌레들이 오고있군”

아시리안이 왜 다시 돌아온건지, 왜 나를 도와준건지, 왜 나에게 키스한건지, 등등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어둠속에 스며들었다. 아시리안의 말처럼 벌레들, 아니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끌려오면서 검은 빼앗겼는지 허리춤은 비어있고 뭔가 무기 될만한게 있나 찾다가 나를 묶고있다가 이제 바닥에 버려져있는 쇠사슬을 아쉰대로 움켜쥐었다.

“이거, 이 계집, 죽은것 같은데?”

“감히 조브님의 물건을 가지고 도망쳤으니 조브님이 화날만하지”

“킬킬, 그래도 죽기전에 천국을 맛보여줬으니 ..뒷처리나 깔끔하게 하자고, 아침되면 그 거지자식이랑 같이 태워버리면 되겠지”

횃불을 들고 오는건지 사내들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빛이 점점 커진다. 이러면 안에 모습이 먼저 보일텐데..라고 걱정이 들었는데 다행히 사내들은 쇠사슬로 묶어논데다가 신나게 채찍질까지 당했으니 아직도 내가 축 늘어져있을거라고 생각해서인지 안의 모습따윈 들여다보지도 않고 쇠고랑 문을 열었다.

철컹,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에 들어온 사내가 그제야 비어있는 감옥을 보고 깜짝 놀라 엇, 하고 소리를 지르는 틈에 쇠사슬로 사내의 목을 감싸고 무릎으로 배를 쳤다. 컥, 하는 신음과 함께 쓰러지는 사내를 잽싸게 타고 넘으며 다음 상대를 향해 쇠사슬을 내던지던 나는 빠른 속도로 쇠사슬을 다시 회수했다.

두명의 사내에게 양팔이 붙잡혀 질질 끌려오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낯이 익다..저사람이 왜 낯이 익은건지 떠오른 순간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결국..붙잡혔구나.. 그럼, 여자아이는?

“이, 이 거지자식이!! 어떻게 풀려난거야!!!”

짐짝처럼 끌고오던 여자를 내던지고 검을 빼드는 사내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쇠사슬로 검을 휘어감아 공격을 저지하는사이 뒤쪽에서 다른 사내의 칼끝이 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쇠사슬로 휘어감은 검을 세게 잡아당기며 빼앗아 뒤로 돌아 상대의 무릎을 발로 걷어찼다.

“큭, 이, 이새끼가!!!”

무릎을 걷어차여 휘청거리는 상대의 머리통을 그대로 발로 차올린후 뒤로 돌자 내게 칼을 빼앗긴 사내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도망치게 해선 안돼. 다급한 마음에 쇠사슬을 휙, 내던져 돌아서서 도망치려는 사내의 목을 올가미처럼 휘어감았다.

“큭.....사...살려.....”

사내는 쇠사슬에 목이 졸려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지만 전혀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쇠사슬을 더 잡아당겨 사내의 목을 더 조르며 내가 말했다.

“여자애는, 어딨어”

그와중에도 시체처럼 널브러져있는 여자를 힐긋 바라보며 사내가 더듬거리며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크...윽...조..조브님이..데려..”

“거기가 어디야!!”

“3...3층....제일 끝..방에....”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은 사내의 말을 다 듣지 않고 얼굴을 퍽, 쳐서 기절시켰다.

내던져있는 여자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짐작하고 있었다. 낮에 만난 그 여자는 이미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어둠속에서도 이리저리 찢겨진 옷과 피범벅인 치마가 보인다. 도망치다가 잡혔겠지.. 여자아이는 다시 빼앗겼을테고..

묵묵히 허리를 굽혀 검을 챙겨들고 사내들이 온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춰섰다. 숨을 몰아쉬면서 옆쪽을 홱 보자 내옆에서 태연히 걸어오던 아시리안이 나를 힐긋 바라보았다. 마치 뭐냐? 라는 듯한 시선.

대체 뭐야... 뭐냐..라고 묻고 싶은건 나라고, 아시리안. 왜 따라오는 거야. 너는, 그 공간이동인지 뭔지로 휙, 사라지란 말이야.

“그 여자애를 구하고 싶은 모양인데, 안갈꺼냐?”

그래, 좋아, 어차피 지금 급한건 아시리안이 아니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나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내가 뛰기 시작하자 아시리안도 자연히 뛰고....가 아니라 아시리안은 바람에 몸을 맡긴것처럼 내옆에서 스윽,스윽 오고 있었다.

지하감옥에서 나오자 찰흙같은 어둠에 잠겨있는 커다란 저택이 모습을 드러낸다. 눈을 피해서 저택으로 숨어들자 호화로운 내부의 모습에 눈이 절로 커졌다. 이렇게 돈이 많으면서.. 가엾은 여자애까지 빚을 핑계로 잡아드린 조브인지 조랑말인지의 추악한 이기심에 속이 불편해진다. 어쩌면 아시리안의 말이 맞는건지도 몰라. 생명은 동등하다고 말하지만 같은 인간들끼리도 많이 가진자가 못가진자를, 강자가 약자를 아무렇지않게 짓밟고 있으니까. 당연하다는듯이..

3층....제일 끝쪽에 있는 방은.. 그 사내가 제대로 알려준건 맞나.. 의심이 들만큼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워낙 커다란 저택이니까 밖에서 지키는 건지도 모른다. 레오포드가에서도 병사들은 저택이 아닌 다른곳에 기거하고 외부를 지키고 있으니까.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문을 박차고 안에 들어간 나는 왜 문앞을 지키는 사람이 없는지 그제야 알아차렸다. 호위병은 밖에 있는게 아니라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왠 놈이냐!!”

문쪽 가까이에 선 두명의 남자들이 안으로 침입해 들어온 내쪽으로 칼을 겨눴다. 조용히 해결하길 바랬지만 일이 커질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들고있는 검으로 맞서며 조브인지 조랑말인지와 여자애를 찾던 나는 멈칫, 행동을 멈추었다.

시선이 멈춘곳은 방의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침대쪽. 침대에 누워있는건 가운을 걸친 늙은 남자, 그리고 조그만 소녀였다. 그리고 벌거벗은 소녀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무슨..짓을.....대체.......무슨짓을!!!!!!! 얼음물을 뒤집어쓴것처럼 온몸이 경직되어 굳어버렸다.

“그놈들은 뭐야!!”

“죄송합니다. 조브님, 당장 이 자식들을..!!”

도무지 믿어지지않아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자 온갖 괴상한 도구들이 벽에 장신구처럼 걸려있다. 톱날처럼 된 칼, 유리가 박힌 채찍, 기괴한 문양의 작은 손도끼...... 그러나 그것들이 단순한 장신구용도만이 아니라는것은 지금 늙은 사내의 손에 쥐어진 피묻은 도구를 통해 알수 있었다. ......흔들, 눈앞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다.......토할것 같아........토할것..같아..

“잠깐,”

내가 금방이라도 구토할것 같은 입을 손으로 막아내는사이 무슨 생각에선지 사내들의 공격을 저지한 늙은 사내가 쭈그러든 얼굴가득 음흉한 미소를 지은채 침대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괴롭히던 늙은 사내가 일어서는데도 소녀에게선 어떤 반응도 없었다. ..하긴 저렇게 되었는데 살아있길 기대하는게 우스운 일일지도..  눈은 파여있고 무엇으로 저렇게 만든건지 소녀의 알몸은 가로 세로로 길게 십자모양으로 그어져 있었다.

“호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나”

늙은 사내가 다가선 상대는 팔짱을 끼고 사태를 방관하고 있는 아시리안쪽이었다. 게슴츠레한 눈에 침이라도 뚝뚝 흘릴것 같은 입매가 진귀한 보석이라도 보는것처럼 크게 벌어져있다. 벌려진 가운사이로 쭈그러든 볼품없는 몸을 가릴 생각도 없어보이는 늙은 남자가 이리저리 훑어보거나 말거나 별로 관심없는듯 오만한 표정을 짓고있는 아시리안이 이제 어떻게 할거냐는듯 내쪽을 힐긋 보았다.

“다 자란 것들에겐 관심이 없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사내녀석은 처음 보는구나”

보는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만져보고 싶어졌는지 쭈글쭈글한 손이 닿아오던 순간 아시리안이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늙은 사내의 얼굴을 손아귀로 콰직 움켜쥐었다.

뭐..하려는.....?...  눈을 크게 뜬 나와 시선을 마주친채 다크블루의 눈빛이 잔인하게 빛난다. 아시리안의 손아귀에 잡혀 사태파악을 못하고 있는 늙은 사내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려질새도없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수박터지듯 머리가 터졌다. 그리고 아시리안의 등뒤에서 긴 머리카락들이 즐거운 노래라도 부르는 것처럼 하늘하늘 춤췄다.

아........경악으로 눈을 크게 치켜뜬 내게서 오만한 시선을 치우지않은채 잔혹한 방법으로 귀찮은 날파리를 살해한 다크블루의눈빛이 쿡, 하고 웃는다. 마치 그 새삼스러운 표정은 뭐냐, 라는 듯이. 겨우 마족이란 존재가 어떤것인지 깨달은건가? 라는 듯이. 마족의 힘앞에서 하찮은 인간들따윈 파리목숨이라는걸 이제야 알았냐는 듯이.

조브의 머리통은 산산조각나고 빈 몸뚱이만 남아 흔들거리다 이내 썩은 나무토막처럼 털썩 쓰러지자 그때까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던 사내들이 이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는듯 문쪽을 향해 달려갔지만 어느새 길게 늘어난 아시리안의 머리카락에 몸이 묶여 허공으로 높이 치솟는다.

“크아아악!!! 사..살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한 사내의 몸이 벽에 쳐박히는 순간 조금전까지 벽에 걸려있던 기괴한 생김새의 도끼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 사내의 이마를 뚫고 벽에 콱, 박혔다.

얼굴이 거의 반이 쪼개진채 벽에 걸려있는 장식품처럼 축 늘어진 동료의 죽음, 손에 잡힌것만으로 머리통이 수박처럼 깨져 산산조각나버린 주인.......... 남은 사내는 공포에 질렸는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채 숨을 꺽꺽 몰아쉬고 있었다.

여전히 하늘하늘 춤추는 머리카락에 묶인채인 나머지 남자가 곧 내앞에 내동댕이쳐졌다. 겁에 질린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이 사람이 내등에 채찍을 쳐댄 사람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사...살려......주십쇼...제발..”

조금전에 가혹한 매질을 해대며 즐겁게 웃던 사람이 지금은 내게 극도의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면서 애원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지라면서 다짜고짜 발로 찼고 사람들앞에서 망신줬다면서 짐승에게 하는것처럼 채찍으로 내려쳤고 ..죄없는 모녀를 죽인 사람이기도 하고..

“죽여라.인간”

아시리안의 말이 들린 순간 흠칫, 놀라서 아시리안을 바라보았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찔, 뒤로 물러서자 아시리안의 눈이 흉폭한 야수처럼 나를 노려보았다. 마치 나를 위한 제물이라는것처럼 내가 물러선만큼 사내의 몸이 다시 내앞에 들이밀어졌다.

“죽이라고 했다. 인간”

“..시.....싫어.......싫어.........싫어!!!!!!!!”

더듬거리다가 이내 거세게 소리치자 아시리안의 머리카락에 허리를 잡혀있던 사내의 몸뚱이에서 하체가 반으로 뚝 잘려나갔다.

“크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면서도 아직 살아있어 상체만 남은 몸뚱이를 벌레처럼 허우적거리며 도망치려던 사내의 머리카락을 아시리안이 천천히 손으로 움켜쥐어올린 아시리안이 내게 시선을 맞춘채 보란듯이 남자의 상체로 푹, 손을 집어넣었다.

“컥!!!!!!!!!”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남자의 가슴에서 심장을 확 잡아뺀 아시리안이 축 늘어진 남자를 휙, 바닥에 내던진다. 그리고 제대로 숨도 못쉬고 있는 내게 시선을 맞춘채 흥건한 피가 묻어있는 손을 천천히 혀로 핥았다. 내리깐 시선으로 나를 응시한채 피를 핥는 아시리안의 기괴한 모습은 확실히 아시리안이 인간이 아닌 잔인한 마족이라는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너도 보잘것없는 ‘인간’일 뿐이지”

주춤 뒤로 물러서자 아시리안이 나를 기묘하게 응시한채 천천히 다가온다. 나도 모르게 도망치려고 몸을 돌리자 돌린 방향에 아시리안이 갑자기 나타났다. 몸이 굳어버려 우뚝 서있는 나를 여유있게 내려다보며 아시리안이 비웃는것처럼 쿡, 웃었다.

“너도 여기있는 벌레들과 다를바 없는 하찮은 ‘인간’일 뿐이지”

몸을 움직일수가 없었다. 방안에 진동하는 진득한 피비린내에 현기증이 나고 구토증이 치밀어서 참을수가 없었다. 바로 눈앞에 아시리안이 있지만 내가 그리워하던 아시리안이 맞는지조차 장담할수 없을만큼 .......나는, 이런 아시리안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서운 아시리안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잔혹하게 사람을 살해하고 즐거운듯이 웃고있는 아시리안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피가 흥건하게 묻은 손가락으로 경직된 뺨을 놀리는것처럼 천천히 쓸어내리며 아시리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너는”

피묻은 내뺨을 혀로 닦아주듯이 느릿하게 핥아올리던 아시리안이 갑자기 뒷머리채를 움켜쥐다시피 잡아채 고개를 위로 확 꺽었다. 머리카락이 뽑히는게 아닐까 싶을만큼 거칠게 잡아당겨진 아픔에 윽, 하는 신음을 뱉는 입술을 짓이기듯 막아온다. 단숨에 입속을 침범한 혀가 잇몸과 치열을 샅샅히 훑고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혀를 휘어감아 난폭하게 내돌렸다. 방안에 진동하는 피비린내에 구토가 치밀어오르는데다 숨막혀 죽을것같은 지독하리만치 강압적인 키스....치미는 화를 견딜수 없어 벌주는것처럼 행해진 키스를 끝으로 아시리안이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아시리안이 사라진후에도 한참 지나서까지 얼어있던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잔인하게 죽어있는 시신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모습은 끔찍하고 참혹했다.. 잠시 잊고 있던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욱......!!!......우욱....!!!!!!!!!!”

양손으로 입을 막았는데도 입밖으로 토사물들이 후드득 쏟아져내린다. 다리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 털썩 무릎을 꿇고 바닥에 양손을 집어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추악한 인간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죄없는 모녀.. .. 당연한듯이 죄없는 여자와 어린아이를 잔인하게 해친 남자들.. 내앞에서 그 남자들을 잔혹하게 죽이고 다시 사라진 아시리안.. ..........머릿속이 지독히 혼란스러웠다.

토하고 다시 토하고 마른침이 나올때까지 구토하다가 입을 소매로 닦자 아시리안에게 강제로 유린당한 입술이 쓰라린 통증을 호소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나는 문쪽으로 걸어갔다. 여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벗어나지 않으면 미쳐버릴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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