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뭐야...죽은게...죽은게 아니었잖아... 멍하게 눈을 깜빡, 뜨며 제일먼저 생각한건 그거였다. 오늘은 날씨가 비가 올것 같군..이라고 평범한 감상을 내뱉는 것처럼 생각하며 흐릿한 시야를 좀더 깜박거리자 까만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이 눈에 한가득 들어오고 빗물이 투둑 투둑 온몸을 때리고 있는 감각은 뒤늦게 찾아왔다.
꿈을 꾼건가.. 아시리안을 만난건....꿈...이었던 건가....
그저 땅바닥에 멍하게 누워있을뿐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않는 비현실적인 감각에 손을 천천히 들어보자 채 말라붙지않은 흥건한 핏자국이 손목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렇다면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
아시리안이, 아시리안이 나를.....죽였어...... 투둑, 투둑 내리는 차가운 빗줄기의 감촉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게 아시리안을 만난 반가움에서인지.. 아시리안이 다짜고짜 나를 공격한데 대한 서러움때문인지 알수가 없는채로 그렇게 멍하게 누워있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 그런 상처를 입고 왜 아직까지 살아있는거지? ...왜 아프지가 않은거지? .. 눈만 깜박거리다가 상체를 조금 일으켜보았다. 읔,하는 신음을 내뱉을 것을 각오한것과는 달리...어라라.. 멀쩡하다?? 깊은 상처를 입은 몸답지않게 움직이는게 아무렇지도 않아서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가슴부분을 내려다보았다. 보기에도 끔찍할만큼 흥건한 피로 옷이 다 젖어있었지만 상처는........없다?
..설마......아시리안이...? 어스름한 어둠속에서 폭탄맞은 것처럼 터져있는 말의 살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주변에서 정신없이 두리번거리자 말소리는 바로 머리위에서 들려왔다.
"나를 찾는거라면 여기있다. 인간"
눈은 자동으로 거만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아시리안은 사람의 몸통 세배는 되어보이는 굵직한 나무의 나뭇가지에 비스듬히 누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아무말없이 멍하게 바라보자 아시리안이 잘난척하듯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 밑에는 너무 지저분해서 말이지"
“이..이렇게 지저분하게 만든게 바로 너잖아!!! 죽이려면 곱게 죽이지 쓸데없이 말을 폭파시켜서는!!!"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시리안이 희한한 생물체를 견학하는 과학자처럼 오묘한 눈길로 나를 뚫어지게 한참 내려다보았다. .............차가웠지만 따뜻함이 깃든.. 그 시선이 아니다. 마치 처음보는 것처럼 낯설고... 차가워...
"........너는 뭐냐"
내가 뭐냐고?... 무슨 질문이 그래....아시리안.....왜..처음 보는것처럼.. ..머리색이 바뀌어서? 그래서?
"나...아르인데.."
내가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아시리안이 콧방귀뀌듯 곧바로 대꾸해왔다.
"하찮은 벌레의 이름 따위가 궁금한게 아니다“
아시리안인데.. 아시리안이 맞는데.. 나를 .. 나를 어째서 모르는 거지?
가슴이 터질것 처럼 울렁거린다. 아시리안인데..아시리안이 아닌걸까. 왜..나를 몰라보는거지? 나뭇가지에 길게 누워있던 아시리안이 상체를 일으켜앉으며 심심한 어린애가 흥미있는 놀잇감을 발견한것처럼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인간인데 말이지.. 마족인 나를 보고도 태연하다니, 하찮은 벌레주제에 배짱은 제법 있군”
“....저기....이름이....?”
더듬거리며 천천히 묻자 여전히 신기한 물건 바라보듯 내위아래를 훑어보며 아시리안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아시리안이다. 마족 아시리안"
젠장, 역시 맞잖아. 아시리안...
"...아..시..리안..이라고...예쁜 이름이네. ."
처음 들었을때부터 잘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아시리안이 나뭇가지위에서 훌쩍 내앞으로 뛰어내렸다. 아시리안이 가까이 다가오자 가슴속이 두근,두근 하는 것과는 반대로 점점 더 가까워지는 낯설고 차가운 시선에 심장이 서늘하게 식어간다. 돌아온다고, 돌아온다고.. 했으면서...
"이상하군, 너는 왜 나를 무서워하지 않지?"
"왜 내가 무서워해야 하는데?"
"벌레같은 인간들에게 마족은 두려움의 대상이니까 "
궁금한거 많고 잘 따지는거 보니까 정말 아시리안이 맞나보다. 아시리안이 그렇게 생각하는건 무리가 아니다. 크로멜성에서 인간들편에 서서 마물들을 물리쳤는데도 아시리안이 마족이란게 밝혀지자 마자 여우사냥하듯이 사람들은 무조건 죽이려 들었으니까...
"사람들이 다 마족을 싫어하는건 아니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 아시리안은 항상 친절했으니까.
"그럼 너는 마족을 싫어하지 않는 쪽이다. 이건가?"
"...그래"
내가 어떻게 너를 싫어하겠어. 아시리안..
"재밌군. 그런데 너무 건방져. 하찮은 벌레주제에!!"
비웃음이 담긴 싸늘한 말이 끝나기도전에 아,하는 사이 몸이 허공으로 부웅 떠서 나무그루터기쪽에 쳐박혔다. 그와중에 입속으로 들어온 흝먼지를 퉤,하고 뱉어내며 쓰러진 몸을 일으키려하자 나무의 줄기들이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내려온다. 허리에 찬 장검을 빼서 그 줄기들을 쳐내고 아시리안쪽을 바라보자 아시리안의 머리카락이 춤추듯이 흔들리고 있다.
아시리안....왜.........어째서.......
반항할테면 더 해보라는듯한 오만한 시선에 어깨에서 먼저 힘이 빠지고 축 늘어진 손에서 검이 떨어져나간다. 검이 진흙구덩이에 쳐박히기도 전에 축늘어진 양팔이 나무줄기에 잡혀 위로 잡아묶인다. 발끝이 땅에서 떨어져서 몸이 버둥거릴 틈을 주지않고 순식간에 다리역시 바닥에 닿지않는 중간쯤에 나무줄기들이 밧줄처럼 묶어가고 온몸을 빙글빙글 타고 올라와 살갗을 조여온다.
"어디 다시한번 그 입을 놀려보시지. 마족을 싫어하지 않는다? 죽기전에 그 오만을 좀 고쳐주마"
"크흑!!!!!"
살갗을 파고드는 고통에 이를 악물며 몸부림을 치면서 비명과 신음을 삼켰다. 몸을 감싸고 있던 피가 묻은 옷들이 뭔가에 베인것처럼 투드득 떨어져내리면서 옷이 찢겨져내려간 전신에 핏,핏..하고 날카로운 칼로 베이는 고통이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신음을 참아내려했지만 고통에 잠식당한 머릿속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흐.......으아아악!!!!"
붉은 피가 파득파득 떨리는 전신에 흘러내리고 고통으로 경련하는 발가락끝을 타고 핏물이 툭..툭..떨어져내리는 끔찍한 감각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온통..
아아........아시리안이.......나를....왜..........어째서.........라고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만다.
"아아아악!!!!!!!........."
.......................................더 버티지못하고 고개가 천천히 꺽어져 내려가는 순간 몸을 묶고있던 가지들이 하나둘 치워지고 나무줄기에서 주르륵 몸이 흘러내린다. 빗물에 젖은건지 핏물에 젖은건지 나무와 맞닿은 등이 질척하다. 몸이 털썩, 쓰러져버리고 난뒤에도 희미한 의식이 남아있어서 엉망으로 찢겨진 몸에 익숙한 푸른빛이 다가오는걸 느낄수가 있었다.
왜...어째서.........왜...........왜........어째서.............왜...........푸른빛이 잠깐 비추자 몸이 아물고 희미해지던 의식이 점차 선명해진다. 찢겨져나간 상처는 치유가 되었지만 고통으로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어찌해야 좋을지 알수가 없어서... 나는 한참동안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귓가로 아시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좀 생각이 바뀌었나. 인간?”
너한테....나는, 이제......없는거지. 아시리안. 이제.. 아무것도..아니게 되버린거지.
장난감처럼 부수었다가 다시 고치고 찢었다가 다시 고치고...그래. 인간의 몸이란건 그럴수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마음은.. 마음은 그럴수 없다는거 알아? 아시리안..마음의 상처는 네 마법으로도 고칠수 없어........
비틀거리며 일어서느라 묶여있던 나무를 손바닥으로 잡자 내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절척하게 감긴다. 마치 나무가 피를 흘리는것처럼 흥건히 묻어있는 자리에 손을 얹어 몸을 지탱한채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내가 무슨말을 내뱉을지 무척 궁금하다는 눈빛을 하고있는 아시리안쪽을 바라보았다.
내존재를 잊은 아시리안과 나사이는.. 이제 잔인한 마족과 하찮고 힘없는 벌레. 그것뿐인거다. 지금 아시리안에게 나는 마족을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는 조금 흥미있고 웃기는 인간,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니었다.
왜 나를 잊은거냐고, 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얼마나 많이 보고싶어했는데...라는 원망도 슬픔도 서러움도 안타까움도 애타는 그리움도...이제.. 무슨 소용이 있겠어. 아시리안.....그렇지..?...그런..거지...?
"나는...네 장난감이 아니야. 죽이고 싶으면 죽여. 하지만 이런 장난은 더이상 치지마. 아무리 하찮고 힘없어 보여도 생명은 어느 누구에게나 동등한거야. 마족이든, 인간이든.."
화가 났지만 슬픔때문인지 목소리는 묘하게 가라앉는다. 고개를 숙인채 젖은 목소리로 말하자 아시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힘없는 인간들이 내뱉는 변명일뿐이지. 생명은 누구에게나 똑같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는 인간들이 자기보다 약한 인간을 더 짓밟고 있다는건 왜라고 생각하나? 지금 네 말은 모순 투성이야. 인간 .그런데...왜 우는거지?"
운다고? 내가..? 아니야. 이건 비야.. 빗물일뿐이야. 나는 아시리안에게서 몸을 돌렸다.
잊은거나 버린거나 똑같아.. 버림받는거 익숙하다고 생각하지만 상처받는게 익숙하다고 해서 새로생긴 상처가 아프지 않은건 아니다. 지독하게 고통스러웠다. 나를 잊은 아시리안과,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시리안과, 나를 하찮은 벌레쯤으로 여기고 나를 놀잇감으로만 보는 아시리안과 함께 있는건..
네가 먼저 나를 버렸으니까 나도 너를 버리겠어. 네가 나를 지운것처럼 나도 너를 지울거야. 이제 더이상 매달리는건 싫어. 돌아봐주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아파하는건.........지긋지긋해. 그래, 잘됐어. 너를 기다리는것도 지겨워지던 참이야. 잘됐어. 잘된거야.
"인간"
..나쁜놈, 부르지마... 인간, 이라고? 그래, 이 마족놈아, 나도 네가 누군지 몰라, 이제 모른다구.
"멈추지 않으면 죽이겠다."
허공에 떠서 내뒤를 졸졸 쫒아오며 아시리안이 하는 말에 나는 화가나서 소리쳤다.
"그래, 맘대로해. 이왕이면 아까 그 말처럼 죽여주는게 좋겠어. 그래야 죽고나서 누군지 못알아볼테니까"
"정말 죽인다니까?"
말귀를 못알아듣는 애에게 하듯이 혀까지 차며 하는 말을 듣자 기도 안찬다. 걸음을 뚝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죽일테면 죽여. 그래도 난 네가 무섭지 않아. 너같은건 무섭지 않아.“
빠르게 말하고 아시리안쪽을 확 돌아보며 빽 소리를 질렀다.
“너따위는 무섭지 않단 말이야!!!!!"
화나게 사람 속 살살 약올려댄게 누군데.. 내가 빽 소리를 질러대자 아시리안은 잘못건드려 노처녀 히스테리에 당하는 사람처럼 어이없는 표정이다. 그 황당하다는 표정도 내가 알고있는 아시리안의 그대로라서..지금 내앞에 서있는것도 변하지 않은 아시리안, 그대로여서 그리움이 나를 뒤흔들었다.
변한건, 달라진건.. 형체없는 마음뿐이다. 사라져버린 마음뿐이다. 어디서 잃어버린건지 알수가 없으니 어디서 찾으면 좋을지도 알수가 없는.. 누구에게 내놓으라고 해야 할지도 모를....소중한 마음..뿐이다.
"가!! 가버려!! 필요없으니까 내앞에서 사라져!!"
더이상..더이상 나를 괴롭히지마, 머리에 핑- 도는 현기증에 몸이 비틀거린다. 그리고 과도한 스트레스는 금물,이라는 진단을 받은 환자가 장거리마라톤을 뛴것처럼 숨을 급격하게 헐떡거리다가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제도 모르고 쓸데없이 소리를 지르니 그런 꼴이 되는거다."
저,저..나쁜놈!! 나를 이렇게 만든게 누구라고 생각하는거야!! 하지만 더이상은 소리지를 힘도 없어서 나는 주저앉은채 무척 한심하다는듯이 나를 내려다보는 아시리안을 죽일듯이 노려볼수밖에 없었다.
“젠장, 이 망할 자식같으니라고!!! 멋대로 혼자 가고 말이지. 배은망덕이 따로 없다니까"
투덜거리며 여관을 나온 외팔이 케드릭은 따가운 햇살아래에 숙취로 지끈거리는 골을 한손으로 누르며 가뜩이나 사나워보이는 얼굴에 인상을 가득 썻다. 여관문앞에 거대한 할버드를 든 덩치크고 사나워보이는 사내가 얼굴까지 구기고 있어선지 여관문주위엔 아무도 들어서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곧 사람들 틈속에서 푸른 머리카락과 연한 갈색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두명이 투닥투닥 말씨름을 벌이며 여관쪽으로 가까이 왔다. 한눈에 봐도 여행객인듯 싶은 유한 사내들이 사나워보이는 불한당으로 보이는 케드릭에게 다가가자 사람들이 금새 웅성웅성 거린다. 그런 웅성거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입씨름을 벌이며 여관쪽으로 다가가던 푸른 머리카락의 사내 프란이 케드릭을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봐, 데런, 내가 여기에는 있을거라 그랬지? 저녁사라”
“뭐..뭐야? 내가 왜 저녁을 사!! 네레이드성에서 용병길드까지 들쑤시고 로드리고 시까지 끌고온것도 모자라 여관이란 여관은 다 뒤지게 한게 누구라고 생각해!! 내 눈밑의 다크서클이 안보이냐!!”
데런이 거품물며 흥분하든 말든 상쾌하기까지 한 미소를 머금은 프란이 케드릭쪽을 바라보았다.
“어이,외팔이”
솜털도 안가신 야들야들한 애송이놈이 다짜고짜 반말이라 상당히 불쾌감을 느끼고 있던 케드릭이 거대한 할버드를 어깨에서 스륵 내렸다. 외팔이? 이 겁대가리없는 놈에게 매운맛을 가르쳐주리라. 이년동안 전쟁터에서 마물들과 싸워온 케드릭이다. 실전에서 닦은 실력은 이제 누구를 상대한다해도 자신있었다.
“네레이드성의 외팔이 베논알지?”
네레이드성의 베논? 할버드을 쥔 손에서 힘을 빼고 눈을 휘둥그레뜬 케드릭에게 프란이 싱긋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케이, 표정을 보니 아는것같고, 그럼, 네놈이 케드릭이겠지?”
“뭐..뭐냐. 네놈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있는거지?”
케드릭의 궁금증은 아랑곳하지 않고 프란이 환한 미소를 지은채 말했다.
”자, 그럼, 내놓으실까?”
“뭘..내놓으란 ...거냐!!”
베논과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상대.. 뭔가 상황이 이상해서 어중간한 말투로 소리치자 프란이 상큼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아.르.를 당장 내놓으란 말이다. 이 산.적.놈.아!”
그리고 눈깜짝할새에 공중으로 붕뜬 케드릭의 거구가 손에 든 거대한 할버드와 함께 여관옆에 말들을 매어놓는 마굿간쪽으로 순식간에 쳐박혔다.
처음에 푸른 머리카락의 잘생긴 사내를 알아보지 못했던 케드릭은 이내 곧 이 남자와 한번 인연이 닿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이름이야 알바아니지만 잘린 팔을 배고파서 삶아먹었냐며 비아냥거리던 그 뻔뻔한 낯가죽을 잊을리가 없는거다. 그러나 그 불유쾌한 첫만남과 의도하지 않은 지금의 재회에 불쾌감을 표시하기엔 케드릭은 지금 상당히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졸지에 유괴범 취급받으며 마굿간에 쳐박혔고 할버드를 빼앗기고 빼돌린 아르를 내놓으라며 억울한 취조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런"
씨이익- 웃으며 프란이 부르는 말에 짓고있는 표정에 그 씨익, 하는 미소가 이상황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런이 케드릭을 불쌍하다는듯이 힐긋 바라보며 왜, 라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외팔이에게 팔을 하나 더 잘라내면 그놈은 어떻게 될까"
"어쩌긴, 양손이 없으니 제손으로 밥도 못먹고, 볼일 볼때도 불편하고, 살아가는데 불편해지겠지"
흠칫,하는 얼굴의 케드릭을 슬쩍 바라보다가 데런이 머릿속으로 수십번 외팔이의 남은 팔을 동강내고도 남았을법한 프란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런짓을 하면 네가 찾는다는 녀석이 싫어하지 않을까? 용병일을 같이 하는걸 보면 꽤 친할지도 모르잖아?"
친하다고? 케드릭은 아르와 자신이 친한 사이인가를 떠올려 보았다. 글쎄.. 그건 아니었다. 분명 보통의 귀족과 그놈이 다르긴 하지만 친하다고 볼수있는 관계는 아닌거다. 감옥에서 손가락이 잘린채 정신놓고 있는 놈을 끌고나온건 그냥 순전히 그의 오기였을뿐, 그러나 곱게 죽이지 않는다, 곱게 죽게하지 않는다..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단지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때 모든것을 다 가진 귀족주제에 그 서글퍼보이는 눈빛도, 묶여서 끌려갈때 온갖 저질 음담패설을 지껄여도 화를 내지 않았던것도, 썩은 시체들이 덤벼들때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려한것도.. 모두 재수없었지만, 더 재수없는것은 그게 위선이나 거짓이 아니었다는거다. ...친하다고? 천만에.. 친할리가 없지 않은가, 지저분하게 막살아온 산적따위와 귀족에서 용병으로 떨어졌어도 더할나위없이 깨끗해보이는 그 재수없는 놈따위와는...
복잡한 생각을 하는 케드릭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는 프란이 데런의 말에 이어 반박했다.
"내가 보기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놈을 용병일 시키고, 저 외팔이놈이 돈을 갈취하고 있던게 분명해"
갈취,라는 말에 케드릭이 무척이나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프란은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케드릭을 괴롭히기위해인듯 더 사악하고 얄미워보이는 웃음을 불길하게 지었다.
"..오,오해십니다!!"
"오해는 무슨, 그럼 설명해보실까. 외팔이. 왜 네놈따위와 아르가 함께 있는지!!"
정말 묻고싶은건 그거였는지 기묘하게 번득이는 푸른 눈빛이다. 오해를 이해로 바꾸지않으면 남은 팔도 서슴없이 잘라버릴것 같은 기세에 케드릭은 크로멜성에서 나온 경위를 설명했다.
"거짓말을 꽤 능숙하게 하는군. 외팔이. 숲을 내려올때 함께 있던 귀족아가씨가 죽이라고 했지만 죽이기 싫어서 반쯤 정신나간 놈을 데리고 탈출했다. 지금 이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냐?"
사실대로 말했지만 역시.. 전혀 믿지 않는다는듯한 프란의 말에 케드릭은 속으로 역시.. 귀족놈들이란, 이라고 분통을 터트리며 서둘러 변명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 귀족년, 아니 그 귀족아가씨가 아르놈..아니 아르가 잡혀있던 곳의 열쇠까지 건네주며 강간하고 죽이라고...........윽!!!"
말을 하던 케드릭의 목에 득달같이 검을 가져다대며 광폭한 표정의 프란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옆에서 데런이 프란을 말리려고 벌떡 일어섰지만 프란의 검은 케드릭의 목을 금방이라도 따벌리듯이 가까이있긴했어도 베지는 않고있었다.
"...그래서, 그녀석에게 무슨 짓했어. 감히 네놈따위가!!!"
"이런 씨부럴!! 하긴 뭘해!!! 내가 아무리 인간말종이어도 처음으로 사람대접해준 놈에게 그런짓 할만큼 개자식은 아니라고!!!!"
화가 나서 진심이 튀어나오며 , 순간적으로 반말, 욕설을 하고 찔끔 하는 케드릭의 목을 겨눈 검을 서서히 내리며 프란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까지는 네레이드성의 외팔이들을 닦달해서 알아낸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에리카 라이에이드의 사주에 의해서였다고.. 아르휜과 사이가 안좋긴 했지만 설마 그런짓까지 벌일 정도로 증오했던가? 아니면 아르휜이 죽으면 펠릭스와 혼담을 방해하던 방해물도 함께 사라지는 셈이니까?
".........아르, 그녀석은 어디까지 알고있지?"
"..거의다.."
에리카 라이에이드가 그런짓까지 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교활한 그녀가 꽤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건 알수 있었다. 죽이기로 작정했으면 직접 손에 피를 묻히고서라도 죽였어야했다. 그게 아니면 증거를 남기지 말던가, 그런데 죽이지도 못했고.. 그 증거도 버젓하게 살아서 이리 잘만 떠들고 있으니.. ... 레이디 에리카, 잘도 이런짓을 하셨겠다?
잊지않겠다. 그리고 배로 갚아주지. 아르녀석처럼 당한거 참고있는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지.
하지만 일단은 아르를 만나는게 우선이다.
“흠. 그래, 그래서 아르와는 네레이드성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거지? 자, 그럼 우리도 네레이드성으로 다시..”
간단하게 말하는 프란을 향해 눈밑에 다크써클이 생긴 데런이 검을 빼들고 달려들었다.
“이자식아, 차라리 날 죽여라, 죽여!!”
"인간사전에 보면 너같은 행색을 거지라고 하지"
빠직.
"거기다 옷도 없고, 머리는 산발이고, 배도 고플테고"
빠지직.
"다른 벌레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는데?"
아앗, 진짜 이 마족놈잇!! 쳐다보는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너!! 사람들은 지저분한 거지쪽을 보면서 입을 헤 벌리고 쳐다보진 않는다고. 먹고살기도 바쁜데 또 거지냐, 이러면서 눈을 부라리면 부라렸지.
내가 스스로 인정하기는 눈물겹지만.. 진흙탕에 구른 겉옷과 머리카락은 흙먼지가 잔뜩이고 안에 입은 옷들도 아시리안 때문에 여기저기 너덜너덜 찢겨있고 아시리안의 말처럼 나는 지금 영락없는 거지꼬락서니였다., 아직 카레인시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런꼴을 보고 아무도 아르휜이란걸 눈치채지는 못하겠지 싶어 아예 후드까지 안쓰고 다녔지만 역시나 사람에겐 차림새가 중요한건지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단지 왠 거지야, 이런 불쾌감 어린 시선으로 힐긋 거리다가 거지옆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눈부신 미모의 남자, 아시리안을 보며 눈을 번쩍 뜰뿐인거다.
지금도 여자들 몇이 옆을 지나가다가 아시리안을 보고 걸음까지 멈춰선채 눈을 못떼고 있었다.
“어머....”
왠 어머? 그냥 지나가요. 여기있는건 얼굴만 멀쩡할뿐이지 잔인한 마족에다가 하는짓은 변태예요. 변태!!
아시리안을 쳐다보는 젊은 여자들의 시선이 사흘굶었다가 먹이를 발견한 독수리만큼이나 반짝반짝 빛난다.
“너는 창피한것도 모르나?”
"네가 날 쫒아오기 때문이잖아!!!"
가뜩이나 없는 기운에 버럭, 소리까지 질렀더니 어지럽다. 눈앞이 아찔해서 휘청, 하며 잠시 비틀거리자 꼴도보기 싫은 마족놈이 팔짱을 딱 끼고 서서 나를 한심하다는듯이 쳐다보는 모습이 두개,세개로 늘어난다.. 눈에 힘을 주고 힘껏 노려보다가 시선을 부딪치고 있으니까 마음이 아련해져서 울컥 솟아오려는 감정을 억누르려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따라오지마"
앞만 보고 척척 걸으며 중얼거리자 벌레같은 인간의 말따윈 옆집개가 짖는거만큼이나 효용성이 없는지 아시리안은 어느새 내옆에 보조를 맞춰걸으며 또 신기한 생물쳐다보듯이 내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쳐다보지도마"
마치 뉘집개가 짖냐는듯 아무 반응도 없이 내얼굴을 쳐다보고 있어서 우뚝 걸음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젠장, 가!! 가버리라고!!!"
화를 버럭, 버럭 내는데도 아시리안은 무지 티껍다는듯이 나를 바라보며 잘난척 웃었다.
"거지행색에 화까지 내니 볼만하군. 인간"
으휴우우..내가 말을 말지. 말어. 실갱이를 벌이는 우리쪽으로 다시 노골적인 시선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어차피 시선들이야 인적이 있는 마을로 들어오면서부터였으니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다.
한사람은 수수한 차림새이긴 하지만 생긴게 범상치않아보이는 검푸른 머리카락의 신비해보이는 아름다운 남자, 다른 한사람은 누구덕분에 찢어진 옷과 누구덕분에 산발인 머리와 누구덕분에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데다 피해망상증까지 생긴 거지.. 전혀 어울리지않는 둘이 딱붙어 오순도순 걸으며 티격태격 다투고있으니 시선을 안받을래야 안받을수가 없겠지만서도..
아시리안은 왜 나를 죽이지 않는걸까. 왜 나를 따라오는 거지? 내가 신기해서? 뭐..보통은 마족에게 이렇게 함부로 편하게 대하지 못할지도.. 게다가 두번씩이나 죽일뻔한 마족이라면 더더욱..지금의 아시리안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역시 하찮은 하루살이쯤으로 여기고 무시하는 순수한 마족 그 자체.. 변덕스럽게 살려내긴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두번씩이나 죽이려한 살인미수범.. 지금도 귀찮아지면 나를 죽여버릴 가능성이 99.9%!!
입가로 쓰게 베어나오는 고통과도 같은 쓴웃음을 목구멍으로 삼켜냈다. 찢어진 옷가지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찬바람의 한기에 오슬거리는 몸을 한차례 떨며 양팔로 몸을 감싸안자 옆에서 나를 지독히도 화나게 하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버틸만큼 버텨서 얼마 못가겠군"
어항밖에 잘못 튕겨나온 금붕어가 햇볕아래 팔딱거리다 말라죽어가는걸 빤히 쳐다보면서 좀뒤면 맛이 완전 가겠군..이런 심드렁한 말투다. 젠장, 가, 좀 가란 말이야. 너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모 CF에서 처럼 낙옆이라도 있음 좋겠지만 여건상 낙옆대신 굴러다니는 진흙이라도 양손에 한웅큼씩 움켜쥐고 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얼마 못버틴다는 아시리안의 말은 그게 지금 '곧'이라는 의미였나보다. 눈앞의 세상이 흔들,하더니 땅밑이 푹 꺼지는 것처럼 몸이 휘청거렸다. 가물거리는 시야안에 나를 향해 뻗어오는 손을 보고 흠칫, 정신을 차리고 손이 몸에 닿기전 움찔, 뒤로 물러섰다.
"............소.............손대지마!!!"
쓰러질듯 하다가 버럭 소리를 질러서인지 소리에 담긴 격렬한 감정때문인지 나를 잡아주려다가 멈칫, 멈춘 아시리안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채 나는 고개를 숙이고 덜덜 떨려오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소...손대지마..나한테 손대지마!!!!!!!"
눈을 마주치면 무수히 많은 감정이 들끓고있는 마음을 들킬것 같아 고개를 푹 숙인채였지만 흔들리는 시야처럼 감정을 숨기지못한 목소리역시 마구 흔들리고 있다는걸 나는 알고있었다. 젠장,젠장,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