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오포드가의 귀공자-18화 (18/36)

18.

흉벽과 탑이 삐죽삐죽 솟은 거대한 성벽이 로드리고 시를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저건 아무래도 마물들의 침입을 대비해서 최근에 세운듯 싶었다. 그래도 아직 도시안에서 전쟁의 냄새는 나지 않는구나...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박빛깔로 샛노란 강줄기에 바람이 불어 물결이 살랑거리고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위에는 노점상인들이 잡다하게 물건들을 늘어놓고 사람들과 흥정을 벌이고 있다. 다리 아래로 깨알처럼 작은 집들과 그 위에 얹은 벽돌지붕.. 그 사이사이로 골목들이 보이고 번다하게 사람들이 오고가는 광장과 여러개의 상점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역시 돈많은 놈들은 씀씀이부터가 다르군”

이번 호위임무를 끝내고 받은 두툼한 주머니를 공중으로 쳐올렸다가 한손으로 척 받아내며 케드릭이 껄껄 웃는다. 케드릭.. 저러니까 진짜 산적같다. 하긴.. 전에 산적이었으니까 그게 당연한지도... 그러고 보니 좁은 다리위 번잡한 사람들속에서도 유달리 케드릭과 내주변에 사람이 없는 이유도 알것 같았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케드릭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불.한.당.의 전형적인 모습일게 틀림없으니까. 커다란 덩치에 보기만해도 입이 쩍 벌어지는 거대한 할버드를 척, 어깨에 멘대가 팔이 없는 한쪽 소매는 바람에 펄럭펄럭, 옷차림새도 불량스럽기 그지 없으니..

“아르, 너 왜 갑자기 걸음을 빨리 걷는 거야?”

“당신하고 일행으로 보이는게 싫어서요..”

창피해...란 말은 삼켰는데 뒤에서 케드릭이 분통을 터트렸다.

“뭐,뭐야? 이 배은망덕한 놈잇!!내가 어디가 어때서!!”

목소리도 우렁차기 그지없다. 한마디씩 내뱉을때마다 옆에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움찔움찔 겁에 질릴만큼.

그러니까 당신같은 무뢰배취급 당하기 싫다고..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뒤에서 케드릭이 소리를 지르던 말던 가급적 거리를 넓히려 애쓰면서...

시종일관 배은망덕하다느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느니, 분기탱천해서 연신 큰소리로 투덜거리는 케드릭과 함께 들어온곳은 숙박겸 식사도 같이 하는 여관이었다. 낮고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고서도 나를 노려보던 눈길을 거두지 않던 케드릭은 잠시 뒤 음식이 나오면서부터 자연스럽게 투덜거림을 멈추었다. 그리고 탁자위의 음식들을 우적우적 쓸어담듯 먹으면서 배은망덕에다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어쩌고는 자연스럽게 잊어버렸는지 금새 배부른 맷돼지처럼 흐뭇한 표정이 된다.

게다가 옆에서 식사하는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트림을 꺼억 내뱉고 배까지 팡팡 두드리고...

운나쁘게도 우리옆에서 식사하던 두사람, 로브를 뒤집어써서 표정이 보이지 않을뿐, 분명 속이 거북하고 않좋은 표정을 하고 있을게 뻔하다.

정말이지..케드릭, 당신은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옆에 있는 나는 무지 창피하다구요..

“꺼억, 그런데 언제 떠날 생각이냐?”

하룻밤 묶을 생각이긴 했지만 어디로 간다고 딱히 정해놓은 목적지가 있는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오래 머물진 못한다. 케드릭에게 내가 이곳에 있으면 곤란한 이유에 대해서까지 설명할수는 없지만...카레인시가 바로 옆에 있는것도 신경쓰이고 귀족들이 이런 싸구려여관에 올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누군가가 나를 알아볼까 싶은것도 신경쓰였다. 아무리 머리색을 바꿨다고 해도 붉은 눈동자와 생김새만으로 [아르휜]을 연상해내지 못한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베논 놈들은 아직도 네레이드성에 있는 모양이야. 뭐..용병신세야 어딜가나 다 똑같으니까 말이지. 그런 외팔이놈들이야 뭐..이리저리 움직여봐야 귀찮기만 하고, 그 질긴 놈들이 아직도 살아있으려나..”

말을 하는 케드릭의 목소리에 은근한 그리움이 묻어있는걸 알고 나는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네레이드성으로 가요.”

“뭐어? 귀찮게스리 언제 거기까지 가려고? 흠,흠.... 아르, 네놈이 꼭 가야겠다면 별수없지만..”

정말 귀찮기짝이 없는데 내가 가자고 하니까 할수없다는 어조로 말하면서도 실실거리는 웃음을 참고있는듯한 케드릭을 보며 나는 다시 슬쩍 웃었다.

솔직하게 보고싶다- 그러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것도 아닌데.. ..

케드릭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그 사람들이 보고 싶긴 했다. 크로멜성을 탈출해서 용병으로 떠돌던 세월 내내 몇 개월전까지는 함께 있었으니까. 어찌보면 그들은 내가 아르인채로 길게 인연을 맺은 최초의 사람들인 셈이었다. 처음 맺은 인연이야 서로 그다지 좋았다고 볼수 없는 불편한 관계지만 지금은 동료보다 조금 더 가까운 관계.. 분명 다시 만나면 반가울 인연인거다.

이런 편안함도 오랜만이어선지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것같은 케드릭을 아래층에 남겨두고 나만 홀로 방이 있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방은 침대 두 개, 탁자와 의자만으로도 빠듯할만큼 작다. 뭐...하룻밤이니까. 게다가 노숙한 적도 있는게 이런거야 충분히 양호한거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간단한 옷가지만이 전부인 짐을 풀어 탁자위에 단정하게 올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가오려는지 저녁하늘이 흐리다. 검은 먹구름이 안개처럼 흩어진 하늘을 올려다보다 침대에 털썩 몸을 눕혔다.

이대로 눈을 감고 ..지옥에 남겨진 기분으로 눈을 떠도 하루를 견디면 저녁이 온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오고 또 하루를 견디면 다시 저녁.. .....지옥같을거라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라고 아파했으면서도 시간은 흐르고 고통은 세월의 바람에 깍이는 돌처럼 무뎌진다. 이제 아픔을 참는건 익숙하니까. 라고 생각하며 억지로 눈을 감았다.

아시리안이 나를 향해 웃고있다. 언젠가 보았던.. 그때 호숫가에서 나를 놀리고 웃었던 것처럼 환하게..

꿈...이야. 하도 많이 꾸어서 이제 꿈이란걸 알고있다. 그럼에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아시리안.....보고싶었어..-

반갑게 달려가면 조금 뒤로 물러서는 아시리안에게 좀체 가까이 갈수가 없어서 마음이 조바심친다.

-아시리안..가지마, 가지마-

아이처럼 쫒아 달려가도 아시리안의 모습이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기만 해서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무릎을 꿇고 자리에 엎드려 서럽게.. 서럽게....서럽게......

-너때문이야-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와 울먹이는 채로 시선을 들자 바로 앞에 아시리안의 모습이 보인다.

반가워서 일어서려는데 뒤쪽에서 아시리안의 몸을 여러개의 창이 푹 꿰뚫어오고 푸른 핏물이 흘러내린다.

-보라고, 아르. 결국 너 때문에 이꼴이 됐어- 푸르게 창백한 낯색으로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아시리안의 등뒤에 서있는건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펠릭스형의 모습.. .. 광기어린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비틀린 웃음을 짓고있다.

-아르휜, 모든게 너때문이야.-

-아시리안을 놔줘!! 아시리안을 놓으란 말이야!!!!!!!!!!!!!!!!!!!!-

이런건 꿈...이야. 하도 많이 꾸어서 이제 꿈이란걸 알고있다. 그럼에도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필사적으로 버둥거린다.

-아시리안!!!! 안돼!!! 안돼!!!!!!!!!!!-

“으....................으으....................아!!”

번쩍, 눈을 뜬 나는 어둠속에서 하악, 하악.. 거친 숨을 여러번 몰아쉬었다..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고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덮자 축축한 물기가 만져진다. 침대에서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켜세우고 어둠속에 한참동안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투두두둑, 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중에야 머릿속으로 인식이 되었다. 침대에서 나와 커튼을 올리고 보자 거센 빗줄기가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인듯.. 유리창을 타고 빗물이 주르르륵 흘러내린다.

빗속을 한없이 바라보다 입술을 꾹, 물고 창가에서 돌아섰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여기까지 와서 그냥 못가겠어...

짐속에서 후드가 달린 로브를 꺼내 입고 방을 그대로 나서려던 나는 멈칫, 걸음을 멈추고 술을 꽤 마셨는지 코까지 드르릉거리며 골고있는 케드릭쪽을 바라보았다. 으휴..도대체 얼마나 마신거야.. 이 술냄새좀봐...

깨워서 말을 건네는건 무리일것 같고.. 주인아저씨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하면 되겠지.

계단을 내려오자 어두운 빈홀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는 주인아저씨가 보여 그쪽으로 곧장 가는데 불현듯 여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그 자리로 가봐요. 어쩌면 거기에 당신이 찾고 있는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한테 한 말인가싶어 둘러보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두인영의 모습이 보였다. 작은 호롱불만이 밝히고 있는 실내에서도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는 이상한 이인조는 조금전 식사할 때 케드릭과 내옆에 앉아있던 사람들이었다.

돌아보는데도 아무말없이 앉아있을뿐이라 내게 한 말인지 아닌지 확신할수도 없어서 그들에게서 몸을 돌렸지만 더 이상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것을 보아 내게 한 말은 아닌것 같다.

주인아저씨가 너무 맛있게 자고 있어 깨우기가 미안했지만 살살 흔들어 깨우고 자고있는 케드릭에게 네레이드성에서 만나자는 말을 전해달라고 한뒤 나는 여관문을 나섰다.

쏴아아아아아........질척한 땅을 달리는 말발굽소리까지 묻혀버릴 정도로 거센 빗줄기들이 대지를 후려치듯 파고든다. 몇시간째 계속 빗속을 달려와서 말도 나도 흠뻑 젖은 상태로 지쳐있었다.

“조금만 힘내줘, 거의 다 왔거든"

오늘하루뿐인 인연이지만 말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하자 마치 내말을 알아듣는것처럼 말이 히히힝~하고 울음을 토한다. 말이 빌리는 거지.. 말안하고 가져온게 훔치는거라고 하면 할말없지만.. 뭐, 어쨌든 날이 밝기전에 곱게 그자리에 돌려주기만 하면 그만이지... 속편하게 생각하고..

비 때문에, 그리고 혹시나해서 얼굴을 숨기려고 로브의 후드를 깊숙이 눌러쓴 상태로 나는 아련한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을 향해 폭우속을 달렸다.

몇시간인지 모를 시간을 정신없이 달려 카레인시의 중심부쪽으로 들어섰다. 역시 로드리고 시처럼 카레인시도 직접적인 몬스터들의 습격은 없는듯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그렇다는거지..빗물에 젖은 피부로 느껴지는 이 쌀쌀함은 비내리는 밤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탓은 아닐것이다. 급격히 늘어난 몬스터들과의 전투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꼬마와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들을 잃은 노부모들이 늘고 있으니까..

마침내 도착한 레오포드공작가의 입구쯤에서 거칠어진 숨결로 투레질을 하는 말위에서 내려왔다. 폭우가 쏟아져내리는 어두운 밤이라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 물론, 그럴거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온거긴 하지만..혹시 사람의 그림자라도 보이면 먼발치에서만 보고 그대로 돌아가려고 했었다. 어차피 이 빗속을 뚫고 카레인시에 온것은 아르휜의 기억에 남아있는 집을 그리워해서 온것은 아니니까.  단지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수가 없었을뿐....하지만..

"그대로네...여기......"

무심결에 입을 열자 숨차게 달려온탓에 떨리는 숨결이 어둠속으로 잘게 퍼진다.

레오포드가를 빙 둘러싸 안이 보이지 않는 높은 담장은 칡넝쿨같은 새파란 나뭇잎들이 감싸고 있다. 미약한 한숨을 쉬며 등을 기대자 빗물에 시달린 젖은 잎사귀들이 접촉을 저항하듯 가볍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비와 함께 불어온 바람에 비에 젖은 후드가 펄럭거리고 후드안에 숨기고있던 검게 물들인 짧은 머리카락을 차갑게 휩쓸고 지나간다.

이제 아르휜으로 살지않겠다고..[아르휜]대신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아르휜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추억만큼은 어쩔수가 없는거라서... 분명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것의 정체는 [그리움]이란 이름..

왜 오고야 말았을까. 보고싶다고 해서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이도 아닌데....펠릭스형이 크로멜성에서의 일을 어떻게 수습했는지는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결국 아르휜은 달아났다,라고 알려져있을테고.. 마족인 아시리안과 함께 있었던것도 인간들에겐 용서받을 수 없는 배신이 되었던 것을 알고있으니까...아버지에게 역시 아르휜 폰 레오포드는 레오포드가의 치욕스런 수치로 기억되고 있겠지..아버지, 저 왔어요!! 하며 들어가는 순간 포옹은 커녕 날카로운 검이 내목을 댕겅 잘라낼지도....

아르휜의 기억속에 있는 레오포드공작을 생각해보면 에이, 그래도 자식인데..설마 죽이기까지야 하겠어. 라고 완전 부정할수만은 없는 사실인거다. 펠릭스형역시 아시리안의 반지를 끼고있는 아르휜의 손가락을 자르는데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으니까. ..

캄캄한 어둠에 잠겨 쏴아아아....하는 빗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함속에 그렇게 한참을 서있는 사이 비는 어느새 성내듯 줄기차게 내리던 소낙비대신 약한 가랑비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살아있는데도 가족들을 만날 수 없다는건 서글프고.. 쓸쓸한 일이다. ....하지만.....................언젠간.. 편하게 만날수 있겠지... 언젠가는..

레오포드가의 커다란 담장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낸후 나는 옆에 세워두었던 말위에 훌쩍 뛰어 올랐다. 그래....언젠간 만날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아니야.

말을 타고 몇시간을 죽창 달려온것처럼 다시 되돌아가기위해서 같은 시간을 달려야하고 .. 날이 밝기전까지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나는 시내의 한복판에서 아르휜의 기억속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전에 프란이 나를 데리고왔던 곳을 찾아헤맸다.

여기인것 같은데...?.. 화려하게 건물주위를 떠돌던 반짝거리는 반딧불의 수가 확연히 줄어들어 있긴 하지만 맞는것 같다. 반딧불이 적어진 이유야 뻔하다. 숲에서 반딧불이를 사냥해야 하는데 워낙 마물들이 드세게 덤벼들다보니 사냥하는 사람들이 적어져서겠지.. 구하기도 어려울거고..

아시리안과 내가 처음 만난 곳에 오자 문득 여관을 나오기직전 후드를 뒤집어써서 수상쩍기 그지없던 두사람이 생각났다.

-처음, 그 자리로 가봐요. 어쩌면 거기에 당신이 찾고 있는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라고 했었는데 지금의 내 상황과 묘하게 일치한다. 이곳은 아시리안과 만난 [처음 그 자리]이니까. 단지 틀린건 이곳에 아시리안이 없다는것뿐...

내가 찾고있는것, 내가 원하는것.. 내가 간절히 소망하는것.........그게 뭔지 모르겠다.. 아시리안이 살아있다고 아시리안을 기다리지만......그냥 이렇게 그리움을 간직한채 사는게 옳은 일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아시리안은 마족이고 나는 인간이고 ...그러니까 다시 만난다고 해도 소용없는 거라고...

몇마리의 반딧불이들이 꽁지를 반짝반짝 빛내며 가랑비를 피해 을씨년스러운 허공을 부유하는것을 쓸쓸하게 바라보다가 위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반짝거리는 빛을 내뿜는 존재가 깃털처럼 손등에 가볍게 안착해 살갗을 살살 간지럽힌다.

그래도 그때 아시리안과 내가 우연히 이곳에서 만난것처럼... 다시한번 만나면, 다시한번 우연이 찾아온다면.. ..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아시리안과 처음 마주친 그자리에서 한참을 벗어나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가볍게 말위에 훌쩍 올라 미련과 아쉬움을 떨쳐버리듯 말을 몰아 아르가 사라진지 얼마후 방금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검푸른 머리카락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처음부터 그자리에 있었던듯 자연스럽게 스며든 남자는 그림한폭처럼 잘 어울리면서도 이공간과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위화감을 풍기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바람도 그에겐 일말의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것처럼 긴로브자락도 허리아래 길게 늘어진 검푸른 머리카락도 한올의 움직임이 없다.

다가닥..다가닥.. 거리는 시끄러운 말발굽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꺽었다가 아시리안은 사창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마족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생명체.. 인간과 달리 영원을 사는 반면 인간같은 영혼은 없다. 그러나 마력이라고는 해도 태어날때는 모체가 필요한 법. 외형이 사람과 비슷하기때문에 주로 인간여성을 이용하고 아시리안을 낳은 모체도 이 사창가에 살던 인간여자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사유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있는 마족인지라 보통 모체로 이용된 인간은 죽이지만 아시리안은 그 인간여자와 한달을 함께 보냈다. 한달이라고는 해도 이미 17세가량의 소년 모습을 하고있는 그를 떠나보내며 그 인간여자는 끊임없이 울고있었다.

순간을 사는 인간여자인 그녀가 오래전 흙으로 돌아가 이제 더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지만 아시리안은 가끔 이렇게 이곳을 찾아오곤 했다. 이미 오랜 시간이 흘러 모체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지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흘린 눈물의 의미는 꽤 오래도록 궁금하게 만들곤 했으니까.

아시리안의 차가운 손이 허공을 빙빙 맴도는 반짝거리는 벌레에게로 뻗었다. 힘을 감추고 있어도 위험스런 존재라는걸 본능이 가르쳐주는지 도망치려고 필사적으로 파닥거리던 미약한 그것은 이내 핏, 작은 몸체를 터트린다.

다가닥,다가닥... 조금 멀어진 말발굽소리가 인간으로선 들릴리 없지만 마족인 그에겐 시끄럽게 울려왔다. 불쾌하고 짜증이 묻은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고 아시리안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꽤 시끄럽게 구는군.. 이 벌레놈.."

그리고 푸른빛이 파직, 타오르는 손끝으로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가 소음처럼 들리는 쪽으로 뻗었다.

으슥한 어둠속에서 유난히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는 언덕의 그루터기의 실루엣이 보였다. 빗속을 뚫고 몇시간이나 달려서인지 몸이 한기에 떨리고있다. ..상태가 별로 좋지않아. 서둘러야겠어. 몸에 스며드는 한기를 이겨내려 말고삐를 다시 힘있게 말아쥐고 달리기에 박차를 가했다.

언덕을 올라 커다란 나무가 서있는 곳을 지나치려던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쏘아오고 있는게 느껴졌다. 나를 겨냥해 오는 그것은 화살과 같기도 하고 번개처럼도 보였다. 저..저게 뭐.뭐지? 생각할 겨를없이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리며 몸을 최대한 멀리 굴렸다. 워낙 뺘른 속도로 덮치고 있어서 말까지 구해줄 엄두는 나지 않았기에 였지만 곧이어 벌어진 사태에 말을 구하려했다면 나까지 산산조각 났을거라는걸 깨닫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내가 뛰어내리는것과 거의 동시에 덮쳐든 날카로운 빛의 광선이 말의 몸을 검기처럼 꿰뚫은 것이다.

그리고 뱃속에 시한 폭탄을 꿀꺽 삼킨 것처럼 말이 울부짖음도 없이 펑- 하고 터졌다.

이..이게 대체...... 다급하게 뛰어내려서 비에 젖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거리는 내주위에 터지면서 허공으로 솟구쳤던 말의 피와 살점들이 뒤늦게 후드득, 후드득.. 떨어져내린다. 후드까지 벗겨내려가있는 것도 모를 정도로 넋이 나가서 형체도 찾지 못할 정도로 산산조각 흩어진 말의 피묻은 살점들을 멍하게 둘러보았다.....뭐..뭐지?!!! 마..마법인가?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존재의 느낌도 없었다.  얼추.. 황당시츄에이션이라는건 알겠는데...아.. 이렇게 되면...이렇게 되면 이녀석을 내가 훔친게 된단 말이잖아!!

“대.. 대체 어떤 미친놈이야!!!!!"

졸지에 도둑이 되버렸다. 말도 없이 몰래 빌린 말을 갈기갈기 조각난 살점만 가지고 가서 죄송합니다, 하고 얌전히 들이밀수도 없고... 휴우우우... 공기중에 순식간에 퍼져가는 비릿한 피냄새에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한기가 스며들자 짜증이 치밀었다.  걸어서 돌아가려면 아침이 되기전에 로드리고 시까지 돌아간다는 계획은 전면수정해야되고.. ..어차피 케드릭에게는 네레이드성에서 만나자고 말을 전해달라고 하긴 했지만.. 내가 곤란한 이유는 지금 여기가 레오포드가영지내인 카레인시라는데에 있었다. 왜 이렇게 되버렸담..이 난처하고 황당한 사태를 어찌 수습해야 좋을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그 미친놈이 나다. 인간"

어......................??............................라...........................?!!!! ....... 차가운 목소리가 귀에 익숙하다. 심장의 박동이 멈춘채로 고장난 기계처럼 천천히 소리가 들린 머리위로 시선을 들자 어둠속에서 푸른빛이 도는 검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존재가 거만하게 팔짱을 낀채 허공에 떠있는게 보였다.

“!!!!!”

내가 아무말도 못하는 것은 갑자기 빛을 쏘아대서 말을 산산조각낸 미친놈이 미친놈주제에 가짢다는듯이 나를 보며 유령처럼 허공에 둥실 떠있어서가 아니었다. 아무말도 못하고 젖은 땅바닥에 주저앉은채 멍하게 올려다보고있는 나를 내리깐 시선으로 차갑게 보며 [그]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하찮은 벌레따위가 건방지게 공격을 피했군"

벌레라니...실례야. 실례라고..... 사....살아.... 살아있었어. 그럴줄 알고 있었어..믿었으니까.

허공에 떠서 푸른 빛이 전기처럼 파지직,파지직 거리는 손을 내쪽으로 내뻗는 이의 얼굴은 이미 알고있는.. 그리워하고....그리워하고........그리워한 ......나의 아시리안이다.

"죽어라. 인간"

날카로운 빛이 화살처럼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걸 느끼며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몽롱한 기분으로 아시리안을 멍하게 올려보았다.가랑비가 투두둑 땅바닥을, 그리고 이미 흠뻑 젖어있는 나를 적시는데도 아시리안주변에선 빗줄기가 피해가듯 아시리안의 주변만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왜.........아시리안.....?..........왜.......나를.........나를......

쿨럭.. 입밖으로 한웅큼 쏟아져나오는 피를 토하며 나는 통증이 느껴지는 가슴에서 울컥울컥 샘솟는 피를 손으로 막았다. 고통이.....생생하다. 그러니..이건....이건....꿈이...아니야.......

아시리안을 만나는 지금 이순간도.. 아시리안이 나를 죽이려하는 지금 이순간도.. 아시리안을 다시만난것에 감사를 해야할지 고통스러운 생이 이리 허무하게 끝나는것에 대해 축배를 들어야할지 알수가 없는 지금.......이.........순............간...............도..........................

그러나 핏물을 쏟아내면서도 웃음이 터지는걸 막을 수가 없었다. .........만났어, 아시리안을.........만났어..

핏물을 토하는 입으로 웃으면서 그리고 울면서 아시리안을 바라보자 아시리안은 머리둘달린 이상한 생물을 보는것처럼 나를 보고 있었다. 지금 내표정이 그렇게..........이상해.......?....죽어가면서 이렇게 행복한 얼굴...이해가 안가는 얼굴이야....기쁜게 당연하잖아.. 이제야.. 널 만났는걸. 이제.. 만났는걸...

그러니까.........좋아, 죽어도.....좋아...

하지만.....할말이 있었는데.. 기다렸다고... 그리고 보고싶었다고....미안하다고...못할것 같....

“......아................시...............ㄹ......”

닿을리 없는 아시리안쪽으로 팔을 뻗자 손에 흥건히 묻은 피가 손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시 입밖으로 한웅큼 쏟아져내리는 비릿한 핏물을 입안으로 삼키며 다시 쿨럭.. 기침을 했다.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낯선 시선의 아시리안을 놓치지않고 눈에 담은채로 나는 더 버티지못하고 털썩 뒤쪽으로 나무토막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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