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불길했던 예감은 어느새 확신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숲에서나 숨어다니던 몬스터들이 숲밖으로 뛰쳐나와 인간을 각지에서 공격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에오포이나국에게만 닥친 문제가 아니라 루카나제국내 다른 나라들역시 마찬가지 상황으로 마물들 퇴치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현재..
"정말 지겨우리만치 달라붙는군. 못생긴건 내취향이 아닌데.. 아차, 이건 인간의 관점이니 이 오크놈들의 입장에서 못생긴건 내가 되려나? 실드, 저 잘생긴 오크들을 날려줘!!"
바람을 이용해 앞에서 달려드는 오크들 몇마리를 날려버리고 프란은 코끝을 찌르는 역겹고 비릿한 냄새에 비해 청명하고 푸른 하늘을 아득하게 올려다보았다. 빌어먹게 ..날씨좋네. 이렇게 화창한 날씨에...
“바쁜 몸이신 내가 네놈들하고 놀아줘야 되겠냐고!!!!”
한풀어내듯 소리치며 검을 휘두르는 프란의 앞에서 창으로 공격하려던 오크가 쿠에엑-하는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비명소리 좀 봐라. 품위없긴. 아차, 이것도 인간의 관점이군.”
피튀기는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태평하게 이런 소리나 중얼거리는 프란의 주변에서 오크들이 빙 둘러서 공격할 틈을 노리고 있다. 허나 프란이 사용하는 정령술이나 검에 이미 여러차례 당해서 쉽사리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프라아아안!!!!!!!!!!!!! 너는 입으로 다 싸우냐? 그 입에 오크살점 쑤셔넣기전에 실력 좀 제대로 보여봐!!"
저쪽에서 오크들에 둘러싸여 오크한놈의 머리통을 터프하게 날려버리고있던 한사내가 프란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데런!! 우리가 지난번에 와이번고기까지 도전했던가?"
프란이 크게 소리치자 데런이라고 이름을 불린 사내가 불길한 상상을 한듯 검을 휘두르다가 어깨를 움칫, 했다. 몸이 바짝 굳어서 표정관리가 안되는 데런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란이 오크의 머리를 검으로 스칵, 베어내며 유쾌하게 소리쳤다.
"우리, 오늘은 오크고기로 배터지게 먹어볼까?"
보기에도 흉칙하지만 노린내 비슷한 역겨운 냄새까지 풍기는 오크들을 잡아먹자는 소리에 데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원래 도발에 잘 넘어가는 성격인지 아니면 지는걸 싫어해서인지 비장한 각오를 품은 데런이 이내 호기있게 소리를 질렀다.
"조,좋아!! 까짓거 머,먹는다!!!"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오크들이야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니 상관없지만 오크들과 피터지게 싸우던 다른 병사들, 용병들은 오크들을 잡아먹겠다고 하는 두 미친 녀석을 황당하다는듯 훑었다. 그 시선들에는 아랑곳없이 오크요리법에 대해 생각하던 프란은 얼핏 몬스터들과 싸우는 사람들의 무리중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경악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자세히 보기도전 오크들에 둘러싸여 모습이 사라진다.
“비켜!!! 이 못생긴 것들이 어딜 가로막어!!!”
자신앞을 달려드는 오크들을 검으로 거칠게 쑤셔박으며 붉은 머리카락을 찾아 두리번 거리던 프란은 흥분으로 크게 떠졌던 눈동자를 천천히 가라앉혔다. 같은 붉은 머리카락이긴 하지만 이쪽은 한순간 착각한게 미안할정도의 생김새다. 게다가 아르휜이 지금도 기억을 찾지 못한 [아르]의 상태라면 전쟁터야말로 녀석이 있을 만한 장소는 아닌거다.
...잘하면 오크보고도 아르,하고 덥썩 껴안겠군. 아르.. 어딨냐. 이자식아. 이만큼 찾아다녔으면 이제 그만 좀 나타나라.
이년이었다. 아르휜이 크로멜성의 감옥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고 찾아다닌 시간이 이년.....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동안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고는 있었지만 사라진 아르의 존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아르가 감옥에서 사라진후 마족이 데려간건 아닐까라는 조심스런 추측이 있었지만 그때 그 마족이 당한 상처로 보건데 소멸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단기간에 회생할 가능성도 없다고 판단... 펠릭스가 어디로 빼돌리지 않았느냐는 추측에 대해선 자신이 아는 펠릭스란 놈에 대해 단언컨대 레오포드가가 먹물을 뒤집어쓸 위험을 감수하고 결코 그런일을 저지를 놈은 아니다. 그놈은.
그리고 세번째 가능성은 감옥에서 함께 사라진 산적떼 몇놈.. 다들 마족에 정신이 팔려있어서, 그리고 마족을 소멸직전까지 몰아갔다는것에 중점을 두었을뿐 쓸모없어진 아르휜이 사라진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고, 마물들이 다시 대대적으로 크로멜성을 공략해와서 그 문제도 유야무야 흘러가버렸지만 프란은 아르가 사라진 지점에서 그들 몇놈도 함께 사라졌다는것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오크와 인간의 핏물이 뒤섞인 비릿한 냄새를 품은 바람이 프란의 푸른 머리카락을 세차게 흔들고 지나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마물들과의 싸움이 한차례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프란과 마찬가지로 성내로 들어와있던 데런이 어깨를 툭, 치며 하는 말에 프란이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뭐...아무것도,.”
“그럼, 어서 식사나 하자고, 여기 성주가 점심만찬에 초대해줬으니 오랜만에 포식 좀 할까?”
“그래? 그럼, 오크는.........”
이라는 말에 데런의 몸이 움찔 굳는것을 모른척 하며 프란이 이어 말했다.
“아쉽게도 다음기회에 이용해야겠군”
굳었던 데런의 어깨에서 힘이 쫙 풀리는게 마치 그가 몰래 내쉬고있는 안도의 한숨인것 같아 프란은 데런몰래 슬쩍 웃었다.
프란이 데런과 만난것은 아르를 찾아 떠돌면서였다. 검실력도 쓸만하고 비슷한 나이또래에 무엇보다 귀족이면서 귀족근성도 없고.. 제법 성격도 귀엽고(데런이 들으면 기겁을 하겠지만). 뭐든지 프란에게 지지 않으려고 눈에 불을 키는 모습이 아주 괴롭히는 맛이 쏠쏠하다라고나 할까. 덩치 큰 곰주제에 답지않게 순진한 구석이 있어서 오크를 잡아먹자는 말에 싫다는 말대신 까짓거 먹는다라고 해놓고서도 실제로 오크를 요리하자고 할까봐 움찔거리는..
오크를 잡아먹을 생각은 아무리 비위좋은 자신이라도 그다지 내키지 않지만, 시도를 해보면 반응이 꽤 재미있을지도.. 프란이 사악한 생각을 하는 사이 아무것도 모르는 데런이 오크요리에 대한 근심에서 해방된 탓인지 한결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걸어왔다.
“그 찾는다는 녀석은 이곳에도 없나?”
“..아마도.”
잠시 침묵했던 프란이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자 데런이 힐끗 프란쪽을 보았다. 이년동안이나 찾아다닌 사람치곤 대답이 너무 심플하다..라고 생각하는 듯 싶었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거론하지 않은채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보니 여기서 한달 가까이 지냈잖아. 언제 떠날 생각이야?”
“한군데에 있다보니 좀이 쑤시는 쪽이냐. 아니면 비운의 레이디가 보내는 추파를 더는 감당할 수가 없는 쪽이냐?”
정곡을 찔린듯 말을 멈춘 데런이 이내 큰 한숨을 내쉬었다. 비운의 레이디는 이곳 네레이드성의 성주딸인 클라우디아의 별명아닌 별명으로 이 도시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백옥같은 피부에 금발에 가까운 다갈색 머리카락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지만 그 아름다운 얼굴에 하필이면 눈이 짝눈이라서 붙여진 별명이 바로 [비운의 레이디]다. 해서 클라우디아 라는 본명보다는 [비운의 레이디]란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리는 그말 그대로 비운의 레이디였다.
그 소문 때문에 아무도 혼담을 청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렇게 홀로인 딸이 안쓰러웠는지 성주가 두팔 걷어부치고 직접 신랑감을 물색하던 중에 그야말로 딱 찍힌 인물이 데런인것 같았다. 이렇게 점심때만 되면 만찬에 기를 쓰고 초대하려는 것을 보면.
“이렇게 점심마다 초대해주니 고맙기 그지 없지만 맛있는 점심 때문에 그 짝눈아가씨를 마누라로 삼을 생각은 없다고.”
데런에게는 결정적인 순간이 될 때까지는 단호해지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방랑벽때문인지 아니면 그 [비운의 레이디]라는 소문이 부담스러워서인지 성주를 장인으로 불러줄 생각은 없는데 성주는 점심만찬때마다 초청해오고... 거절도 못하고 있는 상태라 난감해하는 데런의 투덜거림에 대꾸하려던 프란은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피식 웃었다.. 저 웃기는 놈들은 뭐야?
성아래 앞마당을 외팔이 몇명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한두명이라면 모를까. 저렇게 외팔이들로만 대여섯명씩 뭉쳐다니면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더구나 차림새들로 봐서는 용병들같은데..
“저런...한쪽 팔들은 허기진 오크입에라도 쳐넣었나보군.”
본인들이 들으면 대단히 실례가 될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지나치려던 프란이 무심코 걸음을 멈추었다. 가만.. 이 비슷한 말을 오래전에 한 기억이...?
-,....쯔쯔,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자기 팔들을 하나씩 잘라서 삶아먹으면 쓰나-
마치 랑데부처럼 그때 숲속에서 줄줄이 묶여가던 우울한 산적놈들의 모습이 프란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분명, 그놈들도 모두가 외팔이였다.
프란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데런이 의아해서 왜그러냐고 묻고있었지만 답을 해줄 여유도 갖지 못한채 프란은 실드!!!!!! 라고 외치며 남들이 보면 뛰어내리는게 무모하다고 할정도로 높은 창밖에서 아래로 곧장 뛰어내리고 있었다.
“이 산적놈들아!!!!!!!!!”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져 내려 하나, 둘 위를 쳐다보기 시작하는 외팔이 사내들에게 뛰어내리며 프란이 소리쳤다. 프란의 눈빛은 더할나위없이 생생한 흥분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찾았다!!! 찾았어!!!!!!!!!!!!!! 이제 찾을 수 있어, 녀석을!!! 아르를!!!!!
그리고 프란이 죄없는, 아니 예전엔 죄를 지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용병일을 해서 밥먹고 사는 외팔이 산적들을 다짜고짜 패대기부터 치고 있는 그 시각 그가 찾는 존재는 이미 다른 곳에 있었다.
“크륵.............케에에!!!!
나를 빙 둘러싸고있던 오크들중 마지막남은 한마리의 목을 단숨에 검으로 쳐내고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싸움은 멈춰있었다. 여기저기에 꽤 많은 숫자의 오크들이 죽은채로 널려있었지만 우리쪽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은듯 했다 숲을 반쯤 넘어서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던 오크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던것에 비하면 싸움도 생각보다 빨리 끝난편이고.. . 하긴..그게 당연하려나..
전쟁터에서야 무조건 싸울 사람이 필요하니까 용병신청을 하면 어느정도의 임금을 제공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추세지만 돈많은 상인이나 귀족들이 호위할 용병들을 고를때는 어중이떠중이 용병들은 걸러내고 실력있는 용병들을 고용했다. 특히 지금 호위하는 마차가 꽤 화려한걸로 봐서 돈 좀 있어보이니 나와 함께 고용된 이십여명의 용병들 모두 난다긴다하는 상급 용병들인듯.
그들이 싸움의 끝 마무리, 아직 살아있는 마물들을 깨끗하게 처치-하는 것을 나는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있었다. 처음엔 이렇게 싸우고 나서의 뒤처리에 동참하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한 용병 몇 명과 시비가 붙기도 했었지만 내검은 적아를 구분하지 못한다, 라는 사실을 알려주고부터는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물론 표현하지 않고 있을뿐 여전히 못마땅한 시선들로 힐긋거린다는거 알고 있지만..
움직이지도 못하고있는데 살아있는걸 죽이는건 하고 싶지 않다고.. 그게 아무리 오크라해도.
변명하듯 속으로 중얼거리고 몸을 돌리자 등뒤에서 용병들과 함께 부상당한 오크들을 처치하던 케드릭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아르, 찾기 힘드니까 멀리가지 말라고!!"
한손에 쥔 거대한 할버드를 빈소매가 펄럭이는 어깨에 척, 걸터놓았을 케드릭의 모습은 돌아보지 않아도 알것 같아서 나는 걸음을 멈추지않은채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일행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아무도 없는 곳까지 들어와서야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굵직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서 오크의 피들로 더러워진 칼날을 닦아내고 있는데 바람이 불어온다. 이마를 가리듯이 덮고있던 검은 머리카락들이 바람결에 나부끼는 것을 손으로 훑어올리며 시선을 들고 멍하게 앞을 바라보는데 서산의 끝쪽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손을 뻗어 탁, 가지를 잡아채고 휙, 뛰어올라 굵은 나뭇가지위에서 바라보자 황혼이 지는 모습이 확실하게 눈에 들어온다. 다시 스산한 바람이 몸을 휩쓸고 지나간다. 지상과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부근이 붉은 물감으로 채색한것처럼 핏빛으로 붉게 번져가고 있었다. 마치 혼란과 전쟁에 휩쓸려 한치 앞도 볼수 없는 오만한 인간세상의 미래를 예고하듯이..
지금 불어오는 것은 한조각의 작은 바람.... 그러나 그 작은 바람이 나를 무너뜨릴것만 같아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호위할 마차의 목적지인 로드리고시 옆에는 레오포드가의 영지인 카레인지방이 있고 카레인시에는 레오포드가의 저택이,레오포드공작님이, 동생인 유테르가, 그리고 새어머니가 있다.
어쩌면 그래서 한발 한발 나아가는게 무거웠던 건지도 몰라. 더 이상 [아르휜 폰 레오포드]라는 이름으로 살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왜 이렇게 흔들리는건지.. [아르휜]이라는 이름따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왜... 그리움은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건지..
그때 크로멜성에서 나와서......그렇게 결심했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나는 눈앞에 네 개의 손가락밖에 없는 손을 들어올렸다. 펠릭스형이 잘라버린 새끼손가락과 함께 빼앗겨버린 아시리안의 반지가 있던 자리는 내 상처만큼이나 흉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아시리안......”
흉한 상처가 남겨진 부분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아시리안..........................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그래도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내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이렇게 기다리다보면 다시 만날거라고 믿으니까. 언젠간 아시리안이 찾아올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마.. .
떨어질듯 떨어지지않던 해가 완전히 지고난후에야 나무에서 내려온 나는 일행들쪽으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년인가..”
어둠속에서 쇼파에 몸을 깊이 파묻은채 형체만을 드러낸 남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빈잔에 술을 따랐다.
쪼르르륵..... 고급스럽게 클래식한 유리잔에 피처럼 붉은 액체가 넘칠만큼 가득 담긴다. 창밖에서 비추어야할 달빛은 구름에 완전히 가려있어 평소의 고풍스러운 서재의 모습은 그 자취를 뽐내지 못한채 탁한 어둠속에 잠겨있었다. 남자의 손이 유리잔을 손에 쥐고 들어올리자 안에 든 핏빛 액체가 흘러 넘칠듯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린다.
곧, 투둑.투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밖을 빗물이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금새 거센 빗줄기로 돌변하더니 하늘이 성을 내는것처럼 우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들린다. 술을 마시던 남자가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자 때맞춰 우르릉하는 천둥소리에 이어진 번개가 번쩍, 내리고 그 빛에 남자의 붉은 머리카락이 비춰졌다.
한번씩 번개가 칠때마다 탁자위에 놓인 술잔과 와인병이외의 서류가 눈에 띄고 남자, 붉은 머리카락의 펠릭스는 어둠속에서 술을 마시며 그 서류를 응시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아르휘온 폰 레오포드는 이년전 크로멜성에서 마물들과 싸우다 사망, 이라고 알려져있다. 진실을 알고 있는것은 크로멜성에 함께 있었던 프리스트 가네샤를 비롯한 몇 명의 신관과 야나카황자... 그리고 에리카. 일생일대 만나기도 힘든 사악한 마족을 사냥했던 기사들은 그 자리에 있었던 아르휜이 정확히 마족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마족에게 조종당한 정도..라고만 알고있을뿐.
이년전의 그때일로 레오포드가와 자신은 야나카황자에게 약점이 잡혔다. 그 일로 해서 책임져야 되는건 그것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눈앞의 서류는 기막힘을 넘어서 펠릭스를 분노하게 했다.
라이에이드가에서 다시 꺼내온 혼담은 어디까지나 조심스럽게 서신으로서 정중하게 청하는 입장을 취하고는 있지만 이 배후에 있는것은 분명 에리카 라이에이드일게 분명했다. 어디까지 나를 자극할 셈인가. 이 계집은. 삼년 전의 일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건가. 에리카를 떠올리자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서 서신과 서류뭉치를 확, 밀어제쳐 바닥에 떨어뜨린 펠릭스의 주먹이 탁자위에서 꽉 쥐어졌다.
펠릭스는 쇼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뒤 거세게 비가 휘몰아치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어디있는거냐. 아르휜.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다면 내앞에서 모습을 보이고 내게 직접 말해. 피해자인척 그렇게 숨어버리면 끝이라고 생각한거냐? 하긴, 너란 녀석에게 책임감을 기대한다는게 무리일지도 모르겠군.”
무표정한 얼굴로 냉막하게 중얼거린 펠릭스는 손에 들고 있는 잔을 입가로 가져가다가 멈칫, 멈추었다. 잔속에서 찰랑거리는 붉은 액체가 피처럼 느껴져서다. 그때 크로멜성의 지하감옥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아르휜의 상처에서 뿜어져나오던 붉은 피처럼 ..
냉막하기만 한 표정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불안하고 위태로운 열기를 품은채 기이하게 일렁거렸다.
숨고싶다면 숨어라. 아르휜, 하지만 나는 너를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널 찾아내면...
거센 빗줄기속에서 한줄기 벼락이 내리는순간 펠릭스는 잔에 담겨있던 독한 액체를 단숨에 마셔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