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돌벽에 걸쳐진 돌벽위에 걸쳐진 횃불이 어지럽게 흔들리는 사이로 에리카가 자신의 식솔인 기사하나만을 앞세운채 걸어내려가고 있었다. 어차피 이런 어둠속에서 지켜보는 눈들이야 없을테고 병졸들에겐 그들이 평생가도 만져보지 못할 거금을 안겨서인지 에리카도 식솔인 기사도 몰래 내려가는것 같지 않은 움직임으로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고 있었다.
마족은 해치웠으니 이제 사태가 진정되면 아르휜을 감옥에서 꺼내줄 계획이겠지만, 천만에, 펠릭스 ... 유감이지만 감옥밖에서건 안에서건 오늘밤 이후로 살아있는 아르휜을 두번다시 만나지 못할거야. 당신.
그 마족이 소멸되서 꽤 가슴아파하고 있을 아르휜에게 딱 어울리는 결과가 뭔지 나 알거든. 멍청하게 아르휜이 고집을 부려 살려낸 그 산적떼들에게 뒤처리를 맡기면 꽤 재밌어질거야. 어디 처참하게 죽어보라지. 죽을때까지 겁탈하겠다고 이를 갈던 놈들이니.. 사내맛을 아는 아르휜에게 가장 적절한 죽음이 아니고 뭐겠어?
에리카는 잔인한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눈을 빛내며 웃었다. 사내들에게 겁탈당해 죽어있을 아르휜을 발견하고 펠릭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무척 궁금해졌다. 당신이 스스로 그 감옥에 아르휜을 보호한답시고 집어넣었으니까.. 결과가 그렇게 되면 가슴은 좀 아프겠네. 안그런가요. 펠릭스?
"흥, 그 계집이 인심한번 후하군. 이런 녀석 죽여주는 댓가로 돈과 자유라..."
재수없게 당하고 크로멜성에 끌려온후로 계속 지하감옥에 있어서 구리빛 피부가 창백해진 남자가 까끌하게 길어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옆에서 망을 보던 사내들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귀족놈들 골치아픈 생각이야 알게뭐냐. 그놈이 무슨 죄를 지어서 들어온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야 시키는대로 해주고 튀면 그뿐이지"
"그 게집년 말은 믿을 만 해? 이거 괜히 사람하나 더 죽여서 죄만 덮어쓰는거 아니냐고"
"아니, 그건 아닌것 같아. 실수없이 해치우고 사라져주라고 하던걸 보면 그 귀족계집도 우리가 여기 남아있으면 껄끄럽겠지"
껄끄럽다고? 이놈을 죽이라고 시킨게 자기인것을 고자질 할까봐서겠지. 하지만 이놈을 죽이고 그것을 시킨게 그 년이라고 하면 누가 믿어나 줄것 같냐. 귀족놈들이 보기에 우리같은 놈들 인생이야 발길에 걷어차일뿐인 개똥신세지. 케드릭은 어둡고 음습한 싸늘한 감옥안에 인형처럼 앉아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놈을 내려다보았다.
케드릭이 사내들과 함께 들이닥쳤을때도 이 재수없는 놈은 아무것도 안들리고 아무것도 안보이는지 넋이 완전히 나간 얼굴로 앉아있기만 했다. 이 비실거리는 귀족놈은 첫인상부터가 무척 재수없었다. 계집처럼 희멀건한 면상에 하는짓도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지 않은가. 팔이 잘린 부분에 힐링포션으로 치료해주고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욕지꺼리를 퍼부어도 완전 개무시를 하더니.. 결국 이꼴이냐. 애송아.
그때...
-시끄럽군. 혀를 잘라버릴까-
곱상한 외모로 장난아니게 살벌한 실력을 갖춘 무시무시한 놈의 말에 저절로 합죽이가 된 자신들을 슬쩍 보며 어린애가 장난치듯 눈이 웃고 있었다.
-아니, 그러지 않는게 좋겠어. 저렇게 떠들기 좋아하는게 말까지 못하게 되면 너무 불쌍하잖아-
귀족놈주제에 선심쓰고, 착한척 아주 꼴값을 떨더니.. 꼴좋다. 개새끼..어쭈? 손가락까지 잘리셨군. ..
“하, 이거야.. 이 피부좀 봐, 역시 좋은것만 먹고 자란 귀족놈이라 그런지 보들보들한데?”
“그,그렇겠지. 우리같은 놈들하고 같겠냐?”
산에 살다보니 계집구경하는것도 어쩌다 한번이다. 그것도 돈만주면 하룻밤에도 서너명씩 상대하는 닳고 닳은 창녀들만 상대해본 사내들에게 빨간머리의 귀족애송이는 욕정의 대상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이런 놈 손도 못잡아볼터.이것이 살아생전 다시 못올 기회라는걸 알고있는데도 사내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은채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손대고는 싶은데 마치 마음속의 양심이란 놈들이 따금거리는것처럼,
어쨌건 졸지에 병신된 울화통으로 죽이네,살리네 하긴 했지만 알고있는거다. 병신이 됐어도 이렇게 살아있는 이유는 이 귀족애송이놈이 도와줬기때문이라는것을.
망할, 양심이라니, 그게 뭔 개놈의 이름이냐. 우리같은 놈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어울리지 않는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케드릭이 먼저 축 늘어진 다리를 확, 잡아챘다. 잡아끄는대로 주르륵, 미끄러지듯 바닥에 쓰러진 놈에게선 처음과 마찬가지로 어떤 반항도, 저항도 없었다. 넋이 나가있는 얼굴과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붉은색 눈동자는 죽어도 상관없다는듯이, 아니 차라리 죽기를 바란다는 듯이 보였다.
케드릭의 머릿속에 이 애송이놈이 시체들의 위협속에서 자신들을 풀어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맘대로 해요. 나를 죽이고 싶은게 당신 몸을 썩은 시체들에게 던져주고 싶을만큼 절실하다면!! 저렇게 걸어다니는 시체의 꼴이 되고 싶다면!! 하나밖에 남지않은 팔로 당신 살길을 개척하는 대신 날 죽여보라고!!!-
케드릭은 몸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치솟는걸 느꼈다. 곱게 죽여주길 바라지? 웃기지마, 곱게 안죽여.
"이새끼.. 끌고가자"
"..뭐? 맛이 한참 간것 같은데 그런 놈을 어디에 쓰게."
"제법 쓸만한 얼굴 하고 있으니 끌고다니다가 귀찮아지면 노예로 팔아치우든가.. 여자 생각날때 박고 흔들던가.. 쓸데가 왜 없어"
“여기서 빠져나가는것도 불안한데 그런 짐덩이까지 끌고간다고?..”
"박고싶어서 안달난 사람처럼 이를 뿌득뿌득 갈더니만, 그냥 여기서 한번 해버리고 죽여버리자. 저놈도 보아하니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것 같은데 죽여주는게 편하게 해주는 길이라니까,“
"시.시끄러워!!! 내가 그런다면 그런거야!!"
케드릭이 낮게 소리를 지르자 불만스런 표정들이긴 했지만 말릴수 없다고 생각해선지 입들을 닫는다. 케드릭은 죽이네 살리네 박네 어쩌네 해도 아무 반응없이 인형처럼 있을뿐인 빨강머리놈을 한쪽팔로 들어 팔이 잘린 어깨위에 훌쩍 엎어올렸다.
마음을, 바깥 세상에서 닫아건채 얼마만큼 시간이 지난건지 알수가 없는채로 무심하게 하루는 가고.. 다시 아침의 태양이 오고.. 다시 저녁이 되고.. 그리고 아침이 온다. 나뭇꾼이 잘라낸건지 나무의 밑둥만 동그랗게 남아있는 부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힘없이 멍하게 앉아있는데 굵직한 남자들의 익숙하고 낯선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하도 마물새끼들이 들끓어서 이제 숲에 숨어지내는건 못해먹겠어.”
“여기저기서 용병들을 구한다고 하던데.. 용병이나 해볼까.”
“아서라, 관둬. 어차피 우리같은 놈들은 맨앞에 세워져서 일찌감치 죽는다는거 몰라? 게다가 용병길드에 속하지 않는 놈들은 잘 받아주지도 않는다고”
“하긴.... 그건 그렇고 케드릭대장, 그 미친놈을 언제까지 달고 다닐거야?"
전직이 산적이었지만 아시리안에게 한쪽 팔들을 사이좋게 잃어 대장이라고 불러도 거의 친구나 동지처럼 구는 저 사내들은 무슨 소리를 들어도 반응하지 않는 나를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하는듯 했다. 그저 고장난 인형처럼 아무말없이 그들을 따라 걷고.. 그들이 앉으면 앉고.. 자라고 하면 자고.. 먹으라고 하면 먹고... 나를 왜 데리고 가는지, 어디로 끌고 가는지.. 자폐증에 걸린 아이처럼 아무것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어쩌면 정말 미친건지도 모른다.
"노예로 팔면 돈이 꽤 될것같은데.. 노예로 팔아버리지도 않고, 아직 손대지도 않았지? 설마 그 애송이에게 반한거냐.“
“소문난 난봉꾼 케드릭대장이 어쩌다가,, 흐흐흐흐..몸파는 계집년들이 환장하는 거대한 물건이 아깝군. 아까워"
"시,시끄러워. 내가 끌고왔으니 이녀석은 내꺼야. 내껄 내맘대로 하겠다는데 왠 시비들이야. 넘보지마!!"
하지만 그들이 무슨 말을 나누는지 못듣고 있는게 아니었다. 말을 하지 않을뿐.. 표정을 얼굴에 드러낼수가 없을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보고있는지 인지는 하고 있었다.
"그러고 싶은데.. 그녀석만 보면 소름끼치는 그새끼가 생각나니까 그렇지..!!!"
"익, 재수없게 그놈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혀를 잘라버릴까, 라는 음침한 목소리를 떠올리는듯 케드릭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래, 그랬었다. 아시리안과 함께 숲을 건너던 기억들이 떠오르고 마음속 깊숙이 가라앉아 잔잔한 수면에 작은 돌맹이가 던져져서 생긴 파문이 빙글빙글 원을 그린다. 머릿속을 끊임없이 떠도는건 잊을 수 없는 이름... .....아시리안..........아시리안........아시리안.......아시라안....
"저거.. 또 우는데?"
"내버려둬, 울만큼 울면 언젠간 정신 차리겠지"
퉁명스럽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고 달그락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한참 더 들리더니 내앞에 덥썩 뭔가가 담긴 그릇이 던져졌다.
"울지만 말고 쳐먹어라. 이 애송이놈아"
이 사람을 이해할수가 없었다. 나는 감옥에서 나를 죽이는대신 도망칠 기회를 받은 이들이 나누는 대화역시 모두 듣고 있었다. 정신이 나간 놈이니 죽이고 그냥 가자는 말에 부득불 짐이 될게 분명한 나를 끌고온 케드릭은 잘린 손가락의 상처도 봐주고 크로멜성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도망와서 처음 식사를 하던 순간부터 내가 먹을것을 손수 챙겨주고 있었다.
온갖 음담패설과 험악한 욕설과 저질스런 말을 수시로 해대던 사람이라 정말 옷을 벗기고 달려들면 어쩌지.. 라고 생각했지만 야영을 할때는 내 잠자리를 봐주고 자기옆에서 자게할 뿐이었다. 함께 가는 일행들중의 사내가 내엉덩이라도 슬쩍 건들라치면 득달같이 뭐하는 짓이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그 과정이 몇번 반복되다보니 내게 손대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일행들중에 아무도 없었다.
"야, 이리와"
케드릭이란 사람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끝에 새끼야가 붙는 말이거나 거의 욕설이었기때문에 앉아있던 내가 몸을 일으키는 것과 주변에 앉아있던 다른 사람들이 이것저것 말하는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게 뭐야? 대장, 왠 꽃들을.. 풋.. 그..그 미친놈에게 꽃장식이라도 해주게?"
"크크크.. 아이고, 배아파라.. 대장, 취미가 언제부터 그렇게 고상해졌냐? 그 미친놈을 애지중지 하더니 반하기라도 한거야?"
사내들의 야유에 한팔밖에 없는 한쪽손에 남색빛이 도는 검은 꽃가지를 한웅큼 쥐고 있던 케드릭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시끄러워!!! 이건 물들이는데 쓸거라고, 이 무식한 놈들아. 저 튀는 빨강머리놈을 끌고 랭포셔시까지 데려갈수는 없잖아, 행여라도 이놈을 알아보는 놈들 있으면 귀찮아진다고"
그러게 버리고 가라는둥, 속편하게 노예상인에게 넘기라는둥 다시 시작된 사내들이 야유를 들으면서도 케드릭은 손아귀에 있던 검은 꽃가지들을 그릇에 담아 굵직한 나무로 꿋꿋하게 빻고 있었다.
"야, 이 애송이귀족놈아. 이게 뭔줄 아냐? 이건 다크힐데라는 꽃이지. 나이든 창녀들이 흰머리를 감추려고 주로 사용한다 이거야. 검은 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걸 머리에 바르기만 하면 끝이라 다시 새 머리가 나기 전까진 지워지지도 않고 말이지. 흥,... 돈많은 귀족놈들이야 좋은 염색제로 머리를 염색하겠지만 “
다크힐데.. 꽃의 생김새가 이름과 퍽 잘어울린다.
“야, 이새끼야. 멍청하게 보지 말고 이쪽으로 대가리나 숙여!!"
시키는대로 머리를 숙이자 붉게 흩어진 긴 머리에 검은 꽃에서 흘러나온 물을 들이붓고 샴푸질 하듯이 북북 부빈다. 하나밖에 없는 억센 손아귀로 머리를 감겨주듯 그렇게 문지르고 케드릭이 벌떡 일어섰다.
"따라와, 이 미친놈아"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로 주춤 일어서서 따라가자 그가 데리고 온곳은 숲의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는 물줄기가 있는 곳이었다. 계곡처럼도 보이지만 계곡이라고 부르기엔 좀 초라한 냇가 정도랄까.
"뭐하냐? 씻어, 한쪽 팔밖에 없는 병신인 내가 이 한쪽팔로 네놈 몸뚱이까지 씻겨주랴?"
버럭 내지르는 말에 주춤주춤 물가로 다가가서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푸욱, 물속에 담고 조금 흔들었다.
"..재수없는 새끼, 한쪽 팔이 잘려서 병신된건 나인데 겨우 손가락 하나 잘린 지놈이 병신짓은 혼자 다하지..그게 다 배부르게 커서 고생을 안해봐서 그래. 배고픈게 뭔지도 모르고 오냐오냐 곱게곱게 자랐으니 겨우 손가락 하나 잘렸다고 그렇게 미친놈 행세나 하는거지"
기가막힌듯 혼잣말처럼 주절거리는 말에 멈칫, 행동을 멈추고 돌아보자 케드릭은 냇가의 잔디에 아예 벌렁 드러누운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넋두리하듯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나는 귀족놈들은 모조리 다 재수없다. 귀족이 지나가는 길에서 인사를 안했다고 아버지는 개처럼 얻어맞아 죽었고 여동생은 귀족놈집에서 하녀로 일하다가 겁탈당했지. 캬악-퉤..드런 새끼들.. 너보다도 어린 나이였는데.. 우리같은 놈들 벌레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귀족놈들은 전부 죽여버리고 싶었는데..제기랄.. .이 케드릭도 죽을때가 다되었나? 병신꼴되서 내앞길도 깜깜한판에...내가 왜 너같은 놈을 데리고 이따위짓거리나 하고 있는지 나도 정말 모르겠다. 나도 정말 모르겠다고, "
케드릭의 신세한탄, 혹은 넋두리를 한쪽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물속에 비친 내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붉은 눈동자인건 맞지만 머리카락은 이제 붉은 머리카락이 아니다. 짙은 남색빛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과 함께 어색한 표정을 짓고있는 얼굴이 아른아른한 물결속에 비추이고 있었다.
그저 머리색깔만 바꿨을뿐인데도 하은준도 아니고 아르휜의 모습도 아니고 다른사람이 된것처럼도 보이는것이 이상하기만 하다. 그러나 등허리까지 길게 닿는 머리카락은 [귀족]으로서의 아르휜을 벗어던질수 없다고 말하는듯 했다. 확실히 여자들은 평민이나 귀족이나 머리스타일을 길게 하지만 남자들은 경우가 틀리다. 대부분 머리카락을 길게해서 머릿결까지 관리하는 귀족들과 달리 평민남자들은 대부분 간편하게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녔으니까.
"뭐..우리야 지은죄가 있어서라곤 하지만.. ... 너, 귀족들중에서 꽤 높은 귀족놈이지? 그런데 어쩌다가 감옥에 갇혀서 손가락까지 잘렸냐? ..흥, 하긴, 귀족놈이면 귀족놈답게 굴것이지 멍청한 짓만 골라하니까 그 꼴되지... 이름이 아르휜인가 뭔가 하는것 같더만.. 뭐.. 미친놈이니 이름따위 불러봤자 소용도 없지. 내 주둥이에 풀칠하기도 바쁜 마당에.. 저 미친 또라이놈에게 책임감 따위나 느끼다니,, ..내가 미친놈이지. 내가 미친놈이.............어?"
내가 허리춤에 꽂힌 단검을 빼들었을때도 전직이 흉악한 산적인 외팔이 케드릭은 여전히 따스한 햇살아래 벌렁 드러누운채 푸념과 신세한탄을 투덜거리며 늘어놓고 있었다. 뒤늦게 내가 단검을 빼들었다는걸 눈치챘는지 벌떡 일어선 케드릭이 놀라서 다급하게 소리치는 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이 미친새끼야!!!!!!!!!!!“
케드릭의 시점에서 정신이 나가도 한참 정신나간 미친놈인 내가 검을 빼들고 있으니까 자해라도 하려는건가, 라고 생각한건지도 모른다. 햇볕을 받아 날카로운 검날이 반짝거리고 케드릭의 목소리가 돼지멱따는것처럼 커졌다.
“저 미친놈잇!!!!!너 지금 뭐하는 거야!!!!”
케드릭이 뒤쪽에서 잔디를 짓이기며 내게 다가서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나는 거추장스럽게 길기만 한 머리카락을 한손에 쥐고 서걱- 잘라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내스스로 닫아두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아르,에요....내이름........"
머리카락을 자르기 위해 빼들었던 단검을 다시 허리춤에 꽂으며 한결 가벼워진 머리를 돌려 케드릭쪽으로 반쯤 돌아서자 방금전까지 미친놈이었던 내가 멀쩡하게 말을 꺼낸게 갑작스러웠는지 케드릭은 내쪽으로 손가락질을 한 채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뻐끔만 하고있을뿐이었다.
".....야....너.....너...지금...마..말을.............너..........."
침을 꿀꺽 삼키는 케드릭에게 나는 오랫동안 말하는 법을 잊고있어서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내이름, 아르..라고요. 케드릭"
그러니 더 이상 [야]라던가 [이새끼]라던가 [미친놈아]라는 것들로는 그만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에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갈것처럼 놀라고있는 케드릭에게 더 이상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냥 참기로 한 채 나는 아직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짧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털었다.
젖은 머리위에서 황금빛 햇볕이 반짝이고 얼굴에 한가닥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이 뺨을 쓸어내린다. 얼굴에 묻은 젖은 물기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그때까지도 믿기 힘들다는 듯 버벅거림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케드릭에게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용병...이란거..”
그 뒤의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아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안하는 사이 혀가 굳어버렸는지 머릿속에서 생각한 말을 언어로 꺼내는게 쉽지 않다. 그러나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은 단어만으로도 장문의 문장과 물음표까지 완성했는지 케드릭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보며 되려 되물었다.
“..너.....용병...이 되고 싶은 거냐?..”
지금까지 몰랐던 케드릭의 눈치빠른 언어구사력에 고마워하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용병이라면 자유용병보다는 길드를 통해서 용병으로 들어가는게 더 좋아. 전쟁터에서야 똑같이 화살받이 처지겠지만 그래도 길드를 통하면 형편이 좀 더 낫다고 하던걸,”
“그런데 저 미친노..아니, 아르..란 놈에게 용병을 시키느니 차라리 노예로 팔라고. 케드릭대장, 저 비리비리한 미친 새..아니 그 아르....에게도 피튀기는 전쟁보다야 돈많은 귀족영감밑에서 잠깐 엉덩이나 대주고 배부르게 먹는게 훨씬 좋은 일이잖아?”
“전쟁터에 나가는 순간 아마 바로 죽을텐데..오크에게 뜯어먹히기엔 생긴것도 아깝고 말이지.”
아무래도 다들 내 보호자임을 자청하던 케드릭이 나를 용병으로 만들어 살벌한 전쟁터로 등떠미는게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들이었다. 물론 저들의 머릿속에 나란 녀석은 처음 숲에서 만났을때도 언데드들과 싸울때도 장식품처럼 검을 차고있을뿐 싸울생각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어대던 한심한 모습만이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내자신이 이제는 더 잘알고 있었다. 내가 더 이상 [면도칼밖에 쥐어본적 없던 하은준]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아르휜의 몸이 누구를 만나도 쉽게 지지 않을 만큼의 뛰어난 검사, 라는 것을..
“내가..원해..요. 용병.”
들볶이는 케드릭이 가엾다거나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내 의사표현을 분명히 해두려고 입을 열자 다들 말들을 멈추고 움찔- 하는 표정들이다. 아직도 내가 멀쩡하게 정신이 돌아왔다..라고 믿지 못하는 불편한 표정들이긴 했지만 어쩌면 저렇게들 나랑 눈도 못마주치고 어색해하는 것은 완전 돌은 놈인줄 알고 지금까지 미친놈취급하며 나를 상대로 음담패설을 늘어놓던게 껄끄러워서는 아닌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거라면 난 상관없는데....왜들 저런다지...
나를 싫어한다거나 배척한다거나 라는 느낌이 아니라 재수없는 귀족놈이었다가 정신이 돌아버린 미친놈이었다가 이제 정상인으로 돌아온 나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 난처해하는것 같은 그런 분위기랄까..그래서인지 평소때는 함께 걸어가면서도 늘상 걸걸한 목소리로 지저분한 욕들을 주고받고 시끄럽게 굴었었는데 지금은 얌전한 새색시마냥 입들을 다물고 걷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천천히 생각해보면 겉돌기만 했던 내정신이 아르휜의 몸에 동화되기 시작한건 크로멜성에 가기 직전 언데드마법이 걸린 헬라이드시에서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다가 깨면서부터였던것 같았다. 그때부터 퍼즐의 한조각 한조각이 맞춰지는 것처럼 아르휜의 기억이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니까.. 그이후 강제로 쑤셔넣는 것처럼 한꺼번에 들어온 수십조각들의 기억이 마구마구 뒤엉켜버려서 내 머릿속에 [아르]가 되기전의 기억들은 하은준이었을때의 기억들과 아르휜의 기억들이 뒤섞여서 혼란 그 자체였다.
마치 꿈을 꾼것 같다. 밤새도록 꾸고난후 아침이 되면 드문드문 생각날 뿐인 지루하고 긴 꿈을... 혹은, 지금이 꿈속인걸까.....그럼..꿈을 꾸고 있는건 누구.......[하은준]?..아니면 [아르휜]?..
복잡한 생각에 잠긴채 걷고 있는데 옆에 주저하듯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아르..라고 했던..가아?”
시선을 들자 사내들중에 한명이 어느새 내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걷고 있었다.
“...으..응..”
저런...나보다 나이도 한참 많아 보이는 사람인데 이럴때는..예..라고 대답했어야지, 라고 나를 꾸짖고 있는데 옆에 선 남자는 그다지 기분나쁜 기색도 없이 오히려 한참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기..케드릭에게 듣자하니.. 그동안 우리가 하는 얘기들을 다 듣고 있었다고...그게 참.. 우리는 다 네가.. 헤까닥 돌아버린 놈인줄 알고 ..”
대답을 기다리는듯 보이는 남자를 향해 내가 대답한건 한참까진 아니더라도 조금 시간이 흐른후였다.
“...상관..없어..요. 나는.”
대답은 정해져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장문을 구사할수 없는건 오래 사용하지 않은 혀가 굳어서라기보다는 기억이 뒤엉키면서 언어체계도 혼란스러워졌다고 하는게 맞는것 같았다.
“그.그래? 아...하하.. 뭐, 사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하하하하하. 안그래? 다들?”
우리가 하는 얘기를 예의주시하던 여러개의 눈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사내가 말하자 그때까지의 어색함은 거짓말인 것처럼 다들 한꺼번에 왁자하게 웃어제꼈다.
“아..하하하..그,그럼, 당연히 그렇고 말고.”
“하하하.그렇게 안봤는데, 화끈하니, 좋네.”
그렇게 웃고 떠드는 남자들의 분위기에 동참하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는 케드릭의 뒷모습에 시선이 멎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냇가에서 말을 한 이후 케드릭은 묘하게 나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뻔뻔스러울만큼 당당하게 내 보호자임을 자청하며 터프하게 굴때는 언제고.. 뭐랄까. 갑자기 소심해져서 말을 걸때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뻣뻣한 태도에 눈도 제대로 안마주친다. 나는 내쪽으로는 뒤도 안돌아보고 걸어가는 케드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왼쪽뺨을 손가락으로 긁적거렸다. 설마..창피한걸까?..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는 녹색의 잎사귀들이 츠츠츠..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검게 변해버린 내머리카락도 이리저리 나부꼈다. 나는 시선을 케드릭의 앞쪽에 두었다. 푸른 잎사귀들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쪽, 아니.. 더 먼곳을 응시하듯이.
레오포드공작님의 차가운 얼굴, 유테르.. 알프레드.. 펠릭스, 프란, 에리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아시리안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처음에 노예로 팔렸다가 눈을 뜬 여관에서 아시리안이라고 이름을 불러주자 가만히 눈을 감던 아시리안의 등뒤에서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춤추던 검은 머리카락.. 호숫가에서 나를 놀리고 정말 즐거운듯이 웃었던 모습.. 내가 정신을 잃은후 사라졌다가 크로멜성의 어두운 복도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던 아시리안..우는 얼굴에 해주던 아시리안의 키스.......내이름을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
- 아르-
응......그래...그래. 아시리안.
지금의 나는 [아르] 다.. 하은준으로 돌아갈수도 없겠지만 이제 아르휜으로 살지 않겠어.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르휘온 폰 레오포드]라는 이름에 얽매여있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