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오포드가의 귀공자-8화 (8/36)

8.

그게 뭐야. 생각하는게 얼굴에 다 드러난다고? 이마에 내 생각이 써있기라도 한단 말인지..쳇. 성격꼬인 의뭉스런 변태 아시리안과 함께 호숫가에서 일행쪽으로 다가왔을때 에리카가 있는 마차쪽에서 어라? 저목소리는?? 싶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참 다행입니다. 아르휜하고 길이 엇갈린것 같아 고생 좀 하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하하하. 이 멍청한 아르녀석, 친구가 헤매는 사이에 여기 자빠져있기나 하다니.. "

자빠져있다고? 무슨 그런 심한소리를!! 난 두발로 서있다. 이렇게 당당히.

"프란시스님이 그렇게 걱정해줄만한 가치있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르휜 폰 레오포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기는 있답니다. 프란시스님"

걱정해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라.. 묘한 곳에서 우리가 일치점을 찾은듯 싶네요. 에리카. 나역시 그게 궁금하거든요. 설마 프란이 나를 찾아다닐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지라 프란에게 상당히 미안해졌다.

"아름다운 레이디. 사람의 가치는 객관적인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르휜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글쎄요. 저도 프란시스님을 도와주고는 싶지만 아르휜이 워낙 제멋대로인 사람이라 지금쯤 크로멜성으로 가는게 싫어져서 다른곳으로 갔을지도 모르겠군요."

프란의 뒷모습을 보는 나와 프란과 마주보고있는 에리카의 시선이 부딪치고 [아름다운 레이디]의 눈썹이 보기싫게 팍 찌그러졌다. 그리고 에리카의 시선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프란이 천천히 내쪽으로 돌아섰다.

"프란, 나 여기있는데?"

돌아보는 프란에게 한손을 살짝 들어서 흔들어주자 프란의 눈이 한순간에 커지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반가.........앗!!!"

반갑다고 말하려는 나를 덥썩 품에 안은 프란이 체구도 비슷한 나를 으하하하, 찾았다.라고 소리치며 번쩍 들어올렸다. 그렇게 감격할만큼 고생이 막심했었나.. 어떻게 찾을 생각은 한거지?

"걱정했어, 이자식아. 걱정했다고, 아르, 이 멍청한 자식아!!"

웃음을 뚝 멈추고 마구 화를 내는 통에 바짝 쫄아서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어...........으..응...미안.."

납치당한게 내잘못은 아니지만.. 왠지 상대가 저런 반응이면 내가 뭘 잘못했나보다..라고 달래줄수밖에 없다. 그제야 나를 품에서 놓아준 프란시스가 내얼굴을 노골적으로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왜...왜?"

마치 니가 새벽에 내우유를 몰래 집어갔지? 조사하면 다나와. 라고 범인취조하듯이 살펴보는 시선이라 움찔 뒤로 물러나며 묻자 프란이 빙긋이 웃었다.

"그냥.. 내가 아는 귀여운 아르가 맞구나 싶어서. 싸가지없는 아르휜의 기억을 찾았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저기.. 뭔가 말에 어패가 있다고 생각안해? 너의 절친한 친구쪽은 내가 아니라 그 아르휜쪽이거든? 정말 정상적인 유령의 머리로는 비정상적으로 독특한 정신세계의 프란을 따라갈수가 없다. 고개를 잘잘 흔들자 프란이 싱글벙글 웃고있는 모습 그대로 내게 시선을 고정한채 말했다.

"그런데.. 아르. 너 못보던 사이에 애인생겼냐?"

애인?

"저쪽에서 끝내주는 미모의 아름다운 남자가 나를 찜통에 삶아서 저녁거리고 삼고싶은 마녀같은 얼굴로 노려보고 있는데.. 누구?"

아차...아..아시리안............................을 잊고 있었구나.

성을 공격하는 오크들의 전에 한차례 휩쓸고 갔는지 더러운 오크의 털냄새와 썩어가는 인간의 피냄새가 희미하게 섞여있는 눅눅한 공기를 맡으며 한존재가 어딘가를 향해 서있었다. 흉가로 변해버린 집들이 커다란 길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기 전에는 꽤 평화로왔을 법한 마을이지만 지금은 개미새끼한마리 얼씬거리지않는 페허속에 크게 치켜뜬 초록색의 동공이 아득한 먼곳을 바라보며 인간으로선 볼수 없는 것들을 눈에 담아냈다. 특이하게 녹색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사내의 벌거벗은 전신을 감추고 있는것은 하늘하늘거리는 녹색의 끈들이 칡넝쿨처럼 휘어감겨 있을뿐이다.

그는 커다란 숲을 내려오는 한무리의 일행들을 보고 있었다. 아니, 일행들중 검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를 바라보다가 그가 시선으로 집요하게 쫒고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인간쪽으로 함께 시선을 옮기며 활짝 열려있던 초록의 동공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감히.....인간주제에, 버러지만도 못한 하찮은 인간주제에!!!!!!"

속에서 터져나오는 분노의 일갈과 함께 힘을 숨겼음에도 뭔가 이상한 기척을 느낀듯 예리하게 시선을 돌리는 검푸른 머리카락의 존재와 눈이 마주치기전 그, 나엘은 서둘러 눈을 감아 공간의 장막을 차단했다.

입술을 터질듯이 힘껏 깨물고 있기를 한참 녹색 머리카락들을 츠츠츠..허공으로 치솟아올리며 양팔을 벌리는 나엘의 전신에서 녹빛의 어둔 오오라가 퍼졌다. 어두운 녹색빛의 안개가 눅눅한 땅아래로, 흉가로 변한 마을로 속속들이 가라앉는 와중에 초록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주제도 모르는 인간아, 여기를 너의 무덤으로 삼아라!!!"

하마터면 아시리안에 의해 튀김통에 튀겨져 저녁반찬메뉴로 올려질뻔한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긴 프란에게서 내가 사라진후의 정황을 간단히 들었다. 역시 펠릭스형님은 그럴줄 알았어, 라고 고개를 끄덕끄덕거리자 프란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서운해?"

"응? 뭐가?"

내가 서운해야할 일이 있던가? 를 유심히 생각하는 얼굴로 묻자 프란이 피식, 웃었다.

"됐다. 아닌것 같네. 형에게 버림받았다고 징징거리면 이 넓은 가슴으로 안아주려 했건만"

약올리듯이 말하던 프란의 말에서 안아준다는 말이 누.구.때문에 신경쓰여 나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않은 아시리안앞에서 꽤 대담하구나. 프란.. 저녁거리가 아니면 아침거리로 식탁위에 오를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그러나 아무리 무신경에 배짱좋고 막나가는 프란이라 할지라도 싸늘하게 노려보는 심상치않은 눈초리를 완전히 무시해버릴수는 없는지 슬쩍 아시리안을 보는걸 보고 나는 속으로 웃었다. 펠릭스형님앞에서도 얄밉게 할말 다해가며 슬슬 약올렸으면서 .. 그래도 조금 눈치란건 있구나. 프란.. ..

[저인간, 신경에 거슬린다]

전음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짜증으로 낮게 가라앉아있다.

[말하는게 좀 괴상하긴 해도 나쁜 녀석은 아니야. 아르휜과 친구라고..]

[호오,그래? 그러고보니 아르란 이름으로 먼저 불러댄것도 저 인간이었지?]

그렇긴 하지.. 아르휜이라고 부르면 내가 정말 아르휜이 된것 같아서 아르라고 불러달라고 한거구만.... 그게 왜 짜증낼 일이람?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움찔움찔거리더니 저인간에게는 덥썩덥썩 잘도 안기더군?]

엥? 음..그,그거야 그렇게 갑자기 안아버릴줄은 몰랐......그런데 정말 이러기야? 아까부터 들들 볶아대고.. 나한테만 들리게 전음으로 말하는게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옆에서 걸어가면서 프란과 좀만 얘기해도 눈치란 눈치는 다주고 노려보는 시선이 장난아니다.

[친구끼리 반가워서 한번 안은건데 뭐가 어때서!!]

한번씩 안길때마다 아나이스일지도 모를 소중한 아르휜의 몸이 닳기라도 하냐. 쳇. 쪼잔해. 아시리안.

[한번 안았을뿐이라고? 나한테 안겼을때 겁탈당하는 숫처녀처럼 굴었던건 잊었나 보지?]

[내...내..내가 언제!!]

[입만 산 멍청이가 말은 왜 더듬는지 궁금한데?]

정말이지..다른 마족들은 만나본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마족은 원래 이런가...피곤할정도로 엄청 예민하고 눈치도 귀신같이 빠르고.. 좀 피하려는듯 보이니까 마구 못살게 굴만큼 성격도 못됐고.. 따지는 것도 엄청 잘 따지고...쪼.잔.해.너, 엄청 쪼잔하다고, 아시리안!!

나를 사이에 두고 왼쪽은 아시리안, 오른쪽은 프란.. 이렇게 걷고 있었기때문에 나는 아시리안을 수상하다는 듯 보는 프란을 불안하게 슬쩍 올려보았다.설마 저렇게 자주 힐끔거리는건 마족이라는걸 눈치채서는 아니겠지?

"그러고보니 몸은 좀 괜찮아졌냐. 아르?"

"어..엉?..아.............으..응....괘..괜찮아."

이 대답.. 뭐냐. 하은준.. 이 맹추, 똘빡!! 난 수상한 녀석이니 마구 의심해주세요, 라고 등뒤에 써붙이지? 내가 자학하고 있는사이 어색한 내대답을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는지 프란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우울한 이것들은 다 뭐냐?"

우울한 이것들.. 이라고 지칭하며 옆에서 굴비묶듯이 묶여 끌려가는 산적떼를 힐끗 바라본다. 우울한 이것들이라고 지칭된 산적떼들의 노려보는 시선들엔 아랑곳없이 태연히 귀를 긁적거리는 프란을 나는 새삼 감탄어린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어쩜 저리 얄밉게 말하는지..그것도 다 타고난 능력이다. 능력.

"보아하니 산적들같은데.. 쯔쯔,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자기 팔, 다리들을 하나씩 잘라서 삶아먹으면 쓰나"

컥!! 무신경한 프란의 얄미운 말에 퀭한 산적들의 시선이 내쪽으로 쏠렸다. 모두 너때문이잖아!! 이런 원망의 시선들이다. 박자를 맞추듯 이를 빠드득 가는 소리도 들리고..  나는 한숨을 커다랗게 내쉬었다.

아르휜.. 벽지를 많이 준비해둬요. 벽에 *칠 할때까지 아주아주 오래 살것 같아. 나때문에 지금도 실컷 욕얻어먹고 있는 중이거든요.

숲을 내려와서 아무것도 없는 한적한 벌판을 따라 한참 걸어가자 멀리서 마을이 보였다. 점심때 휴식을 취하고 다섯시간정도를 족히 걸어야했으니까 어느정도 다들 지쳐있던터라 마을이 보이는건 꽤 반가운 일이었다.

“여기 헬라이드시만 지나면 크로멜성도 금방이야.”

“아..응.”

땀방울을 털어내며 프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차가운 붉은색 눈동자의 누군가를 떠올리고 마음이 어두워졌다. 크로멜성에 가면 펠릭스형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렵다. 게다가 나.. 아직 검도 제대로 휘두를수도 없고, 아르휜으로 돌아가지도 못했고.. 이래저래 방해꾼이 되는건 아닐까.

스산한 바람한점이 땅바닥의 메마른 흙을 걷어올리는데도 우울하게 생각에 잠겨 있느라 약간 멍해있는데 흙먼지가 갑자기 세게 휘몰아쳤다.

“읏.”

눈은 얼른 감았지만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게 늦어서 먼지가 입속이나 코속으로 들어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다시 떳을때 나는 조금 놀랐다. 언제 내앞을 가로막은건지 아시리안이 분명 바보같은 표정으로 바라보고있을게 뻔한 내얼굴을 보고있었기 때문이다. 멍하게 보고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채 아시리안의 손이 내뺨을 스치듯 손등으로 슬쩍 쓰다듬었다.

아........무.....무슨.......

“.........고..고마워..”

그제야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허둥지둥 말을 꺼내고 아시리안에게서 몸을 피하듯 앞서 걸어갔다. 누가 보지 않았을까. 아니.. 그런걸 왜 걱정하는거지? 키.. 키스같은것도 아니고... 그냥 뺨에 잠깐 손만 댄거잖아.. 그냥 그것뿐이잖아..

그런데도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린다. 열이 올라오는 얼굴이 쑥쓰러워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며 나도 모르게 프란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의외로 눈치빠른 프란이 이런 내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해서였지만 프란은 여유자작한 걸음으로 앞을 보고 걷고 있을뿐이다.

.. 내가 원래 이렇게 창피한 녀석이었나?.. 조금전 아시리안이 흙먼지를 내앞에서 막아서주고 손을 뻗었을때.. 그순간 머릿속에서 떠올랐던건 화가난 아시리안이 나무둥치로 나를 밀치고 강제로 가둔채 퍼부어대다피시티한 열렬했던 키스..호숫가에서 무례할정도로 마구 만져대던 아시리안의 손길..

이게뭐야.. 아시리안이 뭘 한것도 아닌데 지레 겁먹어서는..  정말이지.. 창피해서 아시리안쪽은 쳐다볼 엄두도 못내겠다. 다행히 아시리안도 나를 비웃거나 놀리거나 하지않고 내옆에서 걷고있을뿐 말을 걸지 않았다.

내내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프란도 전음인지 뭔지로 나를 마구 갈궈대던 아시리안도 웬일로 조용해서 한참을 말없이 걷고만 있는데 마을의 입구쯤에 다다를즈음 갑자기 숨막힐만큼 메퀘한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이..이게 도대체..”

뭔가가 지독하게 썩는것같은 역한 냄새에 나도모르게 손을 입으로 막았다. ..뭐지? 집들이 있는걸로 봐서는 마을이 분명한데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저기 지어진 이삼층짜리 건물들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폐가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넓은 도로엔 개미새끼한마리 지나다니지않고 기분나쁠만큼 고요한 침묵이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그 침묵의 고요를 깨뜨리는건 일행이 걷는 발자국 소리뿐이었다.

“설마.. 몬스터가 여기까지 침입했던 걸까”

“그럴수도 있지.. 크로멜성하고 가까우니.. 시체들은 아마 처리했을수도 있고말이지..”

“그런데.. 분위기가 너무 이상한걸..”

기사들이 수군수군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역시 이 불길한 기운에 잠식당한것처럼 숨을 크게 쉴수조차 없었다. 기분나쁜 메퀘한 냄새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것같은 마을로 점점 걸어가면서 점점 짙어졌다. 을씨년스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메마른 흙먼지만 이리저리 흩날리는 흉가들사이를 걷자니 등이 저절로 오싹해져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프란이 긴장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기분나쁜데, 이상해. 정령들의 움직임도 없어. 도시전체가 살아있는 모든 것이 죽어있는 느낌이야”

프란의 중얼거림때문이었는지 아시리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썩은 고기들이 일어서는군"

썩은 고기가 뭘 어쩐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고개를 갸웃하는 내옆에서 프란이 흠칫, 놀란 얼굴로 아시리안을 보며 소리쳤다.

"언데드!!! 설마 언데드를 말하는...........?!!"

프란이 채 말을 묻기도 전에 불타고 부서진지 꽤 오래된것 같은 페허에서 무언가가 바스락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닫혀진 문을 끼익- 열고 터벅터벅 걸어나오는 발자국소리와 함께 사람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뭐..뭐지...? 사...사람? 아니.. 사람이 아냐.......다들..죽었어..!!. 죽은 시체가 걸어오고 있는거야...........!!!!!!!!!!!!

한집에서가 아니라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썩기 시작한 시체나 이미 부패한지 오래된 시체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광경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더구나 메마른 흙더미속에서 불쑥 솟아나온 깡마른 손아귀에 용병들에게선지 산적들에게선지 동요섞인 비명이 터졌다.

"뭐..뭐야.........으..으아악.......!!! 저건....시..시체다!!! 시체가,시체가 걸어오고 있어!!!!!!!!!!!"

"말도 안돼!!! 어떻게 죽은 시체들이!!!!"

이렇게 많은 시체들이 이 마을 어디에 그렇게 많이 숨어있었던건지 꾸물꾸물 기어나오고 흙더미속을 파헤지고 기어나온 시체들까지 합쳐져 겹겹히 일행을 에워쌌다. 그 시체들의 흉측하고 끔찍한 모습에 나도모르게 덜덜 몸을 떨며 움찔 뒤로 물러섰다.

벌레가 파먹다가 말았는지 머리가 반쯤 함몰댄체 썩어있는 시체도 있고 눈알이 빠진 눈구덩이에서 구더기들이 기어나오는 시체도 있고 죽을때 배가 찢겼는지 튀어나온 창자가 배아래에 그대로 말라붙어 걸어올때마다 너덜거리는 그 끔찍함에 헉, 입을 손으로 막았다.

"젠장,누가 이런 사악한 마법을!!!!"

마법? 마법이라고? 죽은 시체들을 가지고 이따위 장난이나 쳐대는게 무슨 마법이야. 잔인해....너무해...........절대로, 절대로 용서할수 없어. 이런건...

불타고 부서진 페허에서 꾸물거리고 기어나온 시체들이 당황한 일행을 빙둘러 에워싸고 있었기때문에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려서 산적떼들을 묶고있는 줄을 끊기 시작했다.

"이..이봐!! 지금 뭐하는 거야!!!"

그게 산적들중의 누구였는지 용병들이었는지 기사들중의 목소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젠장, 알게 뭐람. 이렇게 묶여있다가는 성한 팔다리도 모두 죽은 시체에게 잡아먹힐걸.  도대체 왜, 어째서 죽은 시체들을 가지고.. 말도 안돼... 시야가 흐려서 줄을 푸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귀찮게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들을 털어내며 줄을 단도로 잘라내던 나와 내게 끊임없이 욕을 퍼부어대던 산적대장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부딪쳤다.

"무...뭐......뭐냐. 네놈은!!! 푸..풀어주다간 후회할걸? 한팔로도 네까짓놈의 목쯤은 얼마든지 분지를수 있다고!!"

시체들이 떼로 덤벼오는데도 저따위 말이나 해대는 한심한 산적대장의 줄을 잘라내며 나는 소리쳤다.

"맘대로 해요. 나를 죽이고 싶은게 당신 몸을 썩은 시체들에게 던져주고 싶을만큼 절실하다면!! 저렇게 걸어다니는 시체의 꼴이 되고 싶다면!! 하나밖에 남지않은 팔로 당신 살길을 개척하는 대신 날 죽여보라고!!! 이 한심한 아저씨야!!!"

버럭, 소리를 지르자 산적대장이 움찔, 하는게 보였지만 갑자기 머릿속으로 날벼락이 떨어지듯 커다란 전음이 울렸다.

[건방지게, 감히, 누구앞에서 죽는다고 헛소리를 하는거냐!!!!!!!!!!!!]

머리속에 크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뒤에 아시리안이 서있는 쪽에서 눈부시게 환한 빛이 터졌다. 아시리안의 화난 목소리보다는 그 환한 빛에 놀라서 핫, 하고 돌아보자 작열하는 빛에 얻어맞은 시체들의 대열에 커다란 구멍이 뚤려있는게 보였다. 마치 폭풍이 휩쑬고 간듯 뻥 뚫린 자리를 보는 내게 빛을 던진 주인공인것 같은 아시리안이 몸을 돌려 나를 분노의 눈길로 노려보았다.

[어리석고 멍청한 놈!!!!!!!!! 그깟 상관없는 벌레들따위가 왜 중요한거지? 그 하찮은 인간들의 손에 죽어도 좋을만큼 가볍게 여기는 건가? 너를, 감히,내앞에서 죽는다는 헛소리를 해?]

그게 아니야. ..그래서가 아니라고, 아시리안..살아있어도 살아있는게 아니니까, 나는!! 살고싶어도 다시 살아날수 없는거니까,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나는!!!!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빼앗고싶지 않을 뿐이야!!!!!!

몸이 저절로 떨릴만큼 분노로 이글거리는 푸른 불꽃으로 나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던 아시리안은 등뒤에 눈이 달린것처럼 시체들이 모여드는 뒷쪽으로 다시 커다란 빛의 구체를 쏘아보냈다.눈부시게 커다란 빛이 눈을 자극해서 눈을 가리는 순간 프란의 놀란 눈빛이 덮쳐오는 시체가 아닌 아시리안에게 향해있는게 질끈 감는 눈사이로 보였다. .. 마족이란거, 들키면 곤란해질텐데.. 어쩌자고 저렇게 마법을 펑펑 쏴댄단 말인가. 바보!!! 저 바보!!!!

[ 이 바보같은 놈!!!!!!!!! 어리석고 한심한 멍청이!!!!!!!]

머리를 쾅쾅 때리는 벼락같은 전음을 토해내며 아시리안이 대열을 정리하지 못한 시체들 무리로 다시 빛을 쏘아보냈다. 빛에 의해 소멸되어 먼지처럼 바스러지는 시체들의 끄아아아아아--------하는 기괴한 비명소리가 귓속에 파고들자 갑자기 머릿속에서 이상한 말소리가 들렸다.

아시리안의 전음관 달리 마치 내 귓가에 대고 야릇하게 속삭이는것같은 거부할수없는 목소리..

-...징그럽다고 생각해?, 너도 죽었잖아? 저 흉칙한 시체의 꼴과 다르지 않아. 어서 저 대열에 합류해야지. 응?-

누군가가 강제로 들이미는것처럼 내생각이 아닌 다른 뭔가가 나를 조종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들리는 머릿속의 목소리가 귀가 아프도록 파고들어 듣지않으려고 양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속에서 빙글빙글 맴도는 환청은 머릿속에서 점점 커져간다.

으흑, 이를 꽉 물고 눈을 꽉 감자 까만 어둠속에서 신호등앞에서있는 내게 덮쳐드는 트럭이 보인다. 퍼억-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날을듯이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부서진 인형처럼 힘없이 추락하는 내모습이 보인다. 딱딱한 시멘트바닥에 머리가 부딪쳐 피가 새어나오고 부러진 갈비뼈가 가슴위로 튀어나온 처참한 모양새가 보였다.

"으............으............시..싫어.......................!!!"

...........아..................아............보...보고싶지..않아......보고싶지않아!!!!!!! 부들부들 떨고있으면서도 보고있는걸 멈출수가 없다. 눈앞에 있는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그 모든 영상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상이 아닌...실제로 죽음을 맞이했던 순간이 실체를 가지고 내눈앞에서 리플레이된다. 그리고 굳게 감겨있던 부서진시체의 눈이 번쩍 뜨이고 까만 어둠속의 나를 올려다보며 무감각하게 말했다.

-하은준, 죽었으면 시체들사이나 걸어다니지 그래?-

내시체는 도로위에 누운채로 점점 부패하기 시작했다. 썩어가고 곫아가고 구더기가 생긴다. 숨이 막힐것같다. 더..보고싶지않아. 필사적으로 눈을 번쩍 뜬 순간 얼굴을 가리고있던 두손이 시야안에 들어온 순간 나는 미칠듯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양손이 썩어있었다. 뼈가 군데군데 들어나는 썩은 살점에 붙은 구더기들... 구더기들.. ..구더기들...

“아아아아아아악!!!!!!!!!!!!!!!!!!!!!!!!!!!!!!!!!!!!!!!!”

미친듯이 머리를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는데 현실감없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정신차려, 이 바보가!! 아르, 아르!!!"

싫어. 싫어. 듣고 싶지않아. 나를 내버려둬. 나는.. 나는 죽었어.죽었단 말이야.

귀를 막고 정신없이 비명을 지르던 몸이 무언가 힘에 의해 끌어당겨진다. 안겨지는 느낌이 있지만 간질환자처럼 발작하듯 벌벌 떠는 몸을 멈출수가 없다.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트럭이 부딪쳐 산산조각 나는 내 모습이, 그리고 죽어있는 내시체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말도안되는 영상이 되풀이 되고 있었기때문에 비명을 멈출수가 없다. 안겨있는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작하는 몸을 뭔가가 단단히 휘어잡고 뒷통수에 따끔한 아픔을 느낀순간이 지나자 나를 사로잡고 있던 영상이 사라져간다. 나는 굳게 감고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앞에 있는건 아시리안이다. 지독한 꿈은 지나간거야.. 괜찮아..구더기들도 사라졌어..

".....하....................아...............하...............악...............하악............하악............"

발작이 가라앉는대신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간다. 안심될만큼 꽉 안아주는 힘에 몸을 의지한채 나는 나를 바라보는 망망대해처럼 넓고 깊은 검푸른 불꽃을 올려다보며 힘없이 웃었다. 고통은 끝난거지...? ... 이제.......무섭지가 않아. 하지만......나.................나............말이지....한번 죽었는데도 이렇게 있는거... 역시..이상해... .. 이상한거잖아..괴로워..아시리안...........괴로워....................괴.....로............워...........

축축한 뭔가가 차가운 뺨을 타고 턱에서 목까지 주르륵 흘러내리는걸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나를...........주...........죽........여......................"

비명을 지르느라 잔뜩 쉰 목소리가 꿈을 꾸는듯 몽롱한 정신으로 중얼거리다가 축 늘어지고 마는 내 허리를 휘어감아올리는 팔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까만 절망같은 어둠속으로 정신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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