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용병들에게 사로잡은 산적떼를 지키게하고 저들을 어떻게할것인가를 의논하는 기사들의 무리쪽에서 나는 멀찌기 떨어진 자리에 주저앉아있었다. 피냄새에 금방이라도 구토가 날것같고 팔다리들이 썰려나간 남자들에게서 들리는 고통스런 신음소리들에 머릿속이 어지럽다. 웅웅거리는 귓속으로 중얼중얼거리는 것처럼도 들리는 기사들의 말소리에 에리카의 앙칼진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저런 짐까지 떠맡고 크로멜성으로 갈수는 없어요. 모두 처리하고 떠나죠."
뭐라고?!! 깜짝놀라 벌떡 일어선 나와 마찬가지로 살아남은 이십여명의 산적떼들도 항복까지했는데 인정사정없이 죽이라는 소리부터 들리자 일그러진 얼굴들로 에리카쪽을 건너다보고있었다.
"하지만 에리카아가씨, 저희쪽 부상은 경미한데다가 별탈없이 제압을 했고, 거기다 더이상 산적질을 하기는 어려울겁니다. 꼭 목숨까지 거두셔야 하는지.."
그,그래요!! 팔,다리가 하나씩 뎅겅뎅겅 잘렸는데.. 죽일 필요까지는 없잖아!! 콧수염아저씨의 말을 지지하며 주먹을 불끈쥐며 응원했다.
"저들이 지금까지 저지른 악행들을 생각해보세요. 오늘도 저 아시리안님이 아니었다면 그대들만으로 산적들을 물리칠수 있었겠어요?"
아시리안이 보여준 눈부신 활약에 자신에게 퍼부어댔던 음욕어쩌고한 모욕은 전부 가려진듯 아시리안에게 무한한 호의를 보내며 에리카가 말하자 그말에 대해서 부정할수는 없는지 기사들이 한숨을 쉬며 아시리안쪽을 힐끔거렸다.
"우리가 갈길이 바쁘다는걸 다들 잊었나요? 어서 죽이세요!!"
생긴걸 보고 사람을 판단해선 안된다는 진리를 여실히 증명하듯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이십여명의 저항하지않는 생명을 제거하라고 내뱉는 잔인함이 끔찍했다. 죽이라고? 에리카,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라고 하는건 개미나 파리가 아니라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야. 당신처럼 똑같이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살아있길 원하는 사람이라고,
"자...잠깐만요!!"
수십명을 사형집행쪽으로 단죄를 내린 재판관없는 집결지로 한손을 번쩍 들고 다가가자 이번일로 더 신용을 잃어 파렴치한에 더불어 비겁한 망나니 아르휜에게 비난과 경멸의 시선이 쏟아졌다.
"어머나, 아르휜. 아직도 도망을 안치셨나요? 설마 아직까지도 차릴 체면이 남아있는것 같진 않은데, 혼자서 돌아가다가 위험이라도 당할 일이 걱정되시나요? 얼굴도 두꺼우셔라"
여러번 느끼는 거지만 얼굴은 곱게 생겨서는 혀가 참 날카롭고 매섭다. 아르휜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맞붙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지금은 뒤로 물러설때가 아닌거다.
"...에리카, 당신에겐 저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없는것 같은데요."
내가 말하자 자기가 무슨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듯 그러나 내가 하는말은 정확히 알아들은듯 에리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르휜 폰 레오포드. 당신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예요. 검사인 당신이 검을 들지 않고 벌벌 떤게 설마 저 산적들이 가여워서라고 주장하고 싶은건 아니겠지요?"
내가 끼어들 문제도 아니고 산적들이 가여워서도 아니다. 단지 나는 아무리 악인일지라도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생명이라는걸 알고있는것 뿐이다. 적어도 이렇게 얼렁뚱땅 죽여도 좋을만큼 무가치한 생명은 하나도 없어. 살아있는 이상은..
".. 조금전 에리카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아시리안이 아니었다면 싸움이 이렇게 쉽게 종결되지 않았을거라고."
아시리안의 얘기가 나오자 입술을 깨물면서도 입을 다무는 에리카를 보며 말을 이었다.
"사로잡힌 산적들을 제압한거 역시 아시리안이니 그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말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게 힘들었다. 얼굴을 두꺼운 철판으로 가렸으면 좋겠다. 지금의 이것은 아시리안의 동의없이 아시리안의 도움을 바라고 하는말, 지금역시 내가.. 비겁한걸까. 마족 아시리안에게 무의미한 벌레들이나 다름없는 건 산적떼와 마찬가지로 하은준도 마찬가지, 틀린게 있다면 하은준이 차지하고 있는 아르휜의 몸이 그의 아나이스와 닮아있다.. 라는것.
"...아르휜님의 말씀도 일리는 있습니다."
처음에 여관에서 말을 걸었던 콧수염난 아저씨의 말에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더 죽이라고 주장하면 아시리안이 구해줬다고 한 스스로의 말을 번복하는 셈이 되어서인지 입술을 깨문 에리카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아시리안님의 의견에 따르도록 하지요. 이 쓰레기같은 산적떼들을 살려줄만한 가치가 있는지!!"
에리카의 말이 끝나자 힐끔거리던 시선들이 전부 아시리안쪽으로 쏠렸다. 제발..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시리안을 돌아보지 못하는 내등에 꽂히는 시선이 뜨뜻하게 느껴진다. 하은준의 부탁을 들어줄 의무따위는 없다고 말한 아시리안이다. 어쩌면 벌레들따위의 목숨처리하는 일을 귀찮게 왜 내게 묻지? 라고 화를 낼지도 몰라.
"살기위해 버둥거리는 하찮은 벌레도 살아갈 권리는 있다고 누가 말하더군. 그리고 그에게 나는 그들을 살려주기로 부탁을 받았고 이미 그 대가도 받았다"
아시리안의 말을 들으며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 고개를 푸욱 숙였다. 그리고 나를 잡아죽일듯이 노려보는 에리카의 시선도 느끼지못한채 나는 아시리안이 강제로 받아낸 댓가의 휴우증으로 벌겋게 부풀어있는 입술을 손등으로 가렸다.
[멍청한 인간인줄 알았더니, 제법 머리도 굴릴줄 아는군.]
지금껏 붙어있던 내머리가 장식품으로 붙어있는줄 알았다고 하는말같다. 도와줘서 감격할라하면 왜저렇게 초를 쳐댄단 말인가. 불만스런 얼굴로 아시리안쪽을 힐끔 바라보자 나무에 등을 기댄체로 서서 니까짓게 노려봐봤자지, 하는듯 픽 웃는게 무척이나 티껍다. 그래.. 너 잘났다. 머리카락변태괴물놈!!........ .. 하지만.........뭐..........엄청 짜증난다는 귀차니즘의 얼굴을 거만하게 하고있긴 해도...어쨌든..도와준건.......맞지?
[.........고.........고마워..]
[됐으니까 멍청한 생각들은 그쯤해두고 이쪽으로 와. 아르]
멍청한 생각? 씨.. 내가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니가 어떻게 알아, 이 변태마족놈아. 그리고 니가 오란다고 내가 개새끼마냥 홀랑홀랑 쫒아갈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오산!! ...............................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얌전히 아시리안에게 다가갔다.
나를 통해 아나이스의 모습을 찾고 있으면서..나라는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고 말했으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쓰는건 또 뭐고.. 도대체 왜 그렇게 화를 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다가오라고 하는걸 보니까 화는 좀 가라앉은것 같으니까.
내가 가까이 다가서자 액체가 담긴 주먹만한 유리병을 건네준다. ....뭐지?
"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한심한 멍청이 보는듯한 시선으로 나를 본다.
"....힐링포션이다. 이미 본적이 있을텐데?"
아, 맞다.. 프란이 그때 짐보따리를 뒤적거리서 이런 색체감이 드는 액체를 내발에 뿌렸었...엑!! 뭐야, 그렇다는건 역시 보고있었다는 거잖아!!!뭐라고 말을 못하고 버벅거리는 나를 보고 흥, 하는 듯한 표정의 아시리안이 멍청이라고 중얼거리는걸 들으며 나는 새끼손가락에 끼어있는 반지가 유난히 강한 존재감으로 반짝반짝 빛을 뿜고 있는걸 망연자실 보았다. 역시 이놈의 반지가 수상해!! 당장 빼버릴테다!!! 이 변태스토커같으니!!!
"...안받을거냐?"
바보를 참아주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얼굴로 힐링포션의 병을 내앞에 들이민 아시리안에게서 얼떨결에 덥썩 받으며 나는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떠올렸다. 왜, 어째서 아시리안이 이걸 내게 주는건가..라는......다친 산적들을 위해서? 아시리안, 네가?!! 왜????
얼떨결에 받은 힐링포션을 든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시리안을 바라보자 차가운 눈빛이 왠일로 시선을 비껴내며 짜증스럽다는듯 중얼거렸다.
"귀찮은 놈 같으니.."
이렇게 힐링 포션까지 챙겨줄줄은 몰랐다. .. 그 마력이란 것으로 만든것일까?
".....아............고..........고마워.. 아시리안.."
벌겋게 부푼 손목이 거슬르는지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잡으려는 아시리안에게서 움찔, 물러서려다가 나는 손을 잠자코 내주었다. ... 내손이 아니다. 이건 아르휜의 손, 상처자국을 치료하는것은 아시리안이 아나이스에게 향한 마음. .. 그러나 지나치게 잘해주지 말아달라고 부탁한걸 잊었나보다... 그런 다정한 눈으로 보면 참 헤깔리는데..
한번 떨어져나간 팔다리들을 붙일수는 없지만 지혈과 상처치료를 하기엔 그만인 힐링포션을 사용해서 부상당한 산적들을 치료해준후 일행은 다시 숲을 넘기 시작했다. 처음 숲에 올랐던 일행들외에 굴비묶듯이 줄줄이 묶여가는 이십여명의 산적들까지 더해져서 숫자가 두배가량 불어있다. 때문에 처음에 넉넉했던 식사도 당연히 모자라게 되어서 기사들도 용병들도 나를 책망하듯이 힐끔거렸다. 그러나 그런 비난의 시선쯤은 얼마든지 받아줄수 있다. 그 어떤 쓸모없는 쓰레기인생이라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내생각엔 변함이 없으니까. 어쩌면 죽어보지 않으면 알수없는.. 아니, 죽었기때문에 더 살아있는 삶에 질투를 느끼는 내 오기일지도 모르겠지만.. 팔이 하나 없어도 다리가 하나 없어도 자신이 이름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삶의 무게가 부럽기만 하다.
"이거봐, 이쁜이.. 정의로운척 한다고 니속을 모를거라고 생각하냐? 귀족들놈들이 생각하는거야 빤하지. 병신된 산적들 끌고가면 표창장이나 받을줄 아나 보지? 계집애처럼 빌빌거리는 놈이 생각하는거야 다 거기서 거기다 이거야!!"
할버드를 맘껏 휘둘러대던 오른팔을 잘려서인지, 아니면 이렇게 끌려가며 구차스럽게 사는것보다는 명예로운 산적의 이름으로 깨끗하게 죽는게 나았다고 생각하는건지.. 산적대장의 악담은 별로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내가 나섰기때문에 이렇게 끌려가게 되는거라고 앙심을 품는것도 이해가 간다.
"아니면 천국맛을 못본게 아쉽냐? 그거라면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니 말만 하라고, 니놈의 똥구멍을 가득차게 박고 흔들어주는데는 한쪽팔이 없어도 가능하거든."
온갖 저질스런 음담패셜이 다나온다. 산적대장의 강의덕분에 시간이 없어서 성적으로 관심이 많은 또래들에 비해 포로노한번 본적없는 초건전청소년이었던 나도 이제 남자들끼리 할때는 어떻게해서 어떻게 하는구나 라고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사실까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 셈이다.
"야!! 이 빨강머리놈아!! 귀가 먹었냐? 사람이 말을 하면 대꾸를 해야할거 아냐!! 희멀건하게 생긴 면상으로 고상한척 내숭떨어봤자 소용없다고. 하긴,니놈의 입은 사내새끼 좇빨아줄때만 열리나보지?"
숨이 차서 잠시 걸음을 멈추자 굴비묶듯이 끌려가는 중이던 대장이 내가 이제야 반응을 보이려는가 해서 심술궂게 더 킬킬거렸다.
"어서 이리오라고, 귀염둥이. 니놈이 빨아줄 팔팔하고 건강한 좇들이 널려들있다. 네놈의 구멍이 선착간 창녀들처럼 너덜너덜 찢어질때까지 만족시켜줄테니...!!"
뭐라뭐라 말을 해대던 대장은 검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아시리안이 내옆에 스윽 다가오자 움찔, 입을 다물었다. 이미 한번 상대해봐서 얼마나 강하고 위험한 존재인지를 알고있기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무리 악에 받쳐 이말저말 떠드는 사람이라곤 해도 본능적으로 함부로 말을 내뱉을수 없는 위압감에 짓눌렸기때문일지도 모른다.
"저 벌레가 꽤 시끄럽게 구는군. 혀를 잘라버릴까"
짜증난다는 기색이 역력한 나직한 목소리를 엿들은 대장의 얼굴색이 사색으로 굳는걸 곁눈질로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지 않는게 좋겠어. 저렇게 말하는걸 좋아하는데 말까지 못하게 되면 너무 불쌍해지잖아"
웃으면서 대답하는 나를 아주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싶어 미칠것 같다는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누구의 것인지 잘알고 있지만 그냥 무시하고 걸었다.
어차피 저사람은 자신의 불행에 대해 분노할 대상이 필요한거니까. 귀족에게 당한게 많은지 귀족콤플렉스도 심한것 같고.... 그냥 내게 위해를 가하는게 아니라 옆에서 떠들어대기만 하는거니까 못들어줄것도 없다. 그리고 매번 신기할만큼 새로운 욕들과 끊임없이 쏟아내는 음담패설이 복잡한 머릿속을 가진 초건전청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고.. 그런데 거기가 찢어지면 엄청나게 아플텐데.. 만족시켜준다는건 또 뭐람..앞뒤가 안맞잖아요.
"...지쳐보인다. 아르"
"응? 아직..괜찮은......"
옆에서 들리는 아시리안의 말에 무심결에 대답하다가 말을 멈추고 뚝 걸음을 멈춰섰다. 그러자 아시리안의 손이 가볍게 어깨에 닿았다가 다른사람이 눈치채지 못할만큼 푸른빛을 잠시 넣어주고 떨어진다.
지쳐보인다는 말처럼 지쳐있었던건가.. 한결 몸이 가벼워졌지만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는대신 말없이 걷기를 계속했다. 고맙다고? .. 아시리안이 지켜주는건 아르휜의 몸이지 내가 아니다. 그러니 고맙다는 말역시 내가 할말은 아니지..
등뒤에서 뚫어지게 바라보는 익숙하고 집요한 시선이 느껴진다.
...그렇게 보지마, 지금은 아나이스도 아르휜도 아니라는걸 알잖아. 그렇게 바라보면 나도 초조해져.. 나라고 좋아서 이 몸속에 들어와 있는게 아니란 말이야.
과연 프란시스, 그 남자가 아르휜님을 찾았을까..를 걱정하던 알프레드는 눈앞에 있는 크로멜성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혼갖 몬스터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집합장소로 변해버린 곳을 경악해서 보고 있었다. 높은 성의 벽마다 수십개의 사다리들까지 올려놓고 오크떼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지만 살아남은 인원수가 적어서인지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하고 있는듯 했다. 심각하다고는 들었지만 이정도일줄이야.. .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몬스터들과 싸우고있는 병사들의 수는 현저히 적어보였다. 그나마 도망치지 않고 싸우고 있는게 가상하달까. 정확히 말하자면 도망치는 쪽을 생각해보지 않아서가 아니라 도망칠 곳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거지만.. 알프레드는 저절로 뱉어지는 깊은 신음을 입안으로 쓰게 삼켰다.
아르휜님이 납치를 당한것 같다는 말에도 흔들림없이 냉정하게 돌아선 펠릭스님의 단호함이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었던 알프레드였지만 지금 이순간만큼은 그 결정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나...과연...?
레오포드의 원군만으로 이 마물들을 물리칠수가 있을까. 솔직히 저렇게 많이 모여있는 마물들은 처음보지 않았던가. 알프레드는 물론 다른 병사들도 예상을 뛰어넘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 마물들의 압도적인 숫자에 당황한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순간 뭔가가 하늘로 솟아 반짝거렸다. 그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검을 빼어드는 펠릭스 폰 레오포드가 검을 하늘로 치켜올리고 소리쳤다.
"검을 들어라!! 이곳은 에오포니아의 땅, 우리는 에오포니아의 자손, 에오포니아에서 더러운 마물들을 쓸어버려라!!!!!!!!!!!!!!!!!!"
아.............펠릭스님........!!!! 당신은, 정말이지.. 굉장한 분이십니다. 순식간에 동요를 잠재울법한 카리스마로 검을 치켜든 남자의 굳건한 등뒤에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걸 보며 알프레드는 다시한번 감탄을 금할수가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뒤를 돌아보지않는 펠릭스 폰 레오포드에게..
순식간에 개미떼만큼이나 바글바글한 몬스터들틈으로 달려들어 눈깜짝할사이에 두세마리를 베어버리는 모습에 와아아아아.. 하고 함성을 내지르며 병사들이 오크들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목숨을 건 혈전.. 치열한 싸움이 될거라는걸 펠릭스님역시 감수하고 있을터였다. 이렇게 되면.. 아르휜님이 납치를 당해서 이자리에 오지 않은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까아아아아아------ 머리위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같은 울림이 하늘을 뒤덮자 알프레드는 달려드는 냄새나는 오크의 입에 검을 찔러넣으며 하늘을 힐긋 바라보고 다시한번 깊은 신음을 삼켰다. 어느새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는것은 흔치않은 와이번떼들이었다. 와이번들이 살기로 두눈을 희번득거리며 하강하는 것을 보고 알프레드는 입술을 콰직 깨물었다. 이 빌어먹을 몬스터들 같으니!!!
오크와 와이번들의 피로 본래의 색체를 잃은채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휘두르자 푸칵,하고 썰어지는 둔탁한 느낌과 익숙해질수없는 더러운 피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기분나쁘게 전신을 감싸고 있는 더럽고 매케한 핏물이 짜증스럽다고 생각하며 펠릭스는 상황을 살펴보며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오크떼와 와이번들의 시체가 널려있는 주위엔 레오포드가에서 온 병사들역시 죽은채 널브러져있다.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자 숨돌릴틈없이 달려드는 오크두마리를 한꺼번에 검으로 베어버리는 펠릭스의 등뒤에서 날카로운 발톱을 번득거리며 와이번이 달려들었다. 어깨의 살점을 뜯으려다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피한 먹잇감이 분한듯이 커다란 눈동자가 일그러지고 캬아아아- 괴기스런 비명을 내지르는 와이번을 베고 펠릭스는 거친 숨을 하아..하고 내쉬었다.
"...정말 짜증나게 하는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펠릭스의 찌푸린 눈가로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툭, 떨어져내렸다. 오크들이나 와이번들이나 펠릭스의 검앞에 상대될리가 없다. 그러나 그 지나치게 많은 수는 마치 베어도베어도 끊임없이 꾸물거리며 몰려드는 지옥의 사자들같지 않은가.
아르휜.. 어쩌면 아르휜이 이자리에 없는게 더 잘된일일수도 있다. 납치라고는 했지만 지금쯤이면 프란시스하워드.. 건방진 그놈과 만났을테고, 설마 멍청하게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네녀석이 조금쯤 머리란게 있으면 말이다.
몇시간째 숨가쁘고 긴장된 혈전이 계속되어선지 살아있는 원군의 일부도 끊임없는 이 싸움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레오포드가의 원군들을 상대하느라 몬스터들이 분산되어선지 다닥다닥 붙어있던 성벽은 조금 소강상태.. 여기서부터는 성안으로 들어가는게 관건이겠군.
굳게 올려져있는 성문을 노려보다시피 날카롭게 바라보는 펠릭스의 붉은 머리카락뒤에서 어둑해져가는 핏빛황혼에 붉게 물든 발톱의 와이번이 카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달려들었다. 뒤돌아 와이번을 베면 앞에서 창으로 공격해오는 세마리의 오크에게 등을 찔린다. 와이번의 공격에서 부상을 감안하고 오크들을 먼저 검으로 후려치던 펠릭스는 어깨가 한웅큼 뜯겨져가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몸을 돌려 방금 벤 오크들의 더러운 피가 흥건하게 묻은 검으로 와이번의 목을 날려버리는 순간, 핏,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와이번의 심장을 뚫었다.
....화살인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쿨럭쿨럭 피가 쏟아져나오는 어깨의 상처를 손으로 누르고 펠릭스의 시선이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향했다.
화살을 쏜 사위를 천천히 내리는 자의 등뒤에서 물결치듯 흔들리는건 붉은 머리카락...설마..아르휜?.. 아니, 활을 어깨로 다시 돌리고 검을 날렵하게 뽑아드는 남자의 머리카락은 핏빛황혼에 물들어 붉게 보였을뿐.. 부서질듯한 황금빛 머리카락이었다. 먼 거리였는데도 펠릭스의 시선을 느낀듯 오만하게 쳐다보는 황금빛 눈동자가 웃는것을 보고 펠릭스는 건방지게 화살을 날린 그를 뒤늦게 알아챘다.그리고 에오포니아의 황자중 하나인 그의 뒤에서 함께 보인 지원병력을 바라보며 펠릭스는 차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황자께서 드디어 납시셨군. 그럼, 어디 실력을 보여보시지.야나카황자님"
원래 나란 놈이 조금 우울한 성격이긴 했지만 숲을 넘는 사이 온갖 비난과 책망어린 시선들에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저질 음담패설에 욕설까지 배부를만큼 실컷 듣고 아르휜의 몸에 적응되지 않는 스트레스까지 더해져서인지 표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나는 꽤 지쳐있었다. 몸이야 아시리안이 여러번 힘을 되찾게 해주지만 지쳐있는 마음은 도무지 생기를 찾을수가 없다.
숲을 내려오기전 마지막 휴식지로 잡은곳은 나무꾼이 벌목을 해갔는지 듬성듬성 날카로운 것으로 잘라낸 흔적이 남아있는 약간 넓은 공토였다. 아시리안이 무심하게 혀를 잘라낼까,라고 내의견을 타진해오던 순간부터 그 말많은 입을 덥썩 다물고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는 시선으로 미움을 퍼붓고있는 대장이 있는 피곤한 산적떼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좀 조용하게 쉬고있으려니 개망나니지만 쓸만한 검사라고 생각했던 아르휜에서 산적떼를 만나보여준 내 모습에 대단히 실망하고 산적떼를 살리는데 쓸데없이 공을 세운뒤부터 나를 하찮은 곤충취급도 안하던 에리카가 웬일로 내쪽으로 다가왔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게 뭔가를 찾고있는것 같다. 아시리안을 찾고있는걸까? 그렇게 개무시하는데.. 속도 좋아..
".. 아시리안님은 보이지 않는군요."
역시... 내쪽으로 다가온건 아시리안이 사라진것 같아서 였나보다.
"예.. 그렇네요."
얼굴만 잘생기면 모든게 용서가 되나..아니지, 아시리안의 경우엔 환상적인 검실력까지 두루두루 갖췄으니 ..그래도그렇지. 아시리안에게 여자어쩌고하며 모욕당한 기억은 아시리안이 산적떼를 날려버렸을때 같이 날라가버렸는지 아시리안에게 다시 관심을 표명하는 에리카가 나로서는 참 신기했다.
화가나면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지는 괴물에다가 남자에게 키스하는 변태라고요. 에리카. 얼른 정신차려요.
"..친구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아시리안은 아르휜을 늘 신경쓰고 배려하던데 너무 무심하군요. 하긴 당신이 주변의 모든 인간들을 무시하던 인간이었다는걸 잊고있었네요."
이제 아르휜이 어떤 사람이었을까.. 라는것도 관심이 없어졌다. 그저 아르휜이 빨리 돌아와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이대로 안돌아오면 어쩌지.. 라고 무섭기까지 하다. 뭐.. 지금 무서운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눈을 샐쭉하게 뜬채 노려보는 무서운 여자, 에리카겠지만..
"크로멜성에 먼저 도착한 펠릭스님이 당신을 어떤 얼굴로 맞이할지는 저도 꽤 기대가 되는군요. 도주하려다가 도중에 저의 일행을 만나서 실패.. 게다가 산적떼앞에서 벌벌 떨던 무용담까지 전해드리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무척 궁금하답니다. 아르휜"
그래.. 펠릭스형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르휜을 만나면.. 휴우..이미 여러날이 지났으니 도주했다고 확신하고 있는건 아닐까.
"당신도 도주하는게 불가능하다고 체념한것 같으니 마음의 준비라도 단단히 해두시는게 좋겠어요. 아르휜. 바로 내일이면 당신의 형님과 기쁘게 해후할수 있을테니까"
휴우.....도대체 이아가씨는 엉덩이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왜이렇게 아르휜을 못잡아먹어서 갸르릉거린단 말인가. 양손톱을 세우고 내얼굴을 할퀴고 싶다는 표정이 호러스럽기까지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르휜이 장신이라서인지 에리카가 보통보다 키가 작아서인지 일어서자 에리카가 정말 작아보인다.
"우리 형제의 재회에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리카. .. 그런데 그렇게 시시콜콜 신경쓰는걸 다른 사람들은 쓸데없는 관심이라고 하더군요. "
에리카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고 몸을 돌리자 뒷통수가 금새 따끈따끈해지는것이 아마 노려보고 있는 모양이다싶었지만 일단 좀 씻고싶어서 용병들이나 기사들이 한차례 다녀간 호숫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햇볕이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이는 호숫물에 샤워를 하고도 싶었지만 물이 얼마만큼 깊은지 알수도 없고 또 호수주변에 푸른 나뭇잎이 우거진 나무들로 둘러쌓여있긴해도 누가 불쑥 다가올지 알수없는 일이고 해서 샤워는 포기.
들풀이 길게 나있는 호숫가 가장자리에 앉아 길게 손목을 덮고있는 양팔의 옷소매를 팔목까지 둘둘말아 걷어부친후 투명하게 비치는 호숫물을 오므린 손바닥에 담아올려 얼굴을 씻었다. 문득 출렁거리는 물살이 물결치는게 잔잔해지는 물속을 바라보자 낯설기 짝이 없는 존재가 의아하게 나를 보고있다. 낯선 붉은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익숙해질수 없는 미남자의 얼굴을 불편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나는 가만히 말을 걸었다.
"...아르휜..어딨어요.."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채 한참 바라보고 있으려니 물속에 투명하게 비추이는 붉은 눈동자아래 콧날, 붉은 입술이 참 못되보이게 비틀어진다.
-...멍청하긴-
............어?............어어? 어어억!!!!!!!!!!! 깜짝 놀라서 다시 물속을 내려다보자 못되게 비틀어져있는 입술은 어느새 사라져있고 크게 떠진 눈이 걷잡을수 없이 흔들거리는 얼굴이 물속을 바라보고있었다.
.........착각..한걸까?... 싶으면서도 심장이 심하게 벌렁벌렁거렸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속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데 머리위로 그늘이 생긴다싶은 순간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위에 검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오만하게 나를 내려다보고있는 남자가 물속에 스윽 비춰졌다. 고개를 들자 언제 온건지 아시리안이 쭈그려앉은 나를 내려다보고있다.
"뭐하는거지?"
뭐하냐고?.. 글쎄.. 머릿속에서 그 멍청하긴- 이라는 소리가 들려오는걸 지우려 애쓰며 당황한걸 숨기려 아무렇지않게 시선을 내렸다.
"..그..그냥...세수하고 있었어"
복잡한 얼굴을 지우려 시원한 물을 가득담아 몇번 푸,푸,푸 거리며 씻어내자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서늘하게 부는 바람이 젖은 얼굴을 쓰다듬고 가는 느낌이 좋아서 가만히 눈을 감고있자 하늘꼭대기까지 닿아있는 것처럼 높은 나무줄기에 매달린 잎사귀들이 츠츠츠츠 부딪치는 속삭임들이 귓가에 아련하게 들려왔다.
감았던 눈을 떴을때는 내옆에 앉은 아시리안이 내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익숙하고..그리고..낯설기만한 시선.. 끈질길 만큼 집요한 검푸른 눈빛에서 피하려 시선을 돌리자 아시리안이 내이름을 불렀다.
"아르"
나직하게 부른 이름에 한참 머뭇거리다 할수없이 고개를 들자 나를 응시하는 다크불루의 시선뒤에서 서늘하게 부는 바람의 방향과는 상관없이 하늘하늘 나부끼는 검푸른 머릿카락이 보인다. .. 왜 저렇게 본담... 조용한 침묵가운데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울리는 심장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어색하다..
“머..머리카락이 또 움직여..”
처음 봤을때처럼 충격은 없지만 그래도 누구에게 들키면 곤란하니까..어색하게 꺼낸 말이 무색하케 허공으로 춤추던 검푸른 머리카락의 일부가 내쪽으로 건너온다. 놀자고 장난치듯 뺨을 쓰다듬자 간지러워서 목을 움추리며 웃었다....그래도 정말 어색하다.. 왜 저렇게 진지하게 본담..
"..간지러워. 하지마"
머리카락을 떼어내려 그끝을 잡아내리자 내손에 잡혀있던 머리카락이 오히려 더 길어진채 빙글 손목을 휘감아 허공으로 팟, 올렸다. 아얏, 이놈잇!! 방해되는 손을 제거하고 슬금 내려온 머리카락이 다시 뺨을 쓸어내리자 이번엔 조금 화가 나서 나머지 손으로 확, 잡아당기듯 잡아챘다.
"..간지럽다니깐!!"
그러나 그손에 잡힌 머리카락역시 아까처럼 길게 늘어나 손목으로 휘어감더니 눈깜짝할새에 허공으로 팟, 잡아올린다. 허공으로 잡아올려진 양손이 묶여서 방해꾼이 없어선지 한결 여유로운 모양새로 느릿하게 머리카락들이 내게 슬금슬금 접근하기 시작했다.
벗어나려고 몸을 바르작거리자 한껏 잡아올려진 양팔의 손목부터 팔목을 거쳐 어깨까지 머리카락들이 담을 감싼 칡넝쿨처럼 빙글빙글 휘감아 왔다. 이쯤하면 장난의 범주가 넘어선 행동이고 장난으로 보기엔 푸른 불꽃속에 일렁거리는 어두운 불길이 거칠고 사납다. 조여드는 머리카락들의 힘이 아픔을 느낄정도라서 짧은 신음을 흘리며 아시리안을 노려보았다.
"윽..왜 이런짓을 하는거야!!"
아시리안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이해할수 없는 대답을 던졌다.
"네가 나의 인내심을 자극하니까"
도대체.. 그게 무슨 .. 억지야.. 흑,하고 신음이 뱉어져나오는 입술을 잘근 깨무는사이 상의옷자락이 스스슥 살갗에 부딪치며 밀려올라가는게 느껴졌다.
"..이러지마"
입만 산 녀석이라는 말답게 아무 반항도 못하고 말로 거부하자 아시리안의 손이 입술을 꽉 깨물고있는 턱을 움켜쥐고 얼굴을 치켜올렸다. 원치않아도 눈이 마주치게 되서 일그러져있을 시선을 비껴내리자 고개를 치켜들게해서 얼굴을 피하지 못하게 한채 반벗겨지다시피한 상반신을 한손으로 쓰다듬었다. 흠칫!! 놀라서 눈을 드는 나를 비웃는듯 내려다보는 푸른 불꽃...왜.. 어째서..?
"시.........싫어...."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겁에 질려 중얼거리는 사이에도 상체를 쓰다듬는 매끈한 손은 기묘한 열기를 품고 예민한 겨드랑이를 쓰다듬어내렸다.
"싫어, 싫다고!!! 으윽!!! "
비명지르듯 소리를 질러 거부하자 머리위로 묶여있는 양팔을 빙글빙글 돌며 옥죄는 것이 살갗을 파고들듯 더 꽁꽁 조여든다. 고통에 어깨를 움추리자 가슴의 돌기가 손톱으로 긁어지고 비틀듯이 쥐어올려졌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눈꼽만큼의 애정도 배려도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성희롱.... 왜.. ..................... ............... .....
지난번에 키스는 그렇게 다정하게 했으면서.. 그렇게 열렬하게 했으면서....왜.................왜....왜.............질끈 감은 눈에서 뜨거운 물기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분해서 우는건가?"
흘러내린 눈물의 자국을 혀로 할짝,할짝 핥아올리며 나직하게 말하던 아시리안이 굳게 감긴 눈꺼풀위에 키스했다.
"요즘 너는 나를 보면 뱀앞의 개구리처럼 긴장하던데.... . 아무짓도 안하는데도 내가 너를 괴롭히는것처럼 그렇게 굴면... 나로서도 사양할 이유가 없지. 기대에 부응하기위해 실컷 괴롭혀줄수밖에"
"으............윽.........왜...왜 내생각이 중요한건데.......내가 뭘 생각하든, 그건 너와 관계없는 일이란 말이야!!!!!!!!!!!!"
내가 가까스로 소리치자 잠시후 양팔을 꽈악 죄어오던 머리카락이 느슨하게 풀린다. 한올한올 풀어지는 머리카락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잡아내렸다. 얼마나 깊게 파고들었는지 시퍼런 피멍이 구렁이가 휘감긴처럼 나있다. ...아프다. .. 하지만 아픔의 정도를 따지자면 아마도 마음쪽이 더 큰것도 같다.
어차피 아시리안..너한테는 나같은거 아무것도 아닌거지.. 아나이스도 아니고 아르휜도 아닌 하은준인 나를 알고있으니까.. 너는. 나같은거 아프든 말든 상관없는거지. 아무렇게 대해도 다쳐도 ...상관없는거지..
알고있다.. 이미 알고있었잖아. 그러니까..상처받을 필요없어..
아시리안의 손이 다가오는 기척에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이 굳었다. 뒤로 물러설 듯한 내게 멈칫했다가 다시 사납게 두팔을 잡아챈 아시리안의 손에서 푸른빛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 관계없어. 지금이라도 너의 영혼따위는 단숨에 소멸시켜버릴수 있을만큼 너역시 내게는 하찮은 존재일뿐. 그러나 아나이스의 얼굴을 하고서 나를 무시하지는 마라. 그렇다면 나역시 네가 나를 싫어하는 아르이든 하은준이든 더는 기다리지 않을테니까"
한순간 격하게 내뱉은 감정만큼이나 눈부시게 터진 푸른빛속에서 나는 잠시 멍해졌다...기다린다고? 아...아르휜이 돌아오기를.. 너의 아나이스가 맞는지 확인하기를? .. 무시한적 없다. 무시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걸까. 피묻은 검을 들고있는 아시리안을 끔찍한 괴물보듯이 흠칫,해버려서 나도모르게 상처를 준것처럼? 내가..싫어한다고? 아시리안을?
"뭐..뭐야...나....나는..너를 싫어하지 않아..."
살기등등해서 노려보는 푸른불꽃은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듯해서 내가 당했던 일을 잊고 오히려 당황해버렸다. 왜.... 내가 싫어할거라고 생각하는거지?
"가끔 심술을 부려도 친절하고 잘해주는걸 알고있어.. 말은 못되게 해도 나를 많이 배려해주고 있다는것도.. 알아.."
그 상냥함이, 친절이 나를 향한게 아니라해도.. 내가 하은준이라는걸 알고있어도 ..벌레같다고 말한 산적들을 죽이지 않아줬고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힐링포션을 줄만큼.. 의외인곳에서 상냥하고 세심한게 아시리안이다.
진심으로 말하는데도 아시리안은 얌전히 듣고있기가 꽤나 거북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먹는 욕구가 없다는 마족도 토기를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잘못먹어서 급체한 사람처럼 얼굴이 떨떠름하다. 그리고 무진장 티껍다는듯이 나를 향해 말도안된다는듯 거만하게 야렸다.
"...친절?..배려?"
그뒤에 그단어의 뜻이 인간과 마족과의 단어사전에 잘못 나와있나,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긴했지만 묘한 표정의 아시리안이 나를 노려보자 나는 가만히 웃었다. 마족도 숨기고싶은 마음을 들키면 당황이란걸 하나보다. 에..그게 좀 토할것 같다는 얼굴이긴 해도..
"..멍청한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또..또 저런다. 왜 저런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지..
"그래, 난 입만 산 유령이야. 잘 아네. 그러니까, 아시리안..앞으로 그..그런 나쁜 짓은 하지마"
"...나쁜 짓?"
"그,그래. 나,나쁜짓!!"
좀더 근엄하게 말할 생각이었지만 아시리안이 징그러울만큼 밀착해서 녹일듯이 뜨겁게 들이부어댄 키스나 아까처럼 화를 내면서 몸의 여기저기를 만져대던것을 떠올리자 얼굴에 열이 쏠린다.
"왜 하면 안되지? 성욕이란게 얼마나 큰 쾌락과 만족을 주는지 모른다고는 안하겠지. 여자와 자는것만큼이나 남자와 자는것도 꽤 즐거운 일이야. 흥, 게다가 나는 마족이다. 인간인 네가 아는 어떤 여자, 혹은 남자보다도 훨씬 더 너를 뜨겁게 해줄... "
저..저게 다 뭔소리야...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를 보고 말을 뚝 멈춘 아시리안이 갑자기 불쑥 물었다.
".. 아직 경험이 없는건가?..?"
헉!!! 허걱!!! .겨..경험없는게 정상이야, 난 아직 건전한 고등학생이라고 분개했지만 차마 대답도 못하는 나를 보고 뭘 생각했는지 아시리안이 떨떠름한 얼굴로 이어 물었다.
“설마 키스도?”
여..여자친구 사귈 시간이 없었단 말이야..라고 생각하며 다시 움찔, 하는 나를 보고 쉽게 결론이 나왔는지 갑자기 훗, 하고 웃는통에 얼굴이 더 빨개졌다.이....음흉한 벼.....변태주제에, 머리카락괴물주제에!!! 그래, 나 총각귀신이다. 어쩔래!!
"하..하아........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래, 웃어라. 웃어. 젠장....
나를 놀려놓고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건지 한참 웃고있는 아시리안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데 저렇게 웃는거 처음보네.. ..변태마족이 저렇게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는건 넌센스다. 넌센스.
"아르,조절이 안되면 생각은 적당히 하는게 어때."
"뭐?"
갑자기 웃다가 생뚱맞게 하는말에 나는 아시리안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나를 티껍다는 듯이 바라보며 아시리안이 내머리위에 턱 손을 얹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다 얼굴에 드러난다는 말이다. 이 멍청아."
그리곤 꼬마에게 하는것처럼 부스스 머리를 흐트러뜨린다. 아시리안의 손이 닿아있는 머리가 뜨겁다. 심장이 원인을 알수없는 열기를 띄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눈부시게 웃고있는 아시리안에게서 홀린듯이 눈을 뗄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