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오포드가의 귀공자-6화 (6/36)

6.

마족과의 이상한 계약을 끝마치고 이층에서 내려오는 나와 아시리안에게로 힐끔거리는 심상찮은 시선들이 쏟아져내렸다. 역시 평범하지 않은 외모는 문제가 많다고.. 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짐짓 아시리안을 힐끔쳐다보다가 카운터쪽으로 다가갔다.

"죄송한데 이지방의 이름이 뭔가요?"

주근깨가 콧잔등에 흩어진 아가씨에게 말을 걸자 왜저러지싶게 얼굴이 빨개진다.

"아..예.. 이곳은 휴첼지방입니다."

휴첼이라.. 숲을 넘기전 지나온곳이다. 그러면 일행들과 그렇게 많이 떨어져있지는 않은건가. 물론 원군이 숲속에 그대로 있어주어야 한다는 가정이 붙지만.. 만약에 도망쳤다고 확신하고 행군을 계속했다면 그만큼 사이는 더 벌어져있을거다.

"예. 고맙습니다. 아시리안, 서둘러야할것 같아."

주근깨아가씨에게 인사를 하고 아시리안에게 말을 하자 뒤에서있던 아시리안이 나를 이상하다는듯이 바라보았다.

"벌써 가자고? 인간들은 음식물들을 먹어 체력을 보충하지 않던가. 계속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움직일수 있나?"

"사먹으려면 댓가를 지불해야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게 없어."

한마디로 말하면 알거지라 이거지...생긴건 멀쩡해가지고 배고픈 거지신세인게 좀 챙피해서 누가 들을까 살짝 입을 가리고 작게 소곤거리자 아시리안이 더더욱 이상한 놈 바라보듯이 나를 바라보며 딱 한마디 뱉었다.

"너같이 멍청한 인간은 처음본다"

엑, 뭐,뭐야? 내가 어디가 어때서!!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꽝 때려부수는것처럼 카운터펀치를 날리고 아시리안은 아까부터 몽롱한 얼굴인 주근깨아가씨에게 차갑게 말했다.

"1인분의 식사"

"아, 예. 소..손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요"

말과 함께 아시리안이 탁, 던진것은 은색으로 반짝 빛나는 동전이었다. ... 생긴게 인간과 비슷하다고는 해도 일단 마족이니까 인간생활에 서툴거라고 생각했던 나를 무지 민망하게 만들만큼, 돈내고 밥사먹는게 무지 자연스럽다. 정말 바보가 된것같아서 머리를 긁적거리던 나는 빈 테이블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아시리안의 맞은편에 어색하게 앉았다.

"너의 목적은 그 얼빠진 벌레들에게 다시 돌아가는 건가?"

얼빠진 벌레들? 미친 머리카락이나 가지고있는 괴물변태주제에!! 라고는 무서워서 말못하고 그저 흘겨보자 아시리안은 흥, 네가 노려봐봤자지, 라고 콧방귀뀌는 표정이다.

"순간의 삶을 영위하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들이 마치 이세상의 주인인양 오만을 떠는게 얼빠졌다는거다. 게다가 지금 네주제에 마물퇴치? 오크의 한입거리 식사도 되지않아. 너는."

엄청 실례인 말을 저렇게 서슴없이 하다니, 어쩜 저리 얄미운 마족이 다있담. 물론 지금의 내상태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어..?.. 그러고보니.. 꼭 지금까지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것 같은 말이다. 노예로 팔리기 직전인 상황에도 잠깐 생각했던거지만 마치 거울을 통해서 나를 보고있었던것 같은 예감은 곧 구속의 반지 어쩌고 했던 쪽으로 신경이 쏠렸다. 설마....?

"그렇게 알려주지 않아도 전혀 도움이 안되는 방해꾼이 될거라는건 나도 알아.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정말 도망친게 되버린단 말이야. 그럼 펠릭스형님하고 아르휜의 사이도 더 멀어질거고.. 아르휜에게 가족들을 잃게 할수는 없다고"

될수있으면 가볍게 말하려고 애썻지만 왠지 조금 쓸쓸한 마음이 든다. 지금까지 아르휜이 무슨짓을 하고 돌아다녔든 가족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미움만 잔뜩 받고 살아왔다면 지금까지 진심으로 행복한 적이 없었을테니까...........

"가족? 왜 그런것에 연연하지? 재물이나 신분상승, 아주 조그만 욕망에 흔들려 질서를 어지럽히는게 인간아닌가. 키워준 어미를 잡아먹는건 거미에게만 해당되는건 아닐텐데"

다큐멘터리를 논술하는 학자처럼 아시리안이 말하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왜 그런걸 나에게 묻는거야. 아니, 넌 마족이라면서 왜그렇게 궁금한게 많아. 아니지, 왜그렇게 잘따져,따지기를.

때맞춰 음식을 가져온 주근깨아가씨가 탁자위에 고기가 풍성하게 떠있는 스튜와 부드러운 빵, 음료등을 올려놓았다. 음식들을 눈앞에 보자 생각지못했던 허기가 차서 빵을 오물오물 씹었다. 1인분의 식사라고 했을때 조금쯤 눈치챈거지만 .. 내가 먹는걸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아시리안을 힐끔 보며 물었다.

"먹지않아도 괜찮다,는 쪽이야. 아니면 이런걸 먹는건 취향이 아니다. 쪽이야?"

이런 식사가 취향이 아니라면 어떤쪽? .. .. 나는 사람의 목의 살점을 물어뜯는 아시리안을 머릿속으로 연상하고 핏기가 사악 가셨다. 설마.... 나의 아나이스 어쩌고 하는것도, 나의 먹잇감인 고깃덩이여, 뭐 이런뜻을 내포하고 있는건 아니겠지?.. 시시각각 변해가는 내표정을 이상하다는듯이 바라보기는 했지만 아시리안은 곧 거만하게 대답했다.

"마족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존재, 인간들처럼 귀찮게 음식물을 섭취할 필요가 없지. 몸을 움직이는건 마력만으로 충분하니까"

아.. 다행이네. 마력만으로 충분하다는건 사람을 잡아먹고 싶지는 않다는거지? 나는 빙긋 웃었다.

"그거 참 불쌍하네. 아시리안. 맛있는걸 먹는게 얼마나 행복한데. 겨우 빵쪼가리 하나 씹으면서 무슨 행복이냐고? 배고픈 사람은 그래. 그러니 아시리안은 알수없을걸. 빵하나에 감사하는 마음같은건."

재물이나 신분상승, 아주 조그만 욕망에 흔들려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서운 사람들따위 내가 알게 뭔가. 아직 한번도 만나본적도 없는데 그속을 어찌알아. 그냥 단지 지금의 내가 아는건 무지 허기진 내앞에 맛있는 식사가 놓여있고 밥사준 변태마족 아시리안이 조금 이뻐보인다는것 뿐.

숲에서 펠릭스형님이 행군을 멈추고 아르휜을 찾고있을 거라는 기대는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봐선 조금 무리가 있었기때문에 도중에 만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럼.. 크로멜성으로 가야겠지?.. 부지런히 수저를 놀리며 음식들을 마구 쑤셔넣는 나를 아시리안은 뚫어지게 보고있었다. 무심한 표정이지만 푸른 불꽃이 일렁거리는 다크블루의 시선은 내게서.. 아니, 이 아르휜에게서 아나이스의 모습을 찾고 있는걸까. 지독히 멀어보이기도하고 심장에 닿을듯이 가깝기도 하고 영혼을 꿰뚫어보듯 집요하기도 한 시선을 불편하게 의식하고 있을때 머리위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지만 혹시 레오포드가의 아르휜님이 아니십니까?"

엑.. 여기서까지 아르휜을 알고있던 사람을 만날거라곤 꿈에라도 생각못한일이라 나무수저를 입에 쑤셔넣던 그대로 고개를 들자 30대초반의 남자가 테이블옆에 서있는게 보였다. 허리에 찬 긴 장검과 가슴부분을 은빛갑옷으로 덧댄 하드레더를 입고있는 남자의 얼굴은 품위있어 보였지만 유난히 내시선을 잡아채는건 인중에서 양쪽으로 멋들어지게 휘어올라간 콧수염이었다. 설마.. 아침마다 저렇게 다듬는걸까? 를 생각하며 나는 대답을 기다리고있는 사람에게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예.. 마..맞는데요"

"역시, 맞으시군요. 저희 아가씨께서 동석을 요청하셨는데 함께 가시지요"

아가씨?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나는 여러개의 테이블중 한쪽에서 평범한 로브를 걸쳤지만 흔치않은 미모를 자랑하는 여자를 찾아냈다. 때마침 내쪽을 보고있는 그녀의 시선은 오랜만이야, 아르휜.. 이라는듯 했다.

"저..저분과 혹시 제가 만난적이 있던가요?"

당사자에게 누구세요? 라고 묻는 실례를 저지르는 것보다는 이쪽이 나을것 같아서 슬쩍 콧수염아저씨에게 묻자 빠직, 이마에 솟아난거.. 저거 힘줄인가? 콧수염도 조금 실룩거리는것 같네..

"에리카 라이에이드 아가씨를 잊으셨다니 대단히 유감스럽니다. 아르휜님. 한때는 펠릭스 폰 레오포드님과 혼담까지 오가셨던 분이고 아르휜님께서 열렬히 구애하시던 분인걸로 알고있는데 말입니다. 물론 아르휜님덕분에 펠릭스님과의 혼담은 물거품이 되버렸지요"

커헉...눈이 휘둥그레져서 입에 물었던 수저를 탁, 떨어뜨리는 나를 안타깝다기보다는 가증스럽다는 시선으로 노려보는 남자의 뒤쪽에서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한맺힌 시선이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못먹는감 찔러나 본다는것도 아니고 옆집영감이 땅을 사니 배가아프다는것도 아니고.. 펠릭스형님과 혼담이 오갔다면 형수가 될지도 몰랐던 사이라는건데.. 왜 형님의 여자는 껄떡댄거란 말인가..도대체 무슨 짓들을 하고 다닌거야. 아..아르휜, 당장 나와욧!!!

안그래도 복잡한 형제사이를 꽈배기처럼 더 꼬이게 한것같은 에리카 라이에이드는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거북한 얼굴을 하고있는 나를 향해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쿨하게 입을 열었다.

"꽤 오랜만이에요. 아르휜. 소식은 늘 듣고 있었답니다. 듣자하니 크로멜성으로 가는 레오포드가의 용맹한 원군에 참여했다는걸로 알고있었는데 이런곳에서 마주치게 된게 정말 뜻밖이랄까요. "

원군은 어쩌고 여관에서 노닥거리고 있냐는 말을 꽤 빙빙 돌려서 말하네. 저여자.. 무서워.

"사정이 있어서.. 펠릭스..아니 원군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펠릭스형님이라는 말을 하려고 하자 불을 뿜으며 꿈틀거리는 에리카의 눈빛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말을 바꿔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설마 아르휜같은 훌룡한 검사가 마물이 무서워서 도망치던 중일까 하고 한순간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과를 드려야되겠어요."

사과? 내가 사과처럼 보여서 아작아작 씹어먹고 싶다는 거만한 표정인걸?

"하지만 잘됐군요. 저희도 마침 크로멜성을 지나쳐서 가야하는데 호위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르휜. 호위기사들과 용병들의 실력을 못믿는건 아니지만 아르휜의 호위가 더해진다면 한결 든든할것 같네요"

..호..호위?!! 꿀꺽. 내 한몸 지키지도 못해서 오크의 한입거리 식사라는 말이나 듣고다니는 내주제에 이 무슨 헤괴한 주문이야.

"아..저..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잘 생각해서 대답해주세요. 아르휜, 거절하시면 아르휜이 도망치던 중이라고 오해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아르휜, 너는 날 벗어날수 없어, 절대- 이런 무시무시한 시선을 보내는 에리카의 강렬한 눈빛앞에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협박까지 해서 날 데려가봤자 호위는 커녕 호박하나 썰지도 못할걸요.. 라는 자백도 못한채 나는 아시리안과 함께 에리카 라이에드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에리가 라이에이드가 탄 마차는 두마리의 말이 끌고 있었고 그옆을 콧수염난 아저씨를 포함한 다섯명의 호위기사들이 지키고 그뒤를 십여명의 용병들이 따랐다.

휴우..또 이 숲을 올라야 하다니... 내팔자도 참 기구하구나. 한숨을 푹,푹, 내쉬며 뒤를 따르던 나는 옆에서 꽂히는 시선의 주인공 아시리안을 바라보았다. 뚫어지게 보는 일이야 종종 있지만 지금은 뭔가 할말이 있는듯한 얼굴이라 왜? 라는 눈으로 보자 못마땅한 시선으로 차갑게 고개를 돌린다. .. 말을 안해도 이미 속으로 팔푼이라고 생각하는거 다안다. 쳇. 쳇.

아르휜의 몸이 내뜻대로 움직이는것을 거부하는건지 내가 이 아르휜의 몸을 적응하지 못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숨을 헥헥 거리는 고행이 시작됐다. 이미 한번 지나쳐온 숲속풍경이긴 했지만 그저 걷는데만 열중했기때문에 생소하기 그지없는 숲을 가로질러 오르며 하악, 하악.. 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일행의 맨 꼬랑지에 간신히 붙어서 전신이 땀에 흠뻑 젖어 뚝뚝 흘러내리는 흥건한 땀을 닦아내느라 잠시 멈춰있자 옆에서 퉁명스런 말소리가 들렸다.

"멍청한 놈"

아시리안은 내옆에서 보폭을 맞춰 걷느라 나와함께 뒤쳐져있었다. 숨을 헉헉 몰아쉬며 고개를 돌리자 뭔가가 축축한 이마에 척, 달라붙는다. 어...하는 사이에 이마에 닿아있는 아시리안의 손에서 그때 여관에서 보았던 푸른빛이 은은하게 새어나오는게 보였다. 서늘하고 차가운 감촉이 몸속의 혈관을 따라 흐르는 기분좋은 느낌과 함께 헐떡거리던 숨이 가라앉고 후들거리던 팔, 다리가 힘을 되찾는다. 아시리안이 이마를 덮었던 손을 떼어내자 나는 조금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채 아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아............고...고마워.."

"너같이 멍청한 인간때문에 한일이 아니다"

탁, 쏘아부치듯 내뱉고 몸을 돌리는 아시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 당연하잖아. 아시리안은 내게서, 아니 아르휜에게서 아나이스를 찾고있으니까..도와준건 하은준에게가 아닌 아나이스일지도 모를 아르휜의 소중한 몸.. 인거다. 혹시 누가 보지 않았을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나는 앞서 걸어간 아시리안의 뒤를 쫒아 서둘러 걸었다.

"여기서 쉬었다가 가야겠습니다. 에리카아가씨"

마차가 있는 쪽에서 들리는 우렁찬 말소리에 휴우..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나는 적당한 자리에 주저앉았다. 점심식사로 나온 말린 고기같은 육포와 딱딱한 빵을 뜯으며 크로멜성으로 찾아가기로 한 이상 에리카 라이에이드일행을 만난건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길을 모르는 시점에서 뜻밖에 좋은 안내자를 구한 셈이니까. 게다가 무슨짓을 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머리카락괴물 변태마족과 둘만 가는것 보다는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시리안의 불편한 시선을 감지덕지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는쪽이 더 편하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뜯고있긴 했지만 어느새 반쯤 남아있는 육포를 앞에 두고 있을때 껄끄러운 동반자에서 좋은 길안내자로 내게 방향전환한 에리카 라이에이드가 다가왔다.

"아르휜, 당신 일행에게도 식사를 권해보지 그러세요?"

에리카의 말에 아시리안쪽을 힐긋 올려다보자 늘 부담스러울만큼 뚫어지게 보던 아시리안의 시선은 왠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속을 향해 있었다. 바로앞에서 서서 자기얘기를 하고있으니 조금 관심을 보여줄법도 하건만 듣는척도 안한다. 생무시에 불편한 얼굴을 하는 에리카에게 내가 서둘러 대답을 했다.

"..아시리안은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해서요."

"이름이... 아시리안님 인가요?"

아시리안님?? 함부로 대할수 없는 분위기때문이라고 보기엔 뭔가 다른 의미를 품은것 같은 에리카의 눈빛이 아시리안에게 향했다. 에리카의 흥미있는 시선을 느끼고는 있지만 돌아보지않은채 아시리안이 냉랭하게 말했다.

"너에게 내이름을 불러도 좋다고 허락한적 없다. 여자"

너? 게다가 여자? ..그..그나마 여자벌레 라고 안한거에 다행이라고 한숨을 돌려야하나.. 하지만 이런 무시중에 생무시는 생전 처음 당해보는지 에리카의 얼굴이 모욕으로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아르휜의 일행이라서 그런지 무례하기 짝이 없군요!!.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은 괜히 나온게 아니겠지요."

귀족아가씨가 어디서 이런 개무시를 당해보았을까. 화를 내는게 당연해.. 동정은 가지만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은 약간 거슬렸다. 그리고 내게는 약간 거슬렸을뿐이지만 아시리안에게는 그말이 어떻게 들렸는지 숲어딘가를 보던 시선을 에리카쪽으로 돌렸다.

"...시끄러운 계집이군"

차갑고 경멸어린 시선이 오만하게 노려보자 에리카가 흠칫, 하는게 보였다. 역시.. 자신의 필요에 의해 내옆에 있을뿐 마족이 인간하고 다른건 어쩔수 없는 걸까. 무시무시한 시선의 압력을 견디지못한 에리카가 숨을 제대로 쉬지못한채 컥, 하는 신음을 토해내면서도 꼼짝달싹을 못한다. 그만둬. 무슨짓이야, 이름을 안불러준다고 괴롭힐때는 언제고!!

"아...........아시리안!!"

벌떡, 일어서서 낮게 소리치자 아시리안이 힐긋 나를 보았다.  그사이 시선의 압력에서 벗어난 에리카가 전신을 가늘게 떨며 커헉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노려보는 나를 마주본채 아시리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탕한 음욕을 채워줄 수컷을 찾고있나? 감히 주제도 모르고 덤비지 마라. 여자. 쓸데없는 욕심은 화를 자초한다는걸 명심해. "

워낙 적나라하고 엄청난 모욕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에리카가 두걸음정도 물러서는게 곁눈으로 보였지만 아시리안의 시선은 나를 향해 고정되어 있을뿐이었다.

원하는것은, 바라는것은 단하나의 존재, 나의 아나이스..  라고 말하는듯한 강렬한 푸른 불꽃에서 시선을 피해 돌리며 에리카쪽을 보았다. 입술까지 파들파들 떨어대는걸 보자 내가 어쩌자고 이런 변태마족따위와 함께 왔던가. 라는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든다. 이 머리카락괴물변태놈에게 중요한건 아나이스, 그 지겨운 아나이스란 존재뿐, 다른 인간들은 하찮은 벌레들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마족인데...

"말을.... 왜그렇게 심하게 하는거야. 듣는 사람은 생각안해? 일부러 상처받으라고 그렇게 말하는거야? 말한마디에 상처받고 마음아파하는 하는게 사람이야. 니가 차가운 얼음덩어리라고 해서 다른 존재들의 마음도 차가울거라고 생각하지말란 말이야!!!"

버럭, 소리지르는 나를 이해할수 없다는듯이 보던 아시리안이 천천히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을 지었다.

"너역시 다른 인간들과 똑같군. 네가 보는것만으로 판단하고 네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정하지. 내가 차가운 얼음덩어리.. 라고, 그말에 책임질수 있나? 어리석고 멍청한 바보주제에 입만 살았지. 너는."

그래, 나는 어리석고 멍청하고 바보인데다가 오크의 한입거리 식사밖에 안되고 ..입만 살았다. 어쩔래!!  자기는 머리카락괴물변태주제에!!!

"나도 너처럼 거만하고 오만불손에 저혼자 잘난척하는 우기기대장은 첨본다. 왜!!!"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눌러참느라 주먹을 꽉 쥐었다. 머리에 끓어오르는 온도로 봐선 라면한개 풀어도 너끈히 잘 익을것 같다. 그때 어딘가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하하하하. 모두 꼼짝하지 마라, 비싼 머리통이 목에 얌전히 붙어있기를 바란다면!!"

얼래? ...이거,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아시리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역시, 멍청한 벌레들이 죽을자리를 찾아왔군"

뭐?.. 쳐들어올줄 알고 있었다는건가? 숲의 어딘가를 보고있던 아시리안이 떠오르자 그렇게 무리인것 같지도 않았다. 식사겸 휴식시간이라 제각각 흩어져있던 일행들이 마차를 중심으로 모이고 우리보다 배가 넘어보이는 숫자의 산적들이 일행을 에워쌌다.

"운이 좋군, 마차 생긴걸로 보면 돈많은 귀족행차인데다가 깔삼한 귀족아가씨까지 끼어있고, 오랜만에 몸좀 풀겠는데?"

깔쌈한 귀족아가씨라고 불려진 에리카의 얼굴이 우락부락한 사내들의 음흉한 시선에 사색이 되었다.

"낄낄낄, 대장, 혼자 재미보면 곤란해. 우리도 귀족계집년 구멍맛 좀 봅시다. 귀족년들 가랭이는 금가랭인가 은가랭이인가. 얼마나 쫀득쫀득한가 기대되는데?"

저속하고 음란한 말에 에리카는 기절하지않는게 장할만큼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보통 성깔이 아닌것만큼 당장에라도 산적들을 갈기갈기 찢어도 시원치 않을 눈으로 노려보고는 있지만 인원수가 배가 넘다보니까 기사들도 용병들도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현재 이 상황에 대한 주도권은 산적들에게 있었고 수만 믿고있어선지 그만큼 실력도 있어선지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것처럼 결과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것 같았다.

조잡하게 여러가지 날카로운 뭔가가 출렁거리는 할버드를 빙빙 휘두르며 거리를 좁혀오던 남자가 먹잇감을 두루두루 살피듯 일행을 훑어보다가 에리카의 뒷쪽에 서있던 나와 눈을 마주쳤다. 처음에 대장이라고 불렸던 사내는 눈을 과도하게 반짝이며 입술을 두툼한 혀로 핥으며 키득거렸다.

"이봐, 계집하고 저 빨강머리놈도 사로잡아. 저 예쁜이가 세상하직하기전에 천국맛을 좀 보여줘야겠으니까. 크하핫, 내가 천국에 데려가주지. 이쁜이"

그게 무슨뜻인지 산적들이 와아하게 웃어졌혔다. 지저분한 농담으로 웃음을 주도하느라 산적들쪽을 보던 남자가 갑자기 앞이 어두워져서인지 흠칫 시선을 돌리는걸 나도, 일행도 경악해서 바라보았다. 아시리안?.. 방금전까지 내옆에 있었는데 언제 저만큼 다가간거지? ..

"천국? 지옥구경부터 먼저 해라. 벌레"

"무...뭐.........뭐야.........이..이놈은!!"

끔찍하게 생긴 할버드를 한껏 치켜올리고 아시리안에게 내리치는 산적의 움직임에 나도모르게 발을 앞으로 뻗었다, 아시리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움직임으로 감쪽같이 사라져서 맨땅만 찍어댄 할버드를 보고 흠칫, 사내가 놀라는 사이 아시리안은 어느새 그의 뒤에 서있었다. 경악으로 굳어지는 사내의 얼굴만큼이나 나도 굳었다. ..........죽인다.......죽는다... 죽는다..저사람.......

-멍청한 벌레들이 죽을자리를 찾아왔군- 이라는 말을 내뱉었던건 이런걸 미리 예상하고 했던 말일까. 피냄새가 짙게 풍기는 잔인한 미소를 지은 아시리안를 향해 비명을 지르듯 속으로 소리쳤다. 아....안돼!!!!!! 주..죽이지마!! 죽이지마!!!!!!!!

눈깜짝할사이에 산적의 몸을 두동강내고도 남을법한 살기를 풍기던 아시리안이 내목소리를 들은것처럼 멈칫, 나를 보았다.

[...죽이지 말라고? 왜 죽이면 안된다는거지? ]

아...이거..전음인건가.. 나는 아까 무심코 했던것처럼 머릿속으로 집중에서 말을 전달하려 노력했다.

[너라면.. 죽이지 않아도 그사람들을 멈추게 할수 있잖아.....부탁이야.]

무척 비겁하고 치사한 말이긴 했지만 그말을 하지 않으면 무슨일이 벌어질지 무서웠다.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없는 아시리안의 시선이 아득하게 시선을 맞춰온 순간 그 기회를 타서 산적대장이 무식하게 생긴 할버드를 휘둘렀다. 앗!!!!!!!! 깜짝 놀라는 나와 여전히 시선을 마주친채이면서 슥, 움직이는것만으로 할버드의 위험에서 피한 아시리안은 눈깜짝할새에 바로 옆에 서있던 산적들중 하나에게서 검을 손쉽게 빼앗았다. 검을 빼앗기는것도 모른듯 멍청하게 비어버린 손을 엇해서 쳐다보는 산적에게 아시리안이 툭 내뱉었다.

"좀 빌리겠다"

그리고 소리도없이 슥, 칼을 휘두르고 바닥을 내뒹구는 팔한쪽을 보고나서야 무슨일이 생겼는지 남자가 뒤늦게 알아챌만큼 깔끔한 솜씨로 팔을 잘라냈다.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동요를 보이는 틈을 놓치지않고 용병들과 기사들이 우르르 산적떼들에게 몰려들었다. 날카로운 무기들이 부딪치고 비명이 울리고 피냄새가 퍼진다. 끔찍한 피가 난무하는 집단 난투극에서 눈을 돌리지않으려 애쓰며 나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얼마지나지않아 싸움의 향방은 손쉽게 갈라졌다. 팔과 다리하나씩이 잘려나가 전투불능상태가 되는 산적떼들이 늘어나는 통에 항복한 그들을 기사들과 용병들이 단숨에 제압한것이다. 드디어..끝난건가..  싸움을 하는 내내 쳐다보고 있는게 전부였었지만 숨을 멈추고 있었던건지 경직된 긴장의 끈이 풀리자 하아......숨이 크게 밖으로 새어나온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는 아시리안쪽을 바라보았다. 몸에 피한방울 튀지않은 깔끔한 모양새로 피가 뚝뚝 흥건하게 흘러내리는 검을 쥐고있는 아시리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없는 얼굴로 창백하게 겁에 질려있을 나를 보고있었다.

[너의 부탁은.. 들어주었다]

스르륵, 검을 놓아버리는 아시리안이 전음으로 걸어오는 말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흠칫,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인간들을 상대로한 그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나는 확실히 느낀거다. 아시리안이 마족이라는것을, 아니 강한 마족 아시리안에게 인간이란 정말 힘없는 벌레나 다름없다는것을, 인간의 팔을 잘라내는건 다잡은 파리날개 떼어내는것만큼이나 아무렇지않고 쉬운일인거다. 저 아시리안에게는.

마치 내가 왜 뒤로 물러섰는지를 아는것처럼 가까이 다가오는대신 다른쪽으로 걸어가는 아시리안의 뒷모습을 멍하게 보는 내쪽으로 아시리안대신 에리카 라이에이드가 다가왔다.

"정말 한심해서 못봐주겠군요. 아르휜. 하.. 레오포드가의 망나니께서 검술실력은 그나마 봐줄만하다고 하더니, 이제 그게 과장이었다는걸 당신스스로 증명한 셈이니까. 저따위 형편없는 산적들앞에서 벌벌 떨기나 하는 겁쟁이가 펠릭스님의 동생이라니, 펠릭스님이 불쌍하군요. 아르휜, 당신은 레오포드가의 수치로 불려 마땅해!!!"

공기중을 떠도는 피냄새, 그리고 아시리안때문에 귓속이 웅웅거려서 다다다다 비난을 퍼부어대는 에리카의 말이 머릿속으로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당신이 얼마나 비겁한 인간인지 잘알았으니까 이제 더이상 동행하지 않아도 좋아요. 당신같이 비겁한 인간에게 호위를 부탁하다니 내가 어리석었어. 크로멜성에 들러서도 당신을 만났다는 얘기는 하지않을테니 어디 신나게 도망쳐보시죠? 아르휜"

아...그래. 나는 비겁하다.. 비겁해. 나는 떨리는 양손으로 힘껏 내볼을 짝,소리가 날만큼 쳤다. 뭐하는거야. 애써 지켜준 은인을 따돌리기나 하고, 마족이면 뭐가 어때서, 죽이지 말라는 내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내부탁을 들어준 아시리안이 아닌가. 숲을 올라오는 도중에도 몇번이나 체력을 보충해줬고..  아시리안이 마족인것을 탓해서는 안돼.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것처럼 그는 마족으로 태어났을뿐이고 내가 인간인것처럼 그는 단지 마족일 뿐인거야.

나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두툼한 나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채로 서있는 아시리안쪽을 바라보았다. 아시리안이 보여준 압도적인 힘에 놀랐는지 기사들, 용병들, 살아남은 산적들까지 힐끔거렸다. 이름을 부르는것보다는 내가 그쪽으로 가는게 나을것같아 걸음을 옮기려는 나를 째지는 하이소프라노 목소리가 저지했다.

"뭐,뭐하는거예요. 아르휜!! 지금 내말을 무시하는건가요?!!"

아차.. 이 아가씨를 잊고 있었네.. 나는 황당해하는 에리카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마워요. 에리카"

내가.. 얼마나 비겁한 멍청이인지 알려줘서...

"뭐,뭐라고요? 아니, 이봐요. 아르휘인!!!!!!!!!!!"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시리안에게 용서를, 그리고 감사를 전하기 위해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공기중에 은은히 떠도는 피냄새를 풍기는 바람에 살랑, 검푸른 머리카락이 길게 휘날린다. 내가 다가서는걸 모르지는 않을텐데 눈을 감고 서서 잠이든 사람처럼 아시리안은 눈을 뜨지 않았다. 잘못을 인정하는건 쉬운 일이지만 어떻게 사과를 해야 좋을지 몰라서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후웁 숨을 몰아쉬고 고개를 들어올린 나는 흐엑, 하고 움찔, 놀랐다. 어..언제 눈을 뜬거야.

언제 눈을 뜬건지 고요히 가라앉아 일렁거리는 푸른 불꽃이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것에서 시선을 피해 난처해서 머리를 쓸어올리려던 내 손목을 뭔가가 잡아채간다. 잡은 손의 손목에 밧줄에 묶여있던 자국을 응시하던 아시리안이 중얼거렸다.

".. 흉터가 남아있군"

"아.......괜찮아.. 곧 사라질건데..뭐.."

손을 빼려햇지만 지난번처럼 쉽게 빠지지가 않는다. 오히려 힘을 꽉 줘서 잡아 윽, 신음을 삼키며 시선을 들자 화가난듯 이글거리는 푸른 불꽃이 자글자글 불타고 있었다.

"너라는 인간이 내게 특별할거라고 착각하지마. 내가 너를 통해 보고있는건 나의 아나이스일뿐"

살기어린 무서운 눈빛이 몸을 꼼짝달싹 할수없게 얽매여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내 손목에 푸른빛이 와닿았다. 마찬가지로 움직일수 없는 다른 손목역시 잡아채가서 강제로 치유당하고 나서야 몸을 속박하고있는 주술같은 눈빛이 나를 풀어준다.

"하........악...........학................하악...............하................악....."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귓가에 아시리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하찮은 벌레들의 목숨을 구걸하는 너의 부탁을 나는 들어주었지. 그러니 그댓가를 받아야겠다."

무슨 뜻인지 알수없어 시선을 들었지만 묻기도전에 잡고있던 손이 확 끌어당겨져 답싹 품에 안겨지고 뭐지.. 생각할 사이도 없이 뭔가가 입술을 덮쳐 눌렀다. 가까이있는 얼굴, 이글거리는 푸른 불꽃, 뺨을 간지럽히는 검푸른 머리카락... ..키..키스?

껴안겨져 입술이 막힌채 경악으로 떠진 눈을 깜박거리다가 나는 버둥거렸다. 나무에 가려져있다고는 하지만 자칫하면 들킬수 있는 거리다. 마구 몸을 비틀어대자 손목을 잡은 손아귀와 허리를 움켜쥔 손에 몸을 부서버릴듯 악력이 들어간다. 반항도, 저항도 무의미하게 부딪힌 입술이 난폭하게 마찰을 시도한다.

단지..나는 사과를 하려고.... 무서운 뱀이라도 본것처럼 잠시라도 그렇게 본게 미안해서.. 나도모르게 죽이지 말라고 소리쳐버린 부탁을 들어줘서, 아니 싸우지 않았을수도 있었는데, 그에게 그런 의무까지는 없었는데 싸워줘서.. 고맙다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아시리안의 말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울고있는 나를 감싸안은 따뜻한 팔이 내게 향한 거라고, 뚫어지게 바라보는 집요한 시선이 나를 향한거라고, 아름다운 푸른빛으로 신비하게 감싸주는 치유도 나를 위한거라고... 나도 모르게 착각해버렸고, 그래서 부탁도 한거겠지.. 그럴 권리가 내게는 없는데....

지금의 키스역시 그리운 아나이스에게....향한거야. 아시리안?

그렇게 생각하자 저항하는게 우스워졌다. 버둥대던 몸에서 힘을 빼자 손목을, 허리를 부술듯이 꽉 쥔 손의 악력이 풀어지고 입술을 벗길듯이 거칠게 마찰하던 입술이 뭔가를 요구하듯 꽉 다물어져있는 내 입술을 가르려고 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부탁을 들어준 댓가.. 인거지?

아시리안이 요구하는대로 꽉 다물고있던 입을 천천히 벌리자 까글까글하고 말캉한 것이 기다렸다는듯이 안을 침범해온다. 입을 얌전히 벌린채 짓눌러오는 아시리안의 입술을, 혀를 받아들였다.  입속을 유린하는 정복자인 아시리안의 난폭한 혀는 거칠었던 처음과 달리 점점 부드럽게 달래듯이 가만히 있는 내혀를 감싸고 상하 좌우로 얽으며 잇몸구석구석과 치열 하나하나를 세심히 훑어간다. 숨이 가쁘다. 머릿속이 몽롱해져갈만큼 부드러운 키스가 눈물이 나올만큼 서글프다.

계약위반을 한건 내쪽이 먼저였는지 몰라도 지금 이렇게 녹일듯이 부드럽기만 한 키스는 아시리안쪽의 반칙,

깊숙이 엉겨있던 혀와 얼마동안 마주댄건지 모를만큼 닿아있던 뜨거운 입술에서 놓여나는 순간 안겨있던 몸을 아시리안에게서 두세걸음 뒤로 천천히 물러섰다. 길고 길었던 키스의 휴우증으로 불규칙한 숨을 몰아쉬면서 후들후들 떨리는 손목을 움켜쥔채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비난하는 눈으로 본거 미안해. . . 이말이 하고 싶었어."

최대한 아무렇지않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걸 본적이 없어. .. 사실은 내가 죽었다는것도 실감이 나질 않아. 무가치하고 약한 벌레는 살아있을 권리가 없는걸까. 작은 곤충도, 아주 작은 벌레도 살아있기위해서 발버둥쳐. 그러니까...살아있는 생명은.. 살아있는 그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내가 비겁했다는건 알아. 너에게 부탁할 권리도 너를 비난할 권리도 없다는걸 알아서가 아니라.. 가만히 서서 지켜보기만 했던 녀석이 취할 행동은 아니었다는 거야."

담담하게 말하는 사이 떨림이 점차 가라앉는것같아 천천히 시선을 들어 아시리안을 바라보았다. 말로 표현할수 없는 감정의 색채가 일렁거리는 검푸른 망망대해처럼 깊은 눈빛.. 그 바다속 깊은 심연에 잠들어있는건 아나이스를 향한 집착, 나를 보고있으면서도 나를 향하지 않은 시선.

"그리고.. 오해받기 싫다면 앞으로는 내가 착각할만큼 지나치게 잘해주지는 말아줘."

몸을 돌리는 뒤통수에 꽂히는 푸른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은채 나는 힘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한쪽에 가서 앉았을때라야 부술듯이 꽉 잡혀있던 손목이 뒤늦은 통증을 호소하며 벌겋게 부풀어올라있는게 보였다. 하은준..이라는 이름따윈 중요하지 않아. ... 지금의 내모습은 아르휜, 아픈 손목역시 아르휜의 것...

그런데....이렇게 아픈 마음은 왜 생기는 거지?... 심장이 따끔거리고 아픈건 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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