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멋진 갑옷을 입은 에오포니아의 기사들이 제일 앞에서고 그뒤를 병사들이 따르고 말들이 끄는 마차가 삼십여대정도 뒤를 따랐는데 그 마차에는 아마 행군에 필요한 음식들이 담겨있을법한 짐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몇몇 귀족인 기사들을 제외하곤 대다수가 평민으로 이루어져있는 병사들에게 제멋대로구는 망나니귀족도련님이란건 불편한 존재일것이다. 행군이 얼마지나지 않아 내가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것쯤 자연스럽게 느낄수있었으니까. 그렇다고 기사, 혹은 병사들이 나를, 아니 아르휜을 보는 시선이 무례했다는건 아니지만 펠릭스형님을 대했을때는 깍듯하게 존경과 충성의 빛을 보이면서 아르휜을 대할때는 어쩔수없이 하는 인사인듯 고개를 까닥 한번 숙여보이고 가끔 힐끔거린다거나 이러면 당연히 싫어하긴 엄청 싫어하나보다 라고 생각할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로선 퍽 다행인 의외의 인물이 이 행군에 함께하고 있었다.
"프란도 갈줄은 몰랐는데"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아내며 말하자 전쟁터가 아닌 어디 휴양지라도 가는것처럼 주변경치를 둘러보며 걷던 프란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걱정마, 적어도 방해는 되지 않을테니까”
“아냐, 그런뜻이 아니고..”
오해할까봐 서둘러 말하는데 빙글거리며 웃고있는 폼이 마치 내가 할말을 미리 알고있는것처럼 느껴져서 입을 다물었다.
"저도 몰랐습니다. 프란시스하워드님이 오실줄은.. 아마 펠릭스님께서도 모르셨던것 같습니다만?"
내옆에서 보폭을 맞춰 걸으며 알프레드가 프란을 힐끔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자 프란이 씨이익, 웃었다. 정말이지..마치 그럴줄 알고 내가 따라왔지롱, 하고 슬슬 약올리는것 같은 얄미운 표정이다. 겉으로 표는 드러내지 않지만 꽤 놀라고 짜증난것 같은 펠릭스형님의 얼굴을 마주대했을때 극에 달했던 그 얄미운 표정을 생각하자 왠지 그걸 목적으로 따라온것 같기도 했다.
"아르 혼자 재밌는 일을 겪게 하는건 왠지 친구로서 배가 아파서 말이지"
재밌는 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프란..
마물퇴치하러가는게 무슨 놀러가는 유흥이라고 이따위 말이나 중얼거리는 프란을 보고있자니 의외의 인물을 보고 자동으로 죄없는 나를 째릿, 노려보던 펠릭스형님의 시선이 떠올랐다. 내가 프란을 끌어들였다고 확실히 오해하는 시선이긴 했지만 나로서는 프란이 따라와주서 솔직히 기쁘다. 검을 제대로 휘두를수도 없으면서 어쩔수없이 가게된 전쟁터도 두렵지만 언제 끝날지 모를 이 행군역시 외롭고 힘들것 같아서 나로서는 프란이 옆에 있다는게 조금쯤 불안을 덜어주었다. 거기다 프란은 내게 퍽 친절하니까.
후읍.. 하아...그나저나 지치네... 땀은 비오듯이 쏟아지고 태양은 뜨겁다. 벌써 몇시간째 행군은 계속되고 발의 뒷꿈치도 진작부터 벗겨져서 쓰라렸다. 내게는 있으나마나 무용지물일것 같은 바스타드소드도 무겁기 짝이 없다. 이러다가 마물들을 만나기도 전에 수분부족으로 말라죽을것같다,라고 생각하기를 여러번, 땅바닥에 주저않을것같은 몸을 가까스로 참고 힘겨운 행군을 계속하던 내게 퍽 다행스럽게도 멀리서 휴식을 알리는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아....다..다행이다...그 자리에 풀썩 주저않아 그제야 참았던 심호흡을 몇 번이나 거칠게 내쉬었다.
마차안의 음식물들을 준비하느라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걸 보니까 식사시간이 되어 잠시 멈춘것 같다. 다시 행군을 시작하면 또 언제 쉬게 될지, 어쩌면 저녁이 될때까지 쉬지 않을것 같은 예감에 이 휴식시간을 최대한 유용하게 쓰려고 거친 숨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편하게 자리에 앉았다. 다행이다..정말이지...흉하게 쓰러질뻔 했어..
“...아르휜님, 이왕 여기까지 오셨는데 다시 되돌아가실수도 없으십니다"
알프레드가 내게만 들리게 슬쩍 하는 말을 듣고있자니 아마 땀을 비오듯이 흘리고 숨을 헐떡거리는걸 훌룡한 연기의 일환이라고 짐작하는듯 했지만 아니라고 변명하는것도 새삼스러워서 손을 흔들어 괜찮다고 표시해주었다.
"..휴우..앉아계십시요. 식사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괜찮다라거나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라거나 아무말도 못하고 고개만 두어번 끄덕거리자 몇걸음 걸어가던 알프레드가 걸음을 멈추고 이상한듯 뒤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곧 그저 고개를 숙인채 축 늘어져 앉아있을뿐인 내게서 시선을 돌렸는지 걸음소리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간의 이 휴식시간에 어떻게든 체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려고 지긋이 눈을 감고있자 어딘가로부터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송글송글 땀이 맺힌 이마에 늘어진 붉은 머리카락을 부드러운 바람이 쓸어올린다. 그 잠시간의 고요가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을 불러일으켰다. 가족들의 얼굴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친구들의 얼굴들이 다시 그 자리를 메웠다가 다시 또 사라지고 까만 머리카락에 평범했던 내얼굴이 떠올랐다가 다시 천천히 사라진다.
........돌아갈수는 없겠지. 나는..... 죽음이라는 것은 그런것일테니까. 다시 만날수도 없겠지.. 이제는.
곧 머리를 흔들었다. 슬픈 생각은 하지 말자. 전쟁이란 어떤것일까를 떠올리자 이번엔 영화속에서 본 전쟁영화나 괴기영상물의 끔찍한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뜨고 허리옆의 장검을 내려다보자 멋들어진 바스타드소드라고 불리는 검이 뜨거운 햇볓아래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래봤자.. 너는 내게 장식품이나 다름없는걸. 어쩔래?”
다른사람에게 갔으면 검으로서의 효용가치가 있었을지도 모르나 내게 있음으로서 사과깍는 일밖에 할수없을지도 모를 멋진검이 불쌍해져서 혼자서 실없이 중얼거리는데 갑작스럽게 푸른 머리카락이 눈앞에 스윽 들이밀어졌다.
"아르,혼자서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야?"
시선을 들자 커다란 덩치로 쭈그리고 앉은 프란이 한쪽팔로 고개를 받치고 내가 이상하다는듯이 갸웃하고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하네. 땀은 또 왜그렇게 많이 흘려? 설마 그걸 걷고서 지친거냐?"
어째 저렇게 같은 말을 해도 얄밉게 말하는지.. 왠지 비웃는것처럼 샐쭉 올라간 입술을 보자니 그렇다고 인정하는게 분하게 생각된다.
"아니야. 괜찮아."
알프레드가 오나 보려고 식사를 하는 병사들 틈바구니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쪽을 돌아보다가 몸을 일으키다 나도 모르게 윽,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왜그래?”
볼썽사납게 쭈그리고 앉아있다가 나를 따라 일어서던 프란이 일어서던 자세로 멈칫하며 묻자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냥... 오래앉아있었더니..”
다리가 저려서 그렇다는 핑계를 대려고 하는데 부축하려는듯 손을 뻗는 프란을 피해 무심코 뒤로 물러서려다 다시 상처가 쓸려 신음은 참았지만 인상이 찌푸려졌다.
"야, 아르. 신발 좀 벗어봐"
프란의 나직한 음성에는 마치 내가 아픈걸 숨기고 있는걸 책망하는듯한 느낌이 숨겨져있었다. 적절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내 대응을 기다리지않고 프란은 무릎을 굽히고 내 한쪽발을 들어올렸다.
"프,프란!!괜찮다니까"
직접 신발을 벗기려는 프란의 행동에 당황해서 작게 소리치자 제각각 식사할자리를 찾아다니던 병사들이 실갱이를 벌이는 우리쪽을 힐끔거렸다. 더 이상 소란을 피우면 시선을 모을것같아 내버려두는사이 프란이 제멋대로 가죽으로 된 신발을 벗겨냈다. 벗겨낸 신발안에 뒷꿈치가 까졌을뿐인데도 오래 방치해두어서인지 제법 피가 묻어있는게 보였다. 발을 들여다보며 프란이 혀를 끌끌 찬다.
"바보같으니..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할것이지"
정말 바보멍청이를 상대한다는듯 가시가 있는 말투에 아무대답도 못하는사이 프란이 자기 짐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 좀 쉬면 괜찮아질거야.."
화를 내는건가도 싶은 반응에 기가 죽어 작게 말하자 프란이 짐을 뒤적거리던 손놀림을 멈추고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푸르스름한 눈안에 뭔가를 담은채 말하려던 프란의 입을 가로막은건 알프레드의 놀란 음성이었다.
"아,아르휜님!!"
..이런.. 두루두루 망신이네. 꼴사납게.
"세상에.. 그 발을 하고 걸으신 겁니까."
"보이기만 이렇게 보일뿐, 그다지 아프진 않아요. 알프레드"
알프레드와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프란이 짐속에서 푸른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는걸 보고 호기심이 동한 내가 프란에게 물었다.
"그게 뭐야?"
"트롤의 피로 만든 힐링포션이지. 멍청이 발따위에 쏟아붓기엔 턱없이 아까워"
트롤이라면 그 녹색괴물? 재생이 잘된다고 했으니까 그 피를 이용한건가.. 차가운 액체가 상처난 부위에 톡,톡 떨어지자 상처가 느리지만 천천히 아무는게 보여서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괴..굉장하다.”
"이상하군요. 출발할때는 괜찮아보이시던데.. "
알프레드가 머리위에서 중얼거리는걸 들으며 나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프란도, 알프레드도 다른 병사들도 다들 식사전이라 배고픈 표정만 제외하면 멀쩡해보이건만.. 게다가 아르휜이 아니었을때의 나도 이정도로 체력이 저하된적도 없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12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잠은 많이 자야 4,5시간.. 늘상 피곤에 절어있긴 했지만 내의지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훌룡한 검사라고 했던 아르휜의 이 형편없는 체력에 대해서는 나도 대단히 실망하고 있는중이었다. 게다가 조금 걸었다고 이렇게 피가 철철 날정도로 뒷꿈치가 까지질않나... 솔직히....창피하다.
"안되겠습니다. 펠릭스님께 말씀드려서 마차나 말위에 오르시는게 나을것 같습니다. 아르휜님"
"앗, 아니 괜찮아요. 알프레.....!!"
펠릭스형님께 말하면 상황이 안좋아졌음 안좋아졌지 결코 나아질것 같지가 않아서 서둘러 저지하려했지만 뭔가 굉장히 미안한 얼굴을 불편하게 짓던 알프레드는 씩씩하게 몸을 돌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친 나를 보며 연기어쩌고 한게 미안해진건지도 모르겠지만 알프레드는 한참후 내 예상대로 힘없이 더 미안해진 얼굴로 돌아왔다. 거봐요.. 괜찮다니까..
"펠릭스님 말씀이 행군에 예외는 없으시다고.."
그럴줄 알았다. 원칙을 어길 사람같지 않았고.. 거기다 아르휜이 그런말을 하면 대번에 엄살피우지 말라고 하실 분이니까. 펠릭스형님은..
"아..예.... 어쨌든 고마워요."
속은 조금 아팠지만 씩씩하게 대답하고 알프레드가 가져다준 식사를 억지로 속에 채워넣었다.
잠시의 휴식후 다시 지루한 행군이 시작됐다. 나로서는 처음보는 주변환경이었지만 조금쯤 둘러볼 호기심도 찾지 못할만큼 힘이 들었다. 계속 숨을 헐떡거리면 그거야말로 레오포드공작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르휜이 쓸모없는 방해꾼이라는걸 증명하는 꼴이기도하고 옆에서 이상하다는듯 힐긋거리는 프란도, 정말 나를 이해못하겠다는듯한 알프레드의 시선도 신경이 쓰여서 어떻게하든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버티는게 내이중고의 문제였다.
검사에다가 180의 키에 근육이 울퉁불퉁하진 않아도 결코 약해보이지는 않는 아르휜의 몸이 원래 약한게 아니었다는건 이상하다는듯이 힐끔거리는 알프레드나 프란의 시선으로 충분히 짐작할수 있었지만 나로서도 원인을 알수 없어 더 힘들고 지쳤던 하루는 커다란 숲을 반쯤 넘다가 야영을 하는걸로 끝을 맞이하는듯 했다.
헉..헉..........하..아.... 바닥에 앉으면 그대로 쓰러질것 같아서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채 서있는 사이 불을 피우고 식사준비를 하는 일사분란한 움직임 너머로 알프레드가 내게 다가왔다.
"아르휜님, 식사하시지요"
지쳐서 배고픈줄도 모르겠고 음식냄새가 맡아지지도 않는다.
"아..저기 알프레드, 미안한데.."
고개를 들면서 말하려던 나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알프레드의 옆에 서서 차갑고 엄격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붉은 시선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페..펠릭스형님??
"아........."
등을 기댄 나무에서 몸을 떼어내는 나를 훑는 시선이 느껴지며 차가운 말이 들렸다.
"전쟁터에선 귀족이나 평민이나 차별이 없다. 철없이 굴지마. 아프다고 엄살피우더니 이제 이런 음식은 도저히 먹을수 없다고 반항할 셈이냐? 이런 음식도 모자라서 굶어죽는 평민도 있어."
조용히 책망하는 말이었지만 그말을 엿듣고 있는 여러개의 시선들이 나를 힐끔거리는게 따갑다. 병사들의 대부분은 평민이었기때문에 내가 음식투정하느라 굶는거라고 생각하면 비난의 시선을 보내는게 당연하다. 하지만 조금쯤 마음이 아픈것은 이런 말을 하는게 아르휜의 친형인 펠릭스형님인데다가 사사건건 오해하고 미움받을만큼 못된 동생이었던가 싶은 아르휜이 안쓰럽고 사이가 극악스럽게 안좋은 이 형제가 안타까워서일거다.
"쓸데없는 참견이신것 같습니다. 펠릭스형님?"
앗, 이 태평하고 얄미운 소리는... !! 시선을 드는 쪽에는 처음부터 보고있었는지 어슬렁어슬렁 거리며 걸어오는 프란이 있었다. 내게 묵묵한 비난의 시선을 쏟아붓고 있던 펠릭스형님의 카리스마넘치는 시선이 대번에 프란에게로 쏠렸다.
"프란시스 하워드. 참견은 어느쪽이라고 생각하지? 잊고있는것 같은데 아무도 너에게 따라와도 좋다고 한적 없는걸로 아는데"
차갑고 위협적인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태평하게 웃음짓는게 가능한걸 보자면 프란은 대단히 무신경하거나 아니면 배짱이 상당한것, 둘중의 하나가 분명해..
"저는 단지 아픈 동생을 나몰라라 하는 무신경한 형님의 생트집을 계속 지켜보기가 어이없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차, 그리고 내가 따라온건 펠릭스형님쪽이 아니라 나의 소중한 친구 아르쪽입니다만?"
컥, 새.생트집? 프란, 어쩌자고 그렇게 막나가는거야!! 당장에라도 허리에 꽂힌 칼을 빼들고 다덤벼, 이럴것 같던 펠릭스형님은 위험수위를 넘나들며 시비를 거는 프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못마땅한 시선을 내쪽으로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아프다고?"
창백한 얼굴을 보는 시선에 어쩔줄 모르겠는 마음의 한켠에 그래도 동생이라고 걱정해주는건가.. 싶어서 조금 뜨뜻해졌던 마음은 곧 이어진 차가운 비웃음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아르휜, 너의 연기가 날이 갈수록 훌룡해지는군. 아픈 연기도 제법이야. 하지만 네녀석이 더이상 못걷겠다 버텨도 말뒷꽁무니에 밧줄로 매달고서라도 끌고갈테니 그쯤해두시지. 식사를 굶든 말든 그건 알아서해라. 하지만 너로인해 행군에 차질이 생긴다면 아무리 내동생이라도 예외는 없다는걸 명심해"
수십개의 바늘이 명치끝을 쿡쿡 쑤셔온다. 왜그렇게 차갑게 말해. 당신 동생이잖아. 왜그렇게 미워해. 당신과 닮은, 당신 친동생이잖아..
차갑게 말을 내뱉으며 돌아서는 펠릭스형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쓸데없이 참견해서 더 미움받게 만들어논 당사자쪽으로 책망어린 시선을 던지자 마치 자신은 아무 잘못없다는듯이 어깨를 으쓱하는 프란이었다. 에휴.. 그래.. 뭔말을 하겠냐... 대신 나는 알프레드에게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알프레드, 그거 줘요. 먹을테니까.."
"..아르휜님.."
"먹는게 좋을 것 같아요."
펠릭스형님의 말도 그렇고 여기저기서 쳐다보는 병사들의 시선들도 그렇고 이쯤하면 먹어둬야 할것같다. 속이 불편하다고 먹지 않으면 정말 전쟁터에 따라와서는 음식투정이나하는 철없는 도련님으로 오해받을것 같으니까..
내 얼굴이 새파려있어선지 못먹겠다고 말하려던걸 염두에 두고 있어선지 건네주기를 주저하는 알프레드에게서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건네들고 나무둥치에 앉았다. 아르휜에게도, 하은준에게도 무척 서러운 마음을 받아삼키듯 억지로 꾹꾹 집어넣은 빵과 스프는 냄새를 느낄수없던 것만큼이나 아무맛도 느낄수가 없었다.
그리고 억지로 집어삼켰던 제대로 맛없었던 식사의 결과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못하고 불편한 속을 뒤척거리던 한밤중에 효과가 나타났다.
"윽...!!"
입밖으로 튀어나올것 같은 토기에 손으로 입을 막고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야영지에서 이탈했다. 어두운 숲속으로 조금 들어와서 나무둥치옆에 한참을 우엑, 하고 토하자 소화가 안됐던 음식물이 그대로 다 쏟아져나오고 더이상 나올게 없을 때까지 토한후에야 토기가 가라앉는다. 불편한 속을 어느정도 털어내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던 나는 현기증에 잠시 멈칫, 멈춰서서 숨을 가만가만 내쉬었다. 몸이 무겁다. 허리에 찬 바스타드소드도 안에 입은 하드레더도 모두 벗고 최대한 가벼운 옷차림이긴 했지만 여전히 끌고다니기에 힘들다.
돌아가기위해 걷기를 한참.. 뭔가 이상함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된거지?.. 굉장히 오래걸은것 같은데.. 일행이 있는 야영지가 안나온다. 설마 길을 잃은건가?.. 아, 진짜 바보짓도 골고루 하는구나. 적막한 어둠속에서 소리를 지르면 가능하겠지만 자다가 일어나서 비웃을게 뻔한 시선들과 책망하는 붉은 눈빛을 생각하자 저절로 깊은 한숨이 뿜어져 나온다. 어차피 ..한밤중이니까 일단 내힘으로 해보고.. 안되면 그때 소리치자고 결심하고 한참 다시 걸어가던 나는 스스슥, 뭔가 움직이는 기척에 움찔, 멈춰섰다. 뭐..뭐야.
"이것보라고, 토헤이. 이건 모두 니놈때문이야. 내말대로 이숲을 넘는건 날이 밝은후로 미뤘어야 한다고!! 이게 대체 무슨 고생이야"
"시끄러워, 좋다고 따라와놓고 고생은 무슨 고생!! 떠들시간 있으면 얌전히 따라오기나 해."
아...사람이구나... 어스름한 달빛아래의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낸건 말소리로 보아 20대후반이나 30대초반으로 보이는 사내두명이었다. 길을 잃은것 같아 당황하고 있던 참이라 퍽 다행이다고 생각하며 숨을 길게 내쉬는 나를 뒤늦게 발견했는지 조금 놀란것 같긴 하지만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건장한 사내둘이 서로 시선을 부딪쳤다.
"안녕하세요. 한가지 여쭤볼게요."
"응? 아..그렇게 하시오"
"죄송한데.. 제가 일행과 헤어져서 그러는데 혹시 오시다가 군의 야영지를 보지 못하셨나요?"
“아..이제보니 길을 잃으셨군. 가엾게도..”
가엾다고 말하면서 내머리에서 발끝까지 주욱 훑어보는 시선이 뭔가 불길하다고 느낀건 사내둘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면서 부터다. 뭐...뭐지. 이사람들?
"흐음.. 군이라면 한사람쯤 없어져도 눈치는 못채겠는데?"
사내한명이 다른 한명에게 슬쩍 시선을 던지며 하는 말에 나머지 한명이 웃는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토헤이, 아까 했던말 사과하지. 이게 웬 횡재야. 팔면 꽤 비싸게 받을수 있겠는걸?"
횡재? 판다고? 흠칫, 뒤로 물러서는 나를 보고 사내한명이 허리춤에서 밧줄로 보이는것을 꺼냈다.
"흐흐.. 노예로서 저정도면 최상품이야. 최대한 다치지않게 사로잡자고"
단지 길을 물었을뿐인데 갑자기 노예어쩌고 하며 잡으려는 사내들에게서 몸을 돌려 도망치려다가 뒷통수를 얻어맞고 기절했던 내가 눈을 뜬건 짐승의 우리처럼 보이는 쇠고랑이 이어진 감옥비슷한 곳에서였다. 얼마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던건지.. 주변을 비추는 불빛이 없어도 날이 훤하다.. 양손목이 위로 잡아올려져 묶여 벽에 고정되어있고 다리도 한쪽씩 쇠사슬같은 것으로 묶여 고정되어 있어 온몸을 꼼짝도 할수가 없었다. ... 큰일났다.. 어쩌지..노예 어쩌고 하는걸로 봐서는 나를 팔 생각인것 같은데..
이를 갈며 노려보는 붉은 눈빛이 허공에 둥둥떠다니고 알프레드의 눈빛도 프란의 눈빛도 힐끔거리는 기사들, 병사들의 눈빛도 생각났다. 레오포드가의 망나니께서 결국 도망을 치셨군.. 이라는 비웃음도 자연스럽게 떠오르고..붙잡힌 신세도 그렇지만 이렇게 되면 나로인해 펠릭스형님과 아르휜의 사이도 더 오해의 골이 깊어질거라고 생각이 드니까 울고싶어졌다.
[도와줄까]
... 어라? 이게 무슨 소리지?
분명히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귀에 들리는 소리는 없었는데 뭔가가 말을 걸어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채 주변을 두리번 거리자 마치 내모습을 보고있는것처럼 머릿속에서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갈수록 바보군. 인간, 멍청하게 두리번 거리지마. 이건 전음이다]
전음이라고? 그게 뭔데?.. 다시 머릿속을 타고 울리는 차가운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전음도 모른다고?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는 벌레군]
어처구니 없다는 말투에 아마도 그 벌레라는건 나를 지칭하는듯도 싶었지만 그 무례한 대화법보다도 주위에 아무도 없고 귀로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데 머릿속으로 들리는 목소리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어디선가 들었던것도 같은 목소리인데 ....
"누구세요?"
잠시 잠잠하게 침묵하던 목소리는 한층 낮아진듯 싶게 내뱉다시피 대꾸했다.
[....아시리안이다]
아시리안이 누구.......아....!!!..아.. 아시리안........이라면...............헉!!!!!!!!!!!!!!!!!!!!!!!!!!!!!!!!
"으헥!! 그 머리카락괴물변태!!!!!!!!!!!!"
[머.리.카.락.괴.물.변.태??...흥, 도움은 됐나보군.]
뭐..뭐야. 이 썰렁한 놈은 .. 우와, 심장이 벌렁벌렁거리네. 머리카락으로 변태짓을 하며 괴롭히질않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리질 않나.. 마족이라더니.. 그게 사실인가..?
도와줄것처럼 찝쩍거리다가 뭔가에 삐쳤는지 사라진것같은 잠잠함이 의심스러워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전음이라는 목소리는 두 번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이 아닌 귓가에 아시리안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들이 들려와서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예. 꽤 좋은 물건들이 많이 들어왔습죠. 분명 마음에 드실겁니다"
“흥, 감히 거짓말을 한거라면 등가죽에 채찍맛을 볼줄 알라고”
겔겔 거리는 거친 목소리에 이어 거만한 남자의 목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오는지 점점 커진다.
"이,이봐요!!"
나는 양손목과 다리가 묶여있다는것도 잊고 앞으로 나가려다가 양팔이 잡아당겨지는 아픔에 윽,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애타게 부르지않아도 내가 있는쪽이 목적이었던듯 싶은 발걸음이 딱, 멈춰섰다. 고개를 들자 쇠고랑밖에 허리가 굽어 아부하듯 굽신거리는 남자와 장신을 우뚝 세운채 내쪽을 사납게 보이는 남자가 보였다.
겔겔거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딱 어울리는 곱추남자가 굽은 허리를 더 굽신거리며 나를 뚫어지게 보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여기 이녀석입니다. 오늘 들어온 싱싱한 물건입지요."
굽신거리는 사내의 말은 들은둥 마는둥하며 뺨에 칼자국이 길게 나있어 잘생긴 얼굴에 어두운 악당의 이미지를 한껏 강조하는듯한 사내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붉은 머리카락이군"
물건의 가치를 평가하듯 싸늘하게 훑어내리는 시선이 소름끼친다. 물러설데도 없으면서 흠칫, 하고 벽에 달라붙는 나를 옭아매듯 훑으며 입가를 비트는 사내의 웃음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습니까. 저물건으로 하시겠습니까?"
나를 사서 어따가 쓰려고?
"눈이 사나워보이는군. 아직 길들이지 못한건가?"
"앗..예.. 오늘 들어온 물건이라.."
"하긴, 직접 길들이는것도 재미있겠지."
기..길들여? 뭘? 다시 흠칫, 하자 먹이를 잡아채는 독수리의 눈빛처럼 칼자국난 사내의 시선이 무섭게 쫒아온다.
"문을 열어라."
"예."
음흉한 눈빛으로 실실거리며 곱추사내가 문을 열어서 안내를 하자 큰보폭으로 남자가 안에 들어섰다. 그들이 가까워지자 궁지에 몰린 사슴처럼 움찔, 몸이 떨렸다. 꼼짝없이 묶여있는데다가 뭘 한건지 알수가 없으니까 견딜수없이 무서워졌다. 바짝 가까이 다가선 남자의 억센 손아귀가 턱을 콰작 부술듯이 움켜쥐고 바짝 치켜올렸다.
"뭐...뭐하는..!"
반사적으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휘젖자 가소롭다는듯 비웃는 남자의 드러난 이의 가장자리가 흉악스럽게 빛난다.
"겁에 질린채 발톱을 세운 고양이같군. 주인에게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면 벌을 받는 법이야. 붉은 고양이"
짜악- 눈앞에서 반짝 별이 보일만큼 뺨이 후려쳐져서 고개가 꺽인다. 두려움때문에 얼얼한 뺨의 통각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는데 이게 끝이 아니라는듯 턱을 움켜쥔 남자의 억센 손아귀가 다시 얼굴을 치켜올렸다.
[내이름을 불러. 그러면 도와주겠다]
윽..사..사라진게 아니었잖아... 이 머리카락괴물 변태놈잇!! 머릿속에서 다시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이상황도 무섭지만 그 마족의 아지트로 보이는 회색공간에서 공중에 높이 띄워져서 길게 늘어난 머리카락에 몸이 죄어지고 희롱당했던 그 경험도 충분히 끔찍했다.
"시..싫어. 이 변태자식아!!!"
누가 너따위에게, 너따위에게 도움을 청할줄 알고!!
"흥, 보기보다 성깔은 있다 이거냐? 하긴 그쪽이 더 재미있지. 반항하는 놈을 굴복시키는것도 꽤 즐거운 유흥거리중의 하나니까. 후훗 채찍맛을 보게되면 아마 생각이 바뀌게 될거다. "
잔인한 말에 눈을 번쩍 뜨자 노예에게서 변태,라고 불린게 무척이나 화가 난듯 열받은 얼굴을 실룩거리는 남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그게 아닌데.. 아니지.. 이사람도 충분히 변태스러워보이고..또..위..위험한것 같은데..어..어쩌지..
"카..카자르님, 노예에게 상처를 입히는것은.."
사내가 사나운 얼굴로 허리춤에서 채찍을 꺼내자 뺨을 때릴때까지만 해도 얌전히 지켜보던 곱추사내가 냉큼 끼어들었다.
"이 노예를 내가 사겠다. 그럼 상관없겠지?"
채찍을 손에 감은 남자를 보고 말릴듯이 나섰던 곱추사내는 원하는걸 얻어낸 사람처럼 흡족한 표정으로 몇걸음뒤로 물러섰다. 남자의 손이 쫘악- 상의를 길게 잡아 찢자 두려움으로 움찔, 하는 나를 보고있는것처럼 머릿속에서 다시 자신을 마족이라고 주장하는 변태괴물의 화난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내이름을 불러!!]
시..........싫......................짜악-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통증이 가슴을 후비고 지나갔다.
"으아아악!!!!!"
아픔만큼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자 훗, 하는 비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한대가지고 죽을것 같은 표정은 심하군. 붉은 고양이. 나를 이만큼이나 화나게 만들었으면 좀더 즐겁게 해줘야지않겠나!!"
짜악- 긴채찍이 가슴언저리를 할퀴고 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다가온 고통에 비명이 목구멍속으로 사라지고 대신 뜨거운 숨이 하악- 토해졌다.
[내이름을 불러라!!!!!!!!!!]
시..싫어, 절대로 도와달라고 안해. 싫어!!!!!!!!.
"몸을 뒤트는게 꽤 귀엽군. 고양이.. 용서를 빌지않는것도 제법이고..후훗"
오해하는것 같아 미안하지만.. 용서를 빌 정신이 없다. 이 고통을 어떻게 견뎌야하는지 알수가 없어서 철썩거리는 채찍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아픔에 온몸이 후들후들 경련할뿐. 가물가물 흐려지는 의식속으로 아시리안의 분노에 휩싸인 외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 멍청한 놈!!!!!!!!!!!!!!그럼, 죽어. 차라리 죽어버려라. 너같은 인간따위!!!]
왜.. 화를 내는거야. ..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게 그렇게 분해? 시키는대로 이름을 불러주지않는게 그렇게 화가 나? .. 이상한 놈.. 이상한 변태마족.. 이상.....이상해...이런거..........너무............이상해..
다시 휘릭,하고 채찍이 크게 원을 그리는 소리를 들으며 몸이 추욱 늘어지는 순간 흐릿한 시야안에 검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누군가가 내앞에 나타났다.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는 고개를 받쳐드는 손의 힘에 억지로 들어올려진 눈에 분하고 서글픈듯한 푸른 불꽃이 이글거리는 눈빛이 나를 직시했다.
"내게 도와달라고 하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렇게 하기 싫은건가?"
어렵다거나 하기싫다거나.. 그런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않아서 그저 고개를 다시 축 늘어뜨리는 귓가에 장난감을 빼앗겨 뿔난 사내의 고함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너는 뭐냐!! 마법사인가?!!!"
마법사가 아니라요.. 얘는 마족이라네요....속으로 웃는 사이 아시리안의 무감각하고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죽어라, 하찮은 벌레들"
인간에게 벌레라니, 실례야. 그것도 엄청 실례라고.. 아픔으로 열이 확확 오르는 멍한 머리속으로 히죽, 웃으며 천천히 정신을 잃어가는 속에서도 위로 묶였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져내린다. 동시에 힘을 잃고 쓰러지는 나를 품에 받아드는 무언가를 느끼며 벼랑끝 어둠이 해일처럼 눈앞을 와락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