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실드, 이 바보를 좀 도와줘"
프란의 말이 끝나자 바람에 감싸인 몸이 둥실 허공으로 솟구친다. 우와..이거 정말 굉장한걸.. 하급 정령이라곤 했지만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서늘한 바람을 신기해하며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고 어스름한 새벽의 미명아래 조금씩 수줍은 존재감을 드러내는 푸른 풀을 밟으며 앞으로 걸어가려던 나는 붉은 안광을 발사하며 노려보는 무언가에 깜짝 놀라서 아앗,하고 숨을 들이켰다. 페..펠릭스형님?? 산책하러 나오신것 같진 않고 조깅하기엔 날이 아직 어두운것 같은데...
"제버릇 개못주지. 아르휜. 며칠간 네방에 붙어있다고 하길래 얼마 안남았다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품위없이 또 창녀들하고 놀아나고 오는중이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정신을 차릴 생각인거냐. 네녀석은!!!"
뭐랄까. 정신없이 몰아쳐대는 소리중 마지막에 들린 소리만이 내가 답할수 있는 전부. 그러니까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수없는 아르휜이 언제 돌아올건지는 나도 모른다는것, 그래서 꽤 답답하다는것. 오해만 잔뜩 받고.. 마족이라고 주장하는 정신병자에게 희롱만 당하고..내가 죽은뒤까지 이렇게 서럽고 서글픈 고난의 길을 걸을만큼 나.. 나쁜 녀석이었던걸까.
"하긴, 기억상실인척 연기하는것도 이제 슬슬 지겨워질때도 됐겠지. 네놈은 주변의 모든 인간들을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하는 녀석이니까."
이를 갈며 내뱉는 말이 하나하나 가슴에 가시처럼 푹푹 박힌다. 아르휜.. 이 나쁜놈. 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사방이 적인데다가 친형님까지 이렇게 이를 가는거야. 정말 미움한번 제대로 받고 있네.. 정말 미워하고 있는거야. 저눈은..
서늘한 바람이 스륵 불어서 몇걸음앞에 서있는 펠릭스형님의 붉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린다. 하지만 차가운 바람에 한치도 흔들리지 않는 엄격하고 절제된 붉은 시선이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아니 아르휜을 죄인처럼 몰아세웠다.
"레오포드가의 명예를 더럽히며 날건달처럼 히히덕거리는게 꽤 즐거웠겠지만 이제 더이상은 곤란하다는걸 명심하는게 좋을거다. 명예는 커녕 저급한 시장날건달처럼 휘둘러대는 너의 검이 마물들과 싸울때는 얼마나 쓸모있는지 지켜보겠다. 기억상실인척 연기하는것도 거짓으로 판명된 마당에 더이상 크로멜성으로 떠나는걸 못가겠다고 할 핑계는 없겠지?"
엉? 내가 뭘 어쩐다고? 기억상실인척 연기한다고 생각할만큼 신용을 잃어버린건 무지 서글프지만 어째 마물어쩌고 하는게 심히 불길하다.
"자..잠깐만요. 제..제가 어딜 떠난다구요?"
눈을 깜박거리며 묻자 이를 가는걸로 모자라 붉은 머리카락만큼이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듯한 펠릭스형님이 지겹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멍청한 연기는 집어치워라. 이제 네가 무슨 짓을 한다해도 크로멜성으로 가는 원정단에 질질 끌고라도 갈테니까. 기억상실? 하, 웃기는군. 마물들의 먹잇감이 되고싶지않으면 떠나는날 전까지 검연습이나 해두시지.쓸모없는 레오포드가의 개망나니노릇도 이제 끝이다. 아르휜 폰 레오포드!!"
뭔가를 다다다다다 쏟아내고 몸을 휙 돌려서 척척 걸어가는 남자의 등뒤에서 멋들어지게 휘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나는 멍하게 내가 지금 들은 단어들을 조합해보았다. 크로멜성, 원정단. .. 마물들의 먹잇감.................흐에에엑!!!!!!!!!!!!! 크..큰일났다아..
오크, 현상범찍어논 것처럼 실물처럼 그려진 생생한 그림아래엔 그 출중한 외모답게 흉폭한 식인몬스터라고 써있는게 보였다. 덩치가 인간보다 크고 힘도 세다. 지성은 빈약하지만 무기를 다루는 전투기술은 굉장함, 주로 무리지어 군대를 이루고 숲에 거주하며 여행자들을 공격해 먹이로 삼거나 가까운 마을을 침략하기도 함.
트롤, 얘는 녹색괴물처럼 생겼다. 비대한 몸때문에 얼굴은 조그맣고 .. 그림 아래에는 역시 식인몬스터라고 써져있다. 거대한 신장에 강력한 힘을지닌 이 괴물들은 인간의 고기를 즐긴다.딱딱한 피부때문에 방어력이 대단히 높고 상처를 입어도 단기간에 재생하는 능력을 가지고있기때문에 일격에 죽일만한,목이 날아가거나 심장 혹은 뇌에 타격을 입혀야한다.
골렘,마법사가 물질에 마법을 걸어 움직이게 한 몬스터. 마법사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돌로 이루어지면 스톤 고렘, 나무면 우드 고렘, 금으로 만들면 골드고렘 등등이 나오며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으로 만든 고렘, 즉 플래시고렘에 해당하는 존재이다. 기타등등.. 서재에서 마물백과사전이라는 책에 열거된 괴물들의 모습과 주요습성들을 눈으로 훑던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침착하게 책을 탁, 닫으며 옆에 서있던 알프레드에게 물었다.
"알프레드, 크로멜성으로는 언제 떠나나요?"
"예? 아..예..3일남아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니까 보기에도 흉칙해서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놈들을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는 거잖아.
"저기..아르휜이, 아니 내가 전에 쓰던 검이 어디있는지 알려주겠어요?"
"아, 예. 잘 생각하셨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알프레드의 말이 어딘가 이상해서 에?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알프레드가 이어 말을 했다.
"펠릭스님께서 아무래도 이번에는 아르휜님을 꼭 데리고 가실 모양이니 기억을 잃으신척 하셔도 소용이 없으실듯 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그동안 검연습이나 해두시는게.. 물론, 아르휜님이 굳이 연습이란걸 하지 않으셔도 충분히 마물들따위를 해치울 능력이 되신다는걸 알고는 있습니다만.."
커..헉.. 알프레드까지 의심을 하고 있었을줄이야.. 어쨌든 그전에 아르휜이 얼마나 휼룡한 검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문제는 그 훌룡한 검사몸에 들어온 녀석이 날카로운 것이라고는 과일을 깍던 과도, 연필심을 깍던 칼만이 전부인 하은준이라는 것인데 있는거다.
가족들이 집에 아무도 없거나 내몫의 저녁식사가 남아있지 않을땐 주로 굶거나 라면을 끓여먹었기때문에 식칼한번 잡아본적 없던 나이거늘.. 휴우..큰일났네. 이제와서 난 아르휜이 아니라 하은준이예요. 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봤자 펠릭스형님은 커녕 알프레드도 믿어줄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이렇게 연기라고 다들 철썩같이 믿고있는건지..
알프레드가 가져다준건 손가락만 슬쩍 잘못 가져다대도 베일것같은 길다란 칼이었다. 그래도 떠나기전에 검을 휘둘러보면 이몸은 아르휜의 몸이니까 금방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은 기대감에 주섬주섬 검을 들었다. 검의 손잡이가 길어서 두손으로 쥐는게 더어울릴것 같아 양손으로 덥썩 쥐고 사선방향으로 휙 그으며 그대로 휘두른 방향쪽으로 무게가 쏠려 휘청, 거리다가 짜잔, 하고 중심을 잡은후 알프레드를 바라보며 빙긋 웃자 알프레드가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재는 좀 좁으니 대련을 여기서 하시는것보다는 늘 하던대로 뒷뜰쪽에서 하시는게 좋을것 같습니다만.."
"대련?"
하..하긴 혼자 휘둘러대는것보다는 연습상대가 있는게 나을지도... 하지만....
"누..누구와 대련을 하죠?"
알프레드가 다시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르휜님의 대련상대는 늘 제가 해드리지 않았습니까."
아,그렇구나.. 알프레드가... 알프레드, 이 얍실해보이는 사람도 거..검사? 왠지 책만 죽어라고 팔것같은 공부벌레 인상이라 좀체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실상 실감이 나지 않는건 엉거주춤 검을 실제로 들고있는 지금의 나인지도. .. 하지만, 나는 비장한 각오로 단호하게 말했다.
"아...알았어요. 가죠. 까짓거.."
책만 죽어라고 팔것 같은 공부벌레? 단연코 NO였다. 알프레드의 검은 막는것도 서투른 나를 거의 벨것처럼 빠르게 다가왔고 검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걸 알수있을만큼 날카로웠다. 양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긴 했지만 아무리 성능좋은 권총이 손에 쥐어졌어도 사격방법을 모르면 말짱 황인것처럼 꽤 검솜씨가 쓸만했다던 아르휜의 몸도 하은준의 지배아래서는 영락없이 식은땀만 뻘뻘흘리는 한심한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한참 알프레드의 주도하에서 검술대련이라고 말하기도 꼴불견인 상황을 연출하던 나는 검을 손에서 떨어뜨리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전신이 땀투성이다. 더 슬픈것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가온 알프레드가 조심스럽게 건넨 한마디의 말이었으니..
"아르휜님.. 이러셔도 크로멜성으로 가는 원정단에선 빠지실수가 없습니다. 이미 펠릭스님께서 공작님께 보고를 다 마친 상태니까요. 잠시만 쉬고 계십시요. 차가운 음료를 준비해오겠습니다"
아르휜으로서는 모르겠지만 하은준으로서는 되지도 않는 검연습을 하겠다고 긴장한채 검을 서툴게 휘둘러대느라 퍽 지친 상태였기때문에 숨을 헐떡거리며 간신히 고개만 끄덕끄덕해보였다.
큰일이다... 크로멜성인지 뭔지 따라가는게 옳은일일까. 이런 상태로 가봤자 방해꾼밖에는 안될텐데.. 땅바닥에 주저앉은채 새끼손가락에 끼어있는 반지를 빙글빙글 습관처럼 돌리던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거야. 그 머리카락 변태괴물놈이 준 반지따위를!! 미쳤어,미쳤어, 내머리를 콩콩 쥐어박으며 나는 좀더 냉정하게 손을, 아니 손가락에 끼어있는 반지를 노려보았다. 지금보니까 황금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테두리에 알수없는 문양의 무늬가 글자처럼 씌여져있다.
내가 왜 아직 이 재수없는 반지를 끼고 있다지.. 당장 빼버려야겠다싶어서 새끼손가락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나도 모르게 멈칫 멈춰버렸다.
-아나이스..아나이스..아나이스..소멸된게 아니었던가..-
슬프게.. 아니 아프게도 들리던 부름.. 그리고 울듯이 일그러진 신비할만큼 아름다운 검푸른 눈동자..
그사람..아파보였어.. 슬퍼보이기도하고.. 어쩌면 못된 아르휜이 그사람에게 아나이스라고 이름을 사기쳤는지도 모르고..
-그 반지는 너를 내게 구속시키는 약속의 반지-
조용하게 들렸지만 거부할수없었던 그의 목소리를 생각하다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구속의 의미라고는 했지만 내몸에 별다른 일이 있는것도 아니고.. 빼버리는건 너무한걸지도, 무엇보다도 그의 아나이스가 아르휜이 맞을지도 모르기도 하고..나중에 가출나간 아르휜의 영혼이 돌아오면 그때가서야 알수 있겠지만....역시 그냥 놔두는게 낫겠어..
이렇게 앉아있으니까 헐떡거리던 숨도 가라앉고 전신에 흐르던 땀도 서늘한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바람결에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죽는다는건 어떤 의미일까. 소멸이라는것은.....존재가 없어지는것, 사라지는것, 하은준으로서의 육체는 그럼, 소멸된거겠지.... 음, 아마도 커다란 트럭과 부딪쳤으니까 죽은게 아마 맞겠지.
나는 쓸쓸하게 웃었다. 풀어헤쳐진 가방에서 흘러나온 낡은 책들이 피에 너덜하게 젖어가던 흐릿한 영상은 아직 지워지지 않는다. 이게 죽는다는거구나..라는 막연한 깨달음도, 그리고 친구들이 보고싶었다. 아마도 조금 외로운것 같다.
펠릭스형님도 유테르도 알프레드도 프란도 어쩌면 그 머리카락괴물도 내가 아닌 아르휜의 모습을 보고 있을뿐. 증오하는것도 미워하는것도 조심하게 대하는것도 친절하게 대해주는것도 광적으로 집착하는것도 모두 내가 아닌 아르휜에게 향한 마음의 일부분일뿐. .. 어디에도 하은준으로서의 나는 없다, 그런데도 이런걸 살아있다.라고 할수가 있는걸까. 모르겠어.. 정말..모르겠어.. 이렇게 숨을 쉬고 얘기를 할수 있다는건 살아있다는 증거겠지만 다른사람의 인생을 대신해야하는건 그다지 즐겁지 않다고....
.. 그러니까 이봐요, 아르휜.. 빨리 돌아와주면 좋겠어. ... 나는 당신을 대신해서 마물들과 싸울 자신까지는 없다구요..
알프레드는 차가운 음료가 담긴 컵을 쟁반에 들고 나오다가 그가 나서던때와 똑같이 땅바닥에 털털하게 앉아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아르휜을 보고 멈칫, 멈춰섰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가엾은 바스타드소드가 흙먼지속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는것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아무리 저래도 소용없을텐데..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등허리까지 물결처럼 웨이브진 타는듯이 붉은 머리카락이 감싸고있는 아름다운 얼굴은 대단히 출중한 연기라고 박수까지 쳐주고 싶을만큼 지쳐보이는 얼굴을 하고있다. 평소의 아르휜이라면 고작 검연습을 몇시간 했다고 저렇게 땀을 비오듯이 흘리지도 않았겠지만, 거기다 우스꽝스럽게 검을 잡은 모양새도 그렇고.. 저렇게해서까지 크로멜성으로 가기가 싫은걸까, 라고 다소 안쓰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것도 아니지만 알프레드가 아르휜의 옆에서 시중을 든것도 벌써 몇 년이던가.
그나마 알프레드가 아니면 아르휜의 옆에서 버텨나지도 못했을거라는 말이 하인들중에서 암암리에 떠돌만큼 괴팍하고 성격나쁜 아르휜이다. 불편한 존댓말도 그렇고 검을 전혀 못다루는 사람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도 그렇고 주인의 변덕이 그리 오래갈리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레오포드가의 망나니라는 화려한 별명까지 가지고있으면서도 이런 연기까지 해야할만큼 마물퇴치하러가는 원정단이 싫었을까,라고 한숨을 내쉬며 부디 이번 여행으로 인해 망나니같은 성격이 (펠릭스님의 기대만큼은 아니겠지만) 조금쯤 철이란게 들기를 약간 기대할 뿐이다. 그래도 어쩐지 저렇게 힘없이 웅크리고 앉아있는 쓸쓸한 모습에 약간의 동정심이 드는것도 사실..흠,흠.. 아니,아니지. 저건 모두 연기라고. 저기 앉아있는게 레오포드가의 망나니 아르휜 폰 레오포드라는걸 잊으면 곤란하지. 알프레드.
"도련님, 여기 음료를 가져왔습니다."
"아, 고마워요. 알프레드"
힘없이 앉아있던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르휜이 쓸쓸한것 같았던 얼굴을 지우며 방긋 웃는걸 보며 알프레드는 아르휜을 눈치안채게 조심스런 눈길로 살폈다. 역시..연기...인걸가?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역시?
아무리 아르휜이 뛰어난 검사였음 무엇하리오. 그 뛰어난 검사의 몸속에 들어와있는건 커터칼날로 연필 깎아본 경력밖에 없는 바보인것을. 이런 나에게 검으로써 마물퇴치하라고 하는건 최신컴퓨터앞에 원시인을 던져놓고 검색하라고 시키는거나 다른없다. 그러나 마물인지 코딱지인지 퇴치하는 원정단에 끌려가게 된것은, 아니 피할수없는 것이 기정사실이니만큼 나는 어떤식으로든 검에 친숙해지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것은 피나는 노력만큼 결실이 맺어지지가 않는다는거지만 내안타까움에 상관없이 날짜는 하루하루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결전의 날, 아니 이 레오포드가를 떠날 날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크로멜성에 황자가 온다는 소문이 있는건 너도 알고있을거라고 생각한다. 펠릭스. "
아..저사람이 아르휜의 아버지구나. 레오포드공작님의 서재에서 훈련받은 사관처럼 깔끔하고 절도있는 동작으로 정중히 인사하는 펠릭스형님의 옆에서 나도 같이 고개를 숙이며 레오포드공작을 힐끔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엄격해보이고 차가워보이는 얼굴은 한눈에봐도 가족이란걸 알수 있을만큼 펠릭스형님과 그리고 아르휜과 닮아있고 유테르의 모습도 있는것 같지만 그래도 제일 많이 닮은건 펠릭스형님인것 같다. 펠릭스형님이 한 30년쯤 지나면 저렇게 되는구나 싶을만큼 절제된 표정이라던가 하는게 닮아있다.
"예. 저도 들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황자와 친분을 쌓아두는것도 좋은 일이 되겠지요"
"레오포드가에서 원군을 보내는것은 마물퇴치를 위한 지원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앞으로의 정치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회가 될지도 모르니 너를 믿겠다. 하지만 왜 아르휜녀석을 데려가겠다고 하는건지 이해를 못하겠구나. 아직도 저 망나니같은 녀석에 대해서 미련을 못버렸느냐. 저녀석은 레오포드가의 수치야."
..그런 얘기는 안듣는데서 하는게 더 좋을텐데.. 대놓고 들으라고 하시니 아무리 내가 아르휜이 아니라고는 해도 가슴속이 쿡쿡 쑤신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같으니.."
조금.. 슬프다, 아니 .. 아프다. 남인 내가 이렇게 아픈데.. 아버지한테 이런 취급받는 아르휜.. 이녀석, 꽤 불쌍하다. 아무리 자업자득이라고 해도 가족에게서도 외면받는 아르휜의 모습은 어떤의미에서는 나를 닮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걱정하지 마십시요. 아버지. 이번기회가 아르휜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겁니다. 아르휜의 검술은 그래도 쓸만하니 마물퇴치에서 활약을 보이면 그동안의 오명도 조금쯤 씻게 되겠지요."
"흥, 레오포드가의 명예나 안더럽히면 다행이지. 됐으니 그만 나가보아라."
"예."
.. 차가운 부자사이다. 쿨하기도 하고, 그나저나 쓸모없는 녀석이란 말, 꽤 친숙하네. 오랜만에 들어서인지 반갑기도 하고..
-이 밥만 축내는 쓸모없는 녀석!! 나가, 당장 나가!!-
술에 찌들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폭력을 휘두르는 그림자를 떠올린 나는 쓸쓸하게 웃었다. 적어도 나의 죽음으로 인해 조금쯤 시원하다고 느낄 사람들이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죽은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네.. 그런 생각을 하는 내자신이 문득 소름끼쳤다. 어디까지나 교통사고는 내가 피할수 없었던 사고같은 거였지만 나란놈, 속으로 죽고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던건 아닐까..라고 불현듯 의심하게 되버리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는걸.. 이라고도 생각이 쏠린다. 창백하게 질린채 몸을 가늘게 떨자 차가운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이끌었다.
"뭐하는거냐, 아르휜. 멍청하게 서서"
아...하고 멍하게 고개를 들자 서재문을 등지고 우두커니 서있는 나를 돌아보는 펠릭스형님의 차가운 시선과 눈이 부딪쳤다. 조금 의아한듯 치켜떠진 차가운 눈빛에서 시선을 비껴내린채 나는 중얼거렸다.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고개를 숙인채 피처럼 붉은 색채의 카펫이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으며 나는 아르휜을 동정했다. 안쓰러움을 금할수가 없었다. 가족들의 미움을 한몸에 받고 있는건 아무리 못된 녀석이었다해도, 자업자득이라고 해도 울고싶을만큼 서글프고 아픈 일이었을테니까.
펠릭스형님의 뒤를 따라 복도의 모퉁이를 돌던 나는 복도의 중간쯤 멈춰서서 힐끔 바라보는 작은 눈동자를 눈치챘다. 유테르.. .. 그러고보니 저 꼬마에게 종이학 만드는걸 가르쳐준다고 했는데 그걸 알려주지 못했구나...
"건강하게 돌아오시길 바라겠습니다. 펠릭스형님"
겨우 10살 남짓한 꼬맹이 주제에 정중하게 인사하는걸 보자 너무 귀여워서 픽, 하고 웃음이 나올것 같다.
"그래. 고맙다. 유테르. 돌아와서 보자"
정중한 인사에 걸맞게 까닥 고개를 숙여보이고 척척 걸어가는 펠릭스형님을 잠시보던 유테르가 서있는 나를 힐긋 올려다보았다. 아유. 귀여워라.. 머리를 부스스하게 흐트러뜨리자 기분나쁜듯 불쾌한 눈빛으로 탁, 손을 쳐낸다. 생긴것 만큼 귀엽지도 솔직하지도 못한 행동거지는 얄밉지만 유테르의 앞에 눈높이를 맞추려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뭐,뭐야!!"
사람이 기껏 웃어주는데.. 뭐야,라니..
"돌아오면 종이학 만드는걸 알려줄께. 많이 놀아주고"
"누,누굴 어린애취급이야!!"
길길히 날뛰어봤자 넌 꼬맹이라고, 요 꼬맹아. 나무뒤에서 훔쳐보던건 아무리 못된 형이라고는 해도 기억상실에 걸렸다고 하니까 걱정됐던 거지?
"다녀올동안 잘있어. 꼬맹이"
무사히 돌아올수 있을까..따위나 생각하며 할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부드럽게 웃으며 머리를 부스스 흐트려주자 작은두손이 억세게 가슴을 밀어뜨린다.
"누가 꼬맹이라는 거야. 너, 너따위는 죽어버려!!"
탁탁탁탁... 반대쪽으로 뛰어가는 작은 꼬마의 뒷모습을 쓸쓸하며 바라보며 몸을 일으키던 나는 펠릭스형님이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것을 눈치채고 무안해졌다. 인상을 찌푸린것도 같고 뭔가 못마땅한것 같기도하고 표정이 이상하다. 무슨 말인가를 할듯한 표정이었지만 차갑게 몸을 휘릭, 돌린다. 하드레더를 덮은 망토자락위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뒷모습을 쫒아 나역시 레오포드가의 원군이 대기하고 있는 앞마당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