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오포드가의 귀공자-2화 (2/36)

2.

이곳은 루카나제국의 강대하고 넓은 땅을 자랑하는 에오타니아왕국내 세력있는 레오포드공작가의 영지인 카레인지역...그리고 내가 본의아니게 아르휜 폰 레오포드라는 이름을 가진 레오포드가의 귀공자행세를 하게 된지 일주일이 지났다.... 몸에 제대로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것처럼 숨쉬는게 불편하고, 내가 아는 얼굴이 아닌 다른 모습이 들어있을 거울역시 처음을 빼곤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은것만 제외하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잘 지내고 있는 중이다. 죽은 사람치고는 말이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혼자지내기에 지나치게 넓은 방은 낯설기만 한 몸처럼 좀체 눈에 익지가 않아서 푹신한 침대시트에 푹 파묻혀서도 편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앉은뱅이책상에 행거하나만 놓기에도 비좁았던 작은 방에 늘 굽어서 새우잠을 자는게 습관이 되서인지 내방보다도 더 넓어서 데굴데굴 이리저리 굴러도 되는 침대에서도 웅크리게 되버린다.

좀체 잠이 오지 않은 뒤척거리며 나는 어둠속에서 팔베개를 한채 잠시 이쪽세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별로 그다지 할일이 없어서기도 하지만 일단 이 낯선 세계가 흥미있는것도 사실이라서 알프레드에게 안내받은 서재에서 본 책들의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책을 읽어야지.. 라는 시도가 무색하게 입밖으로 편하게 튀어나오던 말처럼 글을 읽는게 쉽지는 않아서 처음엔 끙끙거리긴 했지만 기본적인 단어의 짜임새는 영어의 알파벳과 좀 비슷하기도 하고 모르는건 알프레드의 도움을 받아서 조금씩 조금씩 읽어갔다. 아니, 알아갔다. 이 낯선 세계가 내가 살던 세계와는 확실히 틀리다는것을, 여기가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라는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쉽게 예상했다고 해서 쉽게 받아들여진다는 뜻은 아니다. 지구상의 전세계 어느 역사책에도 마족이니, 마물이니, 몬스터니, 검사니, 마법사니, 정령사니, 하는 단어들은 나오지 않을테니까. 신화쪽이라면 모를까. 뭐.. 죽은녀석의 영혼이 다른 몸에 들어와있는 마당에 더 놀랄일도 없겠지만서도..

어쨌든 이 몸의 원래주인인 아르휜은 도대체 어디로 가출나간 상태인걸까를 생각하며 휴우우 한숨을 내쉬던 나는 끼이익- 하는 소리에 응? 하는 얼굴로 두리번거리다가 어둠속에서 스멀거리는 작은 움직임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흠칫, 놀라서 어둠속을 뚫어져라 보고있자 불을 끄기전 분명히 꽉 닫았던 창문쪽 커튼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커튼이 펄럭거릴때마다 어스름한 달빛이 비추이는 틈으로 창가에 터억 걸터앉는 희끄무레한 물체가 보인다.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슬금슬금 다가섰다.

"누..누구 있어요?"

심장이 요란하게 방망이질 친다. 어쩌면 나야말로 유령일지도 모르는데 유령이 나타날까봐 무서워한다는건 말이 안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유령이 내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방가워. 친구, 이럴수도 없을것 같다. 조심조심 다가서는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불빛이 비추인 도깨비불처럼 생긴 뭔가에 나는 그대로 꼬르르륵 뒤로 넘어갔다.

흐에에에...귀..귀..귀신....내가 뒤로 꼬록거리며 넘어가는 사이 도깨비의 형체가 어? 하는 소리를 내며 창을 훌쩍 뛰어넘어와벌러덩 뒤로 넘어간 내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이봐. 아르? 나야, 나. 프란이라고"

아아..그래.........당신!!!!!!!!! 어둠속에서 보인 도깨비불처럼 생겨 나를 잠시 기절하게 만든 희멀건한 뭔가는 아르휜의 친구라는 프란이 불빛으로 자기얼굴만 환히 비추인 탓에 나타난 착시현상인듯..

"시.심장마비로 죽일일 있어? 귀신이나 유령인줄 알았다고!! 무슨짓이야. 이 밤중에!!!"

상체를 벌떡 일으켜 멱살을 움켜쥐고 잘잘 흔들며 호들갑스럽게 말하자 내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던 프란시스 하워드라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기억을 잃은게 아니라..성격까지 완전히 바뀐것 같다. 아르. 이정도로 놀라다니 이거야. 원..적응안되네."

케겡, 흠칫, 놀라서 주춤주춤 멱살을 잡았던 손을 살포시 놓아서 작게 헛기침하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뭐..뭐야.. 놀라게 하니까 그렇지.."

체, 그러고 보니까 또 창을 뛰어넘어온 셈? 보아하니 담까지 훌쩍 뛰어넘은 모양? 게다가 이런 상황이 무지 자연스러워 보인다는건 이런게 한두번이 아니라는 소리기도 하잖아?

"저기.. 내가 예전엔 어떤 성격이었는데?"

친구니까 아르휜의 성격을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지 않을까 해서 소곤거리며 물어보자 쭈그리고 앉아있던 프란이 생각하는 텀도 없이 곧바로 대답을 해왔다.

"어둡고 음침한 성격에 자기 잘난맛에 사는 싸가지였고 동정심도 없이 냉소적인데다가 안하무인이고 고집세고 .."

"그,그만!! 그만해도 될것 같아."

그러니까 한마디로 성격나쁜 놈이었다는거잖아. 아르휜은. .. 그래도 그렇지. 친구라면서 너무한다. 좋은 얘기는 하나도 안해주고. 그나저나 오밤중에 뭔일이래? 궁금해져서 물어보려고 슬쩍 돌아보자 무슨일로 왔냐고 묻기도 겁날만큼 불길하게 웃는 눈빛이 나를 빤히 본다.

"왜...왜?"

움찔, 해서 묻자 씨이이익, 입가를 쪼개는게 심히 불안하다.

"너, 기억을 빨리 찾고 싶겠지. 아르?"

그..글쎄... 가출나간 아르휜의 영혼이 빨리 돌아와주면 나도 좋고 아르휜도 좋겠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리기 불길해져서 침을 꼴딱 삼키자 씨이익, 웃는 입매가 더 진해진다.

"기억을 찾으려면 전에 했던 일들을 하는것만큼 빠른 방법도 없을걸, 그런 의미에서 자 얼른, 외출준비하자고, 아르"

"외.외출? 이 밤중에?"

"훗, 우리의 거사는 주로 아름다운 이 밤에 이루어졌지"

그게 뭐,뭔데? 뭔지 몰라도 왠지 프란을 따라가기가 무척이나 망설여졌지만 가출나간 아르휜의 영혼을 찾아준다는 감언이설에 넘어가 울며겨자먹기로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프란의 뒤를 따랐다.

"저기, 프란.. 우리집인데 굳이 나까지 창문을 넘어가야하는건 좀 아니라고 보는데.."

"밤나들이는 뭐니뭐니 해도 스릴이 최고야. 예전에도 많이 했으면서 새삼스럽게.."

그러니까 나에게는 이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게다가 그 스릴이란거에 관심도 없어!! 훌쩍 뛰어내리는 프란을 따라 창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컥, 생각보다 높아서 움찔 창틀에 매달렸다. 뭐..뭐야. 이런 높은곳에 어떻게 뛰어내려어.. 다리가 부러질걸?

"뭐하는거야, 어서 뛰어내려. 아르"

달빛아래에서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걸 보고있으려니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속으로 안내하는 저승사자를 보는것 같다. 자, 얼른 들어오세요. 따끈따끈하게 뎁혀진게 온천에 온것처럼 기분 좋을겁니다. .. 어떻게 이 높은 곳에서 훌쩍훌쩍 잘도 뛰어넘나드는지 궁금하지 않은건 아니지만 그 호기심을 몸으로 체험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고개만 도리도리 흔들자 등뒤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나를 가볍게 밀었다. 엑? 비명이 나오려는 입을 양손으로 막아쥔채 머리를 거꾸로 박아 낙하하기 시작했다. 눈을 질끈 감고 곧 머리가 땅바닥에 부딪치길 기다리는데.. 어라라라.. 아무일도 없네? 피가 머리쪽으로 거꾸로 쏠린 기분은 그대로 느끼며 눈을 반짝 뜨자 거꾸로 서있는 프란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거꾸로 허공에 떠서.. 어떻게 멈춰있는거지. 나?

"쯔쯔.. 상태가 심각하네. 실드, 그만 이 멍청이를 내려줘"

말이 끝나는것과 동시에 가볍게 둥실 몸이 허공에 바로 세워져서 땅바닥에 가볍게 발끝이 착지한다.

"이..이게 도대체.. 프란, 네가 한거야? 마법?"

"마법같은 소리 좋아하네. 얼른 따라오기나 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앞서가는 프란을 바라보다 나는 내가 떨어져내린 높은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나를 감싸는것 같았는데.. 그게 뭐지?

넓은 정원을 가로지르는 프란의 뒤를 서둘러 쫒아가자 정원의 끝부분에 빙둘러 세워진 높다란 담에 멈춰선다. 창을 훌쩍 뛰어넘나드는것처럼 쉽게 훌쩍 뛰어올라 안정적으로 서서 나를 내려다보며 프란이 팔짱을 꼈다. 프란의 뒤에는 달빛이 비춰졌지만 표정을 보기는 쉽지 않다.

"이봐, 아르.. 너, 정말 기억을 잃은거야? 잃은척 하는거라면 집어치워. 멍청해보여서 짜증난다. 너와 난 검사라고, 검사가 마법을 어떻게 다루냐?"

멍청해보여서 짜증난다는 말에 발끈했다가 검사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거..검사?

아예 담위에 쭈그리고 앉아 눈이 휘둥그레지는  나를 내려다본채 프란시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성질이 더럽긴해도 검술실력하나는 꽤 봐줄만했는데, 아르.. 어쩌다가 창밖으로 뛰어내리지도 못하는 겁쟁이 바보가 됐냐? 마법을 부리냐고 멍청한 질문이나 해대고.."

"하지만 아까 분명히 바람이 감싸는게 느껴졌어."

"실드야, 바람의 하급정령이지. 너처럼 저혼자 잘난줄 알던 재수없던 놈이 이런 바보천치가 되다니.. 쳇. 입이 쓰군."

바..바보..처..천치?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저사람에게는 친구를 사라지게 만들어버린 셈이니까 화를 낼수가 없다. 어디까지나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르휜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건 유감스럽게도 바보천치인 하은준이니까.

"...안.."

"...뭐?"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거리는 말이 들렸는지 담장위에 쭈그려앉아 혼자 툴툴대던 남자가 못들을걸 들었다는듯 눈살이 찌푸려지는걸 알지못한채 나는 내친김에 조금 큰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달빛을 배경삼아 쭈그려앉아있는 남자의 얼굴이 어처구니 없다는듯 얼빠진 얼굴이 된다. 그나마 잘생긴 얼굴이 바쳐줘서 멍청한 바보로는 안보이는게 다행인 프란을 향해 다시 말했다.

"너를 잊어서 미안해. 기억, 빨리 찾도록 노력할게"

그래, 그러니까 가출나간 아르휜의 영혼도 빨리 제자리에.. 하지만.. 어떻게..?

"돼..됐어. 닭살돋는다. 그만해. 못들어주겠으니까"

왜 저렇게 기겁을 한다지?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안정적으로 쭈그려앉은자세에서 넘어지기라도 할듯 잠시 휘청하던 프란은 곧 바람의 정령이라던 실드란 것을 불러 우와.. 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나를 둥실 허공에 띄워 담을 넘게 했다.

레오포드가의 담장을 뛰어넘었다.. 여기서부터는 정말 미지인가..

준비성있게 말까지 두마리 준비해온 프란의 정성에 감복했지만 말을 탈줄 모르는 관계로 구박을 엄청 받으며 말타는 법을 배우느라 실랑이를 좀 벌이고 나는 레오포드가를 벗어나 좁다란 골목길을 구비구비 돌아서 목적지인듯 싶은 곳에 도착했다.

달빛아래서 한밤중이 무색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불빛들이 주변을 빙글빙글 맴도는 3층 목조건물. 허공을 신기하게 둥둥 떠다니는 불빛을 내가 신기하게 바라보자 프란이 설명을 해주었다.

"반딧불이야. 밤에 발광채를 뿜으니까 사냥해서 충분히 길들인후 풀어놓지."

아하.. 반딧불. 이쪽세상에서도 반딧불이라는게 있었구나. 도시에서는 반딧불을 보는게 흔하지가 않다. 해서 실제로 내가 반딧불을 보는건 이번이 처음인 셈이라 신기하기도하고 별빛처럼 가까이에서 반짝거리는게 예뻐서 손을 내밀자 가까이 있던게 사뿐 손등에 가라앉아 꽁지를 바르르 떨어댄다.

"..예쁘다."

"이봐, 아르. 그런 사소한거에 감탄하지마. 너랑 안어울린다. 얼른 들어오기나해."

내팔을 잡고 끌어당기는 통에 내손등에 잠시 앉아있던 빛이 다시 허공으로 솟구치는걸 아쉬운눈빛으로 돌아보며 나는 프란의 뒤를 쫒아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머, 프란시스도련님. 어서오세요"

간드러지는 젊은 여자의 코맹맹이소리에 슬쩍 안으로 고개를 내빼던 나는 허컥!! 하고 온몸이 빳빳히 굳었다. 넓은 홀은 얼큰한 알콜냄새와 묘한 향기가 맴돌고 있고 이곳도 저곳도 속살이 다 비추이는 옷을 입은 반벌거숭이 여자들이 남자들과 엉겨붙어 민망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벌렁거리는 심장을 억누르고 고개를 숙인채 상황파악을 해보려고 노력하는데 그나마 앞을 가로막아주던 뭔가가 사라지고 허전해진다. 그리고 대신 출렁거리는 하얀 뭔가가 덥썩 안겨들었다.

"아이참, 아르휜님, 저 로즈마리를 잊으셨나 했답니다. 왜이리 오랜만에 오셨어요. 호호호호"

찰싹, 목에 휘감긴 하얀 팔때문에 엉거주춤 선채 나는 아르휜과 잘아는 사이인것 같은 여자를 뻘쭘하게 바라보았다. 뇌쇄적이고 고혹적이라는 말이 어울릴법한 미녀이긴해도 찰싹 달라붙어서 안그래도 훤히 다 보이는 풍만한 젖가슴이 출렁거리는게 느껴지고 칡넝쿨처럼 몸에 휘감긴 팔과 다리는.. 몸둘바를 모르겠사옵니다..이다. 게다가 척, 뺨을 쓰다듬는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들..

내가 아무리 순진하고 건전한 청소년이라고 해도 상황이 이쯤되다 보니 이곳이 뭐하는곳인지 이 여인네들이 뭐하시는 분들인지도 파악이 된지라 엉겨붙는 여자를 매단채 필사적으로 프란이 있는 쪽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도, 저기도 시선둘데 없이 뜨거운 분위기를 연출하는터라 한손으로 눈을 덥썩 가린채 살금 본 틈새로 프란을 어렵지않게 찾을수 있었다. 저..저런.. 한명도 아니고 두명의 여인과 엉겨붙어있는 프란은 한여인의 입술을 빼앗고있는 틈에 다른 여인네의 가슴을 주물럭대고있다. 저사람의 도움을 기대하긴 어렵겠구나 싶어서 내몸에 엉겨붙어있는 여자의 밀가루처럼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하얀팔을 뜯어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죄..죄..죄송합니다"

"에..예? 아르휜님?"

의아해서 나를 잡으려는 팔에서 물러서서 허둥지둥 문앞에서 몸을 돌려 나가려했지만 그것역시 여의치가 않은듯. 들어오려다 멈춰섰는지 남자의 신체가 문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숙인 고개를 들어보자 비호감외모에 벌렁거리는 코가 유독 실룩거린다. 마주친 눈빛도 과하게 반짝거리고..

"아아, 이게 누구신가. 잘나신 아르휜 폰 레오포드 아니신가"

..이런,젠장. 이사람은 또 누구야.

"아..네.. 안녕하세요?"

"뭐? 안녕하세요? 사람 놀리는것도 가지가지군. 이 재수없는 놈 같으니!!"

그냥 인사를 했을뿐인데 그게 왜 재수없다는 욕을 얻어먹어야만 하는 일이란 말인가... 억울하다.

"네놈이 무너뜨린 코뼈가 이제야 나았는데 안녕하시냐고 비웃냐?"

어쩐지.. 벌름거리는 코의 윗등이 조금 뭉개져있는것 같더니..

"아직 다 안나으신것 같은데...가 아니라 다 나으셨네요."

코를 보며 다 안나았다고 하는순간 구겨지는 표정이 무서워서 서둘러 말을 바꾼후 나로서는 이곳을 나가는게 더 시급한 사한이기 때문에 남자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저기.. 문에서 좀 비껴주시면 좋겠는데요. 가로막고 계시니 나갈수가 없는데..요..."

"흥, 내 다리사이로 지나가보시지? 잘나신 아르휜"

코는 벌름거리고 다리를 척 벌리고 말하는게 진심인것 같아 난감하다.

"예.. 그럼 잠시 실례를.."

설마,라고 크게 떠진 눈동자를 보지 못하고 몸을 쭈그리고 앉아서 비좁은 가랑이사이로 지나가려했을때 내가 간과한게 있었으니.. 지금의 나는 평균보다 마른편인 170남짓한 키의 약간 작은 녀석이 아니라 180정도에 말랐지만 완전 성인남자처럼 근육도 제법있는 아르휜인것이었다. 문앞을 버티고 선 남자의 가랑이사이를 손쉽게 지나가기엔 무리가 있던 몸에 아직도 익숙치않은 아르휜이 덩치!!  생각지 못하게 뭔가 물컹한 것에 이마가 퍽 부딪치는 순간 앞을 가로막았던 장벽이 꾸에에엑!!!!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라라.. 싶어서 이마를 문지르며 문앞에서 일어난 나는 계단아래로 굴러떨어져 바지앞섬을 움켜쥔체 작살맞은 개구리처럼 전신을 바르르 떠는 남자를 발견했다.

앗...저..저런 아무래도 이마에 부딪쳤던게 저남자의 주니어였던 모양..이다..

"크아아악...아르휘이인.........이 잔인한 자식!!!"

저..저런.. 일부러 그런데 아닌데..

"괘..괜찮으세요?"

입에 게거품을 무는걸로 봐서는 별로 괜찮지가 않아보이는데도 서둘러 다가가려하자 비틀거리면서 벌떡 일어선다.

"이..이 뻐..뻔뻔하고 비겁한 자식!! 일부러 그런거 다알아!!! 너이자식, 두고보자!!!"

앗, 오해십니다아!!!!  그러나 주니어의 아픔만큼 오해도 깊어진 듯하다. 게다가 내게 변명 혹은 해명할 기회도 주지않고 은밀한 부위를 움켜쥐고 뒤뚱거리며 달아나는 남자를 나는 망연자실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체 이 아르휜이라는 인간은 어떻게 살았길래 하나같이 다들 이런 반응들일까 싶어서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어두운 공기속으로 흩어져가는 내숨소리와 함께 어지럽게 반짝거리는 것들에게로 시선을 들자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반딧불들이 허공을 춤춘다. 손을 내밀자 아까처럼 반딧불이 살짝 손등에 와닿았다. 잠시 손등에 앉아있는 빛을 내려다보다가 길을 알지못하니까 프란을 기다려야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어느 한곳에서 멈칫 시선을 멈추었다.

달빛과 건물의 창에서 새어나오는 빛과 허공에 흩어져 춤추는 반딧불사이에서 사창가골목과 전혀 어울리지않을법한 남자가 고고하게 서서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생긴걸로 따지자면 꽃미남축에 속하는 귀공자인 아르휜도 프란도 이런곳과는 안어울리는 생김새긴 했지만 저사람은 확실히 뭔가 전해져오는 느낌이 틀리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푸른 머리카락에 세심하게 깍아놓은듯한 콧날, 머리가 반쯤 가려진 옆모습일뿐이지만 굉장히 아름답구나..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어서 나도 모르게 계속 바라보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뭐, 아무리 신비해보이면 뭐해. 처연하게 올려다보는곳이 응응응하는 건물이라면야...

시선을 고정한채 눈도 깜박거리지않고 있던 남자에게서 시선을 비껴내리는 순간 마치 뒤늦게 자신을 바라보던 날파리의 눈빛을 눈치챘는지 나를 힐긋 돌아보던 무표정한 눈빛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머리카락처럼 신비해보이는 다크블루의 눈동자의 동공이 확대되는걸 보며 나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뭐..뭐냐. 저사람도 이 아르휜인지 뭔지에 원한이라도 있는거야?

아마도 그런듯 싶다. 마치 죽은 시체를 관뚜껑 얌전히 닫아서 흙까지 고이고이 덮어줬건만 관뚜껑을 벌컥 열고 시체가 튀어나온걸 보는것 같은 놀란 표정...  말로 표현할수 없이 격한 감정을 품은 시선에 얽어매어져서 엉거주춤 서있는 내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온 남자는 사신이 길다란 낫을 휘두르는것처럼 긴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를 덥썩 품에 안았다.

"어떻게...............어...어떻게..................."

아둥바둥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얼마나 힘줘서 꽉 끌어안았는지 끄떡도 안한다. 아우우우... 진짜.. 이말 묻는것도 지겹다!!

"...누구세요.?"

"아나이스............아나이스...............아나이스 !!!"

음..아나이스가 자기이름? 그런데 무슨 자기이름을 저리도 절절하게 부른담?

"나의 아나이스....소멸된게.. 아니었나?.. .. 나는.......!! 나는.........!!!!.. .."

가만가만.. 나의 아나이스? 게다가 소멸? 이게 뭔소리?

"저기.. 죄송하지만, 저의 이름은 아르휜이라고 합니다만?"

일단은 그렇다는거다. 아르휜이라는 이 남자가 무척이나 광적으로 나를 끌어안고 있는 이 남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아나이스라고 속이고 사기치지않았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어쨌든 이 애절하고 심각한 분위기에 멀뚱멀뚱 휩쓸려있던 나는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바뀌는 이질감에 화들짝 놀랐다. 뭐..뭐지?.... 달빛이, 어둠이, 반딧불빛이 흐려진다. 그리고 낯선 남자의 품속에 꽈악 안긴채로 내존재역시 희미해진다고 싶은 순간 달빛도, 사창가 골목도, 반딧불도 사라지고 배경이 확 바뀌었다. 남자의 품에 꽈악 안겨있다는 것만 그대로일뿐, 건물의 내부치고는 운동장만큼이나 넓고 거대한 석면으로 이뤄진 공간이 눈앞에 있었다... 아..이건 공간이동??

"아나이스, ..아나이스......아나이스.............. "

갑자기 바뀐 배경도 그렇고 순순히 응해주기엔 뭔가 광적으로 꽉 안고있는 남자도 그렇고, 부담스럽기짝이 없어서 품에서 벗어나려 바르작거리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나이스가 아니예요, 아르휜이라니까요!!"

가까스로 품에서 벗어나는걸 성공해서 숨을 켁켁 몰아쉬는 나를 내버려두지않고 성큼 다가선 남자가 내팔을 거칠게 휘어잡아올렸다.

"내가..이 내가 널 못알아볼거라고 생각했나? 넌, 아나이스다. 나의 아나이스다!!"

"아니... 나는 아르휜이라는 사람..."

내가 말을 이을 틈을 주지않고 검푸른 머리카락처럼 검푸름한 눈동자가 격하게 빛을 발하며 울부짖듯 소리쳤다.

"하찮은 인간의 기억에 얽매여서 나, 아시리안을 기억하지 못하는건가, 아나이스!! 네가 소멸되었다고 알고있었어, 네가 사라졌다고 알고있었다고, 나는!!!"

격하게 쏟아져내리는 원망섞인 고함소리에 섞인 서글픔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저기.. 미안한데.. 저는 아나이스라는 사람을 몰라요. 나는, 아니 이사람의 이름은 아르휜이고.. 아..젠장, 이거 납치라고요. 날 다시 데려다줘요."

내입장을 설명했을뿐인데 어이없는 말을 들은듯 굳어진 얼굴이 곧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바람한점 안부는곳에서 신기하게도 검푸른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휘날리며 넘실넘실 춤춘다.

"어떻게 나를 잊을수가 있지. 아나이스.. 나를 모른다고? 네가, 네가 나를 모른다고!!!!!!!!!!!!"

납치까지 된마당에 어이없는것도 나고 기가막힌것도 나다. 젠장..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그리 많이 지었길래 여기서도 저기서도 다 나를 가지고 태클이란 말인가. 내죄는 아르휜이라는 인간성 별로 안좋은 사람 몸속에 잘못 들어오게된거 뿐이라고..!!!  그러나 컥, 저 머리카락들 춤추는 것좀봐.. 뱀같아. 애절이 넘치다못해 미치광이처럼 광적으로 번들번들거리는 유리알같은 눈동자에 움찔해서 주춤 뒤로 물러서던 나는 침을 꾸울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귀..귀찮으시다면 그냥 제가 알아서 가도록 노력하죠"

이 비굴함.. 그러나 아름답지만 기괴한 괴물처럼 보이는 남자가 무섭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터질것같은 표정도 그렇고 완전 미친놈, 이라고 써있는 어두운 푸른 불꽃이 일렁거리는 눈동자도 그렇고 바람도 안부는데 허공에서 나풀나풀 춤추는 검은 머리카락들도 그렇고..

서둘러 몸을 돌리려던 내게 뭔가가 쐐액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헉, 몸을 움추렸지만 그것은 내허리를 칭칭 동여매 허공으로 띄웠을뿐이다. 하...하하.. 고,공간이동도 했는데 이런것쯤이야..뭐.. 머리카락이 내허리를 휘감아서 허공으로 띄웠다고 해서 그다지 놀랄일은... 뭐야, 충분히 놀랄일이잖아. 이건!!! 대체 이 머리카락들의 정체는 뭐냐고,

"뭐,뭐야!! 당장 내려줘요!!"

길게 늘어난 머리카락의 일부로 내 허리를 휘감은 엽기적인 마법사가 허공에 뜬채 버둥버둥거리는 나를 올려다보며 미친놈처럼 중얼거렸다.

"아나이스"

"아,아니라고 했잖아!!! 나는 아르휜이라니까!!"

필사적으로 소리치자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마법사의 표정이 일순 구겨진다. 그리고 버둥거리는 내게로 엽기적인 남자의 나머지 머리카락들이 제각각 살아있는 것처럼 길게 뻗어왔다. 넘실넘실 다가오는 머리카락들을 보고있자니 등줄기에 소름이 쫘악 끼쳤다. 그러나 내가 경악으로 굳어지든 말든 순식간에 다가온 머리카락뭉치가 뺨을 천천히 쓰다듬어내렸다. 오싹..

"시..싫어........."

살아있는 뱀들이 내몸을 공격해오는 것처럼 양뺨을 , 옷을 입은채인 몸을 , 다리를 휘감아 오기 시작하자 소름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쭈뼛쭈뼛 섰다.

"시..싫어!!!!!!!! 내,내려줘!!!!!!!!!!!!!!!!"

발악하듯 소리치자 마치 소리를 알아들은듯 딱, 멈춘 머리카락들이 내몸에서 떨어져나갔지만 허리를 묶고있는 머리카락은 그대로있고 몸을 마구 기어다니던 머리카락들도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내몸주위에서 넘실넘실 거렸다.

"하.......악...........학......이...거........대..체..!! 내려줘!! 이 미친변태야!!!"

경악하고 놀라고 무섭기도 했지만 분한게 먼저라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괴물머리카락의 주인을 째려보며 소리치자 미친마법사의 표정이 확 굳어진다. 그리고 곧 툭,투득, 툭..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뭐..뭐지? 하고 내려다본 눈에 내 옷의 단추가 저절로 풀리는게 보였다.상의의 단추가 전부 풀려서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풀어헤쳐지려는 옷의 양옆자락을 쥐어 화악, 가슴에 모았다.

"이 변태자식이!!! 그만두지 못해!!!!"

바닥에서 허공에 떠있는 나를 올려다보며 요상한 마법을 부려 내옷을 벗기려하는것 같은 변태놈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자 검푸른 눈동자의 푸른불꽃이 큭, 하고 일그러진다. 저..저거 화난거 맞지? ............아......내주위를 위협적으로 맴돌던 머리카락들중 두가닥이 달라와 옷자락을 모아쥔 양손목에 차락,차락 휘감겨 양옆으로 파앗 잡아당겼다.

"우아아앗!!!!!!!!!!"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얼마 못버티고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듯 양팔이 쫙 찢어지듯 아프게 잡아당겨져 고정된다. 내저항때문에 멈춰있던 옷자락이 양옆으로 다시 벌어지고 상반신이 훤히 드러나게 어깨아래로 훌러 벗겨졌다. 제..젠장!! 금새라도 내 몸을 쓰다듬고 싶어 안달난듯 내주위를 요란하게 빙글빙글 도는 검은 촉수같은 머리카락들의 끝, 정점. 검푸른 다크블루눈동자를 노려보며 분해서 이를 악물었다. 변태놈, 변태자식!!!

"그렇게 보지마, 아나이스. 너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것을 참고있는것은 나야"

"웃기지마, 이 변태괴물놈.........으아악!!"

말을 다 마치기도전에 양옆으로 벌려진 팔이 더 양쪽으로 힘껏 잡아당겨지는통에 양팔이 빠지는것처럼 아파서 말을 멈추고 비명을 내질렀다. 고통스러워 고개를 뒤로 젖히며 비명르 지르는 사이 드러난 상반신을 천천히 휘어감는 머리카락들의 감촉이 느껴졌다. 미끈한 뱀이 벌거벗은 신체를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오싹오싹하고 끔찍한 느낌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노골적으로 상반신을 점령하던 각각의 머리카락들이 유두주위에 원을 그리듯 빙글빙글 돌며 작게 솟아있는 붉은 돌기를 희롱하듯 휘감아 잡아올렸다.

"우윽, 그,그만해.이 변ㅌ.........웁!!"

신음을 내지르는 입안으로 검은 뭉텅이가 꾸역꾸역 입안이 꽉 막힐정도로 차고 들어온다. 컥, 숨이 막혀 죽는가보다..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사이 겨드랑이를 훑고지나가는 감촉과 배를 스멀스멀올라오는 감촉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나이스, 너는 나의 아나이스야"

아..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입이 막혀있어 격렬하게 거부하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자 어린애처럼 우기는 남자의 공허한 눈동자에 담긴 고통이 넘실거린다. 그리고 목구멍깊숙이까지 차오른 머리카락들이 미묘하게 움직이며 입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혀를 휘감아 잡아당기고 입속을 유린해간다. 그만해......제발, 그만해.

"허................으..........................으..........으........."

삼키지못하고 입밖으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타액처럼 고통과 모욕으로 일그러진 눈가에서도 참고참았던 눈물이 맺혀서 물기가 새어나온다. 그리고 둥실 허공에 떠있던 몸이 곤두박질치듯 아래로 낙하하며 몸에 감겨있던 머리카락들이 하나둘 몸에서 사라지고 바닥에 발끝이 닿는순간 입속을 휘접던 머리카락과 양손목에 감겼던 것들과 허리에 휘감긴 머리카락역시 츠츠츠츠거리며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윽..............콜록...콜록..콜록...............콜록...."

몸을 지탱하던것이 사라져 쓰러지듯 털썩 맨바닥에 주저앉으며 목을 움켜쥐고 기침을 했다. 목구멍깊숙이 들어오던 머리카락의 감촉이 남아있는것같아 토하고 싶지만 뭔가 걸린듯 기침이 멈추지가 않았다.

"콜록..콜록...............콜록...."

고개를 숙인채 기침하는 눈아래에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물컵이 보였다. .. 기침을 하느라 입을 막고있던 손을 가져가 물컵안의 물을 꿀꺽꿀꺽 삼키자 토할것 같은 기분도 목에 걸린것 같은것도 한결 가라앉는것 같다. 쳇, 병주고 약주냐? 그래도 물까지 챙겨주는걸 보면 그다지 나쁜 녀석은 아닐지도..라고 생각하며 시선을 들었다가 이내 그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저 망할 괴물변태놈의 머리카락을 보자 다시 토하고 싶은 기분이 들어버렸으니까.

"이...이제 보내줘.."

기침은 잦아들었지만 목은 잔뜩 잠겨서 쉰것 같은 목소리로 말하자 마법사인지 변태인지 미치광이인지 정체가 모호한 남자가 사납게 나를 노려보았다. 고통을 준것은 자신이면서 마치 나를 책망하고 원망하는듯한 시선이다. 입술한쪽을 일그러뜨린채 노려보던 남자에게서 머리카락뭉치가 다시 츠츠츠 내쪽으로 오자 나도모르게 뒤로 움찔 물러서려했지만 머리카락의 끝에는 반짝거리는 뭔가가 매달려있었다. ..뭐지? 반지인가?

"그 반지는 너를 내게 구속시키는 약속의 반지, 그 반지를 끼면 보내주겠다."

내가 왜 너같은 머리카락변태괴물놈한테 구속되어야 하는데!!!

"반지를 끼지않으면 여기서 못나간다는거야?"

"기억을 잃은 하찮은 인간이라해도 너는 내것이다."

저 내것이라고 무턱대고 주장하는 근거가 무척 궁금하긴 하지만 그다지 묻고 싶은 생각도 없다. 머리카락들고 사람 몸을 매만지는 변태놈 생각따위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쳇, 이놈의 반지.. 끼지. 껴준다. 뭐.. 떨리는 손가락을 뻗어 반지를 잡은 나는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보고만 있다가 머리카락변태놈을 힐긋 쳐다보았다.

"반지가 큰데?"

"어느 손가락에 끼든 그 손가락에 맞춰 줄어든다. 빨리 껴라"

이봐, 재촉하니까 왠지 끼기가 싫어져..

구속의 반지라고 하니까 찜찜하긴 했지만 새끼손가락에 슬쩍 끼워넣으니 변태괴물의 말처럼 반지가 저절로 손에 맞춰 신기하게 줄어들었다. 신기하긴 신기하지만..찝찝해. 이거. 여길 벗어나면 당장 빼버릴테다!!

"이제 보내줘, 이 변태마법사!!"

"한가지 말해두지. 나는 마법사따위가 아니다. 아나이스"

나도 아까부터 말했다. 아나이스가 아니라니깐, 멍청한 바보주제에. 그나저나 마법을 펑펑 써대며 마법사가 아니라고? 공간이동은? 허공을 떠도는 물컵은? 지금 니 등뒤에서 사방팔방 춤춰대는 머리카락은?

"나는 마족 아시리안...이다."

뭐? 마족?.. 눈을 동그랗게 뜬채 경악하는사이 서서히 눈앞에서 흐려지는 아시리안의 잔해의 뒷모습은 약간 웃었던것도 같지만 팟, 하고 화면이 바뀌어서 나는 아까의 그장소, 그 사창가골목에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마치 꿈을 꾼듯, 달빛도.. 밤도.. 반딧불도 그대로.. 하지만 왼손을 들어보니 새끼손가락엔 재수없는 반지가 끼워져있다. .. 마족이라고? 하..내가 미친머리카락들에게 반겁탈까지 당한 마당에 더 놀랄일도 없지..

변태마족놈이 준 반지따위 당장 빼버리려고 손을 가져다댄순간 바로 머리위에서 엄청난 소리가 벼락같이 들려왔다.

"야!!! 아르!!! 이자식아!!!!!!!!!!!!!!!!! 어딜가면 간다고 말을 해야 할것 아냐!!!!!!!!!!!"

앗..프란... 주저앉은채로 고개를 젖혀 머리위로 올려다보자 화난 킹콩처럼 콧김을 풍풍 내뿜으며 여기저기 뛰어다녔는지 숨을 헐떡거리는 푸른 머리카락의 남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나 찾아다닌거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순 멍청이가 된 주제에!!!!!!"

에...그러니까 그런 멍청이를 걱정했다는 거잖아?

프란시스가 걱정했다는건 내가 아닌 아르휜이겠지만 어쨌든 이런저런 서러운 일을 잔뜩 당하고 누군가 걱정해주는 사람에게로 무사귀환했다는건 그만큼 감격스러운 일이라 조금 기뻤다. 그리고 친구라고는 했지만 프란시스가 아르휜을 대하는건 마치 기억을 잃은 김에 골탕이나 잔뜩 먹어봐라, 꼭 이런 느낌이었기때문에 더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고개를 뒤로 젖힌채로 헤헤, 웃으며 말하자 쳇,하고 혀를 차면서 고개를 홱 돌리는게 정말 걱정하긴 걱정했나보다.

"누,누가 바보따위를 걱정했다는거냐"

얼굴도 좀 빨갛구만.. 걱정한걸 인정하기 싫어하는것 같은건 또 뭐람. 솔직하지 못하게.. 하지만, 뭐 제일 솔직하지 못한건 나인지도..

이봐요, 프란, 나는 댁이 아는 아르란 녀석이 아니랍니다. 나로말하자면 죽어서 유체이탈되어 당신친구 아르휜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유령녀석이라고요. 그러고보니까 아,, 그 머리카락변태놈에게도 말을 못했구나.

-아나이스..........아나이스...........아나이스...........-

울부짖듯 나직하게 불러대는 깊은 속삭임이 아련하게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파왔다. 듣는 사람이 저절로 눈물이 뚝, 흘러내려도 모자람이 없을것처럼 서글퍼서다. 결코.. 그 머리카락변태놈따위를 동정해서가 아니야. 그런놈, 동정받을 가치고 없어.. 심술궂고 못된짓만 하고..

밤공기의 서늘한 바람이 복잡한 머싯속을 위로하듯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시원하고 서늘한 바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걸 느끼며 후읍 숨을 들이마시자 옆에서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가자. 데려다줄테니까"

퉁명스럽게 말은 해도 왠지 쑥쓰러워하는것 같은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전신을 미미한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나는 빙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뭔가 움찔한것 같은 표정이 나를 이상하다는듯이 힐긋 바라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아무래도의 뒤의 말은 웅얼거리듯이 해서 잘 들리지 않는다.

"응?"

"젠장, 아무것도 아냐, 빨리 쫒아오기나 하라고, 바보아르군"

못마땅한듯이 중얼거리고 척척 걸어가는 푸른머리카락의 뒤를 따라서 나도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녀석은 아르휜이 아닌것 같아-

자연스럽게 웨이브진 붉은 머리카락, 아릅답지만 더없이 차가운 얼굴, 정없이 딱딱 끊어지는 싸가지없는 말투, [아르]라고 부를때마다 계집애이름 부르는것같다고 눈에 불을 키고 길길히 날뛰던 지랄같던 성격, 미안해.고마워,따위를 내뱉을 녀석이 절대로,절대로 아니었던거다. 아르휜은.  기억을 잃었다고해도 어떻게 성격까지 이렇게 확 바뀐것일까. 어떻게 해도 풀기 어려운 공식을 앞에 둔 사람처럼 머리를 긁적거리던 프란은 의외로 단순한 그의 성격을 대변하듯 뭐.. 아무렴 어때라고 결론을 내렸다. 잘난척하고 안하무인에 싸가지없던 아르휜이 나중에 기억을 찾은뒤 이런 바보같은 행동들을 했다는걸 알게되면 그 구겨지는 얼굴을 지켜보는것도  후훗. 꽤 재미있으리라..게다가  지금의 아르놈은 아르라는 애칭이 딱 어울릴만큼 조금 귀엽기까지 해서 될수있으면 기억상실의 시간이 좀 더 길어지기를 바라는 프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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