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포드가의 귀공자 (상) 꽃바람
1.
깜박,깜박...
제일먼저 시야안에 들어온건 높다란 천장에 매달려서 반짝반짝 빛나는 커다란 샹들리에였다.
어라? 뭔가... 이상하다. 눈을 다시한번 깜박거리자 후각에 은은하게 꽂히는 향긋한 냄새가 맡아지고 푹신한 침대의 겉커버를 감싼 매끄러운 비단의 뽀실뽀실한 감촉이 손끝에 만져진다. ... 병원인가? 싶다가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1인용 고급병실도 이보다 더 화려할수는 없으리라..대체 이게 다 뭐야.. 은은하고 고풍스러운 벽지에 넓은 실내에 깔린 보들보들해보이는 카펫에.. 맙소사. 이 이불좀봐... 이런거 살려면 되게 비싸겠다..덮고있는게 미안할정도로 좋아보이는 이불이 살짝 부담스러워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호들갑스러운 말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아르휜님, 정신이 드십니까?"
어라.. 나혼자 있었던게 아니었나보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꼬리가 양옆으로 내려간게 무지 순해보이는 금발머리카락의 외국남자가 걱정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고있다. 이보세요... 그렇게 보시면 굉장히 부담스럽거든요? 내가 눈을 마주한채로 상황파악이 안되서 눈만 깜박거리자 20대초반으로 보이는 선량한 남자의 근심이 한층 더 해진듯..
"아르휜님? 괜찮으십니까? 아르휜님께서 안깨어나셔서 다들 걱.정 하셨답니다"
"에?"
아무래도 저사람이 계속 말을 거는건 나에게인것 같긴 한데.. 내이름이 언제부터 아르휜으로 둔갑했다지? 고개를 갸웃하자 뭔가 심히 찔리는게 많으신지 흠칫하는것 같은 금발머리남자가 허걱 하는 얼굴로 더듬거렸다.
"거..걱정하셨습니다. 분.명.히....아..마..도.요.."
왜 자꾸 나를 아르휜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걱정해줬다는건 고마운일, 고개를 끄덕끄덕 하자 안심의 빛이 역력한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나는 다소 안정이 된것 같은 남자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저기.. 누구세요?"
"예? 저는 알프레도인...!!"
대답하다가 멈칫, 말을 멈추고 잠시간 침묵.. 1초,2초,3초,4초.... 눈을 깜박깜박 거리면서 나를 바라보던 금발머리남자가 커허헉 거리면서 두세걸음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도,도,도련님께서 저에게 존댓말을 하시다니잇!!!!!!!!!!!"
남자가 커허헉 거리는 동시에 화들짝 놀라서 침대벽쪽에 달라붙은 파리처럼 달라붙은채 나도 동시에 소리쳤다.
"나는 도련님이 아니라구욧!!!!!!!! 아..저기.....그러니까....사람을 잘못 보신것 같은...??"
자다가 물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눈이 커지는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나라고 심각하게 고민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말을 멈추게 한것은 침대벽쪽에 달라붙느라 갑작스레 움직이는 바람에 이리저리 상체에 흘러내리는 길다란 붉은 머리카락들. 이..이게 뭐야? 서..설마 해서 콱 잡아당겨보자 잡아당긴쪽 머리부분이 눈물 쏙 빠지게 아파온다.
"거..거울!!! 거울 어딨어욧!!"
"에? 예,예엣!! 여,여깄습니다."
다급하게 소리치자 허둥지둥 거울을 대령해주는 금발머리남자에게서 거울을 거의 뺏듯이 받아들고 나는 거울속을 설마,설마 하는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에에엑.........?!!!"
타는듯이 붉은 머리카락.. 놀라서 크게 떠진 붉은 눈동자, 바보같이 헤에 벌린 붉은 입술.. 어깨아래로 반쯤 흘러내린 실크잠옷사이로 보이는 말랐지만 조금 단단해보이기도 하는 신체...자..잘생겼다아....나는 거울속의 낯선 남자를 향해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척 가리키며 설마, 하는 심정으로 바보같이 물었다.
"누..누구세요?"
누구긴, 아마도 나인것 같구만..
도무지 믿을수 없는 상황에 침을 꾸울꺽 삼키고 어버버거리는 얼굴로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시선을 보내자 허둥지둥상태에서 조금 벗어난것 같은 남자가 애써 대답했다.
"아,아르휜님..머리를 다치셔서 일시적인 쇼크상태에 빠지신 모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요.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아니,자..잠까안!!!"
뭔가를 물어볼새도없이 뒤도 안돌아보고 문을 쾅 닫고 나가는 폼새가 아무래도 저거..도망치는 것 같다. 하지만 뭐.. 의사든 뭐든 필요하긴 필요해. 아까부터 골이 띠잉- 하게 울려오는 중이니까. 나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침대에 철푸덕 쓰러졌다. 한손엔 거울을 꼬옥 쥐고서.
거울속에서 빤히 노려보는 샐쭉한 붉은 눈동자가 무척이나 얄밉다. 볼을 쭈욱 잡아당기자 통각이 느껴져서 죄없는 볼을 가만히 놔주고 쓱쓱 손등으로 문질렀다. 도대체 이게 마른하늘에 왠 날벼락이람... 아르휜이란건 아마도 이 남자의 이름인 모양이지만.. 젠장, 내이름은 하은준이라고.
정신을 잃기전 상황을 가만히 생각해보자 파노라마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아르바이트에 늦어서 신호등을 노려보다시피하며 빨리,빨리를 부르짖으며 발을 동동구르던 나였다. 고등학교 졸업후 바로 독립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학교수업이 끝나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있었는데 늘상 시간이 빠듯했지만 그날따라 더 여유가 없었다. 붉은 신호등이 깜박거리다가 녹색으로 바뀌는 순간 막 신호등을 건너려는데 빠앙- 하는 거친 자동차클랙숀소리가 들렸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것처럼 바로 앞에서 달려드는 자동차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몸이 굳는 순간 퍼억- 하고 부딪치는 소름끼치는 감각은 분명 꿈이 아니었다.
부서진 인형처럼 허공으로 부웅 떳다가 곧 씨멘트바닥에 철푸덕 쓰러지던 순간 가방이 풀어헤쳐져서 튀어나온것 같은 책들이 붉은 피로 젖어가던 모습.. 귓가에 마지막으로 들리던 웅성웅성거리던 시끄러운 소리들..
"남학생이 차였어!!"
"세..세상에..주..죽었나봐..!!"
어라..이게 뭐야..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바라본 시리도록 푸른 하늘..희미하게 들려오는것도 같던 엠블란스의 삐익,삐익,하는 소음..계속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어서 천천히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생각... 이런게 죽는다는 거구나.. 이상하게도.. 죽는다는건 별거 아니네.. 라는것 등등..
그럼.. 나는 죽은걸까? ... 뭐.. 죽은걸지도.. 아니, 확실히 나는 죽은것같다. 그순간에..
죽는순간엔 미처 슬프다고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자연히 솟아오른 눈물이 가늘게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가족들.. 친구들.. 선생님들.. 내가 아는 , 아니 나를 아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하나둘 스쳐지나가고 죽었으면 이제 다시 못보는구나 싶으니까 울음이 터질것같아서 입을 손으로 막았다.
지금 내가 처한 이 이해못할 상황보다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더 사실같아서 훌쩍거릴때까지 울다가 옷소매로 축축한 눈가를 훔쳐냈다.
"칫..그럼.. 여긴 어디야.. 지옥은 아닌것 같고.. 음.. 천국인가?"
다시 눈가를 부비며 멍하게 중얼거리자 어디선가 풉-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라라라.. 알프레도가 나가고 방은 비어있었는데? 넓은 방안을 두리두리 둘러보는사이 풉-소리에 이어진 웃음소리는 커튼이 바람에 팔랑거리는 창가쪽에서 나고 있었다.
"처..천국?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거..걸작이야!!! 아르!!!"
방정맞게 웃어대느라 말을 제대로 못하던 낯선남자는 창문을 넘어오려다가 내가 하는말을 들은듯, 창문을 넘어오려던 자세에서 허리부분부터 상반신만 걸쳐 멈춰선채 웃느라 정신못차리고 있었다. 이봐요. 웃는것도 좋지만 그러다 떨어져요. 라고 걱정해주고 싶을만큼.
커튼이 펄럭거릴때마다 살짝살짝 모습을 드러내던 침입자는 곧 미끄러지듯이 창을 뛰어넘어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으로 들어오고도 한참 웃느라 제정신못차리는 침입자의 얼굴은 신체나이가 이 아르휜(내가 차지한 몸의 주인)과 비슷해보이고 웃느라 정신못차리고 있긴해도 근사해보이는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창을 뛰어넘어온걸 보면 에.. 도둑인건가. 싶지만 아르..라고 하는걸 보면 여기있는 이 아르휜과 아는 사이인지도 모른다.
"크크크크크크크...아이구, 배아파라. 푸하하하하하"
어쨌든 나로 인해 누군가의 엔돌핀이 마구마구 솟아난다고 하니 좋은일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같이 웃어줄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나는 뻘쭘하게 멀뚱거리다가 아까 알프레도에게 물었던 말을 고대로 다시 반복할수밖에 없었다.
"저기.. 웃으시느라 바쁘신건 알겠는데.. 누구?"
거의 방바닥을 구를 정도로 웃어대다가 갑자기 뚝 멈춘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뭐?? 야, 아르.. 장난하냐?"
"저기.. 미안한데.. 장난이 아닌것 같거든요?"
"그 웃기지도 않는 어눌한 말투는 뭐야? 재수없게!!"
어눌한 말투?
"그 바보같이 얼빠진 표정도 때려치워!!"
얼빠진 표정?
"머리를 다쳤다더니 아예 멍청이가 됐냐?"
멍청이? 이 사람이 진짜!!!
"이,이봐요!!!"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치자 방바닥에 앉아있던 남자가 인상을 팍 굳히고 벌떡 몸을 일으킨다. 생각보다 장신이라 깜짝 놀라고 내쪽으로 척척 걸어오는게 무서워서 바짝 쫄았다. 어..어쩌지? 도망쳐야하나? 저 흉악한 얼굴 좀 봐, 잘하면 살인나겠다..
"내가 누구냐고? 아르, 너 진짜 내가 생각안나?"
딱 침대옆에 멈춰서서 나를 내려다보며 푸른 머리카락의 남자가 말하자 나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너는 나를 프란이라고 부르지. 프란시스 하워드. 어떻게 친구이름을 까먹을수가 있지. 아르으으으으으으?!!!!!!!"
친구라고? 잘하면 사람 죽이겠는데? 들어봐, 아르으..라고 하며 이를 빠드득 가는 소리를.
저,저기 미안한데 나는 당신친구가 아니거든요, 라고 해봤자 멍청이 취급만 받을건 뻔하다. 아르휜이라는 거죽을 뒤집어쓰고 앉아서 내이름은 하은준이랍니다. 라고 해봤자 말짱 헛소리고 운나쁘면 정신병원에 끌려갈지도 모를일. 내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 인상이 흉악한 푸른 머리카락의 남자가 팔짱을 딱긴채 수상쩍다는듯이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아르!!"
앗, 깜짝이야... 저 아르라는 건 아마도 나를 부르는 것?
"왜,왜요?!!"
"너, 진짜 내가 생각나지 않는거냐?"
"미...미안해요."
"존댓말은 집어치워.재수없다."
"아, 네..아니..으응.."
얼굴까지 바짝 들이대며 으르릉거리는 통에 침대벽에 바짝 달라붙어서 나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눈을 딱 마주친채 으르릉거리던 남자가 픽, 웃더니 불길하게 후훗, 하고 웃었다.
"일부러 기억을 잃은척 하는거라면 훌룡해. 광대만큼이나 연기에 소질이 넘쳐나시는군. 아르?"
"저기.. 연기가 아닌데..?"
"아니지,아니지. 아르군. 너의 친구 프란이 연기라면 연기인거야!!"
뭐랄까... 이루말할수 없이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는것 같다. 그런데 정말 이런 사람과 이몸의 원래주인이 친구인걸까? 아르,아르 불러대는걸 보니 친하긴 한것 같지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독특한 정신세게, 그러니까 싸이코틱에 가까운 푸른 머리카락의 남자가 창문을 뛰어넘어온 주제에 자기가 방주인인것처럼 당당하게 소리를 질렀다.
"뭐야!!"
"....알프레도입니다."
라는 말이 끝마치기도전에 문이 벌컥,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렸다. 하지만 열려진 문을 열고 들어온건 알프레도라는 선량한 남자가 아니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좀 사나워보이는 카리스마 만땅의 남자가 거칠게 척척 들어오고나서야 문가에 서있던 알프레도가 나머지 말을 한숨쉬듯 내뱉었다.
"펠릭스님께서 오셨습니다. 아르휜님."
똑같이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아니더라도 펠릭스님이라는 남자는 아르휜과 닮아있었다. 한눈에 척봐도 형제구나, 알수있게.. 저쪽은 전체적으로 더 사내답고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게 조금 다를까. 아르휜의 형처럼 보이는 펠릭스라는 남자가 처음 관심을 보인건 지금의 내게 퍽 다행스럽게도 아르휜에게가 아니라 불청객쪽이었다. 아직 아르휜의 친구인지 뭔지 정체를 알수없어서 가택침입자인지 뭔지 단정할수 없는 매우 수상쩍은 남자, 프란에게로 불화살같은 눈빛이 쏘아졌다.
"프란시스 하워드. 여기서 뭐하는 거지?"
사내답고 강인하고 카리스마도있고 더불어 찬바람도 씽씽 분다. 동생의 친구이름을 부르는게 아니라 옆집 똥강아지이름 부르듯이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다.
"친구가 다쳤으니 문병이야 당연한거 아니겠습니까?"
느물느물 거리며 대답하는 아르휜의 친구라는 프란시스 하워드. 아니 프란이라고 했던가? 빙글빙글 웃는게 어쩐지 꽤나 얄미운 인상을 팍팍 풍긴다.
아르휜의 형이라는데 관심이 쏠려 슬쩍 바라본 남자의 옆얼굴은 잘드는 칼날로 다듬은 조각상처럼 수려했다. 등까지 닿는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는 어깨부분에서 입고있는 제복과 같은 끈으로 단정하게 묶여있다.
"문병을 오는것까지는 좋지만 다음에도 담을 넘어오면 도둑으로 오해해서 다리에 화살이 박힐지도 모르니 몸조심하는게 좋을거다."
저사람..... 못쓰겠네. 창문만 넘은게 아니라 담장도 넘어온거?
"그렇지만 정상적인 루트로는 아르의 얼굴을 보기가 워낙 힘드니 부득불 이런 무례를 끼칠수밖에 없어 저도 안타깝습니다. 펠릭스형님"
무례를 끼쳐 안타깝다는 얼굴치곤 너무 얄미워보인다. 저남자..그렇게 생글거리며 안타깝다니.. 진심으로 안보인다고요.
"둘이 뭉쳐 온갖 망나니짓을 다하고 다니는데 자네를 두팔벌려 환영할 의무가 레오포드가엔 없다는것을 말해두지"
둘이 뭉쳐? 거기다 망나니짓? 왠지 오슬오슬한 오한이 든다..
"펠릭스형님, 그 즐거운 장난의 대부분은 아르가 계획하고 주동한 것이라는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저야 그저 친구의 도리로써..."
"프란시스 하워드. 말장난은 그쯤해둬!!"
신경질이 다분히 묻어있는 차가운 눈길이 노려보자 뻔뻔한 싸이코도 어느정도 눈치란건 있는지 양손을 들어 항복을 표시해보이며 그 뻔뻔하게 조잘대던 입을 얌전히 다문다. 그리고 싸이코틱한 프란시스의 입을 다물게한 펠릭스라는 남자의 사나운 시선이 화악 내게 꽂혔다. 어,어쨌든 칼부림이 날뻔한 말싸움이 중지된건 다행한 일이지만 어째 나한테는 별로 다행한 일이 아닌듯? 도..동생이라면서 아주 삶아드시고 볶아드시고 싶다는 표정이다. 나는 침을 꾸울꺽 삼킨후 미소 비슷한것을 필사적으로 지어 인사를 했다.
"아.....아.....안녕하세요..."
어디선가 또 풉-하는 풍선 바람빠지는 소리가 났지만 그쪽으로는 감히 고개도 못돌릴만큼 엄격한 시선이 나를 쏘아본다. 아르휜과는 정말 사이가 안좋으신 가보다. 저 펠릭스형님이란 분. 동생을 보는 시선이 무슨 철천지 웬수덩이를 보는것 같아..내 속의 말못할 고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페이스를 고수하는 펠릭스형님은 오만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어처구니없다는듯이 말했다.
"흥,또 무슨 장난질이냐. 기억상실이라고?."
휴우..이보세요. 당신동생 아르휜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걸랑요? 아마도 유령이 분명한 내가 덥썩 이 몸을 차지했고 당신동생 아르휜의 영혼은 어디론가 외출나갔다고요. 내가 고백하면 엑소시스트를 하겠다고 신부님을 불러오지 않을까?..그때 프란이 얄미운 말투로 불쑥 끼어들었다.
“내가보기엔 기억상실 맞는것 같은데, 아니면 저건 아르휜의 가면을 쓴 껍데기라고.”
덜컥.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바닥에 떨어진 내 심장을 걱정하고 있을때 차가운 펠릭스형님의 목소리가 머리위에서 들렸다.
"하,기억상실? 웃기는군"
그것은 이제 하다하다 별짓을 다한다는... 지긋지긋하다는 말투였다.
프란이 말한 아르휜의 가면을 뒤집어쓴 껍데기.. 라는 말은 단지 비유일뿐이다. 그러니까 기억상실이라는 병아닌 병에 걸렸다는걸 인정하는 말이었지만 지금의 나로 말하자면 내 상황을 정확히 짚어낸 말에 소름이 끼쳐다랄까. 그러나 그 상황에서 내가 맞습니다!! 맞고요, 내이름은 하은준이고 이 아르휜의 몸속에 본의아니게 빙의됐나보네요. 하하하.. 그러니 박수무당이라도 불러주시렵니까. 형님? 도저히 이럴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 말을 했다가는 카리스마만땅 형님이 미친동생은 집안에 수치다, 이러면서 멋들어진 제복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뽑아서 칼춤을 추며 달려들것같은 백퍼센트 확실한 예감도 들었고...
흐음...그나저나 엄청난 대저택이잖아? 레오포드가라는데는.
레오포드가의 장남은 그때 본 카리스마가 질질 흘러넘치는 펠릭스 폰 레오포드. 22세. 차기 공작 후계자라고 들었다.어렸을때부터 전쟁터에서 수훈을 세운 용맹한 기사로 가문의 영광을 반짝이게 한다고... 차남은 현재 내가 빙의된것같은 몸의 주인. 아르휘온 폰 레오포드. 나이 20세.. 레오포드 공작가의 차남이고 키는 178에서 180정도 되보이고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제대로 미남. 그러나 꽃미남이면 무엇하리요오, 여러가지 상황들을 추론해서 결론하자면 에휴, 성격은 꽝인것 같다. (하기사 이렇게 부잣집 아들에다가 제대로 미남에다가 성격까지 좋으면 세상은 차암 불공평한 것이겠지만서도..) 막내는 유테르 폰 레오포드, 아직 10살이라고 하니까 나이차가 굉장히 많이 나는 편이긴 하다. 그건 현재 계신 어머니가 펠릭스와 아르휜의 계모이기 때문인것같다. 레오포드공작의 전부인이 아들둘을 낳고 죽은뒤 오랫동안 혼자 지내던 레오포드공작님이 아르휜과 펠릭스형님의 계모가 되시는 아멜리아 어쩌고 하시는 분과 재혼하신게 10여년전이라고 했으니.. 막내인 유테르만 친자식이 되는건가..
그래서인지.. 어머니도 유테르도 아직 얼굴한번 보지못했다. 더불어 아주 바쁘다고 하는 레오포드공작님이라는 분도.. 그러니까 아주 꼴도보기 싫은 동생이라도 친동생은 어쩔수없다고 여겼는지 펠릭스형님만 한번 왔다간것 빼고는.. 다들 무관심하다고 할까..
이런 정보들은 선량하게 생긴 알프레드에게서 얻어낸 사실이긴 하지만.. 사실 알프레드가 내게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줄때 나를 연신 수상쩍다는 의심의 눈길로 여러번 힐끔거리던걸로 봐서 기억상실 어쩌고 하는 얘길 못믿는것도 같다. 하인되는 신분이라 어쩔수없이 이 어처구니 없는 연극에 동참한다는 느낌이 팍팍 풍겼으니까.
지금 중요한건 이 엄청난 저택이 워낙 층층마다 방이 많아서 가족들인 그 사람들의 얼굴은 커녕 방밖엔 나서면 길을 잃을 불행한 처지에 있다는게 나로서는 엄청 시급한 일이긴 했다. 지금도 이렇게 알프레드가 안내해주지 않는다면 자기집에서 길잃은 바보천치가 되는것도 시간문제일터. 게다가 붉은색 카펫이 깔린 넓은 복도를 따라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느라 앞서가는 알프레드와 제대로 보폭을 맞추지 못하고 있긴 했다. 벽마다 층층이 세워진 정교한 그림들엔 레오포드가의 그 전세대 사람들인지 화려한 옷을 입을 사람들이 한사람씩 그려진 커다란 액자도 걸려있었다.
"앗, 알프레드. 같이 가요"
막 복도 모퉁이로 꺽어지는 알프레드의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자 알프레드의 등이 움찔하고 멈춰선다.허둥지둥 쫒아가는데 복도를 청소하고 있던 젊은 아가씨가 입을 크게 벌리고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본다지? 아차,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인사를 안했군.
"안녕하세요?"
일단 나이를 모르니까 무작정 누나라고 하는것도 실례일것 같아 빙긋 웃으며 꾸벅 인사했더니 빗자루를 두팔로 껴안은채 커헉, 하는 얼굴로 얼어붙는다.
"죄송한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제가 기억상실에 걸려서 이름은 모두 까먹었답니다. 하하하"
"에...엘리사입니다. 도..도련님"
"아.예..엘리사, 이쁜 이름이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역시 예의바르게 꾸벅 인사하고 경쾌하게 돌아서는 내뒤에서 그녀, 엘리사가 빗자루를 껴안은채로 돌덩이가 되어 부스스 흩날리는것을 알지 못한채 굳어있는 알프레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자아, 그만 가죠. 알프레드"
"도,도련님!! 제발 더이상은!!"
괴로운 얼굴로 선해보이는 눈매를 눈물이 뚝, 뚝 떨어질것처럼 일그러뜨리며 알프레드가 중얼거리자 나는 깜짝 놀랐다.
"왜,왜그러세요?!"
그러자 다시한번 신음을 내뱉으며 흠칫, 하는 알프레드. 저 이마에 삐질, 하고 흘러내리는게 식은땀이라면 어디가 안좋긴 않좋은 모양.
"아르휜도련님, 어,어째서 계속 존댓말로 하시는 겁니까"
"알프레드도 저에게 존댓말을 하지않나요?"
"저는 하인이니까 당연한겁니다!!"
"저만 반말하는건 불공평해요. 그럼, 우리 편하게 말 놓을래요? 어차피 나이도 비슷해보이는데.."
조심스럽게 말해보자 커헉, 하는 얼굴로 잠시 하늘거리는 금발머리카락까지 얼어붙었던 알프레드가 괴상한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도,도,도련님!!! 가당치도 않습니다아!!!!"
아...하하하하하..... 까,깜짝이야.. 친구하자고 했다간 한대 얻어맞겠네..
"음, 그럼 나도 싫,은,걸,요. 알프레드"
얼굴을 마주보느라 살짝 고개를 꺽어 웃으며 말하자 알프레드가 다시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할수없이 알프레드를 남겨두고 먼저 걸음을 내딛었다. 두세걸음 걷다가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이 없어 걷는 속도를 늦추며 곁눈질로 슬쩍 뒤를 돌아보니 알프레드가 벌어진 사이를 메우려는듯 빠른 걸음으로 쫒아 걸어오고 있었다. 차라리 뛰어오면 금방일텐데..저렇게 빠른걸음으로 걸어오는게 마치 복도에선 절대로 뛰어선 안돼, 라고 자기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같다. 귀족에게 하인은 절대로 반말까선 안돼, 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데 걸어오는 얼굴이 좀 빨개진것 같은데.. 역시 어디가 아픈건가? 이따 물어봐야겠다.
알프레드의 안내를 받아서 나온 저택의 앞에는 관광객을 받아도 좋을만큼 넓고 잘꾸며진 정원이 있었다. 다시는 못볼수도 있었을 푸른 하늘을 실컷 바라보고 눈부신 햇살이 주는 따스함을 전신으로 느끼고 향긋한 풀내음을 후읍, 큰호흡으로 들이마셨다. 폐속으로 기분좋게 차들어오는 상쾌하고 신선한 공기등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딱히 살아야될 이유가 없다고 해도 살아있다는건 그 자체로 축복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육체라는게 없으면 이 따스함도, 기분좋은 풀내음도, 몸을 선선히 훑고 지나가는 기분좋은 바람역시 느낄수 없었을테니까... 어쨌든 남의 육체를 허락도 구하지않고 빌려입은 셈이지만 .. 아직 살아있다는 게 기이하고 낯설고, 그리고 타인의 육체를 마치 내몸처럼 느끼는게 조금 이상했다.
"저기.. 한가지 물어볼게 있는데요. 에전에 가족들하고 나하고의 사이가 어땠어요?"
입가를 가리고 슬쩍 알프레드에게 묻자 알프레드가 대답하기 난처한 얼굴이 된다.
"그..그게..."
흐음..저 표정을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사이가 안좋았나보다.
"원래 아르..아니, 내 성격이 그렇게 드러웠어요? 무서워서 옆에도 못올만큼?"
슬쩍 입가를 가리고 묻자 알프레드가 왜 그런걸 물어보는지 의아했는지 나를 보았다. 펠릭스형님과의 대화를 생각해보면 그다지 따뜻한 형제애도 없던것 같긴 하지만.. 무서워서 못올만큼, 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수가 없는거다. 아마도 내 짐작이 맞는다면 저 굵직한 나무들중 하나에 몸을 숨기고 슬금슬금 훔쳐보는 붉은 머리카락의 꼬마가 유테르 폰 레오나르, 그러니까 이몸의 주인인 아르휜의 동생인것 같단 말이지.. 뒤늦게 알프레드역시 나무둥치에 몸을 숨긴 붉은 머리카락의 자락을 눈치챘는지 그쪽에 들리지않게 살금거리며 조용히 대답해주었다.
"유테르 도련님이시군요. "
아아, 아르휘인.. 얼마나 못되게 굴었길래 저런 꼬맹이가 나무에 숨어서 못나올 정도인거야. 한숨을 저절로 내쉬다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종이학을 접었다. 내가 오물오물 뭔가를 바스락거리며 접자 뭔가해서 알프레드가 의아한 얼굴로 훔쳐보는것 같긴 했지만 뭐하냐고 묻진 않아서 대답해주는것 역시 패스. 대신 붉은 머리카락이 숨어있는 나무쪽으로 종이로 접어낸 학을 휘익, 던졌다. 작은 손이 발근처에 떨어진 학을 줍는걸 모른척하고 나는 짐짓 모르는척 소리를 쳤다.
"앗, 내 새가 어디로 날아갔지?"
내손으로 집어던져놓고 생쇼하는 나를 눈이 동그래져서 빤히 쳐다보는 알프레드의 시선이 민망했지만 모르는척 다시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이상하네, 분명 이쪽으로 날아왔는데.."
나를 어처구니 없다는 눈으로 보는 알프레드를 계속 모른척하고 붉은머리카락이 숨어든 나무쪽을 힐긋 바라보자 때마침 나무에서 고개를 내민채 나를 훔쳐보고있던 두개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움찔, 하고 나무쪽으로 얼른 작은 몸을 숨겼으나 눈이 마주쳤으니 숨는게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나무에서 살짝 어색하게 비껴나오는 꼬마는 아르휜이나 펠릭스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애였다. 동생이라기보다는 조카,라고 하는게 더 어울릴법한.. 나이차가 꽤 많이 나는 동생....귀엽다.
"혹시 찾는게 이거라면 여기있어. 하지만 이건 새가 아니야. 종이야"
종이일뿐이라고 하면서도 구겨지지않게 손안에 담은 종이학을 내미는 유테르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꼬마와 시선을 맞추려고 몸을 낮췄다.
"유테르, 이건 종이학이란 거야. 봐, 양옆에 달린건 날개고."
작은 손바닥위에 놓인 종이학의 양날개를 잡아 벌리며 설명하자 작고 동그란 눈에 호기심이 가득 찼지만 이내 별관심이 없다는듯 퉁퉁거리며 유테크가 대꾸했다.
"바보아냐? 이까짓걸 새라고 우기고. 빨리 가져가기나 하라고..."
불퉁하게 말하면서도 손바닥을 그대로 편채인 유테르에게서 나는 종이학에 대한 호기심을 읽고 속으로 웃었다. 솔직하지 못해도 아이는 아이다.
"너줄께. 네손에 날아갔으니까 이제 니꺼야. 유테르."
"...이거 정말 나 줄꺼야?"
뭔가 심히 못믿겠다는듯 미심쩍은 표정이다. 꼬맹이가 벌써부터 사람말을 못믿고, 떽, 못써. 하지만 못믿게만든건 아마도 이 아르휜이라는 성질드러운 녀석이겠지?
"그럼, 다음에 종이학 만드는 법을 알려줄께."
빙긋 웃어주자 못볼거라도 본듯 흠칫, 뒤로 물러서는게 좀 불쾌하긴 하지만 손바닥에 있는 종이학을 구기진 않는다.
"흥.... 피..필요없어!! 이까짓 종이로 만든거!!"
필요없다고 팩, 고개를 돌리며 걸어가는 꼬마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웃었다. 종이로 만든 이까짓거라고 하면서 종이학이 구겨지지않게 동그랗게 말아쥔 작은 손이 보였기 때문이다. 몸을 낮췄던 자세에서 슬슬 몸을 일으키자 알프레드가 이상하다는듯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침착해보이는 사람이 커헉, 거리는 얼굴이라거나 돌덩이로 굳는 이상한 현상같은걸 많이 보여주긴 했어도 저런 눈빛은 처음이다.
"왜요?"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르휜님."
아무것도 아닌게 아닌것 같긴 하지만.. 빤히 쳐다보고 있던게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이는 알프레드에게서 고개를 돌려 나는 멀어지는만큼 점점 더 작아지는 유테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