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굳어 버린 코이에게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코이가 날 거부하고 있는 건데, 그럴 리가 없잖아. 코이는 날 사랑하니까. 그렇지? 네가 사랑하는 건 나뿐이지?”
애슐리가 웃었다. 그때와 다르지 않은, 티 없이 맑게 웃는 소년의 얼굴에 코이는 눈가가 시큰거렸다.
“그런 게 아냐.”
코이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고 내뱉었다.
“널 거부하려고 그런 게 아냐. 알잖아, 내 마음을. 난 평생 너밖에 없었어. 너만 좋아했어.”
글썽거리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코이는 급하게 눈을 깜박여서 초점을 맞추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페로몬 향기가 나지 않은 건 그저 내가 미숙했기 때문이야. 조절하지 못해서였다고. 나도 내가 어떨 때 향기를 내고 어떨 때 안 내는지 몰랐어. 당연하지 않아? 난 냄새를 맡지 못한다고.”
코이는 팔로 눈을 문질러 눈물을 닦아 내고 한탄하듯 덧붙였다.
“그런데 어떻게 일부러 페로몬을 조절할 수 있겠어? 단지 난 바랐을 뿐이야. 네가 날 싫어하지 않기만을. 네가…… 오메가 페로몬을 맡으면 발작을 일으키니까.”
애슐리의 손을 잡아 입술을 묻으며 코이가 고백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뿐이야. 평생 너만 좋아했어.”
알아, 하고 애슐리가 또 웃었다.
“아버지도 버니스도 모두 다 틀렸어. 봐, 이렇게 왔잖아. 코이는 날 절대 버리지 않아. 코이한테는 나뿐이니까. 그렇지?”
내가 그렇듯이.
“애쉬.”
코이는 흐느낌을 참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더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애슐리의 깊은 상처를 감싸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코이는 참지 못하고 애슐리를 끌어안았다. 어떻게 하면 페로몬을 낼 수 있지? 엔젤에게 그걸 물어봤어야 했는데, 멍청하게 왜 감추는 법만 물어봤을까.
〈스스로 암시를 거는 거야.〉
불현듯 엔젤의 말이 떠올랐다. 페로몬을 감추는 주문이라며 미소 짓던 그. 만약 그렇다면 반대도 가능하지 않을까?
코이는 절박한 마음으로 눈을 꼭 감았다. 제발, 내가 정말로 페로몬을 낼 수 있다면, 아니, 낼 수 있어. 제발 나와 줘.
애쉬에게 내 마음을 전해 줘.
제발.
“사랑해, 애쉬.”
간절하게 속삭였을 때였다. 문득 이상한 감각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손끝이 간질거리는 것 같은 묘한 느낌에 코이는 멈칫했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맥박이 요동친다. 코이는 눈앞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한 생소한 경험에 그만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
안개처럼 멍한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졌다. 애슐리는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역을 한 바퀴 둘러본 그는 다시 옆을 확인했다. 코이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안도한 애슐리가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코이는 여기에 있어.
내 곁에.
뿌듯한 만족감과 함께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에 맺힌 코이의 얼굴이 어딘지 부옇게 느껴졌다. 몇 차례 더 눈을 깜박이며 초점을 맞춘 그는 점차 명확해지는 상(相)에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히 코이인데 코이가 아닌 것 같았다. 잔뜩 고였던 코이의 눈물이 뺨으로 떨어지고, 시야는 완전히 밝아졌다.
코이가 울고 있어.
애슐리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이상하다, 왜 갑자기 울고 있지? 게다가 방금 전까지 그는 기차역에서 코이와 함께 있었는데, 지금 있는 곳은 전혀 다른 장소였다. 자신이 벽장처럼 보이는 장소에 누운 채로 코이의 무릎을 베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으나 가장 놀란 건 그의 얼굴 때문이었다. 잠깐 사이에 훌쩍 성숙해진 그를 보자 애슐리는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쉬!”
코이가 당황해 소리쳤다. 하지만 애슐리는 벌떡 일어나 그에게서 훌쩍 물러난 뒤였다. 단숨에 경계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는 반응에 코이는 애슐리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금세 코이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애쉬, 괜찮아?”
황급히 팔로 눈물을 훔쳐 낸 코이가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
“다행이다, 걱정했어……. 이제 괜찮은 거지? 정말 돌아온 거지? 응?”
그는 계속해서 물었으나 애슐리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미간을 찌푸린 채 주변을 확인하더니 코이를 외면한 채로 되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여기에 있어?”
날이 선 음성에 코이는 마음이 아파졌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미스 버니스가 알려 줬어.”
그는 심호흡을 한 뒤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네가 여기 있을 거라고, 지금이라면 모두 말해 줄 거라고도 했어.”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또다시 코끝이 시큰해졌다. 코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고백했다.
“네가 아직도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어.”
애슐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길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발작을 일으키고 나면 언제나 머릿속이 평소보다 더 멍하고 기억이 뒤죽박죽이 되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하고 몸이 가벼웠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는 멈칫했다. 깨닫지 못했던 향이 뒤늦게 애슐리를 깨우쳤다. 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향기. 마치 위로하기라도 하듯 주변에 가득한 그 향기는.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
순간 애슐리는 반사적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맥박이 불안정하게 뛰어 댔다. 이제 곧 그를 찾아올 구역질과 고통을 예감하며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나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당연하다. 이 페로몬의 주인은 바로 애슐리가 평생 애타게 그리워하던 바로 그였으니까.
애슐리가 코와 입을 막았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애슐리의 반응에 코이는 단박에 상황을 알아챘다.
“애쉬.”
코이가 흥분으로 떨리는 음성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느껴져? 내 페로몬이? 내가 해낸 거야?”
직접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애슐리의 반응은 무엇보다 확실했다. 하지만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코이와 애슐리의 표정은 정반대였다. 이 향기가 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이라는 건 애슐리 또한 인정했다. 하지만 코이가 오메가라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코이의 향기에는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 역시.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은 따로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나타난 현상을 애슐리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천장을 올려다보고, 다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 감각을 그는 알고 있었다. 처음 코이를 안고 다음 날 느꼈던 그 상쾌한 기분. 그 어느 때보다도 머리가 맑았던 그날의 감각이 그를 일깨웠다. 당시엔 단지 숙면을 해서인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코이는 극오메가야.〉
에리얼의 음성이 되살아나고, 애슐리는 곧 깨달았다.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던 그는 간신히 성대를 쥐어짜 소리를 냈다. 코이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그의 목소리가 마구 흔들렸다.
“나한테서, 페로몬을 뺐어?”
격한 외침에 그때까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던 코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애슐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함을 질렀다.
“페로몬을 뺀 거냐고, 네가! 내 페로몬을!”
거친 고함 소리에 코이는 움칠 놀랐다. 애슐리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이런 그의 모습은 처음이라 코이는 당황했으나 어째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코이는 어색하게 내려온 입꼬리를 다시 끌어 올리려 애쓰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건 나도 잘 몰라…… 어쨌든 상태가 좋아진 거지? 그럼 된 거 아냐? 저기, 내 페로몬 향기도 분명히 나는 거지? 이제 날 믿는 거지? 응?”
코이는 연달아 물었으나 애슐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참담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 코이는 덜컥 겁이 나고 말았다.
“애쉬, 왜 그래?”
그는 불안감을 떨치려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농담처럼 물었다.
“이제 아무 문제 없는 거잖아, 응? 내 페로몬이 나오고 있으니까 이제 우리 괜찮은 거 아냐?”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으나 애슐리는 또다시 뒤로 물러나 버렸다. 벽에 등이 닿아 어쩔 수 없이 멈춰 버린 애슐리가 코이를 노려보며 빈정거렸다.
“괜찮다고?”
여지없이 서늘한 음성으로 애슐리는 뇌까렸다.
“내가 너한테 또 속을 줄 알아?”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코이는 당황해 고작 그 말만을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런 코이를 비웃듯 애슐리가 차갑게 말했다.
“어차피 넌 나보다 불쌍한 사람이 보이면 또 언제든 날 버리겠지. 괜찮아, 상관없어.”
“애쉬.”
코이가 그를 불렀으나 애슐리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코이에 대한 불신과 자신에 대한 혐오가 뒤섞인 얼굴로 그는 쓰게 웃었다.
그러니까 난 불행해져야 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몰골로 망가져야 넌 내게서 떠나지 않겠지.
“왜 자꾸 그렇게 말해?”
코이가 결국 참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그런 그를 보면서도 애슐리의 마음에는 어떤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쾌감이 짜릿하게 번져 오는 것을 애슐리는 알 수 있었다.
동정이라도 좋아. 연민이라도 상관없어.
“이제 나도 오메가가 됐잖아. 너와 함께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데, 왜 믿어 주지 않는 거야?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코이는 계속해서 묻고 또 물었다. 눈물이 가득한 그를 마주 보며 애슐리는 떠올렸다. 코이가 어떤 약속을 해도 애슐리는 믿지 못할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방법은 이것뿐이다.
아니, 이것뿐이었는데.
“난 너한테 복수하고 싶었어.”
애슐리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코이가 멈칫하자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망가지면 착한 너는 괴로워할 테니까. 넌 죽을 때까지 후회하겠지, 날 이렇게 망쳐 버린 걸.”
애슐리가 서서히 웃음을 지었다. 허망하기 그지없는 그 미소에 코이는 완전히 넋을 잃어버렸다.
“그게 내 복수야. 날 버린 너에 대한 복수.”
아하하하, 쇳소리가 섞인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애슐리는 고개를 젖힌 채 웃고 또 웃었다.
그날 이후로 애슐리는 한 번도 페로몬을 빼지 않았다. 누구와 자지도, 주사조차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몸이, 뇌가 망가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기쁘게.
아, 그것만이 내 삶의 전부였는데.
웃음소리는 길게 가지 않았다. 애슐리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네가 내 복수를 망쳐 버렸어.
“애쉬.”
코이가 잦아드는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애슐리는 시선만을 움직여 코이를 응시했다. 울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일그러진 얼굴에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너무 빨리 알아 버렸어. 내가 미쳐 죽은 다음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제 어떻게 널 붙잡지?
이제 어떻게 해야 네가 더 괴로워하고 후회하게 될까.
“버니스가 말했지? 내 뇌가 이상하다고, 미쳐 버렸다고.”
“그렇게 말하지는…….”
“틀렸어, 그녀는.”
애슐리는 평온한 음성으로 말했다.
“처음 복수를 생각했을 때, 이미 난 미쳐 있었어.”
애슐리는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코이는 그가 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울 수조차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떻게 울겠는가. 애슐리가 자신에게 묻듯이 덧붙였다.
“제정신일 수가 없지. 어떻게 멀쩡할 수 있었겠어? 네가 날 버렸는데.”
할 수만 있다면.
네 발에 족쇄를 채우고 하루 종일 나만 기다리게 하고 싶어.
나에 대한 생각밖에 할 수 없고, 나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너의 세계가 나로 전부 찰 수만 있다면,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코이, 내 인생엔 너밖에 없어.”
애슐리가 중얼거렸다.
“내가 가진 건, 내가 원하는 건 평생 너 하나뿐이었어.”
“애쉬…….”
“그런데 이제 그것도 끝났어.”
애슐리가 다시 웃었다. 코이는 그런 그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완전히 망가져 버린 듯한 애슐리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바보같이.”
코이는 고작 그 한 마디만을 중얼거렸다. 떨리는 손을 뻗었지만 애슐리는 그대로 있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묵묵히 지켜보는 그를 코이는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애슐리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의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제 돌이킬 수 없어요. 계속해서 망가질 겁니다.〉
그러면 널 사랑하는 난 사라져 버리는 걸까?
그럼 난 대체 뭐가 될까. 널 사랑하지 않는 내가,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걸까?
“그때는…….”
코이가 머리 위에서 속삭였다. 마치 그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내가 기억할게. 내가 널 사랑할게.”
코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마치 주문처럼.
“나보다 더,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언제까지라도, 평생 널 기억하고 사랑할게.”
코이는 그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애슐리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눈을 들여다보았다. 진한 보라색 눈동자를 향해 코이는 해설피 웃어 보였다.
네가 날 잊어도, 더는 사랑하지 않아도.
“내가 사랑하는 넌 여전히 남아 있잖아.”
코이는 눈을 감고 애슐리의 입술에 키스했다. 애슐리 또한 눈을 감더니 입술을 벌렸다. 머뭇거리던 두 팔이 코이의 허리를 감싸고, 이내 강하게 끌어당겼다. 코이는 기쁘게 그의 목으로 팔을 돌려 더욱 깊이 입술을 겹쳤다. 벽장 안에는 둘뿐이었다.
세상엔 오직, 단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