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는 조마조마해하는 마음으로 애슐리를 훔쳐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그저 눈치만 보고 있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10년 동안 여길 오려고 노력했다고? ……그때부터 계속?”
그의 음성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차분한 시선에 코이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키고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으로 대답을 확인한 애슐리는 또다시 말이 없어졌다.
〈애쉬.〉
지금보다 훨씬 앳된 얼굴의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웃는 모습이 시야에 어른거렸다. 언제나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그, 품 안에 들어오던 마르고 작은 몸, 수줍게 맞닿던 입술까지도.
〈좋아해, 애쉬.〉
하, 실없는 숨결이 입가로 흘러나왔다. 한숨과도 같은 자조적인 숨소리를 사이에 두고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모두의 시선 속에서 애슐리는 코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가를 비뚤어뜨리며 냉소를 지었다.
“내가 가장 필요로 할 때 넌 없었잖아.”
순식간에 코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 버렸다. 창백하게 질린 코이를 바라보며 애슐리가 여전히 비웃음을 머금은 채로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나는 얼마나 기다렸다고 생각해, 너를? 줄곧 그 기차역에 혼자 앉아 네가 오기만 기다리면서 어떤 기분을 느꼈을 것 같아?”
키득거리며 그는 웃음소리를 냈다. 물론 웃고 있는 건 애슐리뿐이었다. 그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어깨를 흔들며 웃더니 여전히 조롱이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무 늦게 온 거 아냐?”
“이 자식이 정말.”
“애, 앨!”
주먹을 쥐고 일어서려는 에리얼을 황급히 말린 코이가 서둘러 말했다.
“애쉬의 말이 맞아. 내가 여기까지 온 건 모두 내가 원해서 한 거고 애쉬하고는 관계없어. 애쉬가 책임지거나 신경 써야 할 문제도 아니고.”
에리얼은 기가 막혀 코이를 바라보다 다시 애슐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넌, 코이가 지금까지 줄곧 널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게 너한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거야?”
에리얼의 말에 애슐리는 여전히 코이를 응시할 뿐 즉시 답을 하지 않았다. 내심 조마조마해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흔들리는 눈동자에 애슐리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던가? 코이가 나를 좋아하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고.”
코이의 얼굴이 해쓱해지고, 에리얼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 고집불통 개자식이!”
“앨!”
코이가 다급하게 소리쳤으나 에리얼이 더 빨랐다. 전 아마추어 복싱 챔피언의 주먹이 전 고등학교 아이스하키 MVP의 턱을 날려 버렸다. 애슐리가 크게 휘청거리고, 코이는 입을 틀어막았으며, 빌이 주먹을 움켜쥐고 소리 없이 ‘예스!’를 외쳤다.
하지만 그 순간은 길지 않았다. 애슐리의 눈동자가 까맣게 물들고, 전신에서 페로몬이 끓어올랐다.
“이…….”
벌떡 일어선 애슐리의 이마에 핏줄이 섰으나 자신을 노려보며 마주 서 있는 상대를 본 순간 그는 주춤했다. 에리얼은 여자였고, 코이는 코이였다. 그의 남은 선택지는 빌뿐이었다.
“잠깐, 이건 너무하잖아!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즉시 하키 스틱을 쥐고 자신에게 덤벼들려는 애슐리를 보고 빌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필사적으로 항변했으나 애슐리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 순간 빌은 자신의 구세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코이, 살려 줘!”
다급하게 코이를 붙잡고 커다란 몸을 등 뒤로 구겨 넣으며 소리치는 빌의 돌발행동에 애슐리는 간발의 차로 스틱의 방향을 바꿨다. 아슬아슬하게 헛스윙을 한 스틱이 매서운 바람을 일으키고, 코이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나풀거렸다. 황급히 스틱을 거둬들인 애슐리가 손을 뻗어 코이를 낚아챘다. 얼떨결에 빌을 감싸려 했던 코이가 휘청거리며 끌려가자 애슐리는 곧바로 그의 몸을 안고 창백해진 얼굴로 다그쳤다.
“괜찮아? 안 다쳤어?”
“어, 으응. 난 괜찮아. 걱정하지 마.”
코이가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애슐리는 그의 온몸을 더듬으며 거듭해서 확인하려 했다. 코이에게 이상이 없다는 걸 확신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즉시 코이를 품에 안고 빌을 향해 내질렀다.
“개자식아, 지금 무슨 짓이야? 코이를 방패로 쓰다니, 미쳤어?”
그때까지 커플의 염병천병을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보고 있던 빌이 뒤늦게 분노를 터뜨렸다.
“그럼 앨 뒤에 숨겠냐, 내가? 여기서 날 지켜 줄 사람이 코이밖에 더 있어? 미친 건 너지! 왜 무조건 나한테 덤벼드냐고!”
“코이는 임신했어!”
애슐리의 고함 소리에 정적이 뒤따라왔다. 에리얼 또한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빌의 분노도 덩달아 증발해 버렸다. 둘은 동시에 애슐리의 품에 푹 파묻혀 있는 코이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빌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코이가 임신을 하다니?”
“거짓말하지 마, 사기꾼 새끼야.”
빌도 에리얼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덕분에 애슐리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애슐리의 눈이 서서히 평소의 보라색으로 돌아오고, 페로몬 또한 수그러들었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만으로도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코이는 임신했어. 물론 내 아이지.”
에리얼의 눈이 이번엔 코이에게로 향했다. 정말이냐고 캐묻는 시선에 코이는 그만 눈을 피해 버렸다.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에 에리얼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 개쓰레기 자식, 감히 코이를 임신시켜?”
그녀는 애슐리에게 다시 주먹을 휘두르고 싶어졌지만 코이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순간 빌은 어깨를 움칠했으나 에리얼은 빌의 배 대신 눈앞의 목제 테이블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에리얼이 이를 갈며 애슐리를 노려보았다.
“코이, 비켜. 저 자식을 한 대 더 때려야겠어.”
“자, 잠깐, 앨. 그러지 마, 난 괜찮아.”
코이가 다급하게 그녀를 말렸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코이를 사이에 두고 잡아먹을 듯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둘의 모습에 빌은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며 끼어들었다.
“코이가 임신을 하다니 무슨 소리야? 코이는 베타잖아?”
“넌 조용히 해, 빌.”
에리얼은 여전히 애슐리를 노려보며 내뱉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찌그러지고 만 빌을 뒤로하고 에리얼이 덤벼들 것처럼 사납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설마 지금 코이를 임신시키고 버리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물론 그런다면 에리얼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저 자식의 재산을 빼앗아 코이에게 주겠다고 다짐하는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느긋한 태도로.
“책임은 져야지, 코이를 오메가로 만들었으니.”
“뭐?”
“뭐라고?”
“뭐야?”
코이와 에리얼에 이어 빌까지 덩달아 소리쳤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셋을 앞에 두고 애슐리가 가늘게 뜬 눈으로 에리얼을 응시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코이가 히트사이클을 일으켰을 때 함께 있었다고 했으니까.”
빌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에리얼을 쳐다봤다. 하지만 에리얼은 상황을 설명하는 대신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가득한 얼굴을 애슐리에게 향한 채 대답했다.
“그래, 알고 있었어. 하지만 책임을 진다는 건 무슨 말이야? 코이가 오메가인 거랑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돌아온 질문에 애슐리는 여전히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 페로몬 때문에 변이했을 테니까.”
그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코이 또한 엔젤을 만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믿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이런 추측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코이만이 아니었다.
에리얼이 흘긋 코이에게 시선을 던지고, 코이 또한 움칠 놀라더니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빌까지 이상한 공기를 알아챘다.
“……뭐야?”
애슐리가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달갑지 않은 상황을 예감한 듯이 지금껏 여유롭던 그의 얼굴에서 다소 긴장감이 느껴졌다. 에리얼과 코이가 다시 시선을 교환하고, 에리얼이 고개를 끄덕이자 코이는 마른침을 삼킨 뒤 심호흡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저기, 그게.”
희미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그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내가 오메가가 된 건, 너와 관계없어.”
애슐리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코이는 머뭇거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네 페로몬 때문에 변이한 게 아니라…… 난 정상적으로 발현한 게 맞아. 그러니까, 알아, 나이가 훨씬 지나긴 했는데, 내 말은, 그게.”
“코이는 일반적인 오메가가 아니라 극오메가야.”
지켜보던 에리얼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어 핵폭탄을 터뜨렸다.
코이가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켜고, 애슐리는 그대로 굳었다. 빌 또한 놀라 그들을 번갈아 돌아보다 뒤늦게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그게?”
빌은 답답해하며 물었으나 대답을 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 사이에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공기조차 흐름을 멈춘 듯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아무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덩달아 굳은 빌만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상황 파악을 하느라 분주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한참 만에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마치 성대를 쥐어짜듯 짓눌린 음성으로 이를 갈며 내뱉은 말에 빌은 화들짝 놀라고, 에리얼마저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코이 또한 아무 말 못 하고 있는데, 애슐리가 거친 음성으로 뇌까렸다.
“헛소리 작작 지껄여, 에리얼. 말이 안 되잖아.”
“어째서?”
정신을 차린 에리얼이 따지듯 물었다.
“왜 말이 안 돼? 코이가 극오메가라는 게 뭐 잘못되기라도 했어?”
“하.”
애슐리가 신경질적으로 탄식을 뱉어 냈다. 기가 막힌 듯 고개를 가로저었던 그는 이내 무서운 눈으로 에리얼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코이가 극오메가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절대.”
“그러니까 그게 왜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거냐고. 코이는 극오메가가 맞다니까?”
에리얼은 분통이 터져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슴이 답답해 미치려고 하는 그녀를 비웃듯 애슐리가 냉소를 지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에리얼이 멈칫하자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극오메가는 형질 검사에서도 나타나지 않아. 베타로 나오지. 극오메가라는 걸 증명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고.”
애슐리의 믿음은 굳건했다. 하지만 그 말에서 에리얼은 답을 찾아냈다.
“코이의 형질 검사를 해 봤어?”
에리얼의 물음에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굳이 할 필요가 있나? 임신했는데, 당연히 오메가겠지.”
“난 했어. 아니, 우린 확인해 봤어.”
에리얼은 확신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코이는 베타였어.”
“또 개소리를…….”
에리얼의 말을 애슐리는 믿지 않았다. 불신이 가득한 얼굴로 욕설을 내뱉자 에리얼이 말허리를 가로챘다.
“믿지 못하겠으면 네가 확인해 봐, 코이의 형질이 뭔지. 간단하잖아? 병원에 가면 길어야 이틀이면 나오고, 돈을 더 쓰면 30분 만에도 나와. 지금 당장이라도 해 보지 그래?”
평소의 여유를 되찾은 에리얼이 애슐리를 노려보며 물었다.
“넌 지금 코이가 극오메가라는 걸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싶은가 본데,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너한텐 오히려 잘된 거 아냐? 극오메가는 극알파들의 궁극의 꿈이나 다름없다던데, 넌 다른가 보지? 아니면.”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코이가’ 극오메가라는 게 문제인 거야?”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코이는 그때까지 조마조마해하며 눈치만 볼 뿐이었다. 차마 애슐리의 얼굴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으나 그는 용기를 끌어모아 조심스럽게 시선을 올렸다.
애슐리는 코이 쪽은 보지도 않았다. 여전히 에리얼만 노려보고 있는 그의 태도에 코이는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애쉬, 정말 그래?”
마른침을 삼킨 뒤 코이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직 그를 안고 있던 팔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코이는 애슐리를 올려다보는 채로 재차 물었다.
“내가…… 나라서 싫은 거야? 내가 베타인 쪽이 더 나았어?”
설핏 눈물까지 고인 코이에게 애슐리가 난폭하게 내뱉었다.
“바보 같은 소릴, 네가 뭐든 난 상관없어.”
“그럼 왜 그렇게 부정하는 건데?”
또다시 에리얼이 끼어들었다. 애슐리는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뛰어 대고,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애슐리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이미 이성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근거는 차고 넘친다. 그동안 느꼈던 수많은 질문의 해답은 오직 하나였다. 페로몬 향기가 오락가락했던 것도, 그때 자궁이 없었던 것도.
내 뇌가 잘못돼서, 미쳐서 착각했던 게 아니라 정말로.
“그럴 리가 없어.”
애슐리의 음성이 희미하게 떨렸다. 마치 자아가 붕괴되는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입술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의 코이가 그럴 리가 없어.”
“애쉬.”
당황한 코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애슐리의 팔에서 힘이 빠지고, 주춤거리며 그가 뒤로 물러났다. 코이에게서 떨어져 선 애슐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기 속에 떠도는 페로몬 향기는 오직 자신의 것뿐이었다.
“코이가 오메가라면 페로몬 향기가 나야 하잖아.”
그는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보고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극오메가니까 페로몬 조절을 해서…….”
“닥쳐!”
거친 고함 소리에 입을 다문 에리얼에게서 고개를 돌린 애슐리가 코이를 응시했다.
“일부러 나한테 페로몬 향기를 감출 이유가 없잖아.”
자신을 억지로 설득하려는 듯이 그가 말을 이었다.
“코이는 변이를 했고, 그래서 페로몬 향기가 약한 것뿐이야. 그게 다라고.”
“애쉬…….”
코이가 다시 그를 불렀으나 애슐리는 성큼 뒤로 물러났다. 막 그에게 다가가려던 코이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아니지?”
애슐리가 억지로 입가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에리얼이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렇지? 넌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잖아, 안 그래?”
“애쉬…….”
“코이.”
애슐리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그는 너무나 간절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애슐리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현실이 아냐.”
“애쉬.”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거세게 고함을 지른 그가 갑자기 숨을 들이켰다. 앞으로 넘어오는 커다란 몸에 코이가 놀라 소리쳤다.
“애쉬!”
“흐억.”
빌이 놀라 짧은 비명을 지르며 팔로 코를 막았다. 에리얼 또한 눈을 크게 뜨고 뒤로 물러났다. 숨을 몰아쉬며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애슐리의 눈동자가 현란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애쉬, 왜 그래? 또 몸에 이상이 생긴 거야?”
코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애슐리는 대답을 할 상태가 아니었다. 페로몬 조절이 되지 않는 건가?
버니스의 말이 떠올라 코이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페로몬 때문에 애슐리의 뇌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상기해 내자 돌연 두려움이 밀려왔다.
“애쉬, 애쉬! 정신 차려, 애쉬!”
급하게 소리치며 휴대 전화를 꺼냈지만 손이 떨려 놓치고 말았다. 코이는 글썽거리는 눈물을 다급하게 문질러 닦고 휴대 전화를 주워 들었다. 버니스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지금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이라고.
“애쉬!”
갑자기 에리얼이 소리쳤다. 막 버튼을 누르고 휴대 전화를 귀로 가져갔던 코이는 반사적으로 돌아봤다가 비명처럼 숨을 삼키고 말았다. 애슐리가 휘청거리며 일어나더니 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애쉬, 기다려! 어딜 가는 거야?”
코이는 전화 연결을 기다리지도 못하고 달려갔다.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애슐리는 난폭하게 그를 뿌리쳤다. 크게 휘청거린 코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애슐리가 방에서 나가고 없었다. 당황한 코이가 서둘러 뒤를 쫓아 보려 밖으로 나갔으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남겨진 것은 평소보다 훨씬 진해진 애슐리의 페로몬 향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