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릭 미 업 이프 유 캔-212화 (21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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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애쉬! 멈춰, 멈추라니까! 으억!”

다급하게 소리치며 소파를 뛰어넘었던 빌이 그만 중심을 잃고 바닥에 얼굴을 박아 버렸다. 그나마 카펫이 깔려 있어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전혀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자신의 부상당한 손목이 또 무리를 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으나 지금은 목숨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했다. 애슐리는 어마어마하게 화가 나 있었다. 보라색 눈이 까맣게 보일 정도로,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에 숨이 막힐 만큼.

“나와 코이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이야, 믿어 달라고!”

아슬아슬하게 얼굴을 비껴간 스틱에 빌은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갑자기 애슐리가 스틱을 거둬들이고 그를 내려다봤다.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빌에게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코이를 호텔 방에 부른 게 네가 아니라고?”

빌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 그건 맞는데.”

“코이한테 샴페인을 마시라고 준 것도 너지?”

“그, 그것도 내가 한 게 맞지만.”

“……키스를 한 건?”

“그것도…… 내……가…….”

빌은 점점 자신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증거로 애슐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골적으로 그를 비웃으며 물었다.

“내가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는 게 뭐지? 모두 다 맞잖아?”

“아니, 맞는데 틀리다고, 이러지 마! 어떻게 된 거냐면, 으악!”

빌은 다시 날아온 스틱을 간신히 피해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코이한테 확인해 봤다면서 왜 이러는 거야? 코이가 너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코이는 거짓말하지 않아.”

애슐리는 전혀 숨결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단정지었다. 빌이 그럼, 하고 희망을 가지려는 찰나 그는 매몰차게 덧붙였다.

“나의 코이가 날 배신했을 리는 없고, 네가 꼬여낸 거겠지.”

“나의 코이?”

빌은 기가 막혀 애슐리가 한 말을 반복했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다. 애슐리의 스틱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빌의 머릿속에 그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렇게 친했었는데,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런 짓을.

억울함이 북받쳐 빌이 고함을 질렀다.

“그럼 나한테 넘어온 코이한테도 잘못이 있잖아!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건데? 너 코이한테는 잘만 넘어갔다면서!”

악을 쓰며 따지는 빌에게 돌아온 대답은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코이를 때릴 순 없잖아.”

“야, 이 개새끼야!”

빌이 다시금 소리쳤을 때였다. 드디어 그의 몸이 사각지대에 갇히고, 스틱이 정확하게 머리를 향해 날아들려는 순간.

갑작스레 초인종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곧바로 애슐리가 움직임을 멈췄다.

“빌, 나야, 코이! 애쉬 여기 있어?”

요란하던 실내에 정적이 찾아왔다. 고작 1, 2초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현역 아이스하키 팀 에이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살려 줘, 코이!”

“이……!”

틈을 비집고 나가 다급하게 소리치는 빌의 뒷모습에 애슐리가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빌은 사신의 낫을 필사적으로 피해 달아나는 기분을 느끼며 죽을힘을 다해 달려갔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를 살려 줄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바로 지금 문밖에 서 있는 코이뿐.

셋. 둘. 하나.

순식간에 문이 가까워졌다. 빌은 힘껏 팔을 뻗어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덜컥, 문이 열린 순간 머리 뒤에서 뻑, 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억!”

“빌!”

“히익!”

빌의 비명과 함께 열린 문 틈으로 또 다른 비명이 섞여 나왔다. 하키 스틱을 든 채 멈춰 선 애슐리의 시야에 사색이 된 코이와 눈을 크게 뜬 에리얼의 모습이 보였다.

“아아악, 아아악!”

뒤통수를 감싸쥐고 바닥을 구르는 빌에게 둘은 후다닥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빌?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

“앰뷸런스 불러야 돼, 머리를 맞았잖아!”

“피는 안 나는 것 같은데. 스친 거 아냐?”

에리얼의 말대로 머리가 터진 건 아닌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코이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애슐리를 올려다봤다.

“애쉬, 어떻게 된 거야? 그건 뭐고?”

애슐리가 시선을 내렸다. 곧바로 뒤통수를 감싼 채 끙끙거리며 실눈을 뜨고 그를 훔쳐보는 빌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빌이 히이익, 비명처럼 숨을 삼키며 더 큰 소리로 끙끙 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코이가 또다시 하얗게 질려 황급히 말했다.

“내가 다 설명했잖아, 이해한다고 하고서 왜 이러는 거야? 어서 내려놔, 그거. 빌이 무서워하잖아.”

애슐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꿈쩍도 않고 선 그를 올려다보며 코이가 빨리, 하고 재촉했다.

그러자 애슐리는 사이를 두고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어?”

무심코 되묻자 애슐리는 느리게, 놀랄 정도로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빌을 감싸고 있는 거야? 내 앞에서?”

“어, 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여전히 멍한 소리만 되풀이하자 에리얼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네가 살인자가 될지도 모르니까 이러는 거잖아. 빌을 감싸는 게 아니라 널 보호하려는 거라고, 멍청아.”

“아니, 나는 둘 다 걱정하고 있는…….”

“넌 조용히 해.”

눈치 없이 나서는 코이에게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린 에리얼은 다시 애슐리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일단 대화로 풀자고. 코이도 무서워하잖아, 안 그래?”

“어? 어어…….”

이번에는 그나마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급히 동의했다. 고개를 끄덕인 에리얼과 눈빛을 교환한 코이가 다시 말했다.

“저기, 그러니까 일단 그건 좀 내려놓고 얘기하자, 응? 제발.”

애원하다시피 흘러나온 음성에 애슐리의 기세가 다소 누그러졌다. 한결 부드러워진 그의 페로몬 향으로 빌과 에리얼은 느낄 수 있었으나 코이는 알지 못했다. 그저 조마조마해하며 올려다보는 그에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다치니까 비켜.”

“어?”

코이는 멈칫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하키 스틱으로 향했다가 다시 애슐리에게로 돌아갔다.

“저기, 그걸 먼저 내려놓으면…….”

“비키라고.”

애슐리가 이를 갈며 낮은 소리로 내뱉었다.

“너부터.”

이렇게까지 나오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빌과 에리얼을 번갈아 보았던 코이가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그제야 애슐리는 들고 있던 하키 스틱을 내려놓았다. 그래 봤자 손 뻗으면 바로 닿을 거리에 위치한 그것은 여전히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어쨌든 위기의 순간은 지난 것 같아 코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리얼이 빌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넷은 드디어 서로를 향해 마주 섰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날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

제일 먼저 울분을 토해 낸 것은 역시나 빌이었다. 그는 억울함과 서운함이 뒤섞여 원망 서린 얼굴로 마구 애슐리에게 고함을 질러 댔다.

“우리가 연락 안 한 지 10년은 됐다고 해도 어떻게 이러냐? 나라고, 빌 걸리버! 고등학생 때 네 베프였던!”

그들이 함께했던 시간이 눈앞을 스쳐 가자 울컥 눈물이 치밀었다. 굵은 팔뚝으로 두 눈을 훔치며 훌쩍거리는 산만 한 덩치의 빌을 보고 에리얼은 위로하듯 등을 토닥였다.

“그래, 이번 건 네가 심했어. 아무리 코이 일이라면 눈에 보이는 게 없다고 해도. 네 입장은 이해하지만 말야.”

“이해한다고? 애쉬를?”

곧바로 빌이 따져 물었다. 화살이 이번엔 자신에게 돌아오자 에리얼은 냉정한 분석을 내놓았다.

“애쉬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 베프였던 네가 코이를 유혹한 게 되니 더 화가 나겠지.”

“그런 게 아니라고! 너까지 날 못믿는 거야?”

으아! 소리치며 머리를 난폭하게 헝클어뜨리는 빌의 허리를 꼬집어 진정시킨 에리얼이 두 눈을 치켜떴다.

“좀 제대로 들어. 애쉬의 입장에서, 라고 했지?”

한층 풀이 죽은 얼굴을 올려다보며 에리얼이 말을 이었다.

“애쉬는 코이에 한해서라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지금껏 난 저 자식이 코이와 관련해서 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꼴을 본 적이 없어.”

팔짱을 낀 채 턱을 치켜올린 에리얼이 야유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나마 너라서 많이 봐준 것 같은데? 전에 어떤 녀석은 몇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진 데다가 거지가 됐다고.”

‘그렇지?’ 하고 에리얼이 물었으나 애슐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리둥절해하는 빌과 코이를 내버려 둔 채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이제 다들 진정이 됐으면 좀 앉아서 얘기할까? 오랜만에 한자리에서 만났는데 이렇게 서서 서로 노려보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제안을 한 에리얼이 가장 먼저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애슐리가 코이를 내려다보더니 어서 앉으라는 듯 팔을 내밀었다. 코이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인 후 시키는 대로 에리얼 맞은편에 앉았다. 당연한 것처럼 코이의 옆에 앉은 애슐리는 한 팔을 코이의 어깨에 걸치고 다른 손에는 하키 스틱을 잡았다. 헛소리라도 하는 날엔 바로 이걸 휘두르겠다는 듯이.

그 모습을 본 빌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 애슐리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았다. 여차하면 바로 달아나려는 양, 문까지의 거리를 눈으로 재며.

그런 그의 행동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 애슐리가 슈트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담배를 꺼냈다. 미간을 모은 채 담배를 문 그가 라이터를 켜려다 멈칫했다. 곧 입에 물었던 것을 떼고 다시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그를 코이가 아무 말 없이 보고 있는데, 애슐리가 말을 꺼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라는 게 뭐야?”

평소처럼 냉정한 음성에 에리얼이 흘끔 빌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리둥절해하는 빌을 내버려 둔 채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빌은 코이에게 어떤 사심도 갖고 있지 않아. 이 녀석이 동부에 온 건 나 때문이니까.”

애슐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에리얼은 썩 내키지 않아 하는 말투로 설명했다.

“나랑 다시 잘해 보고 싶어서 온 거라고. 코이는 우리 둘의 친구니까 중간에서 메신저 역할을 해 준 것뿐이고. 이제 알겠지? 괜한 질투나 분풀이는 그만둬.”

에리얼의 차분한 설득에 코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생각했으나 애슐리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넌 대체 언제까지 보모 노릇을 할 생각이야?”

“뭐라고?”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리둥절해진 것은 에리얼만이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 속에서 오직 에리얼만을 바라보며 애슐리가 빈정거렸다.

“여왕벌 노릇은 고등학생 때 충분히 하지 않았어? 지금까지 친구랍시고 쫓아다니면서 뒤치다꺼리를 하는 건 지나치다고 생각 안 해?”

“애쉬, 무슨 말을…….”

“그러니까 네 말은.”

당황한 코이를 가로막고 에리얼이 물었다.

“코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내게 와서 의지하는 게 불쾌하고 아니꼽다는 얘기지? 그럼 진작에 코이를 찾아서 코이가 널 의지할 수 있게 신뢰를 쌓아 두지 그랬어?”

애슐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곡을 찌른 에리얼이 가차 없이 내뱉었다.

“너와 헤어졌던 10년 동안 코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넌 전혀 모르잖아? 밥도 굶어 가면서 잠도 안 자고 돈을 모았다고. 오직 널 만나러 여기 오겠다고.”

“애, 앨!”

그런 얘기는 뭐 하러 해, 코이는 생각하며 다급하게 그녀를 말리려 했으나 에리얼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코이가 너만 생각하면서 힘들게 일할 때 우리는 그저 옆에서 응원하는 것밖에는 해 줄 수 없었어. 그러는 동안 넌 뭘 했어? 코이가 힘들게 너에게 오기 위해 애쓰는 동안 대체 한 게 뭐냐고. 집안 좋은 여자랑 약혼이나 하고, 페로몬 파티에도 갔었지? 넌 코이를 잊기 위한 10년이었겠지만 코이는 아냐, 너를 더 기억하고 오직 너만을 위한 10년이었다고.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 몰라라 하고 있던 네가 감히 이제 와서 빌과 코이 사이를 오해하고 질투할 자격이 있어?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코이를 지켜봤는지도 전혀 모르면서?”

애슐리는 창백한 얼굴로 굳어진 채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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