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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뒤에도 코이는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멀거니 앉은 채였다. 다만 이전과 다른 것은 그가 진료실에 가 의사와 면담을 하고 돌아왔다는 사실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이 들은 것을 믿지 못했다.
정말로 임신이라니.
그제야 자신이 간간이 느꼈던 복통의 이유를 알게 됐다. 무리한 활동이 자극이 된 것이라며 의사는 코이에게 당분간 안정할 것을 당부했다. 또 임신 초기에는 히트사이클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어떤 경우는 출산을 할 때까지도 히트사이클이 온다고. 호르몬 불균형 때문에 페로몬 조절이 안되어서 그런다는 설명까지 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여기에 정말 아이가 있다고?
슬그머니 배를 쓰다듬어 봤지만 여전히 평평할 뿐이었다. 얼떨떨해하며 그대로 앉아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역시나 애슐리였다.
“어때? 기분은 좀 나아졌어?”
코이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는 자신이 혼란스러워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여전히 그의 말투는 냉담했고,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아는 애쉬가 아닌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아까 사과도 너무 두루뭉술 넘어갔다. 코이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랑했던 애슐리라면 몇 배는 더 진중하게 사과를 했을 테고, 말투도 지금처럼 딱딱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나를 임신시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병원에 왔겠지. 그냥 내버려 두고 상황을 지켜보는 건 너무나 냉정하고 계산적인 행동이 아닌가.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애슐리에게서 듣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코이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부를 털어놓는 것도 아니었니까.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그에게 진실을 말해 줄 사람은.
불현듯 눈앞을 스친 얼굴에 코이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 마음과는 별개로 이성은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필요한 사람은 그녀라고.
후우, 심호흡을 했던 코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불러줄 수 있을까?”
이름을 들은 애슐리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곧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버니스가 병실에 찾아온 것은 대략 1시간여가 흐른 뒤였다.
*
똑똑, 절도 있게 들린 노크 소리에 코이는 잔뜩 긴장해 고개를 돌렸다. 잠깐 기다렸던 그녀는 곧 병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애쉬는 사무실에 일이 생겨서 갔어요.”
슬쩍 안을 훑어보는 듯한 시선에 코이가 먼저 말했다. 이거야말로 타이밍이 좋았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애슐리를 내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야 했을 것이다.
“내게 볼일이라니, 뭐니?”
버니스는 평소처럼 사무적으로 물었다. 코이는 마른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애쉬의 뇌 장애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알고 싶어요.”
버니스가 가고 난 뒤 코이는 혼자 남아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들은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할 리 없고, 그녀의 말을 신뢰하지 않을 거라면 애초에 버니스를 부르지 않았을 터다. 자신을 매몰차게 대했다는 사실을 배제하고 보면 그녀는 자신의 일에 관해선 실수를 하거나 거짓을 더한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 지금의 상황도 그 사람이 가장 정확히 파악했겠지.
충분히 이성적으로 납득이 갔으나 감성적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주니어의 뇌는 이미 손상됐어.〉
〈돌이킬 방법은 없어. 그저 손상을 지연시키는 수밖에.〉
〈그의 뇌는 앞으로 계속해서 망가져 갈 거야.〉
〈언젠가 널 알아보지도 못하고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때가 오겠지. 그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빠르면 수년 내, 늦으면 10년 후? 그보다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이미 감정을 느끼는 변연계가 일부 훼손됐고 기억에도 장애가 생겼어. 앞으로 더욱 심해지겠지. 파편처럼 부서지는 기억을 네가 수시로 짜맞춰 줘야 할 거야. 내가, 이곳의 의료진이 지난번에 그렇게 했듯이.〉
〈변연계가 망가지는 건 극알파들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주니어같이 늦게 발현한 경우는 손상이 거의 없어. 이 정도로 망가지는 건 드문 일이지.〉
〈엔젤이 일으킨 페로몬 쇼크 때문이냐고?〉
〈아니, 주니어는 이미 그 전부터 망가져 있었어. 더 오래전부터.〉
〈이번 페로몬 쇼크는 기폭제가 됐을 뿐이야.〉
코이는 그만 신음과 함께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말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뿐이었다. 애슐리가 그 전부터 망가져 있었다니, 대체 언제부터라는 걸까. 자신이 그와 잤을 때부터? 아니면 다시 만났을 때? 동부에 오기 전?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주니어만이 알고 있겠지.〉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
불현듯 코이는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난 너를 만날 생각이 없었어.〉
다시 만났을 때 애슐리가 했던 말들이 하나씩 되살아나고, 그의 얼굴에서 점차 핏기가 사라져 갔다.
〈네가 너무 일찍 왔어.〉
〈네가 내 계획을 망쳐 버렸어. 완전히.〉
그리고 또 뭐라고 했었지?
〈그럼 언제쯤 날 찾아오려고 했었어?〉
코이가 물은 말에 애슐리는 대답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글쎄. 앞으로 10년 뒤쯤?〉
〈그 정도 지나면 내 계획대로 될 것 같았어.〉
그 순간 코이는 거친 숨을 들이켜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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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슐리가 그린벨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코이가 그에게 전화를 하고 30분이 좀 더 지났을 때였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던 코이는 종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그를 발견하고 그대로 시선을 멈췄다.
성큼 안으로 들어온 애슐리는 한 차례 가게 안을 둘러보더니 곧 코이와 눈을 마주쳤다. 코이는 그에게 웃어 보이려 했지만 얼굴 근육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어설픈 미소를 억지로 만들어 보이는데, 애슐리가 큰 보폭으로 그를 향해 걸어왔다.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애슐리가 코이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위압적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분위기에 코이는 순간 주눅이 들었으나 용기를 내어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냈다.
“빨리 왔네, 1시간은 걸릴 줄 알았는데.”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묻잖아.”
애슐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재차 말했다. 코이는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은 자신을 필사적으로 참고 건너편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 봐, 얘기는 그다음에 할게.”
“…….”
“빨리.”
코이가 다시금 재촉하자 애슐리는 마지못한 듯 건너편에 앉았다. 짜증스러운 것처럼 말끔하게 빗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그를 보며 코이가 말문을 열었다.
“여기, 오랜만이지?”
애슐리가 아무 말 없이 코이를 응시했다. 코이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어릴 땐 여기가 너무 비싸서 음료 한 잔을 제대로 못 마셨는데, 지금은 식사를 사 먹을 수 있을 만큼 돈을 벌었다니 대단하지 않아?”
“음료에 얼음도 넣고?”
애슐리가 빈정거렸으나 코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이제 어른이거든.”
애슐리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는 듯이.
때마침 직원이 자리에 오고, 코이는 따뜻한 허브티를 주문했다. 애슐리가 더블 에스프레소를 말했지만 그것은 메뉴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싸구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직원이 가고 난 뒤 코이가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커피가 마시고 싶지만 카페인은 몸에 안 좋다고 하더라고. 이상하지, 그러고 보니까 커피를 마신 지 좀 됐어. 아마 몸이 본능적으로 알았나 봐.”
무심코 배를 쓰다듬자 애슐리는 그런 그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대체 코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그는 섣불리 상대를 다그치는 대신 신중하게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침묵을 사이에 두고 마침내 코이가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어.”
그는 심호흡을 한 뒤 애슐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넌 내가 오메가가 됐다는 걸 그때까지 몰랐던 게 맞지? 임신도 고의는 아니었고?”
“그래.”
애슐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코이가 다시 물었다.
“만약에 내가 오메가고 임신할 수 있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그때 조심했을까?”
가정이란 의미 없지만 코이에게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애슐리는 잠깐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랬다면 너와 자지 않았을 거야.”
“어째서?”
코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나와 섹스를 하게 되면 애써 쌓아 둔 페로몬이 빠지니까?”
애슐리는 입을 다물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 생각을 읽기란 쉽지 않았다. 그저 그의 입이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리는데, 애슐리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느리게 흘러나온 말에 코이는 그가 내심 당황했다는 걸 눈치챘다.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말을 돌렸다는 게 그 증거다. 코이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미스 버니스와 만났어. 네 상태가 어떤지 들었고.”
애슐리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코이는 그가 아주 한순간 멈칫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애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코이는 굳이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종종 했었어. 넌 예전하고 많이 달랐으니까. 아니, 수시로 말과 행동이 바뀌어서 대체 왜 저러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지. 하지만 뇌에 손상이 온 거라면 앞뒤가 맞아. 네 감정 기복이 심한 것도, 때때로 무서울 정도로 냉정해지는 이유도 그래서겠지.”
빠르게 말을 쏟아 냈던 코이가 심호흡을 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참아 왔던 질문을 드디어 입에 담았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대체 네가 왜 그랬느냐야.”
코이의 음성에 점차 감정이 담겨 격하게 흐트러졌다. 그는 차분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입이 멈추질 않았다.
“내가 너한테 상처 줬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나한테 상처 주고 싶었다면, 그것 때문에 일부러 날 임신시킨 거라고 하면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건 얘기가 전혀 다르잖아. 왜 그런 거야? 내가 네 계획을 망쳤다고 했지? 그래서 계획을 수정한 게 이거야? 그럼 네 뇌는 어떻게 된 건데, 도무지 모르겠어. 나한테 설명을 해 줘.”
코이가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면 역시 난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처음으로 애슐리가 반응했다. 대체 왜 그런 얘기가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는 듯이. 하지만 코이는 이미 이성적으로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몇 시간을 곰곰이 생각하고도 답을 찾지 못했다 보니 그동안 가슴에 묻어 놨던 모든 마이너스 감정들이 쏟아져 나와 버렸다.
“내가 청혼했을 때 당황했잖아. 내가 네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아니면 나를 사랑하고 나와 섹스는 할 수 있어도 결혼은 아니라는 거야? 내가 가난뱅이 코너 나일즈라서?”
그 말에 애슐리는 참지 않고 내뱉었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넌 내가 내 아버지 같은 쓰레기로 보여?”
마치 버튼을 눌린 것처럼 화를 내는 그의 모습에 코이는 깨문 입술을 놓고 털어놓았다.
“메뉴판.”
“뭐?”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코이는 떨리는 숨을 뱉으며 고백했다.
“그 프렌치 레스토랑의 메뉴판, 네가 가짜로 만들었다는 거 알고 있어.”
애슐리는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갑자기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모르는 척하지 마, 네가 일부러 내 사정에 맞춰서 메뉴판을 가짜로 만들라고 한 거잖아. 나머지 금액은 네가 낸 거겠지? 난 그게 정말인 줄 알고 바보같이 좋아했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애슐리는 순간 멈칫했으나 이내 화를 내며 코이를 몰아붙였다.
“내가 그렇게 해서 너한테 무슨 피해라도 있었어? 내가 쓰러져 있었을 때 넌 여자랑 같이 거길 갔었잖아. 왜 거기였어? 과시하기 위해서였던 게 아닌가? 가진 돈은 얼마 없고, 그나마 거긴 네가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식당이었으니까.”
빈정거리며 내쏘는 말에도 코이는 물러나지 않았다.
“네 말이 맞아. 내가 갈 수 있는 제일 좋은 곳으로 가고 싶었어. 왜냐면 내가 그녀에게 굉장히 실례를 저질렀고, 또 저지를 예정이었기 때문이야.”
짧게 숨을 들이켠 후 그는 빠르게 덧붙였다.
“네가 쓰러져 있는 동안에 거기 갔던 건 미안해. 나도 마음에 걸렸지만, 너랑 다시 만나기 전에 모든 걸 정리하고 싶었어. 어영부영 시간을 끄는 건 양쪽 모두에게 실례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뭐가 문제야? 결과적으로 네가 원하는 대로 전부 다 되지 않았나? 대체 왜 화를 내는 거지?”
여전히 애슐리는 그의 말을 전혀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한 설움을 터뜨리며 코이가 물었다.
“넌, 아직도 내가 불쌍해?”
“뭐라고?”
난데없는 말에 애슐리가 한껏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코이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정말로 날 배려했다면 내 사정에 맞는 식당으로 날 데려갔을 거야. 네 수준에 맞는 식당에 가서 가격표를 조작하는 게 아니라.”
순간 애슐리가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움직이는 건 오직 흔들리는 눈동자뿐이었다. 그런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코이는 거칠게 감정을 쏟아 냈다.
“날 사랑한다고 몇 번이나 말하면서 넌 한 번도 청혼하지 않았어. 네가 결혼하려고 했던 그 여자처럼 좋은 집안이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 넌 나와 섹스하고 사랑한다고 말할 정도의 감정이었을 뿐이야. 그러면서 결혼은 또 격이 맞는 사람과 하겠지, 난 거기서 자격 미달인 거고.”
“무슨 개소리를…….”
“부정하지 마, 그게 너의 진심인 거니까. 넌 몰랐겠지. 하지만 이게 맞아. 깨닫지 못했을 뿐 이게 네 안에 숨어 있는 진심인 거라고. 넌 나에게 맞춰 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아. 날 너에게 맞추려고만 하지. 너에게 날 위한 마음이 정말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렇게 거만하게 내게 자선이라도 베풀듯이 행동하지는 못할 거야.”
거기까지 말하고 코이는 다물었다. 격한 감정으로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는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놓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고작 한 짓이 나한테 복수하겠다고 자학하는 거야? 왜 그렇게밖에 못 해? 내가 그런 너를 동정하기라도 하길 바랐어? 이렇게 날 상처 주는 게 네가 날 사랑하는 방식이야? 내가 널 버렸다고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고 날 원망하는 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속상한 마음에 치미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여전히 냉담하기만 했다. 잠시 관절이 하얗게 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던 애슐리가 느슨하게 손을 폈다.
“네가 뭘 알아?”
서늘한 보라색 눈동자가 코이에게 고정되었다. 그는 엷은 조소를 띠며 말했다.
“넌 여전히 아무것도 몰라.”
“그럼 네가 설명해, 내가 알게끔.”
코이는 물러나지 않았다. 전혀 기죽지도 주눅이 들지도 않은 채 자신을 향하는 강한 눈동자에 애슐리는 말이 없었다. 잠시 넋을 잃은 것 같기도 했다. 혹시 또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났을 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내가 굳이 네 수준에 맞춰야 할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난 전부 잊어버릴 거고, 넌 또 날 버릴 텐데.”
황망하게 일그러진 코이를 보며 애슐리가 웃었다. 입가를 끌어 올려 한껏 사려 깊은 미소를 떠올렸으나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코이조차도 알 수 있었다. 급기야 코이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도대체 넌 왜 그래?”
난폭하게 눈을 문지른 그가 빠르게 내뱉었다.
“왜 그렇게 못된 말만 해? 그쪽에 이상이 생겼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그래도 해도 되는 말과 아닌 말은 구분할 거 아냐.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거야?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
달콤했던 기억이 더욱 코이를 괴롭게 했다. 차라리 자신도 애슐리처럼 잊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을 때, 애슐리가 무감정하게 말했다.
“이제 예전의 나는 잊어버려.”
목소리만큼이나 표정 없는 얼굴로 그는 코이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게 지금의 나야. 만약에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어.”
잠자코 듣기만 하는 코이에게 애슐리는 결론을 냈다.
“서부로 돌아가, 코이.”
코이는 멍하니 애슐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쩌면 애슐리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코이 또한 흔들렸으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약해져선 안 돼, 그것 또한 애슐리의 계산일지도 모르니까.
그는 코이를 상처 주고 자신의 말이 맞는다는 걸 기어코 증명할 것이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코이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하겠지.
그것 봐, 넌 또 나를 버리잖아.
결코 그렇게는 하지 않겠어.
애슐리가 이렇게 된 건 코이 때문이다. 여기서 애슐리를 끌어안고 모든 걸 덮어 버리면 간단하게 끝날 일이다. 하지만 코이는 다른 쪽을 택했다. 그보다 먼저 자신에 대한 애슐리의 뿌리 깊은 불신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학창 시절, 애슐리의 집 아이스링크에서 연습을 하다 궁지에 몰려 울음을 터뜨리며 모든 걸 포기하려 했던 순간, 애슐리가 자신을 일으켜 세웠던 그때처럼. 이번에는 코이가 그에게 손을 내밀 차례였다.
테이블 아래로 두 주먹을 움켜쥔 코이가 결연하게 고개를 들고 똑바로 애슐리를 응시했다.
“싫어.”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 정도 저항은 예상했다는 듯이 그는 곧 미간을 펴고 별다른 태도의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아이 때문이라면…….”
“그래서가 아냐. 물론 아이도 이유이긴 하지만.”
코이는 선수 쳐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자신에게 넘쳐나는 돈으로 이 문제도 간단히 해결될 거라고 예상했겠지만 틀렸다. 코이는 평생 가난했고, 돈이 없는 생활쯤은 그에겐 일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때문에 돈은 그에게 선택지가 되지 못했다.
“말했잖아, 난 다시는 널 버리지 않을 거라고.”
코이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 써 힘주어 내뱉었다.
“하지만 네가 그런 식으로 날 상처 주는 걸 참지도 않을 거야. 네가 감정을 느끼지 못해도 난 느끼니까.”
애슐리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이번에는 주름이 좀 더 깊게 잡히는 것을 보며 코이가 약간의 자신감을 얻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물론 코이도 아직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코이 또한 마찬가지이므로.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앞으로 우리가 함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하게 대답하자 애슐리가 하, 하고 기가 막힌 듯 탄식을 뱉어 냈다. 코이는 고개를 돌려 버린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든 난 포기 안 해. 실망했다면 미안하지만.”
애슐리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눈동자만을 그에게 향했다. 그런 애슐리와 눈길을 마주하며 코이가 덧붙였다.
“넌 내가 떠나서 네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거잖아.”
애슐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코이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증명하는 듯했다. 코이는 잠자코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일어섰다.
“내 몫은 내가 낼게. 우린 지금 데이트하는 게 아니니까.”
허리를 쭉 편 코이가 마지막으로 선언했다.
“생각이 바뀌거나 좋은 방법이 생각나면 연락해. 나도 그렇게 할 테니까.”
먼저 자리를 떠나려던 그가 아 참, 하고 걸음을 멈췄다.
“네가 문을 부수는 바람에 그 집엔 있을 수 없게 됐어. 당분간 앨의 집에서 신세를 질 예정이니까 알고 있으라고. 또 괜한 오해는 하지 말고.”
애슐리의 찌푸린 얼굴을 마지막으로 코이는 정말로 그 자리를 떠났다. 가게 밖에서 어떤 여자가 그에게 말을 거는 모습이 전면 창을 통해 훤히 보였다. 길을 알려 주는 것 같더니 대화가 좀 더 길어졌다. 코이가 웃으며 고개를 저은 뒤 다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여자가 한숨을 내쉬며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광경을 애슐리는 그 자리에 앉은 채로 모두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