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릭 미 업 이프 유 캔-207화 (207/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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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우.”

집에 돌아온 코이는 소리를 내어 긴 숨을 내쉬었다. 혼자가 되고 나자 적막감과 함께 마음이 진정되었다.

오늘은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간단히 샤워를 끝내고 침대에 누운 그는 너무나 길었던 하루를 차분하게 정리해 보았다. 빌이 에리얼과 다시 관계를 맺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가 최근 연인과 헤어지고 혼자라는 사실에 그는 뛸 듯이 기뻐했으나 그렇다고 쉽게 다가서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기껏 여기까지 왔으니 빌은 신중하게 관계를 다시 만들고 싶어 했다. 물론 코이는 양쪽 모두의 의견이 소중했으므로 미안하지만 중립을 선언했다. 에리얼이 원하지 않는다면 무조건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이해해, 코이. 지금 앨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알려 준 것만으로 충분해.〉

빌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앨이 헤어졌다는 얘길 했다는 것도 사실 앨로서는 반갑지 않을걸.〉

그건 그래.

코이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에리얼의 사생활을 멋대로 떠들어 댄 거나 마찬가지니까 솔직히 고백하고 사과해야 한다. 빌이 여기에 왔다는 사실도 알려 줘야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를 지원해 주지는 못할망정 계획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사과를 하는 것은 빌이 에리얼을 만난 뒤에 하기로 약속했다. 어차피 빌의 휴가는 2주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미안해, 앨.

죄책감에 사과를 한 코이는 눈을 감았다. 곧이어 애슐리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이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나마 빌과 함께 있을 때는 나았으나 혼자가 되자 곧바로 우울해지고 말았다. 애슐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되살아나고,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곧 알게 될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애쉬?

〈네가 내 계획을 망쳐 버렸어, 완전히.〉

잠으로 빠져들면서 코이는 다시 만났을 때 애슐리가 했던 말을 어렴풋이 기억해 냈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계획이란 뭐였을까……?

하지만 그 말은 다시 의식 아래로 파묻혀 버렸고, 깨어났을 때 그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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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갑자기 배 한구석이 아파 코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며칠 전부터 불규칙적으로 찌르듯이 시작된 통증은 갑자기 나타났다가 이내 가라앉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몸이 안 좋은가……?

코이는 정원의 땅을 파던 걸 잠시 멈추고 허리를 폈다. 정원 공사는 힘들지만 제법 일당이 괜찮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훔쳤던 그는 문득 허리의 진동을 느끼고 휴대 전화를 꺼냈다가 깜짝 놀랐다. 혹시 몰라 저장해 두었던 번호의 주인이 연락을 하다니, 뭔가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아, 네.”

급히 전화를 받자 건너편에서 예의 메마른 음성이 들려왔다.

- 코너 나일즈? 나는…….

“미스 버니스, 혹시 애쉬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코이는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먼저 다급하게 물었다.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일주일은 아직 이틀 정도 남았다. 순간 불길한 예감에 눈앞이 캄캄해졌을 때, 버니스가 “아니.” 하고 짧게 대답했다.

- 일이 생기긴 했지만 주니어는 아냐.

“네? 그게 무슨…….”

어리둥절해하며 묻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 도미니크 밀러 씨가 사망했단다. 어차피 기사에 날 테니 미리 알려 주려고.

“……네?”

코이는 순간 멍해져 고작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도, 도미니크 밀러 씨라니, 애쉬의 아버지가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더듬거리며 묻자 건너편에서는 그래, 하고 냉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 당분간 주니어는 장례 절차로 많이 바쁠 거야. 연락이 닿지 않으면 내게 전화해. 메시지 정도는 전해 주마.

“어, 네…… 자, 잠깐만요!”

여전히 얼떨떨해하며 대답했던 코이는 버니스가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확인한 뒤 코이는 겨우 말을 꺼냈다.

“저기, 애쉬는…… 괜찮나요? 많이 상심한 건 아닌지…….”

당연히 그렇겠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잖아.

코이는 자신을 탓하며 생각했다. 비록 애슐리가 부친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해도 막상 돌아가셨다면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다.

많이 낙담하고 있을지도 몰라.

옆에 있어 줘야 하는데.

애가 타 표정이 어두워졌을 때, 버니스가 입을 열었다.

- 괜찮아. 주니어는 일단 겉으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이제 됐니?

극히 사무적인 목소리에 조금 안도한 코이는 용기를 내어 다시 물었다.

“저기…… 하나만 더요. 저, 왜 알려 주신 건가요? 굳이 이렇게 전화까지 해서…….”

버니스가 그에게 이렇게 마음을 써 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릴 적 그에게 했던 혹독한 말을 떠올리며 등골이 서늘해졌을 때, 버니스가 대답했다.

- 그게 내 일이니까.

뜻밖의 말에 멈칫하자 그녀가 곧 덧붙였다.

- 밀러 씨의 방침이 바뀌었다고 하면 이해가 되겠니? 그럼 이만 끊을게. 나도 많이 바빠서.

“어, 아, 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코이는 황급히 인사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도미니크 밀러의 사망 소식이 기사로 쏟아진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그제야 코이는 버니스가 한 말을 실감했다.

정말로 돌아가셨구나.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기사들을 보면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코이는 인터넷 기사를 훑어보며 도미니크 밀러의 나이가 생각보다 젊어서 깜짝 놀랐다. 코이의 아버지에 비하면 일곱 살이나 적었다.

극알파는 수명이 다른 종들보다 길 텐데…….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사망 원인은 저택의 화재였고,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도미니크만이 아니었다.

애슐리 밀러도 함께 사망.

그와 함께 사망한 걸로 나와 있는 또다른 이름을 발견하고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그 옆에 표시된 나이를 보고 그나마 어깨의 긴장이 풀렸다. 뒤이어 간단히 설명된 가계도 덕에 애슐리의 이름이 그를 낳은 오메가와 알파의 이름을 하나씩 따서 ‘애슐리 도미니크 밀러’였다는 걸 안 코이는 혼자 납득하고 “아아…….” 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쯤 얼마나 상심하고 있을까.

부모가 모두 한 번에 돌아가시다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처가 클 것이다. 당장 달려가 그를 안아 주고 싶었지만 버니스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미리 전화를 해서 상황을 알려 준 것은 코이의 이런 행동을 이미 예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애쉬는 장례 준비 때문에 바빠.

코이는 충동을 억누르고 심호흡을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사를 훑으며 애슐리에 관한 얘기가 조금이라도 나와 있는지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몇 개의 기사를 넘기는데, 그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생전에 찍힌 도미니크 밀러의 사진이었다.

그가 변호사를 그만두고 칩거한 이후의 사진은 없었다. 나와 있는 사진은 모두 변호사 시절에 찍혔던 사진들뿐이었는데, 코이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진 또한 막 법원에서 나오는 그의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검은 코트에 값비싼 양복을 입은 그는 사진으로 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장신의 미남이었다. 예전에 애슐리와 재회하기 전 그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지만 다시 봐도 여전히 코이는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느꼈다. 애슐리보다 더 밝은 은백색의 머리카락에 진한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담배를 피우며 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와 애슐리가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선지 지금은 너무나 빼닮은 것처럼 보였다. 애슐리가 더 나이가 든다면 바로 이 얼굴이 되고 말 거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은 코이는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자정이 지나 새벽 2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지금쯤 자고 있을까……?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은 가까스로 참았으나 메시지까지 참지는 못했다. 그는 주저하다 조심스럽게 자판을 눌렀다.

- 애쉬, 자?

메시지를 전송하자마자 곧바로 후회했다. 당연히 자겠지. 하루 종일 피곤했을 텐데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을 때 휴대 전화의 알람이 울렸다.

- 아니.

너무나 짧은 한 마디였으나 코이를 들뜨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는 머리를 움켜쥐었던 손을 떼고 황급히 답신을 보냈다.

- 전화해도 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기다렸지만 답신은 오지 않았다. 대신 갑자기 울려 퍼진 휴대 전화 벨소리에, 코이는 화들짝 놀라 발신자를 확인했다. 반신반의했지만 애슐리가 맞았다. 그는 부랴부랴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아, 네, 여보세요.”

빠르게 대답하자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용건은?

여전히 짧은 한 마디에 불과했으나 코이는 그만 안도감에 울고 싶어졌다. 황급히 감정을 추스리고 코이는 입을 열었다.

“어, 저기……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서. 많이 힘들겠구나 하고…….”

버니스는 그가 잘 버티고 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도 그럴까? 코이는 다시금 가슴이 먹먹해져 조심스레 덧붙였다.

“저, 괜찮다면 만나고 싶은데…… 가도 돼?”

애슐리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거절할 말을 찾고 있는 걸까? 내심 불안해졌을 때,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낀 순간, 애슐리가 말했다.

- 네가 지금 오면 에이프런 안에 아무 것도 입히지 않고 안을 거야. 괜찮겠어?

갑자기 그와 했던 온갖 변태 같은 행위가 떠올라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두려움에 멎을 것 같던 심장이 이번엔 두근거리며 마구 질주하기 시작했다. 애쉬와 하는 변태 놀이라면 나도 좋아. 코이가 생각하며 그러겠다고 말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 농담이야. 오지 않아도 돼.

“어…….”

벌써 나가려고 침대에서 내려왔던 코이는 엉거주춤 다시 앉고 말았다. 실망이 가득한 음성으로 작게 탄식하자 애슐리가 물었다.

- 실망했어?

“응.”

코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주 많이.”

하하하, 건너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애슐리가 이렇게 웃는 소리를 들은 게 까마득히 옛날 일처럼 느껴져 잠시 코이는 멍해졌다. 자신을 그렇게 냉담하게 대했던 게 마치 꿈인 것 같았다.

- 나도 그래, 코이.

여전히 웃음이 서린 음성으로 애슐리가 말했다.

- 걱정 마, 조만간 꼭 하고 말 테니까.

“어, 응.”

코이는 귓가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기대할게.”

분위기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혹시 잠결이라 태도가 다른 걸까?

“저, 많이 바쁘지? 자고 있는데 깨운 건 아냐?”

내심 떠올린 코이에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괜찮아. 원래 잠은 잘 못 자.

수면 부족이라니, 이건 또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럼 몸에 안 좋잖아. 원래 못 잔다니…… 불면증이라는 얘기야? 얼마나 됐어?”

그러고 보니 그와 함께 지낼 때도 애슐리가 자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는 코이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다. 귀가 시간과 출근 시간을 따져 보면 아무리 많이 자도 5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갑자기 도미니크 밀러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괜히 겁이 났을 때, 애슐리가 대답했다.

-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용건은 이게 다야?

더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애슐리가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 코이는 어쩔 수 없이 화제를 돌렸다.

“저기, 장례는 어떻게…… 할 게 많지?”

-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어. 복잡한 건 상속 절차지.

애슐리의 심드렁한 말투에 코이는 “상속?” 하고 되물었다. 애슐리는 여전히 건성으로 말을 이었다.

- 그래, 아버지가 남긴 게 더럽게 많아서.

따분해한 어조로 욕설을 섞은 말에 코이는 그만 실없이 웃었다가 황급히 사과했다. 애슐리는 아무렇지 않게 괜찮아, 하고 말했다.

- 나도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 상속 절차는 많이 복잡해?”

받을 게 없어서였는지 별로 할 것도 없었던 자신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코이가 묻자 애슐리는 선뜻 대답했다.

- 물려받을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으니까. 유산 정리가 다 끝나면 유언장 작성도 새로 하고…….

“유언장? 무슨?”

유독 귀에 꽂힌 단어에 코이가 반응하자 애슐리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이내 무심하게 대답했다.

- 나도 갑자기 죽게 될지도 모르니까.

잠시 좋아졌던 분위기가 다시 싸늘하게 돌변했다.

“왜 그런 말을 해…….”

코이가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애슐리도 눈치를 챘는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으니까.

“그래도, 그런 말 하지 마.”

강한 어조에 애슐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왠지 불편한 침묵을 느끼고 코이는 으흠, 헛기침을 했다.

“저, 그럼…… 내일, 나도 조문하러 가도 될까? 저, 네가 괜찮다면 말이지만.”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자 애슐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무심히 대답했다.

- 뭐 하러? 죽은 사람한테 인사를 해 봤자 아무것도 모를 텐데.

“어, 그건 그런데…….”

여전히 무덤덤하기만 한 반응에 코이는 왠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애슐리가 부친과 그리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의 반응은 너무 냉담하게 느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를 가만히 곱씹었던 코이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애쉬, 나한테까지 숨기지 않아도 돼. 슬픔을 너무 참는 것도 좋지 않아.”

어쩌면 큰 충격에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애슐리가 말했다.

-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별로 슬프지 않아.

그는 변함 없이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 네게 숨기고 있는 것도 아냐. 말했잖아, 난 아무렇지도 않다고. 코이, 넌 가족이 죽으면 무조건 슬플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 오히려 난 그가 철저히 이기적이었고 끝까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다 했다고 생각해. 슬플 리가, 어이가 없다면 모를까.

왠지 냉소까지 느껴지는 말투에 코이가 멈칫하자 애슐리는 그것보다, 하고 일상적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 너야말로 어떻게 지내고 있어? 아직 앨의 집인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듣자 코이는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나왔다고 저번에 얘기했는데…….”

무심코 말했던 코이의 머릿속으로 버니스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기억 장애라는 게 또 생긴 건가? 순간 굳은 코이와 마찬가지로 애슐리 또한 말이 없어졌다. 긴장된 침묵이 흐르고, 코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지내고 있어.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 아르바이트라니? 무슨?

불현듯 애슐리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코이는 갑작스러운 반응에 얼떨떨해하며 대답했다.

“아니, 다음 직장을 구하긴 할 건데 아직 마땅한 데를 못 찾아서…… 그동안 뭐라도 해야지, 놀 수는 없잖아.”

청혼에 대한 대답이 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이런 때 애슐리의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괜찮아, 반지를 준비할 시간이 더 많아졌다고 생각하면 돼. 코이는 그렇게 넘어갔지만 애슐리는 그렇지 못했다.

- 일을 하고 있다고? 지금? 무슨 일?

연거푸 묻는 말에 코이는 어리둥절해 눈을 깜박였다. 그냥, 하고 괜히 손을 꼬물락거리며 그는 입을 열었다.

“전에 하던 일 그대로지 뭐…… 배관이나 수리나 뭐 그런…….”

- 안 돼, 하지 마. 넌 쉬어야 한다고.

“어? 왜?”

다급하게 쏟아져 나온 말에 코이는 다시금 고개를 갸우뚱했다. 심상치 않은 침묵이 흘렀다. 들리는 것은 애슐리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마치 말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저기, 하고 코이가 말을 꺼내려는데 애슐리가 먼저 소리를 냈다.

- 건강 검진.

“어?”

가까스로 목소리를 낸 듯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 말했잖아, 건강 검진을 해야 한다고. 너야말로 잊어버렸어?

“어, 아니.”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은 했지만 딱히 날짜를 정하지도 않았고, 어영부영 흐지부지 끝난 거라고 생각했던 터라 그는 얼떨떨해져 더듬거렸다.

“그거 아직 유효한 거였어? 난…….”

- 당연하지. ……벌써 지났잖아.

날짜를 확인한 듯 보였던 그가 낮게 욕설을 지껄이더니 곧바로 덧붙였다.

- 다음 주 중으로 다시 건강 검진 스케줄을 잡을 거야.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니까 당분간 일은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 집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검진에 대비하자고, 알겠지?

그저 어, 어, 하며 같은 대답만 반복했던 코이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물었다.

“검진이라는 게 원래 그래?”

그는 평생 건강 검진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에리얼과 한 형질 검사도 학교 때 받은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곧바로 애슐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 원래 그래. 나도 건강 검진을 받을 때는 일주일 정도 회사를 쉬면서 집에만 있어.

“그렇구나…… 다른 사람들 다 그런단 말이지?”

- 그래.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한 애슐리에게 코이는 알았어, 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걱정 마, 아르바이트라 일을 하는 건 자유로우니까. 네 말대로 집에서 쉬고 있을게.”

- 좋아.

그제야 애슐리가 평소의 말투로 돌아와 말을 맺었다. 코이 또한 괜히 안도해 웃음을 짓는데, 뒤이어 애슐리가 물었다.

- 장례 절차가 끝나면 바로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둘 테니까 사흘이면 될 거야. 그동안 내 집에 있어.

“괘, 괜찮아.”

현관에서 도어맨에게 쫓겨났던 기억이 떠올라 코이는 황급히 대답했다. 혹시나 똑같은 경험을 하면 정말로 마음이 울적해질 것 같았다. 게다가 애슐리가 없는데 그 큰 집에 혼자 있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봤던 그의 모습이 너무 차가워서 혼자 기다리고 있기 겁이 났다.

“여기 있으면 돼. 걱정 마, 일은 나가지 않을 테니까.”

비싼 건강 검진을 허사로 만들 수는 없었다. 내심 다짐하며 그에게도 약속했으나 애슐리의 반응은 강경했다.

- 안 돼, 그 집은 환경이 좋지 않아. 말했지?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고. 내 집에 와 있어, 조치는 해 둘 테니까.

“어…….”

코이의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지금 본인의 상황도 좋지 못한데 코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져서, 코이는 결국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내일 갈게.”

- 그래야지.

강한 말투로 내뱉었던 애슐리는 다시 한번 코이에게 자신의 집에 와 그를 기다릴 것을 강조한 뒤 전화를 끊었다. 코이는 뒤늦게 그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못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벌써 늦었다. 이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던 그는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 누웠다.

애쉬의 기억은 어떻게 된 걸까.

묻어 두었던 의문이 다시 살아났다. 상황은 종결된 게 아니었나? 아직 페로몬의 여파가 있는 걸까? 그런 거라면 어떡하지.

피곤하면 상태가 더 안 좋아질 텐데.

하지만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의 장례를 어쩌란 말인가. 코이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며칠만 참으면 애쉬를 만날 수 있잖아.

확인은 그때 해도 늦지 않는다. 어쨌든 자신이 할 일은 명확했다. 날이 밝으면 간단히 짐을 싸서 애슐리의 집으로 가 그를 기다린다. 건강 검진을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 끝. 코이는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한 뒤 억지로 잠을 청했다.

간신히 잠에 빠져들었던 그가 깨어난 것은 갑작스러운 복통 때문이었다.

“아, 아야아…….”

저절로 앓는 소리를 내며 코이는 몸을 새우처럼 웅크렸다. 가끔씩 찾아오던 통증이 이번엔 좀 더 길었다. 배를 감싼 채 끙끙거리며 앓는데, 문득 몸 한구석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어?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눈을 떴던 코이는 그대로 멍하니 기다렸다. 또다시 지끈거리는 통증이 찾아와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일그러뜨린 찰나, 곧이어 열감이 확 퍼져 나갔다.

……어.

그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서서히 통증이 줄어들고 대신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코이는 이것이 뭔지 알고 있었다. 이미 경험해 봤으니까. 그제야 코이는 얼마 전부터 시작된 불규칙적인 통증이 뭐였는지 깨달았다.

히트사이클이 온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코이는 온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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