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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에리얼은 가늘게 울려 퍼지는 벨 소리에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어서 와, 오늘 잘했지? 줄리는 뭐라고 해……?”
에리얼의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코이는 그런 그녀를 지나쳐 곧바로 거실로 향했다. 호기심과 반가움으로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에리얼은 황급히 코이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주방에서 한 컵 가득히 물을 따라 벌컥거리며 마시는 코이를 불안해하며 보는데, 젖은 입가를 훔친 코이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앨, 물어볼 게 있는데.”
“으, 으응. 말해, 어서.”
에리얼이 흔치 않게 말을 더듬었다. 불길한 예감에 미간을 모은 채 기다리던 에리얼에게 코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애쉬가 약혼했었다는 거, 알고 있었어?”
순간 당황해 에리얼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눈을 크게 뜨고 입만 벙긋거리는 그녀의 반응에 코이는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알고 있었구나.”
에리얼은 뭔가 말하려 했으나 곧 포기하고 시선을 떨궜다. 차마 코이를 마주 보지 못한 채 그녀는 머뭇거리며 말문을 텄다.
“말을 할 기회가 없었어.”
“해 줬어야지, 넌 알고 있었잖아!”
코이가 흔치 않게 감정을 담아 내뱉었다.
“내가 10년을 넘게 애쉬만 보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거기까지 말했던 코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끓어오르는 한숨을 내쉬었던 그가 참담한 음성으로 사과했다.
“미안해.”
그의 목소리는 손에 가로막혀 웅얼거리듯 발음이 명확지 않았다. 하지만 코이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로 말을 이었다.
“너한테는 잘못이 없다는 거 알고 있어. 애쉬에게 상대가 있어도 상관없다고 여기까지 온 건 나니까. ……지금은 혼자라도 과거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는 걸 알아야 했는데.”
떨리는 숨결 사이로 그가 토해 내듯 말을 쏟아 냈다.
“애쉬는 나한테, 줄곧 나뿐이었다고 했단 말이야.”
“코이.”
“나밖에 없었다고, 나처럼, 나만 좋아했다고 말했는데, 그래서 나는, 그렇게 말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런…… 이렇게…….”
“코이.”
다급하게 친구를 끌어안은 에리얼이 서둘러 고백했다.
“미안해, 내가 진작에 말해 줬어야 했는데…… 네가 너무 행복해해서, 말할 수 없었어. 벌써 오래전 일이고, 이렇게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애쉬가 너한테, 널 속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네가 너무 행복해하니까, 어쩌면 애쉬의 마음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미안해, 코이. 정말 미안해.”
코이는 여전히 얼굴을 손에 묻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한동안 에리얼은 그저 그를 끌어안고만 있었다. 간신히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것 같던 코이가 입을 열었다.
“또, 있어?”
잔뜩 쉰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애쉬가 날 속이고 있는 거, 네가 알고 있는 게, 또 있느냐고.”
에리얼은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마른침을 삼키고 그건, 하며 머뭇거리던 그녀는 곧 한숨을 내쉰 뒤 고백했다.
“애쉬는 널 사랑하지 않아.”
코이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한동안 그대로 굳어 있던 그는 얼굴을 가리던 손을 천천히 내리고 에리얼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충격과 당혹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뭐라고?”
갈라진 음성으로 속삭이듯 묻는 말에 에리얼은 솔직히 털어놓았다.
“다시 널 만난다는 걸 알고 그 자식 속셈이 뭔지 물어보러 갔었어. 그때 애쉬가 나에게 직접 말했다고. 네 행복을 바라는 건 그만큼 불행해지게 하기 위해서라고. ……정확하게는 이렇게 말했어.”
에리얼은 심호흡을 한 뒤 그의 말을 그대로 되뇌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바닥에 떨어졌을 때 충격이 커지잖아.”
코이의 얕은 숨이 아예 멎어 버렸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얼어붙은 친구를 보고 에리얼은 그동안 가슴에 담아 뒀던 말을 쏟아 냈다.
“코이, 그 자식은 나한테도 널 사랑한다고 말했어. 하지만 난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상대를 불행하게 하겠다는 생각은 절대 할 수 없다고 봐. 그건 사랑이 아냐.”
여전히 코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충격으로 멍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에리얼은 냉정하게 현실을 들이밀었다.
“너에 대한 집착은 남아 있을지 몰라도 코이, 집착이 꼭 사랑에서 기인하는 건 아냐. 사람은 증오하는 사람에게도 집착해.”
침묵이 흘렀다. 에리얼은 코이의 반응을 기다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코이. 내가 상처 준 거라면…….”
“그, 약혼했던 상대는 어떤 사람이야? 알고 있어?”
에리얼의 말을 가로막고 코이가 토해 내듯 빠르게 물었다. 에리얼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많이는 아니고…….”
생각을 정리하듯 시간을 끌었던 그녀는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메가라고 들었어. 그런데 향이 거의 없어서 베타나 다름없대.”
그렇겠지. 오메가 향을 맡으면 발작을 일으키니까.
기계적으로 생각을 떠올린 코이에게 에리얼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정유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서 엄청난 부자야. 외동딸이라 무척 아낀다더라고. 아마 애쉬네 집안에서도 그런 점을 많이 봤을 거야.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혼담을 나누니까.”
고등학교 때 애슐리의 아버지가 자신을 보던 표정이 갑자기 생각나 에리얼은 무심코 얼굴을 찡그렸다.
“연애는 아무나랑 하더라도 결혼은 급에 맞춰서 하잖아.”
별생각 없이 말했던 그녀가 뒤늦게 입을 다물었으나 벌써 늦었다. 당황한 에리얼은 어떻게 자신의 말을 수습해 보려 했으나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네 생각은, 알겠어.”
한참 만에 잔뜩 가라앉은 음성으로 코이가 입을 열었다.
“난 좀 쉴게. 고마워, 말해 줘서.”
“코이…….”
에리얼이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코이는 대답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에리얼은 한숨을 내쉬었다가 거칠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문을 닫고 침대에 누운 코이는 한동안 멍하니 어두운 방 안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높이 올라갈수록 바닥에 떨어졌을 때 충격이 커지잖아.〉
〈사람은 증오하는 사람에게도 집착해.〉
〈연애는 아무나랑 하더라도 결혼은 급에 맞춰서 하잖아.〉
에리얼의 말은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애슐리의 음성과 뒤섞여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그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막막하기만 한 상태로 밤을 지새우고, 간신히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을 때는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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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하게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던 그는 대충 사람들이 모두 출근을 했을 시간쯤 휴대 전화를 들어 애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나 일말의 기대를 했으나 역시 받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결심을 하고 애슐리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입구에서부터 막혀 버렸다.
“밀러 씨는 현재 안 계십니다.”
하필 항상 코이를 들여보내 주던 도어맨은 쉬는 날이었다. 엄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가로막혀 좀처럼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코이는 한참을 빌며 사정했으나 엘리베이터에 타기는커녕 현관에 발을 들여놓을 수조차 없었다.
코이는 막막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마지막 수단으로 기억을 쥐어짜 버니스의 번호를 눌렀다. 단 한 번 본 기억을 믿을 수 없었으나 그가 알고 있는 냉담한 음성이 건너편에서 들려왔을 때 그는 그만 안도감에 주저앉을 뻔했다.
- 네, 버니스입니다.
후우, 떨리는 숨을 내쉰 뒤 코이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음, 코너 나일즈입니다.”
목소리가 갈라져 급히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저, 애쉬의 상태가 어떤지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집에는 아무도 없는데…… 언제쯤 돌아오나요?”
버니스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지만 마치 할 말을 고르는 것 같다고 느꼈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 아직은 말할 수 없어. 검사 중이거든.
“검사요?”
자신도 모르게 놀라 물은 말에 버니스는 여전히 사무적인 어투로 대답했다.
- 그래. 말했지 않니? 기억에 오류가 있다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겠지? 뇌에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야.
코이는 저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심각한가요……?”
극오메가의 페로몬은 극알파에게 그렇게 치명적인 걸까? 문득 불안해진 그에게 버니스가 말했다.
- 좀 더 검사를 해 봐야 해. 지금으로선 얘기해 줄 수 없구나.
어느 병원인지 묻고 싶었으나 대답해 줄 리 없었다.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데, 잠시 사이를 두고 버니스가 덧붙였다.
- 각오는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주니어는 네가 알던 그와 많이 다를 수 있어.
“……어떻게요?”
코이가 물었으나 버니스는 글쎄, 하고 대답을 회피했다.
- 어쨌든 난 경고했어.
차가운 음성에 코이는 경직된 목소리로 받아쳤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애쉬와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줄곧 되새겼던 각오를 입 밖으로 내뱉자 긴장으로 온몸이 떨렸다. 무심코 숨을 죽인 코이에게 그녀는 말했다.
- 굳이 막을 생각은 없어. 그럴 권리도 없고.
자신의 굳은 결심과 대조적인 무심한 대답에 코이는 일말의 허망함을 느꼈다. 짧게 숨을 뱉은 그의 귀에 버니스의 음성이 들렸다.
- 다시 헤어지고 아니고는 너희들의 의지에 달린 거지.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자, 잠깐만요!”
코이는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전화가 끊기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그는 서둘러 덧붙였다.
“애쉬가 깨어나면 꼭 연락해 주세요. 꼭이요.”
- ……그렇게 하마.
짧은 인사를 남기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한동안 그대로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던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발견하고 천천히 손을 폈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하아, 떨리는 한숨을 내쉰 그는 간신히 긴장을 풀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쫓아낸 도어맨에게 돌아가 애슐리가 돌아오면 꼭 연락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구겨진 10달러를 팁으로 주자 그는 가면처럼 미소 짓는 얼굴로 알았다고 말했다. 팁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날 저녁 코이는 에리얼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뒤 예전에 자신이 살던 지하 방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그동안 월세를 꼬박꼬박 냈던 덕에 방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쾌쾌하게 먼지가 쌓인 집 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샤워까지 마친 뒤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그는 바로 아르바이트를 뛰며 바쁘게 일에 전념했다.
그사이 에리얼과 갔던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나왔지만 역시 예상한 대로 그의 형질은 베타였다. 페로몬 역시 한 번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상관없어, 내가 어떤 형질이든.
코이는 열심히 일에 매달리며 떠올렸다. 오히려 베타라면 더 잘된 거잖아. 애슐리는 오메가 페로몬에 발작을 일으키니까. 그는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계속해서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덧 그를 만나지 못한 지 2주가 되어 가고 있었다.
다시 만나면 이번에야말로 내가 먼저 청혼을 하자.
일을 하면서도 온통 생각은 애슐리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찼다.
둘은 사랑하는 사이고, 굳이 누가 먼저 청혼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애슐리는 지금까지 청혼하지 않았으니까 기회를 빼앗긴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반짓값을 모으기 위해 시간을 벌 수 있게 됐으니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며 코이는 매일 밤 연락이 오지 않는 휴대 전화를 손에 쥐고 잠이 들었다.
하아, 하아.
코이는 정신 없이 거리를 달려갔다. 머릿속에는 버니스의 음성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주니어가 퇴원했어. 오늘은 귀가할 예정이야. 계속 주니어의 연락을 기다려도 좋고, 집에 가서 기다려도 괜찮고.〉
언제나처럼 사무적인 목소리에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라고 소리쳐 버렸다.
〈저, 왜 저한테 연락을 주신 건가요?〉
곧바로 달려가려는 발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묻자 버니스는 여전히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거든.〉
통화는 그걸로 끝났지만 코이도 더 이상 질질 끌 생각은 없었다. 미리 잡혀 있던 일도 취소하고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애슐리에게 가는 동안 그는 조바심이 나 안절부절못했다.
애쉬는 괜찮을까?
버니스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걸 보면 괜찮을 거야,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왠지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그동안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을까.
만약 애슐리가 이제 막 깨어났다고 해도 걱정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걱정이었다. 전자라면 그만큼 몸이 안 좋은 것일 테고 후자라면 어째서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괜찮아, 곧 만날 수 있으니까.
코이는 뒤늦게 반지를 깜박했다는 걸 깨달았으나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반지는 다음에 사도 괜찮다. 아니면 애쉬와 같이 가도 되잖아. 지금 먼저 확인할 건 애쉬의 상태가 어떤지부터니까.
후우, 심호흡을 한 코이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공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마어마하게 높고 화려한 건물을 향해 그는 미친 듯이 속도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