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흡…….”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한 코이는 다급하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도대체 왜? 엔젤이 어째서 여기에? 저런 꼴로?
엔젤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흠씬 두들겨 맞았는지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입 밖으로는 피 섞인 타액을 뱉어 냈다. 비틀거리는 몸은 멀쩡한 구석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코이는 그의 위에 군림하듯 우뚝 서 있는 거구의 남자를 보고 그만 얼굴에 핏기가 가셔 버렸다.
저 남자한테 맞았구나.
무심코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저렇게 커다란 남자한테 맞는다면 누구든 버텨 내지 못할 것이다. 거기다 저렇게 호리호리한 체격의 엔젤이라면 뺨 한 대만 맞아도 저만치 날아가 버릴 게 분명했다.
당장 그를 부축하며 괜찮냐고 묻고 싶었으나 간신히 참았다. 엔젤이 한순간 무서운 눈으로 코이를 노려봤기 때문이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그때 우린 서로 모르는 사이인 거야, 알겠지?〉
엔젤의 말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뒤이어 그가 했던 당부도.
〈약속해, 절대 나를 알은체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기억에 코이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두 발을 버티고 서서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코이를 보자 엔젤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착한 아이.’
그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문득 코이는 엔젤이 이미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곧 떠날 거야.〉
불현듯 그의 말을 떠올렸을 때, 애슐리가 코이 앞을 가로막았다. 코이에게 등을 보인 채로 그가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이야? 코이가 놀라잖아.”
불쾌해하는 기색이 애슐리의 음성에 역력히 묻어났다. 곧 처음 듣는 음성이 그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자, 이제 지껄여 봐. 네 뒤에 있는 남창 새끼가 이 걸레하고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문득 묘하게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코이는 의아해졌으나 이어서 들려온 애슐리의 음성에 그가 무척 화가 났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경고하는데, 나의 코이에게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하면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나의 코이.
분명히 불쾌해해야 하는 상황인데 코이는 반대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애슐리가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다. 거기다 ‘나의 코이’라는 말까지 하다니.
왠지 모를 뿌듯함마저 느꼈으나 돌아온 것은 남자의 비웃음이었다.
“그래, 너의 소중한 코이가 이 걸레하고 키스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
애슐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몇 초의 공백을 사이에 두고 천천히 뒤를 돌아본 애슐리의 표정에 코이는 순간 어깨를 움칠했다. 그 반응으로 대답을 대신 한 애슐리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더니 곧 다시 남자를 향해 말했다.
“억지로 당했겠지.”
“허.”
남자가 기가 막힌 듯 짧게 탄식을 뱉어 냈다. 코이로서는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상조차 못 하고 가슴을 졸이는데, 갑자기 그가 발을 들더니 가차없이 엔젤의 배를 걷어찼다.
“허억!”
비명처럼 숨을 삼키며 엔젤이 나동그라졌다. 코이는 사색이 되어 다시금 입을 틀어막았다.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그 전에 먼저 애슐리가 코이의 어깨를 안고 입을 열었다.
“적당히 해, 고문이나 폭행이 자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너도 잘 알 텐데? 화풀이를 하려거든 네 집으로 가서 하든가, 여긴 내 집이야.”
삽시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남자가 움직임을 멈추고, 그들 사이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희미하게 들리는 엔젤의 거친 숨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사색이 되고 만 코이는 일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보라색 눈동자가 한층 짙어지고, 서늘한 시선이 그에게 일직선으로 날아와 꽂혔다.
그 순간 코이는 알았다. 남자가 이렇게 잔혹하게 엔젤을 다루는 이유를. 엔젤은 절대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도 역시 알고 있다. 지금 남자가 협박하는 상대는 코이였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엔젤은 더 심하게 당할 거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명백하게.
“코이.”
애슐리가 낮은 소리로 코이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그냥 저 남자하고 무슨 말을 나눴는지만 얘기하면 돼. 그러면 저들은 곧 돌아갈 거야.”
코이는 애슐리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엔젤과의 약속도 있었지만 만약 그들이 여길 떠난다면 그 뒤에 엔젤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탓이다.
꿀꺽, 마른침을 삼켰던 코이가 어렵게 입술을 뗐다. 엔젤과 약속을 지키면서 그들을 만족시킬 만한 대답을 열심히 찾아 그는 말을 꺼냈다.
“……잠깐, 바람 쐬러 나가자고 해서…… 나도 마침 답답했던 차라 같이 나갔어.”
“처음 보는 사이였는데?”
애슐리가 물었다. 그의 음성에 조소는 전혀 깃들어 있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코이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도 아니었다. 코이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단어를 골라 입을 열었다.
“그건 그런데, 그냥…… 그러고 싶었어. 왜, 가끔 그럴 때가 있잖아. 갑자기 충동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그런…….”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하, 하고 기가 막힌 탄식을 내쉬었다. 혹시 또 엔젤을 구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코이가 사색이 되었을 때, 애슐리가 남자를 향해 물었다.
“그쪽은 뭐라고 했어?”
조용한 음성에 남자는 짜증스러운 듯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잘생겨서 키스했다고.”
“뭐?”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고, 코이는 당황해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는 계속해서 빈정거렸다.
“아마 사실일걸. 이 자식은 예쁘고 잘생긴 건 무조건 좋아한다고 하니까.”
“누가 그래?”
애슐리가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묻자 남자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피트먼이 당했어.”
그는 엔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남창이 원해서 흰머리 독수리를 선물했지. 검독수리와 한 쌍으로. 이유는 하나야. 그저 독수리가 아름답다면서. 그런데 이 남창 새끼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남자가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를 냈다. 침묵 속에서 그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 독수리를 관리하던 고용인과 잤어. 그것도 피트먼의 침대에서.”
당황한 코이는 말문을 잃고 엔젤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남자는 계속해서 빈정거리며 말을 이었다.
“밀러, 너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내일 당장이라도 이 자식은 네 침대에서 뒹굴고 있을 걸? ‘너의 코이’와 함께 말이야.”
애슐리의 시선이 코이에게 향하고, 순식간에 코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 그렇지 않아요. 정말이야, 애쉬. 믿어 줘.”
코이는 당황해 즉시 부정했다. 애슐리가 아닌 다른 사람과 자다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난 평생 너밖에 없었다고,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너도 알지 않느냐고, 몇 번이고 맹세할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애슐리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다시 남자에게 시선을 돌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을 여기 끌고 온 이유가 뭐야? 확인이 필요한 거였다면 이제 충분하지 않나?”
조용한 음성에 남자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말을 고르는 것처럼 다물었던 입을 열었을 때, 아래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크큭, 큭큭큭큭…….”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어깨를 얕게 들썩이며 엔젤이 웃고 있었다. 남자가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뭐가 그렇게 우습지?”
여전히 키득대며 엔젤이 말했다.
“웃기잖아, 너희들 하는 꼴이.”
애슐리의 표정이 굳고, 남자 또한 눈매가 사나워졌다.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킨 엔젤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왜 날 여기로 끌고 왔는지 내가 말해 줄까? 셰퍼드 혼자선 나를 당해 낼 수 없거든.”
“뭐라고?”
애슐리가 불쾌해하는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으나 남자는 여전히 엔젤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선 엔젤이 말을 이었다.
“둘이면 날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코이는 그가 실성이라도 한 걸까 싶어 내심 두려워졌다. 영문을 모르는 것은 애슐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유일하게 상황을 알고 있는 남자는 뚫어져라 엔젤만 바라볼 뿐이었다. 엔젤은 그런 그에게 고개를 저으며 안타까움이 어린 표정을 지었다.
“셰퍼드, 하지만 너희는 고작 둘이잖아.”
엔젤이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지금은 네 잘난 감마 경호원들도 없지.”
“잠깐…….”
남자가 뭔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커다란 몸이 휘청거렸다. 셰퍼드만이 아니었다. 코이는 애슐리 또한 급격하게 창백해지며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는 모습을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멀쩡한 것은 코이와 엔젤뿐이었다. 그들보다 두 배 가까이 큰 남자들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코이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사람이 엔젤이라는 것 또한 그는 깨달았다.
엔젤이 페로몬을 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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