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릭 미 업 이프 유 캔-201화 (201/216)

201화

침착해. 아직 확실한 건 아니잖아.

집에 돌아와 혼자가 된 코이는 침대에 앉아 제법 냉정해진 머리로 생각을 떠올렸다. 엔젤의 말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고 모두 믿기란 쉽지 않았다.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었을지도…….

문득 떠올렸던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젓고 엔젤에게 사과했다. 자신이 그런 무례한 상상을 했다는 걸 알면 엔젤은 얼마나 불쾌할까. 그에게 느꼈던 이유 모를 신뢰와 친밀함을 떠올렸던 코이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내가 정말로 오메가였다면…….

그때 그게 발현이었다면.

어쩌면 이미 내가 모르는 사이 페로몬을 흘렸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 않을까?

그는 조심스럽게 상상을 해 봤다. 만약에 그랬다면 애슐리도 코이가 오메가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지? 아니면 애슐리도 몰랐던 걸까? 내가 페로몬을 감춰서?

〈자각하지 못해도 본능적으로 페로몬을 감출 수 있어.〉

만약 그랬다면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겠지. 내가 정말로 극오메가가 맞는다면 말이야.

어안이 벙벙했지만 엔젤의 말에 구멍은 없었다. 자신의 정황과도 맞아떨어지는 답은 그것뿐이었다.

내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면 아주 간단했을 텐데.

코이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졌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잠시 그대로 앉아 있던 그는 혼란스러운 자신을 다독이며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틀었다.

내가 오메가라면 애쉬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지금껏 베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와는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베타는 알파나 오메가에게 벽이 생길 수밖에 없고, 애슐리와도 몇 번이나 소원해졌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오메가라고 하면…….

애쉬도 나만큼 당황하고 놀라겠지.

순간 두려움이 솟아났으나 뒤이어 또 다른 기억이 그를 가로막았다.

애쉬는 날 사랑한다고 했어.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자신의 나쁜 버릇이다. 애슐리가 몇 번이나 코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불안해하는 건 애슐리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 사랑을 의심받았을 때 얼마나 속이 상했는데. 애쉬에게 같은 짓을 하게 되는 거야.

스스로를 꾸짖은 그는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꿔 보려 노력했다.

오히려 기뻐할지도 몰라.

마음 한쪽에 조심스러운 기대가 솟아났다. 지금껏 코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부정당한 건 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오메가가 됐다면 누구도 그의 마음을 매도할 수 없을 것이다.

애쉬한테도 내가 베타인 것보다 오메가인 쪽이 훨씬 좋을 거야.

하다못해 그에게 러트가 왔을 때도 굳이 다른 사람을 찾지 않아도 된다. 이제 자신이 그를 받아 줄 수 있을 테니까.

기뻐하는 애슐리를 상상하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침착해, 일단 확인부터 해야 돼. 코이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다독거렸다. 엔젤의 말이 맞는다면 곧 히트사이클이 올 것이다. 생각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 확실해지면 말하자. 애슐리의 반응은 그때 고민해도 늦지 않으니까.

‘곧’이란 언젤까……?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곧 눈이 감기고, 어느새 그는 잠에 빠져들었다.

* * *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잠에서 깨어났다. 벌써 주변은 까맣게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누운 채로 몇 차례 눈을 깜박였던 코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침대에서 나와 밖으로 향했다.

“애쉬?”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가자 예상대로 애슐리가 혼자 주방에 서 있었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한곳을 바라보면서.

그의 앞에 반쯤 마신 위스키 글라스가 있는 것을 확인한 코이가 다시 그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니 그제야 애슐리도 코이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애슐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깼어?”

조용한 음성에 코이는 그가 자신이 자는 모습을 보고 갔다는 걸 눈치챘다. 자신이 느꼈던 인기척은 애슐리의 것이었다. 왠지 미안해져 이번엔 코이가 말을 꺼냈다.

“깨우지 그랬어, 저녁은 먹었어?”

“신경 쓰지 마. 피곤하면 더 자지 그래?”

애슐리의 말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나 코이는 왠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니, 하고 그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실컷 잤어. 이제 괜찮아…… 저기, 아직 식사 전이면 같이 먹을래? 내가 주문할까?”

프런트에 전화를 걸려고 몸을 돌리는데, 그 순간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낮에 나갔다 왔다면서?”

“어? 응…….”

도어맨이 말했을까? 코이는 왠지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잠깐 바람 쐬러 다녀왔어. 금방 돌아왔는데 너무 피곤하더라고……. 먼저 잠들어 버려서 미안해.”

엔젤에 대한 걸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내심 긴장했지만 의외로 애슐리는 전혀 다른 질문을 해 왔다.

“별일은 없었고?”

“없었는데?”

코이의 대답에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뚫어져라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가를 캐내려는 것처럼 가는 눈으로 응시하는 시선에 코이는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

엔젤에 대해 스스로 말해 주길 기다리는 걸까?

하지만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엔젤과 한 약속이 그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서 말하는 건 왠지 좋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데, 애슐리가 글라스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남은 위스키를 한 번에 들이켠 그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더니 빈 잔을 내려놓았다.

“……코이.”

“어, 응.”

한참 만에 침묵을 깨고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코이가 잔뜩 긴장해 황급히 대답하자 그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겨우 뭔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 막 그가 입술을 움직이려던 찰나 갑자기 인터폰의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둘은 잠시 그대로 굳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구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대로 두면 벨 소리가 끝날 것 같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잠깐 끊겼던 벨이 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것을 듣고 애슐리는 낮은 소리로 욕설을 내뱉더니 곧 몸을 움직여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 아,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밀러 씨.

건너편에서 도어맨이 당황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을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 불안해하며 바라보는 코이의 귀에 애슐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라고? 이 시간에?”

벽의 시계를 흘끔 보았던 애슐리가 멈칫했다. 잠시 말이 없던 그가 곧 입을 열었다.

“들여보내.”

곧 통화는 끝났다. 코이는 애슐리의 등만 쳐다보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 애쉬. 손님이 오는 것 같은데 난 그럼 방에…….”

“기다려.”

막 걸음을 떼려던 코이를 애슐리가 제지했다. 얼떨결에 멈춰 선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거기 그대로 있어, 네 손님이기도 하니까.”

“어……?”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해졌을 때였다. 엘리베이터의 도착 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전용 엘리베이터가 손님을 싣고 돌아온 것이다.

애슐리가 간단히 벽의 센서를 조작해 중문의 경비를 해제하자 곧이어 난폭하게 문이 열리고 거친 발소리가 이어졌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코이는 그 자리에 선 채 어깨를 움츠리고 한곳을 응시했다. 애슐리 또한 같은 방향을 쳐다보며 곧 나타날 방문객을 기다렸다.

발소리의 주인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큰 보폭으로 순식간에 거실을 가로질러 애슐리와 코이가 기다리고 있던 주방까지 당도한 그는 둘을 발견하자 그대로 멈춰 섰다. 주방 입구에 선 남자의 모습을 본 코이는 당황해 얼어붙고 말았다.

애슐리만큼이나 키가 큰 그는 굵은 뼈대와 큰 근육을 가진 거구의 사내였다. 화이트 셔츠 위에 걸친 베스트는 터져 나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그의 가슴 근육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짙은 머리 색과 날이 선 콧대, 고집스럽게 다문 입매까지 남자는 너무나 위압적이었으나 코이를 놀라게 한 것은 다른 이유였다.

보라색 눈.

페로몬 향기를 맡을 수는 없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슐리 외의 다른 극알파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 코이는 놀라 굳고 말았다.

언제나 코이에게 다정한 애슐리였기에 극알파가 어떤 존재인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문득 에리얼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애슐리에 대해 말을 할 때 으레 짓곤 하던 표정이 머리에 떠올랐을 때였다.

남자가 손에 쥔 뭔가를 발견했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과, 어딘지 낯이 익다는 것을 연달아 떠올렸을 때 남자가 그를 바닥에 내던졌다.

“아윽!”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진 호리호리한 몸은 분명히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뒤이어 코이는 그만 숨을 멈추고 말았다. 비틀거리며 겨우 머리를 든 남자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코이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헝클어진 은발, 창연히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 슬며시 벌어져 있는 새빨간 입술까지.

엔젤이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0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