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코이는 순간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애슐리가 눈썹을 찌푸리고 그를 내려다봤다.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애슐리의 얼굴은 다시 만났던 날 유치장에 갇혀 있던 코이를 바라보던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마주한 냉담한 표정에 코이는 심장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느, 늦어서 미안해.”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그는 사과했다.
“오랜만에 앨이랑 만났더니 너무 놀았나 봐…… 시간 맞춰서 오려고 했는데, 차가 막혀서.”
돌아올 때도 역시 그는 미리 호출해 둔 택시를 탔다. 나가는 코이를 붙잡고 도어맨이 얘기했던 “입주민을 위한 기본 서비스.”라는 말을 그는 철석같이 믿었다. 물론 그것은 ‘만약에 코이가 외출할 경우’를 대비해 미리 애슐리가 손을 써 둔 것이었지만. 덕분에 애슐리는 그가 어디에 다녀왔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에리얼을 만난 것도 거슬렸으나 지금 그를 예민해진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당장 코이를 다그치며 화를 내고 싶었으나 불안해하는 얼굴이 그를 가로막았다. 순간적으로 코이가 아버지에게 맞았던 과거가 머리를 스치고, 뒤이어 철없던 시절 자신이 질투에 눈이 멀어 코이를 겁에 질리게 했던 일도 기억났다. 그러자 애슐리는 어깨에서 천천히 힘을 빼고,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랬구나.”
애슐리는 한껏 다정한 음성을 꾸며 내 미소를 지었다. 금세 밝아지는 코이의 얼굴을 보며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늦어서 걱정하고 있었어. 별일 없었으면 다행이고.”
“응, 별거 없었어. 미안해, 걱정하게 해서.”
솔직히 사과한 코이에게 애슐리는 두 팔을 벌렸다. 코이는 이내 그를 품 안에 들어갔다. 손쉽게 들어온 먹이를 강하게 끌어안았던 애슐리가 다시 멈칫했다.
아침에 나갈 때까지 흠뻑 적셔 놓았던 자신의 페로몬 향이 전혀 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표정이 험악해지고, 주변을 떠돌던 페로몬의 향이 진해졌으나 물론 코이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애슐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말을 이었다.
“앨의 싱크대가 막혀서 봐주고 왔어. 내가 앨을 도울 수 있는 있다니 정말 잘됐지?”
그의 음성에는 아직도 친구와의 만남에서 얻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으나 애슐리는 순수하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씻었어, 코이?”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세제 향을 확인하는 애슐리에게 코이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응, 배수관을 뜯고 확인했더니 옷이 더러워져서…… 그 김에 좀 씻었어.”
그 말로 애슐리는 그를 화나게 한 또 하나의 의문을 해결했지만 그것은 또다른 의혹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었구나.”
표정을 감추려 여전히 코이를 안은 채로 머리 위에서 애슐리가 말했다.
“그런데 이 옷은 뭐야, 코이?”
만약 코이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면 주변에 진하게 퍼진 페로몬 향으로 위험을 감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에겐 불가능한 일이었고, 애슐리에게 안겨 있는 터라 표정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단지 귀에 닿는 다정한 목소리에 속아 그는 순순히 대답했다.
“개럿이, 아, 앨의 남자 친구가 놓고 갔대. 얼마 전까지 둘이 같이 살았었는데 헤어진 모양이더라고…….”
코이는 둘에 대해 자신이 아는 얘기를 늘어놓았지만 애슐리에겐 전혀 관심 없는 화제였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얘기는 따로 있었다.
“알았어, 코이. 일단 옷부터 갈아입을래?”
“아, 응. 그럴게.”
코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애슐리에게서 몸을 뗐다. 그런 코이에게 미소를 지은 애슐리가 그의 셔츠 깃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것을 사정없이 양쪽으로 잡아 뜯어 버렸다.
“어…….”
코이는 그저 입을 벌리고 멍한 감탄사만 흘렸다. 셔츠에서 튀어나간 버튼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뒹굴었다. 애슐리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 집에 들어올 때 다른 남자의 옷을 입고 오면 안 되지.”
코이는 얼떨떨해하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뭔가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여전히 웃고 있는 애슐리를 보면 또 별거 아닌 듯도 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 애슐리는 부드러운 손길로 어깨에 손을 넣어 그대로 셔츠를 밀어서 벗겨 냈다.
“자, 코이. 이건 내가 버릴 테니 올라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어.”
“어, 어…….”
얼떨결에 시키는 대로 팔을 빼내고 상의를 완전히 벗어 버린 코이는 뒤늦게 찾아온 민망함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급히 계단을 올라가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물었다.
“코이, 혹시 앨이 옷 갈아입는 걸 도와줬어?”
“어? 아니…….”
코이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왜 해…… 셔츠만 주고 갔어. 난 욕실에서 혼자 갈아입었고.”
그나마 코이의 몸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얼룩덜룩한 흔적들에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애슐리는 그렇구나, 하고 짧게 대답했다. 코이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곧 뛰다시피 계단을 올라가 침실로 향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애슐리의 침실로 들어가는 모습에 무심코 미소를 지었던 그는 아직 손에 남아 있던 찢어진 셔츠를 보고는 이내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가차없이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애슐리는 곧 술을 꺼내 글라스에 따랐다.
단숨에 위스키를 두 잔이나 비웠으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연하다. 그에게 알코올은 아무런 효용이 없었으니까.
쓸모없는 페로몬.
그는 글라스를 던져 깨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대신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폈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가다듬었던 애슐리는 갑자기 몸을 돌려 자신의 방을 향해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계단을 한 번에 세 개씩 오른 그는 이내 목적지에 다다랐다.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자 이제 막 셔츠의 단추를 꿰고 있던 코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리둥절해하며 눈을 깜박이는 그에게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코이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으나 두어 걸음 만에 애슐리에게 어깨를 잡혀 버렸다. 순간 굳어 숨을 죽이고 만 코이에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아?”
“어…… 응.”
다정함이라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차갑게 굳은 그의 얼굴을 보자 코이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얘기했잖아, 앨하고 만났다고.”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으나 애슐리는 입가를 비뚤어뜨리고 그를 비웃었다.
“상대가 앨인 건 아니고?”
상상도 못 했던 말에 코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벙긋거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앨과 나는 친군데 무슨…… 너도 알잖아. 앨은 나를 자매라고 한다고.”
“하지만 넌 여자가 아니고 앨도 그걸 알고 있지.”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맞는 것도 아니었다. 코이는 입만 벙긋거리다 간신히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앨과 나 사이를 의심하고 있는 거야, 지금?”
“앨이 아니면 그 개럿이라는 녀석이야?”
“애쉬!”
코이는 그만 목소리를 높였다가 급히 숨을 들이켜고 음성을 가라앉혔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아까 현관에서 다 말했잖아, 그게 다야. 정말이라고, 이런 오해는 앨이나 개럿에게도 실례야.”
애슐리가 이제 좀 이성을 찾기를 바랐으나 돌아온 것은 비웃음뿐이었다. 명백한 조소를 머금으며 그는 뇌까렸다.
“밖에서 샤워를 하고, 다른 남자의 옷까지 입고 왔을 때 그 결과가 어떨지 생각 안 해 봤어?”
멈칫한 코이에게 애슐리가 틈을 주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목에 코를 묻고 깊이 숨을 들이켰던 그가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 페로몬이 전부 사라졌잖아.”
코이는 그제야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도 애슐리를 설득할 수 없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스물스물 기어들어 왔다.
“미, 미안해, 애쉬.”
코이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이번엔 내가 생각이 모자라서 그랬던 거니까…… 용서해 줘, 응?”
진심을 담아 그는 애슐리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야…… 너도 알잖아.”
희망을 잃지 않고 간절히 올려다보자 애슐리가 대답했다.
“알아.”
조용한 음성이 이어졌다.
“예전부터 넌 나를 사랑했다고 했으니까. 그래, 진심이겠지.”
“그럼…….”
코이가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으나 그 전에 먼저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괜찮아, 다시 처음부터 하면 되니까.”
낮은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눈을 크게 뜬 채 굳어진 코이를 내려다보며 애슐리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네 온몸을 내 페로몬으로 절여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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